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정치

르네 지라르가 JD 밴스와 피터 틸의 사상에 미친 영향

밴스와 틸은 프랑스 철학자 르네 지라르를 스승으로 받들며 가톨릭과 자본주의를 융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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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철학자 르네 지라르(왼쪽), 페이팔과 팔란티어의 창업자 피터 틸, 2024년 미국 대선 공화당 부통령 후보 JD 밴스. /그래픽=PADO /사진=로이터/뉴스1

2024.10.25 1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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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소위 '새로운 우파'에는 여러 인물들이 포진해 있지만 그 중에서 가장 권력에 가까웠거나 앞으로 가까워질 인물은 둘을 꼽을 수 있습니다. 트럼프 1기 행정부에서 '최고 전략가'라는 다소 독특한 직함을 갖고 있던 스티브 배넌과 현재 트럼프 캠프의 부통령 후보인 JD 밴스입니다. 근래 국내에도 출간된 '영원의 전쟁: 전통주의의 복귀와 우파 포퓰리즘'이 배넌의 사상과 그 근간이 되는 유럽의 신반동주의neo-reactionary 사상을 잘 소개합니다. 그에 비해 JD 밴스와 그에게 많은 영향을 미친 피터 틸의 사상은 궤적이 조금 다릅니다. 흥미로운 것은 과거 국내에서도 널리 소개됐던 프랑스 철학자 르네 지라르의 영향이 이들에게서 두드러진다는 것입니다.


최근 유럽 포스트모더니즘 사상이 현대 좌파에 미친 영향에 대한 비판적인 재평가를 여기저기서 읽을 수 있는데(영향력이 컸던 만큼 푸코가 가장 많은 비판을 받으며 일각의 비판은 조르쥬 바타유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포스트모더니즘과는 결이 많이 다른 지라르가 미국의 새로운 우파에 영향을 미쳤다는 것은 흥미로운 일입니다.


미국 정계에서 트럼프 같은 독특한 인물은 다시 나오기 어려울 것 같지만 현재로선 JD 밴스가 그 뒤를 이을 가능성이 매우 높아 보입니다. JD 밴스의 캠페인 행보를 두고는 당장의 대선보다도 그 다음인 2028년을 노리는 듯하다는 평가가 나옵니다. 여기 소개하는 워싱턴대학 종교정치센터에서 발행하는 ARC매거진의 9월 24일자 기사는 지라르가 밴스와 틸에게 미친 영향과 그들의 사상의 특징에 대해 좌파적 관점에서 분석하고 있습니다. 필자의 견해에 대한 동의 여부와 무관하게 가장 유력한 '포스트 트럼프' 공화당 리더의 사상을 미리 엿볼 기회가 될 것입니다. 내용은 철학, 신학, 정치사상을 폭넓게 다루고 있어서 좀 이해하기 까다롭지만 실리콘밸리 '페이팔 마피아'의 리더 피터 틸과 트럼프의 후계자일 수도 있는 JD 밴스가 어떤 종류의 사상에 접해왔는지 약간이나마 알 수 있습니다.


JD 밴스가 피터 틸을 만난 건 2011년 틸이 예일대 로스쿨에서 연설했을 때였다. 밴스는 오하이오주립대에서 예일대 로스쿨로 진학하면서 미국 엘리트 사회 속으로 빠르게 상승했다. 틸은 변호사에서 벤처 캐피털리스트로, 그리고 실리콘밸리 거물로 변신한 인물이었다. 밴스에 따르면, 당시 틸은 "그렇게 유명하진 않은 인물"이었지만 이미 주목할 만한 경력을 가지고 있었다. 틸은 페이팔의 창립자였고, 포춘지의 기자 제프리 M 오브라이언이 "페이팔 마피아"라고 불렀던 네트워크의 "대장"이었다. 이 네트워크는 실리콘밸리와 그 너머에서 주요 인물이 된 페이팔 직원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틸은 실리콘밸리 세계에 속해 있었지만, 어떤 면에서는 그 세계의 일부가 아니었다. 스탠퍼드대학 재학 시절 보수적 신문인 '스탠포드 리뷰'를 창간한 이래로, 틸은 이단적이고 늘 통념에 반하는 기업가였다. 증권 변호사로 잠시 일한 후 그는 금융 분야로 진출했고, 그 다음에는 빅테크 분야로 들어가 페이스북을 포함한 실리콘 밸리의 가장 주목할 만한 회사들을 설립하거나 투자했다. 하지만 그는 실리콘 밸리의 순응주의적 자유주의와는 거리를 두었다.


틸은 2011년 연설에서 예일대 로스쿨 같은 곳의 엘리트들이 동료들과의 경쟁에 지나치게 집중하여 아무런 생각 없이 명성의 사다리를 오르고 있다고 주장했다. 졸업생들은 진정한 가치나 지속적인 가치를 창출하는 데는 제대로 집중하지 않았다. 그리고 밴스가 2020년 '더 램프The Lamp'에 쓴 블로그 포스트에 따르면, 틸은 "초경쟁적인 직업에 갇힌 엘리트 전문가들"의 문제를 더 광범위한 기술적, 경제적 침체와 연결시켰는데 그 원인은 기술을 사용해 삶을 개선하려는 능력이나 의지 부족이라고 주장했다. 틸은 경쟁을 피하고 대신 다른 사람들이 경쟁을 생각하지 않는 곳에서 실제 가치를 창출(그리고 포착)하는 데 집중하라고 조언했다.


밴스는 자신이 "성취에 대한 집착"을 가지고 있었다고 하는데 이는 부분적으로 사고의 깊은 순응성에서 비롯되었다. 그는 의미 있는 것을 성취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공허한 "사회적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엘리트 집단에서 승진하기를 원했다. 따라서 틸의 주장은 밴스에게 공감을 불러일으켰고 그를 새로운 여정으로 이끌었다. 이 여정에는 그의 모태신앙이었던 개신교를 버리고 가톨릭을 받아들이는 것도 포함됐다.



밴스와 틸 사이에 공감대가 있었던 이유는 명확하다. 틸 역시 자신의 이야기를 기존의 능력주의적 구조에 의해 실패한 사례로 이야기한다. 예일대 로스쿨 강연에서 그의 메시지는 아마도 초경쟁적이었던 과거의 자신에게 하는 조언이었으리라. '동료들과 주변 세계의 가치관을 맹신하지 마라.' 그들은 당신이 로펌의 시니어 파트너가 되기를 원하지만 당신이 무리를 따라다닌다면 절대로 (틸의 2014년 비즈니스 저서의 제목을 빌자면) '제로에서 원으로Zero To One' 갈 수 없을 것이다.


역대 최고령 미국 대통령의 유고 시 그를 대신해 대통령이 될 수도 있는 JD 밴스를 이해하려면 우리는 지라르를 이해해야 한다


밴스와 틸은 친구가 되었다. 틸은 밴스의 2016년 베스트셀러 회고록 '힐빌리의 노래'에 추천사를 썼다. 밴스는 2년 동안 틸의 벤처캐피털 회사인 미스릴캐피털에서 일했다. 틸의 지원으로 밴스는 나리아캐피털을 공동 설립했다. 나리아캐피털은 밴스가 회고록에서 다뤘던 러스트벨트 지역의 기업들을 지원하는 데 집중했지만 또한 더 일반적으로는 그가 실리콘밸리의 "빅테크 과두제"의 정치적 한계와 편견이라고 여겼던 것에 반대했다. 나리아가 투자한 기업 중에는 보수적인 동영상 공유 플랫폼인 럼블Rumble이 있었는데 틸도 이 회사에 투자했다. 또한 틸은 밴스의 정치 경력에 후한 기여를 했다. 2022년 밴스는 트럼프와 MAGA 운동에 대한 자신의 과거 비판을 철회하고 오하이오주 상원의원에 출마했다. 틸은 밴스의 출마를 지지하는 슈퍼PAC에 1500만 달러(170억 원)를 기부했다.


틸의 능력주의 비판을 얼핏 좌파 입장에서의 비판으로 오해할 수 있다. 하지만 틸은 오히려 극우의 입장에서 신자유주의를 비판하는 것이다. 틸은 민주주의에 회의적이 되었고, 군주제가 민주주의보다 우월하다고 주장하는 신반동주의 블로거 커티스 야빈Curtis Yarvin의 경력과 사상을 홍보하는 데 깊이 관여해 왔다. 밴스 역시 야빈이"대성당Cathedral"—다른 곳에서는 '딥스테이트'라고 부른다—이라고 부르는 것에 대한 야빈과 틸의 공격에 찬사를 표현했다. '대성당'과 '딥스테이트'는 연방 정부를 구성하는 직업 관료제와 여기에 부역하는 학계와 언론계의 리버럴(좌파)들을 말한다. 이런 식으로 틸과 밴스는 모두 포스트-리버럴 우파post-liberal right라고 불리는 것의 일부다. 야빈처럼 그들은 야빈이 미국 사회의 "하드 리셋" 또는 "재부팅"이라고 부르는 것의 일환으로 '모든 공무원 해고Retire All Government Employees'(RAGE)를 주장한다.


틸과 밴스의 신반동주의 사상과의 연관성에 대해서는 이미 많은 글이 쓰여졌다. 이는 정말로 경악스러운 일이긴 하다. 하지만 밴스와 틸 사이의 가장 중요한 지적 유대는 직접적으로 정치적이지는 않다. 그러나 이 역시 경악스러운 정치적 결과를 낳을 수 있다. 틸은 밴스가 포스트-리버럴 신반동주의 세계로 전환하는 것을 돕는 것 외에도, 밴스에게 철학자이자 문학평론가인 르네 지라르René Girard의 작품을 소개하는 데 중대한 역할을 했다. 틸이 밴스에게 미친 가장 깊은 영향은 지라르의 사상—그의 모방mimetic 이론과 '희생양' 메커니즘—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역대 최고령 미국 대통령(트럼프가 당선될 경우)의 유고 시 그를 대신해 대통령이 될 수도 있는 JD 밴스를 이해하려면 우리는 지라르를 이해해야 한다.




르네 지라르(1923~2015)는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문학평론가로 자신의 '모방 이론'을 발전시키고 성스러운 폭력에 대해 글을 쓴 것으로 가장 널리 알려졌다. 보편적 인류학—기독교적 함의가 강하긴 하지만—을 구축하면서, 지라르는 인간의 욕망이 근본적으로 모방적이라고 주장했다.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이 욕망하는 것을 욕망한다. 그리고 모두가 같은 자원을 두고 경쟁함에 따라 폭력은 공동체 전체로 퍼진다. 폭력은 일반화되고 그 강도와 힘이 점증한다. 이 폭력을 잠재우기 위해서는 상징적인 범인을 찾아 공동체에서 제거해야 한다. 이렇게 희생양 메커니즘이 탄생한다. 지라르에 따르면, 희생양 메커니즘은 공동체가 폭력을 상징적인 희생에 집중시키고 일시적으로나마 '클린 슬레이트' 즉 깨끗한 상태로 되돌려 놓음으로써 격렬한 갈등을 해결할 수 있게 한다.


최초의 희생양은 레위기 16장에서 욤키푸르 의식의 일부로 등장한다. 염소 한 마리는 희생되고 다른 한 마리는 살아남아 이스라엘 백성의 죄를 성막에서 멀리 짊어지고 간다. 하지만 지라르는 희생양 메커니즘을 보편적이라고 본다. 모든 종교 사회는 모방적 욕망에서 비롯된 경쟁과 폭력을 이런저런 희생양의 희생으로 전환한다. 물론 희생양의 희생이 폭력을 오랫동안 잠재우지는 못한다. 이 사이클은 다시 시작되어야 한다. 그러나 지라르의 관점에서 기독교는 희생양의 역사에서 새로운 것을 나타낸다. 기독교의 희생양 신화는 그리스도가 무죄일 뿐만 아니라 전능하다는 것을 인식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공동체는 그리스도를 희생시키지만 기독교인은 희생양 메커니즘이 근본적으로 부당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지라르에 따르면, 기독교는 공동체의 모든 죄를 짊어진 사람을 만들어내는 대신 전능하면서도 완전히 무죄인 사람, 그래서 자신의 공동체의 희생자가 되는 사람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기독교에서 희생양은 사실 피해자이자 성스러운 희생자다. 게다가 그리스도의 형태로 나타난 우월한 존재는 자신이 부당하게 순교당하는 걸 허용하며 그렇게 함으로써 희생양 과정의 부당함을 드러낸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기독교인들이 자신들의 모방적 욕망을 재조정하는 계기가 된다. 같은 자원을 놓고 경쟁하는 다른 인간들을 모방하는 대신, 기독교인들은 이제 그리스도를 모방하고 그리스도를 통해 신을 모방하려고 노력한다. 따라서 적어도 이론상으로는 모방적 폭력의 순환이 끝나게 된다.


그러나 기독교 이야기는 역설적으로 희생양을 세속화하는 결과도 가져왔다. 기독교 이전의 사회들은 모방적 욕망의 과잉 폭력을 은폐하는 수단으로 신화에 의존했다. 공동체는 자신들이 공동체 갈등의 원인을 잡았다고 자축할 수 있었다. 그러나 계몽주의 사상가들에게 희생양 신화는 더 이상 힘이 없었다. 이런 방식으로 기독교는 계몽주의의 토대 형성에 기여했다. 그러나 계몽주의는 희생양 신화와 함께 신을 거부함으로써 모방적 욕망을 진정시키거나 방향을 바꾸는 데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대신 모방적 경쟁과 질투의 오래된 메커니즘이 계속되었다. 이제 공동체를 만족시킬 방법이 없었다. 모두가 하나(희생양)를 대상으로 하는 전쟁이 다시 홉스식의 '만인의 만인에 대한 전쟁'(포스트모던 버전)이 될 위험이 있었다. 어쨌든 이것이 바로 지라르가 "무신론은 기독교의 발명품"이라고 주장할 때 뜻하는 바다.


지라르의 사상은 인류학에서 연원한 학제적 문학 비평의 긴 역사에서 나왔다. 우리는 프로이트('토템과 터부'), 프레이저('황금가지'), 뒤르켐, 니체, 그리고 프랑스의 사회학자이자 범죄학자인 가브리엘 타르드Gabriel Tarde의 저작에서 그 선구자들을 발견할 수 있다. 이들 사이의 갖은 연관성을 탐구하는 학술 문헌이 많이 있고 계속 늘어나고 있다. 지라르의 사상이 과거 이론들과의 단절을 나타내는지, 아니면 이들의 종합적 정점이나 완성된 형태 같은 것을 나타내는지는 아직 학자들 사이에서도 논쟁의 대상이다. 지라르는 프레이저의 영향을 인정했고 타르드의 영향은 부인했다.


그러나 학계 안팎에서 지라르가 이 이론들과 가장 많이 연관되게 만든 것은 피터 틸의 후한 재정적 후원 덕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틸은 스탠퍼드대학 학부생 시절에 지라르를 알게 됐다. 그는 지라르의 아이디어에 매료되어 지라르의 모방 이론을 발전시키고 연구하는 데 전념하는 조직인 이미타티오Imitatio를 설립했다. 틸은 이후 르네 지라르 강연 시리즈를 포함하여 지라르 사상에 대한 다양한 컨퍼런스를 후원했다. 틸이 지라르의 사상을 지지하고 홍보하는 데 얼마나 많은 돈을 썼는지에 대한 확실한 추정치는 찾지 못했다. 하지만 연구 보조금, 출판, 교육 프로그램 및 기타 활동에 대한 그의 자금 지원을 고려하면, 스콧 앨런 루카스Scott Alan Lucas가 쓴 대로 그 금액이 수백만 달러에 이른다고 추정하더라도 허황된 생각은 아닐 것이다.


틸은 또한 2023년 워싱턴DC 소재 가톨릭대학Catholic University에서 열린 'NOVITATE' 컨퍼런스를 포함하여 지라르가 그의 사상에 미친 깊은 영향에 대해 여러 차례 말하고 글을 썼다. 컨퍼런스 연설에서 틸은 우리가 두 가지 도전에 직면해 있다고 주장했다. 실존적 위험으로 인한 종말Apocalypse과 전체주의적 세계 정부의 등장으로 대표되는 적그리스도Antichrist다. 오늘날 젊은이들에게 이 난제에 대한 해결책은 "교회에 가는 것"이라고 한다. 틸이 다른 곳에서 자신을 "종교적religious이지만 영적spiritual이지는 않다"고 묘사했고 특정 교파에 속하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것을 고려하면 이는 이상한 표현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을 기독교인이라고 설명한다.




지라르가 틸이 공저한 책 '다양성의 신화The Diversity Myth'(1995)에 대해 지지하는 추천사를 썼긴 했지만 그는 노골적으로 정치적 성향을 띤 작가는 아니었다. 그러나 지라르의 사상이 포스트- 리버럴 우파 지망생들에게 지적이고 영적인 위안을 제공할 수 있는 이유를 이해하기란 어렵지 않다. 지라르는 지배 기구들에 대한 사회적 비판을 제시하면서도 그 기구들이 일으키는 문제들에 대한 유물론적 설명을 피한다. 그의 도식에서 우리의 문제는 착취나 빈곤이 아닌 인간 욕망의 기이함—근본적으로 모방적인 인간의 본성—에 기인한 것이다. 그래서 해결책은 궁극적으로 종교적이고 기독교적이다. 바로 우리의 모방적 충동을 최고의 선—예수 그리스도 안에 계신 하나님—에 종속시키는 것이다.


2004년, 틸은 종말에 관한 일주일 짜리 컨퍼런스를 후원했고, 그곳에서 '(레오) 스트라우스적 모멘트The Straussian Moment'라는 제목의 강연을 했다. 나중에 '정치와 종말Politics and the Apocalypse'(2007)에 실린 이 에세이는 2001년 9월 11일 테러 공격에 대한 틸의 견해를 개략적으로 설명한다. 이 에세이는 틸의 가장 인상적이고 독창적인 정치적 서술로 손꼽히며 그가 지라르의 사상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게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틸에게 9/11 테러는 자유민주주의가 일반적으로 갖고 있는 세속주의적 전제의 결함을 드러냈다. 억제할 수 없는 적—칼 슈미트적인 피아 구분을 잊지 않은 적—에 직면하여, 서구는 그들의 정치신학 핵심 원칙들(또는 정치신학이 없어도 된다는 믿음)을 재고해야 했다. 존 로크와 다른 계몽주의 사상가들은 틸이 '미국식 타협'이라고 부르는 것을 만들어냄으로써 근본적인 이데올로기적 차이를 제거하려고 노력했다. 이는 우리가 인류학과 신학의 근본적인 질문들을 일단 한켠에 밀어둘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다. 로크는 미국 건국자들이 기독교의 공적 형태는 유지하면서도 그 형태에서 역동적인 정수를 제거할 수 있게 하는 지적 틀을 구축했다. 우리 인간이 무엇인지는 근본적으로 알 수 없지만 우리는 우리의 본성에 대한 질문을 한켠으로 치워두고 수익성 있는 형태의 무역과 경제 발전을 계속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9/11에 미국을 공격한 테러리스트들은 이러한 근본적인 질문들을 잊지 않았다. 틸은 그들이 세속적인 문제에 의해 동기부여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들은 오히려 서구의 이상에 근본적으로 반대했다. 그러나 그들이 미국식 타협을 용납하지 않으려는 태도는 까다로운 문제들을 야기했다. 만약 미국이 이 새롭게 등장한 적과 그들의 방식으로 싸운다면 미국은 단순히 적의 거울이 될 뿐이며 적이 승리하게 될 것이다. 게다가 서구는 자력으로 근본적인 차이와 인간 본성에 대한 질문들을 한켠에 치워두기 이전의 시기로 돌아갈 수 없었다. 계몽주의가 입힌 손실은 어떤 의미에서 돌이킬 수 없는 것이었다. 신은 계속 죽어 있고 땅 속에 묻혀 있을 것이었다.


지라르는 틸이 이러한 조심스럽게 비관적인 결론에 도달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물론 틸은 희생양 이야기의 기독교적 전복에 대한 지라르의 설명에서 희망을 발견한다. 지라르처럼 그도 그리스도의 이야기에서 모방적 폭력을 통제하고 평화를 가져올 최종 기제를 본다. 그러나 틸의 설명에 따르면, 우리는 이 포스트모던 세계에서 희생양 만들기가 일어나는 기제를 너무나 잘 알게 되었다. 우리는 공동체의 폭력을 전환하고 해소할 수 있는 수단을 폭로했지만 (기독교 밖에서는) 더 평화로운 세계를 만들지 못했다. 외려 모방적 욕망은 새롭고 더 파괴적인 형태를 띨 수 있다. 어떻게든 기독교인들은 정치 영역에서의 행동을 포기하지 않으면서 재림을 기다려야 한다.


틸의 에세이에서 놀라운 점은 부시 시대의 정치적 이슬람에 대한 상투적인 표현들을 뒤집는다는 것이다. 많은 전문가들은 이슬람이 아직 자체적인 종교개혁을 겪지 않았다는 류의 주장을 제시했다. 이와 대조적으로 틸은 약간 모호한 표현으로, 미국식 타협이 없애버린 신앙과 진지함에 대해 거의 향수를 느끼는 것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례별로 결정되는 폭력과 평화 사이의 새로운 실용적인 균형을 찾기 위해 앞으로 나아가야 했다. 언젠가 재림이 있을 것임을 염두에 두고, 틸은 "기독교 정치인"이 "통제가 불가능한 모방의 무한한 폭력"과 "하느님 나라의 평화" 사이에서 사려 깊은 균형을 찾아야 할 것이라고 쓴다. 그는 "모든 어려운 경우에 평화의 편에 서는 것이 현명할 것"이라고 주의를 준다. 그는 지라르의 평화 촉구를 긍정하고 싶다. 하지만 동시에 국가안보기관이 레오 슈트라우스적 수단을 통해 조용히 적에게 전쟁을 수행할 수 있기를 원한다.




이러한 암울한 결론에서 커티스 야빈의 준파시스트적 군주제의 일종으로 넘어가는 게 어렵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세상은 모방적 폭력의 부패한 춤이다. 우리가 바랄 수 있는 최선은 개입하여 혼돈을 관리하고, 조용한 효율성으로 필요한 일을 할 수 있는 강력하고 현명한 CEO 같은 인물이다. 이는 전통적인 의미의 자유주의나 신자유주의가 아니라 일종의 이념적 기술봉건주의techno-feudalism다.


정치철학의 세부적인 내용을 떠나서, 지라르의 기독교 이야기 전복에 대한 설명은 틸과 밴스에게 각기 다르지만 연관된 감정적 작용을 한다. 틸이 지라르의 사상을 설명하는 방식에서 그리스도가 얼마나 자유지상주의libertarian적 기업가처럼 보이는지 알아차리기란 어렵지 않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는 집단에 의해 희생된 전능한 개인이다. 독점기업가로 미덕과 선의 시장을 장악하고 있으며, 선함에도 불구하고 희생되는 게 아니라 바로 그 선하다는 사실 때문에 희생되는, 거의 아인 랜드Ayn Rand적인 영웅이다. 공동체는 이 기적적인 희생양을 파괴함으로써 그를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신성을 확인한다. 틸이 그리스도에게서 (일자리) 창조주로서의 자신의 모습을 본다고 생각하는 건 너무 무리한 상상일까?


이는 너무 번지르르한 해석일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실제로 '움츠린 아틀라스Atlas Shrugged'의 프로메테우스적 영웅들처럼, 틸이 재구성한 지라르의 그리스도는 톨킨, 아시모프, 하인라인의 열렬한 독자들이 가진 청소년기 권력 환상의 모든 매력을 지니고 있다.


밴스 역시 지라르의 그리스도 설명의 매력을 묘사하지만 그리스도 이야기는 그에게 약간 다른 감정적 작용을 한다. 밴스는 자신의 공동체에 책임을 묻고 싶은 욕구와 '힐빌리의 노래'와 다른 곳에서 그가 기록한 탈산업화에서 비롯된 문제들이 사회적 뿌리를 가지고 있음을 마지못해 인정하는 것 사이에서 갈등한다. 이는 그의 회고록이 가진 불편한 양가성에서 이미 명백하게 드러나는 위선적 태도다. 그는 조부모에게는 동정심을 보이면서도, 그가 비난하려는 자신의 어머니와 조부모가 매우 닮았음을 상상하기를 꺼린다. 가브리엘 위넌트가 n+1 매거진에서 날카롭게 지적한 대로 "회고록 작가로서의 밴스와 정치인으로서의 밴스를 연결하는 것은 그를 만든 것—그가 책에서 탐구하는 척하는 트라우마의 본질—과 직면하기를 거의 절대적으로 회피하는 태도다."


2020년 가톨릭으로 개종한 데 대한 설명에서 밴스는 지라르 사상의 매력을 설명한다. 그는 이렇게 쓴다.


"나는 우리의 나쁜 행동을 사회적인 동시에 개인적이며, 구조적인 동시에 도덕적인 것으로 이해하는 세계관을 절실히 원했다. 우리가 환경의 산물이라는 것을 인식하고 그 환경을 변화시킬 책임이 있지만 우리가 여전히 개인적 의무를 지닌 도덕적 존재라는 것을 인식하는 세계관. 이혼과 약물중독의 증가에 대해 그것들의 부정적인 사회적 외부효과에 대한 소독된 결론이 아니라 도덕적 분노로 말할 수 있는 세계관을 원했다."


밴스가 자신의 고향 공동체의 병리적 현상에 대해 누구를 비난해야 할지 혼란스러워하는 것은 사회학의 오래된 행위자-구조agent-structure 문제를 상기시킨다. 이는 학자들이 사회적 결정론과 우리가 개인적 행위자, 즉 주체로서 행동한다는 관찰을 어떻게 조화시킬 것인가를 두고 논쟁하는 문제다. 밴스에게도 이러한 입장들은 신자유주의적 이중 구속을 형성한다. 진보는 공동체의 정신적 문제 해결을 정부에 요구하는 반면, 보수는 그 부담을 개인에게 떠맡긴다.


지라르는 밴스에게 이 모순을 극복하고 오래된 통념을 초월하는 포스트-리버럴 보수주의를 찾을 수 있는 지적 기제를 제공한다. 지라르를 읽은 밴스는 이렇게 결론 짓는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비난을 전가하고 우리 자신의 부족함을 희생자에게 떠넘기려는 우리의 노력이 무엇인지를 본다. 그것은 다른 사람에게 폭력적으로 투사된 도덕적 실패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불완전함을 드러내고, 우리 사회가 선택한 희생자들을 비난하기보다는 우리 자신의 결점을 바라보도록 강요하는 희생양이다."


우리 중 누구도 자신의 운명의 주인이 아니다. 이 관점에서 볼 때 우리의 욕망이 근본적으로 파생적이고 모방적인데 우리가 어떻게 그럴 수 있겠는가? 하지만 결국 답은 우리 공동체의 문제에 대한 책임을 구조적이거나 사회적인 힘에 돌리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 제시하는 해결책은 사회적 개혁이 아닌 영적 개혁인 것 같다. 밴스는 자발적 희생자로서의 그리스도의 지위에서 더 매력적인 길을 본다. 따라서 밴스의 지라르는 우리 자신의 문제를 다른 사람들의 탓으로 돌리는 병리적 경향에 대한 설명을 제공하지만, 이 통찰이 사회결정론과 도덕적 책임 사이의 모순을 어떻게 극복했는지에 대해서는 막연하다. 밴스가 자신의 지적 형성에 대한 설명에서 이 순간에 도달하자마자 서사는 중단된다. 밴스는 다시 주제를 바꾼다.


밴스가 이러한 주장들을 어떻게 조화시키는지 궁금하다. 그는 자신의 주장이 연민 어린 자기 비판에 근거한다고 하지만, 최근 그가 노골적으로 오하이오주 스프링필드의 아이티 이민자들과 난민들을 희생양으로 삼은 것과는 상반된다. 그의 답이 무엇이든, 밴스가 희생양 만들기가 사회 질서를 유지하고 계몽되지 않은 대중의 열정을 재방향화하는 신화로 사용되는 방식에 대해 설명하는 철학적 문헌을 읽어왔다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밴스가 스프링필드에 사는 아이티인들에게 피난처를 제공하는 것의 영향에 대해 이야기를 꾸며내고 인종차별적 밈meme을 퍼뜨릴 때, 그는 그러한 선동적인 신화들을 되살리기를 바라는 것 같다.




틸의 독특한 기술-자유지상주의와 밴스의 출산 장려 가톨릭주의 사이의 동맹이 보수 사상의 역사에서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라고 주장할 수도 있다. 결국 이 동맹은 1950년대 윌리엄 F 버클리 주니어와 프랭크 메이어가 '내셔널리뷰'에서 만들어낸 융합주의fusionism에서 그 선례를 찾을 수 있다. 융합주의는 사회적 보수주의자, 자유시장주의자, 반공 매파를 한데 모았고, 로널드 레이건의 당선으로 절정에 달했다. 그리고 멜린다 쿠퍼Melinda Cooper가 2019년 저작 '가족 가치: 신자유주의와 새로운 사회적 보수주의Family Values: Between Neoliberalism and the New Social Conservatism'에서 주장하듯이, 밀턴 프리드먼과 게리 베커 같은 자유시장 사상의 선구자들은 놀랄 만큼 보수적인 사회적 비전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진보적 복지국가의 대체물로 가부장적 핵가족을 그들의 세계관의 중심에 두었다.


옛 융합주의는 때때로 포스트-자유주의 우파로부터 개인의 자율성에 너무 집중한다는 비판을 받는다. "[자유지상주의자들의] 경제적 편의성에 대한 집중은 평범한 사람을 경제적 기계의 톱니바퀴로 취급한다." 조이 바레타Joey Barretta는 썼다. "마찬가지로 자유지상주의자의 기본적인 자유관이 조장하는 방종의 문화는 평범한 사람들의 도덕과 대립된다." '퍼스트 싱스First Things'에 실린 공저 에세이는 이제 트럼프 이전의 보수주의로 돌아갈 수 없다고 주장했다. "보수주의는 너무 자주 자유주의와 똑같은 지향점—개인의 자율성—을 따랐다. 자율성의 숭배는 역설적으로 대다수의 보수주의자들이 가장 혐오한다고 주장하는 바로 그 폭정을 낳았다." 그러나 쿠퍼의 책은 이러한 비판이 기껏해야 과장되었음을 보여준다. 신자유주의 인류학은 자유주의 인류학이 아니다. 신자유주의 하에서 자유로운 개인은 매우 유연한 인적 자본의 묶음으로서의 인간으로 대체되며, 이러한 관점에서 아이들은 가족의 인적 자본 포트폴리오의 일부일 뿐이다.


틸의 자유지상주의와 밴스의 출산장려주의의 정치적 동맹은 같은 전략을 따르는 것으로 보인다. 틸과 밴스가 무얼 공유하는 지에 대한 보다 적절한 유물론적 분석은 그들이 모두 로버트 브레너Robert Brenner가 '장기 침체Long Downturn'라고 부른 것의 산물이라는 점을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1970년대 초에 시작된 수익성 하락, 탈산업화, 노동조합 쇠퇴의 시대를 말한다. 틸은 전후 미국이 경험했던 것 같은 급격한 경제 성장의 시대를 향수한다. 그러나 그는 지속적인 성장의 부족을 거시경제적 힘이나 노동 대신 자본 수익 증가를 강조한 신자유주의 정책의 탓으로 돌리기보다는 영적 문제의 탓으로 돌리려 한다. 마찬가지로 밴스의 출산장려주의와 백인 노동자 계급에 대한 찬사는 비슷하게 (높은 노조 조직률을 가진) 힘이 있던 시절을 높이 평가하지만, 또다시 대화를 솔직히 말해 바보 같은—그렇다고 해서 무해하진 않은—"대성당", 딥스테이트, 또는 온라인 우파가 다음에 만들어 낼 어떤 터무니없는 '반지의 전쟁'에 나올 법한 관념에 대한 신파시스트적 공격으로 방향을 돌린다.


그러나 틸과 밴스의 지라르와의 관계는 이러한 주장을 복잡하게 만든다. 원래의 융합주의자들을 결합시킨 것은 결국 극단적인 반공주의였다. 물론 그들에게는 국내의 경쟁자와 반대자들이 있었지만 이분법적 피아 구분은 미국을 전 세계의 이익을 위해 패배시켜야 할 외부 세력에 대립하는 존재로 상상했다. 이와 대조적으로, 밴스와 틸은 세상을 다른 방식으로 구분한다. 세상을 개혁하기보다는 세상을 떠나 재림을 기다리려고 한다는 것이다. 만약 포스트모던 세계에서 일반화된 모방적 폭력을 피할 수 없다고 말한 지라르가 옳다면, 아마도 할 수 있는 최선은 방주를 짓는 것일 것이다. 아시모프의 유명한 공상과학 시리즈인 '파운데이션'에서 영감을 받은 권위주의적 해상 공동체나 기술봉건주의적 차터 도시charter city를 만들고 다가올 대홍수를 기다리는 것이다. 하지만 먼저 그러한 피난처의 건설을 막으려는 연방 관료들을 물리쳐야 한다.


틸은 주권국가의 형태 자체를 견디지 못하는 듯한 해상정착, 우주여행, 사이버자유지상주의 유토피아의 비전을 명확히 표현한 바 있다. 그의 표현은 최근 몇 년 동안 더 국수주의적이 되었지만 더 나은 미래에 대한 그의 진정한 비전은 차터 도시에 대한 요구—발라지 S 스리니바산의 '네트워크 국가' 또는 야빈이 '패치워크'라고 부른 것—와 더 비슷하다. 이 모든 것은 국가를 떠나 관료와 기술관료적 리버럴들의 귀찮은 제약에서 벗어나 수천 개의 신파시스트적 또는 기술자유방임주의적 꽃들이 피어나도록 함으로써 전통적인 정치를 우회하려고 한다.


트럼프의 부통령 후보가 되기 전, 밴스는 팟캐스트 인터뷰에서 트럼프가 연방 관료제를 구성하는 기관들을 해체하는 것을 우선시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트럼프가 "좌파의 기관들을 장악하고", "모든 중간급 관료들을 해고하고", 만약 대법원이 그를 막으려 한다면 이를 무시해야 한다고 했는데 이는 본질적으로 커티스 야빈과 최근의 '프로젝트 2025'의 저자들이 제시한 전략을 따르는 것이다. "저는 미국 엘리트와 미국 엘리트 내 나의 역할에 대해 뭔가를 보고 깨달았는데, 이를 파악하는 데 시간이 좀 걸렸어요. 레드필을 먹게 된 거죠." 밴스는 다른 인터뷰에서 설명했다. "우리는 공화국 말기에 있어요... 만약 우리가 이에 맞서 싸우려면 꽤나 과격하고 꽤나 극단적으로 가야 할 겁니다. 오늘날 많은 보수가 불편해하는 방향으로 가야 할 거예요." 정말 극단적이다.


따라서 틸과 밴스를 단결시키는 진정한 적은 국가 내부와 민주적 주권을 행사하려는 국가들 중에서 찾을 수 있다.


통제를 벗어난 세속적 모방의 세계에 저항하고 이를 탈출하려는 이 노력으로 인해 끝없는 복잡성이 발생한다.


반론도 있을 수 있다. 예를 들어 피터 틸이 정말로 국가 권력을 반대하는 사람이라면 그가 창업한 팔란티어Palantir Technologies 같은 기업이 국가 안보 기관과 직접적으로 협력하는 걸 용인했겠느냐고 지적할 수 있다. 팔란티어는 미국 이민세관단속국이 추방 대상자들의 프로필을 만드는 데 도움을 주는 소프트웨어를 제공했다. 브라이언 도허티가 '리즌' 매거진에서 지적했듯이, 요즘 틸은 자유지상주의자보다는 노골적인 내셔널리스트에 더 가까워 보일 때가 많다.


그리고 물론 밴스는 그가 평소에 비난하는 딥스테이트의 부통령이 되기 위해 출마했다. 만약 밴스가 대통령이 된다면, 그가 자신의 많은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딥스테이트의 모든 힘을 열정적으로 사용할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으리라. 그리고 물론 트럼프의 포퓰리즘에 대한 각종 주장에도 불구하고 그가 평범한 공화당 대통령처럼 통치를 했다고 반박할 수도 있다. 억만장자들의 세율을 삭감하고 연방 관료제를 완전히 엉망으로 만들고 우리의 정치를 더욱 양극화하는 등.


따라서 밴스와 틸이 공유하는 공약의 중요성을 평가할 때 우리가 해야 할 과제는 그들의 아이디어를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다. 그들의 아이디어는 모방적 욕망이라는 철학적 전문용어로 포장되어 있더라도 지극히 어리석을 때가 많기 때문이다. 오히려 우리가 그들의 말을 표현한 그대로 받아들여야 할 가능성을 고려하는 것야말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이다.다. 틸이 "더 이상 자유와 민주주의가 양립할 수 있다고 믿지 않는다"고 말할 때, 우리는 그가 자신의 의도를 정확히 표현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음을 이해해야 한다. 또한 JD 밴스의 당선으로 그가 곧 정확히 자신이 원하는 걸 얻게 될 수 있다는 것도.



리 콘스탄티누는 메릴랜드대학교 영문학 교수로 소설 '팝 어포칼립스'와 문학사 연구서 '쿨 캐릭터: 아이러니와 아메리칸 픽션' 등을 썼다.


ARC매거진은 워싱턴대학교 세인트루이스 존 댄포스John C Danforth 정치종교센터에서 발행하는 미국 종교, 정치, 문화에 관한 온라인 저널이다. 위 기사는 '실리콘밸리의 신'이라는 원제로 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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