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각예술

에곤 실레는 청년으로 떠났지만, 그의 풍경화는 영원히 노년이다

뉴욕의 노이에 갤러리(Neue Galerie)에서는 오스트리아 화가 에곤 실레의 덜 알려진 작품들에 대한 전시가 열리고 있다.

2025.02.07 15:53

Washington Po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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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곤 실레, <두 그루의 나무가 있는 강 풍경>, 1913, Oil on canvas, Private Collection

에곤 실레, <두 그루의 나무가 있는 강 풍경>, 1913, Oil on canvas, Private Collection


실레의 인물화처럼 그의 풍경화도 대개 아름답지는 않으며 대신 인상이 강렬하다. 그의 비극적으로 짧은 생애 중―이 오스트리아 화가는 1918년 28세의 나이로 독감에 걸려 죽었다― 실레는 비교적 일찍 자연의 목가적인 장면이나 소박한 마을 풍경을 그리는 것에서 벗어나, 가을의 앙상한 나무와 시든 꽃, 건물로 가득하지만 사람은 거의 보이지 않는 도시 풍경을 그리기 시작했다. 이런 풍경화는 사람들이 가장 잘 알고 있고 찬미하는 작품들은 아니지만, 노이에 갤러리의 이번 전시는 이러한 작품들 역시 실레의 인물화에서와 마찬가지로 동일한 '집착'에서 비롯되었음을 보여준다. 실레의 인물들은 적나라한 나체이면서 동시에 미적 누드로, 날 것으로 취약하지만 부끄럽지는 않은 모습으로 생생히 표현된다.《에곤 실레: 살아있는 풍경들(Egon Schiele: Living Landscapes)》전시의 큐레이터인 크리스티안 바우어는 풍경화와 초상화 사이에 자연스러운 긴장감, 심지어 대립이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풍경화와 초상화는 회화의 기본적인 범주로, 지금도 스마트폰이나 디지털 카메라의 용어에서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풍경화(landscape) 모드는 수평 포맷을 의미하고, 초상화(portrait) 모드는 수직 포맷을 의미한다.


하지만 우리는 실레가 그의 그림에서 이와 같은 규칙들을 깨버린다는 것을 재빨리 알아챌 수 있다. 꽃과 나무는 수직적 세계를 보여주는데, 종종 수평적 캔버스나 종이의 윗 끝을 넘어 잘려져 표현된다. 반면 1914년 작품 <남자와 여자 I (연인 I)>에서는 두 인간 육체가 수평으로 배치되어 있으며, 비틀린 침대 시트과 그 아래 흙빛 카펫을 담은 풍경과 함께 나타난다. 오스트리아 소도시 슈타인에서 같은 교회 탑을 반복적으로 그린 작품들에서는 그 하얀 형상이 위를 향해 올라가는 모습이 하늘, 땅, 그리고 다뉴브강에 박힌 하나의 기둥처럼 보인다.


바우어는 실레의 인물화와 풍경화가 단순히 표현주의적 감성을 공유하는 것만이 아니라 깊은 상징성을 지니고 있으며 그의 강렬한 상징 언어를 공유한다고 주장한다. 살아있는 꽃과 죽은 꽃, 특히 해바라기는 동일한 공간 안에서 존재하며, 이는 생명의 모성적이거나 재생산적 의미를 지니는 듯 하다. 가을의 나무들은 죽음, 위협, 고독을 암시하며, 이는 실레가 그린 많은 사람들의 이미지와도 비슷하다.


에곤 실레, <시든 해바라기(가을 햇살 II)>, 1914, Oil on canvas, Private Collection, Courtesy Eykyn Maclean

에곤 실레, <시든 해바라기(가을 햇살 II)>, 1914, Oil on canvas, Private Collection, Courtesy Eykyn Maclean


실레가 풍경화에서 자연을 의인화하는 것인지, 아니면 그의 초상화에서 인간 신체를 자연으로 그리고 땅의 연장(延長)으로 그리는 것인지는 확실히 알 수 없다. 이 작은 전시회의 성과는, 우리가 전시를 끝까지 관람하게 됨에 따라 두 종류의 그림 사이에 구분이 거의 사라질 것이라는 점에 있다.



실레는 그가 자라난 기독교적 풍경에 애니미즘적 변형을 가미했다. 숲의 신성한 장소들은 버섯처럼 솟아있고, 교회 탑은 원시적인 남근 에너지를 발산한다. 실레는 1910년에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썼다. "모든 나무는 얼굴을 가지고 있어요. 내 눈엔 나무가 가지고 있는 나름의 눈, 나름의 팔, 그 장기들, 그 생명체가 보여요."


에곤 실레, <남쪽에서 바라본 다뉴브 강변 도시 슈타인>, 1913 Oil on canvas, Neue Galerie New York. 이 작품은 에스티 로더(Estée  Lauder) 컬렉션의 일부이며, 에스티 로더가 제공했다.

에곤 실레, <남쪽에서 바라본 다뉴브 강변 도시 슈타인>, 1913 Oil on canvas, Neue Galerie New York. 이 작품은 에스티 로더(Estée Lauder) 컬렉션의 일부이며, 에스티 로더가 제공했다.


그의 글을 조금 더 읽어보면, 세기말의 비엔나, 니체적인 요소에 더해진 바그너적인 연결 및 초월 욕망이 하나로 뒤섞여 있는 매우 익숙한 지적 분위기가 느껴진다. 실레는 젊은 남자로서 자신감과 경멸감이 뒤섞인 망상적 감정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것은 자기 내면의 진실성과 사회의 가식성에 대한 그의 '집착'이 드러난 것이다.


"모두가 나를 부러워하고 속인다. 옛 동료들은 나를 거짓의 눈으로 바라본다. 비엔나에는 그림자만 있고, 도시 전체가 검다. 모든 것은 레시피대로 이루어질 뿐이다"라고 그는 또 다른 편지에서 썼다.


하지만 실레는 비엔나의 언어를 사용했는진 몰라도 그곳에서 살고 작업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슈타인이나 모친의 고향인 크루마우와 같은 소도시들로 갔다. 그는 그곳에서 영감은 받았지만 매료되지는 않았고, 단지 그곳의 그림엽서같은 아취를 격정적으로 그려내며 비엔나라는 대도시에 대한 적대감을 표현했다.


에곤 실레, <크루마우 도시풍경(성 비투스 교회와 집들>, 1912 Oil on panel, Private Collection

에곤 실레, <크루마우 도시풍경(성 비투스 교회와 집들>, 1912 Oil on panel, Private Collection


1912년 작품인 <크루마우 도시 풍경(성 비투스 교회와 집들)>에서는 그림에 사용된 두터운 물감을 매체로서 두드러져보이게 강조하거나 또는 2차원인 그림을 3차원 조각처럼 보이게 하려는 의도가 아니라, 이렇게 보는 자신의 관점이 단지 여러 가지 의견 중 하나가 아니라 순수한 주관이 담고 있는 절대적 진리라고 주장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에곤 실레, <화려한 조끼를 입고 서있는 자화상>, 1911, Gouache, watercolor, and black crayon on paper, mounted on cardboard, Ernst Ploil, Vienna

에곤 실레, <화려한 조끼를 입고 서있는 자화상>, 1911, Gouache, watercolor, and black crayon on paper, mounted on cardboard, Ernst Ploil, Vienna


같은 해에 그린 강렬한 자화상에서도 비슷한 강한 주장이 느껴지는데, 이 그림에서 실레는 자신의 검은 머리카락 난발을 하얀색 후광으로 둘러쌌고, 손을 각지게 그려 마치 무기처럼 보이게 했다. 그는 화려한 조끼를 입고 있으며, 자신이 그린 다른 사람들의 모습과 달리 곧게 서 있다.


하지만 실레는 자신이 그린 나무들에게는 그러한 자신감을 부여하지 않았다. 노이에 갤러리 전시에서 가장 강력한 작품 중 하나는 1913년작 <두 그루의 나무가 있는 강 풍경>이다. 이 두 나무는 마치 젊은 실레처럼 어린 묘목 상태를 겨우 벗어난 듯 하다. 그 주위의 풍경은 몇 개의 작은 화려한 꽃들만 있을 뿐 거의 황량하다. 마치 자신이 적대적인 도시 속에 있다고 상상하는 젊은 남자처럼 말이다.


인간과 식물은 다른 수단과 메커니즘으로 성장한다. 우리는 동물이며, 우리의 몸은 모친의 자궁에서 대부분 만들어지며, 생애 처음과 마지막에 취약하다. 하지만 우리의 정신은 나무와 비슷해서, 서리와 바람에 민감한 연한 새싹을 틔운다. 어떤 가지는 오래가지만, 많은 가지들은 못 버티고 시든다. 어떤 감정은 여리며 취약하고, 다른 감정은 오래된 나무 껍질로 단단히 덮인다.


<두 그루의 나무가 있는 강 풍경>에서 두 나무는 망상을 공유한다. 두 나무는 번성하는데 필요한 모든 것을 가지고 있다. 즉 땅은 넓고, 햇볕도 있고, 뿌리를 적셔줄 강물도 멀리 보인다. 두 나무는 밀집해 있지도 않고 잡초와 숲의 다른 나무들의 침범으로 고통받지도 않는다. 그럼에도 그들은 완전히 불행해 보인다. 마치 고독과 욕망을 안고 살아가는 수많은 젊은이들처럼 말이다.


1918년 실레가 마지막 눈을 감은 침대 위 모습의 사진은 이 모든 것들을 보여준다. 우리는 그의 작품을 보면서 이것이 1928년이나 1968년에 나왔다면 어떤 모습이었을지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다. 그는 탁월한 예술가였고, 적어도 몇 개의 혁명을 안에 품고 있었다. 하지만 그 혁명들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는 늙었던 적이 한번도 없었지만, 항상 늙어 있었다. 어쩌면 젊음을 충분히 맛볼만큼 오래 살지 못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에곤 실레: 살아있는 풍경들》

2025년 1월 13일까지 뉴욕 노이에 갤러리에서 전시

http://www.neuegalerie.org




필립 케니코트(Philip Kennicott)는 퓰리처상을 수상한 워싱턴포스트의 미술 및 건축 비평가다. 그는 1999년부터 워싱턴포스트에서 근무했으며, 처음에는 클래식 음악 비평가로, 이후 문화 비평가로 활동했다.


역자 이희정은 영국 맨체스터대 미술사학 박사로 대영박물관 어시스턴트를 거쳐 현재 국민대 강사로 강의와 연구를 이어가고 있다. 역서로 '중국 근현대미술: 1842년 이후부터 오늘날까지'(미진사, 2023)가 있다.


1877년 창간돼 뉴욕타임스, 월스트리트저널과 함께 미국의 대표적인 일간지로 손꼽힙니다. 닉슨 대통령의 사임으로까지 이어진 1972년 워터게이트 스캔들 보도로 유명합니다. 2013년 아마존 창업자 제프 베이조스가 인수한 이래 디지털 전환을 적극적으로 추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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