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각예술

나치가 벌인 모더니즘 미술과의 전쟁

기사이미지

오토 프로인틀리히,〈큰 머리〉,《퇴폐미술》전시회의 안내 책자 표지, 1937(mahJ /Christophe Fouin)

2025.04.04 15:55

Washington Post
icon 8min
kakao facebook twitter



1943년, 파리에서 파블로 피카소는 화가 잔 코스닉-클로스로부터 절박한 편지를 받았다. 그녀는 편지에 "이미 모든 게 너무 늦었어요," "오토가 북쪽으로 보내졌다는 소식을 방금 들었어요. 제발 그를 위해 무언가 해주세요. 부탁드려요. 제가 슬픔으로 죽기 전에 무엇을 해야 할지 알려주세요"라고 썼다.


코스닉-클로스는 피카소의 친구 오토 프로인틀리히의 반려자였다. 피카소와 프로인틀리히는 몽마르트르의 낡고 허름한 예술가 작업실들이 밀집한 곳, 일명 '바토 라부아르'에서 이웃으로 지내며 살았다. 이는 제 1차 세계대전 이전, 피카소와 조르주 브라크가 입체주의를 창조하던 '영웅적 시기'였다.


두 사람은 연락을 이어갔고, 1938년에는 피카소가 프랑스 정부에 프로인틀리히의 작품 하나를 구입하라고 촉구하는 탄원서에 서명하기도 했다. 그러나 문제의 1943년, 파리는 나치 점령하에 있었고, 피카소는 그 명성에도 불구하고 무력했다. 프로인틀리히는 이미 파리 외곽의 드랑시 수용소에 수감돼 있었다. 코스닉-클로스의 편지가 도착한 지 이틀 뒤, 그는 폴란드의 나치 수용소 소비보르로 향하는 길에 올랐고, 그곳에서 살해됐다.


우리는 파리 피카소 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전시회를 통해 코스닉-클로스의 슬픔을 조금이나마 느껴볼 수 있을 것이다. 유대인 공동체의 중심지로 오랜 세월 자리했던 마레 지구에 위치한 이 미술관은 현재 "퇴폐미술: 나치 아래 재판받은 모더니즘 미술"이라는 전시를 열고 있으며, 이 전시에는 그녀의 편지도 함께 공개되어 있다. 전시는 5월 25일까지 계속된다.



이번 전시에는 피카소, 바실리 칸딘스키, 파울 클레, 에른스트 루트비히 키르히너, 조지 그로츠를 비롯한 수많은 모더니즘 미술가들의 빼어난 작품들이 포함되어 있다. 하지만 이 전시는 드물게도 예술 작품의 수준 자체가 중심을 차지하지 않는 전시다. 이 전시는 실제로 '문화 전쟁'에 관한 것이며, 그것이 결국 어떤 결과로 이어질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오늘날 사람들이 '문화 전쟁'을 언급할 때, 그것은 종종 실제 전쟁—즉 폭탄과 기관총으로 사람들이 죽는 전쟁—과는 구별되는 것이라는 전제가 깔려 있다.


그런 구분이 유지되는 나라야말로 행복한 나라다. 전쟁이 벌어지는 방식이 비폭력에서 폭력까지 스펙트럼을 이루는 것이 사실이지만, 위험한 시대에는 그 사이의 간극이 쉽게 무너져버린다.


조지 그로츠(George Grosz), 〈메트로폴리스(Metropolis)〉, 1916-1917. (Estate of George Grosz/ADAGP/Museo Nacional Thyssen-Bornemisza)

조지 그로츠(George Grosz), 〈메트로폴리스(Metropolis)〉, 1916-1917. (Estate of George Grosz/ADAGP/Museo Nacional Thyssen-Bornemisza)


'퇴폐미술(degenerate art 또는 entartete Kunst)'이라는 용어는 나치가 모더니즘 미술을 말살하기 위한 공개 선전 캠페인의 일환으로 만들어낸 표현이다. 그들은 모더니즘 미술이 "바보", "정신병자", "범죄자", "투기꾼", "볼셰비키", 그리고 "유대인"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주장했다. 아돌프 히틀러가 주도한 이 캠페인은 대중의 혐오와 역겨움을 자극하는 데 초점을 맞췄으며, 1933년 히틀러가 집권한 이후부터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 지속되었다.


그 시기 동안 오토 딕스, 막스 베크만, 오스카 코코슈카, 칸딘스키, 클레, 키르히너 등을 포함한 1400명 이상의 예술가들이 모욕과 공개적인 망신을 당하고, 교수직에서 해임되며, 전시와 창작 활동이 금지되었고, 신변의 위협을 받거나 망명에 내몰렸다. 프로인틀리히처럼 살해된 이들도 있었다.


이미 사망했거나 독일 밖에 거주하던 예술가들도 표적이 되었다. 마티스, 반 고흐, 피카소 역시 '퇴폐미술'로 낙인찍혔다. 공공 미술관에서 수많은 작품이 압수되었고, 이를 비방하는 전시에 작품이 전시되거나 해외에 팔려 나갔으며, 일부는 파괴되었다.



나치는 정권을 잡자마자 '퇴폐미술'에 대한 탄압을 시작했다. 그 이전까지 독일의 미술관들은 최고의 모더니즘 미술 작품들을 적극적으로 수집해왔다. 그러나 안목 있는 미술관 전문가들은 1933년부터 해고되기 시작했고, 독일 전역의 공공 소장품에서 모더니즘 미술 작품들이 대거 제거됐다. 막스 베크만과 오토 딕스 같은 예술가들은 교수직에서 해임됐고, 딕스는 알프스로 은둔했으며, 베크만, 칸딘스키, 클레, 그로츠 등은 결국 독일을 떠났다.


나치가 모더니즘 미술의 가장 타락한 경향이라 규정한 작품들을 모아 공개 조롱한 전시회《퇴폐미술》전은 1933년 드레스덴에서 처음 열렸다. 같은 해 만하임에서는 또 다른 비방 전시인《문화 볼셰비즘의 이미지》가 개최됐다. 이 두 전시는 모두 훗날 열리게 될, 역사상 가장 혐오스럽고 동시에 가장 많은 관람객을 끌어모은 모더니즘 미술 전시의 예행연습에 불과했다.


이 전시 역시 앞선 전시들과 마찬가지로 "퇴폐미술"이라는 이름을 걸고 1937년 7월 19일 뮌헨에서 개막했다. 독일 미술관들에서 이미 압수된 수천 점의 작품들 중에서 선별된 약 700점이 전시되었으며, 유럽에서 가장 저명한 모더니즘 미술 작가들의 작품이 포함돼 있었다.


입장료는 무료였다. 모더니즘 미술 애호가들에게는 수많은 거장들의 작품을 한자리에서 깊이 있게 감상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그러나 나치는 이 작품들을 '퇴폐'의 증거로 제시하며 조롱과 경멸의 대상으로 만들었다.


전시장 벽에는 작품을 설명하거나 맥락을 제공하기 위한 문구가 아닌, 작품을 비방하기 위한 구호들이 칠해져 있었다. 예컨대 "군대에 대한 의도적인 사보타주" "병든 정신이 본 자연" "유대인 인종의 영혼을 드러내다" 같은 문구들이 그것이었다.


다다이즘을 다룬 섹션처럼 일부 경우에는 전시가 조롱조의 아이러니한 연출로 구성되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구호는 노골적인 적개심을 담고 있었다. 유대인 작가들을 다룬 섹션은 단 하나였으며, 거기에는 마르크 샤갈, 얀켈 아들러, 루트비히 마이드너 등이 포함됐다. 그러나 전시 전체는 모더니즘 미술이 유대주의와 볼셰비즘 세계관을 은밀히 퍼뜨리는 선전도구에 불과하다는 전제를 깔고 기획되었다. 나치는 유대인 딜러(화상), 큐레이터, 비평가들이 이러한 미술을 대중에게 강요하고 있다고 주장하며, 그들의 사악한 조작을 폭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히틀러는 모더니즘 미술이 상식에 대한 모욕이라고 믿었다. 그는 전시 안내문에 이렇게 썼다. 일반 대중이 이해하려면 "거창한 사용 설명서"가 필요한 예술은 앞으로 배척될 것이며, 독일 국민이 더 이상 "이처럼 뻔뻔하고 어리석은 쓰레기"를 억지로 참도록 강요받지 않게 될 것이라고 했다.


바실리 칸딘스키, 〈크로이츠폼[십자가 형태](Kreuzform)〉, 1926. (Hanna Neander/LWL-Museum für Kunst und Kultur, Westfälisches Landesmuseum, Münster)

바실리 칸딘스키, 〈크로이츠폼[십자가 형태](Kreuzform)〉, 1926. (Hanna Neander/LWL-Museum für Kunst und Kultur, Westfälisches Landesmuseum, Münster)


프로인틀리히의 석고 조각 작품 <큰 머리>는 전시 안내문의 표지에 실렸다. 이 작품은 '퇴폐'의 상징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나치는 이 작품의 예술적 지위를 부정하기 위해, 붉은 대문자로 인쇄된 KUNST(예술)이라는 단어에 따옴표(" ")를 붙여 조롱의 의미를 덧씌웠다.


《퇴폐미술》전은 뮌헨에서 4개월간 전시된 뒤, 이후 4년 동안 독일과 오스트리아 전역을 순회하며 점차 규모를 줄여갔다. 뮌헨에서는 무려 200만 명, 하루 평균 약 2만 명이 관람하며 주최 측의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흥행을 기록했다. 이는 같은 시기, 바로 옆에 신축된 예술의 '전당'에서 히틀러가 승인한 작품들로 구성된 《제1회 위대한 독일 미술전》의 관람객 수의 다섯 배에 달하는 수치였다.


프로인틀리히의 <큰 머리>는 전시 순회 후반부에 파괴되었으며, 그것은 그가 나치 강제수용소에서 살해되기 불과 얼마 전의 일이었다.


이는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나치의 문화 전쟁—'퇴폐미술'과 모더니즘 전반에 대한 공격—은 결국 '부적합하다', '순수하지 않다', '일탈했다', '이질적이다'고 판단된 수백만 인류를 야만적으로 학살하는 길을 닦은 것이었다. 그들의 방식은 단순했다. 먼저, 타인을 악마화하고, 그 다음엔 파괴하는 것이다.


'퇴폐'라는 개념은 18세기 후반 자연사, 의학, 인류학 등에서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후 다윈이 인간이 이전에 믿어졌던 것처럼 생물학적으로 고정된 존재가 아니라 불안정한 존재임을 밝히면서, 이 개념은 진화 이론과 밀접하게 연결되었다. 일부 사람들은 특정한 힘이 인간을 생물학적으로 퇴행시키며, 그 결과로 신체적 기형이나 정신질환이 나타날 수 있다고 결론지었다. 반면에, 또 다른 요인들은 '선택받은' 일부에게 더 우월한 존재—소위 '신인류(New Man)' 혹은 '초인(Superman)'—로 나아가게 할 수 있다고 상상했다.


이 혼란스러운 개념들은 19세기 말 '퇴폐'(Degeneration)라는 2권짜리 저작을 통해 미술사로 유입됐다. 저자 막스 노르다우는 모더니즘 미술을 퇴폐의 징후로 간주했으며, 조작된 개념인 '아리안 인종'의 순수성과 우월성에 대한 위협으로 보았다.


오스트리아 빈 미술아카데미 입시에 두 차례 낙방한 뒤에도 히틀러는 오랫동안 낙방에 대한 원한을 품고 있었지만, 정치에 몰두하느라 문화에는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러다 1928년, 그의 측근 중 한 명이 '독일 문화전투 동맹'을 창설하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이는 오늘날 '문화 전쟁'이라는 표현을 연상시키는 용어다. 이 단체는 독일 문화가 유대인, 볼셰비키, 외국인, 동성애자, 정신질환자, 그리고 그들과 연대하는 이들에 의해 지속적으로 공격받고 있다는 전제 위에 세워졌다.


1933년 나치가 집권하자, '독일 문화전투 동맹'의 야망은 빠르게 현실로 옮겨졌다. 작가 개인의 출신이나 성향에 관계없이, 모더니즘 미술은 전면적으로 '퇴폐'로 낙인찍혔다. 독일 표현주의의 선두주자인 베크만과 키르히너 같은 작가들도 반 고흐(정신질환자), 피카소(외국인), 프로인틀리히(유대인)와 한데 묶여 배척의 대상이 되었다.


(이러한 탄압의 대상이 되었던 많은 작가들은 현재 미국에서도 열리고 있는 전시들에 포함되어 있다. 텍사스 포트워스의 킴벨 미술관에서는 3월 30일부터 6월 22일까지 《1910–1945년 독일의 모더니즘 미술과 정치》 전시가 열리고 있으며, 뉴욕 노이에 갤러리에서는 5월 26일까지 《노이에 자흐리히카이트/신즉물주의》 전시가 진행 중이다. 후자는 표현주의에 대한 반작용으로 등장한 독일 미술 운동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파블로 피카소, 〈발을 닦는 여인(Femme s'essuyant les pieds)〉, 1921. (Jens Ziehe/bpk/Succession Picasso/Museum Berggruen, Neue Nationalgalerie, SMB, Stiftung Preussischer Kulturbesitz)

파블로 피카소, 〈발을 닦는 여인(Femme s'essuyant les pieds)〉, 1921. (Jens Ziehe/bpk/Succession Picasso/Museum Berggruen, Neue Nationalgalerie, SMB, Stiftung Preussischer Kulturbesitz)



히틀러의 문화 전쟁으로 탄압받았던 개별 예술가들은 어떤 운명을 맞았을까? 나치는 독일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던 피카소의 작품들 가운데 단 한 점을 제외하고 모두 압수했다. 그들의 눈에 '광기 어린 예술가'의 상징으로 보였던 반 고흐의 작품들도 마찬가지로 철저히 제거되었다. 오스카 코코슈카 역시 '정신질환자'로 간주되었고, 프라하로 도피한 뒤 다시 런던으로 망명했다.


어린이의 그림과 정신질환자들의 예술에서 영감을 받았던 철학적 성향의 예술가 파울 클레는 1933년 교수직에서 해임되었다. 그는 그해 말, 독일을 떠나 자신의 출생지인 스위스로 향했다.


피카소 미술관 전시에 포함된 에른스트 루트비히 키르히너의 한 장엄한 회화는 1920년 베를린 국립미술관이 구입한 작품이었다. 그러나 베크만과 마찬가지로 키르히너의 명성은 나치 정권 아래에서 무너졌고, 1937년에는 그의 작품 750점이 압수당했다. 키르히너는 이듬해인 1938년,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막스 베크만의 작품 500점 이상, 바실리 칸딘스키의 작품 260점도 나치에 의해 압수되었다. 이들 가운데 상당수는 힐데브란트 굴리트라는 딜러(화상)에게 넘겨졌는데, 그는 나치로부터 위탁을 받아 독일 외부로 작품들을 판매하는 역할을 맡고 있었다.


당연하게도, 히틀러의 문화 정책은 다양한 모순과 딜레마를 낳았다. 그러나 나치에게 있어 미묘함이나 복잡성은 중요하지 않았다. 예를 들어, 프란츠 마르크는 1916년 3월 베르됭 전투에서 독일을 위해 싸우다 전사한 화가였다. 그의 고향인 뮌헨에서 열린《퇴폐미술》전에 마르크의 작품이 포함되자, 일부 독일 장교들은 이에 항의하는 서한을 보냈다. 그 결과 그의 작품 중 단 한 점만 철회되었고, 나머지는 계속 전시되었다.


심지어 정권에 아부하려 했던 예술가들조차 조롱과 멸시의 대상이 되었고, 그들의 작품은 침 뱉음까지 당했다. 공개적으로 반유대주의 성향을 보였던 화가 에밀 놀데는 1934년 나치당에 입당했다. 그러나 그는 결국 '퇴폐미술가'로 낙인찍혔고, 괴벨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자신이 깊이 오해받고 있다고 호소했다. "내 예술은 독일적이며, 강하고, 엄격하고, 진실하다"고 그가 주장했지만, 공공 소장처에서 수십 점의 작품이 압수됐고, 그 가운데 상당수가 《퇴폐미술》전에 포함되었다.


또 다른 화가 카를 호퍼는 유대인 여성과 결혼해 있었다. 나치가 집권하자 그는 곧 베를린 미술아카데미 교수직을 잃었고, 그의 작품 10점이 《퇴폐미술》전에 포함되었다. 1938년에는 제국미술원에서 제명당해 더 이상 작품을 전시하거나 판매할 수 없게 되었다. 이후 아내 마틸데와 이혼한 뒤에야 회원 자격이 회복되었다. 한편 마틸데는 1942년 아우슈비츠에서 살해되었다.


좋다, 원한다면 이것을 '문화 전쟁'으로 불러라. 다만, 그 이면의 작동 방식이 실제 전쟁, 학살, 말살과 얼마나 정교하게 맞물려 있었는지를 함께 떠올려야 한다. 그리고, 가능할지 모르겠지만, 코스닉-클로스가 피카소에게 남긴 절절한 호소가 뇌리에 맴돌지 않도록 애써보라. "제가 슬픔으로 죽기 전에, 무엇을 해야 할지 알려주세요."



세바스찬 스미는 퓰리처상을 수상한 워싱턴포스트의 미술평론가이자『라이벌의 예술: 모던 미술의 네 가지 우정, 배신, 돌파구The Art of Rivalry: Four Friendships, Betrayals and Breakthroughs in Modern Art』의 저자다. 보스턴글로브에서 근무했고, 런던과 시드니에서는 데일리 텔레그래프, 가디언, 스펙테이터, 시드니 모닝 헤럴드를 위해 일한 바 있다.


역자 이희정은 영국 맨체스터대 미술사학 박사로 대영박물관 어시스턴트를 거쳐 현재 국민대 강사로 강의와 연구를 이어가고 있다. 역서로 '중국 근현대미술: 1842년 이후부터 오늘날까지'(미진사, 2023)가 있다.



1877년 창간돼 뉴욕타임스, 월스트리트저널과 함께 미국의 대표적인 일간지로 손꼽힙니다. 닉슨 대통령의 사임으로까지 이어진 1972년 워터게이트 스캔들 보도로 유명합니다. 2013년 아마존 창업자 제프 베이조스가 인수한 이래 디지털 전환을 적극적으로 추진했습니다.
 
close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