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11.17 13:10
지난 10월 7일 하마스가 수백 명의 이스라엘 민간인을 살해한 몇 시간 뒤 이 기습공격을 기획한 인물이 드물게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하마스의 SNS 채널로 내보낸 영상에는 하마스 군사지도자 무함마드 데이프의 실루엣이 나타났고, 이 실루엣 뒤로 미리 녹음해둔 육성이 흐르며 성명을 발표하고 있었다. 그의 묵직한 목소리는 1400명 이상의 목숨을 앗아간 테러공격을 선언하면서도 이상할 정도로 차분했다.
하마스는 이슬람 조직이다. 하지만, 데이프의 성명은 종교에 대해 거의 언급하지 않았다. 그는 "레바논, 이란, 예멘, 이라크, 시리아의 형제 이슬람 저항세력이 싸움에 참여해달라"고 요청했지만, 다른 종교를 가진(또는 가지지 않은) 전 세계 시민들에게도 시위를 벌여달라고 부탁했다. 성명서를 다 읽은 후 그의 모습은 사라졌고 공포만 남겨졌다.
현재 살아있는 사람들 중에 데이프만큼 이스라엘인을 많이 죽인 사람은 없다. 그는 싸움 중 입은 부상을 치료하던 시기를 빼고 1990년 중반부터 하마스의 군사조직을 이끌어왔다. 이렇게 오랫동안 변함없이 자리를 지킨 것은 암살에 의해 계속 흔들려왔던 조직의 지도부에서는 매우 드문 일이었다. 그의 지휘 아래 하마스의 전술은 시간이 흐를수록 아마추어 느낌이 약해졌고 더욱 파괴적으로 되었다. 처음엔 대규모 자살폭탄 공격이었다가 나중엔 장거리 미사일 공격이 되었다.
암살 공격을 받아 팔다리를 잃고서 휠체어에 의존해 생활하는 그는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을 한 단계 높이 확전시켜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길로 내몰았다. 이스라엘과의 타협을 추구하는 하마스 내 그의 반대파는 확실히 힘을 잃었다.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인지―가자에서 억류되어 있는 200여명의 인질들의 운명, 이스라엘의 맹렬한 공습과 예상되는 지상공격에 대한 반응―은 이제 한 명의 기획과 계산에 달려있다.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사람들, 중동지역은 그 어느 때보다 중대한 갈림길에 놓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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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살아있는 사람들 중에 데이프만큼 이스라엘인을 많이 죽인 사람은 없다.”
하지만 데이프에 대해 알려진 것은 거의 없다. 오랫동안 서방의 스파이들은 그에 대해서 알 길이 막막했다. 언론에는 그의 어린 시절 모습을 담은 색 바랜 사진 몇 장만 공개됐을 뿐이다. 어떤 이들은 그가 사실은 오래전에 죽었고 그의 이름은 선전선동 목적으로 가공된 전설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쉴로모 엘다르라는 이스라엘 기자는 하마스의 많은 조직원들을 인터뷰했는데 이스라엘 정보기관 신베트 조차도 그에 대해 구체적인 정보를 확보하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말한다. 그는 이 막강한 이스라엘 정보기관도 "거리에서 바로 옆에 지나가고 있는 그를 못 알아볼 것"이라고 말한다.
데이프는 아랍어로 "손님"이라는 말이다. 이 하마스 지도자가 자신의 별명으로 "손님"을 택한 것은 수십 년 동안 적을 따돌리기 위해 이곳저곳 전전하던 자신의 생활을 표현하기 위해서였던 것 같다. 무함마드 디아브 알나스리라는 본명을 가진 그는 1965년 가자 남부지역의 칸유니스 난민캠프에서 태어났다. 1948년의 아랍-이스라엘 전쟁이 발발하면서 70만명 이상의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집을 잃었다. 많은 사람들이 요르단 서안과 가자지구로 피란했다. 당시 요르단 서안은 요르단이, 가자 지구는 이집트가 관할하고 있었다.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귀향을 막아서자, 그들이 피란하고 있던 곳의 관할국가가 그들을 좁은 난민캠프로 몰아넣었다.
데이프의 가족은 원래 예루살렘이 내려보이는 언덕 위에 살았는데, 그가 태어났을 때에는 시궁창 하수 범벅의 개울가 모래 위에 세워진 양철 오두막 촌으로 옮겨와 살았다. 데이프가 두 살이 되었을 때 가족들의 상황은 더욱 나빠져 있었다. 1967년의 6일전쟁 동안 이스라엘이 가자지구를 점령했고, 이곳에 살던 피란민들은 이스라엘의 직할 군사통치 아래 놓였다. 육군 지프에 타고 난민캠프를 순찰하는 이스라엘 군인들은 젊은 이들을 제멋대로 멈춰세우고 검문했다.
데이프의 아버지는 가구 수선하는 일을 하며 돈을 벌었고 데이프는 가끔 아버지 일을 도왔다. 칸유니스 난민캠프는 정상적인 교육과정을 제공하지는 않았지만 팔레스타인 저항운동을 이끌 미래의 지도자들을 키우는 학교가 되었다. 데이프는 훗날 정치적 거물이 될 두 사람 가까이서 자라났다. 가자 지구의 현 하마스 지도자인 야히아 신와르는 근처 골목에 살고 있었고, 하마스의 경쟁조직인 파타에서 보안계통 수장을 맡고 있는 무함마드 다흘란 역시 근처 골목에 살았다. 데이프는 어렸을 적부터 두 사람과 친구였고, 함께 축구공을 차며 놀았다. 엘다르 기자에 따르면, 신와르와 다흘란은 다른 친구들과 조직을 만들어 다흘란의 아버지가 가족을 버리고 떠난후 다흘란 가족을 경제적으로 도와줬다.
당시 팔레스타인의 저항은 파타가 주도했고, 하마스는 아직 존재하지도 않았다. 어린 데이프는 그다지 종교적이지 않았고(어느 보도에 따르면 그는 대학에서 코미디 연극팀에 합류했고 별명이 "어릿광대"였다), 어렸을 적 친구 다흘란을 따라 쉽게 민족주의 그룹에 합류했던 것 같다. 야세르 아라파트가 이끌던 파타는 1970년대에 이웃한 아랍 국가들에서 이스라엘을 기습공격해 인기를 얻었다. 처음에 파타는 이스라엘을 인정하지 않았고, 이스라엘이 점거한 땅 위에 민주적 팔레스타인 국가를 건설해야 하며 모든 피란민들이 돌아와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파타의 요구는 조금씩 1967년 전쟁 직전의 양측 경계선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쪽으로 변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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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프가 1980년대 말 가자 지구 이슬람대학에서 화학을 공부하고 있을 무렵, 점령지역의 분위기는 일촉즉발 상태였다. 이스라엘의 점령은 끝날 조짐이 보이지 않았고, 가자 지구 안의 이스라엘인 정착지역은 커져만 갔다. 이스라엘 정착민들이 수영장에서 노는 모습에 초라한 난민캠프의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분노했다. 1987년 12월 드디어 분노가 폭발했다. 팔레스타인 젊은이들은 이스라엘 탱크에 돌을 던졌고, 이와 함께 첫 번째 '인티파다' 즉 봉기가 시작됐다.
“데이프의 가족은 원래 예루살렘이 내려보이는 언덕 위에 살았는데, 그가 태어났을 때에는 시궁창 하수 범벅의 개울가 모래 위에 세워진 양철 오두막 촌으로 옮겨와 살았다.”
팔레스타인 주민들이 얼마나 분노하고 있는지, 그리고 이 분노가 얼마나 빠르게 퍼져나갔는지를 보게 된 중동지역의 모든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 20세기 초 이집트에서 시작되어 사회의 이슬람화를 목표로 하는 이슬람형제단은 지켜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인티파다가 시작된 후 얼마 안 돼 이슬람형제단에 연결되어 있던 가자 지구의 한 팔레스타인 이슬람 이맘(사제)이 '이슬람 저항운동'을 조직했는데, 아랍어 첫 글자를 따 '하마스'로 불렸다. 이 그룹의 출범 선언은 맹렬한 반유대주의로 가득했고, 예언자 마호메트의 말이라면서 "이슬람교도들이 (유대인들을 죽이면서) 유대인들과 싸우기 전에는 심판의 날은 도래하지 않을지니"라는 구절을 인용했다. 가자의 한 하마스 간부에 따르면, 데이프가 하마스에 합류한 것은 출범 몇 주 뒤였다.
하지만 이 새로운 조직이 어떤 종류의 저항을 시작할지 처음엔 분명하지 않았다. 하마스의 창립자인 이맘(사제) 아마드 야신은 장님이었고 하반신 마비 상태로 가자 지구에서 가장 큰 구빈(救貧) 조직을 이끌었는데, 그는 싸움을 위해 잔인한 살육을 마다하지 않을 정도의 강렬한 의지를 가지고 있었지만 종교적인 고매한 모습 아래 감춰두고 있었다. 처음에 야신은 이스라엘을 공격하는 일보다는 '다와' 즉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다시 이슬람에 귀의하도록 하는 일에 관심이 많았다. 이스라엘의 군 지휘관들은 파타 활동가들의 민족주의보다는 하마스 구성원들의 종교주의가 더 좋은 대안이라며 환영했다.
하마스는 1년 이상 이스라엘 안에서 그 어떤 무장투쟁도 벌이지 않았다. 그러던 중 1989년 2월, 하마스는 이스라엘 병사 두 명을 납치해 살해했다. 이에 대응해 이스라엘은 수백 명의 하마스 조직원들과 후원자들을 체포했다. 데이프도 이때 체포됐다. 그는 재판도 없이 16개월을 감옥에서 보냈다. 감옥에서 그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이 막 시작한 운동의 미래를 논의했다. 종교에 방점을 찍은 '다와'와 무장투쟁에 방점을 찍은 '지하드' 중 무엇이 우선인가?
이 논의의 결론이 무엇이었는지는 1991년 데이프가 이스라엘의 정기 특별사면으로 풀려났을 때 분명해졌다. 데이프는 이즈 알딘 알카삼 여단이라는 하마스의 군사조직 건설에 참여했고, 이후 신분을 감추고 생활했다. 그때 그는 결심했다. '그 어떤 수단도 정당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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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프가 아직 청소년이었던 1982년, 이스라엘은 군대를 레바논에 보내 내전의 혼란 속에 빠져있던 이 나라 안에 투쟁의 거점을 구축했던 팔레스타인 전사들을 진압하려 했다. 그 이듬해 이란이 이스라엘과 싸우기 위해 세운 레바논 무장단체 하나가 베이루트의 미군시설을 공격해 미국 해병대와 프랑스 공정대(空挺隊) 병사 299명이 사망했다. 이 공격은 당시로서는 중동지역에서 단 한 번도 시도된 적 없던 공격방식을 사용했다. 그것은 자살공격이었다.
하마스 군사조직은 이 방식을 전면적으로 채택했다. 1990년대 초, 그들은 젊은이들을 예루살렘과 텔아비브에 들여보내 민간 버스에 대해 자살공격을 감행하도록 했다. 데이프는 자신의 전공인 화학을 활용해 폭탄벨트나 폭탄멜빵 제작을 주도했다. 그의 동료들은 그가 폭탄제조 달인이라고 했다.
이 공격에 대응해 이스라엘은 이 자살폭탄 공격자들이 밖으로 나오지 못하도록 가자지구 주위에 장벽을 세우기 시작했다. 데이프는 전혀 굴하지 않고 이젠 로켓을 만들기 시작했다. 하마스의 첫 자체제작 미사일은 발사에 실패했다. 발사 후 몇 십 미터 공중에서 빙글빙글 돌다가 그만 폭발해버렸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이 엉터리 미사일을 '하늘을 나는 하수 파이프'라고 불렀다.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지도자 사냥은 계속되었다. 1996년 이스라엘은 하마스 군사조직의 지도자를 살해했다. 그가 사용하는 핸드폰에 폭약을 몰래 넣어뒀고 이것이 폭발했다. 당시 30세였던 데이프가 새 지도자로 임명됐다. 그는 핸드폰을 절대 사용하지 않는다고 한다.
데이프가 물려받은 하마스 군사조직은 파트타임으로 참여하는 몇 백명으로 이뤄진 테러 조직이었다. 그는 지휘권을 쥐자마자 곧바로 이 테러 조직을 어느 하마스 정치가가 "군대"라고 부를 수 있을 정도의 조직으로 변모시켰다. 그는 느슨하게 연결되어 있던 작은 조직들을 하나로 합쳐 군사 단위로 만들었고 효과적인 충원 운동을 전개했다. 그는 심지어 회의감을 갖게 된 파타 조직원들까지 빼앗아왔다.
“그는 대학에서 코미디 연극팀에 합류했고 별명이 "어릿광대"였다”
파타는 1990년대 후반 들어 인기를 잃었다. 1993년 아라파트는 오슬로협약에 서명했고,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아직 제대로 된 국가가 아니다)를 세우는 댓가로 이스라엘을 인정했다. 자치정부는 팔레스타인 고토(古土) 일부에 대한 제한된 관할권이 주어졌을 뿐이다. 실망한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팔레스타인 자치정부를 이스라엘 경찰 업무를 대리하는 조직으로 봤고, 또 자기들의 이권 챙기기에 열중하는 부패한 조직으로 봤다. 하마스에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2000년대 초, 데이프는 자신의 휘하에 1500여명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이번 10월 공격 직전 그는 최대 4만 명을 지휘하고 있었다고 추정된다.)
1990년대 후반과 2000년대 초, 하마스는 이스라엘과 싸우는 것만큼이나 파타와 경쟁하는데 힘을 썼다. 패턴은 언제나 같았다. 파타의 지도자들이 협상을 통해 뭔가 얻어낸다. 이스라엘 정부는 점령지역에 이스라엘인 정착촌을 더 많이 짓는다. (오슬로협약 이후 요르단 서안 지구의 이스라엘인 정착민 수는 4배 증가했다.) 하마스는 이스라엘에 자살공격조를 보내고,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양측의 일반인들은 오슬로 이후의 평화 프로세스에 신뢰를 잃는다. 이것이 패턴이었다. 이스라엘은 파타에게 하마스 조직원들의 체포를 요구했고, 이 일을 맡은 사람이 데이프의 어렸을 적 친구 다흘란이었다. (다흘란은 한 때 데이프를 감옥에 가뒀는데 밤에는 나갈 수 있도록 허락했다고 한다.)
2000년에 제2차 인티파다 봉기가 발생했다. 이번에는 파타도 자신들의 투쟁 조직을 지원했고, 훗날 이 결정을 후회했다. 인티파다는 2005년에 이스라엘이 협상도 없이 일방적으로 가자 지구에서 철수함에 따라 중단됐다. 이로써 하마스 인기가 올라갔고, 정치적 프로세스의 폐기와 함께 오슬로협정이 약속한 방식의 팔레스타인 국가 건설이라는 작은 희망은 완전히 잊혀져버렸다. 이젠 분쟁의 해결 기미가 더욱 희미해졌다. "오늘 너희들은 지옥을 떠난다." 데이프는 이스라엘이 가자 지구를 떠나던 날 이런 성명을 발표했다. "하지만 약속한다. 내일은 팔레스타인 전 지역이 너희의 지옥이 될 것이다. 이것이 신의 뜻이다."
실망스러운 오슬로협정의 붕괴 과정에서 나타난 데이프의 대담하고 민첩한 모습은 그를 팔레스타인에서 전설적 영웅으로 만들었다. 다른 하마스 지도자들은 살해됐다. 하마스 창립자 아마드 야신은 2004년 공격헬기의 공격을 받아 휠체어에 앉은 채 사망했다. 몇 달 뒤 이스라엘은 야신의 후계자로 하마스 지도자가 된 압델 아지즈 알란티시도 살해했다. 하지만 데이프는 이스라엘의 공격을 피했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그를 "알샤바" 즉 유령이라고 불렀다. 이스라엘 정보기관 관리들 조차도 그의 피신 기술을 "전설적"이라고 표현했다. 데이프는 자신도 순교를 원하지만 천사들이 자신을 계속 지켜주고 있다고 말했다.
그렇다고 그가 상처 하나 없이 피신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2001년 이스라엘은 헬리콥터에서 헬파이어 미사일로 그를 공격했고, 그 다음 해에도 헬파이어 미사일로 공격했다. 이 두 번째 공격에서 가자 지구를 지나던 그의 차가 파괴되었고 그의 경호요원 두 명이 즉사했다. 그는 부숴진 차에서 겨우 기어나왔는데, 이 공격으로 눈과 팔, 다리를 하나씩 잃었다. 하지만 이러한 부상은 그를 둘러싼 신화를 강화했을 뿐이다. 이 공격으로 그가 앉게 된 휠체어는 하마스의 창립자인 아마드 야신을 떠올리게 했다.
엘다르 기자에 따르면, 2006년 데이프는 그의 모교인 가자 이슬람대 스승을 방문하고 있었는데, 바로 그 때 이스라엘의 F-16 전폭기가 이 학자의 집에 1톤짜리 폭탄을 투하했다. 데이프는 가까스로 살아남았지만, 폭탄의 파편이 그의 머리뼈에 박히게 되어 어쩔 수 없이 하마스 군사조직의 지휘를 다른 사람에게 넘겨야 했다. 그는 3개월간 치료를 위해 이집트에 가 있었고, 지금도 고통스런 두통을 이기기 위해 매일 진통제를 먹고 있다고 한다.
그가 자리를 비웠던 시기는 하마스 통치의 새로운 시대와 겹친다. 하마스 정치가들은 2006년의 팔레스타인 선거에서 승리했고, 이 정치조직에게 처음으로 통치의 경험을 제공했다. 부패와 싸우겠다거나 더욱 나은 공공서비스를 제공하겠다거나 하는 선거공약을 제시해 승리했던 그들은 폐허가 되어버린 가자 지구에서 그들의 모범적 이슬람 사회의 이상을 실현하려고 했다. 이제 도덕경찰 업무가 무장투쟁보다 중요하게 되었다. 하마스 지도자들은 관직에서 나오는 혜택을 즐겼고, 고급 벤츠 차량을 타고 가자 거리를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그들은 선거를 다시 실시하지도 않았다.
“"오늘 너희들은 지옥을 떠난다." 데이프는 이스라엘이 가자 지구를 떠나던 날 이런 성명을 발표했다. "하지만 약속한다. 내일은 팔레스타인 전 지역이 너희의 지옥이 될 것이다."”
데이프는 이런 것에 아무런 흥미도 없었다. 그에게 가자 지구는 다음 공격을 위한 교두보일 뿐이었다. 그는 하마스 군사조직이 이렇게 움츠리고 있기를 원하지 않았다. 그의 지지자들은 권력과 돈이 하마스를 망치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를 불쾌하게 만든 또 하나는 데이프의 목숨을 노린 공격들이 있은 후 군사조직을 넘겨받은 사실상의 군사지도자였다.(공식적으로는 치료를 받고 있던 데이프가 군사지도자였다) 이 아마드 자바리는 데이프와는 완전히 다른 성격의 지도자였다. 아마드 자바리는 가자 지구의 부유층과 자주 어울렸고 이 지역 기준에서는 매우 고급스러운 동네에 살았다. 데이프와 달리 그는 온 팔레스타인의 힘을 모아내 이스라엘에 맞서기보다는 가자 지구에서 파타를 몰아내는데 군사조직을 이용하려 했다. 이러한 팔레스타인 내부의 싸움으로 백 명 이상이 죽었다. 하마스 전사들이 파타쪽 요리사 한 명을 손발을 묶은 채 옥상에서 떨어뜨려 죽인 일도 있었다. 자바리는 하마스 전사들을 공안기구에 동원했고, 이집트로 지하터널을 뚫은 후 이스라엘이 반입을 막은 물자를 들여왔다. 3년 뒤 이 터널은 큰 물자도 들여올 수 있을 정도로 커졌다. 어떤 사람들은 자바리가 관세를 자기 주머니에 넣었고, 몰래 사치품 수입을 했다고 비판했다.
자바리는 이스라엘 감옥에서 13년을 보내면서 히브리어(이스라엘어)를 배워 자신이 이스라엘과 협상을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수시로 이집트로 건너가 이스라엘인들과 휴전에 대해 협상했고, 이집트인 중재자들은 양쪽의 호텔 방을 오갔다. 그는 특히 이스라엘이 2007년에 가자 지구에 대해 취한 봉쇄조치를 철회하도록 하는데 노력했다. 2011년 그는 엄청나게 유리한 조건으로 포로 교환을 성사해냈는데, 하마스가 억류하고 있는 이스라엘 병사 질라드 샬리트 1명을 풀어주고는 천 명 이상의 팔레스타인 구금자를 돌려받았다. 이때 신와르(현 하마스 지도자)도 풀려났다.
하지만, 그가 이러한 협상을 통해 하마스의 근본 목표를 퇴색시키고 있다고 걱정하는 이들이 있었다. 정치가들은 이스라엘과 '타흐디아' 즉 단기 휴전뿐만 아니라 '후드나' 즉 장기적인 휴전과 평화를 주요 의제로 띄웠다. 일부는 자신들의 팔레스타인 국가 건설을 요르단 서안과 가자 지구로 제한했고, 이스라엘과의 공존을 이야기했다. 하마스 구성원들 일부는 자신들이 현재 이스라엘과 전쟁상태에 있다는 것을 잊기 시작했다. 2012년 어느 날, 이스라엘과의 영구적 휴전 방안을 검토하고 있었던 자바리는 별로 경계심 갖지 않고 가자 거리에서 차를 몰고 있었는데, 바로 그 때 이스라엘의 미사일 하나가 에어컨을 틀어놓은 그의 기아 자동차를 때렸다.
자바리 암살은 모든 것을 바꿔버렸다. 곧바로 하마스는 적에 대한 무차별 로켓 공격을 시작했고, 이스라엘군은 가자에 대한 파괴적 공습을 시작했다. 데이프는 총사령관으로 돌아왔고 방향을 무장투쟁으로 바꿔버렸다. 하마스 지도자들의 입에서 "무장투쟁에서 비폭력저항으로" 같은 말은 사라져버렸다. 행정, 정치, 협상에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였음에도 하마스 정치가들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실생활을 개선할 그 어떤 성과도 만들어내지 못했다. 그들이 만들어낸 것이라고는 또 하나의 중동지역 독재권력이었다. 이스라엘의 공습은 그들이 만들어놓은 것들을 모조리 파괴했다. 이스라엘은 바다와 땅을 막으며 징벌적인 봉쇄를 계속했다. 데이프는 성명에서 이렇게 주장했다. "오직 힘만이 세상을 바꿔낸다." 이스라엘 지도자들 역시 정치적인 접근에는 관심이 없었던 것 같다.
데이프는 공격에 취약한 시설들을 지상에 건설하는 대신 지하에 주목했다. 그는 2004년의 야신 암살 이후 터널망을 만들기 시작했는데 처음에는 지도자들의 은밀한 탈출로였다. 이것을 자바리가 장사에 활용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데이프는 다시 지휘관을 잡게 되자 '터널도시'로 불려진 원래의 군사적 터널 프로젝트로 되돌려버렸다.
“데이프가 다시 지휘권을 받아 군사조직을 재건한 후 그가 가지고 있던 로켓은 이스라엘 전역을 공격할 수 있었다.”
일부는 100미터 깊이에 만들어져있다는 이 터널들을 통해 하마스는 가자 지구 구석구석으로 움직이며 이스라엘 드론의 감시 밖에서 군사훈련을 하거나 무기 실험을 했다. 이 터널망은 엄청난 양의 무기를 쌓아두는 창고로도 쓰였고 이란 등의 우호국가들로부터 무기를 밀반입하는데에도 쓰였다.
어떻게 데이프의 지휘 아래 하마스 군사조직이 그렇게 많은 무기를 가질 수 있었을까는 분명치 않다. 어떤 사람들은 그가 하마스의 그 어떤 사람보다도 외부의 도움을 받는데 열심이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자바리가 하마스 군사조직을 실제 지휘하고 있을 때, 일상적인 운영에서 손을 뗀 데이프는 중동 전역을 돌아다니며 군사적 지원을 얻을 수 있었다는 이야기다.
하마스의 일부 인사들은 이란으로부터 자금 지원을 받는 것에 반대했다. 하마스의 독립성을 훼손할 수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데이프는 이러한 논리에 반대했다. 이란은 매년 1억 달러를 하마스에 지원해왔던 것으로 보인다. 중동지역 군사조직들을 묶어내려 노력했던 이란의 카셈 술레이마니(트럼프 정부의 미사일 공격에 의해 2020년 사망한 이란 군사지도자-역자주)가 데이프에게 가자 지구 터널망에 대해 조언을 했다고 한다. 하마스 전사들 사이에는 술레이마니가 직접 가자 터널을 방문했다는 전설도 전해지고 있다. 가자 지구의 다른 무장 그룹 지도자에 따르면, 이란은 데이프에게 미사일을 제공했을 뿐만 아니라 가자 사람들에게 미사일 제조 방법도 가르쳐줬다. 2005년 당시 하마스가 보유하고 있던 로켓의 사정거리는 최대 15킬로미터에 불과했다. 하지만 데이프가 다시 지휘권을 받아 군사조직을 재건한 후 그가 가지고 있던 로켓은 이스라엘 전역을 공격할 수 있었다.
데이프는 2014년 또 한차례의 전쟁이 발발하자 자신의 새로운 무기체계를 시험해볼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전쟁 발발의 직접적인 원인은 요르단 서안에서 세 명의 이스라엘 청소년이 살해당한 후 이스라엘측이 그 지역 하마스 활동가 수백 명을 체포한 사건이었다. 하지만 그 배경에 있었던 것은 가자 지구였다. 바로 전 전쟁의 휴전 협상에서 이스라엘은 가자 지구 봉쇄를 중단하기로 약속했었는데, 2년이 지나도 봉쇄가 중단되기는 커녕 더욱 강해졌다. 가자 지구는 더욱 황폐해졌고 경제가 마비됐다. 이스라엘은 데이프의 새 무기체계 앞에서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이스라엘은 일주일간 가자 지구를 공습한 후 하마스의 터널망과 쌓아둔 로켓들을 파괴하겠다고 공언하면서 지상군을 투입했다.
이 전쟁은 가자 지구에서 벌어진 전쟁 중 가장 파괴적이었다. 데이프는 전쟁 중 성명을 발표해 이스라엘을 자극했고("팔레스타인 사람들이 평화롭게 살지 못하는 한 너희들에게 평화란 없을 것이다"), 이스라엘은 그의 집을 공습했다. 이때 그의 7개월된 아들, 세살된 딸, 그의 아내가 죽었다. 데이프는 죽은 가족의 장례식에 참석하지 않았다고 한다. 7주 뒤 휴전이 이뤄질 때까지 총 2300명이 사망했고, 만 명 이상이 부상을 입었는데, 부상자의 1/3은 아이들이었다. 비록 팔레스타인은 피해를 입었지만 데이프는 하마스가 싸우는 조직으로 돌아왔음을 세상에 보여줄 수 있었다. 그는 50일간 중동지역의 최강 육군에 맞서 싸웠고, 그 싸움이 끝났을 때도 아직 가자 지구를 통제하고 있었다.
이후 짧은 기간 동안 하마스 정치조직의 온건파가 주도권을 가질 수 있었다. 2017년, 하마스는 원래의 강령에서 많은 반유대적 표현들과 증오의 말들을 지워버렸다. 하지만 이 무렵 데이프의 오랜 친구인 야히아 신와르가 가자 지구 하마스의 지도자로 부상했다. 강경파의 시간이 왔다.
이제 이슬람주의가 뒤로 물러났고 비밀 무장투쟁이 다시 한번 전면에 섰다. 신와르의 전임자들이 세워놓은 도덕경찰은 더 이상 히잡 안 쓴 여성들을 괴롭히지 않았고, 건설 같은 행정업무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그들은 병원이나 학교를 짓는 일을 절대 안 했습니다." 어느 팔레스타인 학자가 말했다. "그들에게는 무조건 무기가 최우선이었습니다."
데이프는 가자 지구 너머를 보기 시작했다. 요르단 서안에서는 이스라엘 정착촌의 확대가 속도를 내고 있었는데, 특히 하람 알샤리프 지역 주변이 그랬다. 알아크사 사원이 있는 이 지역은 이슬람과 유대교 모두에게 성지였다. 유대인들은 이곳을 성전산(聖殿山)이라고 부른다. 이스라엘 보안부대는 더욱 많은 이스라엘 정착민들에게 땅을 주기 위해 동예루살렘에서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내쫓기 시작했다.
“이 공격으로 그의 7개월된 아들, 세살된 딸, 그의 아내가 죽었다. 데이프는 죽은 가족의 장례식에 참석하지 않았다고 한다.”
2021년 5월 데이프는 또 성명을 발표했다. 이스라엘이 알아크사 지역에서 철수하지 않고 셰이크 자라에서 주민 추방을 멈추지 않는다면 하마스는 공격할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그는 하마스가 "이 지역에서 일어나는 일을 지켜보고 있다"고 경고했지만, 이스라엘이 이 경고를 무시할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 몇 일 뒤 로켓이 공중으로 치솟았고 전투가 시작되었다. 하지만 가자 지구는 이상하리만큼 조용했다. 하마스가 직전 전쟁이 끝난 뒤 동맹 세력인 이슬라믹 지하드를 말리면서 더 이상 로켓을 쏘지 말도록 했다는 점에 주목하면서 이스라엘의 안보 전문가들은 하마스가 어떤 이유에서인지 자제하고 있다고 느꼈다. 일부는 심지어 하마스가 요르단 서안 지구 팔레스타인 자치정부보다 좀 더 효과적인 통치조직이 될 수도 있겠다고까지 말했다. 이스라엘이 하마스를 활용해 가자 지구를 질서 잡을 수 있겠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당시 자만심에 취해가고 있었다. 그들은 데이프가 단지 시간을 벌고 있었을 뿐이라는 사실을 볼 수 없었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자신들이 계속해서 확대되는 이스라엘인 정착촌과 경제봉쇄 아래에서 옴짝달싹 못하고 살아가야 할 운명에 빠진 것으로 보였다. '그들만의 국가'라는 약속은 어디 갔는지 흔적도 보이지 않았다. 여러 아랍 정부들은 이 운명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는지 이스라엘과 경제적으로 가까워졌고 외교관계까지 맺으려 했다. 그러던 중 지난 10월 7일, 이스라엘 안에서 민간인을 대량 학살하겠다는 데이프의 결심은 분노에 찬 군사 대응을 촉발했고, 어쩌면 그가 이번에는 죽게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번 공격은 중동지역 전체를 뒤흔들었고, 팔레스타인을 전 세계적 논의의 중심에 놓았다. 데이프가 그의 최근 성명에서 밝혔듯 이것이 하마스의 목표 중 하나였다.
팔레스타인 일반인들의 피할 수 없는 고통―특히 어린 아이들 수백 명의 죽음―같은 것은 데이프의 결심에서 크게 고려되지 않았다. 그 같은 사람들에게는 살아있다는 것이 그렇게까지 중요한 일이 아니다. "이번 싸움에서 얼마나 죽을까요?" 나는 어느 오후 하마스의 백전노장 지도자에게 이렇게 물었던 적이 있었다. 우리는 공중을 가득 채운 부웅거리는 드론 소리를 들으며 그의 정원에 앉아 있었다. 팔레스타인 사람 1만 명? 2만? 3만? 그는 미소지으며 마치 그런 질문이 마치 파리 마냥 하찮은 것인양 손사래를 쳤다. 자유를 위한 역사적 투쟁에서 그런 고통은 단지 지나가는 "작은 비용"일 뿐이라는 것이 그의 무심한 대답이었다.
니콜라스 펠험은 이코노미스트의 중동 특파원으로 30년 넘게 중동 지역에 대해 연구하고 취재했다. 국제위기그룹(ICG), 유엔, 채텀하우스에서 중동 분석가로 일하기도 했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문제를 보면 인간의 문제는 절대적 선도 절대적 악도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유럽의 민족주의, 인종주의, 제국주의의 모순 아래 차별받던 소수민족이 역사의 기억 속에 있던 땅으로 돌아와 자신들의 나라를 만들겠다고 했고, 이것을 유럽의 제국주의 열강이 도와줬습니다. 이것은 선으로 보였겠지만, 이들이 정착하면서 땅을 잃게된 사람들이 생겼습니다. 이것은 악이었습니다. 이번 하마스의 기습공격도 악과 선, 선과 악이 뒤섞여 있습니다. 정치적 목표를 위해 여성과 아이까지 잔인하게 살인한 것은 악입니다. 하지만 네타냐후 총리와 이스라엘 극우집단의 이스라엘 중심주의와 정착민 확대 역시 악입니다. 정치는 함께 사는 기술입니다. 보복과 보복으로 이어지는 종족주의적 반목을 극복해내는 고도의 기술이 정치입니다. 칸트는 '악마들조차 함께 사는 공화국을 만들 수 있다'고 했습니다. 악마조차 가능한 '함께 사는' 정치가 인간들 사이에서 불가능하진 않을 것입니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 함께 사는 해법이 무엇인지 함께 생각해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정치적 지혜는 지리와 시대를 가리지 않습니다. 이코노미스트의 자매지인 1848매거진의 생생하고 잘 정리된 이 기사를 읽으면서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문제, 인간과 정치, 그리고 전쟁에 대해 한번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지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