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6.09 12:26
5월 18일 늦은 오후,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이와쿠니 해병대 기지에서 장교들을 만나고 리시 수낵 영국 총리가 도쿄에서 열리는 행사 참석을 위해 히로시마를 떠나고 있던 즈음, 전세계 투자자들에게 '일본의 욱일승천'이라는 리포트가 발송됐다.
욱일승천이란 표현은 그간 일본 경제에 대 많은 걸 약속하기도 했지만 또한 많은 실망을 안겨주기도 했다. 그 표현을 되살려 싱가포르은행의 수석 이코노미스트가 쓴 리포트는 절묘한 타이밍에 나왔다.
투자자들은 여러 가지 요인이 겹치면서 일본의 투자 매력도가 근래 최고가 됐다고 한다. 지금의 상황이 과거와는 다른 이유도 거론할 수 있다. 일본 경제가 마침내 '스웩'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언제나 그렇듯이 작금의 현상이 얼마나 오래 지속될 것인가다.
적어도 현재로선 모멘텀이 강하다. '일본의 욱일승천' 리포트가 발송되기 몇 시간 전, 일본 토픽스 지수는 외국인의 매수세가 이례적으로 6주 내내 이어지면서 33년 내 최고점을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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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 거버넌스 개혁을 보다 신속하게 추진하겠다는 약속이 외국인의 지속적인 매수세에 일조했다. 그러나 가장 큰 이유는 일본 경제에서 지난 수십 년 중 가장 거대하다고 여겨지는 실질적·심리적 변화 때문이다. 소비자, 기업, 은행, 정치인 전 세대를 아울러 물가가 그대로거나 떨어지는 것만 겪었던 나라가 이제는 인플레이션을 겪었다.
뱅크오브아메리카는 클라이언트에게 장기적으로 토픽스 지수가 33% 더 오를 수 있다고 설명하기 시작했다. 이는 1980년대 버블 시대의 최고점을 넘는 것으로, 대부분의 투자은행과 투자자들은 일본 증시가 이를 달성할 수 있으리라 여긴 적이 없다.
분위기는 더 달아오를 준비가 돼 있었다. 5월 18일 저녁, 모두 합쳐 20조달러 규모의 자산을 주무르는 펀드매니저 수백 명이 주식 시장 개혁과 기업 거버넌스 개선의 약속에 이끌려 일본에 도착했다. 코로나19 팬데믹 이래 도쿄 최대 규모의 투자 컨퍼런스 '시틱 CLSA 재팬 포럼'에 참석하기 위해서다.
마침 TSMC, 삼성, 마이크론, 인텔을 비롯한 세계적인 반도체 기업들이 경제안보 관련 우려와 글로벌 공급망 재편으로 인해 상당 규모의 제조시설을 일본에 신설할 수도 있다는 발표도 잇따라 나왔다.
미국을 비롯한 여러 나라에서 반(反)중국 컨센서스가 자리잡으면서 일본의 지정학적 위상도 욱일승천하고 있다.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는 자신의 고향이기도 한 히로시마에서 G7 정상회담을 열어 각국 정상을 맞았다. 점차 일본을 아시아 대표로 소개할 수 있는 자리가 드물어지는 상황에서 일본은 그런 기회를 누린다는 사실과 여러 국가 정상을 일본에 초청했다는 사실을 눈에 띄고 즐기고 있다고 외교관들은 말한다. 일본은 이번 정상회담에 한국, 인도, 브라질, 베트남의 정상들도 초청했다.
아시아가 점차 미중 갈등, 군사적 긴장, 그리고 새로운 냉전을 위한 진영 형성의 장으로 인식되는 가운데 관계자들은 기시다 총리가 일본을 안정적이고 충실하며 공급망 친화적인 서구의 파트너로 자리매김했다고 말한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직접 히로시마를 방문(러시아의 침략 이후 젤렌스키의 가장 눈에 띄는 해외 방문 중 하나라 할 수 있다)한 것은 그러한 이미지를 굳히는 데 도움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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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가포르은행의 리포트가 보여주듯, 일본의 경제는 G7 국가들이 부러워할 만한 상태다.
전반적인 경제 활동이 2023년 초부터 견조한 회복세를 보이고 있다. 올해 첫 분기 GDP는 연간으로 환산했을 경우 예상을 뛰어넘는 1.6% 성장을 기록했다. 임금은 소폭 상승했는데 일본이 오랫동안 경기 침체를 겪은 걸 고려하면 상당한 변화다.
수십 년간 디플레이션을 겪었던 일본의 4월 근원인플레이션1은 작년 동월 대비 3.4%를 기록했으며 13개월째 중앙은행의 목표인 2%를 상회하고 있다. 현지 기준으로는 높지만 여전히 통제 가능한 범위 내에 있다.
무디스애널리틱스의 선임 이코노미스트 스테판 앵그릭은 일본 경제의 저력이 (종종 저평가되곤 하던) 그 안정성에서 나온다고 말한다. 혼란이 점점 더 심해지는 세계에서 일본의 저성장과 안정성의 조합은 "특징이지 결함이 아닙니다."
그러나 가장 냉혹한 질문이 남아 있다. G7 회의가 끝나고 투자 컨퍼런스가 끝나면, 다들 돌아가는 비행기 안에서 과거 일본의 '욱일승천' 랠리가 어떻게 용두사미로 끝났는지를 복기하며 과연 이번은 다를까 자문하게 될 것이다. 외빈들을 모신 잔치가 끝나고나면 일본은 다시 현실로 돌아오게 된다. 중국은 여전히 일본에게 가장 큰 무역상대국이고 일본의 인구는 그 누구의 예상보다도 빨리 줄어들고 있으며 많은 경제학자가 글로벌 경기침체를 예상하고 있는 가운데 일본 기업들은 글로벌 성장을 준비하고 있다.
마침내 빛을 보는 행동주의 투자
다음주 열리는 CLSA 컨퍼런스에 참석하는 국제 투자자 500여명은 왜 이번의 '욱일승천'이 (적어도 일본 증시에 대해서만큼은) 지난 30여년과는 다를 것인지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듣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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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엇, 시타델 같은 대형 펀드사는 올해 초부터 도쿄에 사무실을 열거나 일본 투자 비중을 확대하겠다는 발표를 했다.
4월 워렌 버핏의 도쿄 방문은 일본에 대한 세계 투자자들의 관심을 증폭시켰다. 버크셔해서웨이는 일본의 다섯 개 기업 주식에 투자했는데 덕분에 도쿄는 버크셔해서웨이의 포트폴리오에서 미국 외 지역 중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시장이 됐다. 5월 6일 버크셔해서웨이 주주총회에서 버핏은 투자할 만한 일본 기업을 더 물색 중이라고 말했다.
일본에 대한 투자자들의 관심이 돌아온 까닭 중 하나는 일본 기업들이 과거와는 달리 주주 참여도를 높여야 한다는 명확하면서도 피할 수 없는 압박을 받고 있다는 것이다.
도쿄증권거래소를 보유한 JPX 그룹의 CEO 야마지 히로미는 올해 단호한 입장 변화를 보였다. 그는 도쿄증권거래소에 상장된 기업 중 절반 이상의 주식이 장부상의 가치보다 낮게 거래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공개적으로 안타까움을 내보였다. 야마지는 기업들이 기업가치를 개선하고 주주환원을 강화하며 자본비용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도록 거래소에서도 조치를 취할 것임을 시사했다. 이 세 가지 변화는 일본 증시에 대해 투자자들이 거의 기대하지 않던 것이기도 하다.
뱅크오브아메리카의 애널리스트 아쿠츠 마사시는 야마지가 낮은 주가장부가치비율(price-to-book)을 거론함으로써 재계에 사실상 공식적인 망신의 척도를 제시한 것이라고 본다.
"투자자들은 제게 도쿄증권거래소의 계획이 처벌 없이도 성공할 수 있겠느냐고 묻는데 저는 그럴 것이라고 답합니다. 도쿄거래소가 기업지배구조(거버넌스) 지침을 발표했던 2015년은 디플레이션 시기여서 기업들이 자신들의 행태를 크게 바꿀 동기가 거의 없었어요. 지금은 경제 상황이 다릅니다." 그는 오랫동안 인플레이션이라는 걸 경험하지 못했던 일본에서 인플레이션이 발생하자 상황이 얼마나 크게 달라졌는지를 지적했다.
한편으로는 주주 행동주의도 일본의 주류 투자 문화 속에 안착했다. 일본 내 행동주의 펀드의 숫자는 2014년 10개 미만에서 올해 70개 가까이로 늘었다. 미즈호증권의 애널리스트 키쿠치 마사토시는 2015년에서 2022년 사이 행동주의 투자자들의 주주제안 사례가 5건 미만에서 60건 가까이로 늘었다고 지적한다.
일본 기업의 연례 주주총회가 열리는 이번 6월에는 주주제안 건수가 신기록을 세울 전망이라고 키쿠치는 말한다. 하지만 많은 전문가들이 언급하듯 주주제안 그 자체는 일본 연기금과 기관투자자가 움직일 가능성에 대한 두려움에 비하면 그리 중요하지 않을 수 있다. 그간 유순한 편이었던 연기금과 기관투자자가 기업 거버넌스 관련 문제를 갖고 경영진에 반대표를 던질 수도 있다는 두려움은 최근 일본 재계에 보다 넓게 퍼져 있다.
도쿄증권거래소의 발언은 일본 증시 내 행동주의 투자자의 존재감이 커진 것과 맞물려 일본 기업이 말하고 행동하는 방식에 "대변화"를 가져왔다는 게 아스트리스 어드바이저리 투자자문 부문의 책임자인 에이드리언 고널의 평가다.
"거버넌스 개선을 누가 외치느냐와 연관이 크다고 생각해요. 일본은 뭔가 외부에서 강압을 한다는 느낌을 받으면 저항을 합니다. 외국의 행동주의 투자자들이 거버넌스 개선을 요구했을 때가 그랬죠. 이젠 행동주의 투자에 공감하는 일본 투자자들이 더 많습니다. 일본 기업이 더 효율적으로 자본을 운영하고 거버넌스를 개선해야 한다는 거죠. 이젠 일본 스스로가 그런 생각을 갖고 있다고 봐도 됩니다."
전문가들은 그밖에도 두 가지 요인이 더 있다고 한다. 하나는 중국과 거리를 두기 위한 글로벌 공급망 재편으로 외국 투자자들이 일본의 제조업 업체와 시설을 대거 인수할 수 있다는 점이다. 다른 하나는 일부 투자자들이 '낫 차이나(not China)' 트레이드라고 부르는 투자 기법으로 일본 시장이 직접적인 수혜를 입고 있다는 점이다. 이 투자 기법은 중국에 직접 투자를 하지 않으면서도 중국 익스포저2를 제공하는 유동성 높은 투자처를 물색한다.
노무라증권의 도매금융 책임자 크리스토퍼 윌콕스는 중국을 둘러싼 지정학적 불확실성이 일본에 매우 유리하다고 한다. "일본은 경제 규모로 세계 4위이며 우량한 투자처가 많고 세계 수준의 기업들을 갖고 있죠. 향후 5년에서 10년동안 아시아 엑스포저를 원하는 국제 투자자들이 투자하게 될 곳이 바로 일본입니다."
하지만 '욱일승천' 논리의 문제는 인구에 있다. 지난 수십 년간 일본 경제가 몇 차례의 사이클을 거치면서 낙관론이 힘을 받는 일은 여러 차례 있었다. 그러나 그때마다 노령화와 인구 감소에 대한 우려가 빠른 속도로 낙관론을 잠식했다.
일본에서는 개혁 성향의 정권이 들어서고 말 뿐만 아니라 행동이 이어질 거란 인식이 자리잡으면 언제나 강력한 랠리가 이어졌다는 게 모건스탠리의 평가다. 하지만 기시다가 개혁을 성공시킬 수 있을지 아직은 확실치 않다.
일본의 증시 랠리가 얼마나 지속될 수 있을지 의문을 제기하는 요인들도 적지 않다. 뱅크오브아메리카의 월간 설문이 보여주듯 세계적인 펀드매니저의 대다수는 일본에 대해 '비중축소' 의견을 유지하고 있다. 최근 6주간 순매수세가 지속됐지만 지난 6년간 계속돼 온 대대적인 매도세를 상쇄하기엔 역부족이다.
전문가들은 일본 토픽스 지수를 33년 중 최고점으로 끌어올린 자금의 대부분이 특별한 가치를 갖고 있거나 행동주의 투자의 목표물이 될 수 있는 주식을 물색하는 액티브 자금이 아닌, 인덱스를 매수하는 패시브 자금이라는 걸 지적한다.
"글로벌 펀드 자산 배분 비중은 실제론 바뀌지 않았어요." 한 일본 투자은행 주식 브로커의 말이다. 그는 CLSA 컨퍼런스로 상황이 바뀌어 액티브 자금이 일본으로 흘러들어오기 시작할지 궁금하다고 한다. "이번엔 바뀔까요? 어쩌면요. 행운을 빕니다."
일본이 다시 떠오르고 있습니다. 증시는 33년만의 최고점을 기록하고 있고, 머지않아 1989년 버블 시대의 최고점을 돌파하리라는 전망도 나옵니다. 비결은 무엇일까요? 첫째로 일본이 마침내 경제의 구조적인 문제를 해결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일본은 한국과 마찬가지로 사내유보가 강할 수 밖에 없는 기업 거버넌스를 가지고 있어 '엔저(低)'를 통한 '수출 밀어내기'를 하지 않으면 '과소소비'와 저성장의 늪에 빠지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런 기업 거버넌스에 변화의 조짐이 있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국제정세의 변화입니다. 일본은 과거 미국의 동아시아 냉전 파트너로서 미국의 묵인 하에 '엔저'를 통한 경제성장을 추구했다가 1985년 플라자합의로 엔화가 강제로 평가절상되면서 수출에 타격을 입고 오랫동안 침체를 겪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다시 미국의 대중국 정책의 동아시아 파트너가 되면서 미국이 일본의 구조적인 '엔저'를 허용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또한 '인도태평양' 개념을 창안하고 역내 외교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여 왔기 때문에 일본은 외교에서도 동아시아의 허브가 되고 있습니다. 인도, 호주, 동남아는 물론이고 이제는 북한의 문도 다시금 두드리고 있습니다.
물론 일본의 앞날이 장밋빛이기만 한 건 아닙니다. 아래에 전문 번역으로 소개하는 파이낸셜타임스의 5월 19일자 기사가 지적하듯, 일본은 대중국 무역 의존도가 높고 기업의 거버넌스 개선에 대한 정부의 의지는 강해보이지만 이것이 얼마나 실현될지는 아직 미지수입니다. 게다가 빠르게 감소하는 인구는 일본 경제가 뛰어넘어야 하는 커다란 함정입니다. 이 모든 문제는 한국 경제가 (몇몇 경우는 훨씬 더 무겁게) 짊어지고 있는 문제이기도 합니다. 다시 이웃나라 일본의 움직임을 면밀히 주시해야 하는 이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