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3.08 14:39
바스프BASF는 분자를 다루는 기업이다. 90여 개국에서 영업하는 세계 최대의 화학 기업으로 많은 화학 제품을 생산한다. 바스프에서 생산하는 화학 제품의 분자에 탄소 원자가 포함되어 있는 경우(실제로 많은 분자가 탄소 원자를 포함하고 있으며 탄소 원자는 놀라울 정도로 용도가 다양한 자원이다) 이런 탄소 원자는 보통 화석연료에서 나온다. 제조 과정에 고온이 필요한 경우가 잦은데 그 고온은 화석연료를 태워 만드는 경우가 많다. 최근까지 독일 루트비히스하펜Ludwigshafen에 위치한 바스프의 대규모 공장은 독일 전체 천연가스 소비량의 4%를 사용했다.
이런 규모의 공장에서는 발생하는 이산화탄소 분자의 수를 크게 줄이기란 어렵다는 게 통념이다. 탈탄소화를 위해서는 그 대신 '탄소 포집 및 저장'(CCS) 기술로 이러한 분자들을 모아 지하에 폐기해야 한다는 것이다. 통념에 따르면 천연가스 분자를 태워 열을 발생시키는 것을 포기하고 대신 수소 분자를 태우는 것이 친환경적인 대안이 될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수소 분자 또한 에너지 집약적인 공정으로 생산되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최근 "에너지 집약적 제조업의 탈탄소화는 전기화를 통해서만 달성할 수 있다"는 마틴 브루더뮐러Martin Brudermüller 바스프 회장의 선언은 많은 사람들에게 궤변처럼 들린다. 전기는 집과 전구, 그리고 어쩌면 자동차를 굴리는 데는 쓸 수 있을지 몰라도 엄청난 양의 화석 연료를 태우는 중공업에 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런 주장을 하는 이가 브루더뮐러 혼자만은 아니다.
바스프는 사우디의 화학 기업 사빅SABIC과 유럽의 엔지니어링 기업 린데Linde를 포함한 컨소시엄에 합류해 자사의 주력 사업인 화학 공업에 충분한 열을 발생시킬 수 있는 전기로를 개발했다. 최근 제조업에서 전기화로 전환한 기업은 이들만이 아니다. 2024년 2월 8일 거대 광산 기업 리오틴토Rio Tinto와 BHP는 호주 최초의 철광석 전기 제련소의 공동 건설 계획을 발표했다. 또 다른 거대 광산 기업 포르테스큐Fortescue는 전기 굴삭기와 광산용 전기 트럭을 도입하고 있으며, 스페인의 로카 그룹Roca Group은 최근 최초의 세라믹용 전기 터널 가마를 공개했다. 이러한 혁신은 지구 온난화를 늦추는 새로운 길을 제시하며, 많은 경우 이산화탄소와 수소를 기반으로 하는 접근 방식보다 더 빠르고 쉽게 목표를 달성할 수 있다.
[PADO '언더그라운드 엠파이어' 북콘서트가 11월 30일(토) 광화문에서 열립니다! (안내)]
산업 실패
국제에너지기구(IEA)에 따르면 제조업은 전 세계 에너지의 3분의1을 소비하며 그 중 열 발생이 4분의3을 차지한다. 그 열의 무려 90%가 화석연료를 태워서 만들어진다. 이 모든 것으로 인해 제조업은 발전이나 운송 부문보다 더 큰 온실가스 배출원이다. 게다가 발전으로 인한 이산화탄소 배출량은 정점에 도달한 것으로 보이며 전기차가 계속 보급되면 운송 부문의 탄소 배출량도 곧 증가세를 멈출 수 있는 반면, 제조업 부문의 배출량은 무한정 증가할 것으로 예상된다(차트 1 참조).
선진국 정부들은 탄소 배출량을 줄이겠다는 공약을 지키기 위해 제조업 탈탄소화에 가장 큰 도움이 될 것으로 예상되는 수소와 CCS 기술에 보조금을 지급하고 있다. 하지만 지금까지는 두 기술 모두 실망스러웠다. 한편 전기화는 두 가지 이유로 오랫동안 외면받았다. 첫째, 중공업에 필요한 매우 높은 고온과 증기는 전기로 생산하기 어렵거나 생산이 가능하더라도 비경제적이다. 둘째, 시멘트와 철강을 만드는 표준 기법에는 탄소가 투입되어야 하므로 청정 전기가 화석연료 연소를 대체하더라도 이산화탄소 배출은 불가피하다.
그러나 컨설팅 업체 맥킨지는 유럽이 탄소중립 목표를 고수할 경우 2050년까지 유럽에서 예상되는 탈탄소화의 44%가 전기화에서 비롯될 것이며, 이는 수소와 CCS 기술의 비중을 합친 것보다 2배 이상이라고 예측한다. 아직 널리 알려지지 않은 기술에 대해 왜 그렇게 낙관적일까?
제프리 리스먼Jeffrey Rissman은 신간 '탄소 제로 제조업Zero-Carbon Industry'에서 여러 가지 이유로 인해 전기화가 갑자기 다시 주목받고 있다고 주장한다. 가장 뚜렷한 이유는 풍력 및 태양광 발전 비용이 현저하게 하락한 덕분에 친환경 전기가 훨씬 저렴하고 널리 보급되었다는 점이다. 또 다른 요인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 따른 글로벌 가격 충격으로 천연가스 의존에 대한 경계심이 커지고 있다는 점이다. 일례로 독일에서는 가스 공급이 너무 부족하여 정부가 바스프와 같은 제조업 부문 사용자에게 배급제로 공급하는 방안까지 고려했다.
하지만 전기화에 대해 다시 생각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혁신이다. 전기로 물건을 뜨겁게 만드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전기 주전자를 떠올려 보라. 이러한 기술은 그 규모를 확장하는 것도 어렵지 않다. 끓는 물의 양을 10배로 늘리고 싶다면 주전자 10개를 준비하거나 더 큰 주전자를 하나 더 구입하면 된다. 하지만 100°C가 아닌 1000°C를 원한다면 최근까지 전기로 할 수 있는 방법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이젠 상황이 달라지고 있다.
전기화의 길
최대 200°C의 온도를 원할 경우 가장 주목받는 기술은 전기 주전자가 아니라 제조업용 히트펌프다. 히트펌프는 냉장고처럼 한 공간에서 다른 공간으로 열을 이동시킨다. 냉장고는 내부에서 열을 제거하고(내용물을 더 차갑게) 외부로 배출(주방을 조금 더 따뜻하게)한다. 가정 난방용으로 점점 더 보편화되고 있는 히트펌프는 외부에서 열을 받아 내부로 이동시킨다. 이러한 방식으로 열을 이동하는 데 필요한 에너지의 양이 직접 가열하는 데 필요한 양보다 적기 때문에 에너지를 크게 절약할 수 있다. 그리고 기술이 발전하고 매출이 증가함에 따라 가격이 하락하고 있다.
[PADO 트럼프 특집: '미리보는 트럼프 2.0 시대']
일부 기업은 가정에서 효과가 있다면 공장에서도 효과가 있으리라는 데 돈을 걸고 있다. 미국 맥주 제조업체 뉴벨지엄브루잉New Belgium Brewing의 탄소 배출량을 줄이는 것을 목표로 하는 스타트업 애트모스제로AtmosZero가 그 중 하나다. 애트모스제로는 콜로라도주 포트콜린스Fort Collins에 있는 뉴벨지엄 양조장의 가스 보일러를 곧 대체할 히트펌프를 설치 중이다. 지난 150년 동안 대부분의 제조업체와 마찬가지로 뉴벨지엄도 화석연료를 연소시켜 증기를 생산하고, 이를 통해 맥주를 만드는 데 필요한 재료를 가열한다. 애트모스제로의 히트펌프는 연소 없이 증기를 생성할 수 있다. 펌프를 가동하는 데 사용되는 전기는 향후 재생에너지로 전환될 것이므로 이 과정에서 발생하는 대부분의 온실가스 배출을 제거할 수 있다. 또한 전체적으로 에너지 소비가 적어 더 효율적이기도 하다. 또한 히트펌프는 기존 보일러와 마찬가지로 온기를 물에 전달하기 때문에 뉴벨지엄의 기존 공장 시설을 전면적으로 개조하지 않더라도 장비 설치가 가능하다.
이러한 히트펌프는 200°C 미만의 열을 필요로 하는 광범위한 제조업 공정을 전기화하여 화석연료를 사용하는 건조기, 스틸, 오븐, 보일러를 대체할 수 있다. 전기를 사용하여 히트펌프를 가동하는 것이 천연가스를 사용하는 보일러로 난방하는 것보다 몇 배 더 효율적일 수 있다. 반면 수소를 사용하는 것은 효율이 보다 떨어진다. 친환경 전기로 물 분자를 분해하여 수소를 만들면(그린수소) 탄소배출은 없지만 처음에 사용한 에너지의 최소 20%가 손실되기 때문이다(차트 2 참조).
유럽과 일본에서는 보조금과 전기료 대비 상대적으로 높은 가스 가격 때문에 일부 제조업에서도 히트펌프가 사용되고 있다. 일본의 대기업 고베제강Kobe Steel은 165°C의 고압 증기를 매우 효율적으로 생산할 수 있는 상업용 히트펌프를 판매하고 있다. 영국 석유 대기업 쉘Shell의 벤처 부문에서 투자를 받은 노르웨이 스타트업인 히튼Heaten은 제조업 폐열을 활용하여 최대 200°C의 온도에 도달할 수 있는 내구성이 뛰어나고 유지비가 적은 히트펌프를 개발했다. 이는 중간 수준의 열이 필요한 제약부터 섬유까지 다양한 제조업에 적합하다.
심지어 값싼 석탄이 풍부하고 보조금이 부족해 히트펌프 등이 경쟁하기 어려운 상황인 아시아의 개발도상국에서도 필요한 온도가 상대적으로 높지 않은 제조업에 대한 전기화가 진행되고 있다. 싱크탱크 RMI는 2014년 이후 전 세계 제조업 전기화 증가의 약 5분의4가 중국 경공업에서 발생했다고 추산한다. 국제에너지기구는 제조업에서 전기로 생산되는 열의 비중이 2022년 4%에서 2028년 약 11%까지 증가할 것으로 예측한다. 제조업용 열 생산을 위한 재생 전기 사용을 5배 이상 늘어날 전망인 중국은 이러한 성장의 거의 절반을 차지할 것이다.
미국에서는 천연가스가 비교적 저렴함에도 불구하고 전기화 솔루션의 보급이 시작되고 있다. 업계 컨소시엄인 RTCRenewable Thermal Collaborative (재생 열 협력체)가 2024년 1월 발표한 연구에 따르면 130°C 이하의 온도에 도달하는 데 가스보일러와 히트펌프 사이에 비용 차이가 없다고 한다. 이렇게 되면 히트펌프는 보조금이나 기술 개선 없이도 제조업 열 수요의 29%에 대해 경쟁력을 갖추게 된다. RTC는 최대 200°C까지 지원하는 히트펌프가 2030년경에는 경쟁력을 갖출 것으로 예상한다. 맥킨지의 해럴드 바우어Harald Bauer는 머지않아 히트펌프가 500°C까지 달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한다.
하지만 당분간은 200°C 이상의 온도에는 다른 기술이 필요하다. "바로 이것이 제조업 에너지 인프라의 미래입니다!" 축열 기술을 개발하는 스타트업 론도에너지Rondo Energy의 대표 존 오도넬John O'Donnell은 이렇게 선언했다. 그가 열정을 담아 말하는 '미래'는 일견 그리 대단치 않아 보인다. 커다란 금속 상자가 바로 그것이다.
[새로운 PADO 기사가 올라올 때마다 카톡으로 알려드립니다 (무료)]
그 안에는 주로 벽돌이 들어있다. 전선은 토스터가 빵을 굽듯 전기를 사용해 벽돌을 1000°C 이상으로 가열한다. 매우 효과적인 단열재 덕분에 벽돌은 큰 손실 없이 며칠 동안 열을 유지할 수 있다. 필요할 때 다양한 온도에서 제어된 양으로 열을 방출할 수 있다. 공기가 벽돌 사이사이의 통로를 이동하면서 열을 전달한다.
론도의 열 배터리는 코발트나 리튬이 필요한 전기 배터리보다 저렴하게 제조할 수 있다. 저장된 열은 많은 중공업 부문을 돌릴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하다. 애트모스제로의 히트 펌프와 마찬가지로 전체적인 재설계 없이 기존 공장에 장착 가능하다. 또한 각 배터리의 효율이 매우 높기 때문에 전력이 가장 저렴할 때 벽돌을 데우고 언제든지 열을 공급할 수 있다.
이 금속 상자는 많은 열정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론도는 최근 소프트웨어 대기업 마이크로소프트, 사우디 국영 석유기업 아람코, 리오틴토 등 거대 기업의 벤처투자 부서로부터 6000만 달러의 자금을 조달했다. 후원자 중에는 테크 투자 분야의 유명인사들이 대거 포진해 있다. 널리 시청된 테드TED 강연과 최근 다보스포럼 강연 이후 오도넬은 자신이 '벽돌맨'으로 불린다며 웃음을 지었다.
오도넬은 대규모 글로벌 확장을 계획 중이다. 벽돌 제조 경험이 풍부한 투자자인 태국의 시암시멘트그룹Siam Cement Group의 도움을 받아, 론도는 매년 90기가와트시(GWh)의 전기를 저장할 수 있는 상자들을 제조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 이는 네바다에 있는 테슬라의 배터리용 '기가팩토리'의 생산용량의 두 배 수준이다.
다른 회사들도 각각 자신들의 '돌 상자'를 개발하고 있다. 유럽투자은행이 일부 투자한 이스라엘 회사 브렌밀러Brenmiller는 화산암을 저장매체로 사용한다. 캘리포니아의 스타트업 앤토라Antora는 커다란 고체 탄소 큐브를 사용하여 1800°C에 달하는 고열을 저장한다. 보스턴의 포스파워Fourth Power는 흑연 벽돌(및 흑연 배관) 시스템을 흐르는 용융 주석을 사용해 2400°C의 열을 저장할 수 있다. 주석은 녹으면 하얗게 빛나기 때문에 시스템 내부의 특수 광전지를 통해 열뿐만 아니라 전기의 형태로도 에너지 회수가 가능하다. 전력 가격이 변동하는 지역에서는 전력 가격이 저렴할 때 열을 저장했다가 가격이 오르면 전기를 공급하는 것만으로도 수익을 낼 수 있다.
전기화하기 가장 어려운 제조업 공정은 24시간 내내 강렬한 열이 필요한 것으로, 특히 제철처럼 화석연료를 사용하여 열을 생성할 뿐만 아니라 화학적 필수품인 탄소를 공급하는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철강, 화학, 시멘트는 제조업 열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며 제조업 온실가스 배출량에서도 비슷한 비중을 차지하기 때문에 이들 분야의 전기화는 가장 실험적이면서도 잠재성이 가장 크다.
자금력이 풍부한 몇몇 스타트업은 세계에서 가장 오염이 심한 제조업 중 하나인 제철 분야에서 급진적인 혁신을 모색하고 있다. 아마존과 BHP 등의 지원을 받고 있는 일렉트라Electra는 불이 없는 용광로에서 순수한 철을 만드는 방법을 찾아냈다. 콜로라도에 위치한 일렉트라의 연구소에는 아놀드 슈워제네거의 '터미네이터' 영화(슈워제네거가 연기하는 로봇은 제철소에서 최후를 맞는다) 사진이 붙어 있다. 연구원들은 화학 용액에 철광석을 녹여 전기 충격을 가한다. 이 '전해채취electrowinning' 기술은 점결탄이나 화석연료를 사용하지 않고 순수한 철판을 생산하므로 온실가스를 거의 배출하지 않는다. 이 회사는 2026년까지 친환경 철강을 상용화할 계획인 스웨덴의 SSAB를 비롯한 기업들을 추격하고 있다.
제강 과정에서 발생하는 탄소배출을 줄이는 방법으로 현재까지 더 많은 검증을 거친 방식은 용광로를 전기아크로electric-arc furnace로 대체하는 것이다. 전기아크로는 일반적으로 철광석과 점결탄을 사용하여 강철을 만드는 대신 고철을 전기로 녹여 재활용한다. 이는 탄소배출에 가격을 물리며 고철이 풍부하고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철강 수요가 있는 곳—다시 말해 선진국—에서 가장 합리적이다. 2024년 1월, 타타 스틸Tata Steel은 영국에서 고로를 폐쇄하고 전기 제철로 전환하겠다고 발표했다. 리서치 회사 우드매켄지Wood Mackenzie는 향후 몇 년간 전기아크로에 1300억 달러가 투자될 것으로 예상한다. 이를 통해 현재 전 세계 생산량의 28%인 저탄소배출 철강 생산량을 2050년까지 50%로 늘릴 수 있다.
시멘트는 제철과 마찬가지로 화석연료를 태워 열을 발생시킬 때뿐만 아니라 관련된 화학 반응에서도 탄소배출이 발생하기 때문에 탈탄소화가 까다로운 또 다른 제조업이다. 서브라임시스템Sublime Systems은 용액에 전류를 흘려 화학반응을 자극하는 전기분해 공정을 이용해 상온에서 배출물 없이 필요한 화학물질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을 찾아냈다. "우리가 하는 일은 기본적으로 가마를 교체하는 겁니다." 서브라임시스템의 공동 설립자 레아 엘리스Leah Ellis는 설명한다. 시암시멘트를 비롯한 투자자들이 작년에 4000만 달러를 투자했다.
세 번째로 그을음이 많은 거대 제조업은 화학 제조업이다. 화학 제조업 전기화의 여러 방식 중 급진적인 것 하나는 분당 2만 회 이상 회전하는 초고속 로터에 화학 전구체前驅體를 공급하는 것이다. 핀란드 기업 쿨브룩Coolbrook은 이러한 종류의 '로토 다이나믹 리액터'의 선구자다. 브라질의 브라스켐Braskem, 멕시코의 세멕스Cemex, 사우디 SABIC의 지원을 받고 있다. 2023년 12월에는 업계에서 흔히 사용되는 공정인 나프타 분해에 이 기술을 사용했다고 발표했다.
몇몇 화학 기업들은 원자력을 전기와 열의 공급원으로 사용하는 방안도 검토하고 있다. 미국 기업 다우Dow는 텍사스 공장에서 스타트업인 엑스에너지X-ENERGY가 만든 소형모듈원자로(SMR) 4기를 건설할 계획이다. 이 원자로는 현재 전기와 증기를 공급하는 기름 보일러를 대체하게 된다.
가속화
이러한 기술이 선전하는대로 작동하더라도 제조업을 변화시키는 데는 시간이 걸릴 것이다. 프랑스의 대형 제조업 장비 제조업체인 슈나이더일렉트릭의 프레데릭 고데멜Frederic Godemel은 이론적으로 기존 기술로 중공업의 30~50%를 전기화할 수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는 현실에서는 현재 10%만 전기화되고 있다고 본다. 새로운 전기화 장비가 기존 장비 대비 장기적으로 경쟁력이 있더라도 높은 초기 비용, 생산 중단, 새 장비에 대한 교육 등을 이유로 공장주가 전환을 거부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탄소 가격 책정이나 기타 배출량 감축을 위한 인센티브는 분명 도움이 될 것이다. 전환에 따른 생산 중단을 최소화하는 기술도 마찬가지다. 애트모스제로의 CEO 애디슨 스타크Addison Stark는 전기보일러를 기존 공장에 쉽게 설치할 수 있도록 설계하여 설치의 번거로움을 줄임으로써 관리자들의 반대를 극복하고자 했다고 설명한다. "증기가 1차 제조업혁명의 원동력이었다면 탈탄소 증기가 다음 제조업혁명의 원동력이 될 겁니다." 그는 말한다.
전기화가 기대에 부응할 수 있다는 한 가지 징후는 이 기술이 대체하려는 제품을 생산하는 석유 및 가스 회사들이 큰 관심을 보였다는 사실이다. 노르웨이의 국영 석유 회사인 에퀴노르Equinor는 석유를 채굴할 때 배출되는 이산화탄소를 줄이기 위해 오랫동안 자사의 해양굴착장비를 전기화해 왔다. 해양에서 가장 효율적으로 생산되는 석유 1배럴당(또는 동등한 양의 가스) 이산화탄소 배출량은 1kg 미만이며, 이는 전 세계 평균인 배럴당 15kg에 비해 훨씬 적은 양이다. 미국 페름기 분지에서 시추 작업을 하는 석유 회사들은 규제 당국의 배출량 감축 압박에 따라 메탄(강력한 온실가스)이 누출되기 쉬운 기존 장비를 전기 장비로 대체하는 데 수십억 달러를 지출하고 있다. 전기화를 거부할 게 자명한 기업들도 전기화의 가치를 인정하고 있다면 전기화의 전망은 틀림없이 밝을 것이다.
전기차가 막 보급되기 시작하던 시절, '수소차 vs 전기차' 논쟁을 기억하십니까? 보다 정확히는 수소연료전지와 배터리(리튬이온 등) 중 미래차의 동력 수단으로 무엇이 더 적실한가에 대한 논쟁이었습니다. 수소는 육상 교통 뿐만 아니라 해상, 항공, 심지어 난방이나 산업용 열 생산 등 다방면으로 활용이 가능하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그래서 화석연료 기반의 '탄소경제'를 대체하는 '수소경제'를 만들어야 하며 수소차가 그 선봉이 될 것이라는 주장도 있었죠. 몇 년이 지난 지금, 수소연료전지는 승용차 시장에서 거의 잊혀진 존재가 됐습니다.
탄소경제를 완전히 대체한다는 비전이 갖는 매력 때문에 한국을 비롯한 많은 선진국에서 여전히 '수소경제'를 추진하고 있지만 실현은 아직까지 요원합니다. 수소를 사용할 수 있는 부문이 다양한 건 사실이지만 각각의 부문에서 수소보다 더 저렴하고 효율적인 대안이 많기 때문입니다. 여기 소개하는 이코노미스트의 2024년 2월 15일 기사가 보여주듯, 과거에는 전기화가 불가능하다고 여겼던 중화학 제조업에서도 기술 혁신으로 이제는 꽤 현실적으로 보이는 전기화 대안들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수소 부문에서는 아직까지 눈에 띠는 기술 혁신이 나오지 않고 있는 상황입니다.
탄소배출 관련 각종 규제에서 세계를 선도하는 유럽연합은 수입품의 제조 과정에서 발생하는 탄소배출에 대해서도 규제를 가할 예정이며, 유럽연합에 중화학 제조업 상품을 주로 수출하는 한국은 이러한 규제에 직접적으로 노출됩니다. 히트펌프부터 전기로를 사용한 제철까지, 여기서 소개하는 다양한 공장 전기화 기술에 관심을 가져야 할 까닭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