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에세이

국가통치에서 영혼통치로

러시아와 중국을 비롯한 세계의 비(非)리버럴 국가들은 '좋은 삶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나름의 비전을 제시하며 국민의 영혼까지 통치하고자 한다. 미국도 점점 이런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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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제공=Google DeepMind

2025.03.28 1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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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근대 자유민주주의 국가들은 가치에 중립적인 국가라고 부릅니다. 기본적인 약속인 헌법과 기타 법만 잘 지키면 어떤 삶을 '좋은 삶'이라고 믿으며 살든 국가는 관여하지 않습니다. 근대의 자유민주주의 즉 리버럴한 민주주의는 '좋은 삶'에 관심이 없습니다. 아주 거칠게 표현하면, 구성원들이 어떤 '좋은 삶' '최선의 삶'을 살고 추구하는지엔 관심이 없고 최소한의 약속만 지키는 '최저의 삶'만 지키도록 하는데 관심이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사람들은 공허해진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타고나길 '좋은 삶'에 관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좋은 삶'의 중요성을 이야기하는 정치사상을 보통 공동체주의라고 하고 리버럴 민주주의처럼 헌법적 사회계약만으로도 충분히 좋은 나라를 만들 수 있다고 믿는 쪽이 공화주의입니다. 공화주의자들은 하나의 '좋은 삶'을 추구하는 공동체주의적 비전이 자칫 사회적 관용을 파괴하고 억압적인 형태를 띠게 될 위험성이 있다고 지적합니다. 노에마 매거진 3월 4일자 에세이에서 필자인 알렉상드르 르페브르는 '좋은 삶'을 추구하는 아리스토텔레스적 정치체제가 역사상 더 긴 역사를 갖고 있고, 가치 중립을 표방한 리버럴리즘 정치체제는 근대에 나타나 짧은 역사를 가졌을 뿐이라고 주장합니다. 이 한편의 에세이로는 르페브르의 입장을 정확히 알 순 없지만, 그는 공동체주의적 관점, 즉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 및 사회에 대한 관점 기반 위에서 트럼프의 MAGA 운동, 푸틴의 러시아 등 리버럴하지 않은 정치 행태를 이해할 것을 제안합니다. 그리고 그는 솔직히 리버럴리즘도 사실 하나의 '좋은 삶'을 제시하고 있는 것 아닌가라고 반문합니다. '나는 가치 중립적이야' '나는 리버럴해서 모든 것을 관용해'라는 태도 역시 하나의 가치이며 태도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심해지면 이 가치와 태도를 남에게 강요해 갈등을 빚기도 합니다. 르페브르는 리버럴리즘의 관점에서 국내외의 이질적 공동체주의적 정치를 너무 적대시하진 말기를 권합니다. 어차피 모든 정치체제는 명시적으로나 암묵적으로 특정 이데올로기에 기반을 두기 때문에 이데올로기의 차이로 꼭 피를 흘릴 필요는 없다는 것입니다. 근대 리버럴리즘 자체가 더 이상 종교간 투쟁으로 피를 흘리지 말자는 '모두스 비벤디' 즉 타협의 산물이었는데, 또다시 가치의 차이로 피를 흘릴 수는 없지 않냐는 것이 르페브르의 지적입니다.


약 450년 전, 한 프랑스 철학자가 고급 리조트를 배경으로 다양한 투숙객들 사이의 갈등이 점차 고조되는 모습을 그린 인기 미국 드라마 '화이트 로터스'를 연상케 하는 책을 썼다. 장 보댕(Jean Bodin)의 '숭고함의 비밀에 관한 7인의 대화'에서는 엄청난 부를 지닌 베네치아 귀족 코로나이우스가 여섯 명의 손님을 자신의 저택으로 초대해 일주일 동안 오락과 대화를 즐기는 이야기가 펼쳐진다.


(This article was produced by and originally published in Noema Magazine.)


낮 동안 손님들은 정원을 거닐고, 호화로운 식사를 즐기며, 시각적 착시 놀이를 하고, 낮잠을 자거나 책을 읽는다. 하지만 밤이 되어 와인을 따르기 시작하면서 분위기는 달아오른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코로나이우스는 일주일의 시간을 통해 세상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고 생각하는지를 배우고자 했다. 그의 손님들은 루터교도, 칼뱅주의자, 유대인, 무슬림, 회의주의자, 그리고 철학적 자연주의자였다. 이들은 태양의 본질을 포함해 세상의 모든 주제를 놓고 논쟁을 벌인다. 가장 치열한 충돌은 도대체 '잘 산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며, 인간 삶의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인지에 관한 것이었다. 그들은 설득을 시도하기도 하고, 그것이 헛된 일임을 깨닫기도 하며 말을 주고받는다.


그렇다면 우리가 2025년에 이 실험을 반복하고자 한다면 어떨까?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해, 우리가 코로나이우스의 입장이 되었다고 상상해보자. 이제 막 패권 도전을 받기 시작한, 아직은 부유하고 안락한 패권자의 입장이다. 16세기엔 그것이 가톨릭교회를 의미했다면, 21세기에는 리버럴 민주주의 질서가 깨지기 시작하는 상황에 처한 리버럴리즘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코로나이우스처럼 우리도 패권 경쟁자들의 삶과 사고를 이해하고 싶다면, 누구를 초대해야 할까?



답은 명확하다. 리버럴이라면 리버럴리즘의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문화적 우위를 위협하는 전 세계 정치체제들의 가장 생각이 명쾌하고 깊은 대표자들을 찾아야 한다. 이름을 구체적으로 거론하자면, 나는 다음과 같은 이들에게 초대장을 보낼 것이다. 러시아의 철학자 알렉산드르 두긴(일명 '푸틴의 두뇌'로 불리는 인물), 40년 넘게 베이징의 이데올로기를 이끌어온 노련한 전략가 왕후닝, 트럼피즘을 누구보다 잘 대변한 미국의 스티브 배넌, 인도의 힌두민족주의 운동을 이끄는 모한 바그왓, 이슬람주의 관점을 대표할 튀니지의 라셰드 가누쉬, 그리고 헝가리 총리로 재임 중이면서도 시끄러운 토론을 즐기는 빅토르 오르반.


좋다. 이제 21세기판 '7인의 대화' 손님 명단은 완성되었다. 진짜 질문은 이제부터다. 우리는 무엇을 이야기할 것인가?

'정답'으로 여겨지는 리버럴리즘의 '견해'

대부분의 리버럴들은 이러한 모임의 전개를 이미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예의가 허용하는 한 가장 이른 시점에, 리버럴하지 않은 손님들은 한데 모여 권력을 공고히 하고 확대할 수 있는 전략을 주고받고 거래할 것이다. 예컨대, 국내외에서 허위정보를 가장 효과적으로 유포하는 '가짜뉴스 공장'이 어디 있는지 논의할 수도 있다. 혹시라도 이들 중 한 명이 국제 제재를 받게 된다면, 그에 대비한 비공식적인 무역 및 이동 루트도 공유할 것이다. 또한, 개인 재산과 국가 자산의 경계를 흐리며 자산을 해외로 빼돌릴 수 있는 최고의 금융기관에 대해서도 정보를 교환할 게 분명하다.


이런 관점이 리버럴리즘 논단의 지배적 시각이다. 최근 출간된 두 권의 주목할 만한 책을 보자. 첫째는 2024년에 출간된 앤 애플바움의 '주식회사 독재정치: 세계를 주무르는 자들의 네트워크'이다. 그녀는 오늘날 점점 더 많은 비(非) 리버럴 체제들이 협력하는 이유가 공유된 이념 때문이 아니라, 지도자들의 "개인적인 부와 권력을 유지하려는 냉혹하고 일관된 집념"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같은 해 출간된 티머시 스나이더의 '자유에 대하여'는 훨씬 직설적이다. 그는 세계를 두 종류의 정치 체제로 나눈다. 긍정적인 가치를 수용하는 리버럴 민주주의와, 아예 가치 자체가 없는 독재체제다. 수천만 명의 트럼프 지지자들? 그들은 타인에게 고통을 주는 데서 즐거움을 느끼는 '사디즘 포퓰리스트'일 뿐이다. 그렇다면 중국은? 그는 "중국 전체가 일종의 감옥"이라고 단언한다. 그리고 어떤 나라든 리버럴 민주주의에서 벗어난다면, 그 경로가 과두제를 통해 파시즘으로 가는 길이든(러시아와 터키처럼), 파시즘을 통해 과두제로 가는 길이든(브라질과 인도처럼), 결국 결과는 같다.


이렇게 '정답'임을 자부하는 리버럴리즘의 관점에서 비(非)리버럴 세계를 이해한다는 것은 몇 가지 핵심 원칙으로 귀결된다. 첫째, 오늘날의 비(非)리버럴 정권은 억압, 폭력, 부패를 통해 권력을 유지한다. 둘째, 이들 지도자와 그 측근들은 폭정의 전리품—권력, 부, 섹스, 영광—에 의해 움직인다. 셋째는 다소 의견이 갈리지만, 그 국민들은 통치자들에게 체계적으로 기만당하고 있거나, (더 모욕적인 해석으로는) 리버럴 민주주의가 추구하는 복잡성, 개방성, 다원주의를 감당할 능력 자체가 아예 없는 것이다.



만약 이러한 비판자들의 말이 옳다면, 새로운 '7인의 대화'를 열 필요조차 없다. 우리는 이미 비(非)리버럴들이 어떤 존재인지 알고 있다. 그들은 이상(理想)이 아닌 탐욕에, 사랑이 아닌 분노에, 인간적 선이 아닌 저급한 이해관계에 의해 움직일 뿐이다.

반론

이 글은 반대되는 주장을 내놓으려 한다. 즉 세계 곳곳의 주요 비(非)리버럴 정치체제들은 가치나 이상이 부족한 것이 아니다. 그들은 그것으로 넘쳐난다. 그들은 자신들의 가치와 이상을 진심으로 믿는다. 너무도 진심이기에, 각자는 자국민을 위한 구체적이고 긍정적인 '인간적 완성'에 대한 비전을 제시하고 있다. 그리고 다음이 바로 나의 논지다. 즉, 이들은 '좋은 삶'에 대한 비전을 실현하기 위해 국가의 소프트파워와 하드파워를 모두 동원할 준비가 되어 있다. 이들은 영혼을 만들어내는 일, 곧 '영혼통치'(soulcraft)에 나서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내가 이 정권들의 주요 대표자들과 한자리에 앉게 된다면, 다음의 세 가지 질문을 던질 것이다.


1. 당신 나라에서 지배적인 '좋은 삶' 개념은 무엇인가?

2. 왜 그것이 훌륭하며 그것에 헌신할 만한 가치가 있는가?

3. 그리고 당신의 국가는 그것을 어떻게 실현하는가? 실현하려 하는가?


이 주제에 대해 일주일 동안 나누는 대화는, 나 같은 혼란스러운 리버럴들이 경쟁자들의 매력, 힘, 안정성, 그리고 깊은 인간적 열망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인간완성주의의 귀환

정치철학자들은 이러한 국가 권력을 통한 인간적 이상 실현의 시도를 "인간완성주의"(perfectionism)라고 부른다. 그렇다면 오늘날 세계 곳곳에서 인간완성주의가 부상하고 있다는 증거는 무엇인가?


간단하다. 비(非)리버럴 정권들이 말하고 행동하는 방식만 봐도 충분하다. 예를 들어 중국은 이보다 더 분명할 수 없다. 시진핑 주석은 중국 인민의 "정신세계를 풍요롭게" 하는 새로운 현대화 모델을 내세웠고, 그는 인민의 품성을 만들어낼 수 있는 막강한 권한을 휘두른다. 보다 부드러운 방식으로는, 초등학교 때부터 중국 청소년들은 '시진핑 사상'을 학습하며, 효, 근면, 조화와 같은 가치를 주입받는다.


좀 더 예리한 수단으로는 중국 공산당의 유명한 '사회 신용'(social credit) 시스템이 있다. 이는 청구서 적시 납부, 재활용, 자원봉사 같은 '신뢰할 수 있는' 행동에 점수를 주고, 노인 돌봄 소홀이나 정부 비판 같은 '신뢰할 수 없는' 행동에 점수를 깎는다.


가장 강제적인 수단은 신장 지역에서의 '재교육센터' 운영이다. 이곳에서 국가는 위구르족과 기타 무슬림 소수민족들의 문화적·종교적 정체성을 말살하고 재구성하려 했다. 브루노 마시아스가 지적했듯이, 중국은 단순한 국가가 아니라 하나의 문명이며, 정치보다는 문화 중심으로 조직되어 있다. 중국 국가는 특정 문화 전통을 보호하는 것을 최고의 과제로 삼고 있다. 그들은 인민의 마음과 정신을 단지 '얻으려는' 것이 아니다. 요람에서 무덤까지 그것을 '형성해낸다'.


하지만 중국이 이러한 비(非)리버럴 인간완성주의 체제들 가운데서 '우두머리'일지는 몰라도 결코 유일한 사례는 아니다. 인도에서는 나렌드라 모디 총리가 포퓰리즘과 힌두트바(Hindutva)를 결합했다. 힌두트바는 준군사조직을 갖춘 민족주의적이자 영적인 교리다. 러시아에서는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이 러시아 정신의 위대함과 그 취약성에 대해 신비주의에 가까운 긴 에세이를 쓰곤 한다. 표현력 하나만큼은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 빅토르 오르반은 "헝가리인으로 산다는 것은 하나의 과제이며, 사명이며, 아마도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명 중 하나"일 것이라고 선언한다. 그리고 그는 이런 수사를 실질적 정책으로 뒷받침한다. 예컨대 두 명 또는 세 명의 자녀를 둔 어머니에게는 평생 소득세를 면제하고, 내셔널리즘적 이상에 부합하는 예술과 미디어에 막대한 자금을 지원한다. 미국은 이 게임에 다소 늦은지는 모르지만, "정치는 시민들을 신앙과 경건함이라는 선(善)으로 이끌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패트릭 드닌과 같은 지식인이 부통령 JD 밴스에 영감 주는 것을 보면, 그리 멀지 않은 미래일 수도 있다.


내 요지는 이렇다. 오늘날 점점 더 많은 정치체제들이 '백화제방'(百花齊放)을 거부하고 있다. 이들은 '어떤 삶이 가치 있는 삶인지'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지니고 있으며, 그 비전이 대중의 지지를 받고 있다고 믿으며,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설득이든 강제든 기꺼이 동원할 태세가 되어 있다. 그런데 그 비전이 차별적이고 불평등하다고 항의하는 소수자들—혹은 여성처럼 심지어 다수자들—이 있다면? 안타깝지만, 그것은 상관없는 일이다. 한때 가톨릭교회가 그랬듯, '오류에는 권리가 없다'고 말할 것이다.


잠시 후 리버럴들에게 반론할 기회를 주겠지만, 먼저 그들을 진심으로 불쾌하게 만들고자 한다. 분명히 말하건대, 이들 정치체제는 엄청난 수준의 사회적 통제를 행사하며, 폭력적이고 부패할 수 있다. 또 상당수는 긍정적인 이상보다는 불만과 분노를 더욱 강조한다. 하지만 나는 이들이 위대한 인간적 선(善)을 옹호하고 있다고 굳게 믿는다. 리버럴리즘이 종종 축소하거나 제공하지 못하는 그런 선 말이다. 예컨대, 중국 공산당이 중시하는 효, 조화, 위계에 대한 존중은 그들이 추구하는 자아관의 핵심이다. 미국의 탈리버럴리즘 종교 우파는 명예, 경건, 자기희생을 중시한다. 이 모든 가치는 리버럴들에게는 크게 중요하지 않거나 오히려 억압의 원인으로 공격받기까지 한다. 그러나 이들은 부정할 수 없는 인간적 가치이며, 만약 우리가 이러한 가치들이 세계를 다르게 보는 이들에게 얼마나 매력적으로 다가오는지를 인정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오늘날 비(非)리버럴리즘의 매력, 안정성, 확산을 이끄는 핵심 동력을 간과하는 것이다.


나는 이들 정치체제를 옹호하는 것이 아니다. 내 목표는 그들을 이해하는 것이다. 리버럴들은 경쟁자들의 성공에 계속해서 놀라기만 할 수는 없다. 리버럴 민주주의가 21세기에 생존을 넘어 번영하려면, 경쟁하는 정치 개념들과 그들이 상상하는 '좋은 삶'의 매력을 보다 깊이 이해해야 한다. 앞으로의 정치에서는 '국가통치(statecraft)'—즉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사안의 관리—보다는 '영혼통치'(soulcraft)—곧 자아와 품성의 형성—가 중심이 될 것이다. 좋든 싫든, 우리 시대의 핵심 정치적 질문은 '좋은 삶이란 무엇인가'이며, 그것을 누가 정의할 수 있느냐에 관한 것일지도 모른다.

'좋은 삶'을 두려워하는 민주주의

이제 리버럴들이 기다려온 반론의 시간이 왔다. 그리고 그것은 단순한 반론이 아니라, 정치 체제가 '좋은 삶'에 대한 관념을 강요해서는 안 된다는 리버럴리즘의 전면적인 거부다.


그게 왜 잘못된 것일까? 리버럴리즘의 논거는 다음과 같다. 우선, 이런 방식은 개인이 자신만의 삶을 선택할 자유를 박탈함으로써 개인적 자율성을 짓밟는다. 둘째, 모두를 하나의 틀에 끼워 넣어 다원주의를 말살한다. 셋째, 동등한 시민에게 정치 권력을 적용하는 정당한 이유를 제시하지 못함으로써 민주적 정당성을 해친다. 이런 모든 비판을 한 단어로 요약하자면, 그것들이 '목적론적'이라는 것이다.


설명을 덧붙이자면, 리버럴들은 이렇게 말한다. 리버럴리즘은 아주 특별한 정치 이데올로기인데, 그 이유는 사회가 어떤 공동의 목적(telos, 그리스어 어원)을 중심으로 묶여야 한다고 믿지 않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신정(神政) 정치는 영혼을 구하고 신의 나라를 실현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파시스트 체제는 특정 부류의 특권적 인간들에 봉사하는데만 몰두하며, 나머지는 배제하거나 억압한다. 인간완성주의 체제는 유교적 자아, 힌두트바 공동체, 심층적인 러시아적 공동체(mir), 혹은 미국 중심지역의 이상 같은 특정한 인간 이상을 정립하고, 자원과 명예, 권력을 동원해 이를 실현하려 한다.


리버럴들은 이러한 모든 형태의 체제를 거부한다. 그들에 따르면, 한 국가가 공유해야 할 유일한 목적은 역설적이게도, 시민들이 각자 선택한 좋은 삶의 개념을 '합리적인 범위 내에서' 추구할 수 있는 자유롭고 공정한 사회를 유지하는 것이다. 실제로 캐나다 총리 저스틴 트뤼도는 캐나다가 "세계 최초의 탈(脫)내셔널 국가"가 될 수 있다고 말하며 "캐나다에는 고유의 정체성도, 주류도 없다"고 주장했다. 이보다 더 목적론을 거부하는 선언은 없을 것이다.


트뤼도의 발언은 과장처럼 들릴 수도 있지만, 리버럴리즘 정치사상의 핵심 구분을 잘 보여준다. 바로 '얇은'(thin) 좋은 삶의 개념과 '두꺼운'(thick) 좋은 삶의 개념의 차이이다. 리버럴들의 생각에 따르면, 사회는 두 가지 선택지밖에 없다. 하나는 형이상학적·심리적 내용이 풍부한, 모두가 공유해야 할 삶의 종합적인 비전을 강제하는 '두꺼운' 영혼통치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정치 제도가 인간적 번영에 대한 다양한 관점을 중립적으로 다루는 '얇은' 접근법이다. 리버럴들에게 선택은 분명하다. 아무리 두꺼운 비전이 매력적으로 보여도, 다원적 사회는 반드시 얇고, "사는 대로 살게 두는" 방식을 택해야 한다. 그리고 이 문제를 정리하는 데 리버럴들이 흔히 호소하는 것은 리버럴리즘의 표준적인 기원(起源) 서사다. 즉 리버럴리즘은 근대 초기 유럽에서 격렬한 종교 전쟁을 끝내기 위한 해법으로 등장했다는 것이다. 그 전쟁은 각 세력이 자신들이 영혼통치를 맡기 위해 목숨까지 걸며 싸웠던 전쟁이었다. 리버럴들의 결론은 명확하다. 정의로운 민주국가는 그런 논쟁적인 문제에 있어서 중립적이고 포용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리버럴들이 스스로를 정확히 인식하고 있는지는 잠시 후 다시 다룰 문제다. 내 생각엔 그렇지 않다. 그리고 이 혼란—어떤 이들은 '자기기만'이라고 부를 이 상태—이야말로 비(非)리버럴 정권들이 리버럴들을 한편으론 불쌍하게 여기면서도, 동시에 위험할 정도로 무지한 존재로 보는 핵심 이유다. 분명한 것은, 국가가 국민의 삶을 형성하는 데 개입하지 말아야 한다는 리버럴리즘의 관념이 인류 역사 속에서는 오히려 예외적이라는 점이다. 인류 역사의 대부분에서 주류였던 것은 '영혼통치'이지 개인의 자기결정권이 아니었다.

영혼통치

'영혼통치'는 정치철학이나 정치학에서 확립된 용어는 아니다. 하지만 이 개념은 서구 정치사상의 가장 오래된 전통 가운데 하나의 핵심에 놓여 있다. 그 뿌리는 플라톤의 '국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플라톤은 이 대화편에서 정의라는 개념을 탐구하며, 서구 정치사상의 방향을 깊이 바꿔놓은 사상을 제시한다. 바로 정치 체제가 법과 제도만이 아니라 시민들의 품성과 인격까지 형성한다는 것이다.


플라톤의 핵심 주장은 이렇다. 정치 체제는—그가 분류한 귀족정, 명예정(군국주의 국가), 과두정, 민주정, 참주정 등—각기 고유한 인격 유형을 길러낸다. 예를 들어, 과두정(寡頭政, oligarchy)은 과두적 시민을 양산하며, 이들은 특정한 가치, 욕망, 감수성을 지닌다. 그 사회의 사람들은 부를 숭배하며, 명예는 돈으로 측정되고 보상된다. 자녀들에게도 돈 말고는 그 어떤 것도 추구할 가치가 없다고 가르친다. 이는 귀족정, 민주정, 참주정 등 다른 정치 체제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각각의 체제는 저마다의 고유한 인간형을 길러낸다.


이 과정은 결코 수동적인 것이 아니다. 과두적 아기들이 그냥 땅에서 솟아나는 게 아니다. 과두적 인간형을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하나의 정권 전체가 작동해야 한다. 그래서 과두적 세계관은 법에 명문화되고, 교육에 내재되며, 수많은 제도 속에 체계적으로 스며들어 이상이 존중되고 세대를 거쳐 전승되도록 한다. 이것이 바로 영혼통치의 본질이다. 플라톤은 단호하다. 어떤 지성적인 정권도 이 과제를 가장 중요한 정치적 임무로 삼아야 한다. 이를 무시하는 것은 단순히 정권의 정치적 약화를 초래하는 것이 아니라, 지도자들이 도덕적 책무를 방기하는 것이며, 시민들이 지도자들이 '최선'이라 믿는 삶의 방식에서 멀어지게 내버려두고, 허황된 무언가를 좇게 만드는 일이다.


플라톤의 영혼통치 개념은 그에게서 끝나지 않았다. 현대의 사상가들도 이 개념을 바탕으로 새로운 정권들이 어떻게 인간을 형성하는지를 입체적으로 서술해왔다. 알렉시 드 토크빌은 민주주의자의 영혼을, 막스 슈티르너는 아나키스트의 자아를, 안토니오 그람시는 사회주의자의 품성을, 한나 아렌트는 전체주의적 인간형을 탐구했다. 그 가운데 가장 극단적인 예는 아마도 유리 슬레즈킨과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의 탁월한 저작들에 담긴, 소련이라는 '천년왕국 실험실'에서 창조된 '소비에트 인간'일 것이다. '세컨드핸드 타임'에서 알렉시예비치는 이렇게 쓴다. "내가 바로 그런 사람입니다. 우리는 쉽게 알아볼 수 있어요! 사회주의를 거쳐 나온 사람은 나머지 인류와 같기도 다르기도 합니다."


영혼통치(soulcraft)는 오늘날의 시대를 이해하기 위해 꼭 필요한 개념이다. 이 개념을 구성하는 두 요소—영혼과 통치—모두가 중요하다. '영혼'은 정신성과 충만함을 의미하며, 오늘날의 정치 체제가 어떻게 종교의 퇴장으로 생긴 공백을 채우거나(서구의 세속사회처럼), 종교와 결합해 정교(政敎) 혼합체를 형성하는지(이란, 이스라엘, 점점 더 인도에서도) 보여준다. 또한 이 개념은 정치 체제가 단순히 시민들의 의견이나 행동만이 아니라 자아 그 자체를 어떻게 형성하려 하는지를 드러낸다. 한편 '통치'는 이러한 '영혼 만들기'를 위해 사용되는 구체적 수단들을 의미한다. 정치 제도, 시민 단체, 미디어 전략, 교육 시스템 등 모든 것이 포함된다.


이제 우리는 2025년판 '7인의 대화'로 다시 돌아온다. 이 모임을 갈라놓고 동시에 하나로 묶는 것이 바로 영혼통치이다. 당연히 각 인물은 자신이 꿈꾸는 이상적인 국민(citizen)의 모델을 제시할 것이고, 어떤 인간적 완성의 모델이 가장 우수한지를 두고 열띤 논쟁이 벌어질 것이다. 그들은 러시아 출신 영국 철학자 이사야 벌린이 말했듯이, "위대한 가치들 가운데는 서로 공존할 수 없는 것들도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충성과 공정함, 정의와 자비처럼 근본적 가치들은 단순히 더해져 하나의 완벽하고 모순 없는 전체를 이루지 않는다.


그러나 이 견해 차이는, 이 자리에 모인 '손님들'이 공유하는 두 가지 확고한 신념에 비하면 미미한 수준일 것이다. 첫째, 모든 국가는 국민의 영혼을 형성할 수 있고, 그래야 하며, 실제로 그렇게 하고 있다. 둘째, 리버럴인 이 모임의 주최자는 자신도 똑같은 일을 하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부인하는 순진한 바보거나, 교묘한 위선자이다.

리버럴리즘의 인간완성주의

바로 이 지점에서 이 대화의 불꽃이 튀기 시작한다. 탈(脫)리버럴들을 가장 분노케 하며, 동시에 그들의 도덕적 자기확신에 기름을 붓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리버럴리즘이 '좋은 삶'에 대해 중립적인 척을 하는 것이다. 그들에게 있어 리버럴리즘이 "모든 관점을 환영한다"며 특정한 세계관에 따라 국민을 형성하지 않는다는 주장은 위선 중의 위선이다. 진실을 말하자면, 나는 이쯤에서 스티브 배넌이 거친 목소리로 끼어드는 장면을 상상한다. "리버럴리즘은 위선이 아니라 개소리야! 리버럴들 자신도 그 이념이 중립적이거나 포용적이 아님을 잘 알고 있어. 다만 그렇게 말하면 사람들을 설득하고, 감동시키고, 조종하기에 좋으니까 그렇게 포장하는 거지."


이 날카로운 비판 속에는 일정 부분 진실이 담겨 있다. 분명히, '리버럴리즘은 중립적이지 않다.' 사실 그 말 자체가 무슨 뜻인지도 불분명하다. 리버럴리즘은 자율성, 공정성, 상호성, 관용이라는 강한 도덕적 신념을 지닌 이념이다. 그리고 이러한 가치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종교나 이데올로기는 리버럴리즘 국가에 의해 금지되거나 최소한 강하게 제한될 것이다.


리버럴리즘이 포용적이지 않다는 점도 매우 중요하다. 비판자들에 따르면, 지난 40년 동안 서구 문화에는 한 가지 뚜렷한 흐름이 있었다. 바로 리버럴리즘의 가치가 정치와는 무관해 보이는 삶의 영역까지 서서히, 그리고 꾸준히 침투해 들어온 것이다. 이는 단지 뉴스 미디어, 대중문화, 대학 같은 익숙한 분야에만 그치지 않는다. 성(性), 자녀 양육, 우정, 직장 생활 등 일상생활의 근본적인 부분들까지 포함된다. 패트릭 디닌은 2018년 출간한 영향력 있는 저서 '리버럴리즘은 왜 실패했는가'에서 이렇게 말한다. "리버럴리즘은 종종 입헌 정치와 권리의 법적 보장을 위한 정치 국한적 프로젝트로만 여겨지지만, 사실 그것은 인간의 삶 전체와 세계를 변혁하려는 방대한 시도다."


이 지점에서 리버럴리즘의 핵심 위선이 드러난다. 겉으로는 모든 것에 개입하지 않는 듯 행동하지만, 실제로는 24시간 내내 영혼을 형성하는 작업—영혼통치—을 수행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 흔적은 당신의 휴대폰 속 데이팅 앱에도 있으며, 직장에서의 '존중하는 관계 규범'에도 있고, 링크드인에서의 개인 브랜딩 유도에도 있다. 당신의 이메일함엔 끊임없는 '자기 최적화' 조언이 쏟아지고, 넷플릭스의 알고리즘이 제공하는 콘텐츠로 당신의 취향이 형성되며, 슈퍼마켓의 거의 모든 상품이 '자기 계발' 혹은 '자기 강화'라는 이름으로 포장된다. 일상의 대화조차 '관용'(똘레랑스)이라는 언어에 의해 관리된다. 리버럴리즘은 오늘날 대부분의 서구인들에게 기본값(default)으로 작동하는 삶의 방식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에서 진정 비극적인 점은, 비판자들이 말하듯, 리버럴리즘이 '형편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영적으로 빈약한 교리이며, 삶에서 의미와 목적, 열정을 제거한다. 개인 자유 위에 세워진 문화는 연대, 충성, 효, 연민 같은 가치를 약화시킨다. 이른바 다원주의는 공공의 명예를 부여할 공간조차 남기지 않으며, 주고받기 즉 상호성의 이상은 영웅적 자기희생 같은 가치를 시대에 뒤떨어진 것으로 만든다. 줄리아노 다 엠폴리의 2022년 소설 '크렘린의 마법사'에 등장하는 극우 러시아 정당의 창립자는 이렇게 말한다. "서구 문명은 결투가 금지된 순간 끝났다. 거기서 유급 육아휴직까지는 한 걸음뿐이었다."


무엇보다도 리버럴리즘은 모든 형태의 초월성에 대해 귀를 닫고 있으며, 인간 존재의 목적을 그저 오래, 편안하게 사는 것으로 축소해버린다. 러시아 철학자 알렉산드르 두긴은 이에 대해 단도직입적으로 말한다. "반(反)리버럴한 것은 모두 좋다." 그리고 그는 진심이다. 서구가 전 세계에 강요하려는 삶의 방식은, 그들에게 있어서 작고, 슬프고, 공허한 것일 뿐이다.


그렇다면 『7인의 대화』는 어디로 향하게 될까? 앞서 나는 리버럴들이, 리버럴하지 않은 손님들이 단지 권력을 쥐기 위한 전략을 나누러 왔다고 생각할 것이라 말한 바 있다. 하지만 내가 옳다면, 대화의 실체는 훨씬 더 위협적일 것이다. 그것은 아마 이런 식으로 들릴 것이다. "잘 들어, 리버럴들. 너희도 하루 종일 남의 영혼을 만지면서 왜 우리가 그걸 하면 안 되냐고? 우리는 더 나은 이상을 갖고 있고, 그 신념을 지킬 용기도 있다. 위선적인 중립과 포용의 가면을 쓰고 실제로는 아무도 존중하지 않는 패권을 유지하려는 짓도 하지 않는다. 우리는 정직하다. 계획은 간단하다. 리버럴리즘을 버리고, 우리의 가치를 당당하게 추구하겠다."

새로운 리바이어던들

그들은 어떻게 이를 실현하려는 걸까? 바로 현대 국가가 지닌 엄청난 권력을 활용하겠다는 것이다. 존 그레이는 오늘날의 인간완성주의 정권들을 '새로운 리바이어던들'(New Leviathans)이라 부른다. 그 힘은 너무도 막대해 홉스나 루이 14세조차 얼굴을 붉힐 수준이다. 과거의 국가는 안전이나 개인적 영광 같은 '작은 목표'를 추구했지만, 지금의 국가들은 "국민들에게 삶의 의미를 제공"하고, "영혼을 설계하는 엔지니어"가 되려 한다.


물론, 각 정치체제마다 영혼통치 방식은 다르다. 그들은 저마다의 '좋은 삶'과 이상적인 인간형을 상상하며, 행정 능력도 천차만별이다. 이 글의 마지막에서 나는 이제 인간완성주의 정치체제가 될지도 모르는 한 국가에 주목하고자 한다. 바로, 새로운 트럼프 행정부 아래의 미국이다.


물론 아직 초기 단계다. 최대 변수는 '마가'(MAGA) 운동 내의 어떤 계파가 최종적으로 주도권을 잡느냐는 것이다. 일론 머스크나 피터 틸과 같은 인물이 이끄는 자유지상주의 계열이 득세한다면, 영혼통치는 중심 의제가 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만약 기독교 보수 세력이 주도권을 잡는다면 이야기는 완전히 달라진다. 이들은 '딥스테이트'를 경멸하면서도 부러워하며, 그 거대한 기구를 리버럴들의 손에서 탈환해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기독교 영혼통치 도구로 만들 수 있다고 믿는다.


그리고 그들은 이미 그 행동지침서를 써놨다. 바로 약 900페이지 분량의 매뉴얼인 '프로젝트 2025'(Project 2025)이다. 이 문서는 제2차 트럼프 행정부가 2025년 1월에 출범하자마자 즉시 실행에 들어갈 수 있도록 설계된 로드맵이다.


이 모든 것이 음험하거나 터무니없게 들린다면, 하버드대학교 헌법학 석좌교수이자 세계적인 행정법 학자인 에이드리언 버뮬의 말을 들어보라. 그는 미국의 탈리버럴리즘 우파 진영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지식인 중 하나다. '딥스테이트'에 대한 깊은 통찰을 지닌 그는, 보수 세력이 이 거대한 국가 기구의 힘을 어떻게 활용해 문화적, 기독교적 영적 의제를 추진할 수 있는지에 대한 이론을 발전시켰다. 그는 이 비전을 '통합주의'(integralism)라고 부르며, 미국의 국가와 사회가 종교적 도덕 질서와 통합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많은 미국인들이 초반에는 이러한 전환에 저항하더라도, 시간이 지나고 법이 이들의 선호를 재형성해나가면 결국 그것을 사랑하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버뮬은 이렇게 쓴다.


"내부로부터의 통합이 강제에 의한 것인지, 아니면 설득과 개종에 의한 것인지 결론 내리는 것은 의미 없다. 양자의 구분은 너무 취약해서 사실상 무용하다. … 우리는 행동경제학을 통해, 기본 규칙을 설정할 수 있는 행정 권한을 지닌 주체들이 전체 인구를 바람직한 방향으로 유도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배웠다. 이것이 바로 '소프트 온정주의'의 작동 방식이다. 이 상향적 형성이 강제인지, 혹은 피지배자의 '진정한' 선호에 호소한 것인지를 논쟁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중요한 것은 전략적 위치를 확보하여, 리버럴리즘 신앙에 뜨거운 인두를 대고, 리버럴리즘 실행자들의 마음과 정신을 장악해, 리버럴리즘이 스스로 구축해놓은 제도들을 점령하고, 그것을 인간 존엄성과 공동선을 실현하는 데 사용하는 것이다."


이 말은 등골이 서늘해지게 만든다. 어떤 말이 더 무서운 것이 무엇인지조차 판단하기 어렵다. 리버럴리즘이 실제로는 성례적이고 제국주의적이며 배타적인 종교와 다르지 않다는 과장된 주장일까? 아니면 '강제'와 '설득' 사이의 구분은 거의 무의미하다는 가벼운 취급일까? 혹은, 버뮬의 말과는 반대로, 리버럴리즘을 '불에 달군 인두'로 지지겠다는 이런 사고방식이 결국 리버럴들과 탈(脫)리버럴들 사이의 폭력적 충돌로 이어질 것이라는 무시무시한 암시일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말들에는 일종의 전율이 있다. 이 말들은 도덕적 비전을 담고 있고, 열정을 발산하며, 구체적인 계획을 제시하고, 진정한 인격적 완성을 추구한다는 가치를 중심에 둔다. 프랜시스 후쿠야마가 묘사한, 만족스럽지만 무기력하고 살찐 리버럴리즘이 제시하는 "마지막 인간"(the last man)을 길바닥에 걷어차는 듯한 기세다. 오해하지 말라. 나는 이런 세계를 원하지 않는다. 하지만 왜 누군가는 이것을 원할 수밖에 없는지는 충분히 이해가 된다.

프로젝트 2025: 미국식 영혼통치

'프로젝트 2025'에 대해서는 많은 말이 오갔다. 이는 보수 싱크탱크인 헤리티지재단이 주도해 작성한, 차기 공화당 행정부를 위한 로드맵이다. 비판자들은 이를 "파시즘", "권위주의적 장악 시도", "디스토피아적 미국상"이라 불렀다. 그러나 이 계획을 정확히 정의할 가장 적절한 단어는 거의 아무도 언급하지 않았다. 그 단어는 바로 '인간완성주의'다.


그 단어는 '프로젝트 2025'의 서문, 즉 헤리티지재단 대표 케빈 로버츠가 쓴 '미국에 대한 약속'이라는 제목 위에 네온사인처럼 걸려 있어야 한다. 사람들이 말하듯 이 문서가 단지 정부를 축소하겠다는 주장을 담은 것이 아니라는 점은 자명하다. 그 목표는 최상위 지도부에서 최하위 하위기관 관료에 이르기까지, '행정국가'를 점령할 올바른 인물들을 적재적소에 배치하는 것이다. 핵심 메시지는 간단하다. "인사가 곧 정책이다."


그렇다면 그 궁극적 목표는 무엇인가? 로버츠는 서문에서 분명히 말한다. 행정부를 통해 '좋은 삶'에 대한 비전을 되찾는 것. 어떤 정치철학자는 이 문서를 "마키아벨리적 수단을 통해 아리스토텔레스적 목적을 이루려는 시도"라고 표현할 수도 있을 것이다. 예컨대 핵가족 복원을 위한 정책을 살펴보면, 로버츠는 이렇게 쓴다. "이 실존적 과업을 수행하기 위한 수십 가지 구체적 정책이 포함되어 있다. 이제 정책입안자들은 가족의 권위, 형성, 결속을 최우선 과제로 격상시키고, 세금 제도를 포함한 정부 권력을 활용해 미국 가정을 복원할 때다."


이 문서의 모든 정책이 실제로 트럼프 행정부에 의해 실현될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프로젝트 2025'의 진짜 의미는 그 순간의 정책 제안서가 아니라, 보수 진영이 어떻게 권력을 이해하고, 어떤 '좋은 삶'을 상상하는지에 대한 선언문이다. 예컨대 스티브 배넌이 한 인터뷰에서 "MAGA의 의미이자 목표는 미국 노동계층의 '영적 복지'를 지키고 증진하는 것"이라고 말했을 때, 그와 로버츠 같은 보수 지식인들이 같은 찬송가를 부르고 있음이 명확해진다. 그들은 통치의 도구로서 '선'(善)을 지향하는 영혼통치자들이다.


'프로젝트 2025'의 거의 모든 장(章)은 지금까지의 논점을 명확히 보여주는 데 사용할 수 있다. 그 중에서도 가장 큰 비판을 받은 장, 린지 버크가 작성한 '교육부' 장은 특히나 많은 것을 드러낸다. 이 장은 단도직입적으로 시작한다. "연방 교육 정책은 제한되어야 하며, 궁극적으로 연방 교육부는 폐지되어야 한다." 처음 들으면, 이것은 자유지상주의적이고, 반정부적이며, 반(反)인간완성주의적인 주장처럼 보인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프로젝트 2025'가 교육부를 표적으로 삼는 이유는 그 규모나 권한이 과도해서가 아니다. 그 부처가 '잘못된 가치'를 가르치기 때문이다. 진보적 "워우크" 리버럴리즘 이념에 장악되어 있으며, 구조적으로 구제 불가능하다고 판단된다. 해결책은? 그 권한을 보다 '타락하지 않은' 연방 및 주정부의 다른 기관들로 분산시키고, 이들 기관이 대통령 행정명령, 연방 보조금, 교육 인증, 커리큘럼 감독, 민권 소송 등을 포함한 모든 수단을 총동원해 "전통적 미국 가치"에 기반한 교육과 가족관에 도덕적 비전을 강제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전통적 가치는 부모의 권위, 낙관주의, 신앙, 애국심 등을 중심으로 한다.


미국 보건복지부(HHS)를 다룬 장에서도 같은 움직임이 포착된다. '프로젝트 2025'는 단순한 보건 정책 개편에 그치지 않는다. 이 계획은 보건복지부를 문화적, 도덕적 가치 형성의 도구로 재편하겠다는 구상을 담고 있다. 계획에 따르면, HHS는 △낙태 자금 지원을 중단하고 낙태를 의료의 범주에서 제외함으로써 생명 존중 원칙을 강화하고, △성별을 이분법적으로 고정하여 트랜스젠더를 포함한 정의를 금지하고 국립보건원의 '젠더 사이언스'를 '가짜 과학'으로 규정해 예산을 삭감하며, △결혼을 사회의 기본 단위로 재확립하고 깨어진 가정을 복원하며 미혼 커플의 결혼을 장려하는 방식으로 핵가족 체제를 공고히 하고, △성관계 리스크 회피방법 연구에는 자금을 지원하면서 성 정체성 관련 데이터 수집은 중단하는 방식으로 연구 방향을 재구성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이러한 조치는 정부를 축소하려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도덕적·정신적 가치관에 따라 미국 사회를 재편하기 위해 국가 권력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겠다는 의지를 보여준다.


그 실현 방식은 아무도 정확히 예측할 수 없다. 어쩌면 기독교 보수 세력이 미국 전역에 자신들의 영혼통치 비전을 구현하는 데 성공할 수도 있다. 어쩌면, 그것은 생각보다 훨씬 쉬운 일일지도 모른다. 에이드리언 버뮬이 깊이 존경한다고 밝힌 반동주의 사상가 조제프 드 메스트르는 이렇게 말했다. "혁명에서 민중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기껏해야 수동적인 도구일 뿐이다. 프랑스를 위해 왕을 세울 수 있는 건 네댓 명이면 충분하다." 만약 루이 17세—기요틴에서 아버지를 잃고 평생을 감옥에서 보낸 소년—곁에 헤리티지재단이 있었다면, 그의 왕정도 살아남았을지도 모른다.


보다 덜 공격적이지만 오히려 더 근본적인 미래상도 있다. 미국의 지리적 분권화, 즉 서로 다른 지역이 전혀 다른 '미니 정치 체제' 아래에서 운영되는 모습이다. 캘리포니아는 '얇은 리버럴리즘'을, 유타는 몰몬 통치를, 미시시피는 인종별 위계를 중시하는 침례교 모델을 되살리는 식이다. 누군가는 연방주의란 애초에 바로 이런 분화 가능성을 위해 존재한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이러한 분열이 실제로 일어나든 아니든, 영혼통치 체제들의 지리적 범위에 대한 중대한 질문을 제기한다. 예컨대, 기독교나 이슬람처럼 전도적 성향이 강한 종교는 확장주의적인 경향이 있다. 반면, 중국은 구(舊) 청나라 영토 내에서는 절대권을 주장하면서도, 그 밖으로의 확장에는 큰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러한 체제들은 어떻게 공존할 것인가? 어떤 새로운 동맹들이 생겨날 것인가? 그리고 이 불확실성 속에서, 리버럴들은 어떻게 점점 더 대담해지고, 야심 차게 자신들의 영혼통치를 추진하는 체제들과 관계를 설정해야 할까?

'7인의 대화' 2025년판

리버럴들에게 내가 권하고 싶은 태도는, 사실 리버럴리즘 철학자 이사야 벌린이 가장 잘 표현한 바 있다. 그는 우리에게, 우리와 전혀 다른 궁극적 가치를 지닌 사회들도 '쌍블라블'(semblables)로 보라고 했다. 이 프랑스어는 '유사한 존재들' 혹은 '비슷한 자들'이라는 뜻이며, 벌린의 의도는 분명하다. 즉 우리와 같으면서도 깊이 다른, 바로 동료 인간들로 보라는 것이다. 벌린은 이렇게 말한다. "삶을 다양한 가치들이 존재하는 장으로 바라보아야 한다. 이들은 모두 (나름) 진정한 것이고, 모두 궁극적이며, 무엇보다 모두 객관적이다. 따라서 이들을 하나의 영원한 위계로 줄세우거나, 어떤 절대적 기준에 따라 평가하려는 시도는 무의미하다."


솔직히 말해, 대안은 무엇인가? 러시아를 보자. 그것을 국수주의적, 여성혐오적, 인종차별적이라고 단순화하거나, 더 극단적으로 "나라 행세를 하는 주유소"라며 도둑 국가로 치부하는 것은 쉽다. 하지만 그런 인식으로는 아무것도 이해할 수 없다. 그런 관점으로는, 2018년 푸틴이 러시아의 핵무기 교리에 대해 무심하게 던진 발언이 지닌 의미를 파악할 수 없다. 그 발언은 모든 것을 함축하고 있다. 푸틴은 이렇게 말했다. "누군가 러시아를 파괴하기로 결정한다면, 우리는 법적으로 대응할 권리를 가진다. 그 결과 인류와 세계에 재앙이 닥칠 것이다. 하지만 나는 러시아의 국민이자 국가 수반이다. 러시아 없는 세상을 왜 우리가 필요로 한단 말인가?"


그 순간, 블라디미르 푸틴은 러시아의 존재 자체에 절대적인 가치를 부여하며 핵전쟁을 정당화했다. 그렇다면 그 절대적 가치는 누구를 위한 것인가? 러시아인들만을 위한 것인가, 아니면 전 세계를 위한 것인가? 푸틴은 구체적인 설명을 덧붙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분명한 것은 러시아가 스스로를 바라보는 방식에는 자부심과 일종의 성스러움이 담겨 있다는 점이다. 이들은 자신들의 가치 체계를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있으며, 서방 역시 그 점을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서방이 러시아의 이러한 영혼통치적 내셔널리즘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것이 2014년 크름(크림) 반도 병합 이후에도 푸틴의 우크라이나 전면 침공 가능성을 상상하지 못한 배경이 된 것은 아닌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전략적으로 봤을 때, 러시아가 소규모 영토를 확보하고 나토(NATO)의 확장을 막기 위해 쏟아부은 인명, 자금, 국가 이미지 손실은 합리적으로 설명하기 어렵다. 그러나 푸틴이 공개적으로 밝힌 '특별 군사작전'(우크라이나 침공)의 명분을 살펴보면 그의 구상이 보다 명확하게 드러난다. 그는 러시아만이 우크라이나와의 종교적, 역사적, 언어적, 문명적 '형제살해'를 끝낼 수 있다고 주장했다. 여기에 푸틴이 자주 언급해온 철학자 이반 일린의 사상을 연결하면, 이 전쟁은 현실정치 차원이 아닌 민족의 정신적 통합을 지키기 위한 신성한 사명으로 읽힌다. 이는 서방의 가치체계와는 전혀 다른 기준에 따른 행동이다.


푸틴은 2024년 터커 칼슨과의 인터뷰에서 "우리는 겉보기엔 비슷할 수 있지만, 사고방식은 다르다"고 말했다. 이처럼 러시아가 스스로를 독자적인 문명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점은 전혀 새로운 이야기가 아니다. '세컨드핸드 타임'의 저자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도 과거 소비에트 정체성을 다루며 "소비에트를 이해할 수 있는 건 소비에트뿐"이라고 쓴 바 있다.


이러한 흐름은 러시아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중국, 인도, 이란 등 각국은 물론, 미국 내에서도 'MAGA'라는 정치 구호 아래 전통적 가치와 정체성 회복을 주장하는 움직임이 활발하다. 이들이 공통적으로 강조하는 것은 단순한 정책 방향이 아니라, 자국민을 어떤 방식으로 길러내고 어떤 가치를 중심으로 사회를 조직할 것인가 하는 비전이다. 리버럴리즘 국가들이 이러한 주장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상대의 자기 인식과 가치 체계를 면밀히 듣고 이해하려는 태도가 필요하다.


결국 중요한 것은 대화의 장이다. 보댕이 '7인의 대화'에서 마련했던 것처럼, 전 세계 주요 정치 사상가들이 서로의 관점을 교환하는 자리가 지금 이 시대에도 필요하다. 물론 합의에 도달하기는 어려울 수 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우리는 서로 다른 체제가 추구하는 '좋은 삶'의 기준과 방식, 그리고 각국이 국민을 어떤 방향으로 이끌고자 하는지를 보다 정확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알렉상드르 르페브르는 캐나다 출신의 정치철학자로서 존스홉킨스대학교에서 박사를 취득한 후 현재 호주 시드니대학교에서 교수로 재임중이다. 그의 저서로는 '생활방식으로서의 리버럴리즘'(Liberalism as a Way of Life) (프린스턴대 출판부, 2024)이 있다.



(To read the original essay and other similar essays in English, visit noemamag.com.)


‘집 없는 억만장자’로 유명했던 투자가 겸 자선가 니콜라스 베르그루엔(이젠 집을 마련해서 살고 있다고 합니다)이 설립한 베르그루엔연구소에서 발행하는 매거진. 2014년 허핑턴포스트와 파트너십으로 발행했던 월드포스트가 그 시초로, 현재는 자체 웹사이트 위주로 발행되고 있습니다. 정치적 성향은 두드러지지 않으나 대체로 미래지향적인 관점에서 국제정세, 철학, 테크놀러지를 다룹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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