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11.03 12:22
이 기사는 2023년 5월 5일자 포린어페어스 기사(다트머스대의 스티븐 G. 브룩스 교수와 윌리엄 C. 월포스 교수의 공동기고문)에 대한 지상토론을 정리한 것입니다. PADO는 동 기사를 '다극 체제의 신화'라는 제목으로 완역해 소개했습니다.
토론참여자: 조슈아 쉬프린슨(매릴랜드대 교수), 안-마리 슬로터(프린스턴대 교수, 전 국무부 정책기획국장), 빌라하리 카우시칸(전 싱가포르 주UN대표), 로버트 코헤인(프린스턴대 명예교수), 스티븐 브룩스(다트머스대 교수), 윌리엄 월포스(다트머스대 교수)
미국시대의 종말 - 조슈아 쉬프린슨
'다극 체제의 신화'에서 스티븐 브룩스와 윌리엄 월포스는 미국이 강대국 서열에서 자유낙하 중에 있다는 세간의 생각에 도전한다. 그들이 보기에 미국은 아직 "강대국 위계의 최정상에서 중국보다 훨씬 높은 곳에, 다른 나라들에게는 까마득히 높은 곳에 있다." 그들은 세계가 "현재도 양극체제나 다극체제가 아니며, 앞으로도 그렇게 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필자들이 미국을 세계 최강의 국가라고 주장하는 것은 옳다. 하지만 현재의 권력 배분이 일극적이라는 그들의 기본적인 주장은 틀렸다. 사실 필자들이 권력 배분 상태를 측정하기 위해 택했던 지표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오히려 정반대의 결론이 나온다. 일극체제는 과거의 산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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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룩스와 월스포스의 주장은 세 가지 기본 가정에 근거한다. 첫째, 가장 기본적인 힘의 배분, 즉 한 나라의 경제적, 군사적 능력을 보면 현재 미국과 중국 두 나라만이 강대국이라고 불릴 만하다. 둘째, 미국의 기술적 우위와 중국이 이를 따라잡기가 어려운 상황 때문에 중국은 미국과 같은 급의 경쟁상대가 못 된다. 셋째, 현재의 국제체제에는 미국의 행동 자유를 견제할 수 있는 대항 동맹도 없고 단독 무력을 갖춰놓은 나라도 없다. 양극이나 다극체제에서는 극(極)들이 서로 견제하는 메커니즘이 작동하는데, 미국의 행동을 실제로 견제하는 메커니즘이 보이지 않는 것을 보면 일극체제가 계속 유지되고 있음이 분명하다고 그들은 주장한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들은 하나 하나가 의심스럽다. 첫째, 1등 국가와 어느 정도 비슷한 경제력, 군사력을 가져야만 하나의 극으로 계산해줄 수 있다는 주장은 매우 이상하다. 역사 속에서 극이라고 부를 수 있는 강대국은 꼭 양적으로 1등 국가와 비슷해야 했던 것은 아니다. 이들 국가는 (비슷한 양이 아니지만) 어느 정도 충분한 경제력, 군사력과 외교적 역량 및 정치적 영민함으로 갖고 평화시에는 다른 강대국들의 계산에 영향을 미치고 전시에는 다른 강대국들에게 따끔한 맛을 보여줄 정도면 하나의 극으로 부를 수 있었다. 이렇게 극을 넓게 정의해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일본제국, 소련이 모두 국제체제에서 하나의 "극"으로 취급되었던 이유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이들 국가는 각 시대의 최강 국가보다 상당히 약했음에도 불구하고 전쟁과 평화의 방정식에 상당한 영향을 미칠 정도로 충분한 힘을 가졌던 것이다.
국가들의 힘을 경제, 군사, 기술, 외교 등 전반적으로 비교평가해 어느 정도 이상이 되면 하나의 극으로 인정하는데, 극이라는 것은 결국 핵심 문제를 둘러싸고 세계 정치의 흐름을 바꿀 수 있을 정도의 국가 역량을 의미한다. 그런데 전반적인 경제력이나 군사력도 물론 중요하지만, 분석가들은 국력을 판단하는데 그것만을 전부로 여기진 않는다. 오늘날엔 경제적 다양성(경제가 너무 특화되어 있는 것은 취약성이다), 지리적으로 유리한 위치, 핵무기 보유 여부가 국력 평가에 특히 중요한 요소다. 예컨대 인도는 큰 경제규모, 유리한 지리적 위치, 강력한 핵무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전반적인 경제력과 군사력이 약함에도 불구하고 국력 순위는 높아진다. 일본 역시 핵무장이 아직은 실현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핵심요소에서 인도와 마찬가지의 유리함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랭킹이 높아진다. 중국은 불리한 지리적 위치를 놀라울 정도의 재래식 군사력과 커지고 있는 핵무장이 보완하기 때문에 마찬가지로 (아마도 훨씬 더) 높은 랭킹을 받게 된다.
중국의 기술적 낙후성이 브룩스와 월스포스가 주장하는 것만큼 강대국 지위를 얻는데 방해가 되는 것은 아니다. 한 나라가 최첨단 기술을 개발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는 차치하더라도 강대국이 되는데 꼭 기술선도국이 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예컨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소련은 1914년의 기준에서도 상당히 낙후되어 있었지만, 이들 국가는 유럽의 다극성을 구성하는 핵심요소였다. 영국은 독일과 달리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에 제2차 산업혁명을 이끌어내지 못했지만 이 시기에 여전히 하나의 극이었음은 분명하다. 소련은 한 번도 기술적으로 미국 가까이 가본 적이 없었지만, 냉전시기 내내 하나의 극으로서 미국의 경쟁상대로 여겨졌다.
한 나라가 강대국이 되는데 필요한 것은 주요 국제적 결정에 영향을 미치기에 "충분한 수준의" 기술로 충분한 양의 제품을 생산하는 능력이다. 이러한 점에서 중국이 짧은 시간에 얼마나 멀리 달려왔는지가 특기할 만한다. 중국은 1980년대 후반 제대로 된 컴퓨터산업이라는게 거의 없었다. 하지만 중국은 현재 세계경제를 움직이는 컴퓨터 반도체를 생산하는 주요 생산국 중 하나다. 다른 분야에서도 양상은 비슷하다. 미국의 정책결정자들이 중국의 기술력에 대해 우려를 갖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중국이 괜찮은(꼭 최고로 좋은 것은 아니더라도) 제품들을 많이 생산하고 있는 상황에서 미국과 중국이 전쟁에 돌입하게 될 때 미국의 기술적 우위가 얼마나 전쟁결과에 결정적일지는 알 수가 없다.
사실 미국은 현재의 중국을 다루는 것만으로도 벅찰 지경이다. 브룩스와 월포스가 미국은 어느 나라든 견제할 수 있지만 다른 나라가 미국을 견제하는 것은 어려울 것이라고 주장했는데, 그것은 옳은 이야기다. 하지만, 힘의 분포를 설명하는 것은 견제의 강도가 아니라 견제의 존재다. 그런 점에서 미국의 행동 자체가 지정학적 제약과 저항에 직면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으며, 이 모든 것이 현재의 국제체제가 일극이 아님을 설명한다. 미국의 국방예산이 1조 달러에 육박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워싱턴의 정책결정자들과 전문가들은 중국의 경제력, 군사력의 증가로 인해 미국이 동시에 아시아, 유럽, 중동 세 군데에서 안보 공약을 이행할 수가 없게 되었다고 말하는 것이 일상적인 것이 되었다. 그 결과, 부족한 안보 자원을 어디에서 어떻게 써야 하는지 워싱턴에서 어려운 논의가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한편 미국은 중국에 맞서는 일에 인도, 일본, 그리고 기타 아시아 국가들을 동원하려 하고 있다. 이 세상을 미국이(홀로) 지배하고 있다면, 이런 노력은 필요 없을 것이다.
[PADO 트럼프 특집: '미리보는 트럼프 2.0 시대']
힘을 계산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브룩스와 월포스의 주장은 미국의 현재 실제 정책들과도, 그리고 힘에 대한 대한 좀 더 포괄적인 관점과도 일치하지 못 한다. 분석가들은 세계가 양극인지 다극인지 논의할 수 있다. 하지만 일극은 더 이상 아니다.
조슈아 쉬프린슨은 매릴랜드대학교 공공정책대학의 부교수이며, 케이토연구소의 객원 선임연구위원이다.
극'을 넘어 - 앤-마리 슬로터
나는 세계정치에 대해 매일밤 악몽을 꾼다. 21세기가 끝날 무렵, 이르면 더 일찍, 산불, 홍수, 역병, 가뭄, 기근, 그리고 수억 명의 이주난민들에 의한 끝없는 갈등에 의해 현재의 우리 삶이 그 원래 모습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변해버릴지도 모른다는 악몽이다. 이렇게 망해버린 세계 위에 서서 미국은 중국에 승리했노라 외치고 미국이 여전히 "넘버원"이라고 주장하며 국기를 흔들고 있는 악몽이다.
브룩스와 월포스의 기고문은 나의 비관주의를 더욱 악화시킨다. 그들은 마치 1985년이나 1945년에 글을 쓰고 있는 듯하다. 그들은 국제정치를 마치 강대국들의 게임인 것처럼 접근하면서, 여러 국가들 사이의 힘의 분포가 이 게임이 펼쳐지는 운동장의 크기, 위치, 기울기 등을 모두 결정하는 것처럼 다룬다. 그 기고문의 요점은 세계가 여전히 일극체제이며, 미국의 군사력과 경제력이 수치상으로는 상대적으로 약해졌음에도 불구하고 세계를 주도하는 유일한 극으로 건재하다는 것을 증명하겠다는 것이다. "세계는 현재 양극도 아니며 다극도 아니고, 앞으로도 마찬가지다." 이것이 그들의 주장이다. 하지만, 이상 기온으로 죽어가고 홍수와 산불을 피해 도망가는 사람들은 아마도 동의하지 못할 것이다. 세계는 두 개의 극을 가지고 있다. 북극과 남극이다. 양극의 얼음은 빠르게 녹고 있고, 우리 모두에게 한치 앞도 안 보이는 위험이 되고 있다.
바이든 행정부가 2022년 국가안보전략 보고서에서 지적하듯, 기후변화, 팬데믹, 에너지 고갈 같은 인류생존을 위협하는 "초국적" 위협들이 브룩스와 월포스가 다루는 전통적인 지정학 위협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거의 같은 정도의 무게를 가지고 공존하고 있다. 물론 일극이니 양극이니 다극이니 하는 잣대로 정의되는 힘의 분포는 여전히 관리들이 국가정책을 만들 때 고려해야 할 핵심적인 조건인 것은 맞다.
하지만 도대체 '극'이라는 것이 무엇인지가 문제다. 흥미롭게도 브룩스와 월포스는 오직 국가만을 염두에 두고 있는 듯하다. 그래서 그들은 유럽연합(EU)이 아예 존재도 안 하고 있는 듯 글을 썼다. 이것은 엄청난 구멍이다. 그들식의 계산에 따르더라도 유럽연합은 강대국에 가까운 존재다. 또 앞에서 말한 인류생존의 위협들을 막는데 가장 열심히 노력하는 존재가 유럽연합인데도 그들은 유럽연합을 계산에 넣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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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 상황
브룩스와 월포스는 '다극'에 대해 명쾌하게 정의한다. "셋 이상의 비슷한 힘을 가진 국가들이 주도하는" 국제 체제라는 것이 그들의 정의다. 그들은 현재 "미국과 중국이 의심할 여지 없이 세계에서 가장 강한 두 나라인데, 다극이 되려면 적어도 한 나라가 추가로 이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는 그들은 두 개의 도표를 제시하는데, 하나는 GDP 데이터이고, 다른 하나는 군사비지출 데이터로서 이들 자료를 보면 미국과 중국이 프랑스, 독일, 인도, 일본, 러시아, 영국에 훨씬 앞서 있다. 이러한 자료들은 또한 미국이 중국에도 훨씬 앞서 있다는 점도 보여준다는 것이 그들의 이야기다.
이 도표에 유럽연합을 포함시켜 다시 봐보자. 그러면 두 사람의 주장이 흔들리기 시작할 것이다. 국제통화기금(IMF)에 따르면 미국의 GDP는 26.9조 달러, 중국은 19.4조 달러, 그리고 유럽연합은 17.8조 달러다. 인도와 일본도 꽤 큰 경제를 가지고 있는데, 이 두 나라는 3조 내지 5조 달러 정도다. 미국은 2, 3등의 경쟁자들에 꽤 앞서 있긴 하다. 하지만 미국, 중국, 유럽연합과 다른 나라들 사이의 차이는 더욱 크다.
미국은 군사비지출에서 중국과 유럽연합을 크게 앞서고 있다. 하지만 유럽의 군사비지출은 중국과 큰 차이가 없다. 2022년의 유럽방위청(EDA) 보고서에 따르면 26개 유럽연합 회원국들이 공개한 군사비 지출은 모두 합쳐 2140억 달러(2021년)로서 중국의 2420억 달러(2022년)와 큰 차이가 없다. 우크라이나에서 전쟁이 발발했기 때문에 유럽방위청 보고서 수치도 훨씬 높아질 것이다. 유럽의 공동 방위 지출도 꾸준히 증가하고 있고(시작점이 낮긴 했지만), 유럽연합은 공동안보방위 정책에 따라 해외에서 12개의 비군사 작전과 9개의 군사작전을 펼치고 있다.
종합적으로, 브룩스와 월포스의 '일극체제' 주장은 순수 군사력 부문에서 가장 설득력이 있다. 이 부문에서 미국은 실제로 다른 나라들을 크게 앞서고 있고 2, 3위 국가들보다 3배 가까이 군사비를 쓰고 있다. 하지만, 미국이 나토(NATO)나 유럽연합을 같은 편에 두지 않은 채 우크라이나를 지키기 위해 러시아와 싸운다든지 대만을 지키기 위해 중국과 싸운다든지 한다면 이길 확률은 상당히 낮아질 것이다. 이라크에서의 전쟁이 입증했듯, 미국은 동맹국들에게 함께 싸우자고 명령할 수가 없다. 나토는 주요 유럽 국가들을 포함한 회원국들의 합의로 움직인다. 유럽연합은 나토의 합의를 만드는 과정에서 핵심적 역할을 한다.
국제적인 힘의 분포를 계산하는데 오직 국가만을 바라보는 사람들로 브룩스와 월포스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관점은 미국의 많은 국가안보 연구자들 및 정책입안가들이 공유하고 있고, 이들 역시 지속적으로 유럽연합을 무시하거나 평가절하한다. 하지만 유럽연합은 국가적 속성을 많이 가지고 있다. 우선 통화를 가지고 있고(세계에서 두번째로 많이 통용되고 있는 통화이기도 하다), 법률을 만들 수 있고, 외교사절을 해외에 파견하고, 공동의 외교안보 정책을 가지고 있다. 유럽연합이 어떤 성격의 존재인지는 차치하고, 유럽연합가 엄청난 영향력을 가진 국제정치라는 게임의 주요 선수임은 분명하다. 유럽연합은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규제권력이며 기후위기가 증폭되고 확대됨에 따라 이러한 지위는 더욱 중요해지고 있다. 유럽연합의 경제 원조는 2014년에서 2022년까지 우크라이나의 경제적 붕괴를 막아줬고, 전쟁이 끝난 후 우크라이나 재건의 많은 부분을 유럽연합이 담당할 것이다. 그리고 유럽연합의 대러 제재는 미국의 제재보다 중요한데, 러시아와의 무역은 유럽연합이 미국보다 크기 때문이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유럽연합이 안정화세력이라는 점이다. 왜인지 의문이라면, 유럽이 없는 세계를 상상해보시라. 유럽연합의 회원국들은 나토를 통해 미국의 동맹이 될 수 있지만, 경제에서는 경쟁자가 될지도 모른다. 유럽이 유럽연합으로 묶여 있지 않았다면 중국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벌어지기 이전에 이미 그렇게 했듯 동남부 유럽 국가들을 자기 편으로 끌어당길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러시아는 유럽 국가들을 분열시킬 수 있을 것이다. 예컨대, 몇몇 주요 유럽연합 회원국들은 유럽의 타협 메커니즘이 없었다면 러시아의 석유와 가스에 의존을 낮추는데 훨씬 더 저항했을 것이다.
유럽연합의 본보기
유럽연합은 분석가들로 하여금 국가를 어떻게 정의할 것인지 다시 한번 생각해보도록 한다. 미국도 처음 만들어졌을 때 그랬다. '미합중국'의 헌법은 회원국1들의 "더욱 완벽한 연합"을 만들어 내도록 설계되었다. 물론 유럽연합과 합중국 사이에는 중대한 차이가 있다. 호주, 캐나다, 독일, 미국 등은 연방이기 때문에 궁극적으로 중앙정부에 복종해야 하는 반면, 유럽연합은 국가들의 네트워크로서 개별 회원국은 때에 따라 함께 움직이기도 하고 개별적으로 움직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유럽연합은 다른 어떤 지역 기구보다 회원국에 대한 강한 통제력을 갖고 있고, 이러한 점에서 유일한 존재라 할 수 있다.
계속 유일한 존재로 남을 수는 없을 것이다. 이러한 네트워크 국가연합체를 만들어오면서 유럽연합은 좋은 본보기가 되었고, 다른 지역기구들이 모방하기도 하고 자기식으로 변용하기도 해왔다. 예컨대, 2002년 기존의 아프리카단결기구(OAU)를 대체해 만들어진 아프리카연합(AU)은 아프리카 대륙의 사회적, 경제적 통합을 강화하려 한다. 어떻게 이러한 목표를 달성할지를 논의하기 위해 아프리카연합과 유럽연합의 장관 및 집행위원회 위원들은 정기적으로 회합을 갖는다. 1967년에 결성된 동남아의 아세안(ASEAN)은 개별국 장관들의 네트워크가 전적으로 통제하기 때문에 별도의 회원국으로부터 독립된 기관의 권한이 없다. 하지만 최근 몇 년간 아세안은 좀 더 강한 조율 메커니즘을 갖췄는데, 회원국들간에 체결된 강력한 자유무역협정이 그 중 하나다. 아세안은 또한 중국, 일본, 한국을 포함해 '아세안+3' 포럼을 만들었고, 이를 통해 모든 회원국의 외무 장관들이 안보 의제를 함께 논의한다.
현장의 외교정책 실무가들은 이러한 지역기구들이 성공할 것을 바라야 한다. 강력한 지역연합들은 국제기구들과 각국 정부들 사이에서 꼭 필요한 중개자가 될 수 있다. 이들은 모든 나라들의(적어도 다수 나라들의) 협력을 요하는 전지구적 문제를 해결하는데 꼭 필요하다. 심지어 그 막강한 미국조차도 북미의 생태계 회복탄력성, 생물다양성, 보건, 안전을 강화하는데 캐나다와 멕시코의 협력이 필요하다. 이러한 점은 금년 여름에 더욱 분명해졌는데, 미국은 산불을 끄기 위해 캐나다로 소방관들을 보냈다. 캐나다 산불의 연기가 주요 미국 도시들까지 뒤덮었던 것이다.
브룩스와 월포스는 지역 기구들이 유럽연합 수준으로 단합하려 하는 상황에서 지역 기구들을 계속 무시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두 필자는 그들의 기고문에서 단순한 영향력("남들로 하여금 당신이 원하는 것을 하게 만드는 능력")과 힘을 구분한다. 이들에게 힘은 국가의 것이어야 하며 수치화되어야 한다. 하지만 이러한 구분은 무의미하다. 힘은 여러 요소를 갖는다. 영향력도 힘의 요소 중 하나다. 지구를 위해, 그리고 인류생존에 대한 다양한 위협에 대처하는 인류의 능력을 위해 다행인 것은, 개별 국가의 주권과 인류 전체의 단합을 균형잡는 기구들의 영향력이 우리의 미래의 결정을 도울 것이라는 점이다.
안-마리 슬로터는 '뉴아메리카'의 대표이자 프린스턴대 명예교수이며, 2009년에서 2011년까지 미 국무부 정책기획국장을 역임했다.
다양한 국가들이 다양한 상황에서 극을 형성할 수도 있다 - 빌라하리 카우시칸
브룩스와 월포스는 미국이 예전같진 않지만 여전히 의심의 여지없이 국제질서의 정상에 위치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세상에 존재하는 "제대로 작동하는 동맹" 체제는 소국들을 미국에 연결시키고 있고, 그 기본적인 역학에 따라 이러한 동맹체제가 계속 팽창하고 있다고 한다.
이러한 주장은 정확한 주장이긴 하지만 핵심적인 것은 아니다. 미국은 오랫동안 많은(아마도 대부분의) 경제적, 군사적 지표에서 지배적인 나라로 남아있게 될 것이다. 하지만 두 사람이 다극성을 신화라고 결론짓는 것은 다극성을 피상적이고 너무 형식적이고 대체로 고리타분한 방식으로 이해하기 때문이다. 브룩스와 월포스는 주로 19세기와 20세기의 경험에 의존해 다극성을 정의하면서 공식적인 동맹과 군사비지출이나 GDP 같이 힘의 물리적 측면을 너무 강조하면서 다른 것들을 무시한다. 하지만 오늘날 힘은 핵심 자원들의 통제, 비공식적 협조 같은 것에도 똑같이 의존한다. 이러한 기준으로 보자면 현재의 세계는 브룩스와 월포스가 믿고 있는 것보다 더욱 다극적이다.
출구는 없다
현재의 국제체제는 한번도 경험해본 적이 없는 정도의 복잡성과 밀도를 가진 글로벌 공급망으로 특징지워진다. 이 공급망은 친구와 적을 구분하지 않고 세상을 묶고 있으며 친구와 적의 구분 자체를 애매하게 만들어버린다. 미중 경쟁과 우크라이나 전쟁이 이 공급망에 압박을 주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국가안보에 중요한 몇 가지 기술을 제외하고는 그 어떤 것도 공급망의 세계화를 과거로 되돌리지 못했고, 앞으로도 못할 것이다. 상호의존을 폐기하는 비용은 너무나 높기 때문에 시도 조차 하기 어렵다.
몇몇 미국 정책결정자들은 미국과 미국의 동맹국들이 중국과 경제적 연결을 끊기를 바라고 있다. 하지만 그들이 중국에 대해 어떤 우려를 갖고 있든지, 어떤 나라도, 심지어 미국의 최우방 조차도 중국과 교류 하는 것을 멈추려 하지 않을 것이다. 많은 나라들은 상호의존의 리스크를 낮추려 노력할 뿐이다. 예컨대, 중국의 공식통계에 따르면, 2021년 중국은 전 세계 제조업 생산의 30퍼센트 가량을 담당하고 있고, 그렇기 때문에 미국을 포함한 그 어떤 나라도 사실상 세계의 공장 역할을 맡고 있는 이 나라와 거래를 줄이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이 통계를 보면 중국은 수출에 고도로 의존해 있고, 따라서 중국 역시 더욱 자립적인 경제를 만드는 데에는 심각한 어려움이 있을 것이다.)
브룩스와 월포스가 지적하듯, 미국은 중국보다 훨씬 강력한 군대와 경제력을 갖고 있다. 하지만 현재와 같은 서로 연결된 세계 속에서 다극성은 군사적, 경제적 대칭성을 어느 정도 요구하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국제적 자원을 통제하고 있거나 특정 부문에서 중요한 국제적 역할을 하는 국가는 간단히 무시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예컨대, 군대나 GDP만 본다면 싱가포르를 어떤 종류로든 하나의 "극"으로 본다는 것은 말도 안되는 일이다. 하지만 금융의 중심지로서, 그리고 세계 무역과 석유정제의 허브로서(석유를 한 방울도 생산하지 않지만), 싱가포르는 상당한 국제적 지위를 갖고 있다. 싱가포르보다 큰 호주, 인도, 일본, 사우디아라비아, 한국 같은 나라들은 당연히 훨씬 더 큰 영향력을 갖고 있다.
소용돌이
브룩스와 월포스는 미국에 필적할 만한 나라는 아직 없다고 말했는데, 정확한 이야기다. 어느 나라도 미국의 생존을 위협할만한 힘은 없다. 러시아가 위험한 나라인 것은 맞지만, 지금은 쇠락하고 있는 중이다. 중국이 무서운 경쟁자임은 분명하지만, 탈냉전 세계화의 최대 수혜자이기 때문에 세계화의 밥상을 뒤엎고 급진적으로 새로운 시스템을 추구할 이유가 없다. 그런 것을 원한다고 할지라도 중국이 국제질서의 규칙을 완전히 새로 쓸 힘이 있는지는 의문이다. 중국은 한 세기 이상의 약했던 시기에 잃어버렸던 세계적 위신과 지위를 되찾기 위해 국제체제를 주도하겠고 할 수는 있지만, 그 이상은 아니다.
하지만, 미국의 생존을 위협하는 나라가 없다는 것이 다극성이 당분간 "아주 먼 미래의 이야기"로 남을 것이라는 필자들의 주장을 입증하는 것은 아니다. 사실 이러한 생존의 위협이 없는 경우, 미국은 국제질서를 지탱하기 위해 애써야 할?따라서 국제질서를 주도하기 위해 애써야 할?강력한 이유가 없다. 그 결과 1991년 이후 대부분의 미국 관리들은 미국 국내로 시선을 돌리기 시작했고 국제문제보다는 국내문제에 관심을 집중시키게 되었다. 이러한 관심의 변화는 미국의 가장 가까운 동맹과 파트너들로 하여금 세계문제에 대해 미국이 얼마나 관심을 보일지에 대해 걱정스럽게 만들었고, 갈수록 양극화되고 불안정해지는 미국 국내정치 역시 걱정을 가중시켰다. 중국과 러시아에 대한 우려때문에 동맹들과 파트너국가들은 현재 미국을 중심으로 뭉쳐 있긴 하지만, 미국이 앞으로도 예전과 똑같은 동맹으로 남을지에 대한 신뢰는 무너지고 있다. 장기적으로, 미국의 동맹국들과 파트너들은 미국으로부터 독자적으로 움직이려 할 것이고 중국, 러시아 등과의 관계에서 좀 더 운신의 폭을 확대하려 할 것이다.
물론 이들 국가들이 미국을 떠나지는 않을 것이다. 미국은 그들의 첫번째 파트너로 남을 것이다. 하지만 21세기에 '미국이 첫번째'라는 것과 '미국이 유일한 극'이라는 것은 같은 말이 아니다. 영향력을 측정하는 방식은 여러 개가 있다. 따라서 '다극'이라는 것도 객관적이면서도 주관적인 현상이 되었다. '다극'은 이들 국가들이 미국과의 관계와 무관하게 자신들의 전략적 선택을 어떻게 인식하고 자신들의 자율성을 어떻게 실천해나갈 것인지에 달려있다. 예컨대 미국이 환태평양동반자협정(TPP)에서 발을 뺐을 때 이 다자간 무역협정은 무너지지 않았다. 그 대신 일본이 바통을 이어받아 미국을 제외한 TPP의 원 회원국들을 모두 담아낸 승계 협정을 만드는 작업을 주도했다. 중국이 이후 이 무역 블록에 참여하겠다고 신청했고, 몇몇 회원국들은 중국을 참여시키자고 제안하기도 했다. 이들이 이런 제안을 한 이유는 간단했다. 그들은 중국 시장에 들어가고 싶었던 것이다.
국제질서는 실제로 다극적이다. 다양한 안건을 놓고 여러 국가들이 자국의 이익을 위해 뭉쳤다가는 흩어지고 또 다시 뭉친다. 매우 중요한 사안들에 대해서도 하나의 나라가?심지어 미국도?무대를 혼자 주도할 수는 없는 것이 오늘날의 국제질서다.
빌라하리 카우시칸은 싱가포르의 외교관으로서 주유엔 대표를 역임했다.
나라와 나라를 묶는 것들 - 로버트 코헤인
브룩스와 월포스가 미국이 여전히 세계에서 가장 힘이 센 나라라고 주장한 것은 맞는 말이다. 중국이 당분간은 미국을 따라잡지 못할 것이라는 그들의 주장도 옳다.
세계에 대한 그들의 묘사는 대체로 옳지만, 이러한 이야기가 현장의 정책결정자들에게는 그다지 유용할 것 같지는 않다. 특히 미중전쟁을 막으려 애쓰는 관리들에게는 별로 필요할 것 같지 않다. 이 무시무시한 미중전쟁 시나리오는 미국과 중국 사이의 이견이 분쟁으로 확대되어 가는 것에서 발생하지 두 나라 사이 힘의 균형의 변화에서 발생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분석가들은 세계가 일극인지 양극인지 다극인지보다는 미중 관계의 성격에 대해 더욱 많은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분석가들은 이 두 나라가?그리고 각 지역의 나라들이?어떤 식으로 상호의존되어 있는지 생각해봐야 한다. 미중관계의 맥락 속에서 서로 의존되어 있다는 사실 그 자체가 분쟁의 잠재력을 키우고 있다. 각 국가가 국익을 추구하는 것이 상대방 국가의 행동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양국 관계의 모습을 살피면서 양국 정책결정자들은 양국의 국익, 이에 따른 상호의존의 양상은 부분적으로는 주관적이라는 점을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국익이니 상호의존의 양상이니 하는 것들은 객관적인 힘의 자원들뿐만 아니라 상대방에 대한 인식에도 영향을 받는다. 국익과 상호의존이 이렇게 주관적일 수 있기 때문에 한 나라가 세상을 주도하더라도 세계는 본의아니게 분쟁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세상을 움직이는 구체적 요소들
공저인 '힘과 상호의존'에서 조셉 나이(Joseph Nye)와 나는 세계 권력정치가 여러 국가들이 가진 물적 '자원'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국가들 사이의 '관계'에 의해 규정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생각에 따르면, 상호의존 관계에서 덜 의존적인 행위자의 힘이 강해진다. "특정 관계에서 덜 의존적인 행위자는 종종 중요한 정치적 자원을 갖게 되는데, 관계의 변화에 상대방보다 덜 취약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공저에서 사용했던 표현이다. 하지만 군사력, 경제력, 또는 한 나라가 내세우는 가치의 매력(소프트파워) 등 비대칭적 상호의존의 중요성은 관계의 성격에 따라 달라진다. 주요 국가들의 관계는 다차원적이기 때문에, 한 나라가 어떤 부문에서는 우위를 가지면서도 다른 부문에서는 열위에 있을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어떤 나라가 어떤 부문에서 우위를 가지고 있는지는 국가 사이의 관계가 위기를 맞을 때까지는 드러나지 않는다.
브룩스와 월포스가 주목하는 중국과 미국의 힘의 자원들이 어떤 방식으로 이들 국가의 전략 및 양국의 상호행동 결과에 영향을 미칠지를 이해하려면 분석가들은 이 두 나라의 실제 행동에 영향을 미치는 다양한 '맥락'들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특히 (1) 각국이 '인식하는' 이해충돌, (2) 충돌을 제한하고 관리할 수 있는 제도가 존재하는지 여부, (3) 국내정치가 지정학적 전략과 어떻게 만나는지, 그리고 마지막으로 (4)강대국 행위의 소프트파워 차원의 효과들을 모두 검토할 필요가 있다.
이 네 가지 차원 중 세 가지에서 세계는 20년 전보다 더 위험해졌다. 중국과 미국의 '인식된' 이해충돌은 시진핑이 2013년 중국 국가주석에 취임한 이후 훨씬 심해졌다. 특히 중국은 대만을 통제하겠다는 데에서 훨씬 의욕적이며, 미국은 대만 방어에 더욱 의지를 굳히고 있다. 그동안 중국의 군사력이 강화되면서 중국의 대만 공격 능력도 강해졌다. 이렇게 중국의 야심과 객관적 힘이 강해지면서 미국을 끌어들일 양안간 전쟁의 가능성도 높아졌다.
이와 동시에, 미중(美中) 관계에는 1962년의 쿠바 미사일 위기 발생 이후 오랫동안 미소(美蘇) 관계를 규정지어왔던 핵전쟁 일보 직전의 섬찟한 기억, 제도적 방지책, 확립된 상호절제의 패턴 같은 것이 없다. 미국과 중국 모두 국내정치가 갈수록 위태로워지고 있다. 미국에서는 양당 정치가들이 중국에 대해 강한 모습 보여주기 경쟁을 펼치고 있고, 중국에서는 '전랑'(戰狼) 외교(이 외교 방식에 따라 중국 관리들이 해외의 중국 비판자들을 공격적으로 비난한다)를 주창하는 사람들이 활동을 더욱 넓히고 있고, 중국 최고 지도부로부터 지원을 받고 있다. 오직 소프트파워 차원(자국이 상대방 국가보다 더 평화우호적임을 설득하는 능력)에서만 미중이 의욕을 보이고 있고, 이것이 자제와 타협에 조금이나마 유리하게 작동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중국과 미국이 여차하면 군사충돌로 나아가는 것은 쉽게 상상할 수 있다.
브룩스와 월포스가 미중 사이의 하드파워 관계를 평가한 부분은 맞다. 하지만 그들은 더욱 중요한 양국 관계를 놓치고 있다. 중국과 미국의 하드파워 자원들의 대차대조표를 꼼꼼히 살펴본다고 해도 가장 중요한 전쟁 가능성의 원천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다. 힘은 맥락적이기 때문에 그런 대차대조표의 의미는 분쟁이 발생할 상황에 달려 있게 된다. 미국은 중국이 대만을 정복하려는 것을 막는 것보다는 중국이 미 본토나 호주, 일본을 공격하는 것을 더 쉽게 막아낼 수 있다.
결국, 상승하는 중국의 힘과 애매모호한 미국의 힘이 낳는 불확실성은 양국의 하드파워 관계의 대차대조표보다 중요하다. 분석가들이 내 말을 이해 못하겠다면, 1914년 7월을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당시의 전문가들이 각국의 상대적인 경제적, 군사적 힘보다 역동적인 불확실성과 국제체제에 항상 내재하는 예측불허의 상호행동이 가진 잠재력에 좀 더 관심을 가졌더라면 좋았을 것이다. 2023년에도 외교정책을 연구하고 실천하는 사람들은 객관적인 힘의 자원들을 계산하는 일보다 군사기술의 변화와 위기의 역동성이 낳는 위험하고 예측불허의 상호작용 잠재력에 좀 더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
로버트 코헤인은 프린스턴 대학의 국제관계 명예교수다.
브룩스-월포스의 반론
'다극 체제의 신화'에서 우리는 만약 "극"이라는 용어를 원래 이 용어를 창안한 학자들이 사용했던 그대로 사용한다면?즉, 국가가 자국의 목적을 추구하기 위해 사용하는 힘의 원천들의 분포?현재의 국제체제는 양극이나 다극보다는 여전히 일극에 가깝다고 주장했다. 미국은 가장 가까이에서 쫓고 있는 경쟁자들보다 훨씬 힘이 세다. 미국은 세계 최강의 군대와 세계 최대의 경제를 자랑한다. 미국은 세계를 주도하는 테크 기업들의 대부분을 가지고 있다. 미국은 세계의 동맹체제를 주도하고 있다. 그 어떤 나라도, 심지어 중국 조차도 가까운 미래에 미국과 같은 급이 될 수 없다.
우리는 현재의 체제를 "부분적 단극"으로 이름 붙인 것은 미국의 주도권이 여전히 막강하긴 하지만 힘의 격차는 소련 붕괴 직후에 존재했던 "완전한 단극" 상태에 비하면 많이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렇게 세계를 규정하자 몇몇 저명 학자들이 반론을 제기했다. 우리의 원 기고문에 대해 조슈아 쉬프린슨, 안-마리 슬로터, 빌라하리 카우시칸, 로버트 코헤인은 우리가 내린 미국의 힘에 대한 평가와 그것의 의미에 대해 비판했다. 그들은 세계가 더 이상 단극이 아니거나 단극이라고 해도 현재의 단극은 그다지 큰 의미를 갖지는 않는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들은 그렇다면 '다극'이 무엇인지에 대해 모두가 납득할만한 대안적 개념규정을 제시하지 못했다. 그들은 일극이 국제적으로 별로 의미 없다는 것을 증명하지도 못했다. 그들은 미국의 국제질서 리더십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지도 않았다. 그리고 겉으로는 어쨌든, 토론자들 그 어느 누구도 미국이 여전히 세계 최강 국가라는 우리의 핵심 주장에는 반론을 제기하지 않았다.
이중 잣대
쉬프린슨이 단호하게 "단극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결론 지었을 때, 도대체 어떻게 그런 결론이 나온 것인가? 내가 보기에 쉬프린슨이 이러한 결론에 도달한 것은 그의 비판이 대체로 말과 관련된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다른 나라들이 미국과 같은 급의 나라가 되었다고 주장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단지 '단극' 체제를 "미국이 홀로 지배하는" 세계로 재정의할 뿐이다.
이러한 정의가 낯선 것은 아니다. 분석가들은 미국의 힘을 평가하는데는 말도 안 되게 높은 기준을 적용하면서 다른 나라에게는 느슨한 기준을 적용하는 경향을 갖는다. 예컨대, 쉬프린슨은 한 나라가 "평화시에는 다른 강대국들의 계산에 영향을 미치고 전시에는 다른 강대국들에게 따끔한 맛을 보여줄 정도면" 그것이 바로 하나의 극(極)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많은 실제의 싸움도 없이 모든 상황에서 다른 모든 나라에 홀로 맞서 이길 수 있는 나라는 역사상 한번도 존재한 적도 없고 앞으로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외교정책을 만들때 다른 나라들의 예상되는 영향에 대해 생각할 필요가 없는 나라가 존재한 적도 없고 앞으로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예컨대, 냉전이 끝난 직후의 몇 년간을 생각해보자. 당시 모든 이들은 미국이 역사상 전례 없는 우위를 가지고 있음에 대해 동의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과 러시아는 쉬프린슨이 미국 외교정책 선택에 영향을 미치기에 충분한 정도의 기술은 여전히 보유하고 있었다. 중국과 러시아는 미국이 바보처럼 두 나라 중 하나를 공격하는 상황에서라면 미국에게 따끔한 맛을 보여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미국의 권위에 도전하는 유이(唯二)한 나라는 아니었다.
소련의 붕괴 이후 20년간 발행된 포린어페어스 기사들을 훑어만 봐도 미국의 운신의 폭이 때때로 제약을 받았고, 미국의 패권이라는 것도 아프가니스탄, 이란, 이라크, 북한, 세르비아 등 각종 말 안 듣는 나라들에 의해 늘 도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이들 국가들은 핵무기를 개발하거나 테러집단에 돈을 지원했고, 치열한 갈등 상황에서 미국에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맞섰다. 미국이 이라크와 싸우려 했을 때 마음이 내키지 않는 동맹국들은 미국에 도움 요청에 응하지 않았고, 많은 나라들은 미국 주도의 글로벌 경제체제와 갈등의 소지가 있는 지역 블록을 만들었다. 쉬프린슨과 본질적으로 비슷한 단극 개념을 사용하면서, 정치학자인 새뮤엘 헌팅턴은 미국 관리들에게 "단극체제인것 처럼 행동하고 말하는 것을 멈춰라"고 훈계하는 글을 썼다. 1999년이었다.
쉬프린슨에게 있어서는 '극'이 되는 기준이 너무 낮아서 많은 나라들이 극이 될 충분한 자격을 가진다. 우크라이나는 "평화시에는 다른 강대국들의 계산에 영향을 미치고 전시에는 다른 강대국들에게 따끔한 맛을 보여줄" 수 있음을 증명했다. 이란이나 북한 같은 국가들은 1990년대 이후 이런 기준을 이미 충족시켰다. 프랑스와 영국은 모두 냉전 초기에 이 기준을 충족시켰고, 냉전 후반부쯤엔 중국, 독일, 일본도 이 기준을 충족시켰다. 하지만 냉전 기간 중에 세계가 두 개의 극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에는 거의 모두가 동의했다. 미국과 소련이 양극을 이룬 시대였다. 미소 양국 외에 다른 나라들도 이들과 비슷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고 주장한다면 수정주의 역사라고 할 수 있겠다. 쉬프린슨은 개념을 조정해 일극을 없애면서 양극도 함께 없애 버렸다. 그의 개념에 따르면, 세상의 모든 체제는 늘 다극체제가 된다.
쉬프린슨 명제의 문제점?즉, 나라에 따라 극(極)을 구성하는 기준이 바뀐다는 문제?는 미국의 힘에 대한 논쟁에 늘 따라다니는 문제다. 항상 관찰자들은 미국의 영향력이 한계를 가진다는 것과 미국이 직면하는 도전들에 놀란다. 그런데 그들은 미국의 경쟁자들이 더 큰 제약을 받고 있다는 것에는 그다지 놀라지 않는다. 야구에 비유하자면, 분석가들은 미국에 꾸준히 홈런을 칠 것을 주문하고는 홈런을 못쳤을 때를 잊지 않는다. 반면, 그들은 다른 강대국들은 번트만 성공시켜도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정책결정자들, 국방기획가들, 군수업자들이 자신들이 선호하는 것들을 주장할 때(예산 확보를 위해서라도) 이러한 이중 잣대를 사용하는 것은 충분히 이해할만하다. 하지만 학자들이 왜 이런 이중잣대를 채택하는지는 이해할 수 없다. 이런 분석상의 문제를 지적한다고 해서 쉬프린슨이 현재 미국이 직면하고 있는 장애들에 대해 잘못 알고 있다는 것은 아니다. 실제 우리는 쉬프린슨이 오늘날 미국의 전략적 제약을 간략히 잘 정리해 놓은 것에 전적으로 동의하며, 미국이 1990년대, 21세기 첫 10년 동안 직면했던 제약보다 오늘날 더 힘든 제약들이 있다는 그의 관점에 동의한다. 우리는 '완전한 일극' 시대때는 중국과 러시아가 현상(現狀)에 조금이라도 도전하려고 하지 않았지만 '부분적 일극' 시대인 현재 그들은 미국의 힘을 시험해볼 준비가 되어 있다고 말한다. 중국과 러시아가 작고 쉽고 덜 중요한 목표물(러시아가 크름반도를 공격하고, 중국이 현재 남중국해에서 하고 있듯)을 겨냥해 미국에 덤빈다면 그 시도는 성공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현재 미국이 직면하고 있는 수정주의 세력들의 도전도 진정한 다극 또는 양극 체제에서 직면해야 하는 도전들에 비하면 그다지 큰 도전도 아니다.
현재 미국이 직면하고 있는 제약들은 미국의 국익과 관련된 최악의 시나리오를 생각해보면 분명해진다. 만약 미국과 미국의 동맹국들에게 상황이 불리해지고 수정주의 행위자들에게는 유리해진다면,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국토의 1/5를 성공적으로 정복할 수 있을지도 모르고, 중국은 대만을 정복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비록 비극적이고 환영할 만한 것이 못 되겠지만, 그렇다고 이러한 사태전개가 중국과 러시아의 국제적 지위를 질적으로 변화시킬 것 같지는 않다. 하지만 냉전시기 같은 과거의 체제에서는 이러한 것들이 전 세계적 힘의 균형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가능성이 있었고 그러한 불길한 수정주의적 시도에 대한 걱정이 늘 우리와 함께 했었다. 우리의 기고문은 이러한 차이점을 설명했던 것이다.
국제적 권위
슬로터, 카우시칸, 코헤인은 (쉬프린슨과는 다르게도) 미국의 힘에 대한 우리의 묘사 자체에 대해 문제 삼지는 않았다. 힘의 자원을 측정하기 위해 사용된 기준들에 따르면 미국과 같은 급에 있는 나라는 하나도 없으며, 중국이 이 급에 들어오는 것은 먼 훗날의 이야기라는 점에는 그들 모두 동의한다. 대신 그들의 반론은 다른 점에 초점을 맞춘다. 즉 우리의 묘사는 옳지만 그런 일극이 무슨 의미가 있냐는 것이다. 지금처럼 초국적 문제들로 둘러싸여 있는 세계에서 미국이 유일한 초강대국으로 남아 있다는 것이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다. 그들은 미국이 지배적인 세계적 힘으로 남아 있다는 데에는 동의하지만 우리 두 사람이 다른 중요한 국제적 행위자들을 완전히 간과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예컨대, 슬로터는 특히 유럽연합에 관심을 갖는데, 그는 유럽연합을 또 하나의 극이라고 본다. 그는 유럽연합의 중요성을 설파하면서 유럽연합이 미국과 비슷한 규모의 경제를 가지고 있고, 회원국들의 군사력도 합쳐놓으면 상당히 강력하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는 유럽연합이 핵심적인 글로벌 행위자임을 이미 스스로 보여줬다고 주장한다.
물론 우리도 유럽연합이 통상, 글로벌 규제, 국제규범, 국제개발 등에서 주요 행위자임은 인정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극은 아니다. 우리가 21년 전에 포린어페어스에 썼듯, 유럽연합은 "인상적일 정도의 군사 능력"을 갖추고 "하나의 국가처럼 잠재적인 집합적 힘"을 휘두를 수 있어야 비로소 하나의 극이 될 수 있다. 이를 위해서 유럽연합은 "하나의 독립적이고 통합된 방어체제와 방산역량을" 갖춰야만 할 것이며, 이러한 역량을 "재빨리 결단력 있게 행동할 수 있는 권위를 갖춘 하나의 국가 같은 정책결정 기관이 통제해야" 한다. 이러한 기관은 "오직 유럽연합 회원국들의 주권을 정면으로 공격함으로써 얻어지는 것"인데, 놀랍지도 않게 유럽연합은 그런 기관을 결코 만들지 못했다.
사실, 미국에 비해 유럽연합은 21세기 첫 10년때보다도 더 적은 힘의 자원을 갖고 있다. 우리들 중 한명(브룩스)이 학술지 인터내셔널시큐리티 기고문에서 썼듯 외교정책에서 결단력 있게 행동할 수 있는 유럽연합의 능력은 회원국들의 계속되는 독립성과 "전략상의 불협화음"에 의해 심각하게 제약되고 있다. 회원국들은 위협에 대한 인식 같은 중요한 영역에서 입장이 갈리고, 이에 따라 행동조율에 심각하게 제약을 받고 있다. 진정한 '극'이라면 어디서든지 언제든지 행동할 수 있도록 자원을 동원할 능력을 가져야 하는 것이며, 가끔 특정 지역에서 행동을 하다고 해서 극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다른 토론자들은 유럽연합에 대한 우리의 결론에 반론을 제기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들은 힘을 객관적으로 계산하는 것에 회의적이고 대신 '영향'에 좀 더 초점을 맞추기 때문이다. 특히 카우시칸은 국제적으로 영향력을 가진 나라는 하나의 극으로 볼 수 있고 그런 점에서 이러한 극들은 많을 수가 있다고 주장한다. 상대적으로 가난한 행위자가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바람에 미국이 원하던 것을 달성하지 못했다는 흥미로운 이야기들은 찾아내기가 매우 쉽다. 이 때문에 카우시칸은 미국과 중국 등의 힘을 비교한 우리의 분석이 "맞긴 한데 중요 핵심은 아니다"라고 말하면서, 국제질서는 "실제로는 다극적"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카우시칸도 쉬프린슨과 마찬가지로 '일극'을 개념을 조작해 없애버림으로써 우리의 일극체제 주장을 반박하고 있는 것이다. 만약 '일극'이라는 것이 미국이 "무대를 혼자 주도하는" 것을 의미하고 '극'이라는 것이 국가들이 "자신들의 전략적 선택을 어떻게 인식하고 자신들의 자율성을 어떻게 실천해나갈 것인가"에 의해 정의된다면, 다극이 아닌 국제체제는 상상할 수도 없다. 이러한 접근은 쉬프린슨과 같은 문제를 낳는다. 즉, 다극체제는 변수가 아니라 상수가 되며, 힘의 균형이 변하는 것은 변화를 설명하는데 아무런 도움이 못 된다. 힘의 균형이 아무리 변해도 어차피 국제질서는 다극일것이기 때문이다.
극의 힘
카우시칸과 마찬가지로, 코헤인은 극을 따지는 것이 별로 유용하지 않으며, 분석가라면 국가가 가진 힘의 자원을 따지지 않는 것이 더 좋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듯하다. 만약 그렇다면, 우리는 강력하게 반대한다. 극을 따지는 것은 여러 이유 때문에라도 국제관계를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도구로 남아 있다. 극을 분석하는 것은 세계를 묘사하는데 너무 쉬운 방법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세계정치에 대한 이 기본적인 설명이 분석가들로 하여금 매우 중요한 통찰을 가지게 하도록 도울 수도 있다. 극의 효과만을 따로 떼어냄으로서 분석가들은 힘의 균형과 무관한 변수들의 중요성을 더 잘 이해할 수도 있게 된다. 그리고 극에 초점을 맞추면서, 전문가들은 국제정치가 시간 속에서 어떻게 변하는지 추적할 수도 있다.
우리는 20년 이상 극을 측정하기 위해 '미국이 군사, 경제, 기술의 영역에서 어느 정도의 우위를 갖고 있는가?'라는 동일한 기준을 사용해왔다. 우리는 이 격차에 항상 초점을 맞춰왔는데, 그것이 극이라는 개념을 대중화한 케네스 월츠(Kenneth Waltz)를 위시한 학자들의 핵심 통찰과 관련되기 때문이다. 국제정치는 최상단에 대체로 동일한 힘을 가진 국가가 몇 개인가에 따라 다르게 운용된다는 것이다. 이 접근법은 정교함은 상당히 떨어지지만 전문가들로 하여금 오늘날의 세계가 1945년, 1985년, 심지어 2000년의 세계와 비교했을 때 어떤 차이가 있는지를 볼 수 있도록 한다.
대부분의 외교정책 분석가들과 정책결정자들은 극이 중요하다고 인정한다. 그들은 너무 당연시하기 때문에 그것을 자주 논의하지 않으며, 이견이 있을 때만 문제 제기한다. 토론문에서 슬로터는 심지어 극이 "관리들이 정책을 만들 때 고려하는 핵심적인 배경 조건"이라고 썼다. 그렇게 인정했으면서도 슬로터가 우리 기고문에 문제제기한 것은 극에 대한 것이었다. 왜 그런지는 쉽게 알 수 있을 것 같다. 카우시칸이나 코헤인과 마찬가지로 슬로터의 비판은 우리가 세계를 설명하는데 다른 요소들을 무시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 글 어느 곳에서도 극이 모든 것을 설명하는 만능 변수라고 말한 적은 없다. 우리는 극에 대한 연구가 상호의존과 관계의 촘촘한 망을 조심스럽게 살펴보는 것을 대체할 수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우리는 분명히 국제제도, 규범, 아이디어, 글로벌 경제, 기술, 새로운 형태의 상호의존이 세계를 바꾸고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있다. 우리는 단지 힘의 균형에 차분히 초점을 맞추는 작업도 마찬가지로 가치가 있다고 믿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왜 세 개의 토론문은 모두 우리의 기고문이 극의 중요성을 터무니없이 과장하고 있는 것처럼 주장했을까? 이에 대한 정답은 아마도 몇몇 현실주의 계열의 저명 학자들이 극이 경험적으로도 다른 변수들보다 훨씬 중요한 변수라고 주장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 생각에 이러한 주장은 극 개념이 발명된 20세기 중반때에도 잘못된 것이며, 지금은 더더욱 잘못된 주장이다. 카이시칸은 중간 크기의 국가나 작은 국가들도 중요한 일에서 핵심 역할을 할 수도 있고 종종 하고 있다고 강조하는데, 우리는 확실히 같은 생각이다. 작은 나라들은 현재 옛날보다 더 큰 영향력을 행사한다. 특히 거대 제국이 지구 대부분을 지배하고 있을 때에 비하면 확연히 그렇다. 하지만 작은 나라들이 예전보다 중요해졌다고 해서 세계가 다극이거나 극이 더 이상 세계정치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미국이 '넘버 원'
극을 왜 연구해야 하는지 그리고 미국 일극체제의 지속이 왜 중요한지에 대한 마지막 이유를 이야기하겠다. 극에 대한 연구만으로는 큰 전쟁을 막을 수 없다는 코헤인의 주장, 초국적 위협이 충분한 관심을 못 받고 있다는 슬로터의 지적은 모두 옳지만, 세계가 양극이나 다극체제 이면(동시에 미국이 이러한 체제를 주도하지 못한다면), 국가간 분쟁과 초국적 위협들은 지금보다 훨씬 무시무시한 것이 될 것이라는 것도 사실이다.
어느 정도까지는 이러한 점을 망각해도 분석가들은 용서받을 수 있다. 미국이 너무나 오랫동안 막강한 힘의 자원들을 동원해 리더십을 보여왔기 때문에 사람들은 미국의 지도가 없었다면 세상은 어떻게 되었을지에 대해 생각을 잘 못 한다. 우리가 2016년에 발간한 '해외의 미국: 21세기 미국의 세계적 역할'에서 우리는 이러한 가정(미국이 지도하지 않는 세계)을 검토해봤다. 우리가 상상해본 그림은 매우 추했다. 더욱 많은 나라들이 핵무기를 갖게 되었고, 주요 국가들 사이의 전쟁 가능성은 매우 높았고, 국제협력의 전망은 매우 낮았고, 세계경제의 교란은 더욱 잦아졌고 그 피해는 커졌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미국 리더십이 없는 상황에 대해 맛뵈기가 되고 있다. 우리는 영토를 빼앗기 위한 전쟁이 현재 얼마나 드문 것이 되었는지 쉽게 망각한다. 2차 세계 대전 이후 미국이 글로벌 대전략을 추구하던 근 80년 동안 강대국간의 전쟁은 완전히 사라졌다.
미국이 전 세계에 힘을 사용했던 것이 이 상대적 평화의 유일한 원인은 아니다. 하지만 중요한 원인인 것은 분명하다. 미국이 세계 질서를 모양짓기 위해 막대한 힘을 사용하지 않는다면, 세계의 안정은 현재보다 취약해 질 것이다. 코헤인이 묘사하는 공포와 우려들은 훨씬 더 증폭될 것이며, 수십개 국가가 핵무장을 하게 되면서 이러한 문제는 더욱 악화될 것이다. 미국이 세계 힘의 질서 최상단에 자리 잡지 않은 세계는 기후변화나 이주 같은 중요한 초국적 위협을 다루기 위한 국제협력을 해내기 어려워질 것이다. 결국 리더십 없이 공통의 위협이 존재한다는 것만으로 국가들 사이의 협력을 이끌어내는 것은 충분치 않다.
초국적 문제에 대해 좀 더 조율된 행동을 원하는 사람들에게 우리 기고문이 발견한 내용은 희망을 줄 수 있을 것이다. 코헤인이 2012년의 포린어페어스 기고문에서 강조했듯 "전쟁과 기후변화를 망라한 글로벌 문제들을 해결하는데에 협력이 꼭 필요하며, 이러한 협력을 강화하는데에는 리더십이 필수적이다." 하지만 지도적 국가가 나서서 국제협력을 이끌어내려면, 이 지도적 국가가 그런 협력을 원해야 한다. 비록 초국적 문제를 다루는 미국의 노력에 실망할 이유는 많지만, 중국이 그런 지도적 국가가 되었을 때 미국보다 이런 역할을 덜 해낼 것이라고 생각할 이유는 셀 수 없이 많다. 세계가 정말 단극이 더 이상 아니게 된다면, 세계의 많은 문제들은 지금보다 훨씬 더 위협적으로 될 것이다.
스티븐 브룩스와 윌리엄 월포스는 다트머스대 정치학 교수다.
미국이 패자(?者: hegemon)로서 국제질서를 리드해야 한다는 주장은 미국 국제정치학계에서 자주 나옵니다. 반면 미국이 이제는 힘이 예전같지 않으니 국내의 산적한 문제에 좀 더 관심을 돌려야 한다는 신고립주의 주장도 강합니다. 해외 주둔 미군을 철수시켜야 한다는 주장도 강해지고 있습니다. 이런 분위기에서 나온 글이 PADO가 소개했던 '다극 체제의 신화'입니다. 공동 필자인 다트머스대학의 스티븐 브룩스와 윌리엄 월포스 교수는 현재의 체제가 미국이 유일한 극을 형성하고 있는 일극체제이며, 이러한 일극체제가 더욱 안정적이라고 주장합니다. 이번에 소개하는 포린어페어스의 기사는 여러 학자들이 이 글에 대해 비판하고 브룩스, 월포스가 비판에 반박한 내용인데, 학자들이 짧게 토론을 펼치다 보니 좀 추상적이긴 한데, 토론은 신랄합니다. 저렇게 솔직한 토론을 펼치는 미국 학계를 보니 한편으로 부럽기도 합니다. 독자 여러분들도 함께 토론에 참석해보시기 바랍니다. 과연 지금도 미국 일극체제인가? 일극체제, 양극체제, 다극체제 중에서 어떤 것이 좋을까? 미국과 중국이 세상을 나눠서 이끌거나 공동으로 이끈다면 어떤 세상이 될 것인가? 그리고 한국은 앞으로 어떤 나라가 되어야 할 것인가? 싱가포르 외교관 출신인 카우시칸은 싱가포르 같은 작은 나라도 어떤 특정 분야에서 자국의 역량을 발휘해 하나의 극을 형성할 수 있다고 기개를 보이고 있고, 한국은 자국보다 더 큰 국제적 역량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합니다만, 과연 그럴까요? 한국은 어떻게 세계 정치에서 주도적 역할을 할 수 있을까요? 딱딱하고 긴 토론문이지만 찬찬히 한국과 동북아 정세를 생각하면서 읽으시면 재미있게 읽으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