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레나 칼라프 투파하의 시집 '살아감에 대한 어떤 것' 표지. /사진제공=University of Akron Press
2025.02.28 15:39
2023년 10월부터 시작된 이스라엘과 하마스 사이의 전쟁은 15개월에 걸친 전투와 폭격을 거친 후 올해 1월에야 휴전으로 마무리되었다. 가자 지구에서는 오랜 세월에 걸쳐 국지전이 자주 발발해 왔지만, 대규모 전면전으로 급속하게 확대된 이번 전쟁은 사상 초유의 민간인 살상을 초래했다. 얼마 전까지도 현재형으로 진행되던 이 비극의 현장이 문학에는 어떻게 나타나고 있을까? 이런 궁금증이 일던 무렵, 2024년 전미도서상(National Book Award)을 수상한 레나 칼라프 투파하(Lena Khalaf Tufaha)의 시를 만나게 됐다.
아랍계 미국인인 투파하는 시집 <살아감에 대한 어떤 것>(Something about Living)에서 전쟁의 상흔으로 너덜너덜해진 가자 지구를 바라보며 침통한 심경을 드러낸다. 학교나 병원 등의 민간 시설들이 속절없이 무너져 가고 어린아이들까지 참혹하게 죽어가는 처절한 상황 앞에서, 시인은 분노하고 좌절한다. 하지만 한편으로, 투파하의 시에는 이 고통의 시간을 감내하는 가운데서도 힘겹게 부여잡은 한 줄기 희망이 함께 나타나 있다. 시인은 인간의 존엄성이 말살되는 현장을 고발하면서도, 여전히 타자와의 공존을 노래하고 공동체의 재건을 꿈꾼다. 투파하의 시는 지나친 낙관을 조심스레 배제한 채 희망의 메시지를 전달하면서 비극을 묵묵히 견뎌내는 문학의 깊은 저력을 보여 준다.
레나 칼라프 투파하 - 30일의 금요일에 우리는 복수형을 숙고한다 (번역: 조희정)
국경에, 한 무리의 기자들,
희생되는 타이어들이 우리 뒤에서 불타고,
피크닉 텐트 아래에선, 가족들의 장례식,
우리가 모여서, 우리가 그 아슬아슬한 위기를 향해 우리의 목소리를
나를 수 있다면, 우리는 가자 지구에서 다른 무엇이 될 수 있을까?
우리는 질주하는 기도와 맞닥뜨린다,
수의 같은 습한 공기에 구멍을 내며 외쳐대는
낭송 소리들. 우리는 망상 같은 안부의 말들과
맞닥뜨린다, 포옹들 사이사이 초현실적인
'평화가 우리 위에 임하길', 발사 준비가 완료된
지평선. 우리에게 임한 상황은
자비를 요구한다. 복수형이 우리의 귀환이
되게 하라. 축복의 말들이 맞이한 대학살—
깨진 약속으로부터, 거추장스러운 기다림으로부터
놓여난 시체들.

2024년 전미도서상 시상식에 참석한 레나 칼라프 투파하. /사진=AP/뉴시스
이 시에서 시인이 고발하는 현실은 종교를 구성하는 언어적 요소들과 강한 대비를 이루면서 제시된다. 사랑과 선행, 자비를 설파하는 말들은 아무런 힘도 갖지 못한 채 산산이 부서지고, 그 말들에 걸었던 기대는 되풀이해서 좌절되고 만다. "기도"는 질주하듯 달려가며 "낭송 소리들"을 지극히 헛된 것으로 만들고, 종교적 의미를 담은 "안부의 말들" 역시 한낱 "망상"에 불과한 것이 되어 버린다. 그도 그럴 것이, 지옥 같은 살육의 현장에서 "평화가 우리에게 임하길" 따위의 인사말을 습관적으로 서로에게 건네는 상황이란 얼마나 모순적이며 그래서 또 얼마나 더욱 잔인한 것일까?
시인에게 전쟁은 육신의 생명을 앗아가는 참혹한 현실이면서, 동시에 "축복의 말들"로 가득한 종교적 언어 체계 자체를 무너뜨리는 "대학살"의 사건이다. 시의 마지막 부분에서 투파하는 "깨진 약속들과 거추장스러운 기다림으로부터 놓여난 시체들"을 호명한다. 이 구절은 현실의 분쟁 속에서 희생된 이들에 대한 애도를 담아내는 듯 보이지만, 그에 더해 시인은 "시체들"이라는 표현을 통해 교리와 같이 번지르르하게 구성된 허구적 언어 구조에 대해 말 그대로 단호한 사망 선고를 내린다. 종교적 신념이 배타적인 혐오와 적대감으로 변질되어 버린 전쟁터에서, 환대와 축복의 언어는 아무 의미도 없는 빈 껍데기가 되어 시체처럼 나뒹굴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희망 같은 건 끼어들 자리가 없을 듯한 이 잔혹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시인은 절망만으로 시를 마무리하지 않는다. "복수형이 우리의 귀환이 되게 하라"는 시인의 주문은 <살아감에 대한 어떤 것>이라는 시집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을 담은 문장으로 보인다. 우리가 이 비극적 현실에서 돌이켜 나아가야 할 곳은 "복수형"이 제대로 힘을 발휘하는 어떤 경지, 단일한 신념이 타자를 억압하고 지배하지 않는 공존의 세상이다. 또한, "복수형이 우리의 귀환이 되게 하라"는 이 문장은 이질적인 요소들이 함께 존재하는 다양성의 세계만이 진정한 의미에서 "우리"라는 공동체를 재구성해 낼 수 있다는 의미를 담고 있기도 하다. 이 시 전체에 걸쳐 시인은 "우리"라는 대명사를 사용하지만, 처음에 "한 무리의 기자들"을 언급하기만 할 뿐 "우리"가 누구인지에 대해서 명확한 규정을 내리지는 않는다. 아마도 시인이 지향하는 "우리"는 독자를 포함하여 "복수형"의 의의에 공감할 수 있는 모든 이들을 함께 묶어 나가면서 새로운 공동체를 향해 끝없이 확장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시를 읽을 때, 제목에 사용된 "30일의 금요일"이라는 구체적 날짜가 무엇을 뜻하는지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 추측이 가능하다. 종교적 의미로부터 출발하여 매우 명확한 문화적 뉘앙스를 갖게 된 "13일의 금요일"과 아주 유사하면서도 의도적으로 구분 지어진 "30일의 금요일"이라는 표현을 통해, 시인은 고착된 특정 종교의 세계관을 상기시키고는 이를 살짝 비틀어 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또한, 한 달의 끝인 30일, 한 주의 끝인 금요일은 돌고 도는 시간의 주기적 흐름을 따라 다시 시작될 여러 달, 여러 주를 향해 열려 있는 순간으로도 해석될 수 있을 듯하다. 오늘의 희생과 좌절이 결코 종말은 아니며, 오히려 "복수형"이 힘을 발휘할 미래가 시작되는 시점일 수도 있다는 조용한 희망의 목소리가 이 시의 제목을 통해 전달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결국, 미래를 바꾸어낼 힘은 시인이 제목에서 사용한 "숙고하다"라는 동사에 담겨 있다. 인간이 만들어 낸 참혹한 재앙 앞에서 어떤 근원적인 전환을 상상하기 위해서는, 깊이 사고하고 변화를 추구하려는 의식적인 노력이 전제되어야만 한다. 그러하기에, 투파하의 이 짧은 시가 제기하는 질문은 결코 단순하지 않다. 독단적인 신념 체계에서 빠져나와 "복수형"이 존중되는 세상을 향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용기와 결단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에 대해 쓰여진 이 시는 타자에 대해 이해하고 공감하기 위한 "숙고"가 과연 가능할 것인지를 독자를 향해 진지하게 묻고 있고, 그 물음은 단지 가자 지구 뿐 아니라 혐오와 갈등으로 얼룩진 세상 곳곳에서 살아가는 모두에게 던져져야만 할 것이다.
원문: On the Thirtieth Friday We Consider Plurals
At the border, a flock of journalists.
A sacrifice of tires burned behind us.
Beneath the picnic tents, a funeral of families.
What else will we become in Gaza if we gather,
if we carry our voices to the razored edge?
We were met by a gallop of prayers,
clamoring recitatives puncturing the shroud
of humid air. We were met by a delirium
of greetings, peace-be-upon-us surreal
between embraces, the horizon locked
and loaded. What is upon us
will require mercy. Let the plural be
a return of us. A carnage of blessings—
bodies freed from broken promises,
from the incumbrances of waiting.
조희정은 중앙대학교 영어영문학과 교수로 하버마스의 근대성 이론과 낭만주의 이후 현대까지의 대화시 전통을 연결한 논문으로 미시건주립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인간과 자연의 소통, 공동체 내에서의 소통, 독자와의 소통, 텍스트 사이의 소통 등 영미시에서 다양한 형태의 대화적 소통이 이루어지는 양상에 관심을 가지고 다수의 연구논문을 발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