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정학 에세이 서평

인도네시아의 혹독한 독립 과정

인도네시아의 등장은 흔히 상상하는 것보다 더 폭력적이고 더 선구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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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년 네덜란드에 의해 구금된 상태였던 인도네시아 대통령 수카르노와 외무장관 하지 아구스 살림. /사진제공=Wereldmuseum Amsterdam

2024.08.30 14: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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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억8000만이 넘는 세계 4위 규모의 인구와 풍부한 천연자원을 자랑하는 인도네시아의 시대는 이미 도래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현대자동차를 비롯한 많은 한국 기업들이 투자를 하고 있으며 자카르타는 케이팝 그룹들의 필수 방문 코스입니다. 하지만 아직 우리는 인도네시아를 잘 모릅니다. 인도네시아의 역사에 대해서는 더더욱 모릅니다. 세계적으로도 인도네시아에 대한 이해가 깊지 않은 현 상황에서, 인도네시아에서 기회를 보는 이들이라면 다른 이들보다 먼저 인도네시아의 역사를 이해하여 얻을 수 있는 게 적지 않을 것입니다.


호주의 시사문예지 인사이드스토리가 2024년 6월 20일 실은 이 서평은 벨기에 학자 다비드 판 레이브룩의 인도네시아 독립사 '레볼루시'를 다루고 있는데 네덜란드인들이 자국의 과거사에 대해 갖고 있던 착각(영국, 프랑스, 일본 제국에 비해 네덜란드 제국이 훨씬 인간적이었다는)을 깨부수면서 네덜란드 사회에 큰 파장을 가져왔던 저작입니다. 미국, 영국, 호주 등이 인도네시아의 독립을 지원함에도 불구하고 네덜란드는 자신들의 '인도제도' 식민지를 고집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많은 인도네시아인들과 네덜란드 병사들이 희생되었습니다.


우리는 오랫동안 인도네시아가 네덜란드의 식민지였다고 알고 있었지만 네덜란드가 인도네시아를 제대로 장악한 것은 사실 20세기 들어와서이고, 동티모르 독립과정에서 호주와 인도네시아 사이에 긴장이 있는 것을 보고 쉽사리 호주가 가까이 있는 강국 인도네시아에 대해 경계를 하고 있구나 지레 짐작하기 쉬운데, 인도네시아의 독립과정에 대한 호주의 기여를 보면 양국 관계가 간단치는 않을 것 같습니다. 수카르노 역시 우리는 공산주의자인지 반공주의자인지 별로 아는 것도 없이 반둥회의를 이끈 비동맹운동의 주창자 정도만 알고 있습니다. 앞으로 우리와는 관계가 심화되어나갈 수밖에 없는 미래의 강대국 인도네시아에 대해 우선 이 소개 기사를 읽으시고 영어본으로는 무려 656페이지나 되는 '레볼루시'를 읽으신다면 조금이나마 인도네시아에 대해 이해를 갖게 되시리라 생각됩니다.


인도네시아는 세계에서 네 번째로 인구가 많은 국가이자 가장 많은 무슬림이 사는 곳이며 주요 상품 공급국인데다가 유럽 지도에 올려놓으면 아일랜드에서 카자흐스탄까지 뻗어갈 만큼 거대함에도 불구하고, 뉴스에 등장하는 일이 거의 없다.


인도네시아의 과거에 대한 관심은 더욱 미미하다. 하지만 생생하게 말할 줄 아는 이야기꾼 역사가가 때때로 등장해 출판사가 수십 년 전의 먼 시대에 대한 엄청 두꺼운 책으로 시장을 한번 시험해보게끔 만들기도 한다. 존 다우어John Dower의 '패배를 껴안고'(일본의 연합국 점령에 대한 이야기)나 팀 하퍼Tim Harper의 '지하의 아시아Underground Asia'(서구 열강에 대항한 초기 혁명가들에 대한 이야기)를 생각해보라. 네덜란드어로 글을 쓰는 벨기에 학자 다비드 판 레이브룩David Van Reybrouck은 '레볼루시: 인도네시아와 현대 세계의 탄생Revolusi: Indonesia and the Birth of the Modern World'이라는 새로운 저서로 그 반열에 자신을 올려놓았다. 이 책은 네덜란드령 동인도 제도의 말기와 인도네시아의 독립 투쟁을 다루고 있다.


데이비드 콜머와 데이비드 맥케이가 영역한 '레볼루시'는 기억에서 사라진 반세기를 생생하게 되살려냈다. 판 레이브룩은 그 전에 많은 혁명 참가자들을 생전에 인터뷰할 수 있었다. 인터뷰와 문서 기록이 합쳐진 이 책은 매혹적인 읽을거리다. 인도네시아의 독립에 대한 중요한 모든 것을 읽었다고 생각했었다면, 다시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이 책은 이미 네덜란드에 큰 충격을 줬다. 2차 세계대전 이후 4년 동안 네덜란드가 자국 식민지의 독립을 억압하면서 자국 군대가 저지른 잔혹행위에 대한 폭로가 과거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2019년 설문조사에 따르면 네덜란드 국민의 50퍼센트가 여전히 자국의 식민 제국 역사를 자랑스럽게 여겼다. 이는 영국의 32퍼센트, 프랑스의 26퍼센트, 벨기에의 23퍼센트와 대조된다.



네덜란드인들은 자신들의 '인도 제국Indies empire'이 최초의 향신료 무역상들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350년의 역사를 갖는다고 믿었지만 판 레이브룩은 완전한 영토 통제가 이루어진 것은 1914년 식민지 군대인 KNIL(왕립 네덜란드 동인도군)이 수십 년에 걸친 전투 끝에 아체Aceh를 정복했을 때라고 지적한다. 식민지의 전성기는 네덜란드 행정부가 일본의 공격에 항복하기 전까지 단 28년간 지속되었을 뿐이다.


판 레이브룩은 생생한 이미지로 책의 서두를 연다. 현대적인 여객선이 잔잔한 자바해를 가로지른다. 상층 갑판에는 유럽인들과 소수의 부유한 아시아인들이 편안한 객실에 있다. 한 층 아래에는 다양한 인종의 더 많은 수공업자 승객들이 공동 객실에서 잠을 자고 있다. 그 아래의 개방된 갑판에는, 수많은 "원주민" 승객들이 바깥 날씨에 노출된 채 진을 치고 있다. 선원 하나가 수면에 가까운 현창을 열어두었는데 이 때문에 배가 기울어지자 전복으로 이어진다. 이는 1936년 판 데 빅Van der Wyck호가 겪었던 실제 해상 재난이다.


네덜란드 정부가 착취적인 "경작" 시스템(피지배 민족에게 수출용 환금 작물 재배를 강요하는)을 교육 및 기타 개발을 약속하는 "윤리 정책"으로 대체했음에도 불구하고 판 데 빅호 선상의 계급 분할은 현실을 반영하고 있었다. 일부 피지배자들은 3층 갑판에서 2층 갑판으로 올라갈 수 있었지만, 1층 갑판까지 올라갈 수 있는 이들은 극소수였고, 그들 모두가 갈색 피부의 네덜란드인이 되길 원했던 것은 아니다.


1층 갑판 승객이 될 수 있었던 몇몇이 1910년대 후반 수라바야Surabaya 한 골목길에 위치한 집에서 만났다. 교양 있는 자바 귀족이자 신생 민족주의 운동인 사레카트이슬람Sarekat Islam의 회장이었던 우마르 사이드 초크로아미노토Oemar Said Tjokroaminoto가 1914년 그곳에서 기숙학교를 열었다. 당시 학생들 중에는 자바인과 발리인 부모를 둔 수카르노라는 소년이 있었는데, 그는 그곳에서 5년간 공부했다. 방문객들 중에는 1922년 인도네시아 공산당(PKI)를 결성하는 무나와르 무소Munawar Musso 등도 있었고 수카르마지 마리잔 카르토수위르조Soekarmadji Maridjan Kartosuwirjo를 포함한 젊은 이슬람주의자들도 있었다. 인도네시아 저항과 초기 정치의 세 가지 주요 흐름—수카르노가 한데 엮은 민족주의, 종교, 공산주의—이 이 학교의 지붕 아래에서 형성되고 있었다.


네덜란드령 동인도 제도의 총독들 중 보다 영리한 이들은 이러한 열망을 식민지 담론에 끌어들이려 했다. 한 총독은 1916년에 자문기구인 인민 평의회를 구성했다. 다른 총독은 1930년에 이를 확대했다. 하지만 민족주의는 이미 통제를 벗어났고, 공산주의도 마찬가지였다. 인도네시아 공산당은 스탈린의 조언을 무시하고 1926~27년 봉기를 일으켰고 이는 잔인하게 진압되었다. 네덜란드인들은 죽이지 않은 800명을 서파푸아의 말라리아로 가득한 밀림에 자리한 메라우케Merauke에서 강을 사흘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 보벤디굴Boven Digul로 보냈다. 서스데이섬으로 탈출한 소수는 호주 당국에 의해 송환되었다.


1층 갑판에 들어갈 자격이 있었을 법한 민족주의자들도 억압받았다. 반둥에서 건축학을 공부하고 인도네시아 국민당을 결성한 수카르노는 1930년에 투옥되었다. 2년 후 석방되었지만, 해군의 반란으로 네덜란드 식민통치자들의 경계심이 높아지자 이듬해 외딴 플로레스로 유배되었다. 비슷한 시기에 레이던 대학에서 갓 돌아온 미래의 독립 지도자 모하맛 하타Mohammad Hatta와 수탄 샤흐리르Sutan Sjahrir가 보벤디굴에 수용되었다.



대부분의 정당이 금지되었고 신문과 통신은 검열을 받았으며 정보기관에는 추가 자원이 주어졌다. 강경파 총독인 보니파키우스 코르넬리스 더 용에Bonifacius Cornelis de Jonge는 인도네시아를 경찰국가로 변모시키고 있었다.


1층 갑판의 유럽인들은 이 모든 것 위에서 살았다. 점점 더 많은 네덜란드 여성들이 식민지에 도착해(1920년까지 남성 5명당 4명) 네덜란드 남성들이 다른 갑판 소속의 여성과 관계(이로 인해 인도Indo라고 불리는 대규모 혼혈 그룹이 생겨났다)를 맺지 않도록 도왔다. 그들만의 클럽, 방갈로, 골프장에서 유럽인들은 히틀러의 부상에 대한 보고서를 열광적으로 읽었다. 1935년 네덜란드 나치당 지도자가 순회했을 때, 사람들은 오른팔을 뻗는 나치식 경례로 그를 맞았고 드 용에 총독은 그를 두 번이나 접대했다. 식민지 현지의 나치당은 네덜란드 나치당보다 3배나 많은 당원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리고 일본의 침략이 시작됐다. 호의적인 상인으로 위장한 일본 스파이들은 인도네시아인들을 포섭하는 데 효과적이었지만, 침략자들이 점점 더 가혹해지면서 일본인에 대한 인도네시아인들의 태도가 바뀌기 시작했다. 남성들은 시암과 다른 곳으로 노동자로 보내졌고, 돌아오는 이는 많지 않았다. 젊은 여성들은 첩이나 매춘부가 되길 강요받았다. 1944년 자바에서만 400만 명이 기아로 사망했다.


수카르노는 일본의 해방 약속을 시험해보기 위해 그들과 함께 행동했다. 1945년 8월 일본이 항복한 후, 일본인들은 수카르노와 하타가 독립 선언을 방송하는 걸 도왔는데 이는 어떤 유럽 식민지에서도 없었던 일이었다. 그 후 불안한 공백기가 왔다. 수카르노, 하타, 샤흐리르는 조심스럽게 행동했다. 한편으로는 떠나가는 일본인들과 강력한 연합국(호주로 망명한 네덜란드군과 해방된 네덜란드를 포함) 사이에서, 다른 한편으로는 인내심이 바닥난 국민들 사이에서 균형을 맞추려 노력했다.


가장 참을성이 없었던 이들은 '뻐무다pemuda'였다. 이들은 15~25세 사이의 젊은이 200만 명으로, 일본 민병대의 훈련을 받으면서 '세망갓semangat'(정신)이 모든 것을 정복한다고 믿었다. "뻐무다는 그들의 어머니가 굶어 죽고, 아버지가 강제 징용으로 끌려가고, 자매가 위안부로 납치되는 것을 보았다." 판 레이브룩은 쓴다. 그들은 "대나무 창과 막대기, 가짜 총만을 가지고 큰 소리를 지르며 적에게 돌진하도록 끝없이 훈련받은 깡마른 이들이었다. 크게 뜬 눈, 야생의 눈빛, 신성한 분노를 지니고 있었다."


1945년 9월 영국군이 자바와 수마트라에 도착하기 시작했을 때 악몽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호주군은 군도의 동쪽에서 더 수월한 시간을 보냈는데 이는 그곳에서는 네덜란드에 대한 충성심이 강했던 덕분이었다.) 마주치는 모든 유럽인과 혼혈인들을 대상으로 살육의 광란을 벌인 뻐무다는 영국군을 네덜란드의 트로이 목마로 여겼다. 그들은 일본의 무기고를 약탈하여 수만 정의 총기를 나눠주었다.



10월, 뻐무다는 수라바야 거리에서 영국 여단장 오버틴 말라비를 포위하고 그를 난도질해 죽였다. 연합군 동남아시아 사령관 루이스 마운트배튼은 이에 대응해 인도군 1만2000명과 전차 24대를 보냈고, 해상 포격과 싱가포르에서 출격한 랭커스터 폭격기로 이를 지원했다. 인도네시아인 약 1만5000명이 사망했다.


1946년 11월 영국군이 철수할 때쯤 네덜란드인들이 돌아왔다. 먼저 호주로 망명했다가 돌아온 민간인들과 식민지 군대의 잔존 세력이 왔고, 그 다음으로 1946년부터 1949년 사이에 징집된 청년 12만 명으로 구성된 새로운 왕립 네덜란드군이 왔다. (약 6000명이 승선을 거부했고 그 중 2565명이 투옥되었으며, 탈영병 수색은 1958년까지 계속되었다.)


네덜란드군이 네덜란드령 인도제도(인도네시아)에서 세력을 키우는 동안, 네덜란드 고위 정부 관계자들은 병행 전략을 추구했다. 수카르노와 대화하고 미국을 만족시키며, 자바와 수마트라의 인도네시아공화국을 보르네오와 동부 섬들의 주들과 함께 더 넓은 연방으로 통합하여 모두 네덜란드 국왕아래 두는 계획을 제안한 것이었다. 수카르노의 공화주의자들은 이를 최선의 제안으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이 권력유지 계획 수정안은 암스테르담의 보수파들에게는 너무 멀리 간 것이었다. 그들은 일방적으로 새로운 조건을 추가했다. 인도제도의 네덜란드인 및 혼혈 인구가 재정착할 수 있도록 뉴기니는 분리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판 레이브룩의 표현을 빌자면, "미국의 진출 이후 현대화된 뉴기니의 해안은 새로운 고급 갑판을 제공할 것이었다. 군도의 다른 지역에서는 이제 2층과 3층 갑판의 승객들이 최상층 고급 갑판을 차지했기 때문이다."


합의에도 불구하고, 네덜란드와 인도네시아공화국 지역의 경계에서 충돌은 계속되었다. 뻐무다가 일부 외곽 섬들에 침투한 후, 네덜란드 특공대장 레이몬드 "터크" 베스터링이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질서를 회복하라는 임무를 받고 부하 120명과 함께 마카사르Makassar로 파견됐다. 그의 현장 재판과 대량 처형으로 마을 주민 수백 명이 목숨을 잃었다. 중부 자바에서는 네덜란드가 욕야카르타Yogyakarta 시 주변의 공화국 요새들에 해상 및 공중 봉쇄를 가했다.


다비드 판 레이브룩의 저서 '레볼루시' 영역판 표지. /사진제공=Bodley Head

다비드 판 레이브룩의 저서 '레볼루시' 영역판 표지. /사진제공=Bodley Head


이 무렵 네덜란드 재정은 거의 파산 상태였다. 하지만 군 강경파들은 신속한 공격으로 농장들을 장악하면 수출 가능한 상품으로 이익을 얻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공식적으로 평화 협정을 포기하고 약 10만 명의 군대를 동원해 신속한 "치안 활동"을 펼친 덕분에 네덜란드는 서부와 동부 자바의 대부분, 스마랑, 메단 주변의 북부 수마트라, 그리고 팔렘방 주변의 유전 지대를 장악했다.


하지만 그 다음은? 욕야카르타로 진격하길 원했던 네덜란드군 사령관 시몬 스포르는 집권 가톨릭당과 빌헬미나 여왕의 지지를 받았는데 여왕은 "욕야카르타의 온상"과 그곳의 "극단주의자들"을 소탕할 것을 촉구했다. 하지만 연립정부에 참여하고 있던 사회주의자들은 공화국이 살아남기를 원했다. 그렇지 않으면 평당원들이 반발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극단주의자들"을 몰아내는 대신, 평화 협정이 깨지자 가장 합리적인 공화국 측 협상가인 수카르노측 총리 수탄 샤흐리르가 사임해야 했다. '치안 활동'에 실망한 미국과 영국 정부는 중재를 제안했고 (이제는 탈식민화를 지지하는) 호주와 인도는 인도네시아 문제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의제로 상정했으며, 안보리는 휴전을 촉구했다. '치안 활동'은 15일 만에 종료되었지만 네덜란드는 이미 원하는 모든 자산의 통제권을 획득할 수 있었다.


한편 유엔은 분쟁을 중재할 조정위원회를 구성했다. 네덜란드는 같은 식민주의자인 벨기에를 지명했고, 인도네시아인들은 호주를 지명했다(호주는 리처드 커비 산업법원 판사를 임명했는데, 판 레이브룩에 따르면 그는 "확실히 진보적인 성향을 가진 사회 문제 전문가"였다). 그리고 두 나라는 세 번째로 미국을 선택했다. 1947년 10월 세 나라의 대표가 자카르타에 도착했을 때 분쟁은 즉각 국제화됐다.


영해 밖에 정박한 미국 군함 렌빌은 외관상 중립적인 갑판 공간으로, 1947년 말 추가적인 평화 회담이 열린 장소였다. 미국인들은 수카르노측 공화주의자들에게 네덜란드 계획의 새 버전을 수용하도록 압력을 가했다. 네덜란드는 최근 점령한 영토를 유지할 수 있고 다른 곳에 새로운 국가를 형성할 수 있으며, 축소된 인도네시아 공화국을 포함한 모든 것이 네덜란드 여왕 하의 인도네시아 합중국으로 들어가는 계획이었다.


이 계획이 국민투표로 승인되어야 한다는 점은 공화주의자들에게 미래의 탈출구를 제공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카르노가 묶어놓은 민족주의, 종교, 공산주의라는 세 가지 정치적 흐름은 분리되었다. 수라바야의 옛 학교를 방문했던 이슬람주의자 카르토수위르조는 인도네시아를 다룰이슬람(이슬람의 집)으로 만들기 위해 서부 자바에서 봉기를 시작했다. 소요사태는 그가 체포되어 처형된 1962년까지 계속되었다. 사회주의자였던 총리 아미르 샤리푸딘은 사임하고 모스크바에서 막 돌아온 무소(수라바야 학교의 또 다른 방문객이었다) 지휘 하의 공산당에 합류했다.


1948년 9월 공산주의자들이 공화국 영토의 마디운이라는 도시를 장악하고 공화국의 적백기 대신 낫과 망치가 그려진 적기를 게양하자 수카르노와 하타는 공화국군의 실리왕기 사단을 보냈다. 수개월간의 전투 동안 공화국군은 공산당 추종자 3만5000명을 체포하고 무소, 샤리푸딘을 비롯한 수백 명을 즉결 처형했다.


인도네시아 공화국이 보여준 반공주의는 미국을 네덜란드에서 멀어지게 하고 수카르노와 하타의 편으로 기울게 했다. 1948년 12월 초, 미국은 네덜란드에게 추가적인 군사 행동이 마셜플랜 원조에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2월 19일 강경한 새 식민지 행정관 루이스 빌은 두 번째 '치안 활동'을 명령했다. 비행기들이 욕야카르타 공항에 기총을 발사했고 공수부대가 착륙하여 공항을 점령했다. 기계화 부대가 스마랑Semarang에서 남쪽으로 밀고 내려갔다. 수마트라에서는 다른 부대들이 섬을 가로지르는 통로를 열었다. 욕야카르타에서 수카르노와 하타는 공화국 군대가 정글과 시골로 흩어지는 와중에체포되었다.


하지만 다시, 네덜란드는 이제 어떻게 할 것인가? 그들은 유엔 안보리가 그 해의 업무를 마무리하고 이듬해 1월 말에 업무에 복귀할 때는 기정사실화된 상황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으리라 가정했었다. 하지만 미국의 지지를 받은 호주가 긴급 회의를 촉구했고, 12월 24일 열린 긴급 회의에서 휴전과 민족주의 지도자들의 석방을 요구했으며 이후 1950년 7월까지의 주권 이양 일정을 수립했다.


루이스 빌은 4월 '인도네시아 합중국'을 발표함으로써 유엔에 선수치려 했다. 하지만 이전에 순응적이었던 외곽 섬 주들의 지도자들이 공화주의자들 쪽으로 돌아섰다. 네덜란드가 이제 신뢰를 잃었음에도 불구하고 전투는 1949년 8월까지 계속되었다. 사실 이 시기는 4년 간의 전쟁 중 가장 잔인한 단계로 네덜란드 군인 1200명과 인도네시아인 4만7000명(추정)이 사망했다.


판 레이브룩은 유럽과 인도네시아의 요양원, 심지어 영국군 퇴역 군인들이 살고 있는 네팔의 외딴 마을에서도 이 잔혹한 분쟁 동안 저질러진 전쟁 범죄에 대한 개인적인 증언을 수집했다. 전직 군인 구스 블록은 현장 심문, 15세 소년을 야전 전화기에 연결해 전기 고문을 했던 것, 물고문, 공황 상태에서 총에 맞은 민간인들에 대해 이야기했다. 옆방에서 심문받는 용의자들의 비명 소리로 신호음을 들을 수 없었던 무전수 스테프 호르바스는 밀폐된 철도 화물칸에서 탈수와 질식으로 사망한 포로들을 목격했다.


다른 이들은 무분별하고 변덕스러운 총격, 멀리서 기관총으로 캄퐁(마을)을 난사한 일, 마을을 불태우고 14세 이상의 모든 남성을 사살한 일을 인정했다. 심문관들이 포기한 후, 포로들은 "칼리(운하)에 가서 소변이나 봐라"라는 말을 들었지만, 결국 총에 맞아 죽고 탈출을 시도했던 것으로 보고되었다. 강간은 빈번했지만 성폭행으로 유죄 판결을 받은 군인은 13명에 불과했고 그마저도 최대 18개월의 형을 선고받았을 뿐이다.


뻐무다도 잔인했다. 이는 야만적인 보복을 불러일으켰고 결국 네덜란드인들을 더욱 증오하게 만들 뿐이었다. 일본의 침략과 버마 철도에서 살아남았던 전직 군인 톤 베를리는 동료들의 시신을 촬영하고 부검에 참석하는 일을 맡았다. "혀가 나와 있고, 눈이 빠져 있고, 두피가 벗겨지고, 성기가 잘려 나갔어요. 나는 그걸 사진 찍어야 했죠. 당신의 동료들이 그렇게 끔찍하게 훼손되고, 고문당하고, 살해당한 걸 봤다면, 움직이는 모든 것에 총을 쏘게 될 거예요. 그런데 우리가 전범이라고요! 그래요, 우리 쪽도 옳지 않은 일을 했지만, 하지만 그건 그냥 미친 상태였다구요."


판 레이브룩은 현장에서 분노한 개별 군인들의 "과잉 행위" 너머에서 체계적인 전쟁 범죄를 본다. 1947년 12월 9일, 네덜란드 징집병들은 자카르타 근처 라와그데의 남성 전체—아마도 400명—를 처형했다. 두 번째 '치안 활동' 중, 한 군부대는 서부 자바의 칠릴리탄에서 남성 수백 명을 살해했고, 다른 부대는 남부 수마트라의 렌갓에서 약 천 명을 살해했다. 해당 부대 장교들은 훈장을 받았다.


"불법적인 폭력은 탈식민화 전쟁 동안 결코 주변적인 현상이 아니었다." 판 레이브룩은 말한다. "네덜란드의 경우 그것은 군대 조직의 하부에서 일어난 몇몇 과잉 행위에 국한된 게 아니었다. 소대, 중대, 대대를 책임지는 장교들이 이를 명령하고 실행했다. 자카르타에서 최고 사령부는 이를 용인하고 암묵적으로 허용했으며 민간 행정부의 최고위층도 이를 알고 있었다. 최고 사법 당국도 이를 기소하지 않았다." 심지어 군종 사제들조차 항의하지 않았다. "순찰 중의 살인이 모기장 아래에서의 자위행위보다 더 용서받을 만한 것으로 보였다."


궁극적인 책임은 네덜란드 정부와 의회에 있었다. 처음에 정치인들은 낯선 영역에 있었다. 프랑스, 벨기에, 포르투갈, 영국, 미국 제국에 대한 저항 운동과 주권 이양은 아직 오지 않은 상태였다. 그리고 인도제도는 다른 제국 열강들에게 식민지가 중요했던 것보다 네덜란드인의 심리에 훨씬 더 중요했다. 하지만 두 번째 '치안 활동'이 시작됐을 때쯤에는 필리핀, 인도, 파키스탄, 실론, 버마가 이미 독립을 쟁취한 상태였다. "직접적인 명령"은 없었지만 전면적인 공격을 개시하기로 한 정치적 결정이 대규모 폭력의 조건을 만들어냈다.


결국 미국이 원조를 유인책으로 삼아 네덜란드가 네덜란드와의 허술한 "연합" 내에서 인도네시아에 주권을 이양하도록 강요했다. 네덜란드는 자신들의 기업과 이권을 유지했고, 인도네시아가 식민 정부의 부채를 떠안도록 설득했으며, 서부 뉴기니는 향후 협상을 위해 보류했다. 주권 이양은 1949년 12월 27일 암스테르담에서 인도네시아의 모하마드 하타와 새로운 네덜란드 여왕 줄리아나가 참석한 가운데 이뤄졌고, 수카르노는 자카르타로 날아갔다.


전쟁 범죄에 대한 책임 추궁은 1969년 1월, 전직 징집병 요프 휘팅이 고문과 즉결 처형에 대해 처음으로 공개적으로 증언하면서 시작되었다. 그의 텔레비전 인터뷰는 두 번째 치안 활동 20주년과 시기를 맞추려 했지만 한 달 연기되었는데 이는 크리스마스를 맞는 참전군인들이 "갑자기 아내와 자녀들에게 전범으로 보이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휘팅은 그의 이야기를 뒷받침하는 많은 편지를 받았지만 동시에 살해 위협도 받았고 반역자로 비난받았다. 그는 경찰의 보호를 받아 안전한 장소로 이주해야 했다.


1971년의 시효법은 인도네시아에서의 전쟁 범죄를 더 이상 기소할 수 없게 만들었다. 터크 베스터링은 안전하게 네덜란드로 돌아와 죽을 때까지 아무런 피해 없이 살면서 자신이 저지른 일을 모든 사람들에게 이야기했다. 네덜란드 정부가 그에게 희생당한 사람들의 유족에게 보상금을 지급한 것은 2015년에 이르러서였다. 많은 네덜란드인들이 여전히 인도제도에 대해 낭만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는 것도 당연하다.


(분명 의도한 바는 아니었겠지만 판 레이브룩은 10년 전 벨기에가 콩고에서 벌인 행태에 대한 강렬한 책을 씀으로써 네덜란드 사람들이 흔히 할 법한 반박—"벨기에는 안그랬나?"—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었다.)


'레볼루시'는 이 모든 사건들을 훌륭하게 묘사하고 있다. 하지만 판 레이브룩은 책의 부제에 암시된 주장, 즉 인도네시아가 '현대 세계의 탄생'에 중요했다는 점에 대해 더 과감한 주장을 펼친다. 물론 인도네시아의 투쟁은 아프리카의 반식민지 운동에 영감을 주었고, 1955년 수카르노가 소집한 반둥 회의는 오늘날 '글로벌 사우스'라 불리는 지역에서 중대한 순간이었다. 특히 반둥에서 이집트의 나세르와 중국의 저우언라이의 만남은 수에즈 운하 점령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사건들을 촉발시켰다. 하지만 1949년 중국 공산당의 승리, 1954년 디엔비엔푸에서의 베트남의 승리, 1959년 쿠바의 승리는 인도네시아의 성과를 가릴 정도로 컸다.


강대국들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면서 네덜란드의 자산을 몰수하고 서부 뉴기니 점령을 위한 전쟁을 벌이고 이후에는 말레이시아와 전쟁을 벌인 후, 수카르노의 균형 잡기는 무너졌다. 1965~66년 인도네시아 군대는 또다시 공산당 당원들을 학살했고 인도네시아는 혁명가 지망생들에 대한 반동적 학살을 기도하는 자들에게 더 큰 영감의 원천이 되었다. 1973년 피노체트가 살바도르 아옌데의 좌파 정부에 대해 군사 쿠데타를 일으키기 전, 산티아고의 벽에는 "자카르타가 온다"라고 쓰여 있었다.


그리고 레볼루시는 정말로 '혁명'이었나? 반둥의 열광에 휩싸였던 기자 시스카 파티필로히는 판 레이브룩과의 대화에서 이렇게 인정한다. "하지만 물론 모든 것이 허사가 되었죠." 1965년 좌파 인사였던 남편이 투옥되고 사망한 후, 그녀는 네덜란드에서 평생 망명 생활을 했다. 인도네시아인들 대부분은 메르데카(해방) 이후 수십 년 동안 3층 갑판에 머물렀다. 소수의 정치·군사 엘리트들만이 1층 갑판으로 옮겨가 네덜란드인들의 집을 차지하고 식민지 생활방식을 즐겼다. 1980년대가 되어서야 비로소 많은 평범한 인도네시아인들이 2층 갑판으로 올라가기 시작했는데 그들은 수출용 의류, 신발, 가방을 만들고 대중 관광업에 종사했다.


판 레이브룩은 다시 바다로 나가 술라웨시 근처의 작은 배에 탑승한 장면으로 책을 끝맺는다. 팜유 생산과 오염으로 인한 환경 피해를 개탄하면서 그는 새로운 종류의 혁명이 필요하다고 보고, 세계의 뻐무다들 사이에서 그 주창자들을 발견한다. "젊은이들이 지구 온난화와 생물다양성 손실에 맞선 투쟁에서 변화를 만들어낼 수 없다고 믿는 사람은 지금 인도네시아 역사를 공부할 필요가 있다." 판 레이브룩이 그러하듯, 우리는 그들이 덜 폭력적인 전술을 사용하기를 바라야 할 것이다.



해미시 맥도널드는 호주의 언론인으로 시드니 모닝 헤럴드, 파이스턴이코노믹리뷰의 에디터를 역임했으며 저서로 'Demokrasi: Indonesia in the 21st Century'(2015) 등이 있다.


인사이드스토리는 호주의 문예, 시사 전문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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