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11.03 11:51
유럽 근대 문화에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중 한 명은 한번도 유럽에 발을 들여놓은 적이 없다. 바로 그 인물인 가쓰시카 호쿠사이(葛飾北齋, 1760-1849)는 쇄국 중이던 에도시대 일본의 다른 모든 주민들과 마찬가지로 원한다고 해도 열도를 떠날 수 없었고, 그의 판화를 인쇄해 팔던 출판사는 가부키 배우, 꽃, 후지산을 그린 그의 판화를 해외로 수출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가 죽은 지 몇 년 후인 1849년 페리 제독의 '흑선'(黑船)이 지금의 도쿄만으로 항해하면서 일본 시장은 강제로 개방되었고 호쿠사이의 목판화는 바다 너머로 퍼지기 시작했다. 프랑스, 영국, 그리고 곧 미국에서도 도쿄에서 탄생해 전 세계로 퍼져나간 완전히 새로운 종류의 미술이 모습을 드러냈다.
보스턴 미술관(MFA Boston)에서 열리는 일본 목판화와 세계 현대미술 전시회《호쿠사이: 영감과 영향》에서는 미술이 더욱 도회적이고 일상을 묘사하고, 또 관찰된 세계가 기호와 심볼의 평면으로 바뀌는 세계적 문화 변화를 이끈 가장 위대한 판화가 한 명이 등장한다. 아름답기도 하고 좀 실망스럽기도 한 작품들이 섞여 있는(그러나 직접 가서 볼 가치는 충분히 있다) 이 전시는 보스턴 미술관의 독보적인 일본 미술 컬렉션을 충분히 보여준다. (실제로 보스턴 미술관은 1892년에 호쿠사이 회고전을 미국 최초로 개최한 바 있다.)
바로 이곳에서 호쿠사이가 15권의 베스트셀러 화책으로 묶어 출간한 목욕하는 사람, 기녀(妓女), 새와 짐승의 망가(漫畵)―망가(만화)의 문자적 의미는 '제멋대로 그린 그림'이다―를 포함해 100여 점의 판화, 회화, 망가 작품을 볼 수 있다. 그의 가장 유명한 시리즈인 '후지산 36경'에는 커피 머그에 인쇄된 유명한 2개 작품을 포함한 쨍한 색감의 작품 11개가 있다. 커피 머그에 인쇄된 작품은 8월의 후지산을 진흙빛 원뿔로 표현한 <맑은 바람, 맑은 날씨> 와 눈 덮인 후지산이 촉수같은 푸른 파도 아래로 사라지는 듯한 <가나가와 앞바다의 파도 아래>('큰 파도'라는 이름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이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호쿠사이: 영감과 영향》은 두 개의 섹션으로 구성된 전시다. 첫 번째 섹션에서는 18세기와 19세기 일본을 배경으로 호쿠사이의 교육, 견습, 독립적인 경력, 그리고 '우키요에'(浮世繪: '뜬 세상 그림'이라는 뜻)로 불리는 판화의 제작에서 후배들을 지도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첫번째 섹션에는 그의 스승 가쓰카와 슌쇼(勝川春章), 그의 최대 라이벌 우타가와 히로시게(歌川廣重), 그리고 그의 재능 있는 딸 가쓰시카 오이(葛飾應爲)의 작품들도 전시되어 있다. 가쓰시카 오이의 작품으로 여성 3인이 연주하는 모습을 담은 멋진 두루마리 그림이 전시에 포함되어 있다.
[PADO '언더그라운드 엠파이어' 북콘서트가 11월 30일(토) 광화문에서 열립니다! (안내)]
그런 다음 후반의 좀 더 국제적인 섹션은 연대, 표현매체, 색조를 넘나들며 호쿠사이의 생생한 구도와 도회적 주제가 세계적으로 어떻게 이동해가며 변화하게 되었는지를 조명한다. 고갱과 휘슬러의 판화는 호쿠사이의 두툼한 색채와 평면적인 공간을 흡수한다. 일본을 모방한 슈토이벤 유리공장과 부쉐론 보석상들의 장식성 강한 제품들, 호쿠사이의 파도가 표지에 그려진 드뷔시의 '바다'(La Mer) 악보 일부도 전시되어 있다. 또 중요한 의미가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대개는 없다) 여러 '뉴아트' 작품들이 현대 망가와 함께 전시되어 있다.
호쿠사이 자신은 상업적인 영역에서 일했기 때문에(에도 시대에는 순수 예술과 대중 예술의 서양적 구분이 명확하지 않았다), 이 전시가 회화에서 망가로 넘어가는 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제 그는 현대 대중 문화에 완전히 침투하여 스마트폰에 자신만의 이모티콘을 가진 유일한 작가가 되었다. 목판화 원작에서 반쯤 물에 빠져 있는 어부들을 제외한 채 그려진 높이 치솟은 푸른 파도 모양이 그 이모티콘이다.
그러나 보스턴 미술관이 전시하고 있는 현대 작품 중 상당수는 유치하거나 판에 박힌듯 하며, 질보다 양을 추구하다 보니 후반부에는 마치 밀려오는 파도에 그냥 휩쓸리는 느낌까지 든다. 호쿠사이의 파도에 대한 보스턴 미술관의 가장 좋은 표현은 작품 하나만 골똘히 지켜보는 것보다는 모방, 패러디 및 헌정 작품들 사이에서 혼잡하게 나타나는데, 우리는 앤디 워홀과 나라 요시토모의 '큰 파도'를 모방한 작품, 파도 모양의 멕시칸 팔찌와 서퍼를 연상시키는 트롱프뢰유 1가구, 버드나무처럼 호리호리한 올림픽 피겨 스케이팅 금메달리스트 하뉴 유즈루가 청백색 의상을 입고 오른팔을 '가나가와 파도'처럼 구부린 홍보 이미지에서 볼 수 있다. 뉴욕의 현대미술관(MoMA)이 대여해준 로이 리히텐슈타인의 <물에 빠진 소녀>는 은빛 파도 아래로 사라지는 파란 머리의 여인을 그린 작품으로, 이렇게 말하자니 좀 부끄럽긴 하지만, 파란색과 흰색 레고 블록으로 만든 호쿠사이의 큰 파도 복제품과 마주하고 있다.
호쿠사이가 태어난 1760년은 일본이 오랜 불황에서 벗어나 번영을 되찾고 있던 시기였다. 그는 쇼군 아래에서 거울제작자로 일하던 삼촌에게 양자로 입양되었고, 19세의 나이에 배우와 여성의 이미지를 전문으로 그리는 슌쇼의 화실에 들어갔다. 스승(슌쇼)과 제자(호쿠사이)가 그린 두루마리 그림 두 점을 나란히 내 건 멋진 전시에서 우리는 무희(舞姬)의 움직임을 꽃무늬 물결로 표현한 슌쇼와 훗날 장작을 나르는 여인의 뭉친 옷을 같은 선으로 표현한 호쿠사이를 볼 수 있다. 여기서는 회화의 귀족적이고 정신적인 차원은 좀 더 화려하고 일상적인 것에 자리를 내주고 있다. 무대, 거리, 목욕탕, 화류계가 바로 그런 것들인데, 호쿠사이에게는 이러한 것들이 풍경만큼이나 영감과 몰입의 대상이 되었다.
여기서 매우 중요한 점은 호쿠사이가 그리는 일상적 즐거움의 장면들은 '쇄국 중인 일본'의 오염되지 않은 아름다움을 우상시했던 서양인들이 나중에 인정하는 것보다 훨씬 더 국제적인 요소가 있었다는 것이다. 호쿠사이와 그의 제자들 그리고 그의 라이벌들은 중국과 네덜란드의 화법을 배워 세계를 색과 선으로 평평하게 표현했고, 때로는 나가사키 앞바다의 무역소 '데지마'를 통해 수입(또는 밀수)한 외국 안료를 사용하기도 했다.
이번 전시에는 슌쇼가 1790년경에 그린 웅장한 6폭 병풍 두 점이 포함되어 있는데, 멋지게 차려입은 여인들이 원근(遠近) 없이 같은 축척의 평행한 대각선 두개를 따라 그려져 있다. 이러한 화법이 중국 회화의 기둥이라 불리는 축측투상(軸測投象: axonometric perspective)이다. 바로 옆에는 20년 후에 제작된 호쿠사이의 호화로운 판화 시리즈가 걸려 있는데, 에도의 한 유흥가를 묘사하고 있는 이 작품은 스승 슌쇼의 작품과 달리 소실점이 하나인 원근법에 따라 앞쪽의 여인들이 뒤쪽의 여인들보다 더 크게 그려져 있다.
[PADO 트럼프 특집: '미리보는 트럼프 2.0 시대']
유럽 르네상스 시대에 혁명적이었던 원근법은 1740년대 초 일본 예술가들에게도 이미 친숙해졌지만 그다지 큰 감명을 주지는 못했다. 판화가 우타가와 도요하루를 비롯한 몇몇 예술가들이 이 유럽식 기법을 교묘하게 사용하기는 했지만, 대부분은 이를 단순한 시각적 즐거움을 주기 위한 눈속임으로만 여겼다. 호쿠사이가 아시아와 유럽의 다른 공간 묘사 방식을 근대 세계의 새로운 하이브리드 이미지에 통합하기 전까지만 해도 그랬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호쿠사이의 작품 중 하나는 <후지산 36경>(참고로 실제로는 46경이 있다. 출판사에서 36편의 성공을 보고 속편을 요청했기 때문이다) 중에서 구불구불한 길에서 갑작스러운 돌풍으로 날아가버릴 듯한 여행자들을 묘사한 작품이다. 오른쪽의 인물들은 중국식으로 대각선을 따라 배치되어 있지만 왼쪽의 인물들은 유럽식 원근법에 의해 축소되어 위쪽으로 물러나 있다. 일본에서 가장 위엄있는 후지산은 정상을 향해 급히 올라가고, 정상에서는 흔들리며, 다시 지상으로 쭉 미끄러지는 세 번의 필획으로 간단히 표현되어 있다.
호쿠사이 시대 무렵 유럽인들은 중국, 페르시아, 인도에서 영감을 받아 장식 예술을 창작해왔다. 그러나 호쿠사이 사후 서유럽, 특히 전쟁에서 패배하고 대도시로 완전히 변모한 1870년대 파리에 일본 판화가 마침내 유통되기 시작하면서 일본 판화는 미적 보석이자 정신적 삶을 구해줄 방주(方舟)로 등장했다. 호쿠사이와 그의 라이벌들 속에서 뿌리를 잃은 젊은 파리지앵들은 낡은 시각적 어휘로부터의 해방을 발견했고, 자포니즘(Japonisme)이라는 유행은 화실에서 식탁으로 퍼져 나갔다. 후지산을 테마로 한 잉크 스탠드. 연꽃으로 장식된 벨벳 커튼. 망가에서 물고기와 새를 그대로 베낀 도자기가 일상에 들어왔다. 일기 작가 에드몽 드 공쿠르는 "자포니즘은 유럽인들의 시각을 혁신했고," 도자기, 칠기, 그리고 무엇보다도 목판화는 "유럽에 새로운 색채 감각과 새로운 장식 체계, 그리고 시적 상상력을 가져다주었다"고 썼다.
이 예술가, 작곡가, 디자이너들이 일본 문화에 과학적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는 사실은 일본 판화가들이 '이국적인' 서양을 묘사할 때와 마찬가지로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일본적인 것에 대한 프랑스의 유행은 외국 것의 '오해'가 갖는 창조적 능력에 대한 가장 풍부한 예 중 하나를 제공한다. 무엇보다도 훗날 인상파와 후기 인상파가 될 예술가들에게 부드러운 색채, 평면적인 확장 및 음영의 무시를 알려준 일본인들이 없었다면 결코 등장하지 않았을 것이다. 회화적 문법뿐만 아니라 호쿠사이의 도회적 감수성, 연극과 패션, 화류계 여성에 대한 관심도 영향을 미쳤다. 이러한 도시 생활에 대한 취향은 모네와 드가를 비롯한 동료 화가들에게 현대 프랑스 생활에 대한 순간적 인상도 수준 높은 예술의 소재가 될 수 있다는 확신을 심어주었다. 에드워드 사이드가 오리엔탈리즘이라고 불렀던 "욕망, 억압, 투자, 투영의 물결" 속에서 일본적 섬세와 순수라는 고정관념에 빠져들었을 때에도 이 유럽인들은 일본에 의해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변했다.
하지만 호쿠사이의 영향이 20세기에 어떻게 전 세계로 퍼져나갔는지를 제대로 보여주기에는 후반부 섹션이 너무 지루하다. 특히 현대 컬렉션은 검색 엔진으로 무성의하게 큐레이팅한 듯한 느낌이 들었고, 레고로 만든 '큰 파도'는 이곳이 아니라 선물 가게 옆에 있었어야 했다. 내가 정말 원했던 것은 문자 그대로의 파도와 산이 아니라 자포니즘을 특징짓고 2009년 구겐하임 전시 '제3의 마음: 미국 예술가들이 사유한 아시아, 1860-1989'가 잘 드러낸 아시아-서구 교류의 추동력이었던 하이브리드 절충주의였다. 유럽 예술가들의 일본에 대한 오용을 자신의 소외된 자화상으로 되살린 모리무라 야스마사의 작품이 빠져있는 점도 신경쓰인다.
몇 년 전만 해도 미국은 한 지역의 예술가들이 다른 지역의 이미지와 대상을 어떻게 묘사해야 하는지에 대해 고통스러울 정도로 단순한 논쟁을 벌였기 때문에 이런 식의 전시가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누가 어떤 그림, 어떤 재료, 어떤 형태, 어떤 단어를 사용할 권리가 있는지 판단하기 위한 "생활세계적 체험", "힘의 불균형"과 같은 새로운 용어와 관심이 등장했다. (보스턴 미술관도 이 새로운 용어와 관심을 따랐다. 2015년 보스턴 미술관은 모네의 자포니즘 초상화 앞에서 관람객들에게 기모노를 입어보라고 권유했다가 항의와 반발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하지만 호쿠사이와 그의 후계자들이 거듭 강조하는 것은 다른 문화들과 완전히 구분되어지는 순수한 '문화'란 존재하지 않으며, 심지어 해외로 나가면 사형에 처해졌던 에도시대 일본의 문화도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문화는 항상 나뉘어짐과 재결합, 폭력적이기도 하고 평화롭기도 한 조우(遭遇)의 썰물과 밀물이다. 당신은 홀로 고립되어 있을 수도 없으며, 세상의 모든 것은 이리저리 떠다닌다. 당신은 그 썰물과 밀물의 파도를 타야 한다. 이것이 그들의 메시지다.
보스턴 미술관(Museum of Fine Arts Boston)은《호쿠사이: 영감과 영향》(Hokusai: Inspiration and Influence)을 지난 7월 16일까지 개최했고, 10월 19일부터 내년 1월 21일까지 시애틀 미술관(Seattle Art Museum)에서 순회전시한다. 보스턴 미술관은 '한류'를 주제로 한《Hallyu! The Korean Wave》의 첫 미국 전시를 2024년 3월 24일부터 7월 28일까지 개최할 예정이다.
[새로운 PADO 기사가 올라올 때마다 카톡으로 알려드립니다 (무료)]
필자 제이슨 파라고(Jason Farago)는 뉴욕타임스의 객원 평론가로서 주로 미국과 해외의 미술과 문화에 대해 기고한다. 그는 2022년에 실버스-더들리 평론저널리즘상을 수상했다.
역자 이희정은 영국 맨체스터대 미술사학 박사로 대영박물관 어시스턴트를 거쳐 현재 명지대 객원교수로 강의와 연구를 이어가고 있다. 역서로는 '중국 근현대미술: 1842년 이후부터 오늘날까지'(미진사, 2023)가 있다.
이모티콘 목록에서 '파도'를 찾아보면 상당히 익숙한 형태의 파도를 볼 수 있습니다. 실은 18세기 일본 화가 호쿠사이의 유명한 작품에서 유래한 이모티콘인데 그 덕분에 호쿠사이는 작품이 이모티콘에 들어간 유일한 화가가 됐습니다. 당시 일본은 쇄국 정책을 펼치고 있던 터라 호쿠사이 본인은 결코 자신의 작품이 서구에 미치는 영향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지만 이후 호쿠사이의 작품은 고흐부터 드뷔시에 이르기까지 당대 서구 문화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보스턴 미술관에서 시작해 현재 시애틀 미술관에서 순회 전시 중인《호쿠사이: 영감과 영향》은 호쿠사이가 오늘날까지 서구 문화에 행사하고 있는 영향력을 잘 보여주는 전시로, 이를 다룬 뉴욕타임스의 6월 22일자 기사를 소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