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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레는 50년이 지난 지금도 쿠데타의 여파에 흔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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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픽=PADO

2023.10.06 13:02

The Economi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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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데타로 집권해 인권 유린을 일삼았지만 경제 성장의 토대를 닦은 군부를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요? 한국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한국의 첫 자유무역협정 상대국인 칠레도 쿠데타를 어떻게 볼 것인가에 대해 분열을 겪고 있습니다. 오히려 한국은 이제는 어느 정도 쿠데타에 대한 합의가 형성된 반면 칠레의 분열은 아직 현재진행형입니다.


그 중심에는 쿠데타에 끝까지 저항했던 사회주의자 대통령 살바도르 아옌데가 있습니다. 아옌데의 비극적인 최후는 그를 정치적으로 냉정히 평가해야 할 역사적 인물보다는 신화적 인물로 만들었습니다. 이는 아옌데를 추앙하는 37세의 젊은 정치인 가브리엘 보리치를 대통령으로 만든 요인이기도 했습니다. 쿠데타 50주년을 맞아 아옌데를 재평가하려는 시도도 있었습니다. 아옌데 정부의 기술 정책을 긍정적으로 재평가한 예브게니 모로조프의 팟캐스트 시리즈 '산티아고 보이즈The Santiago Boys'는 FT를 비롯한 많은 매체의 호평을 받기도 했습니다.


쿠데타 후 민주주의를 회복한 이후에도 칠레는 꾸준한 경제성장을 기록해 '남미의 모범생'이란 평가를 받았지만 최근에는 더딘 성장과 분배의 문제로 사회가 불안정해지고 있습니다. 보리치 정부의 헌법 개정 시도는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매우 급진 좌파적인 개정안을 내놓았다가 국민투표에서 참패를 당했고, 그 여파로 극우파가 헌법위원회를 휩쓸면서 이번에는 극우적으로 기울어진 개정안을 내놓은 상태입니다. 칠레의 정치가 국민 대다수가 동의할 수 있는 비전을 제시할 수 있을지 두고 봐야하겠습니다.


칠레의 쿠데타는 거친 흑백의 이미지로 역사에 새겨져 있다. 1973년 9월 11일 아침 칠레 공군의 호커 헌터 제트기가 로켓을 발사하자 산티아고 중심부에 있는 대통령궁 라모네다La Moneda에서 연기 구름이 피어오른다. 탱크가 주변 거리를 순찰하고 군인들이 머리에 손을 얹은 민간인 포로 수백 명을 끌고 간다. 선거로 당선된 사회주의자 대통령 살바도르 아옌데가 트위드 재킷과 철모를 쓰고 라모네다에서 권총을 휘두른다. 오후 2시가 되자 그는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그리고 전 세계는 곧 아우구스토 피노체트 장군의 이름을 알게 된다. 그는 아옌데에 대한 폭력 쿠데타의 주역이었고 향후 17년간 칠레를 독재로 통치한다.


라틴아메리카를 비롯한 전 세계에서 칠레의 쿠데타는 상징적 의미를 빠르게 획득했다. 칠레 국민들이 쿠데타 5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준비하는 지금, 쿠데타의 여운은 여전히 남아 있다. 칠레의 국가수반인 젊은 좌파 대통령 가브리엘 보리치는 아옌데의 팬임을 결코 숨기지 않는다. 취임식 당일, 그는 라모네다 뒤편에 있는 아옌데의 동상에 경의를 표하고 지지들에게 한 연설에서 그를 언급했다.


그러나 아옌데가 여전히 불러일으키는 논란으로 인해 정부의 50주년 기념 계획은 차질을 빚고 있다. 대통령이 쿠데타에 대한 "거부를 상징하는 국가적 의식"을 준비하기 위해 임명했던 언론인 파트리시오 페르난데스는 "[쿠데타가] 왜 일어났는지는 역사적으로 계속 논쟁이 될 것"이란 발언으로 공산당으로부터 비판을 받고 7월에 사퇴했다.


칠레는 분열된 듯하다. 보리치 정부는 지난해 부분적으로 피노체트가 만든 칠레 헌법을 개정하려 했지만 국민투표에서 무려 62%의 반대로 부결됐다. 최근 여론조사에 따르면 쿠데타가 민주주의를 파괴했다고 생각하는 응답자는 42%에 지나지 않았고 36%는 쿠데타가 마르크스주의로부터 칠레를 해방시켰다고 답했다. 2006년에는 이렇게 답한 이들이 각각 68%, 19%였다.



국론의 분열은 여전히 해소되지 않은 의문을 반영한다. 칠레와 다른 국가들의 좌파를 반세기 동안 괴롭혀온 의문 하나는 아옌데의 전복이 단순한 군사적 패배였는지, 아니면 무엇보다도 정치적 실패였느냐다. 이와 연관된 두 번째 의문은 쿠데타를 피할 수 있었느냐다.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아옌데 정부가 전복되기 전 천여 일 동안을 되돌아보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산티아고 로이터=뉴스1) 김성식 기자 = 군부 쿠데타 발발 50주년을 맞은 11일(현지시간) 칠레 수도 산티아고의 대통령궁(라 모데나)에서 가브리엘 보리치 대통령이 아우구스토 피노체트 독재 정권에 의해 희생된 이들을 위해 묵념하고 있다. 2023.9.11.  ⓒ 로이터=뉴스1  Copyright ? 뉴스1.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산티아고 로이터=뉴스1) 김성식 기자 = 군부 쿠데타 발발 50주년을 맞은 11일(현지시간) 칠레 수도 산티아고의 대통령궁(라 모데나)에서 가브리엘 보리치 대통령이 아우구스토 피노체트 독재 정권에 의해 희생된 이들을 위해 묵념하고 있다. 2023.9.11. ⓒ 로이터=뉴스1 Copyright ? 뉴스1.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1970년에 당선된 아옌데는 의회를 통해 평화적으로 혁명을 수행하려는 '사회주의를 향한 칠레의 길'을 선포했다. 그러나 그의 정당연합인 인민연합Unidad Popular (UP)은 의회 과반수를 확보하지 못한 상태였다. 이로 인해 칠레는 분열되고 혼란에 빠졌다. 많은 칠레 국민과 대다수 정치인들은 쿠데타를 환영했다. 군부가 질서를 회복하고 새로운 선거를 치를 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아옌데를 민주주의의 순교자이자 세계적인 좌파의 상징으로 만든 것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쿠데타의 잔인함과 그 여파였다. 이후 민주 정부 하에서 이루어진 조사에 따르면 피노체트 군부 정권은 2130명을 살해하고 적어도 3만 명을 고문했다. 다른 하나는 오전 9시 10분 라모네다에서 방송된 아옌데의 저항적인 마지막 대국민 연설이었다. 7분도 채 되지 않는 짧은 연설이었지만 그의 목소리는 배경에서 들리는 고함소리 속에서도 침착하고 차분했다. "저는 사임하지 않을 것입니다." 아옌데는 선언했다. "국민의 애국심에 제 목숨으로 보답하겠습니다... 항상 기억하십시오. 더 나은 사회를 만들기 위해 자유인들이 오가는 위대한 길은 조만간 다시 열릴 것입니다."


살바도르 아옌데는 복잡하고 모호한 인물이었다. 의사였던 그는 자칭 '마르크스주의 사회주의 대통령'이기도 했지만 많은 연인을 두고 화려한 삶을 즐기는 남성이기도 했다. 그는 쿠바의 혁명 지도자 피델 카스트로와의 우정에 기뻐하며 그를 칠레로 초청해 20일 동안 칠레를 여행할 수 있게 했다. 아옌데가 생각한 사회주의는 기존의 사회경제적 질서를 해체하고 이를 국가 통제로 대체하는 것이었다. 이는 스칸디나비아식 사회민주주의가 아니라 혁명과 계급 투쟁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는 경험이 풍부한 칠레 국회의원이자 전 상원 의장이었으며 정중하며 매력이 넘치는 사람으로, 자신의 정치적 '무녜카mu?eca', 다시 말해 협상력과 자신의 뜻을 관철하는 재능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합법적으로 혁명을 이루겠다고 주장했다.

냉전의 대결

칠레가 라틴아메리카에서 두각을 나타낸 이유는 1932년부터 안정적인 문민 정부를 운영해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경제는 미국인 소유의 구리 회사에 의존하고 있었고 농업은 비효율적인 대농장이 지배하고 있었다. 아옌데의 전임자인 기독교민주당 에두아르도 프레이는 토지 개혁과 구리의 부분적 국유화를 통해 이를 바꾸기 위해 노력했다. 아옌데는 네 번째 대권 도전이었던 1970년에 당선됐는데 당시 선거 결과는 칠레 국민의 선택이 좌파쪽으로 크게 변화한 게 아니었다. 그는 300만 표 중 36%만 얻었는데 이는 보수파 경쟁 후보보다 겨우 3만9000표 더 많은 것이었다. 당시 칠레 헌법은 결선 투표를 허용하지 않았다. 의회가 그를 대통령으로 확정했다.


인민연합UP은 공산당과 아옌데가 속한 사회당, 그리고 여러 소규모 그룹으로 이뤄져 있었다. 사회당은 1967년 전당대회에서 당원 과반수가 마르크스-레닌주의 정당을 선언하고 혁명적 폭력을 지지한 바 있다. 인민연합에 속하지는 않았지만 인민연합보다 좌파적인 그룹에는 쿠바에서 영감을 받은 도시 게릴라 조직 '혁명좌파운동Movimiento de Izquierda Revolucionaria (MIR)'이 있었다.



아옌데는 재임 기간 동안 인민연합의 공약 사업을 실시했다. 야당의 지원을 받아 구리의 국유화를 완료했지만 150개 이상의 대기업에 대한 국유화를 명령하기 위해 법적 편법에 의존했다. "이 정도 규모의 변화가 과연 가능했을까요? 처음에는 가능했습니다. 하지만 곧 통제 불능 상태가 되었습니다." 아옌데 정부 말기 광업부 장관이었던 세르히오 비타르Sergio Bitar는 말했다. 당의 극렬세력은 수많은 사업체와 농장, 심지어 주택까지 점령했다. 거시 경제 정책은 무모할 정도로 포퓰리즘적이었으며 큰 폭의 임금 인상과 공공 일자리 확대를 위한 재원은 돈을 찍어내는 것으로 조달했다. 공기업은 부실하게 운영되어 돈을 낭비했다.


미국의 리처드 닉슨 행정부는 라틴아메리카에 '제2의 쿠바'가 생겨났다고 보고 긴장했다. 그는 칠레 경제를 "비명을 지르게" 하라고 CIA에 지시했다. 미국은 칠레에 대한 대출을 차단했다. CIA는 트럭 운전사와 상점 주인들의 파업을 조직한 야당에 자금을 댔다. 1973년 칠레는 한계점에 도달했다. 아옌데의 정책과 유토피아적 비전은 많은 칠레 국민의 마음을 잡았고고 인민연합은 1973년 3월 국회 선거에서 43%의 득표율을 기록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많은 사람들이 우려했다. 부실한 관리로 인해 인플레이션(연간 600%까지 치솟았다)과 공급 부족, 배급 사태가 발생했다. 아옌데는 군 수뇌부를 정부에 참여시켰지만 정치적 양극화와 좌우 극단주의 단체의 폭력 증가를 막는 데는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했다. "적어도 칠레의 절반에게는 매우 두려운 시기였습니다." 칠레의 은행가이자 외교관인 데이비드 갤러거는 말한다.


아옌데는 인민연합의 인질이었고 인민연합은 분열된 상태였다. 공산주의자들은 신중했다. 전술적인 이유도 있었고 소련의 노선이 그러했기 때문이었다. 반면 혁명좌파운동MIR의 영향을 받은 사회당 지도부는 더 빠른 개혁을 원했다. 아옌데는 갈팡질팡했다. 가장 좋은 방법은 중도 성향의 기독교민주당과의 합의였다. 올해 사후 출간된 회고록에서 기독교민주당의 당수이자 나중에 칠레에서 민주주의가 회복된 후 첫 대통령을 지낸 파트리시오 아일윈Patricio Aylwin은 아옌데와의 세 차례 만남에 대해 기록했다. "양자택일을 해야 합니다." 아일윈은 아옌데에게 말했다. "우리와 혁명좌파운동 둘 다와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순 없어요." 아옌데는 자신이 대통령으로 있는 동안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없을 것"이라고 아일윈을 안심시켰지만 실상 인민연합의 많은 구성원들이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추진하고 있었다. 아일윈은 이렇게 반문했다. "정부가 당신이 여러 차례 말했던 것과 정반대로 행동하는데 어떻게 당신을 믿을 수 있겠습니까?"


의회의 야당 다수는 아옌데가 국유화를 규제하는 헌법 개정안을 공포하지 않음으로써 헌법을 위반했다고 선언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아옌데가 헌법 개정안을 선포했다면 국가가 공장과 농장을 반환하게 되었을 것이다. 9월 10일, 비타르 광업부 장관은 아옌데 대통령과 비공개 오찬을 가졌는데 이 자리에서 아옌데 대통령은 정부의 미래에 대한 국민투표를 실시하기로 결정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때는 너무 늦었다. 군 지도부는 이미 쿠데타 준비에 착수했고 피노체트 장군은 마지막 순간에 쿠데타에 가담했다.


결국 아옌데는 기독교민주당과의 합의를 통해 인민연합을 분열시키기보다는 쿠데타의 위험을 감수하는 것을 택했다. "그때와 마찬가지로 나는 지금도 당시 민주주의를 구할 기회가 있었다고 생각한다." 아일윈은 회고록에 썼다. "그러기 위해서는 많은 합리성이 필요했지만 불행히도 그만한 합리성은 존재하지 않았다."


군대가 정치인들에게 좀 더 시간을 줄 수 있었을까? 그들은 자신들만의 환영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들은 극좌파가 쿠바의 도움을 받아 대량의 무기를 비축하고 전사들을 훈련시키고 있다고 믿었다. 일부는 사실이었지만 (이코노미스트를 포함한) 언론 일각에서 우려했던 것만큼은 아니었다. (1973년 당시 본지 보도는 칠레에 내전이 임박했다는 우파의 주장에 지나치게 신빙성을 부여했고 극좌파 무장단체의 규모를 과장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아옌데 정부에 대한 본지의 초기 논조는 노골적인 부정보다는 회의적인 입장이었다. 본지는 쿠데타가 "유감스럽지만 불가피했던 것"이라고 생각했고, 많은 칠레 국민들이 이에 동의하긴 했으나 일각에서는 본지의 논조를 비판했다.)



(산티아고 로이터=뉴스1) 김성식 기자 = 군부 쿠데타 발발 50주년을 맞은 11일(현지시간) 칠레 수도 산티아고의 국립 경기장에서 시민들이 아우구스토 피노체트 독재 정권에 의해 희생된 이들을 기리기 위해 촛불을 밝히고 있다. 피노체트 재임 기간 이곳 경기장 건물에선 고문과 구금이 이뤄졌다. 2023.9.11.   ⓒ 로이터=뉴스1  Copyright ? 뉴스1.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산티아고 로이터=뉴스1) 김성식 기자 = 군부 쿠데타 발발 50주년을 맞은 11일(현지시간) 칠레 수도 산티아고의 국립 경기장에서 시민들이 아우구스토 피노체트 독재 정권에 의해 희생된 이들을 기리기 위해 촛불을 밝히고 있다. 피노체트 재임 기간 이곳 경기장 건물에선 고문과 구금이 이뤄졌다. 2023.9.11. ⓒ 로이터=뉴스1 Copyright ? 뉴스1.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피노체트는 나중에 "실제 전투는 4시간 정도 치러졌다"고 발표했다. 내전은 없었다. "피노체트가 일으킨 폭력은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하기 위한 필사의 수단이 아니라 독재 정권의 잔혹한 권력 장악이었다." 훗날 외무장관이 되는 사회주의자 에랄도 무뇨스Heraldo Mu?oz는 회고록에서 이렇게 표현했는데 옳은 지적이다.


그 누구도 앞으로 닥칠 공포를 예상하지 못했다. "1973년 칠레의 정치계에서는 서로가 서로를 잘 알고 있었는데 우리들에게 정말 충격적이었죠." 전 재무부 장관인 안드레스 벨라스코는 말했다. 피노체트는 동료 군부 인사들을 재빨리 권력에서 배제하고 개인 독재 체제를 구축했다. 그는 칠레에서 마르크스주의를 일소하기로 결심했다. 또한 민주주의가 마르크스주의를 번성하게 만들었다고 믿고 그 또한 없애버리기로 했다. 그는 무자비하게 비밀경찰을 국가 테러의 도구로 만들었다. 여러 라이벌 장성들이 의문스러운 정황에서 사망했다. 비밀경찰은 워싱턴DC에서 노골적인 테러 공격을 가해 아옌데의 국방부 장관 오를란도 레텔리에르Orlando Letelier를 살해했다. 도서관에서는 마르크스주의 저작 뿐만 아니라 JK 갤브레이스 같은 미국식 리버럴들의 저작도 사라졌다.


피노체트의 경제 정책은 또 다른 충격이었다. 대부분의 라틴아메리카 군대는 국가 주도의 산업화를 신봉했다. 그러나 피노체트는 '시카고 보이즈'를 기용했다. 칠레 가톨릭대학교에서 운영하는 교환 프로그램으로 시카고대학교에서 교육받은 젊은 기술관료들이었다. 그들은 밀턴 프리드먼의 제자로 자유시장주의자였다. 그들은 관세장벽과 통제를 허물고 구리 산업을 제외한 모든 것을 민영화했다(구리 산업의 수익은 부분적으로 군대에 전달됐다). 실수도 있었다. 고평가된 고정 환율과 금융 대기업에 만연한 내부자 대출로 인해 1982년 경제 위기를 맞았다. 이후 경제는 보다 실용적인 관리 아래 회복되었다.


무뇨스 전 장관은 피노체트가 기업가 정신, 이윤 동기, 시장 메커니즘 및 수출을 허용함으로써 칠레를 "경제를 지속적인 성장 궤도에 올려놓았"음은 인정한다. 그러나 그는 피노체트가 기본적인 공공 서비스 조차 이윤에 의해 지배되는 '시장 사회'를 만들었다고 비판한다. 이는 최근 칠레에서 불만의 근원이 되고 있다. 그리고 피노체트도 다른 독재자들과 마찬가지로 개인적으로 부패한 것으로 밝혀진다. 그가 다시 역사에 이름을 남긴 것은 1998년으로, 스페인 판사가 치료를 위해 런던에 머물고 있던 피노체트에 대한 체포 영장을 발부했다. 영국 정부는 결국 그를 칠레로 돌려보냈고, 그곳에서 그는 정치범 실종 및 고문 혐의로 기소되어 가택 연금에 처해졌다. 이 사건은 반인도적 범죄에 대한 보편적 관할권이라는 개념의 이정표가 됐다.

쿠데타의 여파

망명지에서 망자를 애도하며 좌파는 인민연합 시절을 반추했다. 공산당은 쿠데타를 군사적 패배로 간주하고 자신들의 방심과 인민연합이 무장하지 않았던 점을 탓했다. 이후 공산당은 폭력 혁명을 추구하기 시작했다. 공산당이 조직한 게릴라 단체는 1986년 피노체트 살해에 성공할 뻔했다(이로 인해 또 다른 탄압이 시작됐다). 많은 사회당원들은 다른 방식의 자아비판을 했다. 인민연합의 전략에서 결정적인 실수를 찾은 것이다. 첫 번째는 정치적 또는 대중적 과반의 지지 없이 그토록 급진적인 정책을 추구했던 것이다. 두 번째는 중산층을 경멸하고 그 지지를 잃었다는 점이다. 이는 칠레 민주주의가 사회 개혁과 보다 평등한 사회를 이미 달성했음을 인식하지 못한 경직된 마르크스주의적 시각에서 비롯됐다.


정치범으로 피노체트의 강제수용소에서 1년 넘게 수감됐던 비타르 전 장관은 인민연합의 또 다른 실수는 냉전의 현실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것이라고 지적한다. 미국의 완강한 반대에 직면한 아옌데 정부는 소련이 자신들을 구제해 줄 것이라고 여겼다. 소련이 아옌데의 선거 운동과 칠레 공산당에 자금을 지원하기는 했지만 아옌데의 대규모 원조 요청에는 주저했다. 소련은 이미 카스트로의 쿠바를 유지하는 데 감당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비용을 지출하고 있었다. 베트남에 몰두하던 마오쩌둥의 중국도 아옌데의 요청을 거절했다. 국내 정치 개입을 꺼리는 입헌주의 전통에도 불구하고 군대는 일단 개입을 시작하자 냉전 시대의 '국가 안보 교리'에 따라 좌파를 척결해야 할 적으로 간주했다.


이에 대한 반성에서 1973년 당시에는 불가능했던 사회당과 기독교민주당 간의 연정이 이루어졌다. '콘체르타시온Concertaci?n('제휴'라는 뜻)'으로 불리는 이 정당간 협력는 1988년 피노체트가 자신의 연임을 묻는 국민투표를 실시했다가 패배한 후 칠레의 민주주의 복귀를 이끌었다. 콘체르타시온은 이후 큰 성공을 거두며 20년 간 집권했다. 콘체르타시온은 집권 후 피노체트의 시장 경제를 유지하면서 보더 엄격한 재정 정책과 더 많은 사회 서비스를 공급했다. 특히 아옌데 이후 최초의 사회주의자 대통령이었던 리카르도 라고스Ricardo Lagos 대통령 시절이 그랬다. 그는 1980년 피노체트의 헌법을 개정해 비민주적인 조항을 삭제했다. 칠레는 전 세계 대부분의 국가와 자유무역협정을 체결했다. 1990년부터 2012년까지 칠레 경제는 연평균 5% 이상의 성장률을 기록했다. 빈곤율은 1990년 68%에서 2022년 7%로 감소했다(그래프 참조).


칠레의 지난 50년간 연간 GDP 성장률  그래프(위)와 칠레의 빈곤 인구율 그래프.

칠레의 지난 50년간 연간 GDP 성장률 그래프(위)와 칠레의 빈곤 인구율 그래프.


그러나 콘체르타시온의 성공은 자기 자신의 발목을 잡았다. 보다 빠른 발전에 대한 기대감을 불러일으킨 것이다. 2011년의 학생 시위는 특히 질 낮은 사립대학의 높은 등록금을 겨냥한 것이었다. 공군 장성이었던 아버지가 피노체트의 손에 사망했던 사회주의자 대통령 미첼 바첼레트Michelle Bachelet는 학생 시위에 대한 대응으로 2014년 연립정부를 확대하여 공산당을 끌어들였다. 그는 콘체르타시온이 '신자유주의'에 지나치게 관대하다고 주장하는 좌파의 '자기학대꾼auto-flagelante'들에 공감했다. 현 보리치 대통령의 정당을 포함한 신생 좌파 정당의 연합(공산당과 동맹이기도 하다)인 '프렌테암플리오Frente Amplio('확대전선'이라는 뜻)'도 같은 입장이었다.


경제 성장이 둔화되고 중도 우파 정부가 집권하면서 2019년에는 불만이 '사회적 폭발'로 끓어올랐다. 대규모 평화 시위와 폭력 시위가 모두 발생했다. 거리의 분노를 진정시키기 위해 보수 정부는 새로운 헌법을 작성하기 위한 협의체를 만들기로 합의했다. 시위에 힘입어 보리치는 2021년 선거에서 승리했다. 프렌테암플리오의 많은 이들은 스스로를 콘체르타시온의 후계자라기보다는 아옌데의 후계자로 여겼다. 그들은 어떤 측면에서 인민연합의 개헌 계획을 상기시키는 헌법 초안을 작성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정치학자 다니엘 만수이Daniel Mansuy가 새 책에서 지적한 것처럼 아옌데가 정치적 프로젝트가 아닌 신화가 되어버렸다는 게 문제다. 프렌테암플리오의 헌법 초안은 작년에 압도적인 표차로 부결됐다. 프렌테앰플리오의 실패는 자신들과 정반대인 강경 우파 호세 안토니오 카스트Jos? Antonio Kast와 공화당의 부상을 야기했다. 카스트는 과거 독재 정권에 대해 유감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공화당은 5월에 치러진 새 헌법위원회 선거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었으며 새 헌법 초안은 12월 투표에 부쳐질 예정이다. 오늘날 칠레에서는 10년 전보다 '1973년'의 의미에 대한 합의가 덜 이루어진 상태다.

배운 교훈과 잊혀진 교훈

하지만 칠레는 1973년에 비해 크게 달라졌다. 2019년의 양극화와 폭력에 대한 정치인들의 대응은 평화적 해결을 위한 광범위한 합의를 모색하는 것이었다. 프렌테암플리오와 가까운 연구원 노암 티텔만Noam Titelman은 신좌파는 인민연합과 달리 자유민주주의를 옹호한다고 말한다. 어려움에 직면했을 때 보리치 대통령은 콘체르타시온 출신들을 정부에 기용해 중도로 방향을 전환했다. 헌법 변호사인 이사벨 아니나트Isabel Aninat는 카스트에 대한 지지는 독재 정권의 부활에 대한 열망이라기보다는 안보, 범죄, 이민에 대한 우려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말한다.


아옌데와 피노체트가 정치적 영감의 원천이 아니라 순수한 역사적 인물로 남아 칠레가 미래를 바라볼 수 있게 된다면 더 좋은 일일 테다. 물론 여전히 어려운 일이다. 아옌데 정부는 엄청난 정치적 실패였다. 그러나 쿠데타 50주년 기념행사를 준비했었던 언론인 페르난데스의 말마따나 "우리가 동의할 수 있는 것은 쿠데타 이후 일어난 일은 용납할 수 없다는 것"이다.

1843년 창간돼 국제정세와 정치, 경제, 사회까지 폭넓게 다루고 있는 영국의 대표적인 주간지. 정통 자유주의 성향의 논평, 분석이 두드러지며 기사에 기자의 이름(바이라인)을 넣지 않는 독특한 전통을 가지고 있습니다. PADO가 가장 탐독하는 매거진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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