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각예술

윌리엄 모리스와 이슬람 미술

19세기 가장 영국적인 디자이너에게 미친 이슬람 미술의 영향, 지금껏 간과돼 온 이 주제를 조명하는 전시가 지금런던에서 열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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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icola Tree for William Morris Gallery, London Borough of Waltham Forest

2024.12.27 15:09

Financial Ti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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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모리스의 실내장식만큼이나 참으로 영국적인 것이 있을까? 19세기 영국 미술공예운동Arts&Crafts movement을 일으켰던 모리스가 창안한 호화롭고 반복적인 패턴은 영국 고유양식의 표상처럼 세계에 알려져 있다. 그의 디자인은 생전에는 모리스 앤드 컴퍼니사Morris & Co's의 벽지와 가구 장식직물로 대중화되었고, 1960년대 저작권이 소멸된 이후 전 세계에서 대량으로 복제되고 있다.


런던시내 북동쪽 월섬스토우 지역에 있는 윌리엄 모리스 갤러리William Morris Gallery는 모리스의 유년기가옥이자 그의 작품을 가장 많이 소장하고 있는 곳으로, 지금 이곳에서 모리스에게 영감을 주었으나 잘 드러나지 않았던 한 원천을 조명하는 전시가 진행되고 있다. <윌리엄 모리스와 이슬람 세계의 예술William Morris and Art from the Islamic World>은 널리 추앙받는 영국의 시인이자 예술가이며 급진적 사회주의자였던 윌리엄 모리스의 정교한 기하학적 디자인에 이란, 튀르키예, 시리아의 미술이 미친 깊은 영향을 최초로 추적한다. 전시는 그의 생애와 작업에 있어서 이들 나라의 미술이 가진 중요성을 탐색하면서, 빅토리아 시대 영국과 이슬람 세계 사이에 더욱 폭넓은 교류가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와 동시에 독창성, 모방과 수용에 대해 지속돼 온 질문들을 던진다.


이 갤러리의 헤이드리안 개러드Hadrian Garrard 관장은 이슬람 세계가 모리스 디자인의 기원으로서 충분히 인정되지 못하고 있다고 믿는다. 관장은 "우리 갤러리로서는, 주민의 20퍼센트가 자신을 무슬림이라고 인식하는 지역에서 이는 매우 중요한 주제이며, '브리튼적인 것'과 '잉글랜드적인 것'을 어떻게 정의할 것인지 다시 생각해 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상설 전시관 내 이 주제를 다루는 공간이 있지만, 갤러리 창립 75주년이 되는 내년에는 이 주제를 반영하여 소장품을 새롭게 배열할 계획이며, 모리스 디자인의 전파에 대한 전시 <모리스 마니아Morris Mania>도 예정되어 있다.


모리스(1834-1896)는 윌리엄 드 모건William de Morgan(그의 타일 패널 작품 <뒷발로 일어선 사자Lion Rampant, 1888-98>가 갤러리 위층에 전시되어 있다)과 같은 동료 작가들에 비해 자신의 디자인 출처가 이슬람 미술임을 분명하게 밝히지는 않았다. 그러나 모리스의 강연과 사우스켄싱턴 박물관 (현 빅토리아 앤드 앨버트 박물관) 소장품 취득 작업, 그리고 그의 소장품들을 통해 볼 때 이슬람 미술의 영향은 충분히 유추된다. "그것들을 나란히 두고 보면 결코 모를 수가 없다"고 개러드 관장은 말한다.



<17세기 초 튀르키예 이즈니크(Iznik) 접시> , Turkey (Ottoman), fritware, polychrome underglaze painted, glazed © The Society of Antiquaries of London (Kelmscott Manor)

<17세기 초 튀르키예 이즈니크(Iznik) 접시> , Turkey (Ottoman), fritware, polychrome underglaze painted, glazed © The Society of Antiquaries of London (Kelmscott Manor)

 <야생 튤립 Wild Tulip>, 1884, designed by William Morris for Morris & Co., block-printed wallpaper © William Morris Gallery, London Borough of Waltham Forest

<야생 튤립 Wild Tulip>, 1884, designed by William Morris for Morris & Co., block-printed wallpaper © William Morris Gallery, London Borough of Waltham Forest


모리스의 기계 직조 카페트 <튤립과 백합Tulip and Lily> (1875)에서 어슷하게 배열된 꽃송이들은 부드러운 갈색을 사용했지만, 그가 소장한 17세기 오스만투르크 퀼트 조각에서 붉은색과 푸른색 튤립 송이들이 번갈아 등장하는 모습과 흡사하다. 연분홍색 배경에 흰색 무늬의 '블록 프린트1' 벽지 <야생 튤립 Wild Tulip>(1884)의 구도는 모리스가 소장한 17세기 튀르키예 이즈니크 접시 위 푸른색, 녹색, 붉은색의 카네이션과 튤립이 풍성하게 펼쳐진 모양새와 명백히 닮아있다. 튀르키예의 야생 튤립은 17세기 튤립 파동 시기 네덜란드 품종들보다 크기가 작았기에, 모리스 벽지의 튤립은 새싹처럼 작은 봉오리로 섬세하게 도안 되었다.


모리스가 소중히 여기던 개인 소장품들이 그의 사후 최초로 한자리에 모였는데, 그가 살던 집들을 개조한 잉글랜드 미술관들의 소장품부터, 빅토리아 앤드 앨버트 박물관 (V&A)과 버밍엄 미술관 트러스트Birmingham Museums Trust의 공공 소장품들을 아우른다. 전시품은 이란의 서사시 '샤나메'Shahnameh와 '오마르 하이얌의 루바이야트2'The Rubaiyat of Omar Khayyam (모리스는 이 책의 시를 골라 가족들에게 읽어주곤 했다) 삽화본부터 16세기 오스만투르크, 시리아의 아름다운 남색, 청록색, 녹색 포도넝쿨 격자 타일 세 점에 이른다.


모리스는 이탈리아 너머 동방으로 여행해 본 적이 없었지만, 삼십대 무렵부터 화상들과 경매를 통해 서아시아 미술품들을 수집하기 시작했고, 작품 파편들을 통해 기법을 분석했다. 전시회 공동 큐레이터 로완 베인은 "그는 컬렉터라기 보다는 만물상 같은 수집가였다"라고 말한다. 그는 소소한 관광 기념품부터 걸작품들까지 눈길을 끄는 모든 것을 모아들였다. 전시 작품 60점은 모두 모리스나 딸 메이가 소유하거나 제작한 것이다. 메이는 자수 작가로서 이집트와 모로코를 여행했고 아버지의 첫 큐레이터 중 한 사람이 되었다.


<Jacket>, 1800–60, Iran (Qajar), woven silk and metal thread lined with European roller-printed cotton © William Morris Gallery, London Borough of Waltham Forest

<Jacket>, 1800–60, Iran (Qajar), woven silk and metal thread lined with European roller-printed cotton © William Morris Gallery, London Borough of Waltham Forest

<Medway>, 1885, designed by William Morris for Morris & Co., cotton, indigo discharge and block-printed © William Morris Gallery, London Borough of Waltham Forest

<Medway>, 1885, designed by William Morris for Morris & Co., cotton, indigo discharge and block-printed © William Morris Gallery, London Borough of Waltham Forest


모리스는 존 러스킨John Ruskin과 아우구스투스 푸긴Augustus Pugin과 함께 19세기 산업 혁명에 따른 기계 시대의 대량 생산에 반발하는 대열에 합류했다. 그가 일생 추구한 '아름다운 집'은 식물과 꽃, 때로는 동물 디자인을 수반했고, 그 속에서 "자연은 가정에 어울리는 패턴으로 질서정연하게 길들여졌다"고 베인은 전시 연계 서적 <튤립과 공작Tulips and Peacocks>에서 밝혔다. 건축가인 샤헤드 살리임Shahed Saleem이 같은 책에서 썼듯이 '영국의 미학적 환타지'는 예술가와 공예와 자연이 근대 이전의 관계를 구현하고 있는 곳으로서 이슬람 세계를 이상화하였다.


당시 근동 공예품에 대한 수요가 높았으며, 공간 전체에서 근동을 느낄 수 있도록 계획된 몰입형 실내장식에 활용되곤 했다. 드물게 오늘날까지 남아 이를 보여주는 곳이 런던 홀란드 공원의 레이턴 하우스Leighton House로, 모리스도 이 곳을 방문했던 것으로 보인다. 모리스는 런던 서부 해머스미스, 템즈 강가에 자리한 캠스코트 하우스Kelmscott House에서 말년을 보냈다. 전시된 19세기 켐스코트 하우스 사진들을 보면, 17세기 사파비Safavid 왕조 시기에 직조된 이란 케르만 산 붉은색 바탕의 '화병Vase' 양탄자가 다이닝룸의 천정과벽을 마치 천막처럼 덮고 있다. 모리스는 벽에 걸린 카페트를 보며 의아해하는 방문객들에게 "동양의 러그는 밑창에 징을 박은 부츠를 신고 밟도록 만든 것이 아니다"고 설명했다. 딸 메이는 양탄자로 덮인 '동양의 벽'과 그 앞에 놓인 금속 공작 한 쌍으로 공간은 "아라비안나이트의 감성이 넘친다"고 말한다.


Dining room at Kelmscott House, Hammersmith, photographed by Emery Walker, 1896 © William Morris Gallery, London Borough of Waltham Forest

Dining room at Kelmscott House, Hammersmith, photographed by Emery Walker, 1896 © William Morris Gallery, London Borough of Waltham Forest

<Peacock>, c.1870, Iran, possibly Isfahan (Qajar),  hollow brass with pierced decoration and turquoise ©  Nicola Tree for William Morris Gallery, London Borough of Waltham Forest

<Peacock>, c.1870, Iran, possibly Isfahan (Qajar), hollow brass with pierced decoration and turquoise © Nicola Tree for William Morris Gallery, London Borough of Waltham Forest


전시품 중에는 1870년경 이란의 황동과 터키석으로 제작된 공작, 모리스가 소유했던 17세기 이란의 치타와 가젤 문양 램프 스탠드, 그리고 19세기 이란 카자르Qajar 왕조 시기의 금박 철궤가 있다. 모리스의 <화원Flower Garden> (1879)은 1883년 도록에서 "금속 상감같은 아름다움"을 빚어낸다고 언급한 것처럼, 금속 상감의 효과를 부드러운 실크의 직조에 섬세하게 투영했다. 모리스의 시선이 이슬람시기 스페인에도 이르렀던 듯, 가구 장식직물 <그라나다3Granada>(1884)는 이탈리아와 오스만 벨벳의 영감을 결합하여 석류와아몬드 모양 봉오리로 채운 이 디자인은 상업적으로 더 생산하기 어려울 만큼 복잡하고 정교했다.



공동 큐레이터 카이스라 M. 칸은 모리스에게 미친 "가장 큰 영향은 튀르키예 미술에서 왔다"고 말한다. 칸은 모리스와 튀르키예 미술과의 연결은 그의 생전에 더 분명했고, 1910년부터는 점차 시야에서 흐려졌다고 믿는다. 그러나 모리스 자신은 페르시아 미술을 최고의 경지로 보았다. "우리 패턴 디자이너들에게, 페르시아는 신성한 땅이 되었다. 페르시아는 우리 예술이 다듬어지고 완성되어 동서로 퍼져나갔던 성지聖地였다"고 모리스는 1879년 강연에서 역설했다.


<Cushion cover (çatma)>, 17th century, Bursa, Turkey (Ottoman), voided and brocaded velvet, metal-wrapped silk thread, cotton and silk © Birmingham Museums Trust

<Cushion cover (çatma)>, 17th century, Bursa, Turkey (Ottoman), voided and brocaded velvet, metal-wrapped silk thread, cotton and silk © Birmingham Museums Trust

<Granada>, 1884, designed by William Morris, manufactured by Morris & Co., silk velvet brocade with silk thread © William Morris Gallery, London Borough of Waltham Forest

<Granada>, 1884, designed by William Morris, manufactured by Morris & Co., silk velvet brocade with silk thread © William Morris Gallery, London Borough of Waltham Forest


인도 또한 모리스에게 큰 영향을 주었지만, 이번 전시회에는 포함되지 않았다. 그러나 1877년 모리스는 동방문제협회Eastern Question Association의 재무담당자로서, '불의한 전쟁'이라는 연설을 통해 영국의 이익을 위해 튀르키예와 러시아의 전쟁에 개입하는 것을 반대했다. 베인에 따르면, 모리스는 인도가 산업화에 의해 큰 손실을 겪고 있다고 보고 제국주의에 반대했다. 다만 "부유한 사업가로서 그가 목화나 염료와 같은 원자재를 수입하면서 이윤을 취하고 있었다"는 점도 사실이다. "문화적 전유cultural appropriation" 에 대한 오늘날의 비판적 담론에서 보면, 장식 미술 뿐 아니라 이슬람 문화 전체를 열등한 것으로 평가절하했던 시대에, 이슬람 예술을 진정으로 이해하고 그 가치를 평가했던 모리스는 현대의 태도를 예견한 시대를 앞서간 사람이었다.


그렇다면 모리스의 디자인은 여전히 독창적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는 모방이 아니라 면밀한 연구를 촉구했다. 그에게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패턴 이면에 담긴 의미였다. 서아시아의 완벽한 디자이너들은 "꽃들이 다마스커스의 정원에서 어떻게 자라는지...혹은 튤립이 페르시아 중부 계곡의 초원에서 어떻게 빛나는지 우리에게 말하고 싶어했다." 그는 반복되는 형태와 색에서 서아시아의 천재성을 배우고 응용하고 영국 시골집 정원과 울타리를 포착해 고유의 색채와 감성과 의미로 자신의 독특한 디자인을 가득 채울 수 있었다.


이 흥미로운 전시는 어쩌면, 세계가 불가분의 관계로 연결되어 있음을 역설한 '오리엔탈리즘Orientalism'(1978)의 저자 에드워드 사이드Edward Said의 관점을 입증하는 것일 수 있다. "고립된 문화나 문명은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사이드는 썼다. "우리가 분리되어 있다고 주장할수록, 우리와 타자에 대한 이해는 부정확해진다."


자신의 영감이 어디에서 왔는지 그 원천을 굳이 감추려 하지 않았던 모리스. 그가 살아있다면 풍성한 그의 예술적 유산 뒤에 차용이 있었음을 기꺼이 공개했을까? 관을 덮는 천으로 16세기 오스만투르크 튤립 문양 벨벳(이 전시에서 최초로 일반에 공개되었다)을 선택한 사실이 어쩌면 그 해답의 단서일지도 모른다.




마야 자기는 인도계 프리랜서 평론가로 예술 및 문학 분야에 대해 파이낸셜타임스, 가디언, 이코노미스트, 뉴욕리뷰오브북스, 뉴스위크 등에 기고하고 있으며, 귄터 그라스, 오에 겐자부로, 토미 모리슨 등 12명의 노벨문학상 수상자를 인터뷰했다. TV와 라디오 진행자도 맡고 있다.


역자 음해린은 서울대 고고미술사학과 졸업 후 시각예술 전문 번역가로 활동중이다.


1888년 창간된 영국의 대표적인 일간 경제지. 특유의 분홍빛 종이가 트레이드마크로 웹사이트도 같은 색상을 배경으로 쓰고 있을 정도입니다. 중도 자유주의 성향으로 어느 정도의 경제적 지식을 갖고 있는 화이트 칼라 계층이 주 독자층입니다. 2015년 일본의 닛케이(일본경제신문)가 인수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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