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4.23 18:00
무함마드 빈살만과 축구를 하고 싶은 아이들은 없었다. 물론 소년 빈살만은 사우디아라비아의 왕족이었지만 사우디에 왕족은 1만5000명이 넘는다. 급우들은 빈살만보다 왕위 계승 서열이 더 높았던 그의 사촌들을 좋아했다고 그의 어린 시절 친구는 회고한다. 친구가 없던 아이. 그러나 훗날 사우디의 왕세자가 되는 이 아이는 어릴 적에 '어린 사담(사담 후세인)'이라 불렸다고 한다.
빈살만(그는 이제 이니셜인 MBS로 통칭되곤 한다)은 가족 관계도 복잡했다. 그의 아버지 살만은 도시 엘리트 가문의 교육 받은 여성이었던 첫째 부인 사이에 이미 다섯 아들을 뒀다. MBS의 어머니는 살만의 셋째 부인으로 사막 부족 출신이었다. MBS가 아버지와 그의 첫째 부인이 사는 궁을 방문하면 그의 이복형들은 그를 '유목민의 자식'이라며 놀렸다. 나중에 MBS의 이복형과 사촌들은 미국, 영국 대학으로 유학을 갔다. 살만의 '유목민 자식들'은 그대로 리야드에 머물러 킹사우드대학교를 다녔다.
젊은 사우디 왕족들은 초대형 요트를 함께 타고 놀곤 했다. MBS는 육지에 가서 담배를 사오는 등 심부름꾼 같은 대우를 받았다고 전해진다. 요트 여행 중 찍은 사진 하나를 보면 왕족 16명이 코트다쥐르1의 언덕을 배경으로 요트 갑판 위에서 반바지와 선글라스를 쓰고 포즈를 취하고 있다. 한가운데에는 MBS의 사촌이자 '아랍의 워렌 버핏'으로 불리는 억만장자 투자가 알왈리드 빈 탈랄 왕자가 있다. 흰 티셔츠를 입은 기골이 장대한 MBS는 끄트머리에 있다.
현 시점으로 돌아오면 MBS는 사진의 한가운데로 들어온다. 세계 최대의 석유수출국 사우디아라비아에서 가장 중요한 의사결정을 내리는 인물이다. 사우디는 절대군주제 국가로 86세인 MBS의 아버지 살만 왕은 명목상 사우디의 국가수반이지만 더는 공개석상에 모습을 잘 비추지 않는다. 지난 수 년간 MBS가 실권자라는 건 명백했다. "사실상 살만 왕은 더는 왕이 아니죠." 전직 사우디 정보요원이 내게 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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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세의 왕세자는 일견 많은 사우디 청년들이 고대하던 바로 그런 지도자로 보인다. MBS는 과거 그 어떤 사우디 국왕보다도 자국민과 연령대(사우디 인구 70%는 30세 미만이다)로 가깝다. MZ세대 전제 군주인 MBS는 게임 '콜 오브 듀티'의 열혈팬으로 알려졌다. 그는 게임에서 가상의 적과 싸우듯 종교계와 왕족의 타성과 특권을 육탄 돌격으로 돌파한다.
그의 성마른 성격과 관습에 대한 경멸 덕분에 그는 사람들이 수십 년이 걸려도 어려우리라 여겼던 각종 개혁을 추진했다. 사우디에서 가장 눈에 띄는 변화는 공공장소에서 볼 수 있는 여성의 존재다. 한때는 아예 볼 수 없거나 남편 또는 아버지의 밀착 감시를 받아야 했다. 그밖에도 많은 변화가 있다. 과거에는 사우디에서 모스크에 기도하는 것 외에는 별다른 오락거리가 없었지만 오늘날에는 저스틴 비버 콘서트를 볼 수 있고, 노래방에서 노래를 부르거나 F1 레이싱 구경을 갈 수도 있다. 심지어 나는 몇 달 전에 호텔에서 열리는 파티에도 가봤다. 사우디 국민과 외국인들이 동 틀 때까지 모래 위에서 맨발로 춤을 췄다. 키스를 하는 커플도 있었고 탱크탑을 입고 맨살을 드러낸 여성들도 있었다. 바에서는 알코올이 든 과일 주스를 제공했다.
그러나 서구의 소비 문화를 포용한다고 해서 서구의 민주주의 가치를 수용하는 걸 뜻하진 않는다. 서구적 소비 문화는 현대적 감시국가와 결합하기도 쉽다. 내가 최근 사우디를 찾았을 때,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정권에 불만을 표하거나 비판하는 걸 들키는 걸 두려워했다. 과거에는 전혀 겪지 못했던 일이다. 사우디 제2의 도시 제다에서 왜 많은 곳들이 재개발이 되고 있는지에 대해 물었을 때 한 전문가는 답변을 거부하며 이렇게 말했다. "지금까지 왕이 네 번 바뀌는 동안 별 문제 없이 잘 살았거든요. 다섯 번째도 무사히 넘기게 도와주십쇼."
사우디의 석유에 의존하고 있는 데다가 변화의 약속에 홀린 서방은 처음엔 MBS의 흠결을 모른 척할 준비가 돼 있는 듯 보였다. 그러다 2018년 말, 이스탄불에서 사우디 정부 관계자가 워싱턴포스트 칼럼니스트 자말 카슈끄지를 살해한 후 그의 시신을 톱으로 토막냈다. 사우디에 가장 우호적이었던 정치지도자들도 등을 돌렸다.
오늘날 또다른 독재자 블라디미르 푸틴 덕분에 MBS는 다시 각광받는다. 푸틴이 2022년 2월 우크라이나를 침략하자 원유 가격이 폭등했다. 보리스 존슨 영국 총리는 얼마 지나지 않아 사우디행 비행기를 탔다. 과거 MBS의 숙적이었던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은 4월 리야드에서 MBS와 포옹했다. 전쟁 때문에 심지어 미국의 대통령조차도 MBS 앞에서 굴욕을 맛봐야했다. 2020년 대선 캠페인에서 조 바이든은 사우디아라비아를 국제사회의 왕따로 만들겠다고 공언했지만 2022년 7월 15일 그는 MBS를 만나 화해를 해야 했다. MBS와 악수를 하지 않으려고 바이든은 주먹인사를 했는데 되려 둘을 더 친해보이게 만들었다. 사우디 국내의 비판론자들도 MBS의 승리를 인정했다. "바이든을 나약해 보이게 만들었죠." 제다의 한 사우디 칼럼니스트의 말이다. "세계 무대에서 초강대국과 맞서서 이겼으니까요."
MBS에게 이는 승리의 순간이다. 사진 한 장의 끄트머리에서 시작해 권력의 심부로 향하는 그의 여정이 거의 마무리됐다. 그는 앞으로 수십 년간 왕좌에 머무르게 될 것이다. 그동안 세계의 꾸준한 에너지 수요를 만족시키기 위해 자기 왕국의 석유가 필요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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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자 한 명의 말이 매우 중요한 왕국에서는 그 권력자의 성격에 왕국의 명운이 달려있다. MBS의 지위가 공고해지고나면 그도 카슈끄지의 살해를 야기했던 복수심과 편협함을 버리게 될 거라는 희망도 있다. 그러나 MBS의 유년기 친구들을 포함해 일각에서는 더 위험한 상황을 우려한다. 이들은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의 사례를 떠올린다. 후세인도 한때는 이라크를 현대적으로 개혁하던 인물이었지만 권력에 취하면서 무모하고 위험해졌다. "권력은 처음에는 위엄을 주죠." 한 전직 서방 정보 관계자가 내게 한 말이다. "하지만 그 다음에는 외로움이 오고 다른 이들이 내가 갖고 있는 걸 빼앗으려 할 것이라는 의심과 두려움이 뒤따릅니다."
MBS가 갓 부상을 시작하던 시기에 나는 그저 수많은 왕자들 중 하나로 그를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내가 오래 연락하고 지내던 인사가 MBS의 휘하에 들어가지 않았더라면 나는 그에게 별다른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을 것이다. 나의 소식통은 자신의 새로운 보스가 진지하게 판을 뒤흔들 생각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2016년 리야드 외곽의 가짜 고대풍으로 지어진 마을에서 미팅을 주선했다. 이코노미스트의 내 동료들과 함께 MBS의 거처에 들어서자 무슨 제임스 본드 영화에 나오는 악당 소굴처럼 문이 스르륵 열렸다. 그 안의 방에는 MBS가 앉아있었다.
사우디아라비아는 여러 차례 개혁을 약속했지만(보통 미국의 압박 때문이었다) 국왕들은 변화를 밀어붙일 뚝심이 없었다. 1920년대 알사우드 가문은 아라비아를 정복하면서 매우 보수적인 종교 단체인 와하브파와 동맹을 맺었다. 1979년 한 급진적 종교 단체가 메카의 대사원을 무장 점거한 사건이 발생하자 알사우드 가문은 이란에서 발생한 것 같은 이슬람 혁명의 가능성을 차단하고자 사우디를 더 종교적으로 신실하게 만들기로 한다. 와하브파 성직자들에게 자신들의 구미에 맞게 사회를 운영할 수 있는 권한이 주어졌다.
와하브파는 권선징악위원회(보통 종교경찰로 불린다)를 통해 사회를 통제한다. 머리를 제대로 가리지 못해 머리카락이 삐져나온 여성의 발목을 때리고 반바지를 입은 남성의 다리를 채찍질한다. 사우드 왕가는 만족했다. 와하브주의는 사회통제를 제공하고 사우디 왕국에 정당성을 부여했고 왕족들은 런던이나 파리처럼 종교경찰의 통제가 미치지 않는 곳이나 자신들의 왕궁 안에서 석유로 쌓은 부를 마음껏 즐기며 살 수 있었다.
지금 와서 인정하긴 싫지만 MBS가 리야드에서 사우디 사회와 경제를 현대화하겠다는 자신의 계획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을 때 나는 그의 열의와 비전, 그리고 디테일을 놓치지 않는 꼼꼼함에 감탄했다. 언제 어떻게 개혁을 할지에 대해 당시에 했던 그의 답변은 실제로 그렇게 이루어졌다. 그는 아직 왕세자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주 사우디아라비아를 "나의" 나라로 언급했다. 우린 오후 9시경 그의 거처에 도착했다. MBS는 새벽 2시였음에도 여전히 말을 멈출 줄 몰랐다.
MBS는 사교성이 좋았고 자신감이 넘쳤으며 시종일관 미소를 잃지 않았다. 그의 보좌진은 보다 조용했다. 그들이 입을 열 때면 상전이 하는 말을 기계처럼 반복하기만 했다. 하지만 MBS가 전화 통화를 하러 나가면 보좌진은 활기를 띠며 말하기 시작했다. 왕자가 돌아오자 다시 침묵이 내리깔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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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절의 많은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나 또한 MBS가 사우디를 위해 할 일들에 많은 기대를 품었다. 몇 개월 후 리야드에 돌아왔을 때 반바지를 입고 있는 남성들을 많이 볼 수 있었다. 나는 계속 주변에 종교경찰이 없나 살펴봤지만 누구도 반바지 입은 남성을 잡으러 오지 않았다. 종교경찰의 체포 권한은 박탈된 상태였다.
왕세자가 되자 MBS는 법률을 제정해 사법 형량이 판사의 자의적 코란 해석이 아닌 국가가 제시한 가이드라인에 따라 내려지도록 만들었다. 그는 돌팔매질로 사람을 죽게 만드는 것과 강제 혼인을 법으로 금했다. 가장 눈에 띄는 변화는 여성의 역할이었다. MBS는 후견인법을 대폭 완화했는데 이전까지 여성은 남성 친족(후견인)의 승인이 없으면 일을 하거나 여행을 할 수 없었고 여권 소지, 사업, 병원 진료, 이혼도 할 수 없었다. 실제로는 후견인 제도의 완화 이후에도 사우디 여성들이 가부장적사회에서 새로운 권리를 주장하기가 어려웠고 여전히 남성들이 여성 친족을 불복종으로 고발하는 게 가능했다. 하지만 MBS의 개혁은 단순한 외관상의 개혁 이상이었다. 몇몇 이슬람 성직자가 감옥에 갇혔고 다른 성직자들은 곧 개혁에 순응했다.
MBS는 종교적 금기를 깨는 걸 즐기는 듯했다. 그가 만든 새로운 국영 TV 채널은 동성애 문제를 다뤘다. 2017년 9월에는 데이트 앱 틴더에 대한 사용금지 조치를 해제했다. 이듬해에는 메카의 이맘 한 명이 새로 열리는 (이전까지는 부도덕한 오락이라고 비난받았던) 카드 게임 대회에서 첫 카드를 딜링하기도 했다. 여러 가지 새로운 스포츠 게임이 사우디에 소개됐다. 복싱, 레슬링, 몬스터트럭 경주, 심지어 스페인 스타일의 소몰이 축제도 열렸다. "그는 완전 록스타에요." 2021년 말 제다에서 열린 F1 대회에서 MBS가 기립 박수를 받는 모습을 본 한 미국인의 말이다.
외국인에게 오늘날의 리야드는 보다 관용적이다. "술 안 마신다고 잡아가는 거 아닌가 모르겠네요." 술을 안 마시는 한 사업가가 하는 말이다. "코카인에 알코올에 매춘부까지 캘리포니아 남부에서도 못 본 정도에요." 다른 파티 참석자의 말이다. "정말 세다니까요." 전직 사우디 고위 관계자는 동유럽 출신이 많은 성노동자들이 파티에 참석하는 것으로 3000달러를 벌고 밤을 보내면 1만 달러를 벌 수 있다고 한다.
MBS가 왕족으로서 공적인 삶을 갓 시작했을 때 그는 왕족으로서는 드물게 자신의 아버지처럼 도덕적으로 엄격하다는 평판을 얻었다. 그러나 그런 평판은 오래 가지 않았다. 취재에서 만난 많은 이들이 MBS가 마약을 상용한다 생각했다. MBS 본인은 이를 부인한다. 궁중의 한 소식통에 따르면 2015년에 친구들이 MBS에게 휴식이 필요하다 생각해 그를 몰디브의 한 섬으로 데려갔다 한다. 탐사보도 저널리스트 브래들리 호프와 저스틴 쉑은 공저 <피와 석유>에서 고용된 모델 150명이 섬에 동행했으며 이들은 "골프 카트를 타고 의료센터에 가서 성병 검사를 받았다"고 한다. 네덜란드의 DJ 아프로잭을 비롯한 세계적인 스타 뮤지션들도 합류했다. 그리고 언론에 기사가 났다.
그후로 MBS는 휴양지로 홍해를 선호했다. 주말이면 측근들이 자신의 요트를 MBS의 요트 '서린'(Serene, 골프연습장과 영화관 등이 딸려있다) 주변에 정박해 일종의 함대를 형성했다. 전직 관계자에 따르면 'DJ MBS(친구들이 그를 이렇게 부른다)'는 자신의 트레이드마크인 카우보이 모자를 쓰고 디제잉을 한다. 요트는 MBS가 부리는 사치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그는 2008년에 프랑스 베르사유 인근에 지어진 2억3000만 파운드(약 3600억 원) 짜리 복제품 고성(명상실은 아쿠아리움을 겸할 수 있게 돼 있다)을 구입했다. 그는 세계 최초의 조만장자(현재 1조 달러는 약 1300조 원)가 되고 싶다고 으스댄 적도 있다 한다.
우리는 위 의혹을 비롯해 본 기사에 등장하는 의혹들을 MBS의 대변인에게 제시했다. 런던의 사우디 대사관을 통해 대변인은 "해당 의혹을 부인하며 근거가 없는 의혹"이라며 전반적으로 부인했다.
MBS의 사회적 관습 완화 조치는 삶의 화려한 면모를 좋아하는 MBS 본인의 취향 못지 않게 사우디를 비롯한 많은 나라에서 그의 또래 젊은이들이 갖고 있는 가치관을 반영한다. 그러나 이런 사회적 혁명에도 불구하고 MBS가 사람들의 사상적 자유에 대해 갖는 입장은 와하브파 성직자와 별반 다르지 않다. 2018년 여성의 운전을 허용하기 직전, MBS의 정부는 사우디 여성인권운동 지도자인 루자인 알하틀룰을 투옥했다. 가족들에 따르면 그는 물고문과 전기고문을 당했으며 MBS의 최측근인 사우드 알카타니가 고문 현장에 있었고 그를 강간하겠다고 협박했다 한다. (유엔 조사 결과 여성 활동가의 고문에 알카타니가 연관돼 있다고 여길 만한 충분한 근거가 있다고 했다. 알카타니는 고문당한 한 활동가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널 내 맘대로 해버리고는 네 시체를 녹여 변기에 내려버릴 거다.") 알하틀룰은 체제의 변화를 기도한 혐의로 기소됐다. 이것이 전하는 메시지는 분명했다. 오직 단 한 사람만 체제를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MBS는 잔혹할 정도로 야심에 가득한 인물이다. 알려지기로 그는 십대 시절 알렉산드로스 대왕에 대해 읽기를 좋아했다 한다. 하지만 그가 권력의 정점에 서는 데는 어느 정도 운도 작용했다.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왕위 계승은 종종 예측불허다. 사우드 왕조는 1932년에 세워져 이제 겨우 두 세대를 거쳤다. 지금까지 왕좌는 초대 국왕의 아들 형제들이 번갈아 차지했다. 차기 계승자들이 점차 노쇠하면서 이것도 어려워졌다. MBS의 아버지는 왕위를 이어받을 가능성이 별로 없었으나 형 둘이 예기치않게 2011년과 2012년에 사망하면서 왕위 계승 순위가 급상승했다.
살만이 76세의 나이로 차기 왕위 계승자로 지명되자 그는 비서실장이 필요했다. 궁중에서는 그가 첫째 부인 사이에서 얻은, 영어를 잘하고 세련된 아들들 중 하나를 택하리라 예상했다. 그러나 그는 걸걸한 베두인 액센트로 아랍어를 구사하는 아들을 택했다. (MBS는 그후로 영어를 빨리 습득했다. 우리가 2016년 만났을 때 그는 때때로 자신의 통역가의 통역을 교정하기도 했다.)
MBS의 아버지를 잘 아는 사람들은 그가 MBS를 비서실장으로 택했을 때 그리 놀라지 않았다. 살만은 보다 짭짤한 수입을 기대할 수 있는 자리를 좇는 대신 리야드주 주지사로 헌신적으로 일했다. 70대가 돼서도 늘 오전 8시에 업무를 시작했다. 그는 엄격한 규율을 중시하는 인물로, 망나니처럼 행동하는 왕족을 지팡이로 패주기를 꺼리지 않았으며 심지어 자신의 감옥에 가두기도 했다. 그는 분명 자신의 여섯째 아들에게서 자신과 같은 근면함을 발견했다. MBS는 게임광일지 모르지만 성실하게 일하는 사람이었고 더 위로 올라가고자 하는 열의가 있었다.
MBS는 원하는 걸 얻기 위해서는 뭐든지 했다. 그의 별명 중에는 '아부 라사사(총알의 아버지)'가 있는데 토지 분쟁에서 자신에게 불리한 판정을 내린 정부 관계자에게 우편으로 총알을 보냈다는 소문(사우디 관계자는 과거 이 소문을 부인한 바 있다)이 널리 퍼지면서 생긴 것이다. 그는 사적으로도 두려운 인물이다. "성미가 불같아서 사무실을 부수고 궁전을 뒤집어 엎는 일이 있었죠." 왕궁과 연줄이 있는 한 소식통의 말이다. "매우 폭력적인 성격이에요." 몇몇 지인들에 따르면 기분이 매우 큰 폭으로 변한다 한다. 전직 왕궁 관계자 둘에 따르면 MBS는 어머니와 말다툼을 하다 어머니의 방 천장에 총을 난사했다 한다. 복수의 소식통과 언론 보도에 따르면 그는 자신의 어머니를 가두기도 했다.
MBS에게 부인이 몇 명 있는지는 말하기가 어렵다. 공식적으로는 딱 한 명, 사라 빈트 마슈르라는 매력적인 사우드 왕가의 공주다. 그러나 궁중 관계자들은 최소한 한 명 더 있다고 한다. MBS는 자신의 가족이 평범하고 행복한 것처럼 보여준다. 애틀랜틱 매거진과의 2022년 인터뷰에서 그는 아이들과 매일 아침을 같이 먹는다고 말했다(걸프뉴스에 따르면 그는 아들 셋과 딸 둘이 있고 맏이가 11세라고 한다). 한 외교관은 MBS가 아내에게 상냥하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러나 다른 왕가 관계자들에 따르면 적어도 한 번, 사라 공주가 남편에게 너무 심하게 맞아 병원 치료를 받아야 했다고 한다.
우리는 이를 비롯해 본 기사에서 다룬 여러 의혹을 MBS의 대변인에게 제시했다. 대변인은 이를 두고 "완전한 날조"라며 이렇게 덧붙였다. "불행히도 사우디아라비아 왕국은 지도자에 대한 거짓 의혹에 익숙합니다. 주로 정치적 (또는 다른) 의도를 가진 악의적인 인물들이 제기하는 것입니다."
MBS는 2015년 마침내 살만이 왕위에 오르면서 정치 권력의 맛을 보게 된다. 살만은 자신의 아들을 부왕세자로 지명하고 국방장관으로 임명했다. MBS의 초기 정책 중 하나는 인접한 예멘과 전쟁을 치른 것이었다. 사우디와 가장 가까운 군사 동맹국인 미국조차도 전쟁 직전에서야 통보를 받았다.
왕좌로 향하는 MBS의 길에는 커다란 장애물이 하나 있었다. 자신의 사촌인 57세의 왕세자 무함마드 빈나예프였다. 빈나예프는 사우디 정보기관의 수장이었으며 사우디와 CIA의 주요 소통 채널이었다. 9.11 테러 이후 사우디에서 알카에다를 몰아내는 데 큰 공을 세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2017년 7월, 빈나예프는 살만 왕을 만나기 위해 메카에 있는 왕궁에 불려갔다.
그 후에 벌어진 일은 언론 보도와 나의 인터뷰를 통해 알려졌다. 빈나예프는 헬리콥터를 타고 왕궁에 도착해 엘레베이터를 타고 4층으로 향했던 것 같다. 국왕 대신 MBS의 요원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빈나예프는 무기와 전화기를 압수당했고 국왕 자문기구에서 그를 해임했다는 통보를 받았다. 그에게는 어떤 선택을 할지 생각할 수 있도록 혼자만의 시간이 주어졌다. 일곱 시간 후, 왕궁의 영상촬영기사는 MBS가 자신의 사촌에게 입을 맞추고 그가 왕세자직에서 물러나겠다는 선언을 받아들이는 가식적인 모습을 촬영했다. 살만 왕은 상황이 벌어지는 내내 뒷전에 있었다. 빈나예프는 현재 구금된 상태다(왕위 계승권을 갖고 있는 빈나예프의 삼촌이 그를 보호하기 위해 개입했던 것으로 보이나 그 또한 나중에 구금된다). 이렇게 연출된 사임 선언(사담 후세인이 즐겨쓰던 것이기도 하다)은 MBS의 시그니처가 된다.
빈나예프는 몸풀기에 불과했다. 2017년 10월, MBS는 리야드 리츠칼튼 호텔에서 국제투자컨퍼런스를 주최했다. '사막의 다보스'라 불린 이 컨퍼런스에는 크리스틴 라가르드, 손정의 같은 업계의 유명인사들이 모여 MBS가 말하는 석유 시대 이후 사우디의 미래에 대해 들었다. 5000억 달러(약 650조 원)가 투입되는 '스마트 시티' 네옴의 건설 계획도 그 일부였다. 컨퍼런스는 성황리에 끝났다. 예멘에서 일어난 전쟁이나 미국과의 안보 문제 파트너였던 빈나예프의 상황에 대한 외교적 불평은 수그러들었다.
컨퍼런스는 종종 국외에 나가 있던 왕족들을 불러들이기에 좋은 기회였다. 초청받은 외국인들이 떠나자 MBS는 냉큼 달려들었다. 왕자와 사업가 수백 명이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뉴욕타임스 기자 벤 허바드의 MBS 전기에 따르면 한 왕족은 호텔방에 들어간 후에야 뭔가 이상하다는 걸 깨달았다. 방에 펜이나 면도날, 유리잔처럼 무기로 사용될 수 있는 물건이 하나도 없었던 것이다.
MBS는 왕족들을 리츠칼튼에 몇 주간 감금했다(감금할 인원을 리츠칼튼이 전부 수용할 수 없어 일부는 메리어트를 비롯한 다른 호텔로 보내졌다). 전화기는 모두 압수됐다. 몇몇은 머리에 덮개가 씌워지기도 했고 돈을 내놓거나 보유하고 있는 자산 목록을 넘기겠다고 할 때까지 잠을 못 자게 하고 구타를 당했다고 한다. 리츠칼튼에 머문 MBS의 게스트들은 1000억 달러(약 130조 원) 가량을 내놓았다.
이전에는 누구도 손댈 수 없으리라 여겨졌던 왕족들(이를테면 사우드 왕가 친위대를 지휘하는 왕자)도 비슷한 대접을 받았다. 사우디 제2대 국왕의 가장 어린 자식인 바스마 공주는 아무런 법적 절차나 변호사를 만날 권리 없이 3년간 구금됐다. 석방된 이후에도 전자발찌를 차고 있어야 했다고 공주의 측근이 말했다.
왕족과 재계 엘리트에 대한 공격은 부패척결로 포장됐다. 실제로 압수된 자산 중에는 부정한 방법으로 취득된 것이 많고 MBS는 이를 모두 사우디 국고로 환수하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 방식은 법적 절차보다는 조폭 영화를 방불케했다.
사우드 알카타니가 심문을 주관했으며 그는 구금된 왕족, 사업가가 심문에 굴복해 은행 계좌와 비밀번호를 불면 MBS에게 직접 보고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본 기사에서 거론되는 알카타니에 대한 모든 의혹은 그의 변호사를 통해 알카타니에게 제시되었으나 아무런 응답을 받지 못했다.) 알카타니는 다른 계파에 속했던 시절, 살만과 MBS를 권력에서 배제하기 위해 살만이 치매가 있다는 소문을 유포하기도 했으나 나중에는 MBS의 신뢰를 받는 수하가 됐다. 알카타니는 자신이 속했던 계파에 매우 충성해 자신의 아들 이름을 계파의 보스를 따서 지었다. 전직 궁중 관계자에 따르면 선왕의 장례식에서 MBS는 알카타니의 뺨을 때렸다 한다. 이후 MBS는 알카타니에게 스스로의 값어치를 증명할 수 있는 기회를 주고 그를 자신의 보좌진에 받아들였다. 알카타니는 다음에 태어난 아들의 이름을 무함마드로 지었다.
명목상 알카타니는 공보 보좌관이다. 전직 기자로 트위터를 잘 이해하고 봇(여론조작이나 광고 등에 사용하는 대량의 가짜 SNS 계정 --역주)과 열혈 팔로워를 동원해 SNS에서 사우디를 비판하는 사람들을 위협한다(그의 사무실에는 직원들이 레이저 총으로 사격 연습을 하기 위해 설치한 대형 스크린과 홀로그램이 있다). 실제로는 MBS가 가장 중요하면서도 폭력적인 임무를 맡기는 인물이다. 바로 그런 임무들로 MBS는 권력을 손에 쥐었다.
그가 맡은 임무는 사우디 국경을 넘는 것도 많았다. 2016년 그는 MBS를 헐뜯던 술탄 왕자(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왕족이었다)를 납치했다. MBS는 자신의 제트기로 술탄 왕자를 파리에서 카이로로 보내주겠다고 했는데 비행기는 사우디로 방향을 틀었다. 호프와 쉑의 책에 따르면 알카타니는 항공사 파일럿인 사우드라는 이름의 기장으로 위장했는데 놀랍게도 초고가의 위블로 시계를 차고 있었다 한다.
이렇게 협박 상대를 인권을 보장받기 어려운 나라로 보내는 전략을 구사하면서 돈줄을 막아버리니 심지어 리츠칼튼에 있지도 않았던 왕족들조차 과도하게 화려한 자산을 처분해야 한다는 압박을 받았다. 주영국 사우디 대사의 아버지는 자신이 애호하던 영국 코츠월드의 2000에이커(약 240만 평) 규모의 글림턴 파크를 팔았다. 리야드의 보석상들은 왕족들이 내놓은 다이아몬드를 거래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로마노프 왕족들이 '파베르제의 달걀'(러시아 차르 왕실의 사치를 상징하던 부활절 달걀 모양의 보석 --편집자주)을 파는 모습 같았죠." 한 경매장 관계자가 한 말이다.
많은 평민들은 엘리트들의 몰락에 기뻐했다. 막대한 지원금을 받으며 살던 왕자와 공주들이 직업을 구하기 시작했다. 왕족 타이틀은 무의미해졌다. 왕족들의 목장은 물을 댈 돈이 없어지자 다시 사막으로 변했다. 은행도 그들을 외면했다. 한 재정 자문가는 왕자들이 자신들의 왕족 지위를 빌려 자금을 융통하려 하자 이렇게 답했다. "귀하께서는 스스로를 왕자라고 하십니다만 이젠 왕국에 왕자는 단 한 분만 계신다고 하네요."
리츠칼튼 사건은 대규모 중앙집권화 프로젝트의 일환에 불과했다. MBS는 다른 왕족들이 갖고 있던 다양한 공안기관의 통제권을 빼앗았다. 국영 석유회사 사우디 아람코도 장악했고 스스로를 사우디의 국부 펀드 PIF의 의장으로 임명했다. "그는 강력한 가문들을 모두 파괴했습니다." 한 은퇴 외교관의 말이다. 2017년 말이 되자 사우디의 법, 재력, 공안권력이 모두 MBS의 것이 됐다.
밀려난 이들 중에는 그 옛날 요트에서 찍은 사진에서 청년 MBS를 사진 끄트머리로 밀어넣었던 왕자들도 있었다. 당시 사진의 한가운데에 있었던 알왈리드 빈탈랄 왕자는 자신의 170억 달러 재산 중 일부를 포기했다. 왕족의 재산 몰수가 심화되자 MBS의 이복형제들은 요트를 내놓았다. 사촌 중 여럿이 투옥됐다. "보복의 시간이로군." 한 피해자의 말이다.
MBS는 국내에서 엘리트들을 쥐어짜는 한편, 국외에서는 중요한 친교를 맺고 있었다. 2016년 미국 대통령에 당선된 도널드 트럼프와 MBS는 공통점이 많았다. 둘 다 비주류의 설움 같은 걸 갖고 있었고 자국의 젠체하는 정치 기득권층을 혐오했다. 또한 도발하기를 즐겼다. 사우디가 미국 소비자에게 석유를 제공하고 미국은 사우디의 안보를 보장하는 전통적인 협약 관계는 최근 들어 악화됐다. 버락 오바마가 2011년 서둘러 이라크에서 철군하고 2015년 이란과 핵 협약을 맺자 사우디아라비아는 앞으로 미국의 보호에만 기댈 수 없다는 우려를 갖게 됐다. 미국이 자국의 셰일 오일을 개발하면서 사우디 석유에 대한 의존도도 떨어졌다. 그때 트럼프와 MBS가 친밀한 사이가 됐다.
트럼프 행정부의 암묵적(때로는 노골적이기도 했다) 지원 아래, MBS는 중동 전 지역을 사우디아라비아에서 했던 것처럼 대하기 시작했다. 자신이 불편하게 여기는 지도자들을 밀어내려 한 것이다. 그는 사우디 동쪽에 위치한 작은 가스 부국 카타르를 봉쇄한다고 발표했다. 2017년에는 레바논이 이란과 관계가 깊어지는 데 격분한 MBS는 오랫동안 사우디의 지원을 받아온 레바논의 총리 사드 하리리를 캠핑 여행에 초대한다. 하리리는 방문하자마자 전화기를 빼앗겼고 곧 TV에서 자신의 사임을 발표하게 된다.
두 조치 모두 결과적으로 사우디에 부정적인 결과를 초래했다. 그러나 트럼프의 중동 참모이자 사위였던 재러드 쿠슈너는 MBS의 기행을 막으려 하지 않았다. 둘은 왓츠앱 메신저로 서로를 '재러드', '무함마드'라 부르며 중동 지역의 새로운 질서를 함께 꿈꾸었다. 둘의 친교는 매우 돈독해서 쿠슈너의 설득으로 MBS는 이스라엘을 국가로서 승인하는 작업을 시작했다. 여전히 공식적으로 국왕이었던 그의 아버지가 여기에 제동을 걸었다.
MBS는 2018년 3월 미국을 방문해 실리콘밸리에서 피터 틸과 팀 쿡을 만났고 루퍼트 머독, 제임스 캐머런, 드웨인 '더 락' 존슨 등의 유명인들도 만났다. 2300억 달러(약 300조 원) 규모의 국부 펀드를 주무르는 사내를 만나고 싶어하는 사람은 많았다. 그러나 보답으로 사우디에 투자하고자 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는 데 MBS는 낙담했다.
그해 10월, 대륙을 넘나드는 우정에 급제동이 걸렸다. 나는 터키에서 열리는 컨퍼런스에 참석할 예정이었다. 전부터 알고 지냈던 사우디 출신 언론인 자말 카슈끄지가 연락을 해 만나자고 했다. 그도 사우디 영사관에 볼 일이 있어 이스탄불에 간다는 것이었다. 카슈끄지는 사우디 궁중에서 벌어지는 일에 대해 해박했고 그가 워싱턴포스트 등의 언론에 기고한 MBS에 대한 비판은 많은 관심을 받았다. 그는 평소보다 연락을 유지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이는 듯 보였다. 내가 컨퍼런스에 있는 동안 카슈끄지의 친구가 내게 전화를 했다. 그가 아직까지 영사관에서 나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내가 영사관에 도착했을 무렵, 터키 경찰이 영사관 주변에 폴리스라인을 치고 있었다.
영사관에서 벌어진 일의 전말은 유출된 정보기관 보고서와 그 후 진행된 유엔 조사에서 드러났다. 사우드 알카타니와 공조한 것으로 알려진 사우디 암살단이 이스탄불로 날아갔다. 카슈끄지가 영사관에 들어오기를 기다리면서 암살단은 그의 시신을 절단할 계획을 세웠다. 튀르키예 정보기관이 영사관 내부를 감청한 녹음에 따르면 이들은 카슈끄지에게 "널 잡으러 왔다"고 말했다. 몸싸움하는 소리가 들리다가 비닐을 두르는 소리가 뒤따른다. CIA 보고서는 MBS가 이 작전을 승인했다고 한다.
MBS는 카슈끄지의 살해에 대해 책임을 통감한다고 했지만 자신이 지시한 일은 아니라고 했다. 그는 알카타니를 비롯해 정보기관 보고서에 등장하는 관계자들을 해임했다. 사건의 여파는 즉각 나타났다. 그해 열리는 사막의 다보스에 기업과 연사들이 참석을 취소했다. 게이츠재단은 MBS가 만든 비영리단체 미스크와의 파트너십을 종료했다. 헐리우드 에이전트 아리 이매뉴얼은 사우디와 체결했던 4억 달러 규모 계약을 취소했다.
왕세자는 이때 자신을 향한 반감에 진심으로 놀랐던 것 같다. 그의 밑에서 일했던 한 사람은 그가 "실망했었다"고 한다. 서방이 요구하던 모든 개혁을 추진하지 않았던가? 어쩌면 그는 사우디 바깥에서는 알려지지 않은 왕족을 건드렸을 때와 국제적으로 유명한 인물을 건드렸을 때의 차이를 간과했을 수도 있다. 아니면 서방 정부들의 우선순위를 그들보다 더 잘 이해하고 있어서였는지도 모른다. 테러와의 전쟁에서 서방의 파트너였던 무함마드 빈나예프가 사라졌을 때 서방 정부들은 거의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리츠칼튼에서 발생한 고문에 대한 언론 보도가 나왔을 때도 어깨를 으쓱했을 뿐이었고 MBS가 예멘을 무모하게 공격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왜 일개 기자를 죽인 것에 대해 그렇게 말이 많단 말인가?
카슈끄지 살해 사건이 발생한 지 3년 후, 사막의 다보스가 가수 글로리아 게이너의 공연으로 막을 올렸다. 배경에 설치된 대형 스크린에 웃고 있는 아이들의 사진이 뜨는 가운데 게이너는 자신의 디스코 히트곡 'I Will Survive'를 불렀다. "내가 무너질 거라 생각했니? 내가 쓰러져 죽을 거라 생각했니?"('I Will Survive'의 가사 일부)
세계적인 자산운용사 블랙록과 블랙스톤의 CEO들이 돌아왔다. 골드만삭스와 소시에테 제네랄, 스탠다드차타드의 CEO들도 마찬가지였다. 심지어 아마존은 창업자 제프 베이조스가 카슈끄지를 고용했던 워싱턴포스트의 소유주라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대표를 보냈다. 한편 알카타니는 다시 왕실의 총애를 받기 시작했다. 유엔 조사단은 그가 카슈끄지의 살해에 연루돼 있다고 결론지었으나 사우디 법정은 그를 기소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MBS는 그간 거의 잠자고 있던 상태의 국부펀드를 다시 움직여 IT, 엔터테인먼트, 스포츠에 수백억 달러를 투자하기 시작했다. 사우디의 이미지를 보다 부드럽고 매력적으로 만들고 새로운 파트너를 끌어들이기 위해서였다. 2020년 4월 국부펀드는 컨소시엄을 만들어 영국 프리미어리그 축구팀 뉴캐슬 유나이티드를 인수했다(인수에는 18개월이 걸렸다). 이듬해에는 사우디의 자체 골프 투어를 만들 대담한 기획을 시작했다. 이렇게 탄생한 LIV 시리즈는 미국의 골프 대회보다 훨씬 많은 총상금 2억5500만 달러(약 3300억 원)로 선수들을 유혹했다. 2022년 열린 첫 LIV 투어에서 톱플레이어 몇몇은 투어를 보이콧했지만 다른 선수들은 상금을 보고 출전했다.
조 바이든은 꼬드기기가 쉽지 않았다. 대통령이 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바이든은 예멘에서 벌어지는 전쟁에 대한 미국의 군사지원을 중단했다. 그는 살만 왕과 직접 소통하겠다며 MBS와의 대화를 거부했다. 심지어 15개월동안 사우디 대사를 지명하지 않았다. 사방에서 사우디-미국 관계가 냉동된 상태라는 이야기가 나왔다. 그러다 2022년 2월, MBS는 대박을 맞았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것이다.
전쟁이 발발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바이든 자신이 MBS와 통화를 하려 했다. 왕세자는 미국 대통령과의 통화를 거부했다. 하지만 푸틴의 전화는 받았다. 둘은 이미 가까운 사이였다. MBS는 사우디아라비아가 전세계 석유 생산량을 통제할 수 있도록 만들기 위해 OPEC(석유수출국기구)의 확장판인 OPEC+에 러시아를 직접 초대했었다. 푸틴은 2018년 카슈끄지 살해가 발생하고 몇 주 후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열린 G20 정상회담에서 MBS와의 친교를 다졌다. 서방의 지도자들이 MBS를 외면할 때 푸틴은 MBS 옆자리에 앉기 전 그와 하이파이브를 했다.
미국에 대한 MBS의 도전은 성공을 거둔 듯했다. 몇 개월이 지난 후 바이든은 7월 제다에서 MBS와 만나기로 마지못해 합의했다. MBS가 택한 장소에서 MBS가 원하는 방식으로였다. 바이든의 사우디 방문은 MBS의 체면을 세워줬지만 양국 관계를 회복하는 데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았다. 석유 생산을 늘리겠다는 구체적인 확약조차 없었다.
미국의 외교가 일각에서는 여전히 MBS가 중동 지역에서 도움이 되는 파트너가 될 수 있다는 희망을 갖고 있다. 그가 카타르와의 대립을 끝냈고 예멘에서도 외교적 출구를 찾고자 하고 있다는 점을 들면서 그가 지도자로서 보다 성숙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너무 낙관적인 것 같다. 엉망이 된 MBS의 예멘 전쟁은 표면상 예멘의 대통령을 지원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2022년 4월, 예멘 대통령은 아라비아 커피와 대추야자를 곁들인 회의에 참석한 지 몇 시간이 흐른 뒤 TV에 나와 사임을 발표했다. MBS는 직접 나서서 예멘 대통령을 제거했다. 이는 그가 국제 외교를 다루는 방식이 여전히 독단적임을 암시한다. "사우디가 배운 건 미국 국회의원들과 자주 저녁을 먹는 기자를 죽이면 안 된다는 정도입니다." 한 외국 전문가의 말이다.
서방은 MBS에게 다른 교훈도 줬다. 전세계의 독재자들이 위안삼을 수 있을 것인데, 어떤 죄악을 저질렀던 간에 증오와 분노를 잘 견디기만 하면 사업가, 유명인사, 심지어 서방 지도자들도 결국은 돌아온다는 것이다. 36세의 MBS에게 시간은 아군이다. 일각에서는 사우디의 석유 매장량이 줄어들고 재정이 악화되기 시작하면 더 위험해질 수 있다고 우려한다. "그가 중년이 됐는데 자신이 지배하고 있는 나라의 수입이 시원찮아 시시해지면 어떻게 될까요?" 개인적으로 MBS를 아는 한 외교관의 의문이다. "더 많은 모험을 시도하진 않을까요?"
올해 초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일하는 오랜 친구를 찾았다. 우리가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그는 자신의 전화기를 꺼내 전파를 차단하는 파우치에 넣었다. 정부의 정부기관이 감청하는 걸 막기 위해서였다. 중국과 같은 경찰국가에서 반정부활동가가 많이 하는 행동이다. 하지만 사우디에서 이런 모습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정계와 연관된 사람들만 이런 식으로 조심하는 게 아니다. 사우디 국민 대부분이 이젠 전원이 켜진 휴대전화 근처에서 대화하기를 두려워 한다. 과거에는 사무실이나 집, 카페에서 꽤 자유롭게 이야기를 하곤 했다. 이제는 아무것도 아닌 일에도 꼬투리를 잡힌다.
그의 사무실 에어콘이 돌아가는 소리를 배경으로 대화를 시작하자, 나의 친구는 지난달에 구금된 아는 사람들의 목록을 줄줄이 늘어놓았다. 감옥에서 죽은 퇴역 공군 장성, 자신의 사무실에서 끌려나간 병원 관리자, 일곱 명의 자식 앞에서 체포된 어머니, 풀려난 지 7일 만에 사망한 변호사. "이 사람들은 선동꾼도 아니에요. 대체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지 아무도 모릅니다."
사우디 정부는 공식적으로는 자국에 정치범이 없다고 한다. 인권단체들은 MBS의 저인망식 단속에 수천 명이 당했다고 본다. 나는 1990년대부터 중동을 취재해왔는데 사우디 외에 취재원이 이렇게 많이 구금된 곳을 떠올릴 수가 없다.
MBS가 정·재계 엘리트와 성직자들을 짓밟은 이후에는 자신들을 노리리라 예상한 평범한 사우디 국민은 없었다. 사우디를 현대적인 네트워크 국가로 만들고 나자 국민들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감시하기가 훨씬 쉬워졌다. 적신월사(적십자와 같은 일을 이슬람 국가에서 하는 단체) 직원 압둘라흐만 알사드한은 가명으로 트위터에 풍자글을 올리곤 했다. 2018년 MBS의 요원들이 그를 체포해 2년간 외부와의 소통을 차단했다. 나중에 미국 검찰은 사우디 관계자에게 여러 트위터 계정 사용자의 실명 정보를 제공한 혐의로 전직 트위터 직원 둘을 기소했다. 알사드한의 가족은 알사드한의 이름이 그 정보에 포함돼 있다고 여긴다. (전직 트위터 직원 한 명의 재판은 현재 진행 중이다. 그는 사우디 관계자에게 정보를 제공한 혐의를 부인하고 있다.)
표면적으로 MBS가 걱정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 여론조사에서(이를 믿기로 한다면) 그는 전반적으로 인기가 높다. 특히 젊은 사우디 국민에게 인기가 많다. 그러나 수면 아래에서는 조금씩 불만이 쌓이고 있다. MBS는 사우디 국민과의 중차대한 사회계약을 파기했다. 국민에게 주는 보조금도 줄였고 금요일의 기도회 후 일반 국민의 목소리를 듣는 전통도 없앴다.
만일 그 전통이 남아있었더라면 어떤 문제가 거론됐을지 상상하기란 어렵지 않다. 많은 사람들이 생활 물가의 상승으로 고생하고 있다. 코로나19 팬데믹 때 다른 나라에서는 보조금 지원을 늘린 반면, MBS는 유가 보조금을 삭감하고 부가가치세를 세 배로 늘렸다. 관개(灌漑)에 드는 비용을 댈 수 없어 몇몇 농부는 밭에 작물이 말라죽도록 내버려뒀다. 등록세나 벌금도 급격히 올랐다. MBS는 사우디의 청년들에 대해 유창하게 말은 하고 있지만 청년들에게 제대로 된 일자리를 제공하는 데 애먹고 있다. 사우디의 실업률은 여전히 두 자리 수를 유지하고 있다. 실업자의 절반이 대학교 학위를 갖고 있지만 내가 만난 MBS의 초대형 사업에서 사무직으로 일하고 있는 사람 대부분은 외국인이었다.
사우디아라비아는 석유 매장량이 장기적으로 감소하는 데 대비하기 위해 자국 경제를 다각화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지만 아직까지 결과는 별로 좋지 않다. 팬데믹으로 외국인 관광객 유치를 빠르게 늘리려던 계획에 차질이 생겼다. 왕가의 친척들에게 수십억 달러를 갈취하는 행위는 사우디에 투자자를 유치하는 데 그리 좋은 방법은 아닌 듯하다.
MBS는 선왕들이 소소하게나마 추진했던 민주화 정책도 무산시켰다. 지방선거는 중단됐다(현지 언론에 따르면 예산 절감을 위해서란다). 150인으로 구성된 국왕의 최고 자문기구인 슈라위원회는 팬데믹 이래로 온라인 회의만 했다(다른 기구들은 여러 차례 대면 회의를 했다). "제가 발언권이 더 있었으면 해요." 한 위원의 말이다. 그는 내가 MBS를 언급할 때마다 다리를 움찔했다.
왕궁을 자주 방문하는 한 인사는 MBS가 이제는 언제나 사람들이 자신에게 반기를 들거라고 생각하는 사람 같다는 느낌을 준다고 한다. 그는 충성심에 집착하는 것 같다. 그는 정부의 핵심 직위에 자신에게 위협이 될 수 있는 현지 기반이 없는 젊은 왕족이나 외국인, 또는 자신이 이미 굴복시킨 사람들을 앉힌다. 현 정부에서 장관직을 맡고 있는 이브라힘 아사프는 리츠칼튼에 감금됐던 인사 중 하나로 사건 2개월 후 세계경제포럼(다보스포럼)에 대표로 파견됐다. MBS의 건설 사업 중 하나의 고위 임원을 맡고 있는 인물은 과거 MBS의 감옥에서 고문당한 적이 있다 한다. "벌거벗겨져 거꾸로 매달려서 얻어맞고 모든 자산을 빼앗겼다가 고위급 사업 관리자가 됐죠." 그와 가까운 지인의 말이다.
MBS의 성질머리에는 누구도 예외일 수 없다. 사우디 소식통에 따르면 MBS가 하루는 장관 하나를 10시간동안 화장실에 가뒀다 한다. (문제의 장관은 이후 TV에 나와 MBS의 지혜로움에 대해 뻔한 이야기를 늘어 놓았다.) 내가 만난 고위 관계자 하나는 그만두고 싶다고 한다. "측근들은 모두 그를 무서워해요." 한 궁중 내부 관계자의 말이다. 이는 인구 3500만의 국가를 효과적으로 다스리기 어렵게 만들 수 있다. 전직 궁중 관계자들은 MBS의 측근 중 누구도 점점 더 거창해지고 있는 그의 사업 계획들에 현실성이 있는지 솔직하게 이야기하지 못한다고 말한다. "그들은 결코 안된다고 말을 못해요."
MBS가 자신의 권력 강화 외에 다른 목표를 갖고 있다면 아마도 네옴에서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네옴은 MBS가 사막에 짓겠다고 공언한 도시로 그는 2017년 네옴 프로젝트를 두고 "인류의 문명사적 도약"이라 했다. 이후 어안을 벙벙하게 만드는 세부계획들이 뒤이어 발표됐다. 네옴의 식량은 물에 띄운 구조물에서 수경재배로 생산하고 도시의 사용 전력은 세계 최대의 그린수소 발전소에서 생산한다. 인근의 산에 수천 개의 제설기를 사용해 스키 리조트를 만든다. 자율주행차량과 드론 택시도 운영될 계획이다.
공식 계획에 따르면 네옴의 도심은 2020년에 완공되고 2025년까지 다른 지구를 추가로 완공할 예정이다. 사우디의 관광부 장관 아메드 알카팁은 계획이 너무 의욕과잉이었던 것으로 드러났다는 소문을 일축했다. "들은 것만 믿지 말고, 오셔서 직접 눈으로 보십시오." 그래서 나는 네옴으로 갔다.
네옴을 찾는 것부터가 문제였다. 어디에도 네옴을 가리키는 도로 표지판을 찾을 수 없었다. 세 시간동안 운전해 우리는 지도에 표시된 지점에 도착했다. 무화과 나무 하나를 제외하곤 황무지였다. 낙타 무리가 텅빈 고속도로를 가로질러 지나고 있었다. 도로 주변으로 건물 잔해들이 늘어져 있었다. 거대한 메트로폴리스를 짓기 위해 철거된 마을의 흔적이었다.
네옴 시티의 부지는 거의 벨기에 정도의 크기다. 내가 봤을 때는 단 두 개 건물만 완성돼 있었다. 하나는 MBS의 궁전이고 다른 하나는 구글 어스에서 '네옴 익스피리언스 센터'라고 나오는 것이었다(센터를 보러 갔더니 조립식 건물에 가려져 있었다). 그밖에 내가 찾을 수 있었던 유일한 건축물은 네옴 프로젝트가 시작되기 전에 지어진 로열 튤립 호텔이었다. 호텔 로비에 붙어있는 포스터에는 '네옴을 발견하세요'라고 써있었지만 호텔 지배인에게 가이드를 요청했더니 지배인은 아랍어 욕설로 내 여동생을 욕하더니 나를 쫓아내려 했다. 네옴 웹사이트에서 볼 수 있었던 "첨단 인프라", "협력적 생태계"를 갖춘 미디어 허브는 보이지 않았다. 네옴의 커뮤니케이션·미디어 책임자 웨인 보그는 "현재 사우디 국외에 있다"고 말했다.
호텔 레스토랑은 컨설턴트들로 가득했다. 내가 만난 컨설턴트들은 전부 외국인이었다. (나중에 사우디 국적의 프로젝트 매니저 한 명을 찾았다. "곧 작업을 시작할 것 같은데 컨설턴트들이 2개월마다 새 계획을 내놓고 있어요." 사우디 매니저의 말이다. "여전히 계획을 위한 계획을 작성 중이라니까요.") 외국인 컨설턴트들은 한탕주의로 가득했다. 대부분 한 달에 4만 달러(약 5300만 원)를 받으며 추가로 짭짤한 보너스도 받는다. "로데오(길들이지 않은 소를 타고 버티는 경기)와 비슷해요." 한 네옴 컨설턴트가 한 말이다. "곧 나가떨어질 걸 아니까. 소 등에 올라 타고서 2분 이상 버틸 수 있는 사람은 없잖아요. 그러니까 있는 동안 최대한 챙기자 이거죠."
높은 급여에도 불구하고 외국인들이 네옴 프로젝트에서 손을 떼고 있다는 보도가 있다. 기대와 현실의 괴리에서 스트레스를 많이 받기 때문이라 한다. 네옴 프로젝트 최고 책임자의 지인들에 따르면 그는 사업의 진척이 너무 더뎌 겁을 먹은 상태라 한다.
나는 마침내 도움을 구할 수 있었다. 공군 기술자로 일하다 은퇴했다는 사람이 600달러를 주면 네옴 시티를 운전해서 관광시켜주겠다고 했다. 그는 나를 사막 위에 놓여 있는 조각물로 안내했다. 'I ♥ Neom'이라 쓰여진 조각이었다. 거기서 좀 더 이동하자 아스팔트로 포장된 길을 발견했다. 꿈의 도시 네옴의 경계를 표시하기 위해 포장한 거라 한다. 그 경계 너머로는 황량하고 적막한 모래벌판이 멀리 뻗어 있었다.
니콜라스 펠험은 이코노미스트의 중동 특파원으로 30년 넘게 중동 지역에 대해 연구하고 취재했다. 국제위기그룹(ICG), 유엔, 채텀하우스에서 중동 분석가로 일하기도 했다.
세계 최대의 산유국 사우디아라비아의 무함마드 빈살만 왕세자는 작년 11월 방한으로 한국에서도 많은 관심을 받았습니다. 자신에게 비판적인 언론인을 잔혹하게 살해한 독재자답지 않은 서글서글한 눈매, 영국 프리미어리그 구단을 소유하고 있을 정도의 재력, 보수적인 사우디 사회의 자유화 개혁 추진, 한국에 제2의 중동붐을 가져올지도 모른다는 초대형 프로젝트 네옴 시티 등으로 대체로 호의적인 분위기였지요. 과연 빈살만은 사우디의 개혁군주로 역사에 남을까요? 아니면 변덕스럽고 망상에 사로잡힌 독재자로 남을까요? 국제정세를 볼 때 지도자 개인에게만 집중하는 것은 실책이 될 수 있지만 절대 군주정이라는 사우디의 특징을 고려할 때 빈살만 왕세자가 과연 어떤 인물인가는 사우디의 앞날은 물론이고 향후 세계질서에도 중요한 영향을 미칠 것입니다. 이코노미스트의 온라인 자매지 1843매거진에 2022년 7월 28일 실린 심층기사는 우리가 잘 알지 못했던 빈살만의 면모를 드러냅니다. 원고지 100장이 넘는 이 롱리드 기사를 읽고 나시면 빈살만에 대해 긍정적이었던 독자들도 다소간의 우려나 회의감을 갖게 될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