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8.30 14:49
프랑스 근대사 중 가장 격동적인 시기에 기욤 르티에르Guillaume Lethière는 가장 존경받는 예술가 중 한 명이었다. 그의 이야기는 한편의 서사시다. 너무도 서사시 같기에 찰스 디킨스나 알렉상드르 뒤마(둘은 르티에르의 장례식에서 추도사를 낭독했다)도 그의 이야기를 믿을 만하게 들려주기 위해 고생했을 것이다. 그러니 서툰 비평가인 필자를 동정해주길.
그는 노예 출신의 혼혈 여성과 백인 농장주 사이에서 셋째('르 티에르'는 프랑스어로 '셋째'라는 뜻) 아이로 태어났다. 오늘날 루브르 박물관을 비롯한 미국과 유럽의 박물관과 아이티의 포르토프랭스에서 그의 그림들을 볼 수 있다. 어떤 작품들은 영화 화면 같은 스케일이다. 그의 작은 작품들 중에는 세상에서 가장 다정하고 아름다운 초상화 한 점이 있다.
르티에르에 대해 들어본 적이 없다고 해서 기분 나빠하지는 마시라. 하지만 그가 1760년에 태어난 과들루프에서는 계속해서 르티에르를 기념해오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계시라. 르티에르에 관한 특별한 새 전시회의 큐레이터인 에스더 벨에 따르면, 해안마을인 생트안느에는 "기욤 르티에르"라는 이름을 가진 자동차 정비소가 있다. 인근 프랑스마을의 번화한 회전교차로 한가운데(이곳에 과거 르티에르가 자란 농장이 있었다), 두 개의 거대한 그림 그리는 붓과 함께 예술가의 팔레트 모양의 거대한 철제 조각품이 있다. 강철로 잘라낸 형상은 그의 제자였던 신고전주의 화가 장-오귀스트-도미니크 앵그르가 1815년에 그린 그림 속에서 묘사된 르티에르의 얼굴을 보여준다.
올 여름, 10월 14일까지 미국 매사추세츠주 윌리엄스타운의 클라크 아트 인스티튜트에서 '기욤 르티에르'를 알리는 고속도로 광고판에서 르티에르의 가장 사랑스러운 초상화(학자들은 이 초상화가 르티에르의 의붓딸이자 뛰어난 예술가였던 으제니 세르비에를 그린 것으로 추정한다)의 확대판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전시회는 11월에 파리 루브르 박물관으로 이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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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라크 아트 인스티튜트의 부관장이자 수석 큐레이터인 벨이 관장인 올리비어 메슬레이와 함께 수년에 걸쳐 연구하고 기획한 이 전시는 432페이지 분량의 도록과 함께 르티에르의 파란만장한 삶에 대해 이야기해준다.
르티에르가 얼마나 중요한 인물인지를 이해하려면 생전에 많은 찬사를 받은 그의 훌륭한 그림과 드로잉을 보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그가 살았던 세계사적 사건과의 복잡한 연관성을 살펴봐야 한다.
노예 신분으로 태어난(그의 혈통과 세례를 받았다는 기록의 부재로 보아 그렇게 추정된다) 르티에르는 14세 때인 1774년, 프랑스 왕이파견한 과들루프 검찰관이었던 아버지에 의해 프랑스로 오게 되었다. 그는 루앙에서 예술가로서의 훈련을 시작했다. 아버지의 영향 덕분에 그는 10대 후반에 이미 권력과 상당히 가까워졌다.
물론 사람들이 계속 바뀌는 상황에서 권력과 가까이 지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르티에르는 동시대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앙시앵레짐의 말기, 프랑스혁명, 공포정치,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부상, 유럽 정복, 제국의 붕괴, 잠시동안의 보나파르트주의 부흥, 왕정복귀, 그리고 마지막으로 1832년 르티에르가 사망하기 직전의 입헌군주정까지 모두 겪어야만 했다.
그에게서 독특하게 흥미로운 점은 과들루프에서 태어난 혼혈 사생아 출신이라는 사실이 주는 의미의 변화를 겪어가면서 이 모든 것들을 헤쳐나갔다는 점이다.
르티에르는 지나치게 나긋나긋하거나 아첨하지도 않았지만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을 마음에 들도록 하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아카데미 프랑세즈의 수장이었던 프랑수아-기욤 메나조는 "정직함과 예의, 결코 흔들리지 않는 솔직하고 충성스러운 성격으로 모든 사람의 존경과 우정을 얻었다"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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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티에르와 그의 어머니 마리-프랑수아즈 페페이는 모두 아버지 피에르 기욤에 의해 노예 신분에서 해방되었다. 하지만 법 개정으로기욤이 르티에르를 아들로 인정하기까지는 수년이 더 걸렸다. 르티에르와 그의 여동생은 1799년 나폴레옹이 권력을 장악했을 무렵 기욤의 상속자로 지명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 년 후 르티에르는 자신이 정당한 상속인이라고 주장하는 먼 친척의 당혹스러운 도전에 맞서 자신을 방어해야 했다. 이 시기는 1819년으로, 르티에르의 명성이 절정에 달했을 때였다. 결국 법원은 르티에르의 손을 들어주었지만, 이미 언론에는 이 존경받는 화가의 "촌스럽고 소박한 혈통"에 대한 굴욕적인 언급이 나와버린 뒤였다.
도덕적, 정치적으로 복잡한 배경은 르티에르 삶의 거의 모든 측면을 숨막히게 했다. 예를 들어, 그가 노예제 폐지론자였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그는 노예 노동에 의존해 부를 축적한 아버지의 농장에서 재정적 이득을 얻었다.
르티에르는 카리브해로 한번도 돌아간 적이 없었지만 그곳 사람들의 상황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졌다. 그는 프랑스 왕정이 폐지되기 직전인 1791년에 시작된 아이티 혁명을 지지했으며, 1794년 프랑스 정부가 모든 영토에서 노예제를 폐지하기로 결정한 것을 환영했다.
8년 후 나폴레옹이 식민지에서 노예제를 부활시키고 과들루프에서 저항 시도를 잔인하게 진압했을 때 르티에르는 분명히 실망했다. 하지만 그 무렵 그는 보나파르트가와 가까웠다. 그는 나폴레옹의 카리브해 출신 아내 조제핀 황후의 초상화를 그렸고, 자신의 출세를위해 나폴레옹의 동생 뤼시앙 보나파르트와 가까이 지냈다.
1807년, 르티에르는 뤼시앙 보나파르트와의 친분 덕분에 로마에 있는 아카데미 프랑세즈의 책임자로 임명되었다. 이는 매우 영광된자리였다. 그곳에서 그는 아카데미에 활기를 불어넣고 수십 명의 프랑스 최고의 예술가들의 교육을 감독했는데, 그들 중에는 르티에르 가족의 드로잉 연작(이번 전시회에 포함)을 그린 앵그르와 파리 살롱에서 100점이 넘는 그림을 전시한 여성 제자 앙투아네트 세실 오르텐스 레스코가 포함되어 있었다.
고대 로마는 로마 공화정을 모델로 삼았던 프랑스의 혁명가들뿐만 아니라 로마 제정을 더 좋아했던 나폴레옹에게도 큰 관심사였다. 예술은 고대 로마와의 연관성을 확립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르티에르가 로마의 아카데미 프랑세즈에 재학 중일 때 프랑스혁명이 발발했다. 당시 그는 주변 환경에서 영감을 받아 <아들에게 사형선고를 내리는 브루투스>라는 제목의 캔버스 대작을 그렸다. 그는 세심하게 구성된 프리즈 같은 구도로 로마 공화정의 창시자인 루시우스 주니우스 브루투스가 군주제 복원을 모의한 아들들이 참수당하는 모습을 냉정하게 바라보는 모습을 묘사했다.
르티에르는 이 주제와 고대 로마의 또 다른 에피소드인 <베르기니아의 죽음>을 반복해서 그렸다. 이 그림의 주제인 '아버지가 딸의 요청에 따라 딸을 죽인다는 이야기'가 노예가 된다는 불명예를 중심으로 진행된다는 것을 알고나면 이 그림이 그에게 얼마나 특별한 의미가 있었을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두 주제를 반복해서 담은 여러 그림들은 로마와 런던에서 전시되었을 때 큰 성공을 거두었다. 하지만 파리에서는 취향이 이미 변화하고 있었고 19세기 후반에는 낭만주의가 부상하고 있었다. 르티에르의 신고전주의 스타일은 인기를 잃기 시작했다.
1819년 상속 소송에서 승리한 르티에르는 다시 카리브해로 관심을 돌렸고, 1822년에 그는 대담한 캔버스 작품 한 점을 그렸는데, 이 작품은 포르토프랭스에 있는 국립 판테옹 박물관에 소장된 대략 11×7 피트 크기의 거대한 그림이다. 이 작품은 혼혈과 흑인인 두 장군이 생도밍그(현 아이티) 주민들의 자유와 독립을 위해 함께 싸우겠다고 맹세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위험하고 비밀스러운 항해 끝에 르티에르의 아들이 직접 포르토프랭스에 있는 아이티 대통령 장-피에르 보봐예르에게 이 그림을 전달했다. 2년 후 프랑스의 샤를 10세는 마지못해 아이티를 인정했지만, 그 대가로 수십 년 동안 이 신생국가는 제대로 국가기능을 못 할 정도로 많은 배상금을 지불해야만 했다.
안타깝게도 최근 무정부상태에 빠진 아이티 상황때문에 이 그림이 미국으로 오지 못했다. 르티에르는 아이티 관객들을 위해 이 그림을 그렸으며, 이번 전시회에 이 그림의 복제품을 멋지게 설치한 벨은 "고향에 대한 르티에르의 사랑이 담겨 있다"고 설명한다.
이번 클라크 아트 인스터튜트 전시는 오늘날까지 계속 울려 퍼지고 있는 수십 년간의 정치적 소용돌이에 우리를 몰입시킨다. 카리브해와 연관이 있는 다른 프랑스 예술가와 작가들에 대해서도 많은 이야기를 한다. 그래서 단순히 한 작가를 소개하는 전시회 그 이상이다. 클라크 아트 인스터튜트 전시 갤러리의 위엄 있는 배치와 르티에르의 신고전주의 양식의 표면적 엄격함에도 불구하고 이 전시는 회전하는 폭죽처럼 빛과 지식, 문화적 에너지를 발산하며 놀라운 유산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깊게 해준다.
《기욤 르티에르》는 10월 14일까지 매사추세츠주 윌리엄스타운의 클라크 아트 인스티튜트에서, 그리고 11월 13일부터 2월 17일까지 파리 루브르 박물관에서 전시된다. clarkart.edu.
세바스찬 스미는 퓰리처상을 수상한 워싱턴포스트의 미술평론가이자『라이벌의 예술: 모던 미술의 네 가지 우정, 배신, 돌파구』The Art of Rivalry: Four Friendships, Betrayals and Breakthroughs in Modern Art의 저자이다. 보스턴글로브에서 근무했고, 런던과 시드니에서는 데일리 텔레그래프(영국), 가디언, 스펙테이터, 시드니 모닝 헤럴드를 위해 일한 바 있다.
역자 이희정은 영국 맨체스터대 미술사학 박사로 대영박물관 어시스턴트를 거쳐 현재 국민대 강사로 강의와 연구를 이어가고 있다. 역서로 '중국 근현대미술: 1842년 이후부터 오늘날까지'(미진사, 2023)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