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1.24 14:45
군사 퍼레이드와 학교 운동회의 중간 어디쯤 되는 분위기다. 인도 나그푸르에서 힌두 민족주의 단체인 '라슈트리야 스와얌세박 상'(힌디어로 '국민자원봉사연합'이라는 뜻, 약칭 RSS)의 회원 수천 명이 카키색 바지, 흰 셔츠, 검은 모자를 입고 운동장으로 들어오며 행진하고 있다. 젊은 콧수염의 남성들, 허리띠 위로 배가 불룩 나온 중년 남성들, 코끝에 안경을 얹은 노년 남성들까지 모두 눈에 띈다. 여성은 없다.
늦은 몬순의 무더운 공기 속에서 작은 주황색 깃발이 게양대 위로 천천히 올라가자, 모두가 침묵 속에서 이를 지켜본다. 곧 명령이 떨어지고, 모든 남성은 오른팔을 가슴 앞으로 뻗었다가 옆으로 내린다. 이는 경례를 하기 직전까지 멈춘 동작이다.
500만 명 이상의 회원을 가진 RSS는 세계에서 가장 큰 자원봉사 단체로, 모든 회원이 남성이다. 지지자들은 RSS가 자선 활동을 하고 젊은 남성들에게 규율을 가르친다고 주장한다. 반면, 비판자들은 이를 소수 민족을 탄압하는 편협한 준군사 조직으로 간주한다. 기자는 나그푸르를 방문해 이 단체의 회원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다.
다른 클럽들처럼 RSS는 공유된 경험, 의식, 그리고 복장을 통해 결속된다. 어린 소년들은 걷고 말할 수 있을 때부터 가입해 매일 열리는 모임과 훈련 캠프에 참석한다. 많은 부모들은 아이들이 친구를 사귀고 운동하며 집 밖에서 시간을 보내길 바라며 이 단체에 보내곤 한다. 모든 회원들은 RSS의 기도문, 구호, 게임 등을 배우며, 단체의 유니폼은 워낙 유명해 몇 년 전 카키색 반바지를 긴 바지로 바꿨을 때 인도에서 큰 화제가 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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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SS의 가장 큰 연례 행사는 힌두교의 두세라 축제로, 이는 단체 창립 기념일과도 겹친다. 올해 나그푸르에서 열린 축제는 RSS의 창립 100주년을 기념하는 시작이었다. 유니폼을 맞춰 입은 남성들이 운동장에 집결한 뒤, RSS의 여섯 번째 지도자이자 둥글넙적한 얼굴의 70대 모한 바그왓이 무대에 올랐다. 그는 무슬림이 다수인 이웃나라 파키스탄과 "딥스테이트", "워우키즘", "문화적 마르크스주의"와 같은 국내의 적들이 인도에 가하는 위협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는 청중들에게 지역 제품을 구매하고 전통 복장과 언어를 유지할 것을 촉구하며 "세상은 강자를 숭배한다. 약자는 무시당한다"고 강조했다.
RSS와 가까워지는 것은 곧 권력과 가까워지는 것을 의미한다. 전 인도 우주청의 수장과 억만장자 최소 한 명이 이 행사에 참석해 있었다. 바그왓의 연설 내용이 나렌드라 모디 총리가 선호하는 주제들과 유사했던 이유는 모디가 RSS 회원 중 한 명이기 때문일 것이다. 모디는 8세에 RSS에 가입했고, 30대에 정계에 입문하기 전까지 RSS 전임활동가로 일했다. 이 역할은 물질적 소유를 포기하고 독신을 서약해야 한다는 의미다. 2014년 총리로 선출된 이후, 모디는 자신의 내각을 RSS 출신 인사들로 채웠다.
주황색 깃발에 미친 사람들
전통적 가치와 소박한 생활을 옹호하는 단체가 어떻게 이처럼 큰 영향력을 갖게 되었을까? 그 힘은 단순하고 본능적인 곳에서 나온다. 작가이자 전직 회원인 푸루쇼탐 아그라왈은 "RSS는 젊은이들에게, 그리고 나이가 많은 사람들에게도 자신이 힌두 국가의 대의를 위해 기여하고 있다는 엄청난 자부심을 느끼게 한다"고 설명한다.
1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보자. 1925년 나그푸르에서 의사이자 정치인인 케샤브 발리람 헤지와르가 RSS를 설립했다. 헤지와르와 그의 후계자들은 인도가 위대한 고대 문명이지만 치욕적인 침략으로 인해 무너졌다고 가르쳤다. 16세기에는 무굴 제국, 18세기에는 영국이 그 침략자였다. 오늘날 RSS는 인도 인구의 15%를 차지하는 무슬림들이 무굴 제국의 후손이자 파키스탄 편에 선 잠재적 제5열(내부 협력자)이며, 힌두교도의 소중한 소나 딸 근처에 둬서는 안되는 외부인이라는 메시지를 암시적으로 전달한다. 헤지와르의 목표는 규율 잡힌 애국자 집단을 양성해 인도를 힌두 국가로 재건하는 것이었다.
헤지와르는 RSS가 정치적 조직이 아닌 문화적 조직이 되기를 원했다. 그러나 1947년 인도가 독립했을 때, RSS 회원들은 뒤이어 일어난 상황에 충격을 받았다. 이들은 인도와 파키스탄으로의 분리를 신성한 영토의 분할로 간주했다. 이들은 인도의 삼색 국기를 반대하며 주황색 깃발을 선호했고, 새롭게 제정된 세속주의 헌법을 혐오했다.
1948년, RSS의 전 회원인 나타람 고드세가 독립운동의 지도자인 마하트마 간디를 암살했다. 고드세는 간디가 무슬림에 대해 유화적인 태도를 취하고 세속 민주주의를 옹호한다고 비판했는데, 이는 RSS가 간디를 비판했던 이유와 동일했다. RSS는 고드세와의 연관성을 부인하려 했지만, 정부는 이 단체를 1년 이상 금지했다. 이 사건 이후 지도자들은 정치에 참여해야 한다고 판단했고, 오늘날 인도 집권당 바라티야자나타 당(BJP)의 전신인 정치 조직을 설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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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SS는 현재 인도의 최대 노동조합, 최대 사립학교 시스템, 여성단체, 학생단체 등 수많은 조직을 배출했다. 해외 지부는 영국, 미국 등 힌두 교포들이 있는 지역에서 모임을 조직하고 있지만, 해외 지도자들은 본국 본부와의 연계를 공개적으로 드러내는 것을 꺼린다. RSS는 기부를 통해 자금을 조달한다고 주장하지만, 그 재정은 불투명하다. 이들의 네트워크, 즉 RSS "가족"을 통해 단체는 인도 전역에서 조용히 영향력을 확대해왔다.
마노하르 비나야크는 10살 때 RSS에 가입했다. 그는 왜소하고 어색했으며 문맹이었다. 다른 RSS 소년들이 그를 괴롭혔지만, 그의 어머니는 그가 그만두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며 그는 친구를 사귀었고, 학교를 끝내지는 못했지만, RSS 선배들이 그에게 현장 훈련 기회를 마련해 주었다. 그는 재단사가 되었고 이후 교사가 되었다. 현재 92세인 그는 지금도 매일 새벽 자신의 낡은 카키색 반바지를 입고 RSS 모임에 참석하고 있다. 그는 "샤카(Shakha, RSS의 지부)가 없었다면 지금의 내가 없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RSS에는 7만3000개 이상의 샤카가 있으며, 이들은 매일 한 시간씩 공원, 운동장, 사원 앞마당에서 모임을 연다. 모임은 요가로 시작하며, 이어서 전통적인 태그와 레슬링의 혼합 게임인 카바디나 막대기 대련 같은 활동이 진행된다. 모임은 역사와 철학에 대한 수업으로 마무리된다. 특히 어린 소년들에게는 규율을 철저히 가르친다.
샤카 모델은 변화에 적응해왔다. 코로나19 봉쇄 기간 동안 대중 집회가 금지되자 모임은 왓츠앱(WhatsApp)과 줌(Zoom)을 통해 원격으로 진행되었다. 벵갈루루와 같은 테크 중심지에서는 바쁜 직장인들을 위해 샤카가 일요일 아침에 열리기도 한다. RSS는 힌디어와 산스크리트를 주로 장려하지만, 모든 지역 사람들을 포함시키기 위해 모임은 영어로 진행되기도 한다.
나그푸르에 사는 16세의 아바니쉬 하르다이는 8살 때 할아버지와 함께 처음 샤카에 참석했다. 처음에는 게임에 흥미를 느꼈지만, 지금은 역사 수업이 그의 관심을 사로잡았다. 그는 무굴 통치자들에 의한 힌두교도들의 박해와 방글라데시와 파키스탄이 인도로부터 어떻게 분리되었는지를 배웠다. 기독교인 친구가 RSS가 종교간 폭력을 조장한다고 주장하자, 그는 친구에게 "구루지(Guruji)의 책을 읽어보라"고 답했다.
그러나 그가 생각하는 것만큼 설득력 있는 반박은 아니다. 왜냐하면 RSS를 독립 시기 동안 이끈 구루지라 불리는 M.S. 골왈카르는 인도에서 힌두교의 우월성을 주장했으며, 나치를 찬양하기도 했기 때문이다. 골왈카르는 "독일은 유대인을 몰아내며 세계를 충격에 빠뜨렸다. 이는 최고 수준의 민족적 자긍심의 발현이며, 힌두스탄이 배워야 할 좋은 교훈"이라고 썼다.
오늘날 RSS와 연계된 가장 무서운 조직은 세계 힌두교 조직(VHP)과 그 청년 조직인 바즈랑 달(Bajrang Dal)이다. 이들은 무슬림 남성들이 "사랑의 성전(聖戰)"이라는 이름으로 힌두 여성들을 유혹하거나, 기독교인들이 속임수로 개종을 유도한다는 온갖 음모론에 심취해 있다. 때때로 이들은 그러한 혐의를 받은 무슬림이나 기독교인들을 폭행하며, 이러한 공격 영상이 바이럴이 되곤 한다. 런던 킹스 칼리지의 크리스토프 자프렐로는 이러한 영상이 "인도의 소수자들은 공공 영역에서 사라져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달한다고 설명한다.
최근 수십 년 동안 최악의 반(反) 무슬림 학살은 2002년 구자라트에서 발생했다. 이 학살로 1000명 이상이 사망했다. 목격자들은 공격자들이 카키색 반바지와 주황색 스카프를 착용하고 있었다고 증언했다. 경찰 보고서는 지역 VHP(세계 힌두교 조직) 지도자들이 폭도들을 이끌었다고 비난했다. 그리고 청년 조직인 바즈랑 달의 전 지역 책임자는 언론의 잠입 취재에 자신이 무슬림들을 어떻게 구타하고 불태웠는지, 심지어 임신한 여성의 배를 갈랐다고 자랑하기도 했다. 당시 구자라트 주 총리였던 나렌드라 모디는 이러한 폭력을 방관했다는 비판을 받았으나, 인도 대법원은 그에게 면책 판결을 내렸다.
RSS는 자신들이 평화적인 단체라고 주장한다. 최근 들어, 이 단체의 지도자들은 유럽 파시즘을 존경했던 과거 지도자들과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대신, 이들은 RSS의 자선 활동을 강조하고 있다. 현재 RSS는 약 5만2500개의 프로젝트를 운영하고 있으며, 이 중에는 1만3000개의 학교와 보건소, 쉼터 등이 포함된다. 대변인 수닐 암베카르는 RSS가 모든 종교의 사람들을 환영한다고 말하지만, 힌두교도가 아닌 회원 수를 따로 집계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그는 RSS의 목표가 인도를 힌두 국가로 재건하는 것이라고 설명하면서도, 조직이 힌두교도를 "힌두스탄의 사람들"(인도를 뜻하는 힌디어) 또는 "힌두교적 삶의 방식을 따르는 사람들"로 정의한다고 덧붙였다.
힌두교를 통합하기 위해 RSS는 카스트의 분열을 없애고자 하지만, 이는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북인도 라자스탄 출신의 달리트(과거 "불가촉천민"으로 알려진 카스트) 출신 반와르 메그완시는 지역 샤카에 가입했을 때 모두가 자신을 인도어 "지(ji)" 즉 "선생님"이라 부르며 동등하게 대하는 것에 놀랐고 기분이 좋았다. 그러나 그는 지도자들이 모두 상위 카스트 출신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한 번은 그의 동네에서 모임이 열렸을 때, 그가 모든 음식을 준비했지만, 지도자들이 음식을 싸서 다른 곳에서 먹겠다고 했고, 결국 그 음식이 길가에 버려진 것을 발견했다. 그들은 달리트 가정에서 만든 음식을 먹고 싶어하지 않았던 것이다. 메그완시는 얼마 지나지 않아 RSS를 떠났다.
모디 총리는 종종 자신이 RSS 활동가로 일했던 시절을 이야기한다. 그는 RSS 사무실에서 잠을 자고, 이른 아침부터 금욕적인 식사와 요가로 구성된 엄격한 일상을 따랐다. 작은 가방 하나를 들고 인도를 돌아다니며 열정적인 연설을 했던 경험을 떠올린다. RSS 기관지 오거나이저(Organiser)의 전 편집장 R. 발라샨카르는 이러한 경험이 모디 총리의 규율과 연설 능력을 길렀다고 평가한다.
인도는 이란과 같은 신정국가가 되기에는 너무 광범위하고, 다양하며, 분권화되어 있다. 그러나 모디 총리 하의 정부는 어느 전기 작가가 "힌두 우선주의"라고 부르는 특징을 보이고 있다. 정부는 인도 내 유일한 무슬림 다수 지역이었던 잠무와 카슈미르의 자치권을 축소했고, 무슬림을 차별하는 시민권 규정을 도입했다. 또한 몇몇 주에서는 소 도살 및 종교 개종에 대한 규제를 강화했다. 모디 총리는 1992년 힌두교 군중이 16세기에 세워진 이슬람 모스크를 파괴하면서 유혈사태를 초래했던 아요디아의 그 부지 위에 힌두교 사원을 건설하는 것을 주도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디와 RSS의 관계는 단순하지 않다. RSS는 BJP 정부에 대해 인사 및 정책과 관련한 조언을 계속해왔다. 그러나 모디의 첫 두 임기 동안 BJP가 의회에서 압도적인 다수를 차지하자, 그의 정부는 RSS의 조언을 필요로 하지 않을 만큼 자신감을 얻었다. 동시에, 모디는 자신의 얼굴을 공공게시판, 백신 증명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제공되는 곡물 포장지에까지 내세우며 개인 숭배를 촉진했다. 이는 어떤 지도자라도, 심지어 총리조차 조직 위에 설 수 없다고 생각하는 RSS 관계자들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모자를 쓴 십자군
RSS와 그 조직의 가장 유명한 회원 간에 공개적인 갈등이 벌어지고 있다. 2024년 선거에서 모디 총리는 세 번째 임기를 확보했지만, 의회 과반수를 상실했다. 이로 인해 그의 권력이 약화되었고, 동맹자들을 소홀히 대하기 어려운 상황이 되었다. 선거 이후 RSS 수장 모한 바그왓은 모디를 간접적으로 비판했고, 모디는 이에 대한 존중의 제스처로 바그왓의 경호를 강화하고, 공무원들이 RSS에 가입하는 것을 금지한 오랜 규제를 해제했다.
모디가 RSS를 더 필요로 하는지, RSS가 모디를 더 필요로 하는지는 판단하기 어렵다. RSS는 수백만 명의 자원봉사자를 통해 BJP의 정책을 설파하고 선거에서 표를 모으는 데 큰 기여를 한다. 역사학자 타니카 사르카르는 "그것이 BJP가 선거에서 사용할 수 있는 비장의 무기다. 다른 어떤 정당도 이런 핵심 활동조직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말했다. 하지만 BJP를 역대 최장 기간 동안 권력의 중심에 있게 한 모디의 카리스마가 없었다면, RSS는 지금과 같은 힌두 우월주의적 비전을 실현하지 못했을 것이다. 일부 RSS 고위 관계자들은 모디가 지나치게 주목받는 것을 못마땅해 하지만, 일반 회원들은 그를 숭배한다.
나그푸르에 사는 13세의 스리발라바 와심카르는 6년 전부터 지역 샤카에 참석하기 시작했다. 그는 모디 총리가 자신처럼 RSS에서 일선 활동가로 활동을 시작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는 질문에 그는 성실히 접고 있던 주황색 깃발에서 고개를 들고 이렇게 답했다. "자랑스럽습니다."
과거 영국에서 국민들의 애국심 내지 공공의식을 진작하기 위해 만들어졌던 조직 중 하나가 보이스카웃입니다. 1차 세계대전을 앞둔 1907년이었습니다. 인도에도 비슷한 조직이 만들어졌는데, RSS라는 조직으로서 1925년에 창설되었습니다. 이 조직은 영국 보이스카웃과 달리 '힌두 민족주의' '힌두 우선주의'라는 배타성이 강한 조직이었습니다. 인도 독립과정에서 이 조직의 배타적 '힌두 민족주의'는 마하트마 간디의 '열린 국민주의' 즉 종파를 불문한 세속주의 국민국가를 만들겠다는 구상과 정면 충돌했고, 이 조직 출신이었던 사람이 간디를 암살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문제는 현재 이 조직 출신이 총리가 되었다는 점이고, 이 모디 총리의 도움으로 RSS는 현재 500만 명의 회원을 가진 세계에서 가장 큰 '자원봉사' 조직이 되었고, 이 조직이 모디 총리의 행동부대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정치가인 모디와 사회운동 조직인 RSS의 이해가 100% 일치하진 않을 것입니다. 이코노미스트(2024년 12월 21일 발행)에 실린 이 기사는 RSS를 심층 취재하면서 이 조직의 힘과 위험성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RSS 같이 이념과 규율을 갖춘 조직은 비상시엔 '준군사' 조직으로 바뀔 수 있습니다. 모디로서는 운신의 자유를 위해서는 다소 거리를 둬야 하지만 비상시 그리고 선거를 생각하면 너무 멀리 할 수도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