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7.07 13:14
모로코 모더니즘 예술가 모하메드 멜레히(Mohamed Melehi)의 1969년 사진 속에는 전통 치마를 입고 무거운 자루를 머리에 이고 시장에서 일하는 여인이 있는데, 그녀는 마라케시의 메인 광장인 제마 엘 프나의 붉은 진흙 벽에 전시된 눈부시게 다채로운 추상화들 때문에 발걸음을 멈추게 된다. 이 즉흥적인 야외 갤러리에서 그녀는 그림을 보려고 목을 빼고 있는 다른 군중과 함께 서있다. 이들은 1956년 독립 이후 모로코 예술의 결정적인 순간이 되었던 실험적 전시회를 관람하는 관객들이며, 오늘날 이 전시는 글로벌사우스 모더니즘의 획기적 사건으로 여겨지고 있다.
2020년 83세의 나이에 코로나로 사망한 멜레히는 살롱에서 거리로 예술을 옮기는 것을 목표로 한 '플라스틱 프레젠스(Plastic Presence)' 운동을 이끈 아방가르드 예술가 중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이 운동은 카사블랑카의 대서양 연안에 줄지어 있는 하얀 회벽에서 계속되었다. 이 운동을 주도했던 작가들은 모두 1960년대 카사블랑카의 미술학교 '에콜 데 보자르'에서 교편을 잡았는데, 바로 이 미술학교가 테이트 세인트 아이브스에서 진행되고 있는 기획전의 주제이다. 대서양 연안도시라는 점, 그리고 영국 모더니즘의 중심지로서 가지는 역사성 때문에 세인트 아이브스는 이 기라성 같은 모로코 모더니스트들을 한 군데 모은 첫번째 미술관 전시회 장소로 아주 적합해 보인다. 전시회의 제목은 다음과 같다:《카사블랑카 미술학교: 포스트식민지 아방가르드를 위한 플랫폼과 패턴, 1962-1987》.
서로 다른 스타일의 예술가 세 명이 핵심인 "카사블랑카 트리오"를 구성하고 있으며 2016년 이래 테이트는 이들 모두의 작품을 소장해왔다. 1962년부터 1974년까지 카사블랑카 미술 학교('에콜 데 보자르')의 젊은 교장이었고 2014년에 사망한 파리드 벨카히아(Farid Belkahia)는 2021년 파리 퐁피두센터 회고전의 주인공이었다. 벨카히아는 파리와 프라하에서 수학하였으며 그의 초기 유화 작품들에는 우울한 색조의 <고문>(1961-62)이 포함되어 있다. <고문>은 인물이 족쇄에 채워진 채 고통스럽게 거꾸로 매달려 있는 모습을 그리는데, 이웃 알제리의 독립 운동에 대한 프랑스의 탄압에 분노를 표출한다.
멜레히는 벨카히아의 정치적 연민을 공유했지만 표현방식은 차이가 있는데, 멜레히의 대조를 이루는 초기 추상화 실험은 그가 스페인과 이탈리아에서 미술을 공부한 후 록펠러 장학금을 받고 유학했던 뉴욕의 강렬한 영향을 엿볼 수 있다. 멜레히의 <미니애폴리스>(1963)는 노란색 띠로 구분된 검은색과 빨간색 영역으로 이루어진 아크릴 캔버스 작품인데, 멜레히 자신의 주요 작품 경향인 변화무쌍한 물결 패턴이 등장하기 전 제작했던 바넷 뉴먼(Barnett Newman)의 색면 회화1에 대한 오마주이다. 2019년 런던의 모자이크룸에서 열린 멜레히의 기억할만한 개인전 <새로운 물결(New Waves)>은 모라드 몬타자미와 마들렌 드 콜네가 기획했던 것인데, 바로 이 큐레이터 팀이 이번 세인트 아이브스 전시를 함께 기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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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사블랑카 트리오'의 세 번째 인물은 모하메드 차바(Mohamed Chab?a)인데, 로마에서 공부하고 2013년에 사망했다. 빨간색, 검은색, 주황색 아크릴 물감으로 양식화된 옆모습을 그린 1965년작 <무제> 작품은 예술과 혁명 관련 계간지로 그해 발행금지된《수플(Souffles, 숨결이라는 뜻)》에 실린 작품으로, 이 작품으로 인해 1972년에 투옥된 차바의 그래픽 감각을 잘 보여준다. '카사블랑카 트리오'의 뛰어난 작품들이 약 20명의 다른 예술가들의 작품과 함께 전시장 곳곳에 전시되어 있다. 벨카히아는 유채를 버리고 현지 재료들을 실험했다. 이를 테면 가죽에 천연 안료를 사용한 <팔라버 트리(Palaver Tree)>(1989), 반추상적인 얕은 부조의 금속을 작업한 초현실적인 <전투(Battle)>(1964-65), 구리를 두드려서 표현한 <게르니카(Guernica)>가 그런 실험을 보여준다. 요동치는 파도와 불꽃을 사이키델릭하게 또는 흙색으로 표현한 멜레히의 작품들은 서정적인 셀룰로오스 회화 <화산(Volcanic)>(1985) (용암이 흘러넘치는 산봉우리와 상현달이 인상적)으로부터 1968년 멕시코 올림픽을 위해 제작된 36피트 높이의 <차라무스카 아프리카나> 기념비(이 전시회에는 사진으로 전시)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차바의 복잡한 기하학적 추상화는 생동감 넘치는 색조의 아크릴과 나무 또는 구리로 만든 조각 작품들을 아우른다.
하지만 이번 전시회의 전시방식은 혼란스러운 점이 아쉽다. 핵심 예술가들의 삶과 작품 궤적을 추적하기보다는 그들의 작품은 전시된 장소에 따라 "플랫폼"이라는 이름으로 분류되어 흩어져 있다.
'카사블랑카 트리오'는 1966년 라바트(모로코의 수도)에서 열린 연합 전시회에서 처음으로 뭉쳤다. 멜레히는 2019년 인터뷰에서 "학생들에게 미술은 사치스러운 가구가 아니라 메시지이자 아이디어이며 자유를 위한 신호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작품을 판매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프랑스 보호령 정부 아래 설립되어 여전히 오리엔탈리즘 스타일을 가르치는 이 학교의 운영을 손에 쥐게 된 이 1세대 유학파 예술가들은 전통적인 아카데미즘 이젤 페인팅을 버리고 국가 경계를 뛰어넘는 추상, 사진, 아틀라스 산맥에서의 현장 학습을 통해 모더니즘에 대한 독특한 해석을 위해 과거를 뒤졌다. "추상은 모로코에서 낯선 것이 아닙니다"라고 멜레히가 나에게 말했다. "추상은 북아프리카의 영혼입니다."
'아프로 베르베르 유산' 섹션에서는 지중해, 사하라 이남, 아랍, 아마지그(베르베르)식 장식들이 어떻게 추상 패턴에 영향을 미쳤고, 이러한 추상 패턴이 포스터와 책 표지부터 호텔 인테리어, 메디나 벽화 그리고 도자기(아브데라만 라훌의 도자기 냄비는 희귀하게 남아 있는 1960년대 작품이다)에 계속해서 되풀이된다. 베르베르식 러그와 함께 전시된 멜레히의 사진에 담긴 아마지그 보석과 색칠한 천장의 모티브가 전시회 곳곳에 보인다.
또 다른 주요 추상 미술가로 모하메드 아타알라(Mohamed Ataallah)와 모하메드 하미디(Mohamed Hamidi)가 있다. 아타알라는 둘로 접는 딥티크(diptych) 형식의 <멀티 마라케시/멀티 불꽃>(1969년) 등을 제작한 작가로 로마에서 공부하고 2014년에 사망했다. 하미디는 파리에서 돌아와 화려한 색채 블록이 중첩된 형상을 즐겨 표현했다. 모로코 최초의 여성 모더니스트로 알려진 말리카 아게즈네이(Malika Agueznay)는 전통 캘리그라피의 해조류 문양을 닮은 생물형상을 즐겨 그렸다. 그녀는 멜레히의 제자였던 1968년, 이번에 전시된 바다녹색 아크릴에 네이비블루을 입힌 작품을 만들었다.
국제적인 카사블랑카 그룹을 가르친 사람들 중에는 '아프로 베르베르(Afro-Berber)'라는 용어를 만든 네덜란드 인류학자 버트 플린트와 이탈리아 미술사학자 토니 마라이니(당시 멜레히의 아내)가 있다. 1967년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아메드 체르카우이(Ahmed Cherkaoui)는 모더니즘 추상화의 선구자였다. 아마지그식 부적에서 영감을 얻은 그의 액션 잉크 드로잉은 식민지 기간 중 장식물 정도로 폄하되던 전통 공예의 가치를 살려냈다. 예술가를 '높은 단계의 장인(匠人)'으로 바라보는 바우하우스의 관점은 건축가와의 멋진 협업에 박차를 가했다. 하이 아틀라스의 호텔 레 로즈 뒤 다데스부터 카사블랑카 트리 포스탈까지 여러 건축물의 멋진 벽 부조와 천장이 전시회에 비치된 화면에 비춰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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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 미술학교를 독특하게 만든 예술가들보다는 학교 자체에 초점을 맞추다 보니 많은 부분이 조명되지 못한다. 또한 반식민주의와 모로코의 뿌리에 대한 지나친 강조에 의해 액션 페인팅, 재즈, 사이버네틱스, 일본식 선(禪, Zen) 불교, 수피즘의 영향은 가려지게 되는데, 멜레히의 경우 "라타투이(프랑스 프로방스 지방의 야채 스튜)"처럼 리드미컬한 색채의 박동 속에 이 모든 영향을 결합하여 모로코의 범대서양 모더니즘을 탄생시켰다.
"공동 창작", "예술의 공공성" 또는 "범아랍 연대" 같은 평범한 섹션 제목 역시 이 놀라운 혼합을 조명하는 데 거의 도움이 되지 않는다. 또한 1970년대와 1980년대 하산 2세의 독재 통치 기간인 이른바 '납의 시대'에 다양한 정치적 공격에 의해 이 그룹이 붕괴된 이유에 대해서도 설명이 없다.
지속되고 있는 유산 한 가지는 멜레히가 1978년에 공동 창설자로 자신의 고향 해변가에서 개최하는 아실라 예술 축제(Asilah Arts Festival)인데, 이 축제 동안 독학으로 미술가가 된 차이비아 탈랄(Cha?bia Talal) 같은 모로코 작가와 전세계에서 온 벽화 작가들이 함께 작업한다. 차이비아 탈랄의 생동감 넘치는 유화 작품인 <결혼식>(1983)은 매력적이면서 뭔가 부족한 이 전시의 대미를 장식한다. 멜레히의 뛰어난 사진들로 제작된 매혹적인 쇼릴(showreel) 화면은 이 전시가 우리에게 주는 즐거움 중 하나로서 중요한 모로코 모더니즘 이야기를 전달하는데 있어서 다른 방법도 있을 수 있음을 보여준다.
전시는 2024년 1월 14일까지
tate.org.uk
필자인 마야 자기(Maya Jaggi)는 인도계 프리랜서 평론가로 예술 및 문학 분야에 대해 파이낸셜타임스, 가디언, 이코노미스트, 뉴욕리뷰오브북스, 뉴스위크 등에 기고하고 있으며, 귄터 그라스, 오에 겐자부로, 토미 모리슨 등 12명의 노벨문학상 수상자를 인터뷰했다. TV와 라디오 진행자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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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자인 이희정은 영국 맨체스터대 미술사학 박사로 대영박물관 어시스턴트를 거쳐 현재 명지대 객원교수로 강의와 연구를 이어가고 있다. 역서로는 '중국 근현대미술사'(미진사, 근간)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