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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발란신의 작품 '주얼스'를 연습하고 있는 뉴욕시티발레단. /사진=로이터/뉴스1
2025.02.14 17:08
이제 나는 알린 크로체Arlene Croce에게 감명을 줄 기회를 영영 잃었다.
지난 12월 90세로 타계한 크로체는 미국 무용의 전성기에 무용 평론계의 거인이었다. 나는 글쓰기 경력을 무용 평론가로 시작했고, 그것만이 내가 오랫동안 작가로서 가졌던 꿈이었다. 내가 처음 발표한 글 60여 편은 모두 무용 리뷰였고, 전적으로 크로체 한 사람만을 독자로 상정하고 썼다. 내가 보는 무용의 세계에서 그는 북극성이자 여왕이었고 무용은 그를 중심으로 펼쳐졌다. 내가 내 인생에서 그의 인정을 받는 것만큼—청춘의 열정과 견습 작가의 칭찬에 대한 갈망으로—강렬히 원했던 것은 몇 되지 않는다.
나는 결코 그의 인정을 받지 못했다. 사실 내가 쓴 글을 그가 단 한 글자라도 봤는지조차 모른다. 하지만 그의 죽음은 나를 그 시절로 되돌려놓았다. 돌이켜보면 당시는 피렌체 회화나 비엔나 음악에 견줄 만한 업적을 미국이 무용에서 이룬, 미국 무용의 황금기가 저물어가는 시기였다. 이제는 이를 기억하는 이가 많지 않다. 무용은 후세에 남기는 것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무용은 벽에 걸 수도, 악보로 재현할 수도, 책에서 발견할 수도 없다. 공연의 순간과 공연자들의 물리적 존재 없이는 경험할 수 없다. 카메라가 이를 기록할 수는 있지만 포착할 수는 없다. 보존은 더더욱 불가능하다. 한 순간에는 여기 있다가 다음 순간에는 사라진다. 그걸 경험하려면 그곳에 있어야 했다. 내가 말하는 그곳이란 뉴욕 맨해튼 남부를 의미한다. 미국 무용의 황금기가 주로 일어난 곳이 바로 그곳이었다. 미드타운의 콘서트홀, 이스트빌리지의 공연장, 소호와 트라이베카의 로프트, 웨스트 19번가의 작은 극장들.
만약 당신이 그곳에 있었다면 조지 발란신George Balanchine의 작품을 보았으리라. 고전적 순수성이 수정처럼 빛나고, 모더니즘적 규모와 속도감이 대담하고 세련된 그의 작품들을, 그가 설립했고 여전히 그의 흔적을 간직한 뉴욕시티발레단이 공연하는 모습을. 무용의 위대한 미학적 혁명가 머스 커닝엄Merce Cunningham의 작품도 보았으리라(발란신이 무용을 이야기에서 해방시키고 음악에 묶어두었다면, 커닝햄은 둘 다에서 해방시켰다고 한다). 수사슴처럼 아름답고, 이스터섬의 석상처럼 수수께끼 같으며, 수학 방정식처럼 자족적인 작품들을. 창의성의 절정에 있던 폴 테일러의 작품, 경쾌하고 즐겁고 넉넉한 그의 춤들, 행복한 인간 세계를 근육과 움직임으로 표현한 이미지들도. 1980년대 초에 등장해(그를 유명하게 만든 것은 '뉴요커'에 실린 크로체의 리뷰였다) 그 천재성을 처음 꽃피우며 무용을 완전히 새롭게 재창조하던("우리가 알고 있던 무용의 언어—오래된 학구적 혹은 반학구적 용법—이 그의 몸에서 넝마처럼 떨어져 나간다") 마크 모리스의 작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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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모던 무용의 거인들(트리샤 브라운, 데이비드 고든, 루신다 차일즈 등)도 보았으리라. 1960년대 초에 시작된 실험적 운동이었던 포스트모던 무용은 나중에 생겨난 '포스트모더니즘'과는 공통점이 없었지만 퍼포먼스 아트와는 관련이 많았다. 끊임없이 나타나 뉴욕 도심의 스튜디오, 오래된 교회, 폐교에서 작품을 공연한 젊은 안무가들(랄프 레몬, 수잔 마샬, 닐 그린버그 등등)도 보았으리라. 미주리나 몬태나, 혹은 스위스나 아르헨티나에서 뉴욕으로 상경해 엘리베이터도 없는 5층 집에 살면서 레스토랑에서 일하고, 고대인들이 생각한 신이 무엇인지 우리에게 보여주었던 젊은 무용가들도 보았으리라.
미국 무용의 전성기는 필연적으로 미국 무용 평론의 전성기이기도 했다. 이전 세대의 대표적 평론가였던 에드윈 덴비Edwin Denby는 예술이 우리의 쾌락 경험을 연장하려는 시도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비평은 우리의 예술 경험을 연장하려는 시도인 것이다. 무용의 경우, 이는 몹시 까다로운 과제다. 움직임을 언어로, 가장 육체적인 예술을 가장 지적인 매체로 번역해야 할 뿐만 아니라, 무용의 찰나적 특성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책상에 도착할 때쯤—사무실 로비에 도착할 때쯤—그것은 사라지고, 남는 것은 빠르게 희미해지는 기억뿐이다. 크로체가 그의 첫 평론집 제목에서 말했듯이 "잔상"일 뿐이다.
크로체보다 더 잘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의 산문에는 권위가 있었고, 그의 지식은 포괄적이었으며, 그의 눈과 귀는(무용은 음악적 예술이기도 하므로) 완전무결했다. 하지만 그 외에도 정말로 잘 하는 평론가가 많았다. 나는 1987년에 무용 비평 수업을 들었다(그것이 내가 이 분야에, 글쓰기에, 그리고 실제로 나의 여생에 발을 들여놓게 된 계기였다). 강사는 토비 토비아스Tobi Tobias였는데 당시 '뉴욕' 매거진의 무용 칼럼니스트였다. 그는 매주 여성 평론가들의 글을 우리에게 소개했다. 크로체 다음에는 '허드슨리뷰The Hudson Review'에 평론을 썼던 마샤 시겔Marcia Siegel, 사진처럼 정확한 기억력과 느슨한 대화체를 구사하면서 매주 '빌리지보이스The Village Voice'에 전면 기사를 쓴 데보라 조윗Deborah Jowitt, '네이션The Nation'에 글을 쓴 민디 알로프Mindy Aloff, 달콤하고 명확한 산문으로 결국 '뉴요커'에서 크로체의 후임이 된 조앤 아코셀라Joan Acocella가 있었다.
여기서 가장 놀라운 점을 놓치면 안 된다. 뉴욕 매거진에 무용 칼럼니스트가 있었다. 네이션에 무용 칼럼니스트가 있었다. 빌리지보이스에 무용 칼럼니스트가 있었다(빌리지보이스는 단순한 웹사이트 이상으로 실존했던 매거진이다). 뉴요커에는 여전히 무용 칼럼니스트가 있지만(현재는 제니퍼 호먼스Jennifer Homans다) 그가 이 자리를 맡은 6년 동안 발표한 리뷰는 총 13편에 불과하다. 크로체가 뉴요커의 무용 칼럼니스트로 일했던 1973년부터 1996년까지 그는 매년 최소한 그 정도의 글을 썼다. 무용 자체처럼, 무용 비평도 미국 문화 속에 존재감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이는 무용 비평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내가 뉴욕에서 성년이 되어 예술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을 때 접한 문화적 환경에는 비평에 생동감과 다양성이 있었다. 영화의 폴린 케일Pauline Kael과 앤드류 새리스Andrew Sarris, 미술의 로버트 휴즈Robert Hughes, 문학의 존 레너드John Leonard와 엘리자베스 하드윅Elizabeth Hardwick, 건축의 마이클 소킨Michael Sorkin과 에이다 루이스 헉스터블Ada Louise Huxtable, 록의 로버트 크리스트고Robert Christgau, 재즈의 스탠리 크라우치Stanley Crouch가 있었다. 인터넷의 등장과 저널리즘 비즈니스 모델의 붕괴 이후 예술 비평의 쇠퇴는 이제 많이 거론된 이야기가 되었다. 하지만 만약 이것이 언젠가 반전될 것이라면 우리는 비평이 애당초 왜 중요했는지—무엇을 어떻게 했는지—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탁월한 산문을 썼다는 걸 제외하고 각기 그 성격이 매우 다른 이들 평론가가 가진 공통점은—그리고 이것이 그들의 비평과 오늘날의 소위 '문화 담론'의 대부분과의 차이점인데—그들의 글쓰기가 작품과의 직접적인 만남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도덕주의적 의제나 시사적인 논점, 또는 개인사적 잡담에 현혹되지 않았다. 그들은 작품에 대한 자신의 반응으로 시작해 거기서부터 확장해 나갔고, 작품이 어떻게 그러한 반응을 불러일으켰는지를 파악하고자 했다. 이는 또한 그들이 스스로의 판단을 신뢰했음을 의미한다. 그들은 논란을 두려워하지 않았고 '담론' 따위는 신경 쓸 여력도 없었다. 그들은 "견해take"를 쓰지 않았다. 견해란 작품에 관한 것이 아니라 다른 이들이 자신을 어떻게 봐주기를 바라는지에 관한 것이다. 그들은 스스로를 만족시키기 위해 글을 썼다. 그들은 자신이 사랑하는 예술에 합당한 평가를 부여하기 위해 글을 썼다.
이는 그들이 자신의 의견처럼 자신만의 목소리를 뚜렷하게 낼 수 있었음을 의미했다. 오늘날의 비평 상당수는 마치 디너 파티를 위해서 쓴 것 같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디너 파티에서 쓴 것 같다. 하지만 그들은 교양있는 체하는 빈말과 대학 캠퍼스에서 쓰는 허튼소리, 비평적 클리셰를 피했다. 그들은 인터넷 말투나 뉴요커식 말투(당시의 뉴요커 매거진은 지금의 뉴요커와 매우 달랐다)를 쓰지 않았다. 그들은 개인으로서 글을 썼고 사람의 언어로 글을 썼으며 관객의 일원으로서, 동료 애호가로서 글을 썼다. 다만 우리들보다 훨씬 더 똑똑했을 뿐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들을 신뢰할 수 있었다. 진지한 비평의 기능 중 하나는 늘 관객을 새롭고 도전적인 작품으로, 충격적이고 혼란스러우며 관습을 위반하고 예의범절을 더럽히는 작품으로 이끄는 것이었다. 비평이 낭만주의와 함께, 현대성의 여명기와 혁명의 시대에 등장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때 처음으로 예술가들은 전통 안에서 작업하는 것이 아니라 전통을 깨고 전통과 단절하고자 했다. 전위 예술avant-garde은 관객에게도 전위대를 요구했으며 최고의 비평가들이 바로 그 전위대 역할을 했다. 그들은 가장 먼저 이해했으며 이를 설명하는 데도 가장 뛰어났다.
그래서 해즐릿은 워즈워스를, 러스킨은 터너를, 루이스 멈포드는 허먼 멜빌을, 에드먼드 윌슨은 프루스트, 조이스 등의 고급 모더니즘을 옹호했다. 무용에서는 크로체가 모리스를, 덴비가 발란신을, 1930년대에는 존 마틴이 마사 그레이엄을 옹호했다. 토니 모리슨은 존 레너드의 초기 지지에 너무나 감사한 나머지 노벨상을 받으러 스톡홀름에 갈 때 그를 초대했다. 기타 등등. "눈부신 업적을 가진 비평가들은 자신의 평판을 걸고, 위험을 감수하며, 문제적 예술작품의 가치와 수명에 대해 공개적으로 베팅을 했다." 위대한 평론가 데이브 히키는 썼다.
하지만 관객의 협조가 필요하다. 관객에게도 자신을 넘어서고자 하는 욕구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수십 년간, 선망을 가진 중산층이 확산되면서 촉발된 '문화 붐' 속에서 관객은 그렇게 했다. 물론 많은 헛소리도 있었다. 지위 과시와 허세, 중급문화middlebrow의 "예술 감상"이 있었다. 하지만 진짜인 것도 많았다. 의식의 확장, 영적 깊이, 예술에 의해 새로워진 세계에 대한 진정한 욕구가 있었다. 특히 젊은이들 사이에서, 특히 뉴욕에서 그러했다.
이젠 그런 걸 볼 수가 없다. 나는 여전히 고된 예술이 창작되고 있고, 그것이 주의 깊게 받아들여지고 지적으로 논의되고 있음을 의심하지 않는다. 하지만 내가 아는 한, 그러한 활동의 거의 전부가 소규모 동인coterie 안에서, 사회적 틈새와 지리적 고립지에서 일어나고 있다. 시인들이 다른 시인들을 위해 낭독회를 하고, 부시윅1 밖에서는 볼 수 없는 예술, 전문 웹사이트나 개인 서브스택에 글을 쓰는 비평가들이 있을 따름이다. 오래 전에 진지함을 잃은 사회에서 사라진 것은, 예술이 시급한 사안이라는 감각, 어떤 의미에서는 우리의 목숨이 그것에 달려있다는 더 넓은 감각이다. 그렇게 대중 관객도 사라졌다. 그렇게 의미 있는 비평의 가능성뿐만 아니라 그 존재 의의도 사라졌다. '화이트 로터스2'나 아만다 고먼3Amanda Gorman, 또는 샐리 루니4Sally Rooney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필요한 사람은 없다. 그런 창작물에 대해서는 "문화 비평"—도덕주의적 의제, 시사적 논점, 개인사적 잡담—으로 충분하다. 이는 예술 비평이 아니라 그 모조품이며 자존심 있는 젠더연구 전공자라면 누구나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다.
진지한 문화가 사라지면서 발생한 피해자가 둘 더 있다. 첫 번째는 또 다른 매개 기관인 대학이다. 대학은 사고와 표현의 전통이란 게 존재하며 그에 걸맞는 사람이 되는 게 우리의 의무라는 생각을 갖고 수련을 시작해야 했던 곳이다. 컬럼비아대학교의 한 고전 수업 강사는 기말고사에 이런 질문을 넣는 것으로 유명했다. "올해 우리가 읽은 책들 중 당신이 가장 재미없다고 생각한 책은 무엇이며 그 사실이 보여주는 당신의 결점은 무엇인가?" 오늘날 '모비딕' 같은 작품은 교실에서 배움의 대상이 아닌 훈계의 대상이다. 아니, 여전히 그런 작품을 학교에서 가르친다면 그럴 테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학생들이 그것을 읽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고, 읽을 능력도 없기 때문이다.
다른 피해자는 도시다. 나의 얘기는 뉴욕시에 대한 것이지만 보다 넓게 보면 도시적 삶의 한 형태를 뜻하기도 한다. 전후 수십 년 동안 뉴욕의 관객들은 자신들을 단순한 개인이 아닌 하나의 집단으로 인식했다. 열린 태도를 갖고, 세련되며, 자기초월적이어야 할 의무—그리고 그 위대한 모험—도 집단적인 의무로 여겨졌다. 사람들은 극장과 갤러리, 음악 클럽, 독립서점에서 서로를 보았고, 서로 속에서 서로를 보았으며, 모두가 함께 더 큰 무언가에 참여하고 있음을 알았다. 내가 앞서 언급한 많은 비평가들이—조윗뿐만 아니라 새리스, 소킨, 크리스토, 크라우치, 그리고 내가 언급하지 않은 다른 많은 이들까지—빌리지보이스에 등장했음은 매우 의미심장했다. 다들 그렇게 말하고 이해했듯, 빌리지보이스는 뉴요커들이 뉴요커가 되는 법을 배우는 곳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당신이 배우는 것의 일부였다.
그런 종류의 도시적 존재, 집단적 도시 의식은 대부분 사라졌다. 뉴욕에서도, 샌프란시스코에서도, 오스틴에서도, 내가 듣기로는 포틀랜드에서도 그렇다. 젠트리피케이션이 한 원인이고, 테크 브로tech bros들과 올리가르히들의 도착, 예술가와 보헤미안들이 임대료 상승으로 쫓겨난 것도 원인이지만, 주된 원인은 인터넷이 일상생활에 가져온 현상이다. 내겐 2000년대 중반 타임스스퀘어 근처의 원룸에 살았던 친구들이 있다. 교외에 있는 집의 침실 하나 짜리 정도로 작은 집이었지만 한 친구는 거기서 사는 게 나쁘지 않았다고 내게 말했다. "어차피 하루 종일 도시에서 보내고 집에선 잠만 잤으니까." 이제 사람들은 노트북과 앱을 가지고 집에 머문다. 특히 예술계의 주요 고객층이 그렇다. 도시의 구조도 이러한 변화를 수용하기 위해 찢겨나가고 있다. 체육관, 카페, 루프탑 사교 공간을 갖춘 '풀옵션' 신축 개발사업이 완전히 자족적인 라이프스타일을 제공하고 있다. 당신의 아파트는 당신의 의식과 마찬가지로 연속된 공간의 한 점이 아닌 네트워크의 한 노드node로 존재하며, 당신은 자신이 도시에 산다는 것을 알 필요가 전혀 없다. 이는 '도시'라는 관념의 죽음이다.
이 모든 것—야심만만한 비평의 쇠퇴와 그것을 야기하고 그로부터 비롯된 모든 것—은 의심할 여지없이 지난 수십 년간 미국 예술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현상인 '정체'를 설명하는 데 도움이 된다. 대략 1945년부터 1990년까지, 미국은 눈부신 창조적 예술 사조를 연이어 육성했다. 추상표현주의, 팝아트, 개념 미술. 비밥, 포크록, 힙합, 펑크. 신고전주의 발레, 포스트모던 댄스, 퍼포먼스 아트. 비트 시와 뉴욕학파. 유대계 소설과 아프리카계 미국인 소설. 흑인예술운동. 뉴할리우드5. 오프-오프-브로드웨이6. 그리고 뉴저널리즘7이 있었다. 그 이후, 특히 지난 20년 동안 우리는 제자리를 맴돈 것 같다.
아무것도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돌아오는 것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머스 커닝엄이 무용에 대해 한 말—무용은 손가락 사이로 흐르는 물과 같다—은 모든 것에 해당한다. 서브스택과 같은 플랫폼이 제공하는 가능성으로, 문화적 힘으로서의 평론을 부활시키려는 계획이 진행 중이라고 들었다. (이 글의 편집자인 샘 칸도 몇몇 동료 작가들과 함께 새로운 문학 리뷰 저널 창간을 추진하고 있다.) 그들의 행운을 빈다. 나는 그저 그들이 지난 미국 예술의 황금기와는 매우 다른 환경에서 성공할 방법을 찾아야 함을 알 따름이다.
윌리엄 데레저위츠는 미국의 작가이자 비평가로 저서 '고독의 종언The End of Solitude', '예술가의 죽음The Death of the Artist' 등이 있다. 1998년부터 2008년까지 예일대 영문학 교수였다.
Persuasion은 2020년 야샤 뭉크Yascha Mounk 존스홉킨스대 국제학대학원 교수가 프랜시스 후쿠야마 등과 함께 창간한 온라인 매체로, 자유민주주의적 가치를 옹호하며 이성과 증거 기반의 논의를 중시하는 플랫폼이다. 정치적 양극화와 편향된 담론을 넘어선 건전한 토론 문화를 조성하는 것을 목표로 하며, 표현의 자유, 민주주의, 포용적 사회에 대한 깊이 있는 분석과 다양한 시각을 제공합니다.
PADO에 실린 에세이 중 가장 많이 읽힌 '문화가 너무 따분해졌다'의 윌리엄 데레저위츠가 이번엔 예술의 정체 현상을 꼬집은 글을 썼습니다. 전후戰後의 활력을 잃은 것은 비단 글로벌 경제만이 아닙니다. 그 스스로가 평론가로서 커리어를 시작했던 데레저위츠는 평론의 정체가 예술의 정체로 이어졌다고 지적합니다. 그 기저에는 문화가 따분해진 것과 동일한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들 스스로부터가 깊이와 진지함의 추구에서 멀어졌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는 한편으로 새로운 인문학 열기 같은 움직임에서 작은 희망을 봅니다.
문화예술을 다루는 데레저위츠의 글(Persuasion 2025년 1월 7일자)에서는 다른 영역에 대한 번뜩이는 통찰도 읽을 수 있습니다. 이 글의 말미에서 언급하는 '도시'의 해체도 바로 그런 통찰입니다. 본래는 복작거리면서 '문화'의 이름으로 외식부터 예술까지 삶의 다채로운 영역을 제공하는 곳이 바로 도시였는데 오늘날 사람들의 생활이 파편화되면서 도시가 해체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본 에디터는 도시란 무엇인가 생각할 때마다 오래 전 뉴욕에서 본 공연을 떠올립니다. 뉴욕의 전설적인 음반 매장에서 주말마다 열리는 무료 공연이었는데 그때 보았던 젊은 색소폰 연주자는 이제 전 세계를 무대로 공연을 하는 아티스트가 됐습니다. 세계 곳곳의 재능 있는 이들이 모여들어, 서로 교류하며 성장해 우뚝 설 수 있다는 것이 진정한 '글로벌 시티'의 저력인데 어쩌면 그런 것도 과거의 유물이 될지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