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6.07 13:56
20여 년 전에 싸이월드로 시작된 SNS 열풍은 온라인을 통한 새로운 소통 방식을 창출했다. 친구들과 지인들은 '이웃'이란 이름으로 연결되어 서로의 미니홈피를 방문하며 사진을 구경하고 방명록을 남겼다. 언제 찾아올지 모르는 '이웃'들을 맞이하기 위해 미니홈피를 예쁘게 단장하고 사진과 글을 업데이트하면서 오늘의 조회 숫자가 얼마나 늘어났는지를 살피던 시절이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열풍은 트위터와 페이스북으로 옮아갔다. 이번엔 누군가의 홈피를 일부러 방문하지 않아도 내가 '팔로우'하는 계정들이 저절로 업데이트되어 눈앞에 펼쳐지는 사이버 세상이 시작됐다. 싸이월드가 주로 온라인 밖의 공간에서도 이미 서로 이어진 관계를 보조하고 강화하는 역할을 했다면, 트위터와 페이스북은 온라인 세계에서만 작동하는 연결망을 본격적으로 가동했다. 이 새로운 연결망은 전혀 알지 못했던 사람들과의 소통을 가능하게 했고, 비슷한 생각을 가진 이들 사이의 연대를 활성화해 주었다.
그리고, 곧이어 인스타그램의 시대가 왔다. 다른 SNS 형식들에 비해 글보다는 이미지나 동영상 등 시각적 자극에 초점을 두는 인스타그램은 사용자들이 스스로의 모습과 삶을 재구성하고 편집해서 타인에게 보여 주는 방식을 취한다. 일기처럼 나중에 자기 자신이 돌아보기 위해 일상을 박제하는 경우, 지인과 근황을 공유하기 위해 의미 있었던 경험을 기록하는 경우 등이 없지 않겠지만, 인스타그램에서 인기를 끄는 계정들은 대개 누군가의 이목을 조금이라도 더 붙잡아 놓기 위해서 패션, 여행, 맛집 등을 소재로 최대한 화려한 순간들을 포착하여 게시한다. 타이완계 미국인 시인인 빅토리아 창Victoria Chang의 '풀, 1967'은 제목이 전해 주는 느낌과는 전혀 다르게 SNS에서 활동하는 한 중년 여성의 마음 풍경을 묘사하는 시이다. 시인은 이 여성이 어떻게 SNS로 눈을 돌리게 되는지, 그리고 어떤 동기에서 SNS를 계속 이용하게 되는지를 실감 나게 그려내어 많은 이들이 현실에서 경험할 법한 상황에 대한 공감을 효과적으로 불러일으킨다.
빅토리아 창 - 풀, 1967 (번역: 조희정)
내가 문을 열 때, 나는 미소를 띠고 사람들에게 손을 흔든다, 오직
눈만 가지고 있고 한없이 즐거워하는 그들에게. 나는 내 아이들을 본다,
하지만 오직 걔들의 뒤통수만 볼 뿐이다. 그 애들이 돌아설 때, 나는
걔들을 알아보지 못한다. 그 애들은 예전에 입을 가지고 있었지만 이제 오직
눈만 가지고 있다. 나는 방을 나서길 원하지만 내가 나가면, 나는
밖에 있고, 다른 모두는 안에 있다. 그래서 다음번에, 나는 문을
열고 안에 머무른다. 하지만 그러면 모두가 밖에 있다. 애그니스는
"고독과 자유는 같은 것1"이라고 말했다. 나의 고독은
풀과 같다. 나는 그것의 존재를 너무나 의식하게 되어 그것 역시
관중처럼 느껴지기 시작한다. 때때로 나의 고독은 내 휴대폰을
움켜쥐고 셀카를 찍어, 다른 사람들이 보고 '좋아요'를 달 수 있게
어딘가 게시한다. 가끔 사람들은 나의 고독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댓글을 달고 가끔 나의 고독은 '하트' 표시로
응답한다. 그것은 나이가 그 반인 고독의 계정들을
'팔로우'하기 시작한다. 나의 고독이 우울하다면 어쩔 것인가? 나의
고독마저 홀로이기를 원하지 않는다면 어쩔 것인가?
시의 첫 부분에서 한 여성은 적극적으로 마음을 열고 타인과의 소통을 시도한다. 그녀는 "문"을 열어 바깥세상을 향하며, 얼굴에 띤 "미소"를 통해 사람들과의 만남에 대한 갈망을 드러낸다. 심지어, 이 여성은 "손을 흔들어" 자신의 존재를 알리고 누군가의 관심을 끌어내고자 하지만, "한없이 즐거워하는" 주변 사람들은 그녀에게 별다른 관심이 없다. 그들은 오직 "눈"만을 가지고 있어서 이 여성을 바라보고 평가할 뿐, 그녀와 소통하고픈 의지를 전혀 보이지 않는다. 이 중년 여성은 자신과 가장 가까운 존재인 "아이들"에게 시선을 돌려 마음을 나누고자 하지만, 그녀가 보는 것은 그저 아이들의 "뒤통수" 뿐이다.
많은 아시아계 미국인 가정에서 자녀의 양육은 엄청나게 중요한 과업으로 여겨지기에, 아마도 이 여성 역시 아이들에게 많은 기대와 사랑을 품어 왔으리라 추측된다. 하지만, 그녀가 그렇게 정성 들여 시간과 노력을 투여한 끝에 자라난 자녀들은 이제 "눈"만 가지고 있을 뿐 "입"은 없는 낯선 존재들이다. 엄마가 만들어 주는 음식을 맛나게 먹고 조잘조잘 이야기하던 아이들의 "입"은 어느덧 사라지고, 타인들과 똑같이 엄마를 멀찍이 바라보면서 평가하는 "눈"만 남아서 그녀를 주시한다. 아이들을 비롯한 주변 사람들과 함께 하고자 하는 그녀의 시도는 계속 좌절된다. 마치 숨바꼭질을 하듯, 이 여성이 의미 있는 관계를 맺고 싶은 이들은 그녀가 있는 공간을 이리저리 비껴가며 그녀를 철저히 고립시킨다.
이렇게 전개되던 시의 중반부에서 다소 갑작스럽게, 애그니스 마틴Agnes Martin의 "고독과 자유는 같은 것"이라는 말이 언급된다. 사실, 이 시가 수록된 창의 2024년 시집 <세상에 등을 돌리고With My Back to the World>는 미국의 화가이며 수필가인 마틴의 그림과 글에서 영감을 받은 시들을 담고 있다. '풀, 1967'이라는 이 시의 제목 역시 마틴의 추상화를 가리키는 것으로, 마틴은 이 그림에서 똑같은 크기의 수많은 격자로 '풀'을 표현한다. 19세기 미국 시인인 월트 휘트먼Walt Whitman이 평등하고 생명력 넘치는 미국적 개인의 표상으로 '풀'을 사용했다면, 마틴이 그려낸 '풀'은 분명한 경계를 지닌 작은 직사각형들로 재현된다. 이 격자는 자신만의 공간 안에서 고독한 자유를 영위하는 개개인의 모습이며, 마틴은 이렇게 스스로에 오롯이 집중하는 것이야말로 예술적 창조를 가능하게 하는 원동력이라고 생각했던 듯하다.
영어에서 '고독solitude'이라는 단어 자체가 부정적인 의미에서의 외로움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혼자만의 세계를 지켜낼 수 있는 적극적인 차원에서의 홀로서기를 의미하는 것이기에, '고독'이 가져다주는 창조적 힘의 의미를 머리로 수긍하기는 어렵지 않다. 하지만, 이렇게 '고독'의 힘을 이해하고 인정한다고 해서 '고독'한 상황이 누구에게나 견디기 쉬운 것으로 곧바로 다가오지는 않는다. 이 시에 등장하는 여성은 마틴의 그림과 글을 통해 '고독'이 개인의 인생에서 가질 수 있는 잠재력을 알고 있지만, 그렇다고 작은 직사각형 안에 갇힌 듯한 고립감을 긍정적인 방식으로 활용하거나 그 안에서 자유를 느끼지는 못한다.
이런 상황에서, 이 중년 여성이 자신의 '고독'을 처리하는 방법은 바로 SNS를 향하는 것이다. 그녀는 '고독'에 이끌려서 자기도 모르는 새 "셀카"를 찍고 그 모습을 인스타그램에 게시한다. 그녀의 게시물에는 '좋아요'와 댓글들이 달리기 시작하며, 현실에서 경험하지 못한 타자와의 소통은 이제 사이버 공간에서 시작되는 듯하다. 자신의 셀카 아래 누군가가 써 놓은 댓글에 '좋아요'를 뜻하는 하트가 표시되도록 핸드폰 화면을 클릭하면서, 이 여성은 누군지 알지 못하는 타인과 작은 연대의 고리를 발견한 것처럼 느낀다. '고독'에서 출발하여 SNS로 유입되는 사람들은 이 중년 여성 한 명에 그치지 않는다. 그녀는 곧이어 나이가 훨씬 어린 젊은이들을 '팔로우'하게 되고, 시인은 그들 역시 마찬가지로 '고독'의 계정들을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 준다.
그렇다면, 이런 수많은 '고독'들의 연결망으로 이루어진 SNS는 과연 조그만 직사각형 속에 고립된 사람들 사이에서 의미 있는 연대를 만들어 줄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대해 이 시는 분명한 답을 제시하지 않는다. 끝까지 의문문으로 이루어져 있는 시의 결말은 다만 화려한 외양을 가진 SNS가 실은 많은 이들이 겪는 '고독'의 징후이며 표지일 수도 있음을 말하고 있을 뿐이다. "홀로이기를 원하지 않는" 사람들이 한없는 "우울" 속으로 빠져들지 않을 수 있도록 조금이라도 도움을 줄 수 있다면, SNS는 분명 어느 정도의 단기적 효용을 가진 사회적 기제일 것이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온라인 공간에서의 대체된 관계망이 현실에서의 고립감을 오히려 심화시키지는 않는지, 혹은 인간으로서 감당해야 할 실존적 '고독'의 힘과 의미를 애초에 회피해 버리게 하지는 않는지, 이 시는 아주 조심스럽게 묻는 듯하다. "고독과 자유는 같은 것"이라는 애그니스 마틴의 말을 되새기며 홀로서기에 따르는 고통과 환희 모두를 마음속 깊이에서 받아들일 수 있을 때, 어쩌면 똑같이 '고독'을 안고 작은 격자 속에서 살아가는 다른 존재와의 진솔한 소통이 어떤 차원에서든 비로소 가능해지는 것은 아닐까? 이 시가 던지는 여러 물음들을 앞에 놓고 더 크고 묵직한 질문 하나를 떠올리게 된다.
원문: Victoria Chang - Grass, 1967
When I open the door, I smile and wave to people who only
have eyes and who are infinitely joyful. I see my children,
but only the backs of their heads. When they turn around, I
don't recognize them. They once had mouths but now only
have eyes. I want to leave the room but when I do, I am
outside, and everyone else is inside. So next time, I open the
door and stay inside. But then everyone is outside. Agnes
said that solitude and freedom are the same. My solitude is
like the grass. I become so aware of its presence that it too
begins to feel like an audience. Sometimes my solitude grabs
my phone and takes a selfie, posts it somewhere for others
to see and like. Sometimes people comment on how
beautiful my solitude is and sometimes my solitude replies
with a heart. It begins to follow the accounts of solitudes
that are half its age. What if my solitude is depressed? What
if even my solitude doesn't want to be alone?
조희정은 중앙대학교 영어영문학과 교수로 하버마스의 근대성 이론과 낭만주의 이후 현대까지의 대화시 전통을 연결한 논문으로 미시건주립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인간과 자연의 소통, 공동체 내에서의 소통, 독자와의 소통, 텍스트 사이의 소통 등 영미시에서 다양한 형태의 대화적 소통이 이루어지는 양상에 관심을 가지고 다수의 연구논문을 발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