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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진핑 리스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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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징 AFP=뉴스1) 우동명 기자 =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5일(현지시간)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열린 전국인민대표대회 개막식에 도착하고 있다. ? AFP=뉴스1

2023.04.22 14:16

Foreign Affai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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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주도권을 두고 미국과 중국이 다투고 있는 가운데 이것이 우리나라는 물론이고 전세계에 미칠 영향에 대한 우려가 큽니다. 지난 반세기동안 개혁·개방을 추진하며 전지구적 자유시장경제 발달에 기여했던 중국의 갑작스런 태세 전환의 원인을 두고 혹자는 중국 정치경제 체제가 본질적으로 자유시장경제에 적대적일 수 밖에 없다고 지적합니다. 한편으로는 중국의 최고지도자 시진핑 개인의 성격을 지적하는 이도 있습니다. 미국으로 망명한 중국 지식인 차이샤(蔡霞)도 이런 관점인데 작년 10월 시진핑의 3연임을 확정지은 당 대회를 앞두고 포린어페어스(Foreign Affairs) 2022년 9·10월호에 기고한 글을 전문(全文) 번역으로 소개합니다. 중국공산당의 최고 교육기관에서 오래 근무한 경험 덕분에 필자는 시진핑에 대해 잘 알려지지 않았던 이야기를 많이 들려줍니다.



오래 전 일도 아니다. 시진핑 중국 공산당 주석은 고공행진하고 있었다. 당내 권력을 굳혔고, 자신의 공식적 지위를 당의 상징적 영도자인 마오쩌둥과 같은 반열에 올려놨다. 또한 주석직 임기제한을 없애 평생토록 중국을 이끌 수 있게 되었다. 대내적으로는 빈곤 퇴치에 장족의 발전을 이뤘다고 자부했고, 대외적으로는 중국의 국제적 위상을 새로운 차원으로 끌어올리고 있다고 주장했다. 많은 중국인들에게 시진핑의 철권통치는 민족적 부흥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지불할 수 있는 대가였던 것 같다.


겉보기에 시진핑은 여전히 자신만만해 보인다. 2021년 1월 연설에서 그는 중국이 "전쟁이 일어나면 반드시 승리한다"고 선언했다. 하지만 무대 뒤에서는 그의 권력에 문제를 제기하는 목소리가 그 어느때보다 높다. 시진핑은 중국의 오랜 집단지도체제 전통을 폐기하고 마오쩌둥 시대를 떠올리게 하는 개인숭배 분위기를 만들어 냄으로써 많은 당내 인사들을 분노케 했다. 심지어 지지자들조차 일련의 정책실패로 그에게 실망했다. 시진핑은 경제개혁을 거꾸로 돌리고 코로나19에 무능하게 대처함으로써 '보통 사람들의 영웅' 이미지를 망가뜨렸다. 겉으로 드러나진 않지만 공산당 엘리트들 사이에는 불만이 고조되고 있다.


나는 오랫동안 중국공산당의 궁정 내부 투쟁을 가까이에서 관찰할 기회가 있었다. 공산당 중앙당교(中央黨校)에서 교직을 맡은 15년 동안, 나는 중국의 당정(黨政) 관료제에서 일하는 중국공산당 고위간부들 수천 명의 교육훈련을 도왔다. 재임 기간 동안 나는 당건(黨建) 문제에 대해 중국공산당 최고지도부의 자문에 응했고 2012년 퇴임 후에도 계속 조언했다. 그러나 2020년, 시진핑을 비판한 후 나는 당에서 제명되었다. 퇴직금 혜택도 박탈되었고 신변이 위험하다는 경고를 받았다. 나는 지금 미국에서 망명중이지만 중국내 여러 인사들과 연락을 유지하고 있다. 금년 가을 중국공산당 제20차 당대회에서 시진핑은 세 번째의 5년 임기를 부여받게 될 것이다. 일부 당내 엘리트들이 시진핑에 대해 점점 불만을 갖고 있어 그의 연임이 아무런 논란도 없이 확정되진 않겠지만 시진핑이 3연임에 성공할 가능성은 매우 높다. 하지만 그의 성공은 미래에 더 많은 혼란을 낳게 될 것이다. 시진핑은 유례없는 임기연장을 통해 대내적으로는 통제를 더욱 강화하고 대외적으로는 자신의 야심을 더욱 높일 것이다. 시진핑의 통치방식이 점점 극단적이 되면서 그가 불을 지핀 당내 투쟁과 분노는 더욱 격렬해질 것이며, 당내 각 파벌 간 경쟁은 그 어느 때보다 치열하고 복잡하고 포악해질 것이다.


그럼 중국은 악순환의 수렁에 빠지게 될 것이다. 시진핑은 위협을 인식하고 더욱 과감한 행동을 취할 것이고, 이는 더 강력한 저항으로 이어질 것이다. 이러한 악순환의 수렁에 갇혀 탈출구를 모색하려는 와중에 시진핑이 대만침공처럼 재앙으로 이어질 수 있는 오판을 내릴 수도 있다. 시진핑은 중국이 지난 40년 동안 이뤘던 성과인 안정적이고 유능한 리더십을 망칠 가능성이 높다. 사실 그는 이미 망쳐버렸다.


중국 마피아

여러 점에서 중국공산당은 1949년 정권을 장악한 이래 변한 것이 거의 없다. 항상 그렇듯 이 당은 중국을 절대적으로 통제하고 있다. 군대, 행정부 모두 당의 통제를 받으며 입법부는 당의 결정을 추인만 할 뿐이다. 나아가 당내 각급 조직은 중국의 최고 의사결정 기구인 정치국 상무위원회에 대해서만 보고를 한다. 인원이 더 많은 정치국에서 5~9명을 뽑아 구성하는 정치국 상무위원회는 중국의 최고 지도자인 당 총서기가 이끄는데, 2012년 이래 시진핑이 총서기직을 차지하고 있다.


상무위원회가 어떻게 운영되는지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철저히 기밀로 유지되고 있지만, 주요 정책 문제를 다루는 문건들이 상무위원들에게 회람되며 각 상무위원들이 이 문건의 여백에 자신의 코멘트를 기입하는 방식으로 많은 결정들이 이뤄진다고 알려져 있다. 이 문건들은 여러 정부부처나 당 기관의 수장들 또는 최고 대학들과 싱크탱크의 전문가들이 작성해 제출하는데, 자신의 문건이 상무위원들에게 회람된다는 것은 문건 작성자에게 큰 영광이 된다. 내가 중앙당교에서 가르치는 동안 우리는 매달 이런 문건을 제출해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상무위원회에 회람된 문건의 작성자는 10,000위안(약 200만원)을 상으로 받았는데, 당시 교수의 한달치 월급보다 많은 액수였다.


중국공산당 체제의 또 다른 지속적인 특징은 인맥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한 사람이 당내에서 승진하려면 실력이나 이념만큼이나 가문의 평판, 당내 파벌 등 인적 관계가 중요하다.


의심할 여지없이 시진핑의 경력도 마찬가지다. 중국의 선전기관과 많은 서양 분석가들이 시진핑이 실력으로 승진했다고 이야기하고 있지만, 시진핑은 자신의 아버지인 시중쉰(習仲勳)의 인맥으로부터 많은 혜택을 받았다. 시중쉰은 흠잡을 데 없는 혁명가 자격을 갖춘 중국공산당 지도자로서 마오쩌둥 시대에 잠시 선전부장을 역임했다. 1980년대 초, 시진핑이 허베이성 북부에서 어느 현의 당서기를 맡고 있을 때 그의 모친은 허베이성 당서기 가오양(高揚)에게 시진핑의 경력을 잘 돌봐달라고 편지를 쓰기도 했다. 하지만 가오양은 허베이성 정치국 상무위원회에서 이 편지의 내용을 공개해버렸다. 편지의 공개는 시중쉰 가문을 매우 난처하게 만들었는데 당 간부들의 특권 추구를 규제하는 공산당의 신설 규정을 위반한 것이 되었기 때문이다. (시진핑은 이 사건을 잊지 않았다. 2009년에 가오양이 세상을 떠났을 때, 그는 장례식 참석을 직접적으로 거절했다. 둘 다 중앙당교 교장을 맡았기 때문에 이러한 행동은 관습을 위반한 것이었다.) 이렇게 인맥을 이용하려다 발각될 경우 다른 일반적 간부들은 경력이 훼손되었겠지만 시진핑은 자신의 인맥의 힘으로 극복할 수 있었다. 푸젠성 당서기의 부친이 시진핑의 부친과 오랜 친구였기 때문에 두 가문은 시진핑이 푸젠성으로 재배치되도록 힘을 모았다. 이러한 인사이동은 매우 드문 일이었다.


하지만 시진핑의 앞길은 여전히 막막했다. 1988년, 지방선거의 부시장 경선에서 낙선하게 되자 그는 지구(地區) 당서기로 승진했다. 그는 그 자리에서도 평범한 직무능력을 보여 경력이 지지부진했다. 중국공산당에서 지구·청(地廳)급에서 성·부(省部)급으로 올라가는 것은 중요한 "관문"인데 시진핑은 오랫동안 이 관문을 통과하지 못했다. 여기서 시씨 가문의 인맥이 다시 개입했다. 1992년, 시진핑의 모친이 푸젠성 신임 당서기 자칭린(賈慶林)에게 간청했고 시진핑은 성급으로 발령났다. 그때부터 그의 경력은 날개를 달았다.


하급 간부들은 다들 잘 알고 있을텐데, 중국공산당 안에서 관직의 계단을 오르려면 자기를 이끌어줄 높은 사람이 있어야 한다. 이것은 시진핑에게 상당히 쉬운 일이었다. 많은 당 지도자들이 그의 부친을 존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시진핑의 최초이자 가장 중요한 멘토인 겅뱌오(耿彪)는 고위 외교관이자 장교로 시진핑의 부친 밑에서 일했던 적이 있다. 1979년, 겅뱌오는 젊은 시진핑을 자신의 비서로 임명했다. 시진핑은 정치경력 초기에 이런 보살핌이 필요했고, 향후 수십년간 연쇄적인 효과가 생겼다. 중국공산당 고위간부들은 각자 자신의 '계보'(系譜), 즉 당 내부인사들의 표현을 빌자면 "은비"(恩庇) 집단1을 가지고 있는데 사실상 중국공산당 내부의 파벌이다. 사실 중국공산당 내부의 이념과 정책 논쟁으로 표현되는 분쟁은 속내를 들여다보면 단순히 '라인들' 사이의 권력투쟁일 뿐인 경우가 많다. 이러한 하나의 시스템은 사적인 충성관계로 얽히며, 만약 누군가의 후원자("?山")가 권력을 잃으면 결과적으로 그는 공직사회에서 고아가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바깥에 있는 사람들은 중국공산당을 정당보다는 마피아 조직으로 보는 것이 이해하는데 더 도움이 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당의 최고 지도자는 마피아의 보스이며 그 밑에는 보스의 의형제 그룹, 즉 상무위원회가 있다. 상무위원들은 관례에 따라 권력을 분할하고 각자의 영역인 외교정책, 경제, 인사, 반부패 등을 책임진다. 그들은 마피아 보스의 자문위원회 멤버로서 '큰 형님'(보스)에게 봉사해야 하며, 그들은 각자 책임지는 분야에 대해 '큰 형님'에게 조언해야 한다. 상무위원회 바깥에는 정치국원 18명이 더 있는데 이들은 상무위원 후보다. 이들은 마피아의 지역보스로서 인지된 각종 위험들을 제거하라는 시진핑의 지시를 관철하는데 보스에게서 점수를 따고 싶어서다. 그들의 지위는 곧 특권이다. 그들은 눈치껏 타인의 재산과 기업을 몰수해 부를 축적한다. 이에 대해 아무런 처벌도 받지않는다. 마피아와 마찬가지로 중국공산당은 뇌물, 협박, 심지어 폭력을 비롯한 직접적인 수단으로 원하는 것을 얻는데 익숙하다.

함께 나누면 복이 온다

공산주의 중국이 설립된 이래로 사적 관계에 기초한 권력과 유연성을 지닌 공식적 규칙은 변함이 없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한 가지 변화가 나타났다. 바로 권력이 한 사람에게 집중되는 정도이다. 1960년대 중반부터 마오쩌둥은 비록 간헐적으로만 자신의 권력을 행사하고 공식적으로는 '동등자들 중 일인'일 뿐이었지만, 모든 일에 대해 절대적인 통제권과 최종 결정권을 가지게 되었다. 1978년에 덩샤오핑이 사실상의 지도자가 되었을 때 그는 마오쩌둥의 종신 1인독재체제를 혁파했다.


덩샤오핑은 중국 국가주석의 임기를 '5년씩 두 번'으로 한정하였고, 집단지도체제를 확립하여 다른 관리들로 하여금 당의 총서기를 맡게 했다. 그는 후야오방(胡耀邦), 그리고나서 자오쯔양(趙紫陽)을 총서기직에 올렸다. 물론 배후에서는 덩샤오핑이 실권을 쥐고 있었다. 1987년 중국공산당은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위원의 선출과정을 개혁하기로 했는데 이 중앙위원회는 명목상의 당 감독기구이며 또한 그 위원들 중에서 정치국원이 선출된다. 이 개혁을 통해 처음으로 당은 위원회 정원보다 많은 후보자를 천거했는데 민주적이라고 할 순 없더라도 올바른 방향으로 일보전진한 것이었다. 이 개혁에 의해 덩샤오핑의 지지가 당선을 보장하는 건 아니게 된 것이다. 예컨대 덩샤오핑은 마오쩌둥파 사상가 덩리췬(鄧立群)에게 정치국 승진을 약속했지만 덩리췬은 충분한 표를 얻지 못해 정치에서 은퇴할 수밖에 없었다. (1997년 중앙위원회 선거 당시 시진핑이 가장 적은 표를 얻어 간신히 중앙위원에 선출된 것은 당내에서 '태자당'에 대한 일반적 혐오감을 반영한 것이라 주목할 만했다. 즉, 중국공산당 고위 간부 자녀들이 능력이 아닌 '관계'에 힘입어 출세하는 행태에 대한 혐오가 있었던 것이다.)


마오쩌둥주의 프로파간다의 절정에서 일어난 재앙, 문화대혁명이 재연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덩샤오핑은 어떤 지도자에 대한 개인숭배 형성도 막으려 했다. 우리 가족과 친한 친구로 일찍이 1978년에 중앙당교에서 공부했던 한 관리가 있다. 중앙당교가 주최한 북경 교외로 양돈장을 참관하는 한 행사에서 그는 화궈펑(華國鋒)이 이곳을 시찰할 때 사용한 물품인 보온병, 찻잔 등이 유리장에 진열되어 있는 것을 알아차렸다. 마치 하나의 종교 제단 같았다. 나의 친구가 화궈펑에게 편지를 서서 개인숭배를 비판하자 화궈펑은 이 진열대를 없앴다. 1982년, 중국공산당 지도부는 심지어 당헌에 개인숭배 금지 조항을 써넣었다. 그들은 이를 첫번째 위험요소로 보았던 것이다.


덩샤오핑의 분권 의지는 여기까지였다. 후야오방, 자오쯔양이 정치적으로 너무 자유화되자 덩샤오핑은 그들을 권좌에서 축출했다. 하지만 덩샤오핑의 후계자 장쩌민은 정치개혁을 더욱 심화시켰다. 장쩌민은 그의 자문그룹을 행정부서처럼 제도화했는데, 그는 상임위원 전원에게 의견을 구하고, 과반수 투표로 결정을 내리고, 연설문은 널리 배포했다. 장쩌민은 또한 후보/정원 비율을 높여 중앙위원회 선거를 더욱 경쟁적으로 만들었다.'태자'들, 심지어 덩샤오핑의 아들도 낙선했다.


2002년 후진타오가 장쩌민을 이어받게 되자 중국은 더욱 더 집단지도체제로 나아갔다. 후진타오는 상무위원 9명의 만장일치로 나라를 이끌었고 이를 두고 사람들은 "아홉 용이 물을 다스린다"(九龍治水)로 했다. 하지만 이러한 평등주의 관행도 불리한 점이 있었다. 한 명의 반대만 있어도 상무위원회는 아무런 결정도 내릴 수 없었던 것이다. 이 때문에 후진타오는 약한 지도자로서 교착상태를 극복할 수 없다는 인상을 심화시켰다. 10년 가까이 덩샤오핑이 시작한 경제개혁이 정체되어버린 것이다. 하지만 이 제도도 장점은 있었다. 만장일치가 필요하다보니 경솔한 의사결정은 막을 수가 있었다. 예컨대 후진타오가 취임한 첫 해, 중국에서 사스가 발생했는데 후진타오는 사스를 신중하게 처리했다. 사스 상황을 은폐한 위생부장을 해임하고 간부들이 사스 전염 상황을 사실대로 보고하도록 격려했다. 후진타오는 또한 임기제한을 확대하려고 시도했다. 후진타오가 정치국과 정치국 상무위원회에 임기제를 두려고 했을 때 강력한 저항으로 실패했지만 성·부(省部)급 이하에는 임기제를 도입하는데 성공했다. 더욱 큰 성과는 정치국에 선출되기 위해서는 중국공산당 고위급 당원들의 투표를 거쳐야 한다는 일찍이 없었던 절차를 도입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시진핑은 바로 이런 민주주의에 준하는 제도를 통해 권력의 정점에 올랐다. 2007년, 중앙위원회 확대회의에서 중국공산당의 고위급 인사 400여명이 베이징에 모여 투표방식으로 200명의 부장(部長)급 중에서 정치국 구성원 25명을 추천했다. 여기서 시진핑이 최다득표로 뽑혔다. 나는 이러한 결과가 나온 것은 시진핑이 절강성 당서기와 상하시시 당서기로 거둔 정치적 성과보다는 그의 아버지에 대한 존경심과 은퇴한 주요 당원로들의 지지와 압력 때문이었다고 의심하고 있다. 5년 후 비슷한 투표에서도 시진핑이 가장 많은 표를 얻었고, 곧 물러날 지도그룹의 일치된 의견 아래 권력 피라미드의 꼭대기에 오를 수 있었다.

한 명의 당

시진핑이 집권했을 때 서방에서는 그를 중국의 고르바초프라고 칭찬했다. 심지어 일부는 시진핑이 고르바초프처럼 급진적인 개혁을 단행해 경제 국가 통제를 해체하고 정치제도를 민주화시킬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물론 이것은 환상임이 드러났다. 시진핑은 마오쩌둥의 충실한 학생으로서 마오쩌둥처럼 역사에 자신의 흔적을 남기고자 절대권력을 확립하기 시작했다. 이전의 개혁들이 당의 지도자에 대해 진정한 견제와 균형을 잡아주는 데 실패했기에 시진핑은 절대권력 확립에 성공할 수 있었다. 이제 중국은, 마치 마오쩌둥 시대로 돌아온 듯 원맨쇼를 다시 시작하고 있다.


시진핑의 권력 공고화 행보 중 하나는 그가 '이념적 위기'라고 일컫는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었다. 시진핑은 인터넷 때문에 중국공산당이 인민사상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하게 되어 당의 생존 자체가 위협받고 있다고 말했다. 그래서 시진핑은 블로거들과 온라인 활동가들을 진압하고, 반대 목소리를 검열하고, 중국의 '인터넷 만리장성'을 강화하고, 외국 웹사이트에 대한 접근을 제한했다. 그 결과 새로 태어나고 있던 중국의 시민사회가 죽어버렸고 시진핑을 견제할 여론이 사라졌다.


그가 취한 또 다른 행보는 반부패 운동을 전개하는 것이었는데 그는 이것을 당을 자멸로부터 구할 사명이라고 불렀다. 중국에서는 부패가 매우 보편화되어 있어서 사실 거의 모든 관리들이 잠재적 표적이 되기 때문에 시진핑은 이 운동을 이용해 정치적 숙청을 단행할 수 있었다. 공식 자료에 따르면, 2012년 12월부터 2021년 6월까지 중국공산당은 총 393명의 성·부급 이상 간부들(이들은 최고위급 발탁을 염두에 두고 관리되고 있던 사람들이다)을 조사해 처벌했고 63만 천 명의 처(處)급 간부들(이들은 현장에서 당 정책을 집행하는 사람들이다)을 처벌했다. 이 숙청 작업을 통해 시진핑이 위협으로 여겼던 가장 영향력 있는 관리들이 체포됐다. 여기에는 전 정치국 상무위원이자 중국 공안계통 책임자였던 저우융캉(周永康), 시진핑의 경쟁자이자 잠재적 후계자로 여겨졌던 정치국원 쑨정차이(孫政才)가 포함되었다.


(베이진 AFP=뉴스1) 우동명 기자 = 후진타오 전 중국 국가주석이 22일 (현지시간) 베이징 인민 대회당에서 열린 중국 공산당 20차 당 대회의 폐막식 중 퇴장하며 리커창 총리, 왕양 정협 주석과 나란히 앉은 시진핑 주석에게 얘기를 하고 있다.  ⓒ AFP=뉴스1  Copyright ? 뉴스1.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베이진 AFP=뉴스1) 우동명 기자 = 후진타오 전 중국 국가주석이 22일 (현지시간) 베이징 인민 대회당에서 열린 중국 공산당 20차 당 대회의 폐막식 중 퇴장하며 리커창 총리, 왕양 정협 주석과 나란히 앉은 시진핑 주석에게 얘기를 하고 있다. ⓒ AFP=뉴스1 Copyright ? 뉴스1.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주목할 점은 시진핑의 출세를 도와줬던 사람들은 '노터치'였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1990년대 푸젠성 당서기였고 훗날 상무위원이 된 자칭린(賈慶林)은 시진핑의 권력획득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는데 자칭린과 그의 가족이 극도로 부패했다고 믿을 만한 이유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칭린 가문은 반부패 운동에서 무사했다. 한 해외로펌에서 유출된 이른바 '파나마문서'에 따르면 자칭린의 손녀와 사위가 여러 개의 비밀 역외 회사를 소유하고 있었지만 그들은 무사했다. 시진핑의 책략은 노골적이었다. 나는 당내 소식통(그가 곤란해질 수 있어서 이름을 밝힐 순 없다)에게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 2014년경 시진핑의 부하들은 시진핑을 공개적으로 비판했던 고위직 인사를 찾아가 비판을 멈추지 않으면 부패혐의로 조사하겠다고 위협했다고 한다. (그러자 그는 입을 다물었다.) 시진핑의 부하들은 자신들의 숙청 대상을 추적할 때 보통 그 대상의 가족과 주변사람들을 압박했다. 내가 중앙당교 박사과정에 재학 중일 때 만났던 전 랴오닝 당서기 왕민(王珉)은 2016년에 체포되었는데 그 근거는 바로 그가 데리고 있던 운전기사의 자백이었다. 자동차 안에서 왕민이 다른 사람과 통화하면서 자신이 승진에서 무시되었다고 불평한 적이 있었다는 것이다. 왕민은 이후 재판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는데 그 죄목 중 하나는 시진핑의 '영도'에 저항했다는 것이었다.


중요한 자리에서 자신의 라이벌을 축출한 뒤 시진핑은 자신의 사람을 그 자리에 심는다. 시진핑의 당내 파벌은 "즈장신군(止江新軍)2" (즉, 浙江?)으로 불린다. 이 그룹은 시진핑이 푸젠성과 저장성의 지도자로 역임하는 동안 그 밑에서 일했던 부하들로 구성되었고, 시진핑의 대학 동창들과 중고등학교 친구들도 포함하고 있다. 권력을 잡은 이래로 시진핑은 자신의 추종자들을 재빨리 승진시켰는데 이러한 직책이 그들의 능력을 넘어서는 경우가 많았다. 시진핑의 칭화대학 룸메이트였던 천시(陳希)는 중국공산당 조직부장으로 임명되었는데 이 직위는 반드시 정치국원이 겸임하며 간부 승진을 결정할 권한이 있다. 그러나 천시는 관련 자격이 전혀 없었다. 그의 전임자 다섯 명은 모두 지방 당무 경험이 있었지만 천시는 경력이라곤 평생 칭화대학 뿐이었다.


시진핑이 폐지한 또 하나의 중대한 개혁성과는 '당과 정부의 분리'(黨政分開)다. 이 개혁은 원래 이념적 통제를 강조하는 당 간부들의 권력을 약화시키고 정부기관의 전문성과 행정에 대한 당의 개입 정도를 낮추는 것을 목표로 했다. 관료제를 전문화하기 위해 덩샤오핑과 그 후임들은 정부 행정을 당의 과도한 간섭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려고 노력했고 일정한 진전을 이뤘다. 하지만 시진핑은 이를 되돌렸다. 40여개의 임시 당 위원회를 만들더니 결국 이들이 정부 기관 업무를 직접 통제하도록 했다. 예를 들어 그의 전임자들과 달리 시진핑은 자신의 팀이 외교부와 국가해양국을 배제하고 남중국해 문제를 직접 처리하도록 했다.


이 '팀'들의 역할은 중국 정부 수반인 리커창 총리로부터 권력 대부분을 빼앗고 리커창의 지위를 시주석의 파트너에서 보조로 낮춰버리는 것이었다. 이러한 변화는 리커창이 공식석상에서 어떻게 행동하는지를 보면 잘 알 수 있다. 전임자인 주룽지와 원자바오는 장쩌민과 후진타오와 나란히 서있었는데, 리커창은 마치 권력의 차이를 강조라도 하듯 시진핑과 거리를 유지했다. 또, 과거 관영통신이나 관영매체에서 '장주체제'(江朱體制: 장쩌민·주룽지 체제)니 '후원체제'(胡溫體制: 후진타오·원자바오 체제)니 하는 표현을 사용했지만, 오늘날 '시·리체제'(習李體制)를 언급하는 사람이 거의 없다. 중국에서는 당과 정부 사이에 오랫동안 갈등이 있었다. 이를 내부사람들은 중난하이(中南海)의 '남원'(南院)과 '북원'(北院)의 싸움이라 불렀다. 중난하이는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와 국무원의 소재지다. 이런 갈등 속에서 자신을 '최종 권위'로 자처함으로써 시진핑은 당과 정부의 갈등을 심화시켰다.


시진핑은 상임위원회의 운영방식도 바꿨다. 이는 중국공산당 역사상 처음이다. 모든 정치국원과 상무위원은 반드시 정기적으로 시진핑에게 보고서를 제출하여 당 중앙에 업무를 보고하고 시진핑이 직접 그들의 업무수행에 대해 논평을 한다는 것이었다. 예전에 존재했던 시진핑을 포함한 상무위원 7인의 우정과 평등 관계는 이로써 사라지게 되었다. 베이징의 퇴직 관리 한 사람이 나에게 이런 말을 했다. 7인 상무위원 중 한명인 왕치산(王岐山)은 국가부주석이며 시진핑의 오랜 동맹인데 그가 시진핑과 다른 상무위원들의 관계를 '군신관계'라고 불평했다는 것이다.


가장 노골적인 변화는 시진핑이 국가주석의 임기제한을 폐지했다는 것이다. 장쩌민 이후 모든 최고 지도자처럼 시진핑은 세 개의 직무, 즉 중국 국가주석,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총서기, 중앙군사위원회 주석 직을 맡고 있다. 비록 공식적으로 5년의 임기를 두번까지 제한하는 제도가 국가주석직에만 해당되지만 후진타오부터 시작해서 이러한 2연임 제도는 다른 두 직위에도 적용된다는 공감대가 자리잡았다. 그래야 한 사람이 동시에 세 직위를 맡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2018년에 시진핑의 요구에 따라 중국 입법기관은 헌법을 개정하고 국가주석 임기제를 폐지했다. 이때 폐지의 이유가 매우 웃겼다. 공식적인 목적은 임기제한이 없는 당 총서기,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직과 임기제한이 있는 국가주석직을 일치시켜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것이 제대로 된 개혁이 되려면 그 반대로 당 총서기, 중앙군사위 주석직에도 임기제한을 신설했어야 했다.


개인숭배를 다시 보자. 당헌에는 여전히 '개인숭배 금지'라는 조문이 분명히 적혀있지만, 시진핑과 그 부하들은 최고 지도자(領袖)에 대해 마오쩌둥 이후 본적이 없던 고도의 충성과 존경을 요구했다. 2016년부터 현재까지 시진핑이 "영도핵심"(전임자인 후진타오에게는 없었던 호칭)으로 불렸던 이래 공식적인 인물사진에서 시진핑은 다른 상무위원들 앞에 서 있다. 시진핑의 초상화도 마오쩌둥 스타일로 정부기관, 학교, 종교장소 및 가정 등 곳곳에 걸려있다. 프랑스의 국영 라디오 프랑스 앵테르나시오날(RFI) 보도에 따르면, 시진핑의 부하들은 중국 최고 학부이자 시진핑의 모교인 칭화대학을 시진핑대학으로 명칭변경할 것을 제안하기도 했다. 그들은 심지어 시진핑의 초상화를 천안문에 마오쩌둥 초상화와 나란히 걸어둘 것을 주장했다. 이 두 제안 모두 실현되지 않았지만 2017년에 시진핑은 '시진핑 사상'을 당헌에 담았다. 그는 마오쩌둥 이후 임기중 자신의 사상을 당헌에 담은 유일한 지도자가 되었고 다음해엔 국가헌법에까지 담았다. 2017년 관영 신화통신은 시진핑에게 그의 전임자들이었다면 부끄러워했을 7개의 북한식 새 칭호를 수여하는 장문의 글을 발표했는데 "개척하는 영도자" "인민에 복을 주는 근면한 일꾼" "신시대 현대화 건설 총설계자" 등 다양했다.


당내에서 시진핑 라인("習家軍")은 시진핑이 자신이 시작했던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 작업을 완수할 때까지 권좌에 남아 있도록 하는 캠페인을 열렬히 펼치고 있다. 그들의 노력이 강화됨에 따라 그들의 메시지도 단순해지고 있다. 금년 4월, 광시자치구 당서기는 새로운 구호를 내세웠는데, "영원히 지도자를 지지하고, 지도자를 수호하고, 지도자를 따르라"였다. 마오쩌둥의 '작은 빨간 책'(小紅書, 원 제목은 마오주석어록)를 모방해, 그들은 <지도자 시진핑 어록집>을 간행했고, 이 어록집의 내용을 암송하도록 인민들에게 요구했다. 시진핑은 자신을 단지 당의 위대한 지도자 정도가 아니라 현대판 황제로 만드려는 듯하다.

벌거벗은 황제님

일반적으로 하나의 정치체제가 지도자 한 명을 중심으로 움직일수록, 지도자의 결함과 성격이 더욱 중요해진다. 시진핑의 경우 과민, 고집, 독재가 그의 성격이다.


사실 시진핑의 이러한 성격은 그가 집권하기 전부터 드러났다. 2008년에 시진핑은 중앙당교 교장이 되었고 당시 나는 그곳에서 교편을 잡고 있었다. 이듬해 교직원 회의에서 중앙당교의 부교장이 시진핑이 교원들에게 내린 경고를 전했다. "누군가 공산당의 밥을 먹으면서 공산당의 가마솥을 부숴버리는 일은 절대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즉, 공산당의 녹을 받으면서 몰래 공산당 제도를 비판하는 일에 경고한 것이다. 중국이라는 국가를 먹여 살리는 것이 납세자들이 아니라 공산당이라는 시진핑의 말도 안 되는 생각에 화가 난 나머지 나는 그 자리에서 쏘아붙였다. "그 공산당은 누구의 밥을 먹나요? 공산당은 인민의 밥을 먹으면서도 매일같이 인민의 가마솥을 부수고 있죠." 아무도 나를 고발하지 않았다. 내 동료 교원들도 내 말에 동의했던 것이다.


시진핑은 권력을 잡자 더 이상 비판을 용납할 수 없었다. 시진핑은 상무위원회와 정치국 회의에서 정책을 논의하지 않고 종종 장황한 연설만 할 뿐이었다. 공식 자료에 따르면 2012년 11월부터 2022년 2월까지 시진핑은 80회의 정치국 '집단학습' 모임을 소집했고, 이 모임에서 '학습'의 특정 주제에 대해 장황한 연설을 했다. 그는 자신의 모양새를 해칠 것 같은 그 어떤 아래로부터의 제안도 거부했다. 왕치산(시진핑의 핵심측근 중 한명으로 시진핑의 첫 주석임기때 상무위원으로 취임)의 친구에 따르면, 한번은 왕치산이 시진핑에게 시진핑이 당원들에게 요구한 "8항 규정"을 개명해 당내의 정식 제도로 채택할 것을 건의했다. 이런 아첨성의 건의도 시진핑은 자신에 대한 모욕으로 받아들였다. 이 규정은 원래 시진핑 자신의 아이디어가 아니었던 것이다. 시진핑은 그 자리에서 왕치산을 꾸짖었다.


시진핑은 '마이크로 매니저'이기도 하다. 많은 전문가들이 지적했듯이, 그는 '모든 것의 의장'처럼 행동한다. 예를 들어 2014년 그는 환경보호 문제에 대해 17번의 지시를 내렸다. 이렇게 크고 작음을 가리지 않는 간섭은 명백히 편집적이다. 덩샤오핑, 장쩌민, 후진타오 모두 중국과 같은 광활한 나라를 관리하려면 반드시 각 지방의 복잡성을 고려해야 한다는 점을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각급 간부들에게 당 중앙의 지시를 따라야 하지만 실제 현장의 상황에 따라 조정을 할 줄 알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러한 유연성이 경제발전에 매우 중요했다. 지방 관리에게 혁신의 공간을 제공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진핑은 자신의 지시를 한 글자도 틀리지 않게 관철시키라고 요구했다. 나는 어느 현당서기의 경우를 알고 있는데, 그는 2014년에 중앙의 새 "8항 규정"에 대한 구체적인 집행규칙을 만들면서 현지 사정에 맞춰 연회(宴會)에 대해 예외를 두려고 했다. 자신의 지역은 외국 투자가들을 대접할 일이 많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진핑은 이 혁신적 시도를 알고 크게 화를 내며 이 현당서기가 "당 중앙을 비판했다"고 질책했다. 이는 심각한 사건이 되어 나중에 당 기율조례에 기입되었고 그 현당서기는 출당조치 당했다.


중국공산당에는 마오쩌둥 시대 이래 이어져온 오랜 전통이 있다. 즉, 간부들은 최고지도자에게 편지를 쓰거나 건의를 하고 심지어 비판까지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시진핑이 취임한지 얼마 되지 않아 이런 것을 하려고 했던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의 사례를 보고 '반면교훈'(反面敎訓)을 얻었다. 2017년경 중국인민해방군 장군이자 전 국가주석 리셴넨(李先念)의 사위인 류야저우(劉亞洲)가 시진핑에게 편지를 써 신장정책을 수정하고 위구르 소수민족의 감금을 중단할 것을 건의했다. 그는 시진핑의 정책에 대해 더 이상 논의하지 말라고 경고를 받았다. 시진핑은 다른 사람들의 건의를 받아들이길 거부함으로써 '자기수정'을 위한 중요한 수단 하나를 없애버렸다.


왜 시진핑은 그의 전임자들과 사뭇 다르게 다른 사람의 제안을 거부하는가? 나는 시진핑이 가지고 있는 열등감 콤플렉스가 원인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다른 중국공산당 고위급 지도자들과 비교할 때, 시진핑은 자신의 교육수준이 매우 낮다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칭화대학에서 화공학을 공부했지만 시진핑은 이른바 "공농병"(工農兵) 학생이었다. 공농병이란 1970년대에 정치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 계급 출신으로 학업성적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대학에 입학한 학생이다. 그에 비해 장쩌민과 후진타오는 모두 경쟁이 치열한 시험을 통해 대학에 입학했다. 2002년 시진핑이 성급 간부로 있을 때, 그는 칭화대학에서 마르크스주의 이론으로 박사학위를 받았지만 영국 기자 마이클 셰리던(Michael Sheridan)이 밝혀낸 바와 같이, 시진핑의 논문은 표절이 의심되는 부분들로 점철돼 있다. 내가 중앙당교에 있을 때 알게 된 사실인데, 당시 고위 관리들은 학교 과제를 비서들에게 맡겨서 하게 하고 대학의 교수들은 이런 관행을 눈감아줬다. 사실 시진핑이 자신의 박사논문을 열심히 쓰고 있던 당시는 그가 푸젠성 성장을 맡아 눈코 뜰 새 없이 바빴을 시기였다.

과오(過誤) 선생

어떤 정치체제에서도 통제받지 않는 권력은 위험하다. 현실에서 벗어나 집단의 의견에 제어받지 않으면 지도자는 경솔하게 행동하고, 시행하는 정책은 종종 현명하지 못하거나 환영받지 못하거나 아니면 둘 다일 수 있다. 예상할 수 있듯이 모든 것을 관장하려 하는 그의 통치스타일 때문에 시진핑은 수많은 재앙적 결정을 내렸다. 변하지 않는 공통점은 그의 지시가 가져온 결과를 제대로 파악할 능력이 없다는 점이다.


먼저 외교정책을 보자. 시진핑은 덩샤오핑의 '도광양회'(韜光養晦)를 버리고 미국에 직접 도전하고 중국을 중심으로 한 세계질서를 추구하기로 결정했다. 그가 남중국해를 군사화하고 대만을 위협하거나 외교관들을 부추겨 '전랑외교'(戰狼外交)라고 불리는 조잡한 외교정책 스타일을 추구하도록 하는 등 대외적으로 모험적이고 공격적인 행위를 전개하는 이유다. 시진핑은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사실상의 동맹을 맺어 중국을 국제사회로부터 더욱 고립시켰다. 또한 많은 나라들이 관련 채무와 부패에 염증을 내게 되면서 그의 '일대일로' 정책 역시 점점 더 큰 저항에 직면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시진핑의 경제정책도 역효과를 가져왔다. 시장경제 개혁을 시작한 것은 중국공산당의 획기적인 성과 중 하나였는데 이 덕분에 수억 명의 중국인들이 빈곤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하지만 시진핑은 집권 후 시장경제를 통치에 대한 위협으로 보고 마오쩌둥 시대의 계획경제를 부활시켰다. 그는 국유기업을 강화하고 민간기업 안에 당 조직을 설립해 기업경영을 지도하도록 했다. 그는 부패 단속과 반독점법 시행을 빙자해 민간기업과 민간기업가의 자산을 빼앗았다. 지난 몇 년 동안 안방(安邦) 보험그룹과 HNA그룹을 포함한 중국에서 가장 역동적인 기업들이 사실상 강제로 경영권을 국가에 넘길 수 밖에 없었다. 텐센트 그룹과 전자상거래 대기업 알리바바와 같은 다른 기업들은 일련의 새로운 규제와 조사 및 벌금의 압박에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 2020년 다우(大午) 농목그룹의 오너로 억만장자인 쑨다우(孫大午)는 인권변호사들을 탄압했다고 시진핑을 공개적으로 비판했는데 무고죄로 체포되었고 곧바로 18년형에 처해졌다. 그의 기업은 허위 경매를 통해 급조된 공기업에 헐값으로 매각되었다.


예상대로 중국의 경제성장은 이미 둔화되었고 전문가들은 대부분 앞으로 몇 년 동안 경제성장률은 더욱 둔화될 것으로 보고 있다. 미국의 중국 IT기업들에 대한 제재, 우크라이나 전쟁, 코로나19 대유행 등 여러 요인들이 작용하고 있지만 근본적인 문제는 중국공산당의 경제에 대한 간섭이다. 정부가 정치적 목적으로 끊임없이 민간기업에 간섭하는 관행은 이미 생산성을 죽이는 독약으로 밝혀졌다. 수많은 중국 기업가들은 기업이 몰수당하고 자신이 구금될지 모른다는 공포 속에 살고 있다 보니 투자나 혁신에 집중할 겨를이 없다. 금년 4월 중국 경제성장 전망이 악화됨에 따라 시진핑은 정치국회의를 주재하고 중국 경제의 당면문제에 대한 구제 조치를 발표하면서 세금 환급, 수수료 감면, 기반시설 투자, 통화의 양적 완화 등 일련의 조치를 공개했다. 하지만 이러한 조치는 국가의 과도한 경제 개입이라는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없기 때문에 실패할 수밖에 없다.


시진핑의 통제욕이 재앙을 가져온 사례로 코로나19 이상의 것은 없다. 이 질병이 2019년 12월 우한시에서 처음 퍼졌을 때, 시진핑은 번영하는 중국 이미지를 유지하기 위해 대중에게 관련 정보를 숨겼다. 그러는 동안 지방정부가 마비되어버렸다. 우한시 시장 저우셴왕(周先旺)이 한달 뒤 상부의 허락도 받지 않고 국영방송에 나와 인정했듯이 그는 코로나 창궐 사실을 공개적으로 밝힐 수가 없었다. 8명의 용감한 의료진이 공개적으로 코로나19 창궐을 알리려 했을 때, 정부는 그들을 구금하고 침묵을 강요했다. 8명 중 한 명은 훗날 자신이 강제로 허위자백에 서명했다고 밝혔다.


시진핑의 '마이크로 매니지먼트'도 코로나19 대유행에 대한 대응을 크게 방해했다. 시진핑은 정부의 보건팀이 정책을 수립하고 세부사항을 시행하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이 직접 중국 전역의 대응을 조율하려 했다. 나중에 시진핑은 "자신이 직접 지휘하고, 대처하고, 전반적인 상황을 총괄하고, 과감하게 행동하고, 나아갈 방향을 제시했다"고 자부했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었다면 결과는 더 나빴을 것이다. 사실 그의 개입은 일련의 혼란과 무대응으로 이어졌는데 지역 보건 당국자들은 베이징으로부터 혼란스러운 정보를 받고는 대응을 취하기를 거부했던 것이다. 내가 국무원(중국 최고행정당국) 소식통으로부터 들은 바에 따르면, 리커창 총리가 2020년 1월 상순에 비상대응 체제를 가동하자고 제안했지만 시진핑은 한창 진행중이던 춘절 축하행사 준비를 방해할까봐 제안을 거부했다.


2022년 2월, 오미크론 바이러스 변이가 상하이에서 확산되고 있을 때 시진핑은 또다시 이해할 수 없는 대응방식을 선택했다. 나는 국무원의 한 인사로부터 의사결정 과정의 상세한 내용을 들을 수 있었다. 상하이에서 오미크론 변이가 발생한지 얼마 되지 않아 60명의 전염병 전문가들이 참석한 온라인 회의가 열렸다고 한다. 참석자들은 만약 상하이가 격리 요건 완화를 포함한 최근 발표된 공식 지침에 따르면 상하이의 생활은 대체로 평소대로 진행될 수 있다고 입을 모았다. 상하이시 당정계통과 위생계통의 많은 관리들이 이 방식을 지지했다. 하지만 시진핑은 그 말을 듣고 격노했다. 그는 전문가의 의견을 듣기를 거부하고 그의 '제로 코로나' 정책을 강행했다. 상하이의 주민들 수천만 명은 외출도 금지됐다. 병원 앞에서 죽는 사람도 생기고 아파트 건물에서 뛰어내려 죽는 사람도 생겼다.


그리하여 상하이라는 번화한 현대적 도시는 인도주의적 재난지가 되었고, 사람들은 굶주리고 아기들은 부모들 품에서 떨어지게 되었다. 만약 지도자가 좀 더 개방적으로 영향력 있는 의견을 받아들이거나 좀 더 견제와 균형을 용납했다면, 이렇게 엄하기 짝이 없는 정책을 시행하지 않았을 것이고 적어도 그 정책의 비용과 민간의 원성을 알게 된 이후엔 방향을 바꾸기라도 했을 것이다. 하지만 시진핑에게 '철회'라는 것은 자신의 과오를 인정하는 것과 같아서 절대로 불가능한 일이다.

작용과 반작용

중국공산당 지도부는 결코 이견이 없는 한 덩어리가 아니다. 마오쩌둥이 말했듯이 "밖에는 당들이 있고 안에는 파벌이 있는 건 언제나 똑같다." 사적 관계는 이들 파벌의 주요 조직원칙이며, 이 파벌들은 자신들을 왼쪽(좌파)-오른쪽(우파)의 스펙트럼 위에 위치시키는 경향이 있다. 다른 식으로 표현하자면, 중국의 정치는 대체로 사적인 파벌로 이뤄지고 있지만 각 파벌은 국가의 정책 방향에 있어서 입장차가 있으며 자신들을 보스의 사상에 연결시키는 경향이 있다.


스펙트럼 왼쪽(좌파)에는 정통 마르크스주의에 헌신하는 인사들이 있다. 좌파는 덩샤오핑 이전에 주도적 위치를 차지하면서 계급투쟁과 폭력혁명을 계속 추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좌파에는 현재 마오쩌둥의 이름을 딴 수많은 하위파벌들, 그리고 고(故) 천윈(陳云: 덩샤오핑 시대의 2인자), 보시라이(薄熙來: 시진핑이 집권하기 직전에 권력이 박탈되고 투옥된 전 정치국원), 그리고 시진핑 본인이 속한다. 기층에서 좌파는 정치적으로 무력한 소수의 마르크스주의 대학생들과 덩샤오핑의 개혁으로 해고된 노동자들도 포함한다.


스펙트럼의 중간(중도파)은 덩샤오핑의 정치적 후계자들이 주를 이룬다. 오늘의 간부들 대부분은 덩샤오핑 시대에 길러졌기 때문에 중도파는 중국공산당 관료체계를 주도하는 파벌이다. 중도파는 전면적인 경제개혁과 제한된 정치개혁을 지지하는데, 이 모든 것은 당의 영구적인 통치를 보장하기 위한 것이다. 중도파에는 은퇴한 장쩌민과 쩡칭훙(전 국가부주석) 파벌, 그리고 전 중국공산당 지도자 후진타오와 현 총리 리커창의 지지자들로 구성된 "단파"(團派) 즉 "공청"(공산당청년단)파가 있다.


마지막으로 스펙트럼의 오른쪽, 우파이다. 우파는 중국의 맥락에서는 시장경제와 온건한 권위주의(심지어 입헌 민주주의까지도)를 추구하는 자유주의자들인데 내가 속한 이 진영이 세 진영 중 가장 약하다. 우파는 후야오방과 자오쯔양의 추종자들을 포함하며 후야오방과 자오쯔양은 덩샤오핑 아래에서 중국공산당을 이끌었다. 어쩌면 우파에 2003년부터 2013년까지 중국 총리를 역임한 원자바오도 포함시킬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원자바오는 아직도 영향력이 있다. 2010년의 한 인터뷰에서 원자바오는 정치개혁 문제에 대해 질문을 받았는데,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생명이 남아있는 마지막날까지 굴복하지 않을 것이다."


시진핑은 위와 같은 좌파, 중도파, 우파 세 진영의 날로 증가하는 반대에 직면해있다. 좌파는 처음에는 그의 정책을 지지했지만, 지금은 그가 마오쩌둥의 정책을 되살리는 방향으로 충분히 못 해내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중 몇몇은 그가 노동운동을 진압한 후 환멸을 느끼고 있다. 중도파는 시진핑이 경제개혁을 뒤집은 것에 불만을 토로한다. 우파는 완전히 침묵 상태인데 시진핑은 가장 사소한 정치적 입장표명도 금지했다.


파벌의 차이는 정치국 상무위원회에서도 볼 수 있다. 상무위원인 한정(韓正)은 장쩌민계로 알려져 있다. 특히 리커창과 시진핑은 의견이 엇갈리는 것 같고 두 사람의 대립이 대중에게 알려지고 있다. 오랫동안 리커창은 기업들을 다시 열고 경제발전을 지켜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시진핑의 '제로 코로나' 정책에 조용히 저항해왔다. 금년 5월, 리커창은 온라인 회의에서 10만명의 간부들에게 경제상황이 예상보다 더 나쁘다고 밝혔고 그러자 시진핑의 동맹세력은 즉시 반격을 가했다. 그들은 신화통신사를 통해 시진핑을 옹호하면서 "중국의 경제발전 전망은 더욱 밝아지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시진핑의 코로나 정책에 대한 저항의 상징으로, 리커창과 그의 측근들은 마스크 착용을 거부했다. 4월에 리커창이 난창시에서 연설을 했을 때 리커창의 보좌진은 참석자들에게 마스크를 벗으라고 요구했다. 지금까지 리커창은 줄곧 시진핑의 독재를 견뎌내며 어쩔 수 없이 시진핑의 '제로 코로나' 정책을 계속 묵인해왔었다. 어쩌면 그는 곧 인내심의 한계에 달할지도 모른다.


관료조직에서 엘리트층의 분노가 아래로 퍼지고 있다. 시진핑의 취임 초기에 그가 권력 구조를 대대적으로 재편하면서 많은 관리들이 점점 불만과 실망을 느끼게 되었다. 하지만 그들의 저항은 수동적이고 무대응으로 표현되었다. 많은 지방간부들이 대거 병가를 내거나 혹은 다양한 핑계를 대고 시진핑의 반부패 운동을 지연시켰다.


2021년 말 중국공산당 중앙기율검사위원회는 그해 1월부터 10월까지 '시진핑과 중앙정부의 중요지시 이행정신 부실' 사건 24만 7천건을 조사하고 처리했다고 발표했다. 상하이가 봉쇄되는 동안 저항은 더욱 공개적이 되었다. SNS에서 지방관리들은 공개적으로 '제로 코로나' 정책을 비판했다. 금년 4월 상하이의 산린젠(三林鎭) 주민위원회 위원들이 단체로 사임하면서 공개 서한을 통해 24일 동안 사무실에 갇혀 가족을 만날 수 없었다고 불평했다.


특히 시진핑을 불안하게 만드는 것은 엘리트들의 불만이 대중에게 확산되고 있다는 것이다. 권위주의 국가에서 여론을 정확히 가늠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시진핑의 엄격한 '제로 코로나' 조치로 대다수 중국인들이 시진핑에 대한 호감을 버리게 될 가능성이 있다. 일찍이 2020년 2월, 부동산 재벌 런즈창(任志强)은 이의를 제기했고 시진핑을 전염병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는 "광대"라고 불렀다. (그는 하루동안 진행된 재판을 통해 징역 18년형에 처해졌다.) 중국 소셜미디어에는 일반인들이 시진핑에게 '제로 코로나' 정책을 끝내달라고 간청하는 영상들이 넘쳐나고 있다. 금년 5월 '상하이 자구자치위원회'(上海自救自治委員會)라고 자칭하는 단체가 "노예가 되지 말라 - 자구하라"는 제목의 선언문을 온라인상에 발표했다. 이 문서는 상하이시 주민들에게 도시봉쇄에 맞서 싸우고 자치기구를 구성하여 서로 도울 것을 호소했다. SNS에서 일부 중국인들은 시진핑이 계속 권좌에 머무르는 것을 막기 위해 가능한한 빨리 20차 당대회를 소집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 '코로나 대응책'일 것이라고 냉소하기도 했다.


빈곤을 퇴치했다는 시진핑의 주장에도 불구하고, 리커창이 2020년에 밝힌 바와 같이 중국에는 여전히 6억명(인구의 약 40%)의 월소득이 겨우 1000위안(미화140달러)에 불과하다. 홍콩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가 입수한 자료에 따르면, 2021년 1월부터 11월까지 약 440만개의 중소기업이 폐업했는데 이는 같은 기간 신규 등록기업 수의 3배 이상이다. 금융위기에 직면해 지방정부는 지시에 따라 교사임금을 포함해 공무원임금을 삭감해야만 했는데 일부는 50%까지 깎였다. 지방정부는 그 부족분을 메우기 위해 민간기업과 일반주민들로부터 재산을 약탈하는 새로운 방법을 찾아낼 가능성이 높은데 이에 따라 더욱 더 큰 경제적 고통이 뒤따를 것이다.


40년의 개방을 경험한 대부분의 중국인들은 마오쩌둥 시대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 그리고 중국공산당 엘리트들 사이에서는 다수가 시진핑이 전통적인 권력 분배 규칙을 깨는 것에 불만을 품고, 그의 무모한 정책이 당의 미래를 위태롭게 만들고 있다고 생각한다. 결과적으로 1989년 천안문 시위 이후 처음으로 중국의 최고지도자는 내부적 이의에 직면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일반 민중의 강력한 반대와 사회불안의 진정한 위험에 직면해 있다.


(상하이 AFP=뉴스1) 우동명 기자 = 27일(현지시간) 중국 상하이에서 정부의 고강도 제로 코로나19 봉쇄 정책에 항의하고 우루무치 화재 희생자를 추모하는 주민들이 정부에 항의하는 의미를 담은 ‘백지’를 들고 시진핑 주석의 퇴진을 요구하는 시위를 하고 있다.   ⓒ AFP=뉴스1  Copyright ? 뉴스1.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상하이 AFP=뉴스1) 우동명 기자 = 27일(현지시간) 중국 상하이에서 정부의 고강도 제로 코로나19 봉쇄 정책에 항의하고 우루무치 화재 희생자를 추모하는 주민들이 정부에 항의하는 의미를 담은 ‘백지’를 들고 시진핑 주석의 퇴진을 요구하는 시위를 하고 있다. ⓒ AFP=뉴스1 Copyright ? 뉴스1.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5년 더?

불만을 품는 것과 행동에 나서는 것은 다르다. 중국공산당의 고위인사들은 자신들이 언제라도 부패 혐의로 처벌될 수 있다는 점을 잘 알고 있고, 따라서 그들은 감히 시진핑에 반대하려 하지 않는다. 첨단 감시시스템이 보편화되어 은퇴한 국가지도자를 포함한 당내 엘리트들은 공식활동 외에는 일상사무라 할지라도 서로 교류할 엄두를 내지 못한다. 일반대중은 검열, 감시, 그리고 체포의 공포 때문에 침묵을 지킨다. 이 때문에 시진핑의 반대세력은 그를 권좌에서 밀어내는 합법적인 수단에 집중하고 있다. 즉, 다가오는 중국공산당 제20차 대회에서 그의 '3연임'을 거부하는 것이다.


어쩌면 날로 심각해지고 있는 실망감을 감지하고, 시진핑은 최선을 다해 경쟁환경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만들어놨을 것이다. 물론 가장 중요한 사람들은 그의 상무위원회 동료들이다. 그들은 시진핑의 연임에 대해 가장 큰 발언권을 가지고 있는데 부분적으로 그들이 갖고 있는 중국 입법부 구성원들에 대한 통제력 때문이다. 시진핑은 상무위원들에게 상무위원직을 보장한다거나 그들 가족은 조사에서 면제시켜 준다고 약속하면서 그들의 지지를 확보해두었을 것이다.


거의 똑같이 중요한 것은 군대인데, 시진핑의 연임을 거부하려면 장군들의 지지가 필요할 것이기 때문이다. 당 선전계통 사람들은 늘 "당이 총을 지휘한다"고 강조하지만 중국 지도자들은 사실 항상 "총이 당의 머리를 겨누고 있다"는 점을 잘 알고 있다. 시진핑은 수년간 자신의 사람들을 단계적으로 승진시켜 장군집단을 채워왔지만, 군 장군들의 발언을 보면 시진핑 개인에 대한 충성과 당 중앙군사위원회라는 기관에 대한 충성 사이에서 그들이 흔들리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인 시진핑이 군권을 장악하고 있다.)


군 장성들 사이에서 여전히 반대자가 존재한다는 징후가 있다. 작년 12월, 나는 중국의 몇몇 지인들로부터 시진핑의 위구르 정책을 비판해 시진핑의 비난을 받은 류야저우 장군과 그의 남동생이 동시에 연락이 끊겼다는 것을 들었다. 그의 동생도 장군이었는데 형제 두 사람의 집을 수사관들이 급습했다. 이 소식은 군에 큰 충격을 주었다. 전 국가주석의 사위로서 류야저우는 일반적으로 건드릴 수 없는 존재로 여겨졌기 때문이었다. 시진핑은 류야저우 형제들을 구금해 고위급의 자제들("태자들")과 군 고위층에게 '대오에서 이탈하지 말라'는 지금까지 가장 강력한 경고를 발령했던 것이다.


또한 시진핑은 표면적으로 반부패 운동을 강화했다. 2022년 상반기에 성·부급(省部級) 이상 간부 20명, 청·국급(廳局級) 간부 1,237명을 처벌했다. 그중에서도 국가공안부와 국가안전부가 특별한 주의대상이었다. 금년 1월 중국 국영방송국은 쑨리쥔(孫立軍)의 자백을 방송했는데, 그는 중국 국가공안부 부부장으로 부패 혐의로 기소되어 처형될 가능성에 직면했다. 중국공산당 중앙기율검사위원회에 따르면, 쑨의 죄는 "패거리를 만들어 주요 부서를 통제하려 했고" "정치적 야심이 도를 넘었으며" "정치적 품성이 매우 나쁘다"는 것이었다. 3월, 쑨리쥔의 상사이자 중앙공산당 중앙위원 겸 중국사법부장인 푸쩡화(傅政華)도 횡령혐의로 기소되어 해임과 출당 조치를 당했다. 시그널은 명확했다. 충성 아니면 몰락 뿐.


시진핑은 자신의 '3연임'을 더욱 확실히 하기 위해 은퇴한 중국공산당 간부들에게 암묵적인 위협을 가했다. 오랫동안 당의 거물급 원로들은 중국 정치에서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예를 들어 1989년에 자오쯔양을 끌어내린 건 은퇴한 원로들이었다. 금년 1월, 시진핑은 이 원로 그룹을 정조준해 정부가 각 지역에 대해 "20년을 소급해 조사함으로써" "체계적인 공직 부패를 없애고 숨겨진 위험을 제거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그리고 5월, 중국공산당은 은퇴 간부들에 대한 지도원칙을 강화하고 그들에게 "당 중앙의 대정(大政) 방침을 공개적으로 논의하지 말고, 부정적인 정치적 발언을 퍼뜨리지 말고, 불법 사회조직의 활동에 참여하지 말고, 원래의 권위와 지위 및 영향력을 이용해 자신과 타인을 위해 이익을 추구하지 말고, 각종 잘못된 사상을 단호히 반대하고 제지해야 한다"고 경고했다.


더 나아가 시진핑은 중국공산당 20차 당대회에 참석하는 대표 2,300명의 지지를 확보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중 2/3은 각지의 고위관리이고 나머지 1/3은 기층에서 일하는 일반 당원이다. 참석하는 대표들은 시진핑에 대한 충성도를 꼼꼼히 심사해 선별했다. 당대회에서 혹시 모를 사고를 막기 위해 '비조직활동' 금지령을 내렸다. 이에 따라 대표들은 성 대표단의 정식 소그룹회의 외에는 모이는 것이 금지되었고, 대표들이 특정 정책이나 최고지도자의 능력에 대해 반대하는 조직을 결성하는 것을 막았다.


중국공산당 제20차 당대회가 열리기 몇 달 전 시진핑은 더 많은 고위관리들을 체포하고 재판을 벌일 수도 있다. 시진핑의 비판자들 역시 더 많은 정보를 누설하고, 더 많은 소문을 퍼뜨릴 것이다. 서방 전문가들의 일반적인 추측과는 달리 시진핑의 '3연임'은 아직 확정되지 않았다. 날로 늘어나는 시진핑 반대파는 시진핑이 이미 중국공산당 기층 당원들의 지지를 잃었다는 점을 다수 상무위원들에게 설득해낼 수만 있다면, 또는 당 원로들에게 개입하도록 설득할 수만 있다면 시진핑을 성공적으로 축출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경제위기, 사회혼란이 심해지면 시진핑의 가장 확고한 동맹자들도 시진핑에 반대할 것이다. 이럴 가능성이 전혀 없다고는 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22년 가을의 가장 가능성이 높은 결과는 시진핑이 절차를 조작하고 상대를 협박해 당내에서 '3연임'을 얻어 국가와 군대의 최고지도자로 재선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덩샤오핑 집권 이래 유일하게 의미가 있었던 정치개혁의 성과가 산산조각날 것이다.

고삐 풀린 시진핑

그러면 어떻게 될 것인가? 의심할 여지없이 시진핑은 자신의 승리를 역사적 사명을 부여받은 것으로 간주하면서 중국 부흥이라는 중국공산당의 정해진 목표를 실현시키기 위해 마음대로 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의 야심은 더욱 높은 곳으로 올라갈 것이다. 민간기업들을 억제하면서 경제를 진흥하려는 자신의 노력이 실패할 경우, 시진핑은 자신의 중앙집권적 경제정책을 몇 갑절 더 강화할 것이다. 시진핑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잠재적인 경쟁자를 선제적으로 없애고 사회적 통제를 강화하여 중국을 북한처럼 만들 것이다. 시진핑은 심지어 세번째 임기 이후에도 계속 권력을 잡으려 할 것이다. 간이 커진 시진핑은 남중국해 분쟁지역의 군사화를 가속화하고 대만을 무력으로 통일하려 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시진핑이 끊임없이 중국의 지배적 지위를 추구함에 따라 중국은 세계로부터 더욱 고립될 것이다.


하지만 위와 같은 모든 조치들로 당내의 불만이 마술처럼 갑자기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연임하더라도 중국공산당 내부에서 시진핑의 권력확대와 개인숭배에 대한 반대 목소리를 줄일 수는 없고, 또한 민중의 마음 속에 매일같이 자라나는 시진핑의 합법성 문제를 해결할 수도 없을 것이다. 사실 시진핑이 세번째 임기내에 하려고 할 조치들은 전쟁 위험, 사회 혼란, 경제 위기를 가중시켜 기존의 불만을 더욱 심화시킬 가능성이 매우 높다. 아무리 중국이라도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무력과 협박 이상의 것이 필요한데, 바로 실질적 업적이다. 마오쩌둥과 덩샤오핑은 모두 업적으로 권위를 얻었다. 마오쩌둥은 국민당을 물리치고 중국을 해방시켰고, 덩샤오핑은 중국을 개방하고 경제번영의 문을 열었다. 이에 비해 시진핑은 칭송할만한 성과도 없고 그만큼 과오가 용인될 여지도 없다.


내가 보기에 중국이 진로를 바꿀 유일한 방법은 가장 무섭고 치명적인 방법이다. 즉, 전쟁에서 굴욕적으로 패배하는 것이다. 만약 시진핑이 그의 첫번째 표적인 대만을 공격한다면, 전쟁은 계획대로 진행되지 않을 것이고 대만은 미국의 도움으로 침략에 저항하고 중국 대륙에 심각한 피해를 줄 수 있을 것이다. 그 상황에서 중국 엘리트와 민중은 시진핑을 버릴 것이며 이는 시진핑 개인의 몰락을 위한 길을 열 뿐만 아니라 심지어 중국공산당의 몰락을 위한 길을 열 수도 있다. 역사적 선례를 거슬러 올라가면, 18세기 건륭제는 중앙아시아, 미얀마, 베트남으로 제국의 영토를 확장하는데 실패했고 19세기에 와서 청일전쟁에서 참패했던 것이 청조(淸朝) 몰락의 토대를 마련하고 장기적인 정치적 혼란을 가져왔다. 황제는 영원하지 않다.



차이샤(蔡霞)는 중국 출신의 정치학자로 중국공산당 중앙당교(中央黨校) 교수로 15년 간 재직했다. 자본가의 중국공산당 가입을 허용한 장쩌민 전 중국 주석의 삼개대표사상의 초안 작성을 돕는 등 자유주의 성향이 강했으며 시진핑 집권 이후 시진핑을 비판했다가 2020년 중국공산당에서 제명당했다. 2019년부터 미국으로 망명해 거주하고 있다.



1922년 창간된 격월간 국제정치 전문지. 미국의 국제정치 싱크탱크인 외교협회(CFR)에서 발행하는데 국제정치 분야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매거진으로 꼽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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