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7.28 11:26
"난 이것이 회화 작품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하지만 이건 존재하죠. 바로 여기요." 1962년 여름 큐레이터 샘 와그스태프가 앤디 워홀의 커다란 <캠벨 수프 캔>을 벽에 걸어 이 팝 아티스트에게 첫번째 뮤지엄 전시를 허용했을 때 그가 입을 겨우 열고 내보인 열의는 이 정도가 다였다.
1964년 워홀의 미국 후원자들이 그의 역사적인 <죽음과 재난> 그림들에 퇴짜를 놓자 워홀은 장소를 옮겨 파리에서 작품을 선보일 수밖에 없었고, 그곳에서 프랑스 일간 르 몽드로부터 다음과 같은 혹평을 받았다. "워홀이 한 컷의 드라마틱한 자살 혹은 자동차 사고의 희생자 사진을 실크스크린1으로 캔버스 전체를 뒤덮는건 좋지만, 사고 이미지가 여러 개 쌓인다고 해서 그것이 전형적인 교통사고에 담긴 고유한 본질을 더 보태거나 없애지는 않는다. 교통사고의 고유한 본질은 팝에 적대적이다."
그해 말 몇몇의 보헤미안들은 워홀이 돈을 받고 그의 첫번째 <마릴린 먼로> 작품을 복제해 전시했다는 사실에 크게 역겨움을 느낀 나머지 워홀의 새 작품 더미에 총알을 박아버렸다.
그리고 지금 과거 수상쩍었던 바로 그 작품들, 즉 <캠벨 수프 캔>, 위대한 <자동차 사고>, 총알에 관통 당한 <마릴린 먼로>가 《앤디 워홀: 서른 개가 한개보다 낫다》라는 이름으로 전시중이다. 이 전시는 피터 브랜트가 50년에 걸쳐 수집한 작품들을 개관(槪觀)하는 행사인데, 피터 브랜트의 뉴욕 이스트 빌리지 소재 재단에서 열리고 있다. 한때 변전소였던 곳을 용도 변경한 전시장의 조명과 공기와 탈공업적인 매력 속에서 워홀의 작품들은 너무나도 인상적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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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고전이 되어버린 50여 점의 팝 아트 작품과 이들의 선행작인 1950년대 작품 몇 점, 그리고 포스트 팝 아트 작품 20여 점이 함께 전시되고 있다. 이 포스트 팝 아트 작품으로는 1978년 작 <그림자>, 같은 시기 워홀이 오줌으로 "그려낸" 거대한 <산화>, 그리고 1987년 워홀이 사망하기 몇 달 전에 제작한, 벽면을 가득 채울 정도로 큰 <위장>과 <최후의 만찬> 시리즈가 있다. 워홀의 위업을 소개할 수 있는 더 나은 방법은 상상하기 힘들다.
하지만 우리는 더 나쁜 소개를 상상해보는 것이 나을지도 모르겠다. 즉, 오늘날 받아들여지는 것처럼 워홀 업적의 올바름을 이해하도록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맨 처음부터 존재했던 심오하고도 비옥한 잘못됨을 알려주는 소개를 상상해보는 것이다. 브랜트 전시 공간의 아늑함 속에서 오늘날 워홀의 그림들이 지니는 편안함을 떨쳐내고 과거 이 그림들이 제공했던 그 불편함을 재발견하는 데에는 노력이 필요하다.
위대한 아방가르드 예술가의 진가를 알아채지 못한 비평가를 비웃는 것이 일반적이라면, 워홀의 경우에는 "멋진 말썽"을 드러낸 비평가의 혹평을 칭찬해야 할 것이다. 큐레이터 와그스태프는 워홀의 수프 캔이 회화라는 정립된 개념에 치명타를 날릴 수 있음을 우려했는데, 그때 그는 중요한 무언가를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르몽드의 비평가가 자동차 사고 이미지의 중첩이 강렬한 주제에서 "더하거나 빼는" 것을 거부한다고 지적했을 때, 그의 말이 맞았다. 기존 예술의 경우는 그렇다. 하지만, 워홀은 이 말썽 많은 주제를 가장 차가운 무표정으로 표현함으로써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또 워홀이 돈을 받고 그의 초기 아이콘을 반복 제작했을 때, 그의 초기 아이콘은 그가 한때 불렀던 것처럼 실제로 "죽은 그림"이 되었고, 총을 든 보헤미안들은 이를 생각해 볼 계기 대신 격분할 대상으로만 여기는 실수를 범했던 것이다.
그 보헤미안들이 공격한 <마릴린 먼로> 복제작품들을 통해 우리는 '어느 예술가보다도 워홀이야말로 어떤 무엇이 예술이 되고 결국 돈처럼 되어버려 예술로서의 생애를 끝마치게 되는 과정을 알고 싶어했다'는 사실을 알아야한다. 워홀은 1962년 봄, 그가 처음으로 팝 아트 작품을 상업 전시장에 선보였을 때 이를 강조했다. 그는 1달러짜리 지폐 200개를 인쇄한 거대 캔버스를 전시하며 작품의 가격을 200달러로 내걸었었다. (이것은 아마도 워홀의 첫번째 실크스크린 회화 작품이었을 것이고, 브랜트 소장품 중 하나가 196장의 지폐를 담은 것으로 위와 거의 동일한 작품이다. 다만 이 작품이 196 달러로 책정되었던 적이 있는지는 알 길이 없다.)
첫번째 가격표('200달러')가 예술과 돈이 같은 것이 될 수도 있는 방식에 잽을 날리며 워홀의 신랄한 야유의 본질을 드러냈다면, 그의 그림이 오늘날 팔리는 가격은 그의 작품을 가장 안전한 고급 자산으로 만든다. 2017년도에 브랜트는 3000만 달러(약 390억 원)를 들여 커다란 <수프 캔>을 구매했다. 작년 11월 브랜트는 <자동차 사고> 구매에 8500만 달러(약 1100억 원)를 썼다. 작년 봄, 그의 <마릴린 먼로>와 쌍둥이 작품이지만 같은 가치를 갖지는 못하는 작품이 1억9500만 달러(약 2500억 원)에 낙찰됐으며, 오직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살바토르 문디>만이 경매에서 이보다 높은 가격을 기록했다. (브랜트가 소장한 <마릴린 먼로>가 2022년에 팔린 작품보다 더 좋은 이유는 총알 구멍이 보이기 때문이다. 워홀은 브랜트에게 총알 구멍을 손을 대 없애려 하지 말라고 조언한 바 있다.)
"도대체 누가 끔찍한 자동차 사고 장면이 담긴 8피트 (2미터 43센티)짜리 그림을 보고싶어 하겠어요, 앤디?" 한 친구가 워홀에게 사실 더 강한 표현을 써가며 물은 적이 있다. "당신은 돈줄을 말아먹고 말거에요." 그러자, 워홀은 "그렇죠. 끝장 나겠죠"라고 답했다. 워홀은 그의 작품 시장이 자동차 사고와 자살까지 소비할 정도로 커질 것이라고는 예상치 못했다. 하지만, 우리가 누리는 부(富)의 문화는 워홀의 위협을 달러의 홍수 속에 희석시켜 무력화시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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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위협"은 적절한 표현이 아닐수 있는데, 이는 워홀이 의지를 갖고 단 하나의 메시지를 전달하려 했다는 의미로 비칠 수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우유부단함과 모호함이 그의 예술의 진정한 특징이다. 하지만 이러한 모호함은 명백한 위협만큼이나 예술 애호가들을 괴롭힐 수 있다.
브랜트 재단 전시는 1984년 워홀이 손으로 자국을 내어 만든 거대한 로르샤흐2 패턴으로 덮힌 13피트(약 3.9미터)가 넘는 캔버스를 선보인다. 보는 사람에 따라 다르게 읽히도록 고안된 형상의 진수다.
1986년에 제작된 또 다른 캔버스는 전체 길이가 35피트(약 10.6미터)에 달하며, 끝에서 끝까지 실크스크린으로 처리되어 고전적인 위장막처럼 보인다. 뭔가를 보이지 않게 하려는 디자인이 여기서는 보이는 미술 작품이 된다.
워홀의 최고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이 작품들에서, 워홀은 지난 500년 동안 서양 문화에서 전개되어온 '파인아트(순수 미술)'라고 불리는 기묘한 것의 핵심에 다가간다. '파인아트'의 근본적인 기능은 기능을 갖지 않는 것이며, 새로운 관객 각자가 예술로 제시된 어떤 오브제와 만날 때 로르샤흐 패턴처럼 다양한 가능성에 열려 있게 되는 것이다. 철학적으로 말하자면, 서양의 '파인아트'는 그것이 무엇에 관한 것인지를 영구히 숨기면서도 그 자신은 보여지도록 시선을 끄는 그 무엇이다.
수프 캔인가, 회화인가? 끔찍한 사고인가, 매혹적인 패턴인가? 명작인가, 팔리는 물건인가? 워홀의 대답은 "맞다"이다. 그리고 브랜트 전시의 워홀 작품들이 대신 말한다. 그런 질문이 뭔가를 예술로 만드는 바로 그 대답이라고.
필자 블레이크 고프닉(Blake Gopnik)은 옥스포드대 미술사학 박사로 워싱턴포스트에서 미술비평가로 재직했으며 현재는 뉴욕타임스에 정기적으로 기고하고 있다. 저서로 <워홀(Warhol)>(New York: Ecco, 2020)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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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자 윤혜정은 현재 미국 캔사스 주립대에서 미술사 박사과정에 있다.
팝아트의 대명사인 앤디 워홀은 예술이란 무엇이고 그 예술이 시장의 메커니즘 속에서 어떻게 안전한 자산으로 전락해 더 이상 예술이 아니게 되는지에 대해 항상 고민했습니다. 그래서 그의 예술은 대답이기보다는 질문이고 도발이었는데, 그의 작품들도 똑같은 메카니즘을 이겨내지 못하면서 인기를 얻게 되고 일상화되고 평범해지며 더 이상 질문과 도발이 아니게 되었습니다. 오랫동안 워싱턴포스트에서 미술비평을 했고 지금은 뉴욕타임스에 기고하고 있는 블레이크 고프닉의 6월 1일자 뉴욕타임스 칼럼은 앤디 워홀에 대한 대중의 소비를 안타까운 마음으로 비판합니다. 우리는 그를 너무 찬미하는데, 그것은 그가 원했던 것이 아니라는 지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