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11.22 15:28
프리다 칼로는 왜 그림을 그렸을까?
이런 질문을 하는 것이 무례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좀 더 정중한 접근 방식은 그녀가 그린 그림의 의미를 분석하는 것으로 제한하는 것이겠다. 하지만 칼로의 경우 '왜'라는 질문은 그 모든 무례함에도 불구하고 중요하게 느껴진다.
답을 찾으려고 해도 확실한 답을 얻지 못할 수도 있다. 하지만 칼로가 자신과 자신의 삶의 에피소드를 너무나 자주, 그리고 매우 강렬하게 그렸던 것을 보면 칼로는 사람들이 그녀를 움직인 동기가 무엇인지 궁금해하기를 원했던 것은 분명해 보인다.
《프리다: 신화 너머》는 텍사스의 댈러스 미술관에서 열리는 매력적인 전시로, 칼로의 실제 작품들보다는 그녀가 살아온 삶과 그녀가 구축한 페르소나에 집중하는 최근의 경향을 따르고 있다. 전시 제목의 함의는 칼로가 (실제 그랬듯) 신화 창조자라는 사실뿐만 아니라 이 신화가 널리 퍼져 있는 잘못된 믿음이므로 그것을 넘어서야 한다는 의미도 담고 있다.
[PADO '언더그라운드 엠파이어' 북콘서트가 11월 30일(토) 광화문에서 열립니다! (안내)]
물론 그러한 충동 자체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하지만 무엇보다 칼로(1907~1954)가 왜 그토록 자신을 신화의 대상으로 만들고 싶어했는지 물어보는 것도 흥미로울 수 있다.
이 전시가 칼로의 작품보다 일생에 초점을 맞춘 것은 부분적으로 필요에 따른 결과다. 칼로의 작품을 대량으로 빌리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워졌다. 칼로는 쿠사마 야요이, 앤디 워홀, 뱅크시와 함께 의식적으로 자기를 연출해낸다는 최근의 창의성 개념을 대표하는 작가로 꼽힌다. 하지만 나는 칼로가 반 고흐, 프랜시스 베이컨, 신디 셔먼에 정신적, 질적인 면에서 더 가깝다고 생각한다. 어쨌든 그녀의 작품은 수요가 많다. 작품은 작을 수 있지만 이동하는 데 드는 비용은 엄청날 수 있고 대여자들은 점점 더 대여를 꺼린다.
하지만 꼭 필요성 때문만은 아니다. 이 전시가 칼로 일생에 초점을 맞춘 것은 21세기 문화의 산물인 우리 모두가 신화에 빠져있고 진정성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신화가 거품과 같다면 진정성은 거품이 터질 때 잠깐 동안 나타나는 것이다)
워홀 이전, 셔먼 이전, 마돈나, 레이디 가가, 비욘세 이전에 칼로는 변장과 위장, 감추기와 드러내기 등 자기 발명의 여왕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어떻게든 진정성을 유지했다. 칼로의 의상과 표상(인디오 원주민 드레스, 목걸이, 털 없는 솔로이츠퀸틀레 개, 뻗어나가는 상징물들)은 그녀의 끊임없는 자기 신화화를, 그녀의 일자 눈썹은 그녀의 근본적인 진정성을 가리킨다고말할 수 있다.
하지만 일자 눈썹도 신화가 되지 않았나?
댈러스 미술관의 아구스틴 아르테아가 관장과 동 미술관의 미국 미술 담당 큐레이터인 수 캔터베리가 기획한 이 전시는 두 개의 평행한 복도 모양으로 구성되어 있다(한 쪽 복도를 따라갔다가 다른 쪽 복도로 돌아오는 구조다). 칼로의 작품 30점이 전시되어 있다. 절반이 조금 안 되는 작품이 종이에 그려진 작품이지만 결코 가벼운 작품이 아니다. <사고>(1926), <꿈(I) 또는 꿈꾸는 자화상>(1932), <무제(프리다와 낙태)>(1932), <푸에블라 데 로스 앙헬레스>(1952) 같은 드로잉은 마크메이킹(자국을 만드는 것)의 효과가 드러나는 만큼 생생하고 흥미진진하다.
[PADO 트럼프 특집: '미리보는 트럼프 2.0 시대']
또한 자화상, (각각 상징적인 의미가 담긴) 다양한 정물화, 칼로의 가장 특별한 작품인 <내 드레스는 거기 걸려 있다>(1933-1938)와 <도로시 헤일의 자살>(1939) 2점을 포함한 16점의 그림이 전시되어 있다.
칼로의 작품들은 그녀의 아버지 기예르모 칼로, 이모젠 커닝햄, 루시엔 블로흐, 줄리앙 레비, 니콜라스 머레이 등이 촬영한 같은 수의 칼로 사진들과 함께 전시되어 있다. 사진들에는 어린 시절부터 사망 직후까지의 날짜가 적혀있고, 한 점 한 점이 모두 매력적이다.
이 모든 전시물들은 시간순으로 배열되어 있어 오래된 사진첩의 페이지를 넘기거나 특히 매혹적인 인플루언서의 소셜미디어 피드를스크롤하는 것과 같은 효과를 얻을 수 있다.
하지만 다시 원래의 질문으로 돌아가서, 칼로는 왜 그림을 그렸을까? 그리고 무엇보다, 그녀는 왜 자기 자신을 그렸을까?
그녀는 한 가지로만 알려지는 것을 두려워했던 것 같다. 이것은 건강한 두려움이다. 우리 모두는 그런 두려움을 가져야 한다. 하지만 칼로는 그것을 아프도록 강렬히 느꼈다.
그녀는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고통을 겪었다. 어린 시절 소아마비(결국 다리를 절단해야 했다)와 끔찍한 버스 사고로 인해 신체가 완전히 망가진 자신의 고통을 인정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하지만 고통은 우리를 위축시킨다. 우리의 다양한 정체성을 단순화시킨다. 칼로는 단순히 고통받는 여성으로만 알려지기를 원하지 않았다.
[새로운 PADO 기사가 올라올 때마다 카톡으로 알려드립니다 (무료)]
마찬가지로 그녀는 남편 디에고 리베라를 사랑했다. 하지만 리베라는 거대하고 카리스마가 넘쳤으며 어쩌면 압도적일 수도 있는 존재였기에 칼로는 단순히 디에고 리베라의 눈에 띄지 않는 아내로 알려지기를 거부했다.
그녀의 신체적 고통이 가진 무게와 남편 리베라의 무게는 그녀를 쉽게 무너뜨릴 수 있었지만, 오히려 두 가지가 합쳐져 자극제가 되었다. 칼로는 더이상 무너지지 않으려면 자신의 처지를 적극적으로 활용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소극적인 태도는 치명적일 수 있다.
리베라 이전부터, 사고 발생 이전부터, 건강 문제가 생기기 이전부터 삶을 팽창시켜 살겠다는 열망은 처음부터 있었을 것이다. 그것은 타고난 것이다. 그러나 그림 그리기는 비록 위험이 따르기는 했지만(남편의 영역에서 경쟁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소극적인 삶에서 벗어날 수 있는 확실한 길을 제공했다.
내 생각엔 칼로의 자기 연출은 병상에 누워 있는 사람이자 약혼한 사람이 경험하는 잊혀지고 소외되고 무시될지도 모른다는 특별한 두려움을 스스로 치료한 것이었다. 다른 이유가 무엇이든, 멕시코인으로서의 자부심과 공산주의에 대한 헌신은 그런 두려운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려는 그녀 의지의 표현이었다. 아무도 프리다 칼로를 '무시'하지 않았다.
그녀는 세상의 가장 큰 무대에서 삶을 펼치기로 결심했고, 그녀가 영화배우(폴레트 고다르, 돌로레스 델 리오, 마리아 펠릭스), 연기자(조세핀 베이커), 예술가(이사무 노구치), 혁명가(레온 트로츠키) 등과 정사를 가진 것도 어느 정도는 이러한 결심 때문이었다.
그녀는 멕시코 남성 벽화작가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는데, 그들은 원래의 건축물보다 주목 받으며 수 세기 동안 살아 남을 벽화를 통해 거대한 이념적 비전으로 멕시코 사회를 재구성하겠다는 바람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그녀의 그림들은 작고, 보석같았고, 사적인 암호로 가득했다. 처음에는 시시해 보였다. 하지만 지금 보면 그 그림들은 그 얼마나 장엄하고 광대하며 심오한가?
세바스찬 스미는 퓰리처상을 수상한 워싱턴포스트의 미술평론가이자『라이벌의 예술: 모던 미술의 네 가지 우정, 배신, 돌파구』The Art of Rivalry: Four Friendships, Betrayals and Breakthroughs in Modern Art의 저자이다. 보스턴글로브에서 근무했고, 런던과 시드니에서는 데일리 텔레그래프, 가디언, 스펙테이터, 시드니 모닝 헤럴드를 위해 일한 바 있다.
역자 이희정은 영국 맨체스터대 미술사학 박사로 대영박물관 어시스턴트를 거쳐 현재 국민대 강사로 강의와 연구를 이어가고 있다. 역서로 '중국 근현대미술: 1842년 이후부터 오늘날까지'(미진사, 2023)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