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정학

시진핑이 부친에게 배운 러시아 대하는 법

기사이미지

/사진=로이터/뉴스1

2024.07.19 15:26

Foreign Affairs
icon 14min
kakao facebook twitter

외교가에서 가장 핫한 논의주제 중 하나는 과연 과거 닉슨-키신저가 이뤄냈던 것처럼 미국과 서방이 이번에는 러시아를 끌어내어 중국 봉쇄에 동참시킬 수 있을 것인가입니다. 무엇보다 중국과 러시아가 긴 국경선을 가지고 있어서 근본적으로 둘이 친해지는데 한계가 있다는 것이 러시아 분리가능론의 주요 논거입니다. 반대론자들은 중국과 러시아 사이에 과거 같은 분쟁들이 벌어지지 않고 있어서 양국의 결별 가능성이 안보인다고 주장합니다. 2024년 6월 24일자 포린어페어스 기사는 중러 관계가 과거 중소 관계와 달리 이데올로기보다는 편의와 실용에 기반하고 있어서 더욱 유연하고 그래서 더욱 견고하다고 주장합니다. 이데올로기는 뜨겁기 때문에 쉽게 합치기도 하는데 그것으로 둘러싼 싸움으로 쉽게 분리시키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이 기사는 강력한 미국과 서방이 유라시아 대륙 주변에 포진해 있고, 대륙의 심장부를 차지하고 있는 중국과 러시아는 실용적 이유로 협력하고 있다면서, 아버지 시중쉰이 오랫동안 중소관계를 다뤄왔던 것을 옆에서 지켜본 시진핑이 러시아를 다루는 법을 상당히 잘 알고 있는 것 같다고 주장합니다. 즉, 시진핑은 '너무 가깝지도 않고 너무 멀지도 않게' 적절한 거리를 잘 유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기사가 시의적절한 이유는 트럼프가 11월 미국 대선에서 승리할 가능성이 높아진 현재, 트럼프가 마음에 품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중국봉쇄 및 러시아 활용 구상이 현실 정책으로 나타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과연 중국과 러시아를 묶고 있는 끈은 얼마나 강할까요? 러시아로 갈아타기를 시도하고 있는 북한에 대해 중국이 보여주고 있는 의심과 우려를 보면 조금이나마 그 끈의 강도를 알 수 있을 것도 같습니다. 미국과 서방의 압박, 그리고 중러의 협력. 당분간은 이 구도가 이어지리라 생각됩니다. 아버지 시중쉰과 아들 시진핑의 대소, 대러 정책, 어떻게 이어질지 흥미롭습니다.


우크라이나 침공 직전인 2022년 2월 4일,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베이징을 방문해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제한 없는" 파트너십을 표방하는 문서에 서명했다. 이후 2년이 넘는 기간 동안 중국은 우크라이나 침공을 비난하지 않았고, 러시아가 전쟁에 필수적인 공작기계부터 엔진, 드론에 이르는 물자를 확보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시진핑과 푸틴의 친밀한 파트너십은 서방 정부들에 심각한 의문을 제기했다. 냉전 초기 모스크바와 베이징을 묶었던 동맹이 다시 부활할 수 있을까? 러시아와 중국은 이러한 이야기를 반복해서 일축했지만, 현재의 파트너십은 공산주의 세계를 함께 이끌던 시절보다 더 탄력적이라고 주장해 왔다.


시진핑도 알고 있을 것이다. 그의 아버지 시중쉰(習仲勳)은 중국 공산당 고위 관리였는데 경력 대부분이 베이징-모스크바 관계의 축소판과 같았다. 시중쉰은 1920년대와 1930년대의 혁명 초기부터 1940년대 단속적(斷續的)으로 진행된 원조와 1950년대 소련 모델의 전면적 모방, 1960년대와 1970년대 공개 분열, 1980년대 후반 화해에 이르기까지의 전개과정을 가까이서 지켜보고 관여했다. 시진핑 아버지와 모스크바의 관계는 친밀과 적대 모두 위험하다는 것, 너무 가까워지면 감당할 수 없는 긴장이 조성되어 오히려 값비싼 불화를 낳는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역사를 잘 알고 있는 시진핑은 현재 모스크바와 베이징의 관계가 1950년대보다 훨씬 더 강하며 초기 분열로 이어진 긴장을 피할 수 있다고 믿고 있다.


냉전시대에는 공산주의 이데올로기가 궁극적으로 두 나라를 갈라놓았지만, 지금은 보수적이고 반서구적이며 국가주의적인 태도가 두 나라를 묶는다. 과거에는 개별 지도자 간의 좋지 않은 관계가 관계를 손상시켰지만, 오늘날 시진핑과 푸틴은 개인적인 관계를 양국간 전략적 파트너십의 한 축으로 삼고 있다. 과거에는 상대방을 위해 자국의 이익을 희생해야 했던 냉전시대 동맹의 긴박함이 동맹 해체의 씨앗을 품고 있었지만, 현재의 편의적인 파트너십은 더 많은 유연성을 허용한다. 중국과 러시아가 다시는 중국 공산혁명 승리 초창기처럼 일사불란한 행보를 보이지는 않겠지만, 그렇다고 금방 서로 멀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위험한 관계

시진핑은 1953년, 중국의 소련 모방 열풍이 한창이던 시기에 태어났다. 그해 중국에서 가장 인기 있었던 슬로건은 다음과 같다. "오늘의 소련은 내일의 중국이다." 시중쉰은 중국 북서부에서 베이징으로 이주해 온지 얼마되지 않았는데, 그는 북서부에서 지난 40년간 1917년의 볼셰비키 혁명에 영향을 받은 혁명 투쟁에 참여했었다. 많은 같은 세대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시중쉰도 수많은 좌절과 개인적인 희생에도 불구하고 혁명이라는 대의에 헌신했으며, 1935년에 공산주의 정통성을 충분히 고수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공산당 동료들의 박해와 투옥을 겪으면서도 그 헌신은 흔들리지 않았다.



러시아 볼셰비키의 승리는 초기 중국 급진주의자들에게 영향을 주었고 모스크바는 이제 막 활동을 시작한 중국 공산당을 지도하고 자금을 지원했다. 그러나 이후 마오쩌둥의 부상과 함께 중국 공산당의 독립성 강화가 진행되었고, 시중쉰의 운명은 마오쩌둥의 운명과 연결되었다. 마오쩌둥의 서술에 따르면, 소련에서 훈련받은 급진주의자들은 중국의 특수한 상황을 이해하지 못해 중국의 혁명을 거의 묻어버릴 뻔했다. 마오쩌둥은 이 독단주의자들이 1935년 자신을 공격할 때 시중쉰을 박해했었다고 주장했다. 당시 마오쩌둥은 소련에 동조하는 중국공산당 지도자들로부터 외면당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오쩌둥은 모스크바와의 결별을 옹호하진 않았다. 시중쉰은 젊은 시절 대부분 동안 외국인을 거의 만나지 않았지만, 1940년대 후반 내전으로 공산당이 중국 전역을 휩쓸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그는 신장 지역을 관장하는 거대한 당 조직인 중앙서북국(中央西北局)의 수장으로서 소련인들과 지속적인 교류를 시작했다. 소련은 중국 공산당의 군사력 건설을 도왔고, 1949년 12월 공산당이 전쟁에서 승리하고 중국 본토를 장악한 후 시중쉰은 소련과 협력하여 신장 지역의 자원을 공동 개발하자고 당 지도자들에게 제안했고, 이 제안이 받아들여졌다. 1년 후 시중쉬은 북서부 중소(中蘇) 우호협회의 수장이 되었다.


시진핑이 태어날 즈음 중국 공산당은 소련과 시진핑 일가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첫 번째 대규모 숙청을 단행했다. 마오쩌둥의 잠재적 후계자로 여겨지던 고위 관리 가오강(高崗)이 사적인 대화에서 다른 지도자들을 지나치게 비판한 것이 화근이었다. 마오쩌둥은 자신이 키우던 이 예비 후계자를 공격했고 가오강은 결국 자살했다. 가오강은 소련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고, 당시에는 그것이 숙청의 공식적 이유는 아니었지만 마오쩌둥은 그러한 관계에 대해 걱정하게 되었고 그것이 반역에 해당한다고 결론을 내렸다. 가오강과 함께 북서부에서 일하며 1935년에 함께 박해를 받았던 시중쉰도 의심의 칼날을 피할 수 없었다. 동맹국이라도 외세와 밀접한 관계를 맺는 것의 위험성을 내버려 둘 순 없었던 것이다. 시중쉰도 가오강과 함께 몰락할 뻔했다.


가오강의 몰락으로 시중쉰의 경력은 타격을 입었지만, 이후 그는 내전 이후 중국의 재건을 돕기 위해 파견된 수만 명의 소련 전문가들을 관리하는 임무를 맡게 되었다. 쉬운 일은 아니었다. 시중쉰이 1956년 연설에서 언급했듯이, 이 전문가들은 중국에 적응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고, 그들 중 일부는 "죽고, 식중독에 걸리고, 다치고, 병에 걸리고, 강도를 당했으며, 심지어 자살도 문제였다"고 한다. 같은 해 마오쩌둥이 중국의 정치구조가 너무 "소련식"이고 베이징에 너무 많은 권한이 집중되어 있다고 결론을 내리자 시중쉰은 당 지도부로부터 정부 구조조정 계획을 수립하라는 임무를 부여받기도 했다.

분열

1959년 8월과 9월, 당시 막강한 부총리였던 시중쉰은 대표단을 이끌고 소련을 방문했다. 타이밍이 나빴다. 6월에 소련이 중국의 핵무기 프로그램을 지원하겠다는 약속을 어겼기 때문이다. 시중쉰은 그해 여름 초에 소련을 방문할 예정이었지만, 펑더화이(彭德懷) 국방부장이 루산(廬山)에서 열린 중국공산당 대회에서 숙청됨에 따라 그 계획이 무산되었다. 펑더화이는 마오쩌둥에게 대약진운동을 비판하는 편지를 썼고, 마오쩌둥은 펑더화이의 행동을 개인적인 모욕으로 해석했을 뿐만 아니라 소련 지도자 니키타 흐루쇼프가 그를 사주한 것으로 의심했다. 펑더화이과 시중쉰은 중국 북서부 전장에서 쌓은 경력으로 인연을 맺었다. 중국 공산당의 두 번째 대규모 숙청은 첫 번째와 마찬가지로 시진핑 일가와 밀접한 관련이 있으며 마오쩌둥의 소련에 대한 의심과도 관련이 있다. 그리고 다시 한번 시중쉰은 간신히 살아남았다.


1956년 이후 중-소 간 긴장은 막후에서 서서히 고조되어 왔지만 시중쉰의 모스크바 방문 기간 동안 공개적으로 터져 나왔다. 베이징 주재 소련 대사관이 시중쉰의 소련방문을 공식초청한 1959년 8월 25일, 중국과 인도 국경에서 중국군이 인도 군인 한 명을 사살하고 다른 한 명에게 부상을 입혔다. 중국은 이 사망 사건이 우발적인 사고라고 결론지었지만, 소련은 이 폭력이 인도인들을 공산권에서 밀어내고 곧 워싱턴을 방문할 예정인 흐루쇼프의 서방과의 데탕트 시도를 좌절시킬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격분했다.


국경 폭력 사태 이틀 후 모스크바에 도착한 시중쉰은 중소 동맹을 재확인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소련 부총리와의 비공개 회담에서 그는 1년간 진행되어 온 마오쩌둥의 대약진운동에 대해 긍정적으로 설명하려고 노력했다. 그는 소련의 기술적 승리를 보여주는 '국가 경제성과 전시회'를 방문하고 소련의 초대 두 지도자인 블라디미르 레닌과 조셉 스탈린의 영묘(靈廟)에 화환을 바쳤다. 당시 소련에 속했던 우크라이나, 그리고 체코슬로바키아에서 며칠을 보낸 후 모스크바로 돌아온 시중쉰은 대표단과 함께 크렘린궁에 있는 레닌의 옛 집무실과 거소를 둘러보았다. 시중쉰은 자신의 아들에게 이 방문을 이야기했던 것 같다. 2010년 시진핑이 부주석 자격으로 모스크바를 방문했을 때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러시아 대통령에게 그 방으로 데려가 달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내부 사정에 정통한 한 러시아 전문가에 따르면, 시진핑은 그곳에서 상당히 길게 머물면서 메드베데프에게 이곳이 볼셰비즘이 자라난 곳이라고 말했다. 시진핑은 자신의 부친에게서 러시아와 중국은 항상 친구가 되어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1959년 시중쉰은 양국 관계의 위기 한가운데 있었다. 9월 9일 베이징에서 소련 외교관들은 중국-인도 국경 분쟁에 대해 소련 정부가 중립적인 입장을 취하는 성명을 국영 타스통신에 발표할 계획임을 중국 측에 알렸다. 중국은 격분하여 소련 측에 성명을 변경하거나 연기해 달라고 요청했다. 소련은 중국의 요청을 거절했을 뿐만 아니라 곧바로 그날 저녁 성명을 발표했다. 시중쉰은 9월 18일까지 대표단을 계속 이끌기로 한 원래 일정을 중단하고 바로 다음 날 베이징으로 떠났다. 다음 달 마오쩌둥과 흐루쇼프가 만났을 때 마오쩌둥은 "타스통신의 발표는 모든 제국주의자들을 행복하게 만들었다"며 성명에 대해 불만을 토로했다.


이 분쟁은 동맹의 첫 번째 공개적인 균열에 불과했다. 1960년 여름, 흐루쇼프는 중국에서 소련 전문가들을 모두 철수시켰고, 시중쉰은 그들의 출국을 관리하는 책임을 맡게 되었다. 아들 시진핑이 이 사건에서 얻은 교훈은 중국인들은 스스로를 의지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전직 미국 고위 외교관에 따르면, 2022년 11월 인도네시아 발리에서 열린 미중(美中) 정상회담에서 시진핑은 바이든 미국 대통령에게 미국의 기술 차단이 실패할 것이라고 말하면서 과거 소련의 기술 협력 중단이 중국의 자체 핵무기 개발을 막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뜨겁고도 차가운

1962년 시중쉰은 운이 다해 중국 공산당의 세 번째 대숙청으로 권좌에서 쫓겨났다. 가오강과 펑더화이와 마찬가지로 그는 소련을 위해 스파이 활동을 했다는 혐의를 받았지만, 그것이 주된 처벌 이유는 아니었다. 마오쩌둥은 중국이 이전 소련과 마찬가지로 계급투쟁에 대한 열의를 잃어가고 있다고 판단했고, 시중쉰은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마오쩌둥이 일으킨 파괴활동(문화대혁명)에 휘말렸던 것이다. 1965년 마오쩌둥이 소련이나 미국과의 전쟁에 대비해 중국 사회를 대대적으로 재편하는 불행한 계획을 세우고 있을 때, 시중쉰은 베이징에서 수백 마일 떨어진 뤄양시의 광산기계 공장으로 추방당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공장은 소련 전문가들의 도움으로 완공되었으며, 현지 신문에서 "영광스러운 중소 우정의 결정체"로 묘사되기도 했다.


결국 시중쉰은 16년 동안 정치적 귀양 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는 마오쩌둥이 사망한 지 2년 뒤인 1978년에 복권될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이제 광둥성의 당 서기가 된 시중쉰은 미국인들에게 소련의 침략을 막기 위해 강해져야 한다고 경고했다. 1980년 미국을 방문했을 때 그는 미국측 인사들에게 자신의 반소 견해를 강하게 어필했고, 콜로라도에 있는 북미방공사령부(NORAD) 본부를 방문하면서 보고 들은 많은 것을 메모해두었다. 이후 좌파, 공산주의 성향의 해외 혁명정당들과의 관계를 담당하는 정치국 위원이 된 시중쉰은 전 세계에서 소련과의 영향력 경쟁을 주도했다. 그는 티베트 문제도 관리했으며 1980년대 전반에는 달라이라마에 대한 소련의 영향력을 우려하기도 했다. 그러나 1986년, 중소 관계가 해빙되면서 시중쉰은 소련 지도자 미하일 고르바초프의 개혁을 칭찬하고 관계 개선에 대한 희망을 표명했다.


시진핑은 이 역사를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2013년 최고 지도자가 된 후 첫 해외 순방길에 러시아를 방문한 시진핑은 한 그룹의 중국 연구자들과 1959년 아버지의 소련방문에 대해 따뜻한 담소를 나눴다. 당시 여행 사진은 문화대혁명 기간 동안 모두 파기되었지만, 그의 어머니가 그 당시의 선물을 보관하고 있다고 그는 말했다. 시진핑 주석은 많은 관찰자들이 자신의 세대가 서구를 지향한다고 생각하지만, 자신은 중국문학과 함께 러시아문학을 읽으며 자랐다고 설명했다. 시진핑은 문화대혁명 기간 중 "청년 하방(下放)"으로 시골로 추방된 후 러시아 혁명소설을 읽으며 시간을 보냈는데, 그중에서도 니콜라이 체르니솁스키의 '무엇을 할 것인가'를 가장 좋아했다고 한다. 시진핑은 나중에 침대에 못을 박고 자며 의지를 다진 열혈 혁명가 라흐메토프 캐릭터를 좋아한다고 주장했다. 이 소설 덕분에 시진핑은 시골에 있을 때 비바람과 눈보라 속을 헤쳐나갈 수 있었다고 했다.


그러나 2013년 러시아의 중국 연구자들과 대담하면서 당시 중소 관계의 암울한 상황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그가 시골로 보내진 1969년 당시 중국과 소련은 사실상 국경 전쟁을 치르고 있었고, 심지어 소련의 핵 공격에 대한 두려움도 있었다. 그는 대학 졸업후 첫 직책이 중앙군사위원회 비서장 겅뱌오(耿飇)의 비서였다는 사실도 말하지 않았다. 겅뱌오는 소련을 의심의 눈으로 바라봤다. 1980년 베이징에서 열린 회담에서 해롤드 브라운 미 국방부 장관은 소련에 대한 양측의 견해에 대해 "양측 참모들이 함께 논문을 작성한 것 같다"고 겅뱌오에게 말했다.

이데올로기라는 자극적 요소

오늘날 러시아, 중국, 미국 간의 관계 상황을 고려할 때, 시진핑이 10대의 일부 시간을 소련의 공격 가능성에 대비해 공습 대피소를 파는 데 보냈다거나 그의 아버지가 미 콜로라도 소재 북미방공사령부에 초대받았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다. 지난 75년 동안 워싱턴-베이징-모스크바 삼각관계가 유동적이었기 때문에 일부에서는 시진핑이 어떻게든 러시아에 대한 지원을 자제할 수 있게 될 것이라는 희망을 품고 있다. 그러나 중소 분열의 재연을 바라는 사람들은 실망할 가능성이 높다.


우선, 이데올로기라는 자극적인 요소가 이제 양국 관계에서 거의 사라졌기 때문이다. 1949년 직후에는 공산주의라는 공통의 이데올로기가 베이징과 모스크바에 특별한 접착제로 작용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이데올로기는 오히려 양국이 서로의 차이를 관리하는 것을 더 어렵게 만들었다. 마오쩌둥은 전술적 차이를 더 깊은 이념적 분쟁으로 해석하는 습관이 있었다. 마오쩌둥은 소련이 "수정주의자"가 되었기 때문에 서방에 대한 중국의 전투적 입장을 지지하지 않는다고 점점 더 믿게 되었다. 그리고 공산주의자들 사이에서는 이론적 이단 혐의를 씌우는 것은 큰 싸움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았다. 1959년 10월 타스통신 발표를 놓고 마오쩌둥과 흐루쇼프가 싸웠을 때, 특히 흐루시초프를 격분하게 만든 것은 소련이 "기회주의자"라는 중국 외교부장 천이(陳毅)의 비난이었는데, 이는 그를 혁명 사업의 배신자로 그려 그의 공산주의자 자격 자체에 의문을 제기했기 때문이다. "이데올로기의 중요한 역할이 없었다면 중소 동맹은 성립되지도 않았을 것이고 따라서 붕괴되지도 않았을 것"이라는 역사학자 로렌츠 루티의 주장에는 많은 진실이 담겨 있다.


게다가 이데올로기에 대한 논쟁이 정권교체 요구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에 이념적 차이가 개입되면 다른 이야기를 하기가 어려워졌다. 1971년, 소련 외교관 두 명과 비교적 생산적인 대화를 나눈 후 저우언라이(周恩來) 중국 총리는 그들 중 한 명이 소련 국민에게 혁명을 일으킬 것을 촉구하는 인민일보의 기사를 문제 삼자 폭발했다. 저우언라이는 소련이 마오쩌둥과 충돌하여 사실상 추방된 중국 공산당 초기 지도자 왕밍(王明)을 보호해주고 있다는 점을 지적했다. 저우언라이는 "우리가 그를 두려워한다고 생각하겠죠"라고 말했다. "그는 똥보다 더 나쁜 놈입니다!" 한 소련 외교관이 함께 있던 어느 중국측 인사에게 "고함은 논쟁이 아니다"라며 고함을 멈추라고 요청하자 이 중국 외교관이 맞받아쳤다. "소리를 지르지 않으면 안 들을 것이잖소!"


그러나 오늘날의 러시아는 공산주의의 이상과는 거리가 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푸틴은 한때 소련의 붕괴를 "지정학적 재앙"이라고 불렀지만, 소련 공산당에 대해서는 종종 부정적인 견해를 드러내곤 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직전 연설에서 그는 현대 우크라이나를 만든 레닌을 비난했고, 스탈린에 대해 "독재"라거나 "전체주의 정권"을 언급하기도 했다. 이와 달리 시진핑은 공산주의의 유산을 계속해서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있다. 한 호주 외교관에 따르면 러시아 외교관들은 시진핑 주석이 러시아 혁명소설 '강철은 어떻게 단련되었는가'를 인용했을 때 이를 이상하게 여겼다고 한다. 독단주의자는 아니지만 시진핑은 이데올로기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으며 소련의 붕괴를 부분적으로 소련 정부가 인민들로 하여금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진지하게 받아들이도록 하는데 실패한 탓으로 돌리기도 했다.


이러한 중요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중국과 러시아의 엘리트들은 보수적이고 국가주의적인 세계관을 공유하고 있다. 두 나라 모두 자국의 역사에 대한 공격을 자국 정권의 정당성을 훼손하려는 서방의 음모로 간주하고 민주주의 증진을 존립의 위협으로 여긴다. 두 사람 모두 전통적 가치를 불안정성에 대항하는 보루로 높이 평가하며 서방이 문화를 논쟁 대상으로 삼아 스스로를 분열시키고 있다고 생각한다. 두 사람 모두 권위주의 정권이 현대적 난관에 더 잘 대처할 수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또한 두 사람 모두 자국의 잃어버린 지위와 잃어버린 영토를 되찾기를 원한다. 푸틴과 시진핑은 심지어 비슷한 권력 정당화 논리를 펼치기도 하는데, 전임자들이 참을 수 없는(그리고 서구의 영향을 받은) 국가적 권위의 타락을 허용했다면서 이러한 타락은 오직 자신들이 보여주고 있는 힘에 의한 통치만이 저지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인간 대 인간

=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11일 (현지시간)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열린 동방경제포럼의 극동 거리 요리 부스에서 앞치마를 두르고 팬케이크를 요리하고 있다. 시 주석은 이날 정상회담에서 "중·러는 일방주의와 무역보호주의에 반대한다"고 말했으며 푸틴 대통령도 "양국은 국제 정세와 관련해 많은 점에서 의견이 일치한다"며 "일방주의를 단호하게 억제해야 한다"고 답했다.  © AFP=뉴스1

=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11일 (현지시간)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열린 동방경제포럼의 극동 거리 요리 부스에서 앞치마를 두르고 팬케이크를 요리하고 있다. 시 주석은 이날 정상회담에서 "중·러는 일방주의와 무역보호주의에 반대한다"고 말했으며 푸틴 대통령도 "양국은 국제 정세와 관련해 많은 점에서 의견이 일치한다"며 "일방주의를 단호하게 억제해야 한다"고 답했다. © AFP=뉴스1


오늘날 모스크바와 베이징을 묶는 또 다른 요소는 푸틴과 시진핑의 개인적 관계이다. 중국과 러시아 언론은 두 지도자의 개인적 관계가 돈독하다고 선전하지만, 그 우정이 얼마나 진심인지 말하기는 어렵다. 푸틴은 KGB 요원으로 훈련받으며 사람들을 관리하는 방법을 배웠고, 시진핑도 회의론자들을 설득하기 위한 공산당 '통일전선'의 대가인 아버지로부터 비슷한 요령을 배웠을 것이다. 푸틴과 시진핑은 매우 다른 사람이다. 푸틴은 레닌그라드 지하철에서 거친 사람들과 싸우다 팔이 부러진 적이 있다. 시진핑은 아무도 모르게 권좌에 오른 능력에서 알 수 있듯이 뛰어난 자제력을 일관되게 보여 왔다. 푸틴은 호화로운 생활을 즐기는 반면, 시 주석은 금욕주의에 가까워 보인다. 적어도 러시아와 중국 지도자 간의 관계가 마찰을 보이지 않는 것은 역사적으로 이례적인 일이다.


마오쩌둥가 보기에 스탈린의 이데올로기적 헌신과 소련 역사에 대한 기여는 그를 공산주의 세계의 거인으로 만들었다. 하지만 1940년대 후반 중국 혁명에 대한 조심스런 태도 때문에 스탈린을 평가절하했다. 1949년과 1950년 양국 간 동맹조약 협상 과정에서 스탈린이 보여준 고압적인 태도도 마찬가지였다. 스탈린이 사망한 후 마오쩌둥은 자신의 위상이 흐루시초프보다 훨씬 높다고 느꼈고, 이 소련 서기장을 경멸적 태도로 대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마오쩌둥은 그가 키우던 부하 덩샤오핑이 1960년대 모스크바에서 이데올로기를 둘러싼 끝없는 논쟁에서 보여준 강인함에 깊은 인상을 받았는데, 덩샤오핑은 세계 무대에서 중국의 가장 두드러진 투견(鬪犬)이었다. 마오쩌둥이 사망한 후 덩샤오핑은 소련과 가까운 국가들은 경제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반면 미국의 동맹국들은 번영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덩샤오핑이 중국의 최고 지도자가 되었을 때 많은 측근들이 모스크바와의 관계 개선을 희망했지만 덩샤오핑은 그런 목소리를 무시했다. 덩샤오핑과 고르바초프는 천안문 시위 즈음에 단 한 번 만났고, 덩샤오핑은 소련 지도자를 "바보"라고 결론지었다. 소련이 붕괴하고 보리스 옐친이 러시아 대통령이 된 후, 중국인들은 공산주의의 종말을 가져온 그의 역할에 대해 처음에는 회의적이었지만 점차 최고 지도자 간의 관계가 개선되었다. 덩샤오핑의 후계자인 장쩌민은 소련에서 공부한 경험이 있어 과거의 중소 우정의 노래들을 부를 수 있었다.


개인적 관계가 오늘날 러시아와 중국이 가까워진 주된 이유는 아니지만, 과거 역사에서 개별 지도자가 상대방 지도자와 그들이 이끄는 국가를 싫어할 때 이것이 얼마나 큰 문제가 되는지를 보면 개인적 관계의 중요성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서로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푸틴과 시진핑이 개인적인 차원에서 잘 지낼 수 있는 이유를 짐작하기란 어렵지 않다. 두 사람은 거의 같은 나이이고, 둘 다 국가를 위해 희생한 남자의 아들이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두 사람 성장기에 모두 정치적 불안정의 위험성을 경험했다는 점이다. 문화대혁명 당시 시진핑과 그의 가족은 마오쩌둥의 홍위병에게 납치되어 구타를 당했고, 1989년 당시 드레스덴에 주둔하던 KGB 장교였던 푸틴은 모스크바로부터 지도를 받지 못한 채 동독이 무너지는 것을 지켜봐야만 했다. 두 사람은 텔레비전 카메라 앞에서 함께 러시아식 블리니와 중국식 만두를 만들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팀워크

오늘날 베이징과 모스크바의 파트너십은 유연성이 높아지면서 과거보다 단단하게 만들고 있다. 1949년 이후 유라시아 대륙의 권위주의 심장부를 함께 구성하고 있는 두 강대국이 미국이 주도하는 민주주의 주변부의 위협에 맞서 어떻게 효과적으로 협력할 수 있을지가 핵심적인 전략적 과제였다. 가까운 주변부에서 보이는 미국의 막강한 지위에도 불구하고 베이징과 모스크바는 이에 맞서는 협력을 제대로 이끌어내지 못했다. 거듭해서 두 나라는 상대방을 위해 자신의 이익을 희생하려 하지 않았는데, 부분적으로는 상대방이 서방과의 관계 개선을 위해 자신을 팔아넘기려 할지도 모른다는 의심때문이었다.


중소 분열 이전, 중소 동맹은 미국에게는 골치거리가 되었고, 중국과 소련에게는 실질적인 이익을 가져다주었다. 두 나라 사이의 국경이 평온했기 때문에 서방에 맞서고 군사기술을 공유하는 데 집중할 수 있었다. 1958년 중국이 대만을 장악하기 위해 대만을 공격했을 때 흐루쇼프는 미국이 분쟁에 개입하면 중국을 보호하기 위해 소련도 개입하겠다고 공개적으로 경고하며 중국을 도왔는데, 중국이 사전에 계획을 알리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분개했다.


그러나 유라시아 대륙의 심장부와 주변부의 관계는 항상 공존과 경쟁이 뒤섞여 있었으며, 모스크바와 베이징은 이렇게 상충하는 목표에 동일한 비중을 부여한 적이 거의 없었다. 1950년대와 1960년대에 소련이 현상유지 편에 선 주류 강대국이었던 반면, 중국은 본질적으로 국제체제에서 소외되어 있었다. 마오쩌둥이 중국-인도 국경과 대만해협 연안 섬에 대한 무력 사용과 함께 핵전쟁을 위협하는 거친 언사를 쏟아내자 크렘린에서는 중국이 소련을 전쟁으로 끌고 갈 것이라는 두려움이 커졌다. 모스크바는 핵확산금지조약(NPT)을 지지하고 다양한 위기 상황에서 중국을 돕지 않았으며 서방과의 데탕트를 희망했다. 이를 본 베이징의 지도자들은 모스크바가 공산권보다 서방을 더 챙긴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현재의 중국과 러시아는 위치가 바뀌었다. 중국은 미국 및 유럽과의 지속적인 관계를 통해 경제적, 기술적 이익을 얻기를 희망하는 반면, 모스크바는 서방에 대해 순전히 경쟁적 관점에서 생각한다. 러시아는 의심할 여지 없이 중국이 우크라이나 전쟁에 무기 지원을 제공하고 중국 북동부로 천연가스를 보내는 파이프라인인 '시베리아의 힘 2'에 동의하기를 바라고 있다. 그러나 중소 동맹의 전성기 때와는 달리, 중국은 공식적인 동맹국이 아니기 때문에 모스크바를 위해 경제적 이익이나 평판상의 이익을 희생할 의무가 없다. 따라서 러시아는 배신감을 느낄 이유가 적고 중국도 함정에 빠질까 두려워할 이유가 적다.

역사의 교훈

러시아와 모스크바의 관계에 깊이 관여한 인물의 아들인 시진핑은 자신의 역사를 잘 알고 있다. 과거는 부주의한 포옹과 전면적인 적대의 위험을 모두 보여주었다. 이제 시진핑은 서방과 러시아, 이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으려 하고 있다. 서방이 문제시할 정도로 러시아와 가까워지긴 하되, 그렇다고 서방과 완전히 분리되어야 할 정도로 가까워지지는 않겠다는 것이다. 물론 쉬운 일은 아니며 더 나빠질 수도 있다. 미국은 우크라이나에서 러시아의 전쟁을 돕고 있는 것으로 묘사함으로써(틀린 묘사는 아니다) 중국을 러시아와 한통속인 것처럼 말하고 있는데, 이것이 중국의 '두 마리 토끼 잡기'를 어렵게 만들고 있다. 이 전쟁으로 인해 중국은 러시아의 일부 요청을 외면하는데도 불구하고 경제 및 평판에서 상당한 비용을 치르고 있다.


모든 관계, 특히 강대국 간의 관계에는 문제가 늘 존재한다. 냉전시대와 다른 점은 이념적, 개인적 갈등때문에 더 이상 그러한 문제가 관리불능 상태에 빠지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우크라이나에서의 핵무기 사용, 러시아의 국가 붕괴, 대만과의 전쟁 같이 그 영향은 막대하지만 가능성은 낮은 사건이 발생하지 않는 한, 중국은 이미 설정해둔 광범위한 운신의 폭을 가지고 움직일 것이다. 중국은 때때로 러시아와 긴밀한 관계를 보일 것이고, 때로는 상황에 따라 메시지를 조절하면서 더 거리를 둔 관계를 암시할 것이다. 미국은 중국의 계산법에 영향을 미쳐 러시아가 받는 도움을 제한할 수 있다. 그러나 가까운 미래에는 시진핑의 중러 관계 모델은 과거 중소 관계보다 더 견고할 것으로 보이는데, 그 이유는 아마도 우리의 직관과 달리 현재의 중러 관계가 그렇게까지 친밀하진 않기 때문이다. 친밀함은 오히려 위험할 수 있다.


조셉 토리지언은 스탠포드대학교 후버 역사연구소의 연구원이며 어메리칸대학교 국제업무대(School of International Service) 교수이다.




1922년 창간된 격월간 국제정치 전문지. 미국의 국제정치 싱크탱크인 외교협회(CFR)에서 발행하는데 국제정치 분야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매거진으로 꼽힙니다.
 
close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