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에세이 서평

해적과 민주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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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5.12 09:57

The New Republi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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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적은 수많은 사람에게 낭만적 상상을 가져다줬습니다. 많은 아이들은 미국 애니메이션 <캐리비언의 해적>과 일본 애니메이션 <원피스>를 보면서 자랍니다. 바다보다는 호수와 운하의 수적(水賊)에 관심이 많았던 중국인들은 <수호지>라는 고전을 남겼는데, 서양에서 묘사하는 해적과 <수호지>의 수적은 많이 닮았습니다. 예일대와 런던정경대 교수였던 데이비드 그레이버는 아나키즘 사상가로도 유명한데, 그가 말하는 아나키즘은 '무정부' 상태를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주의에 반대하고 시민사회의 자율에 의해 자유와 평등의 민주주의를 추구하는 시민사회 중심의 사회주의를 의미합니다. <1984>를 쓴 조지 오웰이나 미국 정치사상가 마이클 월저 같은 사람들도 아나키즘 성향의 민주사회주의자들입니다. 해적과 수적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은 뻥 뚫린 공간인 바다나 큰 호수, 그리고 중앙아시아의 초원에서는 어느 누구든 조직에 참여하고 이탈하는 것이 자유로워 정치조직은 자유로우면서도 평등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대지>(The Good Earth)로 유명한 노벨문학상 수상자 펄 S. 벅이 수호지를 번역하면서 영문제목을 "All Men Are Brothers"(모든 인간은 형제다)라고 했던 것은 의미심장합니다. 바다와 큰 호수, 초원에서 자유롭게 조직을 만드는 해적, 바이킹, 노마드는 조직을 만들기는 어렵지만 자유와 평등의 원칙에 따라 조직을 만드는데 성공하게 된다면 그 어떤 조직보다 단단한 조직을 만들어낼 수 있었고, 이들은 민주정부를 만들기도 하고 세계적인 제국의 중핵을 만들어내기도 했습니다. 데이비드 그레이버는 캐리비언해를 주름잡다가 나중에는 마다가스카르섬으로 근거지를 옮겨 인도양 해로를 약탈하던 영국인 해적들 다수가 원래는 노동계급 출신의 영국해군 수병들이었다고 합니다. 그들은 해군함정에서 상류계급 출신 장교들에게 괴롭힘을 당하다가 이탈해 해적이 되었고 그러다보니 그들은 계급차별이나 권위주의에 대한 혐오를 갖고 있었다고 합니다. 데이비드 그레이버의 이야기가 엄밀한 인류학적, 역사학적 연구는 아닙니다만, 사실 18세기 사상계를 뒤흔든 볼테르나 루소의 저작 역시 확실하지 않은 인류학적, 역사적 근거를 기반으로 자신들의 사상을 펼쳤습니다. 그런 점에서 데이비드 그레이버의 이 책은 20세기 이후의 직업적 역사학이나 인류학이라기 보다는 19세기 이전 사상가들의 글쓰기를 따른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렇게 본다면 데이비드 그레이버의 <해적 계몽주의>는 매우 흥미로운 사상서가 될 수 있습니다. 미국의 대표적인 진보진영 매거진인 <뉴리퍼블릭> 5월호에 실린 <해적 계몽주의> 서평을 전문해석으로 소개합니다. 이글은 사실 미국의 보수우파도 좋아할 수 있는 글입니다만, <뉴리퍼블릭>이 그 점을 알고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금년 봄에 방영중인 BBC의 코미디 <우리의 깃발은 죽음을 의미한다>(Our Flag Means Death)도 영국인들이 해적을 어떻게 이해하는지 잘 보여줍니다.


바다에서 싸움을 한바탕 치른 후 그렇게 얻은 전리품을 어떻게 지킬 것인가는 역사적으로 해적 '경제' 연구에서 가장 과소평가된 문제이다. 먼바다 해적의 황금기인 17세기 말에서 18세기 초, ("going on the account"로 종종 불렸던) '해적질'에 대한 신화와 이야기는 항상 약탈과 추격전, 수평선에 검은 깃발을 발견했을 때 상선 선원들이 느끼는 공포, 씻지 않아 목에 땟국물이 흐르는 거친 선원들과 무자비한 선장들에 대한 드라마 같은 것이었다. 사실 해적의 이야기는 정직한 회계기록 보다는 허풍에 가까운 것이었다. 하지만 스페인 갤리온선을 나포해 해적선의 화물칸을 보석과 비단, 금화로 가득 채우고 난 이후 해적선장은 무엇을 해야 했을까? 해적들에게도 유동성 확보는 어려운 문제였다. 막대한 양의 귀중품을 현금으로 쉽게 전환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해적들은 부패한 식민지 관리가 눈감아주지 않는 경우, 제국의 손길 닿지 않는 곳에 있는 해적 소굴을 통해 배에 물과 식량을 다시 싣고, 떠나는 선원들을 내려주고 새로 합류하는 선원을 싣고, 희귀한 보물을 깔끔하게 현금으로 세탁할 수 있었다.


마다가스카르는 바로 그런 곳이었다. 1700년 무렵 마다가스카르는 카리브해 해적들이 막 호황을 누리던 인도양 해로를 약탈하기 위해 이동하는데 필수적인 경유지가 되었다. 이 섬 북동부 해안의 한적한 항구에 해적들은 암보나볼라, 생트마리 같은 타운을 세웠다. 항상 뜨내기 거주자가 수천 명이나 있었지만 제대로 된 정부 같은 것은 없었던 이 정착지 타운은 서인도 제도에서 동아시아에 이르는 수많은 섬으로 이뤄진 비공식 해적질 인프라의 한 부분이었다. 데이비드 그레이버의 유작인 <해적 계몽주의>에 따르면, 이 섬들은 정치적 상상력과 자유의 온상이기도 했다. 해적과 마다가스카르 현지인 간의 만남은 비즈니스에도 도움이 되었지만, 파리와 쾨니히스베르크에서 수만 리 떨어진 이 곳에서 급진적인 형태의 민주적 통치와 "계몽주의 정치사상의 여명" 같은 것이 나타나기도 했다. 과연 그레이버다운 주장이다! 사실이라면 흥미진진하고, 이야기가 가진 증거보다 더 멀리 나아가더라도 사상적으로는 옳을 수 있으며, 의도적으로 전문가들을 자극하는 글이며, 평범한 사람들이 세상을 창조해내는 힘을 지켜보는 아나키스트의 기쁨이 전해지는 글이다.


2020년 5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그레이버는 인류학자이자 사회 이론가로서 최고 수준의 학자였다. 또한 자신이 혐오했던 불평등과 권위에 대한 반대라는 대의를 (월스트리트 등에 대한) '점거'(Occupy) 운동에서 발견한 격렬한 반세계화 운동가이기도 했다. 이 <해적 계몽주의> 역시 그러한 반항심에서 출발했다. 이 책은 18세기 마다가스카르에서 대담한 민주주의 실험이 꽃을 피웠다고 주장하면서, 유럽인들이 유럽밖의 도움 없이 어떻게 유럽 땅 위에 민주주의를 재창조하고 근대 세계를 최초로 최고로 건설했는지에 대한 뻔한 이야기들을 해체해버린다.


데이비드 그레이버, <해적 계몽주의(Pirate Enlightenment)> (New York: Farrar, Strauss and Giroux, 2023)

데이비드 그레이버, <해적 계몽주의(Pirate Enlightenment)> (New York: Farrar, Strauss and Giroux, 2023)


그러나 이 도발(그리고 여러분들이 이 책에 설득되는지 여부)은 이 책의 주된 매력은 아니며, 앞으로 몇 년 동안 이 <해적 계몽주의>를 몇 번이고 다시 읽게 될 이유나 이 책이 지닌 영원한 가치의 본질과도 관련이 없다. 이 책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 이유는 그레이버에게 가장 중요했던 것, 그리고 그가 우리에게 중요한 이유가 또다시 이 책에서 멋지게 빛을 발하기 때문이다. 즉 그가 지금까지 장난기 넘치면서도 관대하며, 야망이 넘치면서도 언제나 매력적이었던 흔치 않은 지적 스타일, 부채와 불평등, '고약한 직업들'의 출현, 관료주의의 그림자 같은 유혹에 대해 수천 년을 가로지르며 서술하던 역사인류학 저작활동의 정신이 여기서도 빛나고 있다. (저작을 통한 그의 마지막 위대한 선동은 차분한 제목의 <모든 것의 새벽: 인류의 새 역사>였다.) <해적 계몽주의>는 그레이버의 역사적 관점, 즉 과거가 중요한 이유와 사람들이 과거에 대해 어떻게 글을 써야 하는지에 대한 그의 견해를 더욱 명확하게 보여준다. <해적 계몽주의>는 우리가 역사를 앎이나 정의(正義)가 아니라 자유를 위해 어떻게 사용할 수 있는지 보여주려는 그의 노력을 가장 잘 보여준다.





바나비 슬러시는 18세기에 접어들 무렵 HMS 라임 호에서 근무한 영국 왕립해군 요리사였다. 그는 1709년 영국 독자들에게 놀라움과 심적 동요를 안겨주며 "해적들"은 같이 배를 타고 있는 동료들끼리 "군왕"처럼 행동한다고 설명했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서로를 민주적으로 동등하게 대했기 때문이다. 슬러시는 해적은 "모든 면에서 무지막지한 강도들"이지만 "자기들끼리는 정의롭다"고 말했다. "다른 모든 시도에는 대담함을 보이는" 무자비한 해적선장조차 해적선원들이 지켜온 "평등의 법도"를 감히 침해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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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의 <보물섬>에서 악명 높은 해적 플린트 선장이 등장하면서부터 해적선은 대중의 상상 속에서 바다위의 독재체재로 취급되어 왔다. 하지만 이것은 사실이라기보다는 해적을 폄훼하려는 정치적 선전에 가깝다. 사실 바다위의 독재체제는 해적선이 아니라 대영제국 해군함정이었다. 영국 해군함정에서는 수병에 대한 규율이 자의적으로 잔인했고 장교들이 노동계급 출신 수병들에게 폭군처럼 행동했다. 많은 해적들이 전직 수병들이었다. 이런 독재에 맞서 목숨을 걸고 반란을 일으켰던 그들이었기에 똑같은 독재체제를 재현하는 것을 혐오했다. 어차피 사형 선고를 받은 해적들에게 자유는 남은 시간 동안 누릴 수 있는 가장 큰 보상이었다.


역사학자 마커스 레디커는 해적들이 의도적으로 "주인을 두지 않는 사람들"이 되었고, 이에 따라 스스로를 통치했다고 주장했다. 해적선장은 전투가 치열하거나 추격전이 벌어질 때 명령을 내릴 수 있었지만, 그 외에는 권한이 제한적이었다. 다수결로 선출된 해적선장은 마찬가지로 같은 절차로 해임될 수 있었다. 해적선장은 다른 모든 선원들과 동등한 자격으로 선원들 전체모임과 소수 회의체에 참여했다. 또한 배의 자원을 배분하고 분쟁을 해결하며 선원들을 대변하는 갑판장과 권한을 나눴다. 18세기의 한 관찰자는 갑판장의 역할을 "로마의 호민관을 모방한 것"이라고 표현했다. 또 다른 관찰자는 갑판장을 배의 총리로 보았다. 해적선은 선장과 갑판장 외에는 계급이 나뉘어있지 않았다. 다니엘 디포가 쓴 것으로 추정되는 1724년작 고전인 <해적 일반사>(A General History of the Pyrates)에서는 해적들이 "자신들 아래에 있는 조건으로" 선장을 임명한다고 설명한다. 이것은 사탕수수를 럼주로 증류한 것처럼 민주적 주권을 간단히 '증류'한 형태다.


그레이버는 이 '거칠지만 이미 완성된 평등주의'가 마다가스카르에 상륙한 것은 1690년대였다고 말한다. 해적들은 반영구적인 전초 기지를 세우고 바다에서 실천했던 집단주의 정신을 그대로 가져왔다. 이 평등의 전초기지를 세운 사람들은 예상할 수 있듯이 '어둠의 사람들'이었다. 자메이카에서 살인 혐의로 수배 중이던 전 해적 아담 볼드리지가 생트마리를 세웠는데, 이 타운은 아나키즘이 번성했던 해적 마을이었으나 볼드리지가 (뉴욕의 한 비열한 상인과 손을 잡고) 동맹자들을 노예로 삼으려 하자 각 지역 지도자들이 들고 일어나 보복으로 생트마리 정착지를 파괴해 버렸다. 그 후 버뮤다 출신 영국 해군 수병 출신인 나다니엘 노스가 해적의 인프라 위에 부활시킨 암보나볼라 타운이 마다가스카르 최고의 해적 전초기지가 되었다. 그레이버의 설명에 따르면 해적들은 세 가지 이유로 번영을 누렸다. 그들은 세계에서 가장 호화로운 상품을 거래할 수 있었고, 영토 정복이나 식민지화에 관심이 없었으며, 해적 생활을 통해 고국에서 완전히 벗어나 현지 여성, 남성들과 함께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마다가스카르 해적 왕국에 대한 소문이 퍼지면서 해적 왕국의 존재는 신화로 변모했다. 1700년대 초, 유럽에서는 세계에서 가장 끔찍한 해적 헨리 에이버리가 무굴 황제 아우랑제브의 딸을 납치해 아내로 삼은 후 아내와 함께 인도양에 본격적인 해적 왕국을 건설하고 있다는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존재하지도 않는 이 강력한 국가와 수만 명의 해적들을 대표한다는 의문의 외교사절들이 유럽 궁정에 도착하기 시작했다. (스웨덴은 조약에 서명하고 외교사절을 보낼 준비를 했다가 사기라는 사실을 깨닫기도 했다.) 하지만 이 해적 왕국의 신화보다는 해적들이 노예제나 강제 없이, 심지어 무소유로 자유로운 삶을 살았다는 평등주의 낙원 리베르탈리아(Libertalia)의 전설이 더 큰 반향을 일으켰다. 이 두 국가가 존재했다는 증거는 없다. 하지만 적어도 비슷하게 흥미를 자아내는 것 하나는 실제 존재했다.




벳시미사라카 연방은 약 700킬로미터의 해안선을 지배하며 1710년대에 탄생한 거대한 마다가스카르의 국가다. 당시 영국인 해적과 마다가스카르인 어머니의 아들로 추정되는 라시밀라호가 건국 왕이었다. 이 지역을 연구하는 서양 역사가들은 오랫동안 이 연방을 약소국이자 실패한 왕국으로 보아왔지만, 고고학자들은 중앙집권적으로 권력이 운영되었다는 데 대한 구체적 증거를 찾지 못했다. 그레이버는 이것이 근본적으로 분권화되고 심지어 (당시로서는 급진적인) '민주적' 사회 질서를 감추기 위해 허수아비 군주를 앞에 내세운 대안적인 정치체제를 심각히 오독한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물론 이를 입증할 기록은 드물고 또 혼란스럽지만, 그레이버는 독자들에게 '해적 민주주의'와 평등주의 및 토론이라는 지역적 전통을 결합할 수 있었던 상상력이 풍부한 "원시 계몽주의적 정치실험"으로 이 벳시미사라카 연방을 보길 요청한다.



벳시미사라카 연방 시대 마다가스카르 의사 결정의 중심에는 지역사회 전체에 영향을 미치는 문제에 대해 남녀가 함께 모여 합의를 모색하는 오래된 회의체인 카바리가 있었다. 카바리는 마을 내에서, 씨족 간에, 심지어 지역적으로도 개최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격식 차리지 않고 활발한 토론을 선호하는 지역적 특성을 고려할 때, 카바리는 마다가스카르 사회가 유럽인들이 유럽 계몽주의의 원동력으로 자주 주장하는 것과 같은 종류의 자유분방하고 수평적인 사회성에 의해 움직이고 있었다고 그레이버는 생각한다. 이러한 마다가스카르의 전통이 대화와 상업적 교류를 통해 '해적 평등주의'와 만나면서 벳시미사라카 연방이 탄생하게 되었다. 그레이버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는 "사회적 계급 체계가 발달하지 않은 분권화된 풀뿌리 민주주의"를 만들기 위한 급진적인 실험이었으며, 유럽의 통치자나 철학자들이 이룬 어떤 업적도 능가하는 위대한 업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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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구의 지식 엘리트들의 글이 아닌 전 세계 평범한 사람들의 기여에 초점을 맞춰 민주주의의 근대사를 서술하는 것은 그레이버가 평생 동안 추구한 지적 프로젝트였다. 그는 2007년에 "나는 인도, 마다가스카르, 츠와나, 마야가 본질적으로 민주적 전통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서구를 모방하려는 시도로 보기보다는 전 지구적 민주화 과정의 다른 측면으로 본다"고 말했다. 그레이버는 근대에 실제로 일어난 것은 서구의 발전을 따라잡기 위한 식민지들의 추격이 아니라 민주주의 사상이 "사방으로 날아다니며" 세계체제가 형성되는 와중에 "오랜 민주주의 관행을 실현시켜 온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러한 통찰에 따라 그레이버는 (많은 좌파 유럽지식인들이 비판하듯) 유럽 계몽주의를 본질적으로 결함이 있고 폭력적이며 반인간적인 것으로 거부하는 대신 유럽 계몽주의를 긍정적으로 재평가하려 하는데, 그는 계몽주의에 담긴 가장 해방적인 사상들이 실제로는 권력을 차지하고는 범행의 흔적을 감추려는 유럽 남성 엘리트가 아니라 변방으로 밀려난 민중에 의해 발명되었다는 것을 보여 주려고 노력했다.


그레이버의 핵심 의제에 공감하고, 특히 마다가스카르 추장과 노동계급 해적의 목소리와 행동이 민주주의 발전에 대한 서술에서 더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데 동의하면서도 <해적 계몽주의>는 역사책으로서는 아무래도 설득력이 떨어진다고 생각할 수 있다. 마다가스카르 사람들이 일종의 숙의 민주주의를 실천했고, 체류하는 해적들과 자유롭게 통치하는 방법을 논의했다는 것은 매우 그럴듯한 이야기다. 그러나 그레이버는 벳시미사라카 연방 내에서 카바리 제도가 실제로 어떻게 작동했는지, 의사 결정이 어떻게 이루어지고 권력이 어떻게 작동했는지, 해적과의 대화가 실제로 있었는지, 있었다면 어떤 내용인지에 대해서는 많은 것을 알려주지 않는다. 증거 기록이 너무 빈약하다는 것은 그레이버 자신도 인정하는 사실이다. 그가 인용한 핵심 자료는 문제의 사건이 발생한 지 수십 년이 지난 후 프랑스인 첩자가 작성한 것으로, 그의 주요 목표는 사기꾼 헝가리 백작을 위해 대담한 가짜 업적을 지어내는 것이었다.


그 결과 믿을 수 없는 추측이 사실로 둔갑하여 다소 대담한 주장의 무게를 견뎌내야만 했다. 물론 견뎌내긴 어렵다. 그레이버는 지역의 고유 전통과 해적의 전통이 정치적으로 종합되는 것은 충분히 예상 가능하기 때문에 연방을 건설한 마다가스카르 젊은이들이 해적들을 롤모델로 삼았다고 해도 "그리 놀랄 일이 아닐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입증할 기록이 부족하기 때문에 이 정치적 실험에서 카바리가 어떻게 사용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상상력을 발휘해봐야 한다"고 인정한다. 그리고 해적과 마다가스카르 현지인들 사이에서 유럽 계몽주의 스타일의 사회성을 만들어냈다는 실제 대화 기록은 "물론 거의 다 잃어버렸지만…우리는 그런 대화가 분명히 있었을 것이라는 것은 추측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매우 흥미로운 이야기다. 하지만 그레이버가 지적했듯이, 실제 있었던 것에 대한 "확실한 서술을 작성할" 수 있는 "방법은 전혀 없다"고 한다. "우리가 가진 것은... 특별한 사건에 대한 몇 안되는 작은 창문들 뿐"이라는 것이 그의 해명이다. <해적 계몽주의> 마지막 부분에서 그레이버는 연방의 급진적 정치에 대한 자신의 설명을 실제기록의 도움도 없이 방어하려고 노력하다보니 연방의 왕인 라시밀라호가 영국인 아버지의 집에 살기 위해 허가가 필요했는지 여부와 같은 별로 관련 없는 세부 사항을 파악하는 데 너무 많은 노력을 기울였고, 그러면서 자신을 불필요한 구석에 몰아넣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그레이버는 진정한 역사 탐구는 그가 마지막 부분에서 보여준 이런 종류의 좁아빠진 실증주의와 동의어가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는데, 그런 점에서 책의 이 마지막 부분은 놀랍다. 책 전반에 걸쳐 그레이버는 역사가들의 실증주의적 사고방식을 은근히 비판한다. 그는 리베르탈리아가 신화에 나오는 대로 실제로 존재했는지에 대한 "다소 사소한" 질문에 집중하는 학자들에 대해 짜증스러워한다. 그는 훨씬 더 흥미롭고 가치 있는 것은 이러한 매력적인 환상이 전 세계에 파문을 일으켜 정치적으로 가능한 것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을 바꾸어 놓았다는 점이라고 한 세대의 문화사 학자들을 대변하며 말한다. 내러티브와 소문이 역사의 흐름을 바꾸는 힘이 될 수 있다는 그의 주장은 옳다. 어떤 경우에는 내러티브와 소문을 떠받치고 있는 실제 상태가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레이버는 해적 민주주의와 마다가스카르 계몽주의에 대해 우리가 모르는 것이 많을 수 있음을 인정하면서도 우리의 "무지는 단지 세부에 대한 것일 뿐"이라고 덧붙인다.


<해적 계몽주의>의 수많은 도발적 역사서술의 천둥과 번개 가운데, 가장 급진적인 것은 별다른 언급도 없이 천연스럽게 전달하는 다음의 서술이다. 그는 이렇게 우리들에게 묻는다. 도대체 일반적인 진실과 추세, 가능성을 다루면서도 사건의 구체적 세부내용에는 무관심한 역사를 쓴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할까? 덜 관대한 독자들은 이것은 역사가 아니라 사회 이론, 심지어 시나 철학이며 그레이버가 여기서 둘을 혼동하는 오류를 저질렀다고 항의할 수 있다. 또는 "구체적 세부내용"에 무관심하다고 말하는 것은 증거가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진실이라고 믿고 싶은 주장을 편리하게 하기 위한 방법일 뿐이라고 주장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레이버는 이보다 더 많은 공로를 인정받아야 마땅하다. 저자가 집필 도중 사망해 완성을 못 본 <해적 계몽주의>의 전체에 걸쳐 흐르는 것은 역사서술 방식과 사라진 세계들의 가치에 대한 그의 독특하면서도 설득력 있는 비전이다.





역사는 여러 가지 열쇠로 문을 열어가며 여러 가지 목적으로 쓰일 수 있고, 종종 중복되는 경우가 많지만 모두 가치가 있다. 역사학 자체가 쇠퇴하고 있는 지금, (폭력적인 백인 우월주의부터 고삐풀린 국제 자본주의에 이르기까지) 현대의 많은 병폐에 대한 계보학적 설명, 역사에 비춘 현실파악, 소외된 목소리 및 집단을 어둠에서 구해 힘을 보태줌으로써 정의를 추구하는 것이 대중의 지배적인 관심사다. 하지만, 뼛속까지 아나키스트인 그레이버는 역사적 탐구가 무엇보다도 '자유'를 위해 봉사해야 하며, 자유를 상상하고 추구할 수 있는 우리의 역량을 심화시켜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강조점의 차이는 미묘하지만 강력하다. 이는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은 그의 학문적 의도를 반영한다.


그레이버는 <해적 계몽주의> 전반에 걸쳐 역사 서술에 있어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그리고 어떻게 하면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는지에 대해 설명한다. 그는 "기존의 역사는 심각한 결함이 있고 유럽 중심적일 뿐만 아니라" "불필요하게 장황하고 지루하다"고 한탄한다. 이러한 미학적 주장은 과거에 대한 많은 글들이 "모든 것을 건조하게 만들고, 사람들을 판박이 고정관념으로 축소시키거나", 종종 "인간의 가능성에 대한 우리의 감각을 훼손하고 심지어 파괴하는" 방식으로 "문제를 단순화"하는 경향이 있다는 그와 데이비드 웬그로우가 <모든 것의 새벽>(The Dawn of Everything)에서 주장한 것과 같다. 그레이버는 또한 역사가 자신이 얼마나 "역사의 위인들의 행동을 일일이 검토하고 있는지" 증명하려는 도덕주의적 역사학에 지쳐 있었다. 그는 이런 종류의 연극적 판단은 "은밀한 쾌락"이며 "지루하고" 덧없다고 생각했다.


그레이버는 이 모든 것 대신에 과거 역사를 주로 우리의 마음을 확장하는데 도움이 되는 '사회적 가능성을 모아둔 백과사전' 또는 대안 세계와 자유에 대한 급진적 실험의 방대한 저장고로서 접근하는 역사 저술을 더 많이 보고 싶었다. 이 프로젝트는 (그레이버가 이전 책들에서 주로 다뤘던) 근대적 삶의 '숨겨진 부분'이나 그 삶을 제약하는 부정적인 힘들이 아니라 사람들이 다른 삶을 살 수 있었던 '막 형성되고 있던 세계체제의 활기찬 변방'에 초점을 맞춘 프로젝트여야 했다. 1960년대와 1970년대의 위대한 좌파 사회문화사학자, 즉 '아래로부터의 역사'를 써야 한다고 믿었던 E.P. 톰슨이나 나탈리 제몬 데이비스 같이 노동자, 장인, 농민을 연구한 학자들처럼 그레이버는 인간의 자유와 창의성은 항상 권력의 무관심과 방치 속에서 활기를 띠는 기성질서의 구석에서 가장 번성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우리는 집단적 자기 창조의 결과다"라고 그는 <모든 것의 새벽>에서 웬그로우와 함께 말한다. "인류의 역사를 그런 식으로 접근하면 어떨까?" 오래 전에 살았던 사람들을 "상상력이 풍부하고 지적이며 재미를 좋아하는 존재로 이해한다면 어떨까?"라고. 평범한 사람들의 삶과 상상력에 주목할 때 느끼는 기쁨과 흥분, 경외감을 독자들과 함께 나누겠다는 그레이버의 결심으로 엮어낸 책이 바로 <해적 계몽주의>다. "그럼 이제 마법, 거짓말, 해전, 납치된 공주, 노예 반란, 인간사냥, 가짜 왕국과 사기꾼 대사들, 스파이, 보석 도둑, 독살자, 악마 숭배, 근대적 자유의 뿌리에 있는 성적 집착에 관한 이야기를 해보겠다"고 그레이버는 유쾌하게 무대를 꾸미며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레이버가 해적과 마다가스카르 지역 지도자들에 대해 글을 쓴 것은 단순히 그들을 비난에서 구출하거나 잘못을 바로잡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이 이룬 업적을 기리고 그들의 창의적인 장난과 활기찬 정신을 즐기며 우리 모두가 조금 더 자유로워지도록 돕기 위해서다. 이것이 바로 <해적 계몽주의>의 진정한 보물이자 지적 유산이다. 그레이버는 인간의 삶을 그 생명력의 중심에 초점을 맞춰 조명하는 역사서술 방식에서 세상을 바꾸는 힘을 발견했다. 그 생명력의 중심은 무질서하고 놀랍고 지저분하고 야만적이며 언제나, 언제나 재미있다.



서평 필자인 이안 비콕(Ian Beacock)은 뉴리퍼블릭의 기고자이다.


<해적 계몽주의>의 저자 데이비드 그레이버(David Graeber)는 미국 태생의 인류학자로 미국의 예일대와 영국의 런던정경대(LSE)에서 교수를 역임했다. 그는 아나키즘 이론가로 유명하며 월스트리트 점거운동을 사상적으로 지도했다. <해적 계몽주의>는 2020년 사망 전에 작성한 마지막 저작으로 사후 출간됐다.



1914년 창간된 미국의 진보 성향 매거진으로 본래 주간지였으나 현재는 월간지 형태로 발행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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