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3.08 14:39
때때로 외교정책은 기술적 요소에 좌우된다. 바람으로 항해하던 시절, 범선을 만들 수 있는 목재는 귀중한 천연자원이었다. 증기 동력의 등장으로 광산과 탄광은 국가의 중요한 전략적 자산으로 떠올랐다. 그리고 동력이 증기에서 석유로 전환되면서 석유 매장지는 너무나 소중한 보물이 되었다.
중동의 풍부한 석유는 1908년에 처음 발견되었고, 곧 이곳은 세계경제의 핵심지역이 되었다. 처음에는 당시 최대 식민지배국이었던 영국이 이 지역의 질서를 유지했지만,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수십 년 동안 미국이 질서유지를 맡게 되었다. 1970년대에 미국은 이란과 사우디아라비아에 의존해 글로벌 석유공급을 유지하면서 지역 안보를 현지 파트너에 맡기려고 했다. 그러나 1979년 이란혁명으로 이란이 우방에서 적으로 돌아선 후, 미국은 이라크와 이란이 잔혹한 전쟁을 치르는 동안 두 나라 중 어느 한 나라가 걸프만을 지배하는 것을 막기 위해 양쪽 모두에 군사지원을 해가며 힘의 균형을 유지하려 했다. 하지만 1990년 이라크가 쿠웨이트를 점령하고 사우디를 위협하면서 이 힘의 균형은 무너졌다.
이때 조지 H. W. 부시 행정부는 이라크의 침략을 물리치고 쿠웨이트의 주권을 회복하기 위해 국제 연합군을 이끌며 직접 사태 관리에 나섰다. 그러나 이라크의 지도자 사담 후세인은 전쟁에서 살아남아 이라크 대부분을 다시 장악했다. 미 행정부는 제재와 봉쇄 정책으로 돌아섰고, 그 후임자들은 10년 동안 이를 지속했다.
그러던 중 9/11 테러가 발생했다. 그 후 조지 W. 부시 행정부는 테러 문제뿐만 아니라 이라크 문제도 해결하기로 결정하고, 이라크를 정복한 후 사담 후세인 정권을 힘으로 제거하기로 결정했다. 이라크 공격은 대체로 계획대로 진행되었지만 그 결과는 혼란스러웠다. 해방은 점령이 되어버렸고, 지역의 불안은 반란으로, 그리고 내전이 되어버렸다. 미군은 결국 이라크에 머물며 거의 20년 동안 여러 적들과 싸워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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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이라크 전쟁은 너무도 비참하고 막대한 비용이 소요된 실수였기 때문에, 돌이켜 보면 이 전쟁이 냉전 이후 미국의 패권에 대한 세상의 관점이 '성공적이다'에서 '의심스럽다'로, 그리고 환영에서 저항으로 바뀌는 전환점이었던 것 같다. 20년이 지난 지금, 더 나은 중동에 대한 꿈, 적극적인 국제적 개입에 대한 미국의 열망을 보여주던 미국 일극의 시대는 막을 내렸다. 남은 것은 어떻게 그런 엄청난 자멸적 실패가 애초에 일어날 수 있었는지에 대한 의문이다.
이라크의 대량살상무기 프로그램에 대한 전쟁 전 주장이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지자, 많은 사람들은 9/11에 대한 복수심, 이데올로기적 열망, 이라크 자원을 차지하려는 욕망 등 다른 의도가 미국의 침공을 이끌었다고 믿게 되었다. 최근의 역사학은 이러한 이론들을 반박하면서 부시 행정부 관리들이 실제로 대이라크 봉쇄가 무너지고 있다고 생각했고, 그 이후에 이라크가 무슨 짓을 할지 정말로 두려워했음을 보여주었다. 미 행정부 관리들은 진실을 몰랐고 아무도 진실을 믿지 않으려 했다. 진실은 이랬다. 사담 후세인 정권은 1990년대 초에 거의 모든 대량살상무기 프로그램을 폐기했지만, 폐기후 10년이 지난 시점까지도 상당수의 대량살상무기 프로그램을 유지하고 있다는 징후를 내비쳤고 그것이 후세인 정권을 파멸로 몰아넣었다.
저널리스트인 스티브 콜은 사담 후세인의 대량살상무기 프로그램과 이를 종식시키려는 미국의 시도를 서술한 '아킬레스의 덫'에서 이 기묘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주로 이라크에서 확보한 기록과 전직 관리들과의 인터뷰를 바탕으로 한 이 책은 명확하고 가독성이 뛰어나며 세심하게 역사의 현장인 바그다드에서 바라본 시각을 잘 표현하고 있으며, 단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록할 뿐만 아니라 이해할 수 없는 많은 것들을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1991년의 걸프전 이후 사담 후세인의 행동은 위험할 정도로 공격적이고 비이성적이었다. 또, 9/11 테러 이후 트라우마에 시달리던 미국의 새 행정부(조지 W. 부시 행정부)는 이 심리적 트라우마를 해결하고자 했다. 그리고 2003년, 미국과 이라크의 상호 오해는 파국으로 치달았다. 중국의 군사이론가 손자(孫子)는 전략가들에게 "적을 알고 자신을 아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말했는데, 이라크 전쟁은 양측이 서로를 모를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보여준다.
사막의 라쇼몽
저자 스티브 콜은 눈길을 사로잡는 디테일로 가득한 생동감 넘치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예를 들어 독자들은 사담 후세인의 삼촌이자 스승이었던 카이랄라 툴파가 '신이 창조하지 말았어야 할 세 가지'라는 책에 가문의 철학을 요약해 담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페르시아인, 유대인, 성가신 날벌레 파리"가 바로 이 '신이 창조하지 말았어야 할 세 가지'다. 삼촌과 마찬가지로 사담 후세인도 20대에는 암살자였고 60대에는 다작의 소설가였다. 그는 사람들의 충성심은 대상자 자녀들의 대화를 엿듣고 집에 자신의 사진이 어디에 걸려 있는지 확인하는 것으로 알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의 아들인 우데이와 쿠세이는 괴물이었고, 사위 후세인 카멜은 자신의 노여움을 산 부하에게 휘발유를 마시게 한 다음 배에 총을 쏴 그 부하의 몸이 폭발하는지 확인했다고 자랑했다.
콜의 많은 이야기는 각국의 정치 문화에 대한 중요한 진실을 보여준다. 1990년대에 사담 후세인은 러시아, 프랑스, 중국, 유엔 관리들에게 뇌물을 주어 지지를 얻었고, 그의 외무장관 타리크 아지즈는 유엔의 최고 무기사찰관인 스웨덴 외교관 롤프 에케우스가 왜 뇌물을 안 받으려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아지즈는 에케우스에게 "스위스은행에 당신을 위해 50만 달러 계좌를 개설해줄 수 있다"고 말했다. (스웨덴에서는 그런 일을 하지 않는다고 에케우스는 대답했다.) 이라크의 한 생물학 무기 프로그램은 사담 후세인이 독살당하지 않도록 보호하는 조직에서 시작되었는데, 아지즈는 이를 지극히 정상적인 일로 여겼다. 그는 유엔 조사관에게 (당연하다는 듯) "전 세계 모든 정부에는 국가 보안 조직에 지도자의 음식 검사를 전담하는 부서가 있다는 것을 당신도 잘 알고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미국 관리들은 가치 있는 성과를 거의 거두지 못한 성급한 비밀 작전을 반복했는데, 그 전형적인 과정은 한 정보 장교가 자신의 벽에 붙인 "CIA 비밀작전 6단계"라는 메모로 요약할 수 있다. '행복한 흥분, 혼란, 환멸, 죄인 찾기, 무고한 사람 처벌하기, 일에 거리두고 있던 사람들에게 상 주기'가 바로 그 6단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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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결과 청각장애인 사이의 서로 이해 못하는 대화가 이어졌다. 예를 들어 1980년대에 레이건 행정부는 이라크 정부가 이란-이라크 전쟁에서 버틸 수 있도록 자국민 수만 명에게 독가스를 살포하는 와중에도 이라크에 광범위한 군사 지원을 제공했다. 그러나 동시에 미 행정부는 이스라엘과 협력하여 레바논의 헤즈볼라에 의해 억류된 미국인 인질을 석방시키기 위해 이란에 군사 지원을 제공하고 여기서 나온 무기 판매 수익금을 니카라과의 반공 콘트라반군을 지원하는 데 사용했다. 이 음모가 드러나자 사담 후세인은 씁쓸해하면서도 놀라지 않고 이란-콘트라 사건은 자신을 파괴하려는 이스라엘의 음모라고 말했다. "내 말은, 시오니즘.....여봐요, 동지들, 매번 그 말을 반복해야 합니까?"
콜은 "많은 미국인들이 자국 외교 정책의 엄청난 무능으로 이해한 것을 사담 후세인은 교묘한 음모로 해석했다"고 말한다. 수년 동안 비슷한 오해가 반복적으로 발생했고, 양측은 서로 상대방의 행동을 과도하게 해석하면서 자신의 행동에 대해서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일이 반복되었다. '근본적 귀인(歸因) 오류'('잘 되면 내 덕, 잘못되면 남 탓'으로 보는 인지오류)에 대한 교과서 한 권을 쓸 수 있을 정도다.
없어진 무기
'아킬레스의 덫'은 비밀 작전에는 많은 시간을 할애하지만 이라크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에 대한 미국의 각 행정부 내부의 논쟁에 대해서는 거의 다루지 않는다. 미국의 보다 진지한 직접 대화 시도가 긴장을 완화했을지도 모른다는 저자의 견해가 간간히 나오지만, 그런 희망은 그가 이야기해주는 끝없는 무지몽매 사례들에 의해 무참히 깨져버린다. 이 책에서 사담 후세인은 편집증적이고 자기기만에 빠진 과대망상증 환자로, 함께 건설적인 것을 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한 인물로 등장한다. 스웨덴 외교관 에케우스는 이 문제를 정면으로 제기한다. "사담 후세인은 매우 제한된 관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는 대부분 이라크인들로 구성된 소수 그룹에 둘러쌓여 있습니다." 에케우스는 사담 후세인의 사고회로가 "기괴하고 엉망진창"이라고 덧붙였다.
이러한 성향들은 1990년대에 이라크 정부가 취한 조치에서 드러났는데, 전모가 드러난 지금 더욱 놀랍게 다가온다. 걸프전 이후 국내 입지를 상당 부분 재건한 사담 후세인은 그 어떤 것에도 후회따위는 품지 않고 적과 다시 싸울 날을 기다리며 군사력과 완전한 행동의 자유를 되찾아 세계에 계속 맞서기로 결심했다. 사담 후세인은 대량살상무기 보유가 문제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1991년 중반에 대부분의 프로그램을 포기했지만, 포기 사실을 밖에 알리지 않았고, 무슨 일을 했는지 기록도 남기지 않았다. 이라크 핵 프로그램 책임자는 나중에 "우리는 무엇이 파괴되고 무엇이 파괴되지 않았는지 알지 못했다"고 말했다. "모든 것이 엉망이었다."
(자신이 제대로 알리지 않아) 이처럼 완전한 혼동 상황을 만들어내면서 사담 후세인은 바깥 사람들이 실제 발생한 것들을 당연히 알고 있겠지라는 식으로 행동했다. 콜은 이렇게 말한다.
"그는 전능한 CIA가 이미 핵, 화학, 생물학 무기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고 가정했다...... 그리고는 미국이 진실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불법 무기를 숨기고 있다는 거짓 주장을 하고 있으니,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추측했다. 그것은 시온주의자들과 그를 반대하는 스파이들이 그를 권좌에서 축출하려는 음모를 추진하기 위해 대량살상무기 문제를 이용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는 그들의 게임에 놀아나거나 그들의 사찰에 응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콜은 이라크 고위 관리들조차 자국의 대량살상무기 프로그램의 정확한 상황에 대해 확신하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예를 들어, 2003년 미국의 이라크침공 전 한 회의에서 1980년대 이라크 쿠르드족에 대한 독가스 살포를 감독한 악명 높은 '케미컬 알리' 알리 하산 알 마지드는 "우리에게 대량살상무기가 있습니까"라고 퉁명스럽게 물었다. "모르는가?" 사담이 대답했다. "모르는데요." 알리가 말했다. 사담은 "없네"라고 답했다. 그러나 이라크는 그러한 무기가 존재한다는 것을 전제로 한 미국의 공격이 임박한 상황에서도 진실을 공개하려는 시도를 전혀 하지 않았다.
봉쇄에서 롤백으로
콜의 책은 이라크 전쟁의 원인이 사담 후세인의 위협 증가와 이것이 워싱턴에 불어넣은 공포였다는 주장을 뒷받침하는 것으로 이해하면 쉬울 것 같다. '아킬레스의 덫'은 사담 후세인을 군사력을 재건하려는 악랄한 연쇄 침략자로 묘사한다. 한편 서방에서 대이라크 제재 해제를 주장한 사람들 중 일부는 사담 후세인으로부터 뇌물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주장은 의심을 받았다. 이라크 망명자 아메드 찰라비 같은 사기꾼들이 만들어낸 가짜 증거가 아니더라도 언젠가 사담 후세인이 전략적으로 중요한 지역을 다시 분쟁에 빠뜨릴 것이라고 믿을 만한 충분한 근거가 있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오랫동안 변함없는 사실이었기 때문에 21세기 초에 별안간 미국이 진로를 바꾸고 선제적 예방전쟁을 통해 위협의 원천을 제거하기로 결정한 이유를 설명할 수는 없다. 9/11에 일어난 일은 이라크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었기 때문에 9/11 테러가 미국의 이라크 침공으로 이어질 필연적 이유도 없었다. 미국이 전쟁을 일으킨 것은 걸프지역 안보 유지라는 근본적인 문제와 사담 후세인의 이상한 행동, 그리고 9/11이 소수의 특이한 미국 관리들에게 미친 심리적 영향이 결합된 것이었다.
2000년 조지 W. 부시 대신 앨 고어가 미국 대통령에 당선되었더라도 사담 후세인의 지역적 야망과 이를 저지하려는 미국의 결의를 고려할 때 미국과 이라크 간에 전쟁이 일어났을 수 있다. 그러나 그 전쟁은 사담 후세인이 터무니없는 일을 저지르고 앨 고어가 연합군을 동원해 대응하는 1991년 걸프전의 재연이 되었을 것이다. 클린턴 행정부는 전임 행정부로부터 물려받은 지저분한 봉쇄정책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더 나은 대안을 찾을 수 없었다. 부통령 시절 고어는 클린턴 행정부의 이라크 논쟁에서 매파적 입장에 있었지만, 무력 침공을 옹호한 적은 없었고, 그가 대통령이 되었다면 침공했을 것이라고 생각할 이유도 없다.
조지 W. 부시가 딕 체니 부통령과 도널드 럼스펠드 국방부 장관 대신 브렌트 스코크로프트와 로버트 게이츠 같은 공화당의 국가안보 분야 대가들을 행정부의 요직에 임명했거나 콜린 파월 국무장관 같은 사람들에게 힘을 실어줬더라면 클린턴 행정부때와 비슷한 시나리오가 전개됐을 것이다. 심지어 부시가 당선되고 강경파가 행정부를 채웠음에도 불구하고 9/11 테러가 일어날 때까지는 이라크를 공격할 움직임이 없었다. 부시 행정부를 아프가니스탄뿐 아니라 이라크에서도 전쟁의 길로 들어서도록 등을 떠민 것은 9/11이었다.
클린턴 행정부 기간 중 독립적인 급진 이슬람 테러리스트 단체가 점점 더 큰 위협으로 부상했다. 이들은 1993년 뉴욕의 세계무역센터, 1998년 탄자니아와 케냐의 미국 대사관, 2000년 예멘의 미국 군함 콜 호를 폭탄공격했다. 대통령직 인수 과정에서 퇴임하는 클린턴의 관리들은 새로 취임하는 부시 행정부에 그러한 테러리스트 단체들이 미국이 직면한 가장 시급한 위협이라고 말했지만, 부시 행정부는 불량 국가들이 훨씬 더 큰 위험을 초래한다고 믿었기 때문에 점점 더 안절부절 못하는 부시 행정부 내 정보부서의 경고와 함께 클린턴측 관리들의 경고를 깡그리 무시했다.
따라서 9/11 테러 당시 알카에다가 뉴욕과 워싱턴을 공격했을 때 부시 행정부의 고위 인사들은 슬픔과 분노, 죄책감으로 큰 충격을 받았다. 부시는 "나는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딕 체니도 "우리가 놓쳤다"고 말했다. 하지만 진심으로 책임을 받아들이는 것은 아무나 감당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것은 자신들과 달리 다른 사람들은 그것을 놓치지 않았으며 이제는 그들의 이야기를 무시할 것이 아니라 귀를 기울여야 한다는 불편한 진실을 솔직히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하지만, 비판자들에게 머리 숙여야 하는 굴욕감과 스스로를 무능한 실패자로 여기는 인지 부조화에서 벗어나기 위해 부시와 그의 고위 참모들은 상황을 재구성했다. 그들은 이번 공격에 대해 왜 잘못했는지 알아내려고 노력하기보다는 앞으로 예방할 수 있는 공격을 찾았고,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들을 선견지명이 있는 영웅으로 재조명하려했다. 콘돌리자 라이스 국가안보보좌관은 "9/11 테러에 대해 과거로 돌아가 자책하는 것이 능사는 아닙니다"라고 말했다. "중요한 것은 다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이라크는 위험일 뿐만 아니라 기회이기도 했다. 이라크는 위협이 될 만큼 강하지만 정복할 수 있을 만큼 약했고, 9/11 테러에 연루되지 않았더라도 최소한 또 다른 대량 살상 공격의 무기 공급처로 충분히 상상할 수 있는 나라였기 때문이다. 사담 후세인을 무너뜨리는 것은 위협을 제거하고, 세계를 향한 미국의 입장 표명이 되고, 오래된 문제를 한꺼번에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따라서 9/11 참사 2주 후, 부시는 럼스펠드 국방장관에게 이라크 전쟁계획을 검토해 달라고 요청했다. 2001년 말, 미군 중부사령부의 사령관 토미 프랭크스 장군은 이라크 침공에 대한 청사진을 전달했다. 그리고 2002년 중반, 부시는 사담 후세인이 확실히 무장해제 하지 않으면 공격하기로 결정했다.
바그다드 그리고 그 너머
미국의 다른 행정부들도 사담 후세인 제거를 꿈꿨지만, 사담 후세인의 국가를 관리할 책임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전쟁에 나서지 않았다. 1994년 체니는 걸프전 당시 사담 후세인을 무너뜨리지 않기로 한 미국의 결정을 옹호하면서 "이라크에 가서 점령하고 사담 후세인 정부를 무너뜨리면 그 빈 자리엔 무엇을 채울 건가요? ......수렁입니다." 조지 W. 부시 행정부는 이 문제를 무시하고 넘어갔다. 그의 전쟁 계획서에는 '전쟁이 어떻게 끝날지'에 대한 섹션이 없었기 때문에 당연히 전쟁은 실제로 끝나지 않았고, 이후 수년 동안 전투가 계속 이어졌다.
이제 몇몇 사람이 이 눈에 띄는 누락('전쟁이 어떻게 끝날지')에 책임이 있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유능하지 못한 국가안보보좌관은 행정부의 정책을 조율하지 못했다. 불량한 국방장관은 전후(戰後) 계획에 대한 통제권을 요구하고 그것을 얻은 다음에는 그 이름에 걸맞은 일을 하지 않았다. 상황에 압도된 현장 지휘관은 전쟁의 작전 수준 너머를 한번도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 모든 책임은 자신이 내린 결정의 예상 가능한 결과를 충분히 고려하지 않은 무능한 최고사령관, 즉 대통령에게 돌아가야 한다.
작년에 외교사학자 멜빈 레플러는 그의 저서 '사담 후세인에 맞서다'(Confronting Saddam Hussein)에서 콜의 주장과 비슷한 주장을 펼치며 미국의 시각을 제시하고 음모론에 사로잡힌 비평가들로부터 부시 행정부를 옹호했다. 그러나 그조차도 비난의 목소리를 냈다. 레플러는 "부시는 격렬한 논쟁을 싫어했기 때문에 자신이 추진하려는 정책에 대한 철저한 검토를 지시하지 않았다"며 "그는 자신이 하려는 일의 규모, 그 안에 내재된 위험, 발생할 비용을 전혀 파악할 수 없었다"고 덧붙였다.
똑똑한 관리들로 가득 찬 정부 전체가 명백히 잘못된 계획을 왜 순순히 실행했는지는 별개의 문제다. 사담 후세인의 이라크나 블라디미르 푸틴의 러시아 같은 독재 정권에서 이런 일이 발생하면 관찰자들은 당연히 반대의견에 대한 끔찍한 대가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미국의 이라크 침공은 그러한 강압이 필요하지 않으며, 관료들의 '상명하복'과 일상화된 무비판성만으로도 비슷한 결과를 낳을 수 있음을 잘 보여준다.
이 안타까운 광경에서 두 가지 교훈을 얻을 수 있는데, 하나는 프로세스에 관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정책에 관한 것이다. 오늘날 잘 운영되는 조직은 심리가 성과에 어떤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 이해하고 있으며, 직원들의 자각과 주의력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예를 들어, 뉴욕양키스는 프론트 오피스에 행동 과학자를 고용하고 라커룸에 심리학자를 배치해 모든 선수가 입장할 때 가장 먼저 만나고 퇴장할 때 가장 마지막으로 만나는 사람이 바로 심리학자다. 백악관 상황실에서도 비슷한 조치를 취해 참가자들이 인지적, 정서적 장애를 걷어낸 후 더욱 원활하게 토론할 수 있도록 유도할 수 있다.
고위 관리들이 여러 정책 대안의 상대적 장점에 대해 자유롭게 논의하는 토론이 실제로 있어야 할텐데, 이라크 전쟁 참전 결정에 대한 가장 중요한 사실 중 하나는 그러한 회의가 없었다는 것이다. 부시 행정부는 단 한 번도 전쟁의 목표와 이를 달성하기 위한 전략을 공식적으로 밝히지 않았고, 그 결과 계획의 엄청난 공백이 드러나지 않고 비판받지 않은 채로 방치되었다. 좋은 프로세스가 반드시 좋은 정책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명백히 나쁜 정책을 걸러내는 데는 도움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최고의 관리 방식을 따르는 참선(參禪)의 달인들 조차도 사담 후세인을 상대하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후세인 일가는 1983년 영화 '스카페이스'의 악당 이름("토니 몬타나")을 따 비밀 투자수단 중 하나를 몬타나 매니지먼트라고 명명했다. 알파치노가 연기한 이 자멸적 캐릭터처럼 사담과 그의 아들들은 비참한 최후를 맞이할 운명이었고, 문제는 언제 어떻게 죽느냐였다. 2003년 12월, 사담은 티크리트 인근 농장의 구덩이에서 생포되었고, 3년 후 교수형에 처해졌다. 2003년 7월 모술에서 미군은 은신처 주인이 3천만 달러의 포상금을 받고 넘긴 우데이와 쿠사이를 덥쳤다. 미군은 별장을 포위하고 그들에게 투항을 명령했다. 집안에서 쏜 총격으로 4명의 군인이 부상을 입었고 수류탄, 중기관총, 헬리콥터 발사 로켓이 동원된 3시간 동안의 총격전이 벌어졌다. 마지막으로 대전차 미사일의 공격으로 한때 이라크의 미래 통치자들이었던 그들이 바리케이드를 치고 있던 철옹성 같은 별장이 파괴되었다. 그들이 (알파치노처럼) "내 친한 친구와 인사나 해라"고 외치며 총을 쏘았는지는 모른다.
빌 클린턴 대통령은 참모들에게 이라크가 "합리적인 대응책이 없기 때문에 가장 어려운 문제"라고 말한 적이 있다. 걸프전에서 사담 후세인이 살아남았으니 미국은 또 다른 전면적 분쟁에 휘말리지 않고 그를 봉쇄하려는 시도를 하는 것이 합리적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접근 방식은 비용이 많이 들고 위험하며 지속하기 어려웠다. 조지 W. 부시 행정부는 그런 만족스럽지 못한 방법이 최선책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맹목적으로 심연으로 뛰어들었다. 이라크나 미국의 지도자들이 덜 무모하게 행동했다면 전쟁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바그다드의 토니 몬타나로부터 세계경제를 보호해야 하는 과제는 여전히 남아 있었을 것이다.
기디언 로즈는 미국외교협회(CFR)의 부선임연구원이며 '전쟁은 어떻게 끝나는가How Wars End'의 저자다. 클린턴 행정부 국가안전보장회의(NSC)에서 중동 문제를 담당했다.
미국 뉴욕과 워싱턴에 대한 테러공격이 이뤄진 9/11은 전 세계 정세를 180도 바꿨습니다. 테러리스트들이 납치한 여객기가 뉴욕 무역센터 '쌍둥이 빌딩'에 부딪히던 그 순간 이후, 미국인들은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공포에 휩싸였고 복수심에 불타고 있었습니다. 부시 행정부는 뉴욕과 워싱턴을 지켜내지 못한 죄책감에 미국 국민의 복수심을 해소해줄 희생양을 찾고 있었습니다. 9/11을 주도한 알카에다가 거점으로 삼은 아프가니스탄을 공격하는 것은 당연해보였는데, 중동의 군사강국 이라크도 대량살상무기를 가지고 있고 미래에 또 다른 9/11을 일으킬 소지가 있다는 명분으로 침공했습니다. 이렇게 이라크전쟁이 발발했고 미국은 20년간 그 수렁에서 빠져나오지 못했습니다. 이라크전쟁은 명분이 있는 전쟁도 이길 수 있는 전쟁도 아니었습니다. 사담 후세인은 대량살상무기 대부분을 이미 폐기한 상태였습니다. 이라크전쟁으로 미국은 명분과 힘 모두 훼손되었고 세계질서는 미국 일극체제의 조종(弔鐘)을 울렸습니다. 포린어페어스 3/4월호에 실린 이 기사는 퓰리처상을 2회 수상하고 미국 컬럼비아대학교 언론대학원 교수인 유명 저널리스트 스티브 콜(Steve Coll)의 신간 '아킬레스의 덫'에 대한 서평입니다. 아프가니스탄과 빈라덴의 알카에다가 어떻게 연결되었는지를 밝힌 '유령전쟁'(Ghost War)으로 퓰리처상을 수상한 저자는 이번에는 이라크전쟁을 조명했습니다. 베트남전쟁과 함께 미국을 또 한번의 수렁에 빠뜨렸던 이라크전쟁. 기사를 읽으면서 국제정치의 냉혹함, 외교의 역할, 그리고 세계질서의 리더 미국의 역할과 한계에 대해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지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