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사회이슈

고전 깊이 읽기가 당신의 영혼을 구원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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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Oscar Ovalle

2024.07.12 1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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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배움을 추구할 것인가, 어떻게 우리 아이들을 가르칠 것인가라는 문제는 영원한 숙제인가 봅니다. 예일대에서 10년간 영문학을 가르쳤던 윌리엄 데레저위츠는 2008년에 학교를 떠나 현재는 전업 에세이스트, 비평가로 활동하고 있는데, 그는 PADO가 이전에 소개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대학 캠퍼스 밖에서 진정한 배움, 진정한 인문학의 가능성을 모색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스탠포드라는 서부지역에서 이런 운동을 하는 테드 지오이아와는 달리 동부 뉴욕을 중심으로 이 운동을 펼치고 있는 데레저위츠는 야스차 뭉크Yascha Mounk 존스홉킨스대 국제학대학원 교수가 프랜시스 후쿠야마 등과 함께 창간한 온라인 매체 Persuasion에 2024년 5월 29일 기고한 글에서 '고전' 읽기를 중시합니다. 느리게 조금씩 음미해가며, 그리고 자기 자신과 대화를 해가며 인류의 지혜가 담긴 고전을 읽어나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합니다. 물론 이런 식의 배움이 대학 캠퍼스에도 가능합니다만, 현재 미국에서는 시간이 지날수록 어려워지고 있다고 합니다. 아마 우리의 경우는 더 어려울 것입니다. 제대로 번역되어 있는 고전이 드물뿐더러 그런 '느린 배움'을 허용하는 분위기도 아닐 듯 합니다. '먹고 사는 문제'에 골몰한 시대라서 더욱 그럴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인류가 이 세상에 나타난 이래 인류로서 가지는 삶의 문제, 공동체를 꾸리는 문제 등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런 점에서 이런 근본적인 삶과 사회의 문제를 고민해온 선현(先賢)들의 생각은 지금도 도움이 됩니다. 어느 집은 그 집만의 독특한 냄새가 있습니다만, 그 집안 사람들은 그것을 모릅니다. 밖에서 온 사람만 알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한 시대를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은 그 시대의 특징과 한계를 모릅니다. 그것은 그 시대를 탈출했다가 돌아와야 알 수 있습니다. 고전과 함께 하는 시간 동안 우리는 바로 우리가 속한 시대를 이탈할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그 이탈의 시간을 거친 후 다시 우리 시대로 돌아왔을 때 우리는 우리 시대의 특징과 한계를 볼 수 있게 됩니다. 이러한 경험이 없이는 우린 난무하는 루머, 유행, 편견, 근거없는 믿음의 급류에서 벗어 날 수 없습니다. 데레저위츠는 이 급류에서 벗어나는 자신의 방식을 우리에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길을 찾아봐야 할 것 같습니다.


고등교육은 교착 상태에 빠져 있다. 많은 부분이 형편없는데 그 어떤 것도 변화할 가능성이 없다. 대학들은 스스로를 개혁할 의향이 없어 보인다. 그럴 의향이 있더라도 방법을 모르며, 알고 있더라도 할 수 없을 것이다. 관료주의적 관성, 교수진의 저항, 그리고 다양한 이해관계자들의 상충하는 의제 속에서 협동적인 변화는 불가능해 보인다. 게다가 적어도 소수 엘리트 학교에서는 비즈니스가 잘 되고 있다. 일각에선 학생들과 부모들이 하버드와 예일 같은 대학들을 혐오감으로 외면하리라 말하지만 이는 환상에 불과하다. 엘리트 교육기관이 엘리트 고용주로 가는 주된 통로로 남아 있는 한(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가진 자들과 노력하는 자들은 그곳으로 몰려들 것이다. 다른 모든 것—수업, 정치, 예술, 과학—은 부차적이다.


중등(및 고등) 이후의 교육에서 흥미로운 일들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런 일들이 대부분 캠퍼스 안에서 일어나지 않을 뿐이다. 사람들은 내게 이런 현상들에 대해 말한다. 그들이 시작했거나, 시작하고 있거나, 참여한 계획들에 대한 것이다. 내가 아는 한, 이런 현상들은 크게 두 가지 유형으로 나타난다. 사람들이 학부 경험에 대해 제기하는 두 가지 근본적인 불만에 해당하는 것이다. 첫 번째 불만은 대학이 그들을 현실 세계에 준비시키지 못했다는 것이다. 논문, 많은 과제들, 무의미한 요구사항, 고립된 학문 분야들과 추상적인 이론 등 대학에서 경험하는 것들은 학생들이 실제로 삶에서 하고 싶은 그 어떤 것과도 동떨어져 보인다는 것이다.


이러한 불만을 해결하는 프로그램들은 놀랍도록 일관된 특징들을 보여준다. 학제적interdisciplinary 접근을 취하며, 보통 분리되어 있는 방법론과 관점들—예를 들어 공학과 사회과학—을 통합한다. 비형식적이며 교원 주도 수업과 전통적인 평가 방식을 피한다. 경험을 중시하며, 읽고 쓰는 것보다는 실행—창작, 협동—에 더 초점을 맞춘다. 외부 활동을 중시하며 학생들을 지역사회로 데려가 봉사 프로젝트, 인턴십, 예술 설치 또는 공연에 참여시킨다. 이런 프로그램들은 특정한 목적을 갖고 있는데 주로 사회 개선이나 환경 보호와 관련이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학생 중심적이다. 참가자들은 프로그램이 제공하는 자원들을 활용하여 맞춤형 커리큘럼을 구성함으로써 자신의 교육을 주도할 수 있다(그리고 그렇게 할 것으로 기대된다). 한 마디로 이러한 노력들은 '참여'를 강조한다.


이 모든 것은 그것이 가능한 한에서는 좋다. 고등교육에도 이와 유사한 사례와 선례가 존재하며(에버그린, 베닝턴, 안티오크, 햄프셔) 진보적 교육(특히 중등교육에서)에서도 마찬가지다.. 고등학교들은 "프로젝트 기반 학습"에 초점을 맞추며 평가는 포트폴리오와 공개 전시를 통해 이루어진다. 학생은 문제(인간적 필요, 불의, 과소대표의 사례)를 식별한 다음, 대응책(물리적 체계, 지역사회 대상 프로그램, 예술 프로젝트)을 고안하고 실행한다.



다시 말하지만, 나는 이런 프로그램들이 나온 배경과 문제의식에 동의하고 많은 학생들이 바로 이런 걸 원한다는 것도 안다. 그러나 이러한 교육 접근법이—'문제' 접근법, 'STEAM'(STEM1 + 예술) 접근법—빠뜨리고 있는 것들이 나를 불편하게 만든다. 그것은 인문학을 빠뜨린다. 책을 빠뜨린다. 문학과 철학, 역사와 미술사, 그리고 종교사를 빠뜨린다. 실용적 용도로 바로 전환될 수 없는 모든 종류의 탐구 방식—성찰, 사변, 과거와의 대화—을 빠뜨린다. 세상 모든 것이 해결해야 하는 '문제'는 아니다. 세상을 일련의 '문제'들로 보는 것은 세상과 자아의 잠재력을 제한한다. 어떤 노래가 다루는 '문제'란 무엇인가? 볼테르를 읽는 것이 어떤 문제를 어떤 예측 가능한 방식으로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인가? '문제' 접근법—'참여' 접근법, '세상을 구하자'는 접근법—은 결국 내가 '배움learning'이라고 부르는 것을 빠뜨린다.


바로 이것이 대학 졸업생들이 표현하는 두 번째 불만이다. 이런 본질적인 의미에서 어떤 것도 배웠다는 느낌 없이 대학을 졸업했다는 것이다. 대학에서의 교육은 감동을 주지도, 스스로를 변화하게 만들지도 못했다는 것이다. 어딘가에 보물—그걸 '고전Great Books'이라 부르든 그냥 양서라고 부르든, 인류의 지혜와 가장 훌륭한 사상이 담긴 것—이 있으며 대학 교육의 목적은 그 안에 있는 보물을 일깨우는 것이라고. 학생들은 그런 인류의 지혜에 입문하기 위해 훌륭하다는 교육기관(그 건축물이 문화를 보여주고 그 역사가 깊이를 보증하는)에 들어왔지만 그런 걸 경험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알 수 이유로, 기만당했다고 느낀다.


나는 컬럼비아와 예일에서 이런 학생들을 본 적 있다. 결코 많지는 않았다. 그리고 인문학 관련 학과 등록 현황을 보면 점점 더 줄어들고 있다. (2013년부터 2022년까지 영문학 학사 학위로 졸업하는 사람들의 수는 36% 감소했다. 전체 학위 중 비율로는 42% 감소하여 60명 중 1명 미만이 되었다.) 그들은—순례자들, 태아 상태의 지식인들, 불타오르는 영혼들은—그들이 대학에 온 목적인 그런 종류의 교육을 받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에 대해 내게 말하곤 했다. 교수들은 종종 다른 일에 정신이 팔려 있었고, 멘토링이나 시간에 구애받지 않는 상담에 대한 인내심이 거의 없었다. 철학과 같은 분야에서조차 수업은 생기 없고 비인격적으로 느껴졌으며 마치 숫자 대신 단어를 사용하는 공학 같았다. 무엇보다도 최악은 동료 학부생들, 출세주의자들과 경력주의자들이었다. "주변의 모두가 자기 영혼을 팔려고 할 때 자기 자신의 영혼을 구축하기는 어려워요." 한 학생이 한번은 이렇게 말했다.


그 학생의 이름은 매튜 스트로더였다. 근래 진지한 학습에 대한 사람들의 갈망에 응해 캠퍼스 밖에서 생겨난 이니셔티브 중 가장 잘 알려진 이니셔티브 두 가지에 대해 내가 알게 된 것은 바로 매튜를—당시 그는 30대 초반이었고, 여전히 그런 걸 모색 중이었다—통해서였다. 첫 번째는 2012년에 설립되어 현재 매년 수십 개의 과정을 대면과 온라인으로 제공하는 브루클린사회연구소Brooklyn Institute for Social Research이다. 이곳의 세미나는 4주 동안 매주 3시간씩 진행된다. 최근에는 멜빌의 '사기꾼', 에리히 아우어바흐Eric Auerbach의 '미메시스', 동화, 그리고 메소포타미아에 대한 강의가 제공됐다. 좌파적 성향을 가진 브루클린사회연구소는 자크 라캉, 질 들뢰즈, '인종 자본주의', '임신의 정치학' 등, 비판이론과 사회과학 분야의 과정도 운영한다.


매튜가 내게 알려준 두 번째 이니셔티브는 2020년에 시작된 캐서린프로젝트Catherine Project다. 이곳의 분위기는 브루클린사회연구소와 매우 다르다. 브루클린사회연구소는 컬럼비아대학교 박사과정생들이 설립했다. 캐서린프로젝트는 애나폴리스의 리버럴아츠 대학인 세인트존스칼리지의 교사이자 가톨릭 개종자이며, 온타리오 동부의 수도원 공동체 마돈나하우스에서 3년을 지냈던 제나 히츠Zena Hitz가 설립했다. 브루클린사회연구소는 1930년대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마르크스주의 사회학 사상의 탄생지인 프랑크푸르트사회연구소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다. 캐서린프로젝트는 초기 기독교 순교자인 알렉산드리아의 카타리나Catherine와 마돈나하우스의 설립자인 캐서린 도허티Catherine Doherty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다.


브루클린사회연구소는 교육 못지 않게 정치를 중요시한다. 이곳의 '프락시스Praxis' 프로그램은 노동조합과 비영리단체에 워크샵과 기타 자원을 제공한다. 캐서린프로젝트는 스스로를 '배움의 공동체'를 만든다고 말한다. "대화와 환대", "단순함[과] 투명성"이 이곳의 원칙 중 하나다. 수업(세인트존스의 관행을 따라 '튜토리얼tutorial'이라고 불린다)은 무료이며(브루클린사회연구소는 335달러), 수강 인원 제한은 4~6명이고(브루클린사회연구소는 23명), 12주 동안 매주 2시간 진행되며, 그리스, 로마의 고전, 파스칼과 키르케고르, 단테와 세르반테스 같은 고전을 중심으로 다룬다(캐서린프로젝트는 또한 더 넓은 범위의 텍스트를 다루는 독서 그룹을 다수 진행한다). 브루클린사회연구소가 학문적 노동을 위한 더 공정한 시장을 만들고자 하는 반면—수업료의 대부분은 강사에게 지급된다—캐서린프로젝트는 선물경제gift economy로 기능한다(하지만 강사들에게 약간의 사례금을 제공하기 시작할 계획이다).


2014년에 설립되어 실리콘밸리에서 인문학 기반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제퍼연구소Zephyr Institute도 있다. 2020년부터 학부생, 대학원생, 그리고 젊은 전문가들의 혼합 그룹을 위해 온라인 세미나를 진행해온 헤르토그재단Hertog Foundation의 인문학 프로그램도 있다. 대면과 온라인에서 모두 증가하고 있는 독서 모임과 살롱들을 더해보자. 그리고 틀림없이 내가 아직 모르는 이니셔티브들이 더 많이 있을 것이다.


인문학 프로그램이 이렇게 급증한 데에는 여러 요인이 작용한다. 물론 그 중 하나는 인터넷이다. 학습의 매체이자 오프라인 행사를 홍보하는 수단으로 기능한다. 또 다른 이유는 학계의 인문학 학과들이 정치적 선동과는 반대로 오랫동안 인문학적 탐구에 적대적이었다는 느낌을 대학생들이 받아왔다는 것이다. 상위권 공립대학에서 픽션 전공으로 예술석사(MFA)를 했던 한 학생은 석사과정의 글쓰기 지도는 그저 그랬지만, 적어도 워크샵에서는 그가 "우스꽝스럽다"고 표현한 그 대학의 영문학과에서 벌어지는 것과는 달리 정말로 글을 읽을 기회를 제공했다고 말했다.


세 번째 이유는 앞서의 두 가지에 비해 덜 두드러진다. 학계 내 고용시장의 장기적 위기—시간강사에 대한 의존 증대, 박사학위 소지자의 과잉 공급—는 학계에 느슨하게 연결되어 있거나 학계와 완전히 분리된 자격 있는 강사를 대거 만들어냈다. 브루클린사회연구소의 강사진은 거의 모두가 박사 학위를 가지고 있으며, 시간강사(그리고 정교수) 뿐만 아니라 출판 편집자, 전업 작가, 대학 사서, 고고학자, 그리고 정신분석 실습생도 있다. 러셀 저코비Russell Jacoby가 지적했듯이, 그가 '마지막 지식인The Last Intellectuals'에서 기록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수십 년간의 지식인들의 대학으로의 이주는 최근 역전되었다. 작은 잡지들의 부상, 또는 재부상(과거의 Dissent, Commentary, Partisan Review나 요즘의 n+1, The New Inquiry, The Point, The Drift 등)도 이런 추세를 반영하는 것이다.


캐서린프로젝트의 강사진은 네 번째 요인을 반영한다. 캠퍼스 인문학의 현실에 절망하는 학생들도 있지만 마찬가지로 느끼는 교수들도 있다. 히츠가 내게 말하길, 캐서린프로젝트에 참여하는 강사들 상당수가 정규직 교수직을 가지고 있다. "학자들이 우리 프로젝트에 이끌려 와서 학습 그룹에 참여하기도 하고 그룹을 이끌기도 해요. 전통적인 교육기관에서 지적인 삶이란 죽어가고 있거나 이미 죽었기 때문이죠." 학부생 교육은 "특히 힘든 일"이라며 그는 캐서린프로젝트가 교수진에게 "정말로 배우고 싶어 하는" 사람들을 가르칠 기회를 제공한다고 덧붙였다.


나라면 여기에 '배울 수 있는' 사람을 가르칠 기회도 있다고 덧붙이겠다. 9년 전 스티븐 그린블랫Stephen Greenblatt은 이렇게 썼다. "하버드의 내 셰익스피어 수업을 듣고 있는 매우 재능 있는 학생들조차도 내가 아주 오래전에 전에 그랬던 것보다, 또는 1980년대 버클리의 내 학생들이 그랬던 것보다 셰익스피어의 미묘한 언어의 마법에 감동받을 가능성이 적습니다. ... 문제는 그들의 언어에 대한 몰입이 ... 종종 놀랍도록 얕거나 미지근해 보인다는 것입니다." 물론 지금은 상황이 훨씬 더 나빠졌다. 인문학 학과 등록자 수의 급락에 대한 작년 기사에서, 또 다른 하버드 영문학 교수인 아만다 클레이보Amanda Claybaugh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제가 마지막으로 '주홍 글자'를 가르쳤을 때, 학생들이 문장을 문장으로 이해하는 데 정말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어요—예컨대 주어와 동사를 식별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 거죠." 이게 하버드에서 벌어진 일이다. 교수들이 자신이 사랑하는 책에 대해 실제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학생들을 갈망하는 건 당연하다.


나 자신도 이러한 캠퍼스 밖에서 벌어지는 기획에 관여하고 있다. 내 학생 매튜는 수년간 자신의 이상적인 지적 환경을 찾고 꿈꾸다가 직접 만들기로 결심했다. 그것은 문학 및 철학 텍스트의 엄격한 그룹 학습과 생활 속에서의 마음챙김, 그리고 통신기술에 대한 절제를 결합시키는 것이었다. 대면 공동체, 산만함으로부터의 도피처, 성인을 위한 학교가 될 것이었다. 규모는 작고, 자치적이며, 사색적이고, 무료일 것이었다. 그는 딥스프링스 칼리지Deep Springs College, 플라톤의 아카데미, 빌라 루비나치Villa Rubinacci에서의 니체의 경험 등 여러 사례를 연구했다. 그는 방대한 노트를 작성했다. 일련의 원칙들의 초안을 작성했다. 뉴욕 북부에 부동산을 구입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계획이 실현되는 걸 보지 못했다. 매튜는 작년 암으로 35세의 나이에, 그의 인생의 한복판에서 사망했다. 하지만 그의 꿈의 아름다움과 그가 불러일으킨 사랑이 너무나 컸기에, 그의 지인 중 일부가 미망인 베르타 윌리쉬의 주도 하에 그 꿈을 실현시키기로 결심했다. '성찰적 삶을 위한 매튜 스트로더 센터Matthew Strother Center for the Examined Life'는 각각 5명의 참가자를 위한 열흘 짜리 시범 프로그램 3개를 운영하고 있다(이후 그룹 정원을 10명으로 확대하고 더 긴 세션을 제공할 계획이다). 교수진에는 나 자신, 제나 히츠, 그리고 매튜의 친구이자 마운트세인트빈센트대학교 교수 렌 나렌츠Len Nalencz가 포함된다.


시범 프로그램 발표에 대한 세간의 반응은 고등교육의 한계를 벗어나 가장 깊은 질문들을 다루는 텍스트 기반 탐구에 대한 큰, 충족되지 않은 욕구가 존재함을 내게 확인시켜 주었다. 부족했던 홍보, 촉박한 데드라인, 그리고 꽤 까다로운 지원 과정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160개 가량의 지원서를 받았다. 지원자들은 졸업을 앞둔 대학 4학년 학생부터 70대까지 다양했다. 교사, 예술가, 과학자, 그리고 다양한 분야의 박사과정 학생들도 있었다. 잠수함 장교, 랍비 학생, 회계사, 그리고 벤처캐피털리스트, 은퇴자, 어린 자녀를 둔 부모, 그리고 갈림길에 선 20대들도 있었다. 인도, 요르단, 브라질, 그리고 다른 9개국에서도 지원서가 들어왔다. 지원자들은 전체적으로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가능했다면 우리는 15명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을 받아들였을 것이다.


왜 참여하고 싶은지 물었을 때, 많은 사람들이 공식 교육의 병폐에 대해 이야기했다. "우리가 배움과 갖는 관계는 정말 심하게 망가져 있어요." 한 지원자가 말했다. "그것은 무서운 것이 아니라 재미있어야 해요." 그는 자신이 학생이었을 때 느꼈던 '답을 알고 있어야 한다'는 압박을 거론하며 그게 말이 안 된다고 했다. 다른 지원자는 공부나 주의력이란 개념이 '능력 측정'처럼 자체적인 인센티브를 가진 교육기관의 전유물이 되었다고 했다. "우리에겐 현대 대학의 자격 인증 시스템과는 다른 독서와 탐구의 기회가 필요해요." 그는 계속해서 말했다. 왜냐하면 대학에는 "그런 종류의 학습이 펼쳐지는 느린 방식"을 방해하는 것들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명문 교육기관을 중퇴하고 열심히 독학을 한 다른 지원자는 건축이론가 크리스토퍼 알렉산더의 '친밀도의 변화intimacy gradient' 개념을 사용하여 대학 과정이 일반적으로 허용하는 것보다 자료와 더 깊이 접촉하고 싶은 욕구를 설명했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와 같은 삶의 중요한 질문들에 대한 답은 친밀도의 변화를 따라 안으로 들어감으로써 찾을 수 있지, 주변을 어슬렁거리며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에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우리 지원자들 중 많은 이들에게—물론 이 질문은 우리 프로그램이 다루고 있으며 인문학이 다루는 문제이기도 하다—배움은 실존적 무게를 갖는다. 교육에 대해, 테크놀러지로부터의 단절에 대해, 창의성과 고독을 위한 시간을 갖는 데 대한 그들의 이야기 기저에서, 나는 힘과 의제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어 하는 욕구를 감지했다. 대학의 '관련성relevance' 의제, 교수진의 정치적 동원 의제, 시장의 생산성 의제, 인터넷의 감시와 중독 의제. 간단히 말하자면 동질성을 강제하는 자본주의적 알고리즘적 이데올로기적 '헤어볼'(소화를 막고 있는 뱃속 털뭉치) 전체로부터의 자유다. 그 욕구는 포섭되지 않고, 도구화되지 않으며, 개인으로 남아 (혹은 개인이 되어), 평균mean이나 밈meme으로의 퇴행에 저항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매튜 스트로더 센터가 학습 자체를 위한 추구 이외의 어떤 목표도 갖지 않는 것이—이는 캐서린프로젝트와 다른 캠퍼스 밖 인문학 프로그램에도 마찬가지다—중요한 이유다. 학생들이 배운 것으로 무엇을 하고 싶어 하든, 배운 것으로 그들이 어떤 사람이 되든, 그 자체가 바로 목적이다. 이것이 자유다. 교육이 특정 방향을 가리키지 않을 때, 그 가능성은 무한하다. 대학을 졸업한 후, 매튜는 유럽으로 떠났다. 나는 5년 동안 그에 대해 아무 소식도 듣지 못했다. 마침내 나는 편지를 받았다. 약 30페이지에 달하는, 내 평생 받은 것 중 가장 긴 편지였다. 그것은 독서 기록을 겸한 영혼의 일기였다. 그는 조이스, 헤세, 벨로, 카뮈, 로렌스, 라킨, 밀러, 서머싯 몸, 헤밍웨이, 체스터턴, 셀린저, 듀렐, 오직, 블레이크, 고리키, 체호프, 제프 다이어, 폴 굿맨, 로베르토 칼라소, 데이비드 실즈, 그레고어 부이에, 그리고 조지 WS 트로우를 언급했다. 말미에 그는 이렇게 썼다: "저의 이야기는 곧은 강처럼 흘러 현재의 넓은 삼각주에 다다랐습니다. 바다를 바라보니 갈 곳은 어디에도 없지만 어디로든 갈 수 있습니다." 정확히 그러하다.



윌리엄 데레저위츠는 1998~2008년간 예일대 영문학 교수로 학생들을 가르쳤고 현재는 전업 에세이스트이자 비평가로 활동중이다. '공부의 배신Excellent Sheep', '예술가의 죽음The Death of the Artist', '고독의 끝: 문화와 사회에 관한 에세이 선집The End of Solitude'을 포함 5권의 책을 썼고, 네이션, 뉴리퍼블릭, 뉴욕타임스, 애틀랜틱 등에 기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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