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5.05 12:35
1990년대와 21세기 초반에는 미국의 글로벌 지배력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어떤 힘의 지표를 보더라도 미국의 압도적 우위를 확인할 수 있었다. 17세기 중반 근대 국제체제가 탄생한 이래 군사, 경제, 기술 영역 모두에서 동시에 이렇게까지 앞서 나간 나라는 없었다. 한편 미국과 동맹을 맺은 국가들은 대다수의 가장 부유한 국가들이었으며, 이들은 미국이 주도적으로 구축한 일련의 국제기구와 제도에 의해 하나로 묶여 있었다. 미국은 근대 이후 역사에서 그 어떤 강대국보다 외부의 제약을 덜 받으며 외교정책을 수행할 수 있었다. 중국, 러시아, 그리고 다른 야심 찬 강대국들이 체제 내 지위에 불만을 품었지만 그들은 이 체제를 뒤집을1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때는 그랬다. 하지만 이제 미국의 힘은 많이 약화된 것처럼 보인다. 그 사이 20년 동안 미국은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에 대한 값비싼 개입 실패, 파괴적인 금융위기, 국내정치의 양극화 심화, 고립주의 충동을 가진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4년간의 집권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그 와중에도 중국은 눈부신 경제성장을 지속하며 그 어느 때보다 목소리가 커졌다. 많은 사람들에게 러시아의 2022년 우크라이나 침공은 미국이 더 이상 수정주의 세력을 막지 못하고 자신이 구축한 국제질서를 집행할 수 없다는 신호이자 미국의 우위가 끝났음을 알리는 조종(弔鐘)으로 보였다.
대부분의 관찰자들이 보기에 일극(一極) 체제는 결정적으로 끝났다. 많은 분석가들은 중국경제의 규모를 지적하며 세계가 양극(兩極) 체제로 바뀌었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분석가들 대부분은 더 나아가 세계가 이제 다극(多極)으로 전환하기 직전이거나 이미 다극으로 전환됐다고 주장한다. 중국, 이란, 러시아는 모두 이 견해를 지지하며, 반미 수정주의를 주도하는 이들이 마침내 자신들이 원하는대로 체제를 재구성할 있는 수 있는 힘을 갖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인도와 가난한 다른 많은 국가들도 같은 결론에 도달했으며, 수십 년간의 초강대국 지배를 끝내고 마침내 그들 스스로의 길을 찾아 나갈 자율성이 생겼다고 주장한다. 심지어 많은 미국인들 조차도 이제 세계가 다극체제로 바뀌었다는 이야기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미국 국가정보위원회의 연이은 보고서와 미국의 보다 조심스러운 외교를 지지하는 좌우파 인사들도 마찬가지다. 오늘날 세계가 더 이상 일극체제가 아니라는 생각보다 더 널리 받아들여지는 진실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는 잘못된 것이다. 세계는 지금도 양극이나 다극 체제가 아니며, 앞으로도 그렇게 될 가능성이 없다. 지난 20년 동안 미국의 지배력이 약해진 것은 사실이지만, 미국은 여전히 세계적 힘의 서열에서 최상위에 있으며 중국과 다른 모든 국가보다 훨씬 우위에 있다. 더 이상 어떤 특정 지표 하나를 선택해 이러한 현실을 보여줄 수는 없지만, 올바른 지표들을 사용하면 분명히 보인다. 근대 국제체제의 시작부터 냉전시기까지 다극 및 양극체제의 국제정치를 형성했던 힘이 오늘날의 세계에는 거의 없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일극의 지속성은 더욱 분명해진다. 그 힘이란 '밸런싱' 즉 동맹을 통한 '힘의 균형' 회복이다. 과거와 달리 이젠 다른 국가들이 동맹을 맺거나 군대의 힘을 합치는 것만으로는 미국의 힘에 맞설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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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힘은 여전히 전 세계에 존재감을 갖고 있지만 이전보다는 작아진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는 관점을 바꿔 봐야 한다. 그렇게 보면 미국 주도의 일극 체제가 성격이 바뀌었을 뿐 일극 체제 자체가 사라진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 보일 것이다.
미국과 중국만 보인다
냉전기간 동안 세계는 '미소(美蘇) 경쟁'으로 정의되는 양극의 세계였다. 소련이 붕괴한 후 세계는 일극으로 바뀌었고, 그 정점에 미국이 홀로 서게 되었다. 다극을 주장하는 많은 사람들은 권력을 영향력, 즉 다른 사람들이 내가 원하는 것을 하도록 만드는 능력, 즉 '결과'를 가져오는 능력으로 생각하는 것 같다. 이런 사람들은 미국이 아프가니스탄이나 이라크에 안정을 가져오지 못했고 다른 많은 글로벌 문제를 해결할 수 없기 때문에 세계는 다극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일극이냐 양극이냐 다극이냐를 정하는 잣대는 결과가 아니라 군사력과 경제력을 중심으로 하는 원천으로서의 힘이어야 하며, 이것은 측정가능하다. 실제로 오늘날 대부분의 다극체제 주장은 하나의 아이디어에 뿌리를 두고 있는데, 이것은 강대국들 사이에 (힘의 원천이 되는) 권력자원들이 어떻게 분포되어 있는지에 따라 국제정치가 다르게 작동한다는 생각이다.
하지만 다극체제가 되려면 국제정치의 최상단에 힘에서 어느 정도 대등한 세 개 이상의 국가에 의해 국제질서가 만들어져야 한다. 물론 미국과 중국은 의심할 여지없이 가장 강력한 두 국가이지만, 다극체제가 만들어지려면 적어도 한 국가가 더 있어야 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다극체제 주장이 무너지게 된다. 프랑스, 독일, 인도, 일본, 러시아, 영국 등 그럴듯하게 3위를 차지할 수 있는 어느 국가도 결코 미국이나 중국과 대등한 위치에 있지 않다.
이는 어떤 지표를 사용하든 마찬가지다. 국제체제가 '몇 개의 극인지'는 20세기 중반에 유행하던 지표, 주로 군사비 지출과 경제적 생산규모로 측정되는 경우가 여전히 많다. 하지만 이 조잡한 척도로도 현재의 국제체제는 다극체제가 아니며, 앞으로도 수십 년 동안 그렇게 되지 않을 것이 확실하다. 간단한 표만 봐도 알 수 있다. 미국이나 중국이 완전히 붕괴하지 않는 한, 이들 국가와 다른 강대국 간의 격차는 가까운 시일내에 좁혀지지 않을 것이다. 인도를 제외한 모든 국가는 인구가 너무 적어서 같은 리그에 속하기 어렵고, 인도는 너무 가난해서 21세기 후반에나 이런 지위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경제적, 군사적 현실과 다극체제의 조건 사이의 간극 문제는 다극체제가 돌아왔다는 이야기의 또 다른 문제로 이어지는데, 오늘날의 국제정치와 수세기 전의 다극 체제가 작동하는 방식이 완전히 다르다는 점이다. 1945년 이전에는 다극이 국제정치의 표준이었다. 국제정치는 비슷비슷한 강대국들 사이에서 끊임없이 변화하는 동맹을 특징으로 했다. 물론 이 동맹게임은 주로 강대국들 사이에서 이루어졌지 강대국과 약소국 사이에서 이루어지진 않았다. 어느 나라와 손을 잡을 것인가라는 '계산'이 정치외교술의 핵심이었다. 한 국가가 단기적으로 자국의 힘을 강화하기 위해 국내적으로 할 수 있는 그 어떤 것보다 힘의 강화에 훨씬 효과가 크기 때문에 다른 강대국과 동맹을 맺는 것은 하루아침에 국가간 힘의 균형을 뒤엎을 수 있었다. 예를 들어, 1801년 러시아 황제 파벨 1세는 나폴레옹에 대항하는 대신 그와 동맹을 맺는 것을 진지하게 고려했고, 영국에서는 유럽대륙에서의 프랑스 패권 가능성에 대한 두려움이 커졌는데, 일부 역사가들은 이러한 우려때문에 1801년에 영국이 파벨 1세 암살을 도왔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오늘날 세계의 거의 모든 '실질적 동맹'(군사지원을 수반하는 동맹)은 소규모 국가들을 워싱턴에 묶고 있으며, 그 기본 메카니즘은 이러한 동맹 시스템을 확장하는 것이다. 미국이 여전히 가장 많은 '물리적 힘'2과 많은 동맹국을 보유하고 있기 때문에 미국이 동맹을 전면적으로 폐기하지 않는 한, 국제정치의 운명은 어떤 국가가 누구와 손을 잡는지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PADO 트럼프 특집: '미리보는 트럼프 2.0 시대']
다극 시대에는 상대적으로 균등한 힘의 분포로 인해 어느 국가가 다른 국가를 추월하는경우가 많았고, 이로 인해 많은 강대국이 이제는 자국이 세계 1위라고 주장하며 앞에 나서는 '힘의 전이(轉移)' 시대로 이어졌다. 예를 들어, 1차 세계대전 직전 영국은 세계를 주름잡는 해군과 막대한 식민지 보유를 바탕으로 세계 1위라고 주장할 수 있었지만, 경제와 육군은 독일보다 작았고, 이러한 독일 역시 러시아보다는 육군이 작았다. 그리고 이 세 유럽 국가의 경제는 모두 미국에 비해 작았다. 한편, 쉽게 베낄 수 있는 당시 기술의 특성 덕분에 한 강대국이 자기보다 우월한 라이벌의 장점을 모방하여 그 격차를 빠르게 좁힐 수 있었다. 따라서 20세기 초 독일 지도자들이 영국을 압박하고자 했을 때 영국 해군과 기술적으로 충분히 경쟁할 수 있는 함대를 빠르게 구축할 수 있었다. 하지만 오늘날은 상황이 매우 다르다. 우선, 확실한 리더와 추격자가 하나씩 존재한다. 그리고, 군사 기술의 특성과 세계경제의 구조가 과거와 달라서 추격자가 리더를 추월하는 과정이 느리다. 오늘날 가장 강력한 무기는 무서울 정도로 구조가 복잡하며, 미국과 그 동맹국이 무기생산에 필요한 많은 기술을 통제하고 있다.
과거 다극체제는 추악한 세상이었다. 강대국 전쟁은 1500년부터 1945년까지 10년에 한번 이상 끊임없이 발발했다. 30년 전쟁, 루이 14세 전쟁, 7년 전쟁, 나폴레옹 전쟁, 제1차 세계대전, 제2차 세계대전 등 모든 또는 대부분의 강대국들이 끔찍하고 소모적인 분쟁에 빠져들어 서로 싸웠다. 변화무쌍하고 막대한 결과를 초래하며 확실한 것이 없었던 '다극'의 동맹정치가 이러한 분쟁에 기여했다. 국력의 잦은 변동과 이에 따른 주요 국가들의 끝없는 국제적 위상 변화 역시 잦은 분쟁에 기여했다. 현재의 국제환경은 1990년대의 황금기와 비교하면 문제가 많아졌지만, 이러한 구조적 분쟁 유발 요인이 없기 때문에 과거의 다극체제와 유사점이 별로 없다.
양극체제에 베팅하지 마라
일부 분석가들은 국내총생산(GDP)과 군사비 지출을 사용하여 양극체제가 등장하고 있다고 그럴듯하게 주장할지 모른다. 그러나 여러 기술혁명이 가져온 국가권력의 원천에 대한 심오한 변화를 제대로 설명하는 몇몇 지표를 사용하면 이러한 주장은 무색해진다. 보다 정확한 지표에 따르면 미국과 중국은 아직 근본적으로 다른 리그에 속하며, 특히 군사 및 기술 영역에서는 오랫동안 다른 리그에 머물러 있을 것이다.
극이 몇 개인지 그 변화를 예고하는 지표로 GDP보다 더 자주 언급되는 지표는 없지만, 중국 안팎의 분석가들은 오랫동안 중국정부의 공식 경제 데이터에 의문을 제기해 왔다. 경제학자 루이스 마르티네스는 야간 조명의 강도에 대한 인공위성 수집 데이터(전기 사용량과 경제활동의 상관성)를 사용하여 최근 수십 년간 중국의 GDP 성장률이 공식적으로 보고된 통계보다 약 1/3 정도 낮았다고 추정했다. 유출된 미국 외교전문(外交電文)에 따르면, 2007년 당시 랴오닝성 당서기 리커창은 주중 미국 대사에게 자신은 "사람들의 손을 거친" 중국의 GDP수치를 신뢰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대신 그는 전기 사용량과 같은 대리 지표를 주로 본다고 했다. 시 주석이 집권한 이후 중국 정부가 중국의 실제 GDP를 추정하는데 사용되던 수만 개의 경제통계 발표를 중단하면서 중국경제에 대한 신뢰할 수 있는 데이터를 구하기가 더욱 어려워졌다.
하지만 일부 지표는 위조할 수 없다. 예를 들어 중국의 경제적 역량을 평가하기 위해 특정 산업에서 한 국가의 기업들이 전 세계 수익에서 차지하는 점유율을 보는 것도 좋다. 정치경제학자 숀 스타스(Sean Starrs)의 작업을 기반으로 한 필자 중 한 명(브룩스)의 연구에 따르면, 전 세계 상위 2000개 기업 중 미국 기업들은 74%의 업종에서 글로벌 수익 점유율 1위를 차지한 반면, 중국기업들은 11%의 업종에서만 1위를 차지했다. 하이테크 부문에 대한 데이터는 더욱 분명하다. 미국 기업은 현재 이 중요한 산업에서 53%의 수익 점유율을 차지하고 있으며, 하이테크 부문이 중요한 다른 모든 국가의 수익 점유율은 한 자릿수에 불과하다. (일본은 7%로 2위, 중국은 6%로 3위, 대만은 5%로 4위를 차지했다.)
또 기술역량을 측정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다른 사람들이 기꺼이 돈을 지불할 만큼 가치있는 기술의 지적 재산권을 사용하고 얼마나 대가를 지불하는지를 살펴보는 것이다. 이 데이터에 따르면 지난 10년간 중국의 광범위한 R&D 투자가 결실을 맺고 있으며, 2014년 10억 달러 미만이었던 중국의 특허 로열티가 2021년에는 120억 달러에 육박할 정도로 성장했다. 하지만 지금도 중국은 매년 미국(1250억 달러)의 1/10도 안 되는 로열티를 받고 있으며, 독일(590억 달러)과 일본(470억 달러)에도 훨씬 뒤쳐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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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대부분의 분석가들은 중국군의 급속한 현대화에도 불구하고 군사적으로 여전히 중국이 미국의 글로벌 경쟁상대가 되기에는 아직 멀었다고 보고 있다. 미국의 우위는 어느 정도이며 얼마나 오래 지속될 것인가? 정치학자 배리 포즌(Barry Posen)이 '공역(公域) 지배권'이라고 부르는 공중, 해상, 우주 등 오픈된 공간에 대한 통제권을 미국에 부여한 군사적 능력을 생각해 보자. 공역의 지배는 미국을 진정한 글로벌 군사강국으로 만드는 힘이다. 중국이 이 영역에서 미국의 지배력에 도전할 수 있을 때까지 중국은 단지 지역 군사강국에 머물러 있을 것이다. 핵잠수함에서 인공위성, 항공모함, 대형수송기에 이르기까지 13가지 범주의 군비체계를 이러한 능력의 근간으로 간주했는데, 중국은 이 중 5가지 능력을 제외한 모든 분야에서 미국 능력의 20% 미만이며, 순양함/구축함, 군사위성 등 2개 분야에서만 미국 능력의 1/3 이상이다. 미국이 수십 년에 걸쳐 이러한 체계를 개발하는 데 막대한 자원을 투입해 이러한 우위를 유지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이러한 격차를 줄이는 데도 수십 년의 노력이 필요하다. 겉으로 보이는 숫자를 넘어 품질까지 고려하면 격차는 더욱 커진다. 예를 들어, 미국의 핵잠수함 68척3은 중국이 추적하기에 너무 조용한 반면, 중국의 핵잠수함 12척은 미 해군의 첨단 대잠전 센서가 심해에서도 추적할 수 있을 정도로 소음이 심하다.
과거의 소련과 비교해보면 많은 것을 알 수 있다. 소련군은 냉전시기 동안 미군의 진정한 경쟁자였지만 현재의 중국군은 그렇지 않다. 당시 소련은 중국에는 없는 세 가지 이점을 누렸다. 첫째는 지리적 이점이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동유럽을 정복한 소련은 세계 경제 생산량의 상당부분을 차지하는 유럽 중심부에 대규모 군사력을 배치할 수 있었다. 둘째, 버터보다 총을 훨씬 더 중요하게 여긴 소련의 계획경제 체제가 군사력 생산에 초점을 맞출 수 있었다. 소련은 냉전기간 내내 국방에 투입한 GDP의 비율(%)이 두 자릿수를 유지했는데, 근대 이후 그 어떤 강대국도 평시에 이렇게 경제력을 국방에 집중시킨 적이 없었다. 셋째는 비교적 복잡하지 않은 군사기술의 특성으로, 냉전기간 내내 소련은 상대적으로 취약한 경제력 위에서도 미국의 핵과 미사일 능력을 빠르게 따라잡고 재래식 군사력을 압도할 수 있었다. 냉전의 마지막 10년 동안에야 소련은 오늘날 중국이 직면한 것과 같은 문제, 즉 막대한 군사 R&D 예산(현재 연간 1400억 달러)을 써가며 기술적으로 역동적인 미국의 최신무기와 경쟁할 수 있는 기술집약적 무기를 어떻게 생산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직면했다.
미소 양극체제는 흔치 않은 상황에서 발생했다. 제2차 세계대전으로 소련은 유라시아를 지배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고, 미국을 제외한 다른 주요 강대국들이 제2차 세계대전으로 타격을 입은 상황에서 미국만이 소련을 견제해 힘의 균형을 다시 잡는 연합세력을 구성할 수 있는 힘이 남아있었다. 따라서 군비경쟁, 제3세계에서의 끊임없는 경쟁, 베를린에서 쿠바에 이르기까지 전 세계에서 주기적으로 발생하는 초강대국간 위기 등 냉전의 격렬한 경쟁이 계속되었다. 다극체제에 비해 이 양극체제는 정점에 한 쌍의 국가만 있는 단순한 체제였기 때문에 걱정할만한 잠재적 '힘의 전이'는 단 하나의 경우뿐이었다.
소련이 멸망하고 양극체제에서 일극체제로 전환되면서 역사상 전례 없던 양극 상황이 마찬가지로 전례 없던 일극 상황으로 바뀌었다. 이제 두 개의 강대국이 아닌 하나의 강대국과 하나의 동맹체제가 존재하게 되었다. 소련과 달리 중국은 글로벌 세력균형에 꼭 필요한 중심지를 아직 정복하지 못했다. 또한 시진핑 주석은 소련 지도자들이 보였던 군수산업에 대한 의지를 보이지 않고 있다. (중국은 오랫동안 GDP의 2%를 군사비에 꾸준히 투입해왔을 뿐이다.) 또한 현대 무기의 기술적 복잡성을 고려할 때 시진핑이 경제력을 대거 투입한다고 해도 몇 년 안에 미국의 군사력을 따라잡는 것은 불가능하다.
부분적 일극체제
오늘날의 체제가 다극이거나 양극이 아니라는 주장한다고 해서 상대적 힘 관계가 변했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특히 경제분야에서 중국의 부상이 두드러지고 냉전 이후 소강상태를 보였던 강대국간의 경쟁이 다시 시작되었다. 미국이 모든 것에서 우위를 점하던 시대는 지났다. 그러나 역사상 가장 크게 벌어진 힘의 격차를 좁히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며, 모든 부문에서 같은 속도로 좁혀지지는 않을 것이다. 중국은 경제 영역에서 격차를 줄이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여 왔지만 군사력, 특히 기술분야에서는 훨씬 적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 결과 오늘날 세력판도는 양극이나 다극보다는 일극에 더 가깝게 유지되고 있다. 세계는 현재의 질서 이전에 일극을 경험한 적이 없어서 이러한 세계의 변화를 설명하는 용어가 없다보니 많은 사람들이 다극이라는 개념에 불필요하게 집착해가며 미국의 주도권이 예전같지 않다는 느낌을 전달하려 했던 것이다. 비록 차이가 좁혀지긴 했지만 미국의 주도권은 여전히 상당하기 때문에 오늘날의 세력판도는 냉전 이후 존재했던 '완전한 일극'과 비교하여 '부분적 일극'으로 설명하는 것이 가장 좋을 것이다.
'완전한 일극'의 종말은 중국, 러시아 및 기타 불만을 품은 국가들이 왜 미국의 적대감을 불러일으킬 위험을 감수하고 불만을 행동으로 옮기려는지 그 이유를 설명해준다. 그러나 이들의 시도를 보면 미국을 견제하는 것이 어렵다는 전망이 미국보다 오히려 미국의 라이벌들의 행동에 훨씬 더 큰 제약이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크라이나가 대표적인 사례다. 러시아는 전쟁을 통해 자신의 수정주의적 잠재력을 한번시험해보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그러나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침공의 필요성을 느꼈다는 사실 자체가 약점을 드러내는 신호다. 1990년대에 푸틴 대통령의 전임자인 보리스 옐친을 만나 2023년에 러시아가 (당시 러시아 관리들은 독립 후 결국 러시아의 신뢰할 수 있는 동맹국이 될 거라 생각했던) 우크라이나에 대한 영향력을 유지하기 위해 전쟁을 벌일 것이라고 말했다면, 옐친은 러시아가 이렇게까지 망가질 것이라고는 거의 믿지 않았을 것이다. 일극체제의 종말이 자주 선언되고 있는 이 때, 러시아가 미국의 패권이 절정에 달했을 때는 가지고 있었던 것을 미국 패권이 무너진 지금 되찾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것은 아이러니하다. 옐친에게 경제규모가 러시아의 1/10에 불과한 나라와의 전쟁에서 러시아가 승리하지 못할 것이라고 말한다면 그는 더더욱 믿지 않았을 것이다. 게다가 우크라이나에 대한 러시아의 오판은 서방의 엄청난 제재들로 인해 러시아의 장기적인 경제 전망을 크게 훼손했다.
그러나 푸틴의 예상대로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를 신속하게 점령하고 친러 정부를 세웠다고 해도 전 세계의 세력판도에는 거의 영향을 미치지 못했을 것이다. 우크라이나 전쟁의 결과가 우크라이나 주권의 미래와 무력에 의한 영토 점령에 맞서는 국제 규범의 힘을 위해 매우 중요하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세계적인 세력판도와 관련해 매우 협소하고 냉정한 계산을 해본다면 우크라이나의 작은 경제 규모(캔자스 주와 거의 같은 규모)때문에 우크라이나는 나토에 속하든 러시아에 속하든 또는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든 별로 중요하지 않은 나라다. 그렇다고 우크라이나가 미국의 동맹국인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러시아가 동맹국도 아닌 이 나라를 공격했을 때 미국이 우크라이나에 무기, 경제지원, 정보를 제공하고 강력한 러시아에 제재를 가하는 등의 반응을 보인 것을 볼 때 러시아는 미국이 진짜 동맹국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어떤 지원에 나서게 될지 분명히 알게 되었다.
중국의 수정주의는 훨씬 더 전반적인 역량에 의해 뒷받침되지만, 러시아와 마찬가지로 역사적으로 볼 때 중국의 수정주의 시도는 놀라울 정도로 성적이 미미하다. 지금까지 중국이 영토적 현상변경을 시도한 곳은 남중국해에서 일부 인공섬을 건설한 정도에 불과하다. 그러나 이 작고 노출된 새 점령지는 전시에 미군에 의해 쉽게 무력화될 수 있다. 또한 중국이 남중국해의 모든 분쟁지를 점거할 수 있다고 해도 그렇게 확보한 남중국해의 자원(주로 어류)은 경제적으로 별로 중요하지 않다. 남중국해의 석유 및 가스 대부분은 여러 국가들의 해안선 가까이 분쟁여지가 없는 해역에서 주로 나온다.
미 해군이 아시아에서 철수하지 않는 한, 중국의 수정주의적 야망은 현재 일본, 필리핀, 대만 등 태평양 군도를 잇는 이른바 제1 도련선(島?線)까지만 확장될 수 있다. 중국이 미군이 가진 '공역(公域) 지배권'에 대항하는데 필요한 모든 역량을 개발하려면 몇 년이 아니라 수십 년이 걸릴 것이기 때문에 이 상황은 조만간 바뀔 수 없다. 또한 중국은 그러한 능력을 추구하지 않을 수도 있다. 미국의 행동이 아무리 위협적으로 보이더라도, 현재의 미국 외교정책이 과거에 미국이 가졌던 냉전시대 수준의 공포를 중국 정책결정자들에게 불러일으키지는 않을 것이다. 미국은 그 공포에 질려 막대한 예산을 투입해 글로벌 전력투사 능력을 갖추게 되었던 것이다.
현재로서는 중국이 수정주의적 현상변경 시도를 한번 해보고 싶어하는 곳은 사실상 대만뿐이다. 시진핑 주석이 2022년에 "조국의 완전한 통일을 반드시 이뤄야 한다"고 선언하면서 대만에 대한 중국의 관심은 분명히 커지고 있다. 대만에 대한 중국의 공격 가능성은 중국이 너무 약해서 누구도 이 시나리오에 대해 걱정할 필요가 없었던 완전한 일극체제 전성기와는 확실히 달라진 변화다. 그러나 대만에 대한 중국의 야심은 20세기 전반의 일본과 독일, 20세기 후반의 소련과 같은 과거의 수정주의적 도전과는 거리가 멀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이들 국가는 각각 먼 거리에 걸쳐 광활한 영토를 정복하고 점령했다. 대만의 전략적 중요성을 가장 강력하게 지지하는 사람들조차도 대만을 그렇게까지 중요하다고는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대만이 다른 편에 포함된다고 해서 과거 다극체제를 위험한 것으로 만들었던 세력판도의 극적 변화까지 가져올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중국과 러시아 간의 활기를 띤 파트너십은 어떤가? 물론 문제다. 미국과 동맹국에게 문제를 야기하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이것이 체계적인 '힘의 전이'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리더십을 갖고 광범위한 동맹체제를 유지하면서 현상유지에 열심인 초강대국을 견제하는 것이 목표라면, 대항 동맹도 그에 못지않게 중량감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이 점에서 중러 파트너십은 낙제다. 양국이 이를 공식적으로 동맹이라고 부르지 않는데는 다 이유가 있다. 중국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첫 해 동안 석유 구매를 제외하고는 러시아를 거의 돕지 않았다. 진정한 의미로 중량감 있는 파트너십이라면 편의에 따른 얕은 수준의 협력 정도가 아니라 다양한 영역에서 지속적인 협력을 필요로 한다. 그리고 중국과 러시아가 양국 관계를 격상하더라도 양국은 각각 여전히 지역 군사강국일 뿐이다. 지역적 힘의 균형을 이룰 수 있는 두 강대국이 결합된다고 해서 글로벌 균형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이를 달성하려면 러시아와 중국이 개별적으로나 집단적으로 보유하지 못한, 그리고 당분간 보유할 수 없는 종류의 군사적 역량이 필요하다.
수정주의 앞에 놓인 장애물
중국과 러시아의 제한적인 수정주의 움직임조차도 핵전쟁으로 비화할 수 있는 강대국간 전쟁을 촉발할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 모든 것이 그다지 위안이 못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현 국제체제의 안정성을 역사라는 큰 그림 속에 놓고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 냉전 기간 동안 미국과 소련은 독일이 모두 상대방에게 넘어가면서 글로벌 힘의 균형이 결정적으로 바뀔 것을 두려워했다. (1970년 당시 서독의 경제 규모는 미국의 1/4, 소련의 2/3 정도였으니 그럴 만도 했다.) 초강대국들은 각각 이 경제적으로 매우 가치 있는 대상에 매우 가까이 있었고, 이 사냥감이 말 그래도 그들 사이에 나뉘어 있었기 때문에 그 결과 독일 절반에 각각 수십만 명의 병력을 배치하는 치열한 군비경쟁이 벌어졌다. 독일의 운명을 둘러싼 일촉즉발의 긴장은 국제정치의 배경에 깔려 있다가 1961년의 베를린에서처럼 전면에 등장하기도 했다.
또는 독일이 비무장 상태의 제한적인 힘을 가지고 있다가 10년도 채 되지 않아 유라시아 전역을 거의 정복할 뻔했던 1930년대의 다극체제와 현재의 상황을 비교해 보자. 당시 독일은 오늘날에는 존재하지 않는 두 가지 이점 덕분에 그렇게 할 수 있었다. 첫째, 당시의 무기체계는 그다지 복잡하지 않았기 때문에 강대국은 단 몇 년 만에 상당한 군사적 투사력을 구축할 수 있었다. 둘째, 독일은 주변 국가를 정복하여 국력을 증강할 수 있는 지리적, 경제적으로 실행 가능한 선택지를 가지고 있었다. 1939년 나치 독일은 먼저 체코슬로바키아(독일 경제의 약 10% 규모)와 폴란드(17%)의 경제적 자원을 추가했다. 나치 독일은 이러한 승리를 발판 삼아 1940년에 벨기에(11%), 네덜란드(10%), 프랑스(51%) 등 더 많은 국가를 정복했다. 하지만 중국에는 이와 같은 기회가 없다. 대만의 GDP는 중국의 5%에도 미치지 못하고, 대만섬은 본토와 거대한 바다로 분리되어 있기 때문이다. MIT의 과학자 오웬 코트는 중국이 이 해역에 대한 제해권이 없기 때문에 "폭 100마일이 넘는 대만 해협을 여러 차례 건너가는 동안 공격에 동원된 적절한 규모의 해상세력(전투함정들)과 이를 지원하는 데 필요한 군수지원 선단을 보호할 수 없다"고 강조한 바 있다. 영국해협은 폭이 대만해협의 1/5에 불과하지만 나치 독일의 영국 정복을 막기에 충분한 장벽이 되었다는 점을 생각해보라.
일본과 한국은 주변에서 유일하게 큰 경제력을 가진 국가이지만, 중국은 군사적으로 이들을 공격할 수 있는 위치에 있지 않다. 일본, 한국, 대만은 지식기반의 경제를 가지고 있고 글로벌 경제와 고도로 통합되어 있기 때문에 정복을 통해 효과적으로 부를 뽑아낼 수도 없다. 예를 들어 나치 독일은 체코의 무기 제조업체 스코다 웍스를 징발하여 독일의 무기를 만들어낼 수 있었지만 중국은 대만 반도체 제조회사를 그렇게 쉽게 징발할 수가 없다. 이 회사의 운영은 침략을 받으면 해외로 도망칠 수 있는 전문지식을 갖춘 직원들과 전시에는 차단될 글로벌 부품 공급망에 의존한다.
오늘날의 수정주의자들은 또 다른 장애물에 직면해 있다. 즉, 지역적 힘의 균형에 골몰해 있는 동안 미국은 전 세계적으로 반격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미국은 전쟁터에서 러시아를 직접 만나지 않고 대신 글로벌 지위를 이용해 파괴적인 경제제재와 우크라이나에 대한 재래식 무기, 정보 및 다른 형태의 군사 지원을 통해 러시아를 응징하고 있다. 중국이 대만을 점령하려 할 경우 미국은 마찬가지로 "글로벌화"를 시도하여 중국 해안에서 멀리 떨어진 채 해군을 통한 폭넓은 원거리 대중(對中) 해상봉쇄를 단행해 중국의 세계 경제에 대한 접근 자체를 차단할 수 있다. 이러한 봉쇄는 기술수입에 크게 의존하고 글로벌 생산망에서 조립 역할을 주로 하는 중국 경제를 황폐화시키는 반면 미국 경제에는 훨씬 적은 피해를 줄 것이다.
미국은 세계경제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기 때문에 보복에 대해 크게 걱정하지 않고 경제적 지렛대를 사용하여 다른 국가를 처벌할 수 있다. 만약 중국이 대만을 정복하려 하고 미국이 중국을 봉쇄한다면 중국은 분명히 경제적으로 보복할 것이다. 하지만 중국이 할 수 있는 그 어떤 보복조치도 미국에 큰 피해를 입히지는 못할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우려하는 것처럼 중국은 미국내 이자율을 높여 경제적 타격을 가할 요량으로 막대하게 보유중인 미국 국채의 일부 또는 전부를 매각할 수 있다. 하지만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FED, 연준)가 매각하는 모든 채권을 매입할 수도 있다. 경제학자 브래드 셋서(Brad Setser)는 "궁극적으로 미국이 더 센 카드를 쥐고 있다"며 "연준은 중국이 팔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이 살 수 있는 세계 유일의 행위자"라고 말했다.
오늘날의 국제규범도 수정주의자들을 방해한다. 이러한 행동 기준의 대부분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과 그 동맹국들에 의해 만들어졌기 때문에 이는 결코 우연이 아니다. 예를 들어, 미국은 주요 분쟁을 예방할 뿐만 아니라 자신에게 유리한 전후(戰後) 현상유지를 위해 '국가 경계 변경을 위한 무력사용'을 일체 금지하는 규범을 공포했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침공에 대한 강력한 반발을 불러일으킨 것은 부분적으로 러시아가 이 규범을 노골적으로 위반했기 때문이다. 다른 분야와 마찬가지로 규범에 있어서도 글로벌 지형은 미국에 유리한 지형이지만 수정주의자들에게는 험난한 지형이다.
미국의 선택
정치학자 케네스 왈츠는 세력판도(힘의 분배상황)의 진정한 체계적 특징과 체계내 행위자인 국가가 형성하는 동맹을 구분했다. 그는 국가가 얼마나 많은 힘을 가질지는 맘대로 선택할 수 없지만 소속팀을 선택할 수는 있다고 주장했다. 국제정치의 많은 부분을 규정하는 미국 중심의 동맹체제는 이제 70년을 넘어서면서 단단한 구조를 갖추게 되었지만, 왈츠의 주장은 여전히 유효하다. 현재의 국제질서는 힘만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미국과 동맹국들이 경제 및 안보 분야에서 긴밀히 협력하여 처음에는 소련을 봉쇄하고 나중에는 무역과 국제협력이 더 쉬워지는 세계질서를 발전시키기 위해 내린 여러 선택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들의 선택은 여전히 중요하다. 그들이 올바른 선택을 한다면 양극체제나 다극체제는 먼 미래의 일로 남을 것이며, 오늘날의 '부분적 일극체제'는 앞으로 수십 년 동안 더 지속될 것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미국이 유럽과 아시아에서의 동맹과 안보 공약에서 물러나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미국은 이 지역들에서의 안보 리더십을 통해 상당한 이익을 얻고 있다. 미국이 본국으로 돌아가는 고립주의를 택한다면 더 위험하고 불안정한 세상이 도래할 것이다. 또한 세계경제와 기타 중요한 문제에 대한 국제협력도 줄어들 것인데, 미국 혼자서는 이러한 문제를 해결할 수가 없다.
사실, '부분적 일극' 시대에는 동맹이 더욱 중요하다. 수정주의적 시도에는 처벌이 필요하며, 미국에게 단독행동의 선택지가 줄어들면서 미국이 동맹국들과 협력하여 대응해야 할 필요성이 커졌다. 그러나 미국은 여전히 그러한 협력을 만들어낼 수 있는 상당한 힘을 가지고 있다. 국익만을 추구하는 국가들 간에도 협력은 누가 주도하지 않아도 언제든 나타날 수 있지만, 미국이 프로세스를 주도할 때 그렇게 될 가능성이 더 높아진다. 그리고 미국의 제안은 종종 파트너 국가들이 결집하는 구심점이 된다.
아시아와 유럽에서 미국의 동맹을 그대로 유지한다고 해서 미국이 백지수표를 발행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미국의 우방국들은 스스로를 적절히 방어하기 위해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고 또 해야 한다. 그들은 더 많은 지출을 해야 할 뿐만 아니라 더 현명하게 지출해야 할 것이다. 유럽의 미국 동맹국들은 미국이 역할을 줄일 수 있는 영역에서 영토 방어 역량을 강화해야 하는데, 미국이 강한 부분과는 겹치지 말아야 한다. 실제로 이것은 단순히 더 많은 지상군을 배치하는 임무에 집중하는 것을 의미한다. 아시아에서 미국의 동맹국들은 특히 대만 문제를 염두에 두면서 방어시스템과 전략을 마련하는 것이 현명할 것이다. 다행히도 대만을 삼키기 어려운 '고슴도치'로 만든다는 방어전략을 챙기라는 미국의 요청을 10년 넘게 무시해 온 대만이 우크라이나에서의 전쟁 덕분에 마침내 이러한 필요성에 눈을 뜬 것으로 보인다.
경제 정책에서 미국은 동맹국들을 압박하려는 유혹을 물리쳐야 한다. 최고의 지도자에게는 기꺼이 따르는 추종자가 있는 것이지 회유하거나 강요해야 하는 추종자가 있는 것은 아니다. 오늘날 국제질서의 중심에는 미국이 이 질서를 지배하면서 특정한 혜택을 얻지만 리더로서의 지위를 남용해 동맹국으로부터 부당한 이익을 얻어내려 하지 않겠다는 암묵적인 약속이 있다. 이 약속을 유지하려면 트럼프나 바이든 행정부가 추구하는 정책보다 보호주의 색깔이 약한 정책이 필요하다. 무역과 관련하여 미국은 자신이 원하는 것만 생각하는 대신 동맹국이 원하는 것도 고려해야 한다. 대부분의 동맹국에게 있어서 이것은 미국시장에 대한 접근이다. 따라서 미국은 아시아와 유럽의 파트너들을 위해 무역장벽을 낮출 수 있는 실질적인 무역협상을 테이블에 올려야 한다. 제대로만 이루어진다면 미국시장 접근성 강화는 미국의 동맹국들을 만족시킬 뿐만 아니라 미국 정치인들이 정치적 제약을 극복할 수 있을 만큼이나 미국인들에게 충분한 이익을 가져다 줄 수 있을 것이다.
미국은 또한 현 상황을 바꾸기 위해 군대를 사용하려는 유혹을 물리쳐야 한다. 20년에 걸친 아프가니스탄에서의 국가건설 시도와 이라크 침공은 자해행위였다. 교훈은 너무 쉽다. 이렇게 외우자. '다시는 다른 나라 영토를 점령하지 말자!' 아시아와 유럽 이외의 지역에서 미군의 군사력을 사용하려는 모든 제안은 엄격하게 검토되어야 하며, 응답은 원칙적으로 "아니오"여야 한다. 중국과 러시아를 막아 아시아와 유럽에서 현상변경을 못하도록 하는 것은 과거에는 비교적 쉬웠지만 이제는 엄청난 노력이 요구된다. 미군의 노력은 바로 여기에 집중되어야 한다.
궁극적으로 '부분적 일극' 시대의 세계는 형태만 바뀌었을 뿐 '전반적 일극' 시대에 나타났던 많은 특징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국제 규범과 제도는 여전히 수정주의자들을 제약하고 있지만 이들 국가는 이에 더 활기차게 도전하고 있다. 미국은 여전히 전 세계에 군사력을 투사할 수 있는 독보적인 능력을 보유하고 있지만 중국은 해안 근처에 치열한 경합구역을 만들었다. 미국은 여전히 막대한 경제적 영향력을 보유하고 있지만 제재를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동맹국들과 협력해야 할 필요성이 더 커졌다. 미국은 여전히 협력을 촉진할 수 있는 고유한 리더십 역량을 보유하고 있지만 일방적으로 행동할 수 있는 범위는 줄어들었다. 미국은 소련 붕괴 직후에는 직면하지 않았던 한계에 직면해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다극체제라는 이름의 신화는 미국이 여전히 얼마나 많은 힘을 가지고 있는지를 못 보게 만든다.
스티븐 G. 브룩스(Stephen G. Brooks)는 미국 다트머스대학 정치학 교수이며, 윌리엄 C. 월포스(William C. Wohlforth)는 같은 다트머스대학 정치학 교수로 <안보연구>(Security Studies)의 편집장을 역임했다. 두 사람은 국제정치학계에서 영향력 있는 <균형이 깨진 세계>(World out of Balance: International Relations and the Challenge of American Supremacy)(프린스턴대학 출판부, 2008)를 공저했다.
미국이 세계의 경찰을 자처하며 글로벌 이슈에 적극적으로 관여를 해야 하는지 아니면 제2차 세계대전 이전처럼 강대국의 하나로 몸을 낮추며 그러한 관여를 줄여나가야 할지가 항상 미국 외교의 고민입니다. 트럼프 전 대통령이 대표적인 '관여 줄이기'파, 즉 이른바 고립주의파입니다. 속내를 다 알 수는 없지만 그는 심지어 주한미군의 축소 또는 그 이상의 변화까지도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중국과의 경쟁에서 미국은 어떤 정치적, 경제적, 군사적, 규범적, 문화적 수단을 사용할까요? 미국은 과연 관여를 계속 이어갈 정도의 힘이 있을까요? 이러한 문제에 대해서 미국의 동맹이자 중국의 인접국인 우리가 면밀히 검토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최근 영국의 이코노미스트는 '비동맹'에 대해 기사를 자주 내고 있는데, 미국의 포린어페어스도 5·6월호의 커버스토리로 '비동맹'을 잡았습니다. 동 매거진은 강대국 사이에서 편을 정하지 않는 비동맹의 재등장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여러 기사를 통해 살펴보는데, 이번 주 PADO는 기사들 중 비동맹의 부상이 반드시 다극체제의 등장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고 미국 일극체제가 일부 약화된 '부분적 일극체제'로 이해하는 것이 옳다고 주장하는 기사를 전문번역으로 소개합니다. PADO는 '비동맹'의 재부상을 주요 이슈로 계속 다뤄나갈 예정이니 독자 여러분의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