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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청기사파 반란자들의 눈부신 예술: 테이트모던 '표현주의자들' 전시 리뷰

바실리 칸딘스키, 가브리엘레 뮌터 그리고 동료 예술가들의 예상치 못한 색채를 담아낸 작품들이 매혹적으로 보여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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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츠 마르크, <호랑이>, 1912, Lenbachhaus Munich, Donation of the Bernhard and Elly Koehler Foundation, 1965

2024.06.28 15:23

Financial Ti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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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표현주의 화가 가브리엘레 뮌터의 유화 작품에는 낮게 깔리는 쪽빛 여름 하늘 아래 파릇파릇한 알프스 산비탈에서 나른하게 누워 있는 두 친구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강렬한 검은 윤곽선과 보석 같은 색채는 바이에른 지역의 민속예술에서 영감을 받았지만, <야블렌스키와 베레프킨>(1909)의 주인공들은 1차 세계대전으로 무참히 해체된—하지만 전쟁 이후에도 오랫동안 영향을 끼쳤던— 불운한 미술가 그룹의 일원들이었다.


일하지 않아도 될 충분한 재산을 가졌던 베를린 시민 뮌터는 1911년 뮌헨에서 그녀의 연인이자 이전에는 스승이었던 바실리 칸딘스키가 공동 창립한 '청기사' 그룹의 핵심 인물이었다. 이 청기사 그룹에서 유럽 표현주의가 태어났다. 칸딘스키와 바이에른 출신의 화가 프란츠 마르크는 종종 청기사파의 선도자로 더 많이 소개되었지만, 런던 테이트모던에서 열리고 있는《표현주의자들: 칸딘스키, 뮌터, 그리고 청기사》는 결점도 없진 않지만 흥미로운 전시로 뮌터와 다른 여성 화가들을 전면에 내세우고 있다.


17명의 예술가 작품들이 소개되는 이번 전시는 1960년 이후 영국에서 열리는 첫 번째 청기사파 전시이다. 75점이 넘는 작품들은 뮌헨의 렌바흐하우스 뮤지엄에서 대여한 것들이며, 이 뮤지엄은 뮌터가 80세가 되던 해인 1957년에 전쟁의 파괴로부터 지켜낸 다수의 작품들을 기증한 곳이다. 이 예술가 그룹은 1938년 런던에서 처음 공개되었는데, 당시 선보인 작품들 중에는 이번 테이트모던 전시의 마지막 전시실에서 볼 수 있는 칸딘스키의 무지개가 가로지르는 추상화 작품 <코사크>(1910-11)가 포함되었다. 이 작품은 전년도(1937년)의 악명 높은 뮌헨 전시회(《퇴폐 예술 전시회》)에서 나치가 그들의 작품을 "퇴폐 예술"로 선언한 데 대한 반박이었다.


바실리 칸딘스키와 프란츠 마르크, <청기사>, R. Piper & Co., Munich, 1912, Book cover © Victoria and Albert Museum, London

바실리 칸딘스키와 프란츠 마르크, <청기사>, R. Piper & Co., Munich, 1912, Book cover © Victoria and Albert Museum, London


칸딘스키가 기사(騎士)에, 그리고 마르크가 동물(특히 말)에 매료된 데서 이름을 따온 '청기사1' 그룹은 강렬한 색채와 무조(無調)의 음악, 퍼포먼스 아트를 실험하며 사실적 지각(知覺)을 벗어나고자 반항하는 예술가의 내적 경험을 드러냈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국제주의 하나만으로도 나치의 표적이 되었을 것이다. (진열용 유리케이스에 전시되어 있는) 칸딘스키의 목판화 표지와 함께 에세이와 이미지가 수록된 '청기사 연감'(1912)의 서문 초안에서 칸딘스키와 마크는 예술이 "국경이나 국가를 알지 못하고 오직 인류만 알기 때문에"라면서 국제주의를 지지했다.



바실리 칸딘스키, <승마 커플>, 1906-1907, Lenbachhaus Munich, Donation of Gabriele Münter, 1957

바실리 칸딘스키, <승마 커플>, 1906-1907, Lenbachhaus Munich, Donation of Gabriele Münter, 1957


뮌헨의 이 이른바 독일 표현주의자들 중에서 바이에른 태생은 마르크뿐이었다. 오데사에서 자란 모스크바 태생의 법대생 칸딘스키는 양파모양의 돔들2을 배경으로 말을 탄 채 동화 같은 포옹을 하는 <승마 커플>(1906-07)이라는 점묘화를 그렸다. 이 작품은 러시아 북부에서 민족지학적 현장 학습을 통해 얻은 예술적 깨달음을 기념하기 위해 제작한 것이다. 미국 남북전쟁을 피해 독일로 돌아온 이민자 가정 출신 뮌터는 과거 카메라를 들고 때로는 파격적인 시선으로 미국 전역을 누볐는데, 그녀의 '파격적인 시선'은 유유히 넘실대는 드레스 차림의 텍사스 흑인미녀들을 촬영한 사진 <일요일 나들이 옷을 입은 세 여성>으로부터 알 수 있다.


뮌터는 1904~08년 칸딘스키(자신의 사촌과 결혼한 상태였다)와 함께 유럽과 튀니지를 여행했다. 이 뮌터-칸딘스키 커플과 이들이 초대하지 않았더라면 계속 외톨이로 지냈을 스위스계 독일인 예술가 파울 클레 등 주변에 모인 사람들은 뮌헨과 뮌헨의 예술가 지역인 슈바빙에 이끌렸다. 슈바빙은 특히 차르가 지배하는 러시아 제국으로부터 박해를 받고 도망쳐 온 사람들에게 비교적 자유로운 피난처였다. 뮌터와 칸딘스키가 상트페테르부르크 미술 아카데미 출신의 마리안 폰 베레프킨과 알렉세이 야블렌스키 부부와 함께 1909년 바이에른의 시골 무르나우에서 예술가 공동체를 설립했을 때, 지역 주민들은 이 공동체를 "러시아의 집"이라고 불렀다.


가브리엘레 뮌터, <식탁에서 칸딘스키와 에르마 보시>, 1912, Lenbachhaus Munich, Donation Gabriele Münter © DACS 2024

가브리엘레 뮌터, <식탁에서 칸딘스키와 에르마 보시>, 1912, Lenbachhaus Munich, Donation Gabriele Münter © DACS 2024


"우리는 자기표현의 한 형식으로서 그림에 대한 공통된 열정을 공유하는 친구들일 뿐이었습니다"라고 뮌터는 회상했다. 이들의 국경을 초월한 우정은 초상화를 통해 생생하게 드러나는데, 이는 표현주의자들이 추상만큼이나 형상을 수용하고, 앙리 루소의 "천진난만한" 그림을 전시했다는 사실을 상기시켜 준다. 기쁨에 들뜬 칸딘스키가 1903년에 그린 거의 인상주의라고 할만한 작품인 <칼 뮌츠—가브리엘 뮌터 페인팅 II>에서 이젤 옆에 강렬한 파란색 드레스를 입은 연인을 묘사하고 있다. 뮌터의 <식탁에서 칸딘스키와 에르마 보시>(1912)는 (독일 바이에른 지방에서 입는) 가죽 반바지를 입은 채 자신의 생각에만 골몰한 그녀의 연인(칸딘스키)이 티테이블에 팔꿈치를 뻣뻣하게 놓고 있는 트리에스테 출신이며 이전에 칸딘스키의 학생이였던 그녀(뮌터)를 가르치는 모습을 장난스럽게 그렸다.


베레프킨은 뮌헨의 아방가르드 살롱 사교가이자 후원자였다. <무용수, 알렉산더 사차로프>(1909)에서는 중성적인 성향의 마리우폴 태생 퍼포먼스 아티스트인 그녀의 제자를 입술에 빨갛게 루즈를 바른 모습으로 묘사하고 있다. 1910년에 그린 비범한 베레프킨의 자화상에서는 등허리가 꼿꼿하고 도전적인 붉은 눈을 가진 그녀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상트페테르부르크 미술 아카데미에서 베레프킨이 만난 야블렌스키는 뮌터의 <듣기(야블렌스키의 초상)>(1909)의 주인공이 되는데, 이 작품은 전간기3(戰間期) 독일의 신즉물주의(4新即物主義)를 예견하며 캐리커처 방향으로 전환한 작품이다.


가브리엘레 뮌터, <듣기(야블렌스키의 초상)>, 1909, Lenbachhaus Munich, Donation of Gabriele Münter, 1957 © DACS 2024

가브리엘레 뮌터, <듣기(야블렌스키의 초상)>, 1909, Lenbachhaus Munich, Donation of Gabriele Münter, 1957 © DACS 2024


이 느슨한 청기사 그룹의 또 다른 예술가로는 어거스트 맥케, 엘리자베스 맥케 부부가 있다. 어거스트 맥케의 <사과를 든 초상(사과를 든 엘리자베스)>(1909)에서는 빛나는 과일이 담긴 표현주의풍 그릇이 아내의 자연주의적인 얼굴을 돋보이게 한다. 오늘날의 우크라이나 출신이자 파리에서 살고 있던 엘리자베스 엡스타인(1911년의 꾸밈없는 자화상에서 창백한 살갗을 드러낸 모습으로 묘사)은 이 독일계 그룹을 로버트 들로네와 그의 오데사 출신 아내 소냐와 연결시켜주는 프랑스 인맥이 되었다.


무르나우에서의 시골 생활과 흥분된 실험은 칸딘스키를 추상의 길로 이끌었고, 이러한 추상화는 이 지역의 멋진 풍경이나 <암소>(1910)와 같은 목가적인 그림을 통해 볼 수 있다. <암소>에서는 우유를 짜는 여성의 모습이 암소의 환한 노란색 얼룩들에 가려져 거의 보이지 않는다. 테이트모던에서 이어지는 멋진 그림들은 맥락을 알면 더 잘 감상할 수 있다. 신지학5(神智學) 운동의 절충주의적 종교성에 열광한 칸딘스키는 예술가의 표현 욕구를 악에 대항하는 힘으로 보았다. 이젤에 대한 사제 같은 야망을 포기한 마르크는 세잔과 루소만큼이나 불교와 애니미즘에 영향을 받아 <호랑이>(1912)와 <수도원 정원의 암사슴>(1912) 같은 매혹적인 동물 작품을 그렸고, 그의 아내 마리아 프랑크 마르크는 <소녀와 아이>(1913경)에서 유년 시절의 순수성을 불러일으켰다.



프란츠 마르크, <소, 빨강, 초록, 노랑>, 1911, Lenbachhaus Munich

프란츠 마르크, <소, 빨강, 초록, 노랑>, 1911, Lenbachhaus Munich


모더니스트들은 모든 곳에서 자극을 찾았다. 그러나 이 전시회는 디아스포라적 네트워크와 민속적 요소는 조명하지만, 이들 예술가들의 비유럽적 예술 작업들은 거의 조명 하지 않는다. 비판적 관점에서 이 예술가들의 소장품들과 민족지학적 사진들에 있는 "식민지 문화 작품"들을 몇 개 전시한 것이 전부다. 이로써 중요한 연결을 보여줄 기회를 놓친 것이다. 마르크의 그림 <눈 속의 사슴 II>(1911)는 일본 목판화의 영향을 받은 것이 분명하지만, 그의 방대한 일본 판화 컬렉션이 아닌 색채 이론과 연결지어 전시되었다. 반대로 뮌터의 튀니지 사진들은 오리엔탈리즘 회화에는 없는 식민지적 '복잡성'을 드러낸다고 주장하는데, 이는 베일을 쓴 여성과 낙타 시장을 묘사한 판화만으로는 증명할 수 없는 주장이다.


이번 전시회는 표현주의 회화와 표현주의 음악의 친화성을 탐구하는 전시실을 가지고 있어서 더욱 탄탄한 기반을 가지게 된다. 첼리스트인 칸딘스키, 바이올리니스트인 클레를 비롯해 청기사파의 몇몇 아티스트는 음악가였다. 이들과 함께 그림을 전시한 작곡가 아르놀트 쇤베르크는 "[칸딘스키에게] 외부 대상은 색과 형태를 즉흥적으로 표현하도록 하고 이전에는 작곡가만이 했던 것처럼 칸딘스키 자신을 표현하도록 자극하는 것 이상이 아니기 때문에" 결국 화가들이 음악가의 길을 쫓고 있다고 봤다.


1911년 칸딘스키가 베레프킨의 살롱에서 마르크를 만난 다음 날, 두 사람은 뮌헨에서 열린 쇤베르크 콘서트에 참석했다. 이 콘서트에 대한 칸딘스키의 회화적 반응은 <인상 3(콘서트)>이었는데, 이 작품에는 열광하는 청중이 눈부신 노란색 불빛 아래에서 그랜드 피아노의 검은 덩어리와 합쳐지는 것 같다. 칸딘스키와 그의 친구들에게 색채는 음악과 마찬가지로 "영혼에 직접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수단"이었다.



전시는 2024년 10월 20일까지

tate.org.uk



필자 마야 자기(Maya Jaggi)는 인도계 프리랜서 평론가로 예술 및 문학 분야에 대해 파이낸셜타임스, 가디언, 이코노미스트, 뉴욕리뷰오브북스, 뉴스위크 등에 기고하고 있으며, 귄터 그라스, 오에 겐자부로, 토미 모리슨 등 12명의 노벨문학상 수상자를 인터뷰했다. TV와 라디오 진행자도 맡고 있다.



역자 이희정은 영국 맨체스터대 미술사학 박사로 대영박물관 어시스턴트를 거쳐 현재 국민대 강사로 강의와 연구를 이어가고 있다. 역서로 '중국 근현대미술: 1842년 이후부터 오늘날까지'(미진사, 2023)가 있다.

1888년 창간된 영국의 대표적인 일간 경제지. 특유의 분홍빛 종이가 트레이드마크로 웹사이트도 같은 색상을 배경으로 쓰고 있을 정도입니다. 중도 자유주의 성향으로 어느 정도의 경제적 지식을 갖고 있는 화이트 칼라 계층이 주 독자층입니다. 2015년 일본의 닛케이(일본경제신문)가 인수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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