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픔을 달래는 '초록빛': 시의 힘에 대한 성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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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 카슨의 시집 '잘못된 규범'(2024) /사진제공=New Directions Publishing

2025.03.28 15: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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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이 점점 더 물질적 가치로 환원되고 평가받는 듯한 오늘날의 세상에서 시는 과연 어떤 일을 할 수 있을까? 효용을 중요시하고 이윤을 추구해야 비로소 살아남는 현대인들에게 시가 의미 있게 다가오는 순간이 있기는 한 것일까? 요즘 같은 시절 그나마 조금이라도 시에 마음이 끌리는 계기가 있다면, 그건 아마도 어떤 아픔이 불쑥 찾아와 우리 곁에 머무르게 될 때가 아닐까 싶다. 열의를 쏟아 추구하던 과업이 실패할 때, 관계에서 크디큰 좌절감을 맛볼 때, 그리고 소중한 무엇인가를 떠나보내야 할 때, 슬픈 노래들은 남의 일이 아닌 것처럼 들려오고 무심코 읽은 시 한 편은 생각지도 않은 위로를 안겨 준다. 집단적인 차원에서 역시, 시는 때때로 큰 고통을 달래는 위안을 주기도 한다. 예컨대, 2001년 미국을 큰 충격으로 뒤흔들어 놓았던 9/11 사태가 발발했을 때, 시는 여기저기서 출현하여 상처 입은 마음들이 서서히 애도와 치유를 향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했다.


국내에서도 많은 사람들에게 주목받고 있는 캐나다 출신 작가 앤 카슨(Anne Carson)의 '아픔에 대한 짧은 강연'(Short Talk on Pain)은 이렇게 고통에 맞서는 시의 힘에 주목한다. 유력한 노벨문학상 후보로도 자주 거론되는 카슨은 몇 년간의 공백을 깨고 2024년에 <잘못된 규범>(Wrong Norma)이라는 제목의 산문시집을 발표했다. 전미도서상 최종 후보의 자리에까지 오르며 평단의 찬사를 받은 이 시집에는 명확한 진술보다는 불연속적인 질문들이 더 많이 담겨 있는 느낌이다. 2023년에 카슨이 발표한 '아픔에 대한 짧은 강연'은 어떤 의미에서 <잘못된 규범>으로까지 이어지는 단상을 담고 있지 않나 싶다. 카슨은 이 짤막한 글을 통해 시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또 독자는 시에 어떻게 다가가야 하는지에 대한 깊은 성찰을 재치 있는 방식으로 담아내고 있다.

앤 카슨 - 아픔에 대한 짧은 강연 (번역: 조희정)

잔디밭과 풀밭과 언덕과 넓고 오래된 벨벳

소매, 초록빛인 것들. 그것들은 쭉 뻗어 있고, 접히고, 굴러가고,

펼쳐지며 눈을 진정시킨다. 그림들 속에서 무성해 보인다.

전투가 초록 들판에서 벌어진다. 아니면 당신은 먹을 것을

펼쳐 놓고 저녁을 먹을 수도 있다. 머나먼 숲들의 바닥, 얼마나

은밀하게 놓여 있는가. 다음엔 무덤이 온다, 초록에 대한

많은 시에서. 그러나 이것은 시가 아니다. 이건 냉동

초록 콩의 광고판이다. 냉동 초록 콩은

아픔에 잘 듣는다.



카슨은 "초록빛"이라는 색상을 시각적으로 독자 앞에 펼쳐 보이면서 시를 시작한다. 고대에 시작된 목가시(pastoral)의 전통에서부터 "초록빛"은 바쁜 현실을 떠나 전원적 풍경 속으로 잠시 몰입하게 하는 시의 역할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빛깔이었다. 문명이 더욱 발전하고 복잡한 도시 생활이 본격화된 이래로, "초록빛"은 더욱 중요한 색으로 시에서 나타나게 되었다. 낭만주의 시인들은 자연으로부터 단절되고 고립된 인간의 삶을 탈피하고자 했으며, 그 이후 "초록빛" 세상 속에서 위안과 치유를 얻고자 하는 시도는 수많은 시들을 통해 거듭되어 왔다.


"잔디밭"이나 "풀밭", "언덕"과 같은 자연 경관은 시 속에 새겨져서 지금 당면한 현실에서 이런 초록의 풍경 속으로 직접 뛰어들 수 없는 이들이 겪는 아픔을 상상적 몰입을 통해 어루만져 주었다. 카슨은 시 속에 자주 등장하는 이런 자연물들을 언급한 후 여기에다 "넓고 오래된 벨벳 소매"를 덧붙임으로써 "초록빛"을 가진 사물들을 다양하게 짚어내고, 자연과의 교감 뿐 아니라 과거의 따뜻한 기억에 대한 향수 역시 정서적인 치유를 가져다줄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렇게 "눈을 진정"시키는 "초록빛"은 시각적으로 안정적인 기운을 전달해 주면서 매일의 반복된 일상에서 혹사당하는 육체와 정신을 재생시켜 줄 에너지의 충전을 가능하게 한다.


하지만, 바로 다음 대목에서 카슨은 "초록빛"이 시에서 가지는 상징적인 의미에 질문을 던지기 시작한다. "그림들" 속에서 유난히 "무성해" 보이는 초록빛은 어쩌면 지나치게 과장되고 미화된 것은 아닐까? 더 나아가서, "초록 들판"에서 때로는 "전투"가 벌어지기도 한다는 다음 구절은 시에서 반복적으로 강조해 온 "초록빛"의 치유적 힘에 대해 본격적으로 의문을 제기한다. 녹색의 자연은 일상적 삶에 찌든 인간들이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공간만이 아니라, 치열하고 참혹한 전쟁터로 언제든지 변할 수 있는 곳이기도 한 것이다. 물론, 평화로운 시기에 "초록빛" 자연은 먹을 것들을 펼쳐 놓고 사랑하는 이들과 즐거운 식사를 할 수 있는 배경이 되기도 한다. 그렇다면 결국, "초록빛" 자체가 위로를 주는 것이 아니라 독자가 "초록빛"과 어떤 형태의 만남을 가지는지가 그 빛깔의 의미를 결정하게 되는 셈이다.


오랜 세월 동안 시가 제시해 온 독자와 "초록빛" 사이의 만남은 지나치게 추상적이거나 관념적인 차원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경우도 많이 있었다. 카슨은 "머나먼 숲들의 바닥"이라는 구절을 통해 독자들로부터 동떨어진 "초록빛" 세상을 신비화해서 그려내는 시들의 한계를 지적한다. 이런 녹색의 세계는 독자가 실제로 교감하기에 너무 "은밀하게" 보일 뿐이다. 또한, "무덤"이 등장하는 많은 시에서 보여주는 "초록빛"은 자연계에서 작동하는 순환적 질서를 표상함에 분명하지만, 무덤 위에서 돋아나는 녹색의 풀들은 독자가 지금 당장 느끼는 아픔을 효과적으로 치유해 주기에는 너무 상투적이고 진부한 상징물로 느껴지기도 한다. 죽음 너머에 있을 또 다른 삶의 도래를 상상하는 것은 물론 현실의 고통을 아예 초월하는 경지로까지 나아가는 의미를 지닐 수 있겠지만, 막상 아픔을 겪어내고 있는 이들에게 그런 고차원적인 상상은 쉽사리 도달하기 어려운 추상적 관념으로만 다가올 수도 있다.


그래서, 카슨은 훨씬 더 직접적이고 명쾌한 방식으로 고통에 대한 치유를 이야기하고자 한다. 자신의 시는 기존의 시들과 구별되는 "냉동 초록 콩의 광고판"이며, "냉동 초록 콩"은 "아픔에 잘 듣는" 아주 효과적인 처방이라는 것이다. 근육통이나 관절통이 심할 때 차가운 얼음찜질을 하듯이, 북미권에서는 신체적 아픔을 달래기 위해 얼어 있는 "초록빛" 콩을 사용하곤 한다. 이 시의 마지막 부분에서 몸에 직접적으로 와 닿는 촉각적 경험이 갑작스럽게 환기되는 순간, "초록빛"은 멀리서 바라보는 시각적 이미지를 넘어서서 지금 바로 체험할 수 있는 차가운 기운으로 새롭게 정의된다. 독자의 고통을 어루만져 주기 위해서는 "초록빛" 세상을 막연하게 그려내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며, 때로는 "냉동 초록 콩"이 전해 주는 선명한 신체적 자극이 필요하다는 점을 카슨은 정확하게 직시한다.

아픔에 대해 이야기하는 시에서 냉동식품이 느닷없이 등장하는 것은 사실 매우 신선하다. 온도의 관점에서 말해 보자면, 흔히 우리가 떠올리는 위로나 치유는 차가움보다는 따뜻함과 훨씬 많이 연관된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이 점을 의식하는 듯, 카슨은 시의 마지막 구절에서 "냉동 초록 콩은 아픔에 잘 듣는다"고 분명히 말한다. 어쩌면, 때때로 고통에 대한 처방으로 가장 적합한 것은 따스한 온기를 담은 포옹보다는 현실에 대한 차가운 자각일지도 모른다. 시는 따뜻한 위안만을 안겨 주는 것이 아니라 냉철하게 상황을 바라보는 관점을 일깨워 줌으로써 아픔에 대한 효과적인 치유를 시작하기도 하는 것이다.


흥미롭게도, 이 시에서 차가움을 가득 담은 이 "냉동 초록 콩"은 독자에게 곧바로 전달되는 대신 "광고판"에 나타나 있다고 제시된다. 사실 우리는 언제나 수많은 광고들을 스쳐 지나가며 살아가지만, 그중에서 무엇인가를 선택하고 거기에 돈과 시간을 투자할 때만 "광고판"에 떠 있는 사물은 우리에게 의미를 지니는 것으로 변화한다. 시를 읽는 작업 역시 어느 정도 이런 속성을 공유하는 것은 아닐까? "광고판"에 나타나 있는 "냉동 초록 콩"을 아픔에 잘 듣는 처방으로 얻어내기 위해서는 단순히 물질적 대가를 치르는 이상의 투자가 필요하다. 시를 곱씹고 되풀이 생각하는 정서적 비용을 아끼지 않고 지불할 때에야, 시는 비로소 독자를 차갑게 각성시키고 고통을 잠재우는 고유의 역할을 하게 될 수 있을 것이니까 말이다.

원문: Short Talk on Pain

Lawns and fields and hills and wide old velvet

sleeves, green things. They stretch, fold, roll away,

unfurl and calm the eye. Look lush in paintings.

Battles are fought on greens. Or you could spread

a meal and sup. How secretly they lie, floors of

distant forests. Next comes the grave, in many a

poem about green. But this is not a poem. This is a

billboard for frozen green peas. Frozen green peas

are good for pain.




조희정은 중앙대학교 영어영문학과 교수로 하버마스의 근대성 이론과 낭만주의 이후 현대까지의 대화시 전통을 연결한 논문으로 미시건주립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인간과 자연의 소통, 공동체 내에서의 소통, 독자와의 소통, 텍스트 사이의 소통 등 영미시에서 다양한 형태의 대화적 소통이 이루어지는 양상에 관심을 가지고 다수의 연구논문을 발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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