2023.04.25 10:27
패션 업계를 떠난 지도 거의 5년이 흘렀지만, 아직도 강박처럼 남아있는 직업병이 하나 있다. 바로 사람들의 백을 보는 것. 이게 아니면 어린 시절 추억이나 향후 병원 예약 날짜 따위나 생각하고 있었을 텐데, 내 머릿 속에서는 누가 어떤 백을 들고 다녔는지가 엑셀 문서처럼 정리된다. 보테가 베네타 카세트 백, 녹색 패딩 가죽, 소호(Soho) 지역, 20대 여성. 루이비통 포쉐트 메티스 백, 로고 캔버스, 호이트셔머혼 역1, 40대 여성. 나는 10년간 이 데이터를 이용해 명품백 시장을 집요하고 상세하게 취재했다. 이제 이 정보들은 그저 쌓이기만 한다. 내가 알아보지 못하는 가방을 보는 일은 거의 없다.
그런데 최근 1~2년 들어 예전엔 거의 볼 수 없었던 현상이 사람들의 어깨에서 일어나고 있다. 오래된 백의 귀환이다. 패션에 민감한 사람 상당수가 지난 10여 년간 출시된 디자인을 찾으려고 옷장 깊은 곳이나 중고 시장을 뒤지고 있다. 역사적인 중요성을 지닌 빈티지 스타일이나 부유한 어미니가 딸에게 물려준다는 클래식 명품을 찾는 게 아니다. 그보단 지금 인기가 바닥이어야 마땅할 그런 가방들을 들고 다닌다. 한 시즌에만 출시했던 상품, 2010년대에 인기 절정이었던 디자인, 혹은 패션을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구식이라고 평가할 가방들이다. 패션의 기본 규칙 하나는 '바로 몇 년 전에 유행했던 것보다 멋없는 건 없다'는 건데 마치 지금이 2015년인 듯 당당하게 돌아다니는 멋쟁이들이 있다.
가방의 흠집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최근 뉴욕타임스는 좀 더 편안한 분위기를 내고 싶어서 더 오래되고 사용감 있는 에르메스 버킨백을 찾는 소비자들이 있다고 보도했다. 이런 가방은 (상대적으로) 가성비도 좋다. 중고 명품 거래 플랫폼 더리얼리얼(The RealReal)을 보면 이러한 추세는 핸드백 시장 전반으로 확대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사용감 없는 중고 신상을 찾던 수요가 오래되고 사용감 있는 디자인(결점이 뚜렷하게 보이는 것도 포함)을 선호하는 쪽으로 이동하고 있다. 2022년에는 가장자리가 긁히거나 사용 흔적이 뚜렷한 "나쁘지 않은 상태(fair)"의 디자이너 백 판매가 두 배 가까이 증가했다.
단순한 시장의 변덕이라 볼 수도 있다. 안그래도 고급 핸드백 시장의 변덕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지 않은가. 게다가 패션이란 스스로의 역사를 참고해 새로운 제품을 내놓는 경기민감형 산업이다. 하지만 이러한 수요 변화에는 뭔가 더 큰 사건이 벌어지고 있다는 징후가 엿보인다. 산업으로서의 패션이 지친 소비자의 한계에 부딪히기 시작한 걸지도 모른다. 사람들이 새로움 자체에 피로감을 느끼기 시작했다면 그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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핸드백은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시장성이 좋아 패션 산업에서 그 입지가 독특하다. 패션에 그리 관심이 없는 사람도 명품백은 쉽게 알아볼 수 있다. 그래서 지위의 상징으로서 핸드백이 갖는 매력은 더욱 크다. (하지만 드라마 '석세션'의 최근 에피소드에서는 3000달러짜리 핸드백을 사더라도 누구 앞에 들고 나오냐에 따라 역효과가 나기도 한다는 내용이 나온다.2) 가방은 파티용 드레스나 하이힐보다 실용적이며 옷처럼 몸에 맞느냐의 문제도 비껴갈 수 있다. 3000달러(약 400만 원) 짜리 백은 여전히 일반인에겐 너무 비싸지만 많은 사람들이 비슷한 가격의 스웨터보단 백을 사는 데 카드를 긁는 걸 더 합리적이라고 생각한다. 그 결과 핸드백은 매년 수백억 달러 규모로 성장하는 글로벌 시장을 형성하며, 명품 산업의 가장 중요한 재정 동력 중 하나가 됐다. 많은 디자이너 브랜드, 특히 업계 바깥에서도 인지도가 높은 브랜드의 백은 (다른 제품을 얼마나 생산하는지와 관계없이) 그 자체가 비즈니스다.
럭셔리 브랜드들은 수년 간 이런 눈부신 상황을 즐겨왔지만 최근 브랜드와 구매자 사이의 관계는 다소 경색됐다. 가격이 너무 올랐다는 게 첫 번째 문제다. 디자이너 핸드백은 언제나 너무 비쌌다(솔직하게 말하자면 너무 비싸다는 게 주된 특징이기도 하다). 하지만 비즈니스오브패션의 2022년 시장 분석 보고서에 따르면 미국 내 디자이너 핸드백 평균 가격은 2019년 이래 27% 상승했다. 모두가 선망하는 최고급 핸드백은 그 가격 상승이 훨씬 더했다. 샤넬 클래식 플랩 백의 경우, 같은 시기에 걸쳐 가격이 60% 올랐다. 이전에도 백 가격은 조금씩 꾸준히 상승했는데 최근의 급등기를 제외하고 보더라도 일부 제품은 10년에 걸쳐 가격이 두 배가 됐다.
두 번째 문제. 가격이 올랐음에도 핸드백 시장은 과잉 공급으로 제품이 과다 노출된 상태다. 디자이너들은 제품 출시 규모와 빈도를 더 늘리라는 압박을 받는다. 과거에는 봄과 가을 연 2회 컬렉션을 발표하는 게 업계 표준이었지만 이제는 대부분의 대형 브랜드가 연간 5~6회 신상품을 내놓는다. 브랜드들도 새로운 디자인 아이디어에 대해 위험회피적인 태도를 취하게 됐다. 백이 영업이익의 핵심이기에, 즉각 인기를 얻기 어려운 혁신적인 발상을 하는 디자이너를 인내하지 못한다.
이런 문제가 발생한 배경을 살펴보면 결국은 업계 내 인수·합병 때문이다(패션 업계만의 일은 아니다). 옛날 옛적에 고급 패션은 유럽 공방에서 숙련된 장인을 고용해 오래된 방식으로 가죽 제품을 만드는 가문 소유 비즈니스였다. 그러나 이제 제품 대부분을 대량 생산하는 럭셔리 대기업들이 주요 브랜드 대부분을 보유하고 있다. LVMH와 케링은 대표적인 럭셔리 대기업으로, 루이비통, 디올, 구찌, 보테가베네타, 펜디, 셀린느, 발렌시아가, 생로랑 등 액세서리 업계 대표 브랜드 거의 전부를 거느리고 있다.
회사가 상장기업(LVHM와 케링 모두 상장기업이다) 계열사가 되면 뻔한 기대를 받는다. 주주는 수익과 성장을 바라기 때문에 디자이너들은 생산을 늘리고 리스크를 낮추려고 한다. 판매 실적을 늘리는 데 가격을 올리는 것만큼 쉽고 빠른 방식은 없는데, 이는 가방을 더욱 독점적으로 보이게 하는 이점이 있다. 브랜드들은 환율 변동, 제조 비용 상승, 공급 문제 등 다양한 요인을 들어 가격을 인상한다. 하지만 내 경험상 가장 흔한 이유는 시장이 이를 감당하리라는 믿음 때문이다.
지금까지 이런 믿음은 성과를 냈다. 팬데믹 기간 동안 글로벌 패션 시장 내 부유층은 여행, 외식 등 값비싼 취미를 1~2년간 중단해 돈을 절약했다. 상당수가 집에 있느라 지루해 뭔가 자극을 찾게 됐고, 여분의 돈을 고가의 시계나 디자이너 핸드백 같은 걸 구매하는 데 썼다. 하지만 소비시장이 정상화되면서, 특별하지도 매력적이지도 않은 흔한 값비싼 핸드백이 쏟아지고 있다. 비싸긴 했지만 흔하지 않고 평생 쓸 수 있는 명품이라 해서 산 핸드백이, 어느 순간 연예인, 인스타그램 인플루언서는 물론이고 브런치 모임에 나온 여자들 절반이 다 들고 있는 '흔템'이 되고, 곧 더 반짝이는 '신상'에게 밀려 사라지는 걸 보는 기분이 좋을 리 없다. 이런 불만 섞인 긴장감은 언제나 존재했지만 SNS와 온라인 쇼핑이 유행의 주기를 보다 짧게 만들면서 이제 기존에 먹혔던 업계 전략은 약발이 다했다. 이 시점에서는 사람들에게 그게 여전히 효과가 있다고 보여주면 오히려 민망한 일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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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사람들이 지난 시절의 핸드백을 소환하는 현상이 놀랄 일은 아니다. 패션 비즈니스란 새로운 아이디어와 제품을 효율적으로 사람들에게 제시하는 일을 기반으로 하는데 오늘날의 패션 업계는 '안전빵'을 추구하는 데 만족하는 것 같다. 한편 모든 가격대에서 구매자들은 수년간의 레트로 리바이벌에 매료돼 요즘의 신상보다 독특하거나 기발한 걸 찾기 위해 리세일 플랫폼과 중고 판매점을 뒤지고 있다. 이러한 추세는 디자이너 가방에서도 나타나는데 특히 2000년대 중반 '잇백(It Bag)' 시대의 백이 그렇다. 클로에의 패딩턴과 실버라도 백에 긴 대기순번이 이어지고, 드라마 '섹스 앤드 더 시티'에서 펜디 바게트백과 에르메스의 버킨백이 각자의 스토리라인을 갖고 등장했던 시기다. 이 시기에 나왔던 디자인 상당수가 핸드백의 미적 고정관념을 타파하려는, 매우 흥미로운 시도였다. 오늘날의 대형 브랜드가 장기적인 브랜드 가치를 저당잡혀 단기적인 재정적 이득을 취하느라 만들길 거부하는 바로 그런 디자인이다.
이 현상이 특정 시대에만 국한된 유행은 아닌 것 같다. 왜냐면 보다 오래된 백에 대한 관심이 2000년대 중반을 넘어 지난 20년간 나온 독특한 제품들에도 미치고 있기 때문이다. 프로엔자슐러(Proenza Schouler) PS1, PS11도 다시 관심을 받는 백인데 2010년대 중반 인기의 정점을 찍은 제품이라 '레트로'라고 부르기엔 너무 근래에 유행했던 상품이다. 이런 스타일 대부분은 리세일 웹사이트에 매물이 풍부해서 수백 달러(약 수십만 원)에 쉽게 구입 가능하다. 동일 디자이너의 새 제품이 수천 달러인 것과 대조적이다.
오래된 핸드백이 인기를 끌자 브랜드들은 이런 현상을 보고 잘못된 교훈을 얻었다. 최근 몇 년 동안 이런 옛날 디자인 중 상당수를 재출시해서 사람들의 향수를 불러일으키려고 한 것이다. 하지만 제품 대다수가 애초부터 저렴하지 않았는데 이제는 훨씬 더 비싸졌다. 리이슈 핸드백이 두어 분기 정도 매출을 유지해줄지는 몰라도, 이는 허울 뿐인 로고 장식이나 늘 똑같은 무난한 클래식 디자인에 질린 소비자의 불만에 대한 해결책이 되지 못한다. 무엇보다도 사람들은 계속 구매를 하라는 압박에, 돈을 쓸 여력이 있다는 걸 보여주는 것 외에 별다른 의미도 없는 것에 계속 돈을 쓰라는 채근질에 지쳤는지도 모른다. 패션 업계에 창의성이 메마른 현 상황에서 소비자가 얻어갈 게 없는 건 아니다. 지금 당장 입거나 들고 싶은 물건이 이미 당신의 옷장 속에 있다는 걸 깨달을 수도 있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