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8.09 14:53
'라떼' 이야기를 꺼내는 것이 '꼰대'가 되는 지름길인 세상이다. 누구의 인생이든 돌아보면 울퉁불퉁 여러 가지 굴곡들이 있게 마련이고, 그 경험을 나누다 보면 다른 누군가에겐 힘이 되고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요즘 우리는 그런 예전 이야기가 언급되는 것 자체를 두려워하고 원하지 않게 되었다. 세대 간의 대화가 이렇게 단절된 바탕에는 기존에 오랫동안 우리 사회에서 작동하던 지나친 위계적 질서와 권위주의에 대한 경계가 깔려 있다. 과거의 어려움을 소환했다가는 결국 젊은 세대의 나태함이나 자유분방함을 꾸짖는 듯한 결론으로 흘러갈 것이 뻔하기에, '라떼' 얘기는 금물이라는 사회적 약속을 통해 과거를 돌아보거나 언급하지 말아 달라는 간곡한 요청을 받게 된 셈이다.
거꾸로 말해 보자면, '라떼' 이야기가 어떤 서사적 힘을 가지기 위해서는 우선 기성세대의 권위 실린 목소리부터 사라져야 하며, 그 힘을 찾는 주체는 젊은 세대로 다시 설정되어야만 한다. 2024년 퓰리처상 시 부문 수상자인 브랜든 솜Brandon Som은 기성세대가 아닌 새로운 세대의 관점에서 '라떼' 이야기의 소재가 될 만한 과거 가족들의 경험을 재구성하여 시를 쓴다. 멕시코계와 중국계의 혈통이 합쳐진 솜의 가족들은 미국으로 이민 온 후 힘겹고 치열한 삶을 살아왔고, 솜은 그 생생한 분투의 흔적들로부터 시적 영감을 얻는다. 과거의 서사들이 함께 모여 공동체의 정서를 완성해 갈 수 있다고 믿기에, 솜은 희망과 낙담이 끝없이 엇갈리던 순간들을 포착하여 가족의 역사를 증언한다. 수많은 '라떼'의 이야기들은 이렇게 시인의 시선을 투과하면서 분명한 의미를 지니게 되며, 시인은 과거를 통해 현재에 대한 이해에 천천히 도달하기에 이른다.
브랜든 솜 - 샤이너다스 (번역: 조희정)
(원문에서 이 시의 제목은 이탤릭으로 표기되어 있으며, 그에 대한 설명은 시에 대한 해설에서 언급하였다.)
히스패닉 루이...
찰리, 날 "다이아몬드"라고 불러 줘, 이 친구야!
—호세 몬토야1
소년 시절 그는
영화 볼 돈을 마련하려고 구두를 닦았지.
그리고 나는 구두닦이 상자가
극장 의자 아래 어떻게 딱 맞게
들어갔을지 상상해 보았어.
수십 년 후 내가 어둠 속에서
그것을 보았을 때
그 상자가 우리 할아버지의
오래되고 가라앉은 스프링 침대
아래에 딱 맞게 들어갔던 식으로.
나중에 불도저로 밀렸지만,
피닉스 극장은
전쟁 전 시절의 극장들처럼
생겼던 게 틀림없어,
대부분은 없어지고
이젠 그저 히로시 스기모토2의
사진 속에나
기록된 극장들처럼.
—그 사진을 찍기 위해
예술가는 커다랗게 만들어진
카메라를 스프링으로
닫힌 좌석들의
마지막 줄에 두었지,
화려한 벽의
조각품들과
바로크풍 촛대들 아래에,
그 때 그는 거기에
카메라의 조리개가
열린 채 완전한 기능을
할 수 있게 두었지.
그렇게 우리가 별들을
보는 것이지—모든 결말들과
손 닿을 수 없는
시작들. 이미지들,
인물들, 그리고 플롯들은
사라지고 오직 하얀 불빛만
남은 것. 솔들과,
헝겊들, 그리고 구두약
통들을 담은 그 삼나무 상자에는
경첩이 달린 자물쇠와
신발을 품을 수도 있는
손잡이가 있었어.
내 발은 그걸 건드려
본 적어 없어, 하지만
나는 그 안의 어떤 솔이
거꾸로 솔질을 할 것인지 궁금해,
방향을 가로질러서,
그 사진들 중 하나가
투영시키는 젖은
손가락을 좀 더 내밀어서
한 소년을 비출지,
광내는 곳에서
올려다보듯 스크린을
바라보는 소년을,
아니면 그 모습은
저 다른 발명품에서
빌려와야 할까?
내가 그 구두닦이 상자에다
아주 작은 구멍을 깎아 만들어
뒤집힌 이미지들이
저장된 창고를 열어야 할까?
—마치 혁명이란 그렇게나
간단한 시각적
장치인 것처럼,
구두닦이를 저 위에 올려보내
반짝이는 존재로 만들 수 있게.
시인의 중국계 미국인 할아버지가 보낸 어린 시절을 묘사하는 이 시에서 소년은 영화를 볼 돈을 마련하기 위해 구두를 닦는다. 영화관 좌석 아래 구두닦이 상자를 집어넣은 채, 소년은 눈 앞에 펼쳐지는 영상에 몰입한다. 시인은 20세기 초반 2차 대전 이전의 고풍스러운 영화관 건물들을 상상하면서, 그 속에서 빛나는 스크린을 하염없이 바라보는 한 소년의 모습을 그려낸다. 소년의 응시가 궁극적으로 가 닿는 지점은 구체적으로 영화를 구성하는 "이미지들, 인물들, 그리고 플롯들"이라기보다 빛나는 "별들"로 상징되는 "하얀 불빛" 그 자체이다. 소년은 어두운 관객석과 대비되는 빛의 공간을 동경하며 현실의 어려움을 잊은 채 하얗게 반짝이는 세계에 집중하는 것이다.
이 시의 정서적 효과는 시인이 '빛내다'(shine)와 '빛나다'(shine)라는 두 가지 의미를 동시에 가지는 하나의 단어를 끈질기게 탐색하는 과정으로부터 나온다. 구두를 닦아 '빛내는'(혹은 '광을 내는') 일을 하는 소년은 '빛나는' 스크린에서 멀찍이 떨어진 채 그저 그 불빛을 바라볼 뿐이다. 이 하나의 단어는 목적어를 가진 타동사로 사용될 때와 주어에 초점을 둔 자동사로 사용될 때 거의 상반될 정도로 동떨어진 의미를 갖는다. 우리말에서도 '빛내다'와 '빛나다'는 고작 토씨 하나의 차이를 가질 뿐이지만, 그 차이는 인간사의 현실에 적용되는 순간 어느 인물의 사회적 위치를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뒤바꾸어 놓을 만큼 큰 것이 되고 만다.
하지만, 곧이어 시인의 상상력은 이 단어에 들어 있는 두 가지 의미가 그 크나큰 차이에도 불구하고 어느 순간 서로 섞일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시 속으로 끌어들인다. 구두를 닦는 솔질의 방향을 바꾸듯이 카메라의 각도를 조금만 움직이면 혹시 소년을 비출 수 있게 되지는 않을까? 그러면 늘 타인의 구두를 '빛내며' 살아가던 소년이 순식간에 '빛나는' 모습으로 사진에 나타나지는 않을까? 더 나아가서, 시인은 소년의 구두닦이 상자에 "아주 작은 구멍"을 내어 그 안으로부터 영사기처럼 "뒤집힌 이미지들"이 쏟아져 나오게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상상을 하기에 이른다. 그래서 "구두닦이" 소년을 저 멀리 떨어진 스크린까지 올려보내 "반짝이는 존재"로 만들 수 있다면 그것은 "시각적 장치"를 이용한 작은 "혁명"일 것이라고 시인은 꿈꾸듯 말한다.
타인을 '빛내는' 삶에 묶여 있는 현실에서도 '빛나는' 자리로 나아가고 싶은 갈망은 많은 사람들에게 상승하는 방향의 사회적 유동성social mobility을 얻고자 하는 끝없는 노력과 엮여 있었을 것이다. 19세기, 그리고 20세기를 돌아보면, 수많은 이들이 조금이라도 더 반짝이는 위치에 도달하려고 애쓰고 달음질쳤으며 그러다가는 지치고 넘어져 왔던 흔적들을 볼 수 있다. 물론, 이들 중 몇몇은 실제로 성공 신화를 새로이 쓸 만큼 사회적 위치의 큰 변화를 얻어냈을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남을 '빛내는' 일로 점철된 삶을 스스로 '빛나는' 것으로 바꾸어 보려는 꿈은 좌절로 끝난다. 그렇게 무산되어 버렸을 할아버지의 꿈을 이 시에서 시인은 상상력을 통해 의미 있는 것으로 재구성한다. 할아버지의 "구두닦이 상자"는 다른 이들의 구두를 '빛내는' 것에 그치지 않고 할아버지의 소년 시절을 '빛나는' 존재로 만들 수 있는 어떤 저력을 가진 것으로 묘사된다.
시의 제목인 '샤이너다스'라는 어휘는 사전에 나오지 않는 신조어로 보인다. 이탤릭으로 되어 있는 이 제목의 의미를 추측하다 보니, 소리를 통해 '빛내다/빛나다'(shine)라는 의미와 '아버지'(da)라는 뜻이 서로 결합된 단어가 아닐까 생각해 보게 되었다. 이 시는 솜의 중국계 미국인 할아버지에 대한 것으로 특정되지만, 남들을 '빛내는' 자리에서 '빛나는' 저 너머로 상승하고 싶은 욕구를 품었던 이들이 어찌 시인의 할아버지 하나에 그칠 수 있을까. 언어를 넘어, 인종을 넘어, 유사한 희망과 좌절의 수없는 서사를 우리 모두의 아버지들, 또 그 아버지들이 가슴에 품고 살았을 것이기에, 시인은 명확한 어느 언어로 제목을 쓰기보다 발음으로 유추되는 의미를 전달하면서 이 이야기가 지니는 보편성을 확장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이런 '라떼' 이야기들이 정작 우리 사회에서는 어떻게 받아들여질 수 있을까? 지금 젊은 세대가 겪는 절망과 고통의 가장 큰 부분은 '빛내는' 삶에서 '빛나는' 삶으로의 역전이 이제는 거의 불가능해 보인다는 현실에서 나오는 것 같기도 하다. 과거의 세대들이 노력하면 뭔가 이룰 수 있다는 희망을 품에 안고 살아온 결과 적어도 전반적 생활 수준의 향상이라는 집단적인 과업을 달성했다면, 젊은 세대들은 그 가능성조차 이미 차단당한 것 같은 박탈감을 안고 살아가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이런 현실에도 불구하고, 지금의 젊은이들이 모두 동질적으로 패배감에 젖어 있다는 식의 일반화된 세대론을 펼치는 것은 '라떼' 이야기를 권위적으로 되풀이하는 낡아빠진 감성만큼이나 위험한 듯하다. 과거로부터 현재를 지탱할 힘을 끌어내고자 노력하는 젊은이들은 지금도 분명 존재하기에, 솜의 시를 읽으며 그가 할아버지의 구두닦이 상자를 작은 "혁명"의 도구로 상상하는 대목에서 느끼는 감동은 여전히 용감하게 이 시대를 헤쳐 나가는 젊은 세대들에게 보내는 응원으로 이어져야 마땅하다.
원문: Brandon Som - Shainadas
Ese Louie...
Chale, call me "Diamonds," man!
—José Montoya
He shined shoes
as a boy for movie money,
& I imagined how
a shinebox might fit
under the theater's seat
the way it fit decades
later when I saw it
in that dark beneath
my grandparent's old,
sunken spring-bed.
Later bulldozed,
the Phoenix theater
must have looked
like those pre-war
cinemas mostly lost
now but documented
in the photographs
of Hiroshi Sugimoto
—for which the artist
placed his large-
format camera
in the last rows
of spring-shut seats
below ornate
wall-carvings
& baroque sconces
where he then
left the camera's
aperture open
for a full feature.
It is what we see
of stars—all endings
& untouchable
beginnings: images,
characters, & plot
gone & only white light
left. The cedar box
housing brushes,
rags, & tins of polish
had its hinged latch
& the handle that
also cradled a shoe.
My foot's never
touched it, but I wonder
which brush inside
might brush back,
against the grain,
one of those photos
to extend the wet
finger of projection
over a boy, who looks
up toward the screen
like he looked
up from a shine.
Or is the figure
to borrow from that
other invention?
Could I carve open
a pinhole in the shinebox
for its storehouse
of inverted images?
—as if revolutions were that
simple an apparatus
of optics to have
the shiner ascend there
to what shines.
조희정은 중앙대학교 영어영문학과 교수로 하버마스의 근대성 이론과 낭만주의 이후 현대까지의 대화시 전통을 연결한 논문으로 미시건주립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인간과 자연의 소통, 공동체 내에서의 소통, 독자와의 소통, 텍스트 사이의 소통 등 영미시에서 다양한 형태의 대화적 소통이 이루어지는 양상에 관심을 가지고 다수의 연구논문을 발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