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9.08 12:01
가즈오 이시구로는 1954년 일본 나가사키에서 태어나 1960년 영국으로 이주한 일본계 영국 소설가이다. 대학 시절에 문학, 철학, 문예창작을 공부했고, 1982년 첫 소설 『창백한 언덕 위의 풍경』을 출간했다. 2023년 현재까지 『부유하는 세상의 화가』, 『남아 있는 나날』, 『나를 보내지 마』, 『클라라와 태양』 등 장편 여덟 권과 단편집 한 권을 출간했고, 2017년에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소설 외에 가사와 시나리오를 쓰면서 타 장르 예술가들과 협업하기를 즐긴다.
아래 인터뷰는 2005년 여섯 번째 소설 『나를 보내지 마』를 출간한 지 2년 후 일반 청중을 대상으로 공개적으로 이루어진 대화의 기록이다. 인터뷰에서 이시구로는 소설 창작에 있어서 시점, 목소리, 시대와 장소 같은 형식적 요소들에 관한 주관을 밝히며, 또한 국가와 공동체가 역사를 인식하는 방식을 이야기하는 데 있어서 작가가 갖추어야 할 책임 의식에 대해서도 역설한다. 낭독회와 인터뷰 같은 창작 외 활동에서 느끼는 감정, 노래 작사와 영화 시나리오 쓰기 같은 다른 예술 장르에 참여할 때의 즐거움과 유익함에 대해서도 소탈하게 풀어놓는다. 말할 수 없는 것에 이르는 글쓰기, 말할 것이 없는 순간에 이르는 말하기, 종국에는 그것을 말하는 대화의 기록이다.
'더 말할 수 없어서 미안합니다'
인터뷰: 션 매슈스Sean Matth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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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2007년 6월 2일, 리버풀 호프 대학교, 〈가즈오 이시구로와 국제 소설〉 학회에서 진행한 공개 대화를 기록 편집한 것이다.1
션 매슈스: 최근 몇 년 동안 동시대 작가들의 경험에서 가장 극적인 변화 중 하나는, "작가 행사"와 "작가 인터뷰"의 폭발적 증가에서 확연히 드러나듯, 새로운 "작가 숭배" 유형의 대두라 하겠습니다. 선생님께서도 이처럼 낭독회, 대화, 이력 관리가 맞물리는 회로에 점점 더 편입되고 있다는 것을 인지하셨을 텐데요. 『남아 있는 나날』의 출간 시기를 전후하여 세계 전역에서 엄청난 횟수의 공개 행사를 치르셨지요. 피로하고 심지어 트라우마가 생겼다고도 하셨고요. 『위로받지 못한 사람들』의 주인공 역시 여러모로 여행하는 예술가의 악몽에 옥죄어 있는데요. 작가로서 겪는 이런 삶의 양상에 대해 무언가 이야기해주실 수 있을까요?
가즈오 이시구로: 작가 행사는 "낭독회"라 불리지만 점점 더 전혀 낭독회가 아니게 되었습니다. 제가 낭독회에 처음 나갔을 무렵, 사람들이 작가에게 기대하는 것은 그저 자기 작품을 읽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몇 년이 흐르자 토론과 질의응답 세션도 바라게 되었어요. 작가 행사는 독자적인 예술 형식으로 변모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이제 책은 완전히 제쳐놓는 지점까지 이르고 있지요. 작가 행사에 참여하기만 해도 실제로 문학계에 대해 아는 게 많아집니다. 책과 전혀 조우하지 않고도, 어떤 노고를 들이지 않고도, 작가와 직접 소통할 수 있어요. 물론 과장이긴 합니다만, 그 때문에 심란합니다. 이런 현상에는 건전한 측면도 있는 것 같아요. 작가들이 과도하게 내향적인 상태에 빠져 지내는 것을 막음으로써, 우리가 글을 쓰는 것은 실존하는 사람들을 위해서라는 점을 상기시키지요. 그렇더라도 더 문제적인 측면이 있습니다. 책을 판촉하기 위해 세계를 여행하다 보면, 외국 독자들에 다소간 지나치게 예민해질 수 있습니다. 노르웨이에서 이틀을 보낸 적이 있는데요, 제 작품에 나오는 특정한 문화적 참조점들에 대해 여러 질문을 받았지요. 그러다 보니, 이제 서재에서 글을 쓰는데, 머릿속에서 특정 노르웨이인에게 말을 걸 때가 종종 생기더라고요. 노르웨이인들에게는 이 책에 대해 설명해주어야 할 거라고 인지하게 되었기 때문이지요, 노르웨이어로 번역하면 문화적 참조점의 상당수가 살아남지 않는 상황에서요. 그래서, 노르웨이인들을 응대하며 꼬박 이틀을 보낸 결과, 서재의 고독으로 돌아오자 이제 그들은 제 어깨 너머로 내려다봅니다. 세계화가 작가에게 와닿는 방식은 이렇습니다. 일본 독자들에게도 설명하고, 미국 중서부의 농부들에게도 설명해야 하는 상황에서, 주의하지 않으면 자기 정체성의 모든 감각을 상실하게 되어요. 자기 언어와의 접촉도 실제로 상실할 것입니다.
이를 다른 각도에서 접근해 보지요. 독자들 중 어떤 분들은 제 개인사에 의거해서 제가 쓴 것의 의미를 추측하시는데요, 특히 저와 일본의 관계 및 아웃사이더 같은 인물의 수적 우세를 주제로요. 거기에 깊은 연관이 있는지 저는 모르겠습니다. 사람들의 말만큼 제 인물들이 정말 아웃사이더인지도 확실하지 않고요. 두 번째 소설 『부유하는 세상의 화가』의 주인공 같은 자는 자기 사회와 세대의 본질적 구성원이고, 어느 정도는 그것이 바로 그의 비극이고, 전쟁기에 그 세대와 시기의 바깥에 나와 설 만큼 탁월하지 않습니다. 그저 조수에 따라 휩쓸릴 뿐이지요. 『나를 보내지 마』에도 어느 정도 유사한 상황이 있습니다. 인물들은 다소 기이한 공동체에 소속되었는데, 어찌 되었든 그 공동체에 통합되어 있고, 그 바깥에서는 견뎌낼 수 없어요. 하라고 하는 것에 그들이 그토록 수동적으로 따르는 까닭은 이 때문입니다. 그들은 자기가 처한 상황 바깥에 개별자로서 서 있을 수 없습니다. 제 인물 상당수는 흘러가는 대로 가는 경향이 있고, 『남아 있는 나날』의 스티븐스 같은 아웃사이더 역시 어느 정도는 아웃사이더가 아닙니다. 그는 본원적으로 자기 계급의 일원처럼 생각하는 자이고 거기서 탈피하지 못합니다. 저는 우리 모두 어떤 의미에서 어느 정도는 집사라는 의구심 때문에 『남아 있는 나날』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윤리적이고 정치적인 층위에서 우리 대부분은 집사입니다. 우리는 우리 주변 환경의 바깥에 나와 서서 그것을 평가하지 않습니다. "멈춰 봐, 대신 이렇게 할 거야"라고 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명령을 받아들이고, 우리의 직무를 이행하고, 위계에서 우리의 위치에 수긍하고, 우리의 충직성에 효용이 있기를 희망합니다. 마치 그 집사처럼요. 그러므로 제 인물들이 개인적으로 외로운 자일 수는 있겠지만, 제가 창조하려는 것은 장삼이사입니다. 말이 나온 김에, 개인적으로 저는 저 역시 아웃사이더 부류라 여기지 않아요.
그러한 추측에 근거한 전기비평적인 독법에 학자, 문학평론가, 교사들은 죄책감을 느낄 수도 있겠어요. 가즈오 이시구로의 상상 세계를 탐구하는 법 이야기를 하면서 급료를 받는 분들이요. 이처럼 "전문적인" 독자들 역시, 선생님의 표현대로, 선생님이 글을 쓰시는 동안 어깨에서 서성이나요?
많은 작가들처럼 저도 도서계에서 일어나는 일에 꽤 신경을 씁니다. 책을 출간하고 어디선가 서평이 나오면, 득달같이 읽고 평에 따라 침을 뱉기도 해요. 대학에서 저에 대해 말하고 쓰는 것에는 그런 식으로 신경쓰지 않아요. 때때로 그런 게 눈과 귀에 들어오는데, 보통은 그 모든 사람들이 제 작품을 이렇게나 진지하게 여긴다는 데 그저 마음속 깊이 우쭐해지지요.
[PADO 트럼프 특집: '미리보는 트럼프 2.0 시대']
대학과 저 같은 작가들 사이에 더 많은 접촉이 필요합니다. 제 생각에 상업주의의 압박에서 벗어나 현대 및 동시대 문학을 토론할 수 있는 장소를 확보하는 게 점점 더 중요해지고 있습니다. 작가들을 위해, 그리고 글쓰기를 위해 중요해요. 제가 책을 쓰기 시작했을 무렵, 출판계에는 "하이브로우 엔드"라 할 만한 게 있었어요. 문제점도 많았지만, 픽션 문학 출판에 있어서 상업적 양상의 지배에 대항하는 입장을 취하는 성향에 긍지가 있었지요. 문학에 대해 아주 진지한 토론들을 했어요. 오늘날 문예 창작 수업의 급증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경향은 거의 사라졌습니다. 지금 글쓰기를 시작하는 젊은 작가에게는 엄청난 상업적 압박이 있어요, 댄 브라운이 되고자 하든 새뮤얼 베케트가 되고자 하든 상관 없이요. 출판업자들은 책을 보며 이렇게 말합니다. "이 데뷔작을 몇 부나 팔 수 있을까?" 상당 부수가 팔릴 거라 예상되면 출판되는 거죠. 문학적 장점은 거의 평가되지 않아요. 이런 상황에 평행추가 필요합니다. 대학은 이처럼 만연한 상업주의에서 피난처로 기능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무엇이 좋은 책을 만드는지, 문학적 전통에서 간직해 나가고 싶은 가치는 무엇인지, 대학은 이를 토론하는 장소를 마련할 수 있습니다.
선생님께서 "문학적 전통"이란 용어를 쓰시는 게 흥미롭습니다. 선생님의 작품과 연관을 맺을 만한 문학적 전통에 대해 의식적으로 생각하시는 게 있는지요? 각별한 연관이 있다고 의식하는 작가와 작품이 있습니까?
어려운 질문이네요. 넓은 스펙트럼에서 제가 보다 진지한 작가들과 같은 맥락에 있다고 여겨지면 좋겠습니다. 톨스토이를 염두에 두고 있다고 생각하셨을 텐데요... 종국에는, 그렇습니다, 진지한 목적을 가진 작가라 여겨지고 싶습니다.
물론 제 책들이 즐거움을 주기를, 페이지를 넘기는 게 과도하게 힘들지 않기를 바라지만, 그래도 역시 독자들과 진지한 대화를 나누려 애를 씁니다. 삶에서의 진지한 일들에 대해, 무엇이 우리의 삶을 가치 있게 하는지에 대해, 같이 이야기하기를 희망하지요.
여하간 제 작품에 의미심장한 영향을 끼친 것들이 있었습니다, 기꺼이 인정할 수 있어요. 20대 초반 저는 "일본 시기"를 거쳤는데요, 일본 문화에 관한 모든 것에 굶주렸었지요. 구로사와 아키라와 오즈 야스지로 같은 일본 영화감독들이 심오한 영향을 끼쳤고, 아마 작가로서의 저에게도 대단한 영향력을 발휘했을 겁니다. 이 감독들은 영화에서 주로 "휴머니즘의 전통"이라 일컬어지는데, 구로사와가 특히 그렇지요. 반대로, 당시 접한 소설가들, 미시마 유키오와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아주 부정적이고 허무주의적이기까지 했습니다. 이들에 대해 무어라 판단을 밝히고 싶지 않습니다만, 아주 생경한 문학처럼 느껴졌어요. 뭐가 어떻게 되는지 잘 이해할 수 없었고, 부정적 인생관을 흥청망청 즐기는 것 같았습니다. 예술적 감수성을 갖는 것과 부정적 감수성을 갖는 것은 동전의 양면이지만요. 그래서 이들에게서는 거의 아무것도 얻지 못했습니다. 저와 미시마 같은 사람은 전혀 연관이 없다고 봅니다. 극우파 또라이 같은, 뭐, 달리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그는 어쩌면 대단한 작가였겠지요. 하지만 네오파시스트 부류였고, 일본인이라는 사실만 아니라면 저 자신을 그와 연관 지어 생각해본 적이 결코 없을 거예요.
말이 나온 김에, 현재 일본 작가들 세대, 무라카미 하루키 같은 사람들은, 제가 좋아하는 작가 중 한 명인데요, 전혀 다른 전통에 있다고 봅니다. 제가 아주 기꺼이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작가들이에요. 무라카미는 어디서나 인기가 많은 것 같아요. 이탈리아와 프랑스에 가보면 국제적인 작가 그 자체인 듯해요. 어느 언어에서나 존재감이 상당하지요. 그의 세계는 허무주의적 전통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요.
다른 문학적 전통으로, 이 말을 이런 경우에 써도 된다면, 저는 종종 "포스트모더니즘"으로 분류되는데요. 하지만 저는 사실 저 자신을 이런 용어에 따라 생각해본 적이 전혀 없어요. 제가 문학과 문예창작 학생이었을 때, "포스트모던"이라는 표지는 최신 유행이었고 거의 윤리적 입장과 같았습니다. 새 세대 작가로서 포스트모던한 방식으로 써야만 했고, 그렇지 않으면 다소 제국주의를 조장하는 것이었습니다. 어떤 논리에 따라 그랬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그래서 저 역시 포스트모던하다고 불리기를 바랐던 시기가 짧게 있었던 듯한데, 그러나 절대적으로 정직하게 말씀드리자면, 포스트모더니즘의 모델로 제시된 작가들, 도널드 바셀미나 이탈로 칼비노 같은 작가들은 습작기의 저에게 유용한 작가들이 아니었습니다. 막상 써야 할 때가 되자, 찰스 디킨스, 도스토옙스키, 제인 오스틴, 그리고, 맞아요, 톨스토이로부터 배웠습니다. 포스트모더니즘에서 이용할 수 있는 것은 그다지 없다고 생각했어요.
포스트모던 글쓰기의 특성에 대해 더 생각해 보면, 저는 개인적으로 "메타픽션"에, 즉 픽션의 본성에 대한 책을 쓰는 데 관심이 없습니다. 그런 책에 반감이 있는 게 아니라, 픽션의 본성보다 더 위급한 질문들이 있으니까요. 그런 점에서 스토리텔링에 대한 글쓰기에도 관심이 없습니다. 하지만 어떤 공동체나 국가가 자기의 과거에 대해 무엇을 이야기하는가, 그에 함의된 바에 따라 그 공동체나 국가는 현시점에 어디에 있으며 다음에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이러한 의미에서의 스토리텔링이라면 관심 있습니다. 개인은 어떻게 자기의 과거를 받아들이고 이후에 무엇을 할지 결정하는가, 그리고 국가나 공동체는 그러한 일에 어떻게 접근하는가, 이 둘 사이에 평행선을 그리고자 한다면 이때 스토리텔링은 중요한 관건이 됩니다. 사람들이 공동체 안에서 서로 나누는 이야기들, 말 그대로 이야기죠, 현대에 그것은 TV 프로그램, 언론, 온갖 사건을 추적하면서 솔깃하게 꾸며내고 해석하고 그게 사실은 무슨 뜻인지 이야기해주는 그 모든 논평이기도 하지요. 우리가 이런 이야기를 할 때 쓰는 도구는 무엇일까요? 우리가 나누는 이 이야기들은 정확히 무엇일까요? 우리가 왜 그랬는지 국가적으로 이야기를 나눌 때, 그 동기는 무엇일까요? 무엇이 그 과정을 추동할까요? 우리는 정직함을 추구할까요, 아니면 기만하려 할까요, 아니면 자기를 위무하려 할까요? 이 같은 질문들은 사회에서 종교의 역할에도 적용됩니다. 그래서 이런 의미에서 이야기와 스토리텔링에 관심이 있다는 것이고요, 단순히 픽션의 본성을 숙고하는 책은 좋아하지 않아요.
이처럼 스토리텔링에 관심을 기울임으로써 인간, 장소, 사건, 역사를 재현하는 방식에 작가의 책임이 연루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선생님의 작품에는 보편성과 특수성 사이의 긴장이 있는데요. 선생님의 이야기들은 한편으로는 널리 나아가 노르웨이든 일본이든 어디서나 잘 읽힐 수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예를 들어 제2차 중동 전쟁처럼 아주 특수한 역사적 순간 및 나가사키 같은 구체적 장소에서 일어나니까요. 선생님의 작품에서 장소와 역사의 재현에 있어서 이 같은 책임의 감각에 대해 말씀해주실 수 있을까요?
작가로서 제 이력 내내 고민한 질문이로군요. 저는 배경과 역사와 늘 불편한 관계를 맺었어요. 저는 역사를 그저 픽션을 위한 원천으로만 사용한 것 같아요. 저는 프리모 레비 같은, 더 최근의 예로는 독일의 프랑스 침공에 대해 쓴 이렌 네미롭프스키2 같은 작가가 아닙니다. 역사의 특정한 순간에 일어나는 사건들을 증언하고자 하는 필요성을 느끼는 작가들 말입니다.
이러한 작가들과 대조하여, 저는 저만의 이야기와 주제가 있고, 제가 역사에 기대는 까닭은 다소간 극적 효과를 위해서입니다. 저는 글쓰기 과정에서 배경을 꽤 나중에 설정하는데, 이야기를 가능한 한 가장 잘 합주할 수 있는 장소를 물색하기 때문입니다. 『남아 있는 나날』은 1930년대에 대해 쓰고 싶다는 생각으로 착수한 게 아니에요. 다른 것들을 먼저 고려했지요. 그런 다음 그 모든 아이디어가 가장 잘 울려퍼질 특정한 시기를 배경으로 정하려고 했어요. 1930년대는 민주주의의 문제와 결부되었으므로, 1970년대보다 그 시대를 배경으로 삼는 편이 나은 것이지요. 하지만 그러면 나는 역사를 이용할 뿐이며 실존한 사람들이 겪은 심오하고 때로는 비극적인 경험을 일종의 배경막이나 행사용 의상으로 착취하고 있다는 거북한 느낌이 가시지 않습니다. 그래도 저는 그 점에 책임을 지고 사건을 곡해하지 않으려 노력합니다. 유감스럽지만, 저는 특정 시대에 대해 진실을 자문해주는 사람은 아니에요.
소설에서 장소 설정의 문제는 시대 설정의 문제와 유사한 과정을 따릅니다. 장소 결정은 불가피합니다. 소설을 어디에든 설정해야 해요. 요즘 쓰고 있는 소설에서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장소를 결정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렸어요. 저는 주로 자기의 과거 및 의식과 투쟁하는 개인들에 대해 쓰는데요, 요즘에는 그저 개인이 아니라 사람들이, 공동체와 국가가, 어떻게 자기 역사를 기억하고 망각하는지에 관한 소설을 쓰고 싶어졌습니다. 국가는 망각해야 하고 인간은 사건을 은폐하고 해결하지 않은 채 내버려 둘 수 있는 시대가 어쩌면 있기도 하지요. 안 그러면 온갖 문제가 들끓어 오를 테니까요. 오래도록 저는 배경과 고투했습니다. 예를 들어, 1990년대 보스니아 전쟁을 배경으로 삼으면, 그것은 1990년대 보스니아 전쟁에 관한 책이 됩니다. 작가 행사를 하면 보스니아에 대한 무수한 질문들을 받겠지요. 완전히 이해할 만합니다. 그저 손쉽게 미국으로 배경을 옮겨서 미국은 어떻게 노예제와 인종차별의 시대와 국가의 관계에 충분히 직면하지 않았는지 이야기할 수도 있어요. 그러면 그 책은 그에 관한 책이 되고요. 그렇다면, 무언가 이상한 것, 낯설고 추상적인 장소에 대해, 이상하게 행동하는 외계인 유형에 대해 써야 할까요? 아닙니다. 소설은 어딘가 배경을 설정해야 합니다.
이는 소설가에게 아주 실무적인 문제입니다. 우리가 선택하는 배경 및, 보편적 메타포를 위해서든, 온갖 인간적 상황에 적용 가능한 이야기를 위해서든, 그 장소를 사용하고 싶다는 사실 사이에는 언제나 긴장이 있어요. 이 소설에는 특정한 시간과 장소가 설정되어 있다고 독자들에게 알려주어야 합니다. 그래도 바라건대 독자들은 소설은 다른 시간과 장소에서도 다시금 일어나는 일들을 다룬다는 것을 인지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균형 잡기는 꽤 어렵지만, 그것이야말로 위대한 책들이 그토록 무수하게 다양한 독해를 산출하는 까닭이기도 하지요.
책임감과 진지함에 관한 이러한 질문들에는 특히 서술자의 목소리와 관련하여 형식을 선택하는 문제도 결부되어 있을까요? 선생님께서는 종종 "신뢰할 수 없는" 일인칭 서술자를 사용하시는데요. 선생님의 글쓰기에는 확실히 일인칭 서술이 두드러지지요, 최근에는 객관성을 견지하는 삼인칭 목소리를 구사하시는 듯합니다만.
일인칭과 삼인칭 서술의 구분은 대수로운 게 아닙니다. 요즘 쓰는 책은 일인칭으로 서술되지 않지만 그렇게 보일 수 있어요, 적어도 상당 부분에서요. 더 중요한 것은 소설에서 의식이 어디에 위치하는가입니다.
하지만 더 근원적인 문제가 있습니다. 제가 일인칭에서 멀어지는 이유 중 하나는 오로지 한 가지 방식으로만 작업하면 예술적 불구를 초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한 가지 방식만 고집한다면 그것은 과연 예술적인 이유 때문일까요, 아니면 그저 습관에 따른 것일까요? 『남아 있는 나날』 같은 책에서 예시하듯 일인칭 서사의 의의 같은 게 있기는 하죠. 여기서 일인칭 서사는 무언가 숨기는 작용을 합니다, 심지어 서술자 자신에게도요. 스티븐스는 불편한 기억들을 수용하려 분투하고, 마침내 그것을 인정하면서 아주 후련해집니다. 서술자가 자기에 관한 무언가를 이해하는 순간, 클라이맥스에 도달합니다.
이는 완벽하게 좋은 서사 모델이에요. 그러나 나이가 들수록 제 주변의 세계는 계속 변화하고, 저는 이런 서술법이 점점 편하지 않습니다. 이런 모델은 제가 더 젊었던 시절에는 쉽게 들어맞았지만, 이처럼 억압된 서술법은 지금은 잘 맞지 않습니다. 감정적 억압은 50년대의 문제였지 우리 시대의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거의 반대되는 상황에 시달리고 있지요, 모두가 아무데서나 자기가 느끼는 것을 그저 쏟아내고 있어요.
일인칭의 억압된 목소리는 오늘날을 살아간다는 것은 어떤지를 표현하는 데 적합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어두운 충동을 억제하고 있기 때문은 아니에요. 요즘에는 중심을 견지하기가 아주 어려운데, 그저 스포츠센터에 등록하기만 해도 나 자신일 수도 있는 다른 어떤 사람, 결혼할 수도 있는 다른 어떤 사람, 나도 가질 수 있는 다른 어떤 직업, 나도 따라할 수 있는 다른 어떤 삶의 방식이 마치 놀리는 것처럼 늘상 눈에 들어와요. 우리로 하여금 누군가 다른 사람이 되라고 계속 곯려대는 세계의 지평에 살고 있어요. 롤모델들이 어느 방향에서나 꾸역꾸역 밀쳐듭니다. 거의 정반대의 문제이지요. 말하자면, 자기 자신이라는 감각을 유지하기 어려운데, 단지 마음 먹기만 하면 무엇이든 원하는 게 될 수 있다고 주입받기 때문이에요.
그러므로 소설의 형식, 목소리는 작가가 살아가는 시대와 연관이 있습니다. 『남아 있는 나날』을 쓸 무렵을 돌이켜보면, 막연히 프로이트적 이상, 아니, 관념이라 할 만한 것이 제 세대 작가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는 생각이 듭니다. 사실 저는 런던에서 사회복지 일을 하고 있었는데, 그 세계에는 특유하게 치유적 성격의 개인 성장 대항문화가 있었어요. 그래서 저는 실제로 프로이트 추종자는 아니었지만 이처럼 막연하게 프로이트적 관념들이 반영된 것을 꽤 흡수했습니다. 영화가 나왔을 때 그 점이 상당히 강조되었지요. 영화는 책보다 더 억압을 부각했습니다. 제 홍보 담당자 데버러 로저스가 아주 기막힌 논평을 했어요. "영화는 감정적 억압을 다루고, 책은 자기 부정을 다룬다"라고요. 그게 중요한 차이점이라 생각됩니다. 앤서니 홉킨스의 역할은 감정의 억압에 관한 연구 사례이고, 영화가 미국에서 그토록 흥행한 이유는 부분적으로 그 때문이었어요. 그에 대해 편지를 많이 받아서 안답니다. 돌이켜 보니, 억압에 관한, 그리고 인간이 감정적으로 심리적으로 통합을 이루는 법에 관한 관념들이 당시 널리 퍼졌었고, 어떤 가설은 비판 받거나 의문시되었고, 또는 단순히 상투적 속설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소설에서의 인물 묘사법에 관한 관념을 제고하고 있습니다. 어떤 작품에서는 인물 묘사가 거의 만화 수준이 되었어요. 조니 캐쉬와 레이 찰스의 전기 영화를 연이어 본 적이 있는데요, 인물을 구성하는 전형적인 방식이 있더라고요. 현시점에 고뇌에 빠진 예술가를 보여주고, 그가 삼각 관계였을 때 겪은 사건을 플래시백으로 처리하면, 이로써 그는 왜 약물 중독자가 되었는지 설명됩니다. 대중 소설과 드라마에서 이는 인물을 축조하는 게으른 방식이 되었어요. 누군가 자기의 트라우마를 계시적으로 깨닫는데, 그러면 그 짧은 순간에 캐릭터가 완성되는 것이지요. 이 점에 있어서 저 같은 소위 문학 작가들은 조금 더 교묘한 방식을 쓰지만 찔리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캐릭터 또는 흥미로운 인간을 구축하기 위해 그를 과거의 사건들에 따라 설명하고, 그러면 그 캐릭터는 다 된 거라 여기는 경향이 있어요. 실제 삶에서 인간은 훨씬 더 이해불가한데도요. 어떤 사람을 여러 해 알고 지냈어도 설명할 수 없는 커다란 덩어리가 있잖아요. 내게 아무리 완벽한 아이가 있어도 문득 "너 왜 이러는 거니?" 싶은 순간이 있고, 반대의 경우도 있지요. 인간은 앞서 말한 정형이 허용하는 것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난해합니다. 자기 삶을 바꾸거나 삶의 도정 어딘가에서 자기 자신을 바꾸는 인간의 잠재성, 그것이 과소평가되었어요. 인물을 어떻게 전제하는지, 인물을 어떻게 온전히 기술하는지, 프로이트적 소설에서 출발하더라도 기본적으로 인물을 어떻게 구축하는지에 따라 어떤 소설가나 세대가 속한 시대를 가늠할 수 있습니다. 지금은 움직여 나아가야 할 때입니다. 인간 존재의 예측할 수 없고 설명할 수 없는 본성을 더 받아들이면서요. 그러면 그것은 소설의 형식과 목소리와 구조의 층위에서 현시될 것입니다.
선생님의 초기작 중 어떤 것을 슬슬 후회하고 있다는 말씀처럼 들리기도 하네요. 과거로 되돌아가 고쳐 쓰고 싶으신가요?
이전 작품으로 돌아가 고치고 싶은 마음은 결코 없습니다. 어떤 작가들은 그렇게 하고 있어요. 30년 전에 출간한 것을 소소하게 바꿔서 페이퍼백 판본으로 발행합니다. 헨리 제임스는 수정을 가한 자기 작품의 선집에 서문을 썼지요. 저는 이게 우려스럽습니다. 당시 쓴 것은 당시 쓴 것이고, 그것만의 결함과 실패를 담고 있어요. 그것은 당시 내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당시 내가 무엇을 말하고 싶었는지를 드러냅니다. 가끔 20년 전에 찍은 자기 사진과 마주칠 때가 있잖아요, 나팔바지를 입고 촌스러운 머리 모양을 하고요. 이상한 사람이 아니고서야 그 이미지를 바꾸겠다고 포토샵을 하지는 않겠지요. 사진은 자기 자신이에요, 그러면 정직하지 않아요.
말씀하신 김에, 후세를 위해 그 나팔바지와 촌스러운 머리 사진들을 간직하시나요? 더 구체적으로, 공책, 스크랩 페이퍼, 그리고 초고 뭉치 전부를 후세를 위해 보관하시는지요? 확신하건대 미래 세대가 가즈오 이시구로 아카이브에서 연구하고 싶어할 텐데요.
아니오. 아주 곤란한 질문이로군요. 『남아 있는 나날』을 쓰고 났을 때까지 저는 제의적으로 전부 다 내던져 버리곤 했어요. 사람들이 최종의 소설 외 다른 아무것도 보지 않기를 바랐거든요. 종이 부스러기 하나도 간직하지 않았어요. 감정적으로 모든 것을 잘게 찢어 버렸습니다. 그런데 어떤 도서 수집가가 전화해서는 그러면 실수하는 거라고, 그 자료를 팔면 엄청난 돈을 벌 거라고 하는 거예요. 전부 보관했다가 훗날 텍사스의 호구에게 팔아야 한다고요. 그런 전화 받지 말 걸 그랬어요. 지금은 아무것도 버릴 수 없습니다. 하루 날 잡아서 엄청난 양의 종이 자료를 만든 다음, 일이 마무리되면 마분지 상자에 집어넣고 다락에 올립니다. 이것이 어떤 아카이브가 될지는 모릅니다. 물론 돈은 좀 되겠죠. 하지만 진심을 털어놓자면 이런 것이 누구에게 왜 가치 있을지 이해할 수 없어요. 어떤 사람들에게는 창작과 글쓰기 과정을 추적하는 게 흥미롭겠지만, 그것은 소설을 읽는 데서 얻는 것과 같은 가치를 지니지는 않습니다. 학계에는 이를 위한 별도의 관심 영역이 있겠지요. 하지만 개인적으로 맥락의 특정한 디테일을 알게 되거나 글쓰기 도구와 자료를 샅샅이 탐색한다고 해서 좋아하는 작가들을 읽는 경험이 월등히 고양되는 것 같지 않습니다. 『죄와 벌』 텍스트 배후의 모든 장치를 볼 수 있다고 해서 그 결과로 그것을 더 높게나 더 낮게 평가하게 될지는 모르겠어요. 중요한 것은 글쓰기를 작가와 진지한 독자들 사이의 대화로 간주하는 것이고, 예술 작품의 감상에서 생겨나는 충만과 열광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렇더라도 비평가들은 창작의 여러 단계에서 예술 작품을 분석함으로써 그것의 창작 과정을 추적하는 데 관심을 둡니다. 이러한 분석을 통해 창조성의 본질 및 장인의 역량이 어떻게 영감을 조형하는지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을 테고요. 선생님의 글쓰기에서 단편이나 영화는 장편 소설과 어떤 관계인지 생각해 보기도 흥미롭지요.
제 작품을 아는 분이라면 제가 그다지 다작하지 않는다고 여기실 텐데요. 1982년 이래로 소설은 여섯 권만 출간했지만, 실제로는 아주 많이 쓰고 있습니다. 소설에 가려진 무수한 글쓰기를 실험하고 있지요. 예전에는 장편을 위한 아이디어를 연습하는 방편으로 단편 형식을 사용했어요. 이는 또 하나의 근심스러운 문제인데요. 저는 역사의 남용뿐만 아니라 단편 형식에 대해서도 의식적으로 자각합니다. 집필에 수 년이 걸리는 장편에 온통 심혈을 기울이기보다, 단편에서 어떤 아이디어를 굴리면서 그게 성공하는지 보는 때가 자주 있는데요. 앨리스 먼로나 체홉이 쓰는 식의 단편이 아니라. 제가 쓰는 것은 대개 실제로는 단편이 아니에요. 신속하게 마무리되는 쪽글에 불과한데 이따금 장편 안에 자리를 잡습니다.
영화에 관해서는, 두어 가지 이유로 저 자신을 설명하는 데 대단히 중요합니다. 우선, 소설가가 위험에 빠질 때가 있는데요, 책에서 단 하나의 기획적 관점에 따라 의상 디자이너, 무대 디자이너, 감독, 그 모든 역할을 수행하는데, 세월이 흐르며 때로 지속적으로 영감을 얻기가 어렵다는 것이지요. 만약 음악인을 인터뷰하면, 재즈 연주자라 칩시다, 대화를 나누다 이 즈음에 이르렀을 때 과거에 자기와 함께 연주했던 사람을 일고여덟 쯤 언급했겠지요. 그래서 재즈 연주자로서 내 발전의 역사는 나와 협연한 사람들의 역사가 됩니다. 연극에서도 그렇고, 다른 많은 예술 형식에서도 그렇습니다. 회화와 소설에서 작가는 그저 섬처럼 편협해지고, 다음 단계로 나아가야 하건만 그러지 않을 위험이 있습니다. 많은 작가가 이런 상황에 처하는 것을 보았어요. 만약 그들이 다른 협력적 예술 형식에 참여했다면, 나이가 듦에 따라 자기에 대한 것을 알게 되고 변화에 다른 방식으로 반응했을 거라 생각됩니다. 그러도록 장려하는 기회가 자주 주어지지 않아요. 제가 다른 예술 형식, 무엇보다 영화 일을 좋아하는 까닭은 부분적으로 이를 보상하기 위해서입니다, 영화에서 작가는 창작자의 위계에서 아주 낮은 데 위치하는데요, 영화에서 무엇이 가능한지, 훨씬 더 급박한 기술적이고 상업적인 결정들, 실무적인 결정들에 직면하게 됩니다. 이런 협력은 저에게 아주 소중한 것이지요.
결국, 문제는 작가로서 저의 관점이 아닙니다. 영화는 감독의 매체입니다. 저는 감독을 보조하고요. 사실 〈화이트 카운티스〉는 제임스 아이보리와 제가 공동으로 지은 이야기인데요. 둘이 같이 앉아서 "우리가 진짜로 무엇에 관한 영화를 만들고 싶은 걸까요?" 질문했어요. 그런 다음 "이런 식으로 해볼까요?" 물으며 이야기를 구성했지요. 그렇게 진행되었어요. 아주 협력적인 일이었습니다. 소설가의 관점에서 보면 시나리오 작가로 일하기란 어처구니없이 실망스럽죠. 실제 각색되는 작품에 비해 얼마나 대접을 못 받는지 분개하게 될 거에요. 하지만 그것은 부차적인 것이고, 저는 비교적 상처 받지 않고 일을 해냈고, 그리고 이미 말했듯 저는 진심으로 협력의 경험을 소중히 여깁니다.
다른 층위에서, 그저 영화를 보고 영화 팬 되기, 그리고 때로는 영화에 참여하기, 이는 제 글쓰기 방식에 큰 영향을 행사합니다.
어떤 장면을 상상하려 할 때, 글 쓰는 사람으로서요, 마치 거의 영화적인 장면을 떠올리는 때가 있어요. 하지만 영화 산업에서 실제로 일한 경험이 소설에 실용적으로 많은 도움을 주었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그저 다른 사람들과 일하고 나의 상상력과 예술적 자아를 다른 예술적 자아들과 혼합하는 아주 일반적인 감각의 차원에서 그렇지요. 간접적인 영향이에요. 영화에서 돌아오면 저는 약간 확장되어 있고 제 안에는 무언가 들어와 있는 것입니다.
처음에 어떻게 영화에 참여하시게 되었습니까?
근래의 일은 아닙니다. 첫 소설 출간 후 제가 전업 작가가 될 수 있었던 연유는 채널4에 대본 두 편을 썼기 때문이지요. 텔레비전 드라마였는데 기술적으로 필름으로 찍었어요. 이렇게 시나리오를 쓰면서 밥벌이를 시작했고요. 그때부터 두 가지 경력을 동시에 진행하려 애썼습니다. 여러 해 동안, 아마 20년 동안, 시나리오 한 편을 계속 썼는데, 제목은 『세상에서 가장 슬픈 음악』입니다. 2004년에 드디어 개봉했어요. 이 또한 영화의 특성입니다. 내가 어떤 일을 할 수 있는데, 사람들은 내가 그 일을 한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할지도 몰라요. 그래도 저는 두 가지를 다 하는 게 좋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시나리오 쓰기는 이제 일종의 취미이고, 주업이라 여기지는 않습니다만.
이야기를 다른 방향에서 접근해 보겠습니다. 『남아 있는 나날』을 각색한 영화를 보셨을 때 어떤 느낌이 들던가요?
영화는 책과 연관이 있어야 합니다, 사촌처럼요. 영화는 아주 실용적인 형식이고, 고려해야 할 게 아주 많아요. 누가 스티븐스를 연기할지 같은 것도 그렇죠. 헐리우드에서 찍을 거라는 조건에서, 그렇다면 1990년 미국에서 어떤 영국 배우가 영화를 이끌어갈 수 있을까. 당시에는 세 명뿐이었습니다. 제레미 아이언스, 밥 호스킨스, 그리고 앤서니 홉킨스요. 존 클리즈에게도 역할 제안이 갔을 텐데, 왜냐하면 그가 〈완다라는 이름의 물고기〉로 박스오피스 흥행 재목이 되어서, 다들 그라면 이 영화를 이끌어갈 만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죠. 제 말은 영화계에서는 대부분 이런 것들에 따라 일이 결정된다는 것이에요. 반드시 작가의 관점을 완벽하게 체현할 사람을 찾는 게 아닙니다. 앤서니 홉킨스의 연기는 굉장했어요. 그는 제 머릿속의 스티븐스와 달랐어요. 다른 판본, 다른 유형의 스티븐스를 창조했고, 그래서 저는 스티븐스를 홉킨스 같은 사람이라 상상할 정도에 이르렀어요. 영화는 책의 단순하고 직접적인 번역이 아닙니다. 전적으로 다른 종류의 작업이지요. 일은 대개 그렇게 진행됩니다. 이 같은 것은 이야기 내용에도 적용됩니다. 영화에서 이야기가 어떤 방식으로 종결되는 까닭에는 많고도 많은 비예술적인 요인들이 개입합니다. 책은 거듭 살펴볼 수 있으므로 원하기만 하면 그 모든 비예술적 이유를 뽑아 버릴 수 있고요, 인내심이 있다면요.
선생님의 최신작 『나를 보내지 마』로 돌아가 보면, 서술적 목소리, 형식, 그리고 선생님의 작품에 내재한 진지함과 관련하여, 이 소설은 방금 말씀하신 많은 것들의 압박을 입증하는 것 같습니다.
맞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작품에서 어느 정도 저는 인물들이 감정적으로 살짝 괴벽스럽게 구는 상황을 창조하려 하는데요, 캐시에게도 마찬가지였어요. 예를 들어 스티븐스에게 "여기서 좀 벗어나서 이 여자 분께 데이트를 청하지 그래요?"라고 권할 수 있겠지요. 이것은 일종의 기술이에요. 즉, 인물이 했으면 하는 바로 그 행동을 하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나를 보내지 마』에서 중대한 관건은 인물들이 절대로 반란을 일으키지 않는 것, 그들이 했으면 하는 일을 하지 않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들은 자기 장기가 도륙당하는 기획 체제를 수동적으로 받아들입니다. 이처럼 아주 강력한 이미지를 그린 까닭은 우리 대부분이 여러 면에서 수동적인 성향이 있고 운명을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아마 그 정도까지 받아들이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우리는 생각보다 훨씬 더 수동적이에요.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듯한 운명을 받아들여요. 우리에게 주어진 조건들을 받아들입니다. 저는, 궁극적으로, 우리는 필멸이며 이로부터 도망칠 수 없다는 것, 어떤 순간 이후 우리는 모두 죽을 거라는 것, 우리는 영원히 살 수 없을 거라는 것을 사람들이 어떻게 받아들이는지에 관한 책을 쓰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이에 여러모로 분노가 치밀겠지만, 종국에 우리는 이를 받아들여야 하고 서로 다르게 대응들을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인간 조건을 받아들이고, 늙음을, 편편히 부서짐을, 그리고 죽어감을 받아들이는 방식과 마찬가지로, 『나를 보내지 마』의 인물들이 자기들이 종속된 이처럼 끔찍한 기획 체제에 대응하게 하고 싶었습니다.
여러 면에서, 제 작품이 복잡하다면 이 정도입니다. 저는 진지하되 직설적인 진실에 관심이 있어요. 예를 들어 캐시가 조지 엘리엇의 『다니엘 데론다』를 읽는 장면의 의미에 대해 질문을 받은 적이 있는데요, 거기에는 아무런 실질적인 의미가 없다고 고백해야겠어요. 저는 그저 그 인물이 빅토리아 시대 소설 같은 것을 읽게 하고 싶었고, 『블리크 하우스』라던가 그런 극도로 명백한 것이 아니었으면 했어요. 그 장면은 캐시와 문학의 관계에 대해 무언가를 말해줍니다. 그저 『미들마치』를 읽는 게 아니라 『다니엘 데론다』를 읽지요. 저는 『다니엘 데론다』를 몇 년 전에 읽었는데 무슨 이야기인지 기억하지 못합니다. 그런 식으로 이용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기억나지 않아요. 저는 개인적으로 암시를 사용하기를 좋아하지 않지만, 그래도 어떤 인물이 책을 읽으면 그 책에 제목을 붙여 주어야겠지요, 그를 어떤 시간과 장소에 위치시키듯이요. 그래서 적절한 책을 고르려 하는데, 사람들이 그게 무엇을 반향하는지 알아내려 책을 찾아 읽기를 바라는 것은 아닙니다. 이렇게 말씀드렸어도 그러고 싶으시다면 상관하지 않겠습니다. 그런 작가들이 있고, T. S. 엘리엇 같은 사람도 별다르지 않고, 아무튼 저는 개인적으로 그러고 싶지 않습니다.
이는 상징의 사용과 관련이 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제가 좋아하는 것은 아니에요. 『나를 보내지 마』에서 인물들이 들판에서 작은 배를 발견하는 장면에서 저는 그것을 무언가 대단한 상징으로 의도하지 않았어요. 그것은 죽음이든 무엇이든 표상하지 않습니다. 그저 그런 장면이 필요했어요. 그게 감정적으로 맞는 것 같았어요. 저는 실제로 노퍽의 습지 어딘가에서 땅으로 밀려온 배를 본 적이 있는데, 눈에 자꾸 맴도는 광경이었어요. 저는 인물들로 하여금 이런 경험을 하게 하고 싶었습니다, 글래스톤베리에 가는 것보다는, 그들의 삶에서 무언가 문화적인 사건이라 할 만한 것으로서요. 제가 보기에 이는 전적으로 맞았습니다. 낡은 고기잡이 배에는 무언가가 있어요, 바다에 나간 지 오랜 세월이 지나, 주변의 땅은 다 말라붙었고, 아이들은 그런 이야기를 하며 그것을 보면서 자기들의 삶에 대해 생각하지요. 그리고 말합니다, "음, 우리는 이것을 보았어," 그러고는 떠나요. 그게 제가 바란 것처럼 느껴졌어요.
저는 음악인이 되고 싶었던 적이 있고 지금도 연주를 합니다. 그런 장면에 대한 저의 대답은 음악인이 해줄 만한 대답이에요. "그 독주는 왜 그렇게 했나요?" 또는 "그 악절을 왜 그렇게 작곡했나요?"라 물을 때요. 저는 논리적인 대답을 드릴 수 없습니다. 오로지 음악인이 말하는 방식으로만 말할 수 있습니다. 그게 음색으로나 감정으로나 저에게 좋게 들리니까요. 그게 제가 원한 것이니까요. 작가로서 무수한 결정을 하는데, 그것은 "메타포를 의도했습니다"라거나 "그래야 하는 것이니까요"라거나 "T. S. 엘리엇의 메아리지요" 같은 간단한 대답으로 진정 뒷받침할 수 없습니다. 무언가 선을 그리기 시작하면, 그것은 어떤 식으로만 이루어져야 하고, 다른 아무것은 안 될 때가 있습니다. 왜 그런지는 말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이렇게 연주해야만 한다고 말하는 음악인과 흡사해요. 왜냐하면 그렇게 해야 맞게 들리고, 그렇지 않으면 맞지 않을 테니까요. 저는 그저 그 배가 자아내는 분위기 때문에 그것을 원했어요. 더 말할 수 없어서 미안합니다.
? Sean Matthews, 2010, "I'm Sorry I Can't Say More: An Interview with Kazuo Ishiguro," Continuum, an imprint of Bloomsbury Publishing Plc.
윤경희는 문학평론가이자 번역가로 파리 8대학에서 비교문학을 공부했다.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문학과 예술을 가르친다. 산문집 《분더카머》와 《그림자와 새벽》을 썼고, 앤 카슨의 《녹스》와 그림책 여러 권을 우리말로 옮겼다.
PADO는 국제정세 뿐만 아니라 해외 문학 소개도 꾸준히 해나가고 있습니다. 그 일환으로 현대 영미시, 에세이에 이어 해외 주요 작가 인터뷰의 소개를 시작합니다. 그 첫 번째는 윤경희 문학평론가·번역가의 2017년 노벨문학상 수상자 가즈오 이시구로의 인터뷰 번역·소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