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내 나이 마흔셋에 자폐증 진단을 받고 마침내 깨달은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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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Jeffrey Czum

2024.08.16 14:56

New Yo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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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폐증(ASD)이나 ADHD(주의력 결핍 과잉행동 장애)를 어린이나 청소년 만의 문제로 여기기 쉽지만 주변을 살펴보면 의외로 이런 문제를 겪고 있는 성인들도 많습니다. 게다가 영화나 드라마에서 묘사되는 자폐증은 실제 ASD의 극히 일부에 불과합니다. ASD의 공식 명칭은 '자폐성 스펙트럼 장애'로 그 '스펙트럼' 또한 사람마다 크게 다릅니다. 국내에도 작품이 소개된 바 있는 한국계 미국인 작가 매리 HK 초이가 뉴욕매거진(프린트판으로는 2024년 7월 1일 간행)의 버티컬 더컷The Cut에 팬데믹을 거치면서 남편과 갈등을 겪은 후 ASD 진단을 받은 일을 그린 이 에세이는 아시아계 미국 이민 2세가 겪는 정체성의 혼란부터 ASD 당사자만이 포착할 수 있는 지점들을 세밀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이 에세이를 읽으면서 내게도 숨어있는 '스펙트럼'의 일말을 감각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이런 것 또한 문학의 묘미 중 하나일 것입니다.


6년 전, 현재 내 남편인 샘이 나의 아버지에게 나와 결혼해도 되냐고 물었다. 둘은 텍사스 샌안토니오에 있는 부모님 집 진입로에 주차된 아버지의 볼보에 앉아 있었다. 비가 오고 있었다. 샘에게 아버지는 나에게 공유했던 어떤 통찰보다도 훨씬 더 표현력 있고 사려 깊은 지혜를 전했다. 여기엔 서로 성격이 잘 맞는다는 점과 샘이 나를 사랑하기 때문에 아버지가 그를 사랑한다는 것을 이해하면서도, 나는 그들 사이에 내가 결코 알 수 없을 친밀감이 있다고 느꼈다.


아버지는 일중독자였다. 쉽게 화를 내곤 했다. 내 남편이 등장하면 그는 누그러졌다. 온화해졌고, 쉽게 웃었다. 그는 노인들이 그러는 것처럼 끊임없이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샘을 처음 만났을 때, 그는 샘을 껴안았다. 나는 경악했다. 이 사람은 몇 달 동안 떨어져 있다가 만나도 마치 내가 사업상 동료이기 때문에 억지로 그 존재를 참고 있는 것처럼 악수로 인사하던 사람이었다.


차 안에서 아버지는 샘에게 그가 자신을 얼마나 행복하게 해주었는지 말했다. 그는 샘과 내가 마음가짐과 사랑으로 우리의 삶을 차근차근 쌓아갈 것이며, 우리가 다른 누구의 행복이 아닌 우리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기에 시간은 우리의 편이라고 말했다.


둘이 차에서 내리자, 아버지는 집으로 돌아가기 전에 샘을 멈춰 세웠다. 그는 존경과 명예, 상호 배려를 나타내기 위해 양손으로 명함을 내밀었다. "알겠지만 그 아이, 성격이 까다롭네." 그가 경고했다. "무슨 일이 있으면 전화하게."



"그 아이가 누구야? 나?" 나중에 샘이 그때 있었던 일을 털어놓자 나는 폭소를 터뜨리며 말했다. "그래서 뭐, 우리 아빠가 당신한테 A/S를 해준다는 거야? 우리 아빠가 애플케어인 줄은 몰랐네."


"내가 실제로 아버님께 전화했다면 어땠을지 상상이 가?" 우리 결혼 생활 동안 남편은 여러 번 이렇게 말했다. "그리고 당신은 어떻게 반응했을지?"




샘과 나는 이제 9년째 함께하고 있다. 우리는 여러 면에서 매우 잘 맞는다. 우리 둘 다 아이를 원하지 않는다. 우리는 둘 다 민감하고, 쉽게 불안해하며, 바보같을 정도로 공항에 일찍 도착하는 사람들이다. 한번은 인기 있는 해변 마을에서 휴가를 보내다가 사흘째 되는 날 그에게 도움을 청했는데, 그도 역시 끔찍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는 것을 알고 기뻐했다.


다시 말해, 우리 둘 다 특별히 성격이 좋은 사람은 아니다.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에는 엄숙함이 있다. 그는 작곡가이고, 나는 작가다. 우리의 일은 본질적으로 고독하고 시간이 많이 걸리며, 각자의 변덕스러운 영감에 휘둘린다. 코로나19 봉쇄 기간 동안, 우리는 뉴욕 아파트의 인접한 방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길 건너편 건물에서 우리를 엿보는 사람이 있다면 우리 둘 다 책상 앞에서 똑같이 일에 몰두하고 있는 모습을 발견했을 것이다. 겉보기에는 만족스러워 보일 게다.


하지만 샘에 따르면, 우리의 분리에는 불안한 톤이 있었다. 팬데믹이 터지고 1년이 지나자, 그는 내가 몇 달 동안 계속해서 산책이나 화창한 날의 외식 제안을 모두 거절했다고 지적하기 시작했다. 내가 심지어 마감에 쫓기지 않을 때도 그랬다는 것이다. 그는 정확히 짚어내기는 어렵지만, 내가 그를 피하고 있는 듯하다고 했다.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타이밍이 안 좋았던 게지. 내가 일중독 성향이 있어서 말야. 솔직히 말하자면, 그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대부분의 날에는 그의 존재를 그냥 잊어버렸다고 고백했다. 듣기 좋은 이야기가 아니라고 한다면 이해할 수 있었다. 내가 인정할 수 없었던 것은 내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종종 나는 내가 벽 너머에서 그의 움직임을 듣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와 마주치지 않으리라 확신할 때만 화장실이나 간식을 먹으러 나왔다.


그래도 우리는 둘 다 내가 애정을 표현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고 합리화했다. 또는 어쩌면 내가 무언가로 인해 삐쳐 있다고 결론내리기도 했다. 우리 관계에는 내가 자기중심적이고, 다른 일에 정신이 팔려있거나, 앙심을 품은 것으로 볼 수 있는 다른 많은 역학관계가 있었다. 예를 들어, 샘이 여행을 갈 때마다 나흘째가 되면 나는 통화를 할 때마다 말수가 적어지고 문자에 답을 잘 하지 않았다. 일주일 이상 떨어져 있다가 돌아오면, 그가 돌아왔다는 데 대한 나의 표면적인 기쁨과 정확한 시간을 정하진 않았어도 함께 식사를 하기로 약속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배고픈 채로 빈집에 돌아왔다. 며칠 동안 나는 해가 진 후에도 오랫동안 내 방에 남아 있었고, 우리가 부엌에서 만날 때마다 그가 '서비스 센터 목소리'라고 부르는, 감정적으로 이격되고 공식적인 어조로 그에게 말했다. 그는 내 눈 속에서 광대한 인식의 부재가 보인다고 말했다. 소름 끼치는. 완전한 공백. 마치 그의 짧은 부재 동안 우리가 함께 살았다는 증거도 모두 사라진 마냥.


여러 차례 시끄럽고 날카롭게 다투면서, 나는 그의 비난을 일축했다. 그가 귀가할 때 기대하는 그 어떠한 화려한 환영도 과도한 특권 의식이라고 주장했다. 전형적으로 남성적인 특권 의식. 그가 없는 동안에도 내 삶은 계속되었다. 그래서 뭐 어쩌란 말인가? 나는 내가 상호의존적이고 정지된 수면 상태에 갇혀 있다가 그가 돌아왔을 때만 다시 살아나서 닭고기 요리를 해줘야만 당신이 행복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샘은 그건 가스라이팅이라고 했다. 나는 샘이 그걸 가스라이팅이라고 부르는 것 자체가 가스라이팅이라고 했다.


논리적으로 볼 때 내가 수동공격적1passive-aggressive 성격이라고 보는 게 맞았다. 내가 속으로는 그가 집을 떠나는 걸 원망하지만 그런 약점을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고. 그러나 내가 느낀 것은 악감정이 아닌 혼란이었다. 샘이 돌아오기 전 며칠 동안은 늘 기대감이 있었다. 내겐 그에게 말하고 싶은 이야기와 가십거리, 생각들이 있었다. 그를 위해 특별히 산 간식들, 함께 하고 싶은 계획들이 있었다. 하지만 마침내 그의 물리적 존재와 마주하게 되면 어쩐지 나는 속은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 샘은 분명히 가짜였다. 나는 진짜 샘, 예전의 샘, 내가 알고 있던 샘이 멀리 어딘가에 있다고 생각하며 계속 찾아볼 수밖에 없었다.


그러고 나면 나는 늘 그를 다시 알아가게 되었다. 며칠이 더 지나면 샘은 내가 갑자기 변하는 걸 볼 수 있었다. 그는 내가 너무 갑작스레 변해서 정말로 '전등 스위치' 같이 변한다고 설명했다. 내 눈빛에는 따스함이 돌아오고 목소리의 음색이 밝아진다. 우린 결국 이것을 농담거리로 삼게 됐다. "오, 당신 돌아왔구먼!" 그는 행복과 안도를 느끼며 말하곤 했다. "여기 있었네!" 난 이렇게 대꾸하곤 했다. 사과와 함께, 진심으로 당황하면서. 그러고 나면 나는 그가 떠나 있던 동안에 있었던 모든 것에 대해 수다스럽고 즐겁게 이야기하기 시작했지만, 그가 다시 여행을 떠나면 내가 또 다시 똑같이 행동할까 두려워했다.


부부 상담에서 샘은 이런 사과의 반복 때문에 자신이 학대적인 관계에 있다고 확신하게 됐다고 말했다. 나는 그의 말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도 지쳐 있었다.


문제는 내게 있음이 틀림없었다. 왜냐하면 이는 단지 내 결혼생활만의 문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나는 인간들의 상호작용 대부분이 너무나 변덕스러워 당황했다. 각각의 상호작용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나를 혼란스럽게 했다. 나는 아직 "팀"을 필요로 하는 직업, 즉 대부분의 직업을 성공적으로 지속하지 못했다. 나는 "크리스마스를 잘 못 보내는 사람"이었고, 특별한 행사가 있을 때마다 번아웃과 '만들어진 위기'를 겪곤 했다. 모임에 서투른 나는 가장 부담 없는 뒤풀이조차도 놀랍도록 재미없게 만들 수 있었다.


우리가 만난 지 얼마되지 않았을 때, 샘의 가족과 저녁 식사를 한 적이 있었다. 파스타 면의 삶은 정도를 가늠하기 위해 각각 면 한 가닥 씩을 받았다. 그것은 개인적인 선호의 문제였다. 샘과 그의 어머니는 알덴테를 선호했고, 그의 여동생과 조카는 좀 더 익은 걸 선호하는 편이었다. 나는 수행 불안에 압도되어 급히 면을 씹었고 결코 오지 않을 깨달음을 갈구했다. 나는 갑자기 사실 파스타를 싫어한다고 선언하고 빵에 소스를 찍어 먹었다.


다른 저녁 식사, 친구의 집들이에서 나는 달콤한 것을 가져오라는 요청을 받았다. 나는 두 곳의 제과점과 여러 전문점을 찾아 심각하게 망설이다가 과소비를 하고, 결국 내가 가져온 것들(평범한 베리, 덜 익은 감, 위압적인 케이크)을 싫어하게 되어 모든 걸 쓰레기통에 던져버리고 싶어졌다. 나는 그날 저녁 내내 대화 중에 그것 때문에 산만하고 예민했다. 같은 요청을 받은 다른 친구는 우리가 식사하는 동안 르뱅 쿠키 세트를 배달시켰다. 완벽했고 무심했다.


이성적으로는 이게 내가 일을 망치는 이유라는 걸 항상 알고 있었다. 땀에 젖고 주먹을 꽉 쥔 채 여유를 잃은 상태. 내 방 벽 건너편에 있는 샘과 마찬가지로 모든 것이 대립적이고 긴장감 넘치는 것처럼 느껴졌고, 나는 그것이 내 잘못이라고 확신했다. 어떤 요청을 받더라도 나는 후속 질문을 스무 개, 서른 개는 하고 싶었다. 함정에 빠진 것 같거나, 곤란한 상황에 처한 것 같거나, 좌절감을 느끼지 않기 위해서였다. 나는 그 질문들을 하지 않는다. 하지만 질문들은 사라지지 않고 계속 남아있었다.


나는 어떻게 하면 가볍고 편안해질 수 있는지 알고 싶었다. 술 약속으로 사람을 만났어도 아까 점심을 못 먹었으니 자연스레 음식을 주문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대화를 사전에 미리 리허설하지만 미리 준비한 대화 주제들이 자연스럽게 나오지 않아 늘 실망하는 이 습관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다른 사람이 화장실에 갈 때가 아니라 내가 원할 때 소변을 보고 싶었다. 어디에 있든, 나는 마치 비행기의 창가 좌석에 앉아 통로 쪽 사람에게 미안해하며 조심스럽게 웃으면서 일어나 줄 것을 부탁하는 것 같은 기분을 항상 느끼게 될 운명 같았다.


샘이 그리웠지만 동시에 그가 주변에 있는 것을 원하지 않았던 것처럼, 나는 내 친구들을 사랑했지만 특별히 그들과 시간을 보내고 싶진 않았다. 나는 모두가 나에게 그냥 맞춰주고 있다는 의심에 갉아먹히는 걸 견딜 수 없었다. 모두가 내게 화가 났을지도 모른다. 내가 너무 오래 자리에 머무르거나 또는 너무 일찍 자리를 뜨는 걸 보고 서로 눈빛을 주고받는지도 모른다. 내게 친구는 있지만 결코 그들의 결혼식에는 초대받지 못하는 이유가 이것 때문이 아닐까 추론했다. 30대 후반이 되자, 나는 그저 사람들과 어울리는 데 서툴다고 결론 내렸다. 나는 또한 형언할 수 없이 외로웠다.




2023년 5월 24일, 43세의 나이에 나는 자폐 스펙트럼 장애austism spectrum disorder 진단을 받았다. 나는 샘이 말다툼 중에 아파트를 나가면서 던진 짜증 섞인 한마디에 평가를 받기로 했다. 돌아서기 전, 그는 반농담조로 내게 말했다. "세상에, 아무래도 당신, 자폐증이 있거나 성격 장애가 있는 것 같아." 그는 그리고 문을 닫았다.


나는 당시 그가 얼마나 명백하게 못되게 굴고 있는지에 대해 소심한 승리감을 느끼지 않았다. 나답지 않은 일이었다. 내가 가장 기억하는 것은 반갑지 않은 깨달음에 뒤따르는 가라앉는 듯한 기분이었다. 그래서 말다툼 이후 몇 주 동안, 나는 틱톡에 빠져들었다. 그 다음은 레딧이었다. 나는 알고리즘이 내가 계속 앱울 붙들게 만들기 위해 선정한, 나의 확증 편향을 강화시킬 영상들을 계속 들여다 봤다. 바로 자폐증 밈("자폐인의 시점: 자폐인이 멀티태스킹 중이라면..." 또는 "성인 여성의 자폐증은 이렇게 보일 수 있다...")이었다.


한 달이 되지 않아, 나는 "풀 서비스 부티크 심리치료 센터"라는 색스 센터에 예약을 잡았다. 자폐증 레딧의 깊숙한 곳에서 발견한 센터로, 그곳의 평판에 대해 확신이 없었지만 이 상태로 40년 넘게 살다보니 나는 조급해졌다. 이 문제에 돈을 뿌릴 준비가 되어 있었다. 나는 3년 전 내 담당 정신과 의사에게 ADHD(주의력 결핍 과잉행동 장애) 진단을 이미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참고로 내 담당 의사는 내게 성격 장애가 있다는 샘의 다른 비난을 제거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자폐 스펙트럼 장애(ASD)와 ADHD 모두에 대해 검사받기로 했다. 평가 비용이 하나에 695달러(87만원), 둘 다에 795달러(99만원)여서 거부할 수 없었다.


줌을 통해 진행된 ASD 평가는 네 가지 심리측정 테스트로 진행됐다. 자폐적 특성과 그것들을 숨기려는 성향 모두를 스크리닝하는 설문이었다. 그 후에는 75분간의 인터뷰가 이어졌는데 내 어린 시절부터 평생의 간식에 대한 집착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다루는 광범위한 대화였다. 전체 과정은 3시간도 채 걸리지 않았다. 그날 늦게, 메일이 왔다. PDF 파일이었다. 아만다라는 이름의 사람을 위해 작성된 것이었다.


속은 기분이 들었다. 꼴좋다는 생각도 들었다. '인터넷에서 거지 같은 걸 사면 이렇게 되는 거지.' 하지만 검사를 담당한 심리학자는 신속하게 이름을 수정하고 내가 모든 테스트에서 ASD를 가진 사람의 범위 내에 잘 들어맞는 점수를 받았다고 확인해 주었다. 검사 결과는 DSM-5에 따라 나를 ASD 레벨 1, 즉 가장 적은 지원이 필요한 수준으로 분류했다. (과거에 아스퍼거 증후군으로 진단받은 많은 사람들이 현재 여기에 속한다.) 나는 항상 특정 소리, 조명, 냄새, 질감에 매우 민감했는데 인터뷰에서 이러한 감각 문제들도 ASD로 인한 것이라고 결론 내려졌다.


나는 샘에게 검사 결과에 대해 말했다. 하지만 이후 몇 주 동안 다른 사람들에게도 이에 대해 말해야 할지 고민했다. 나는 오랫동안 뭔가 "이상하다"고 의심해왔다. 하지만 이제 그것을 증명할 서류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나를 믿지 않을 것 같았다. 내 삶의 모습을 '레인 맨'의 더스틴 호프만,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러브 온 더 스펙트럼'의 예비 커플들, 비언어적 아이들, 또는 훌륭한 배우 배리 키오건이 연기한 대부분의 영화 캐릭터들과 조화시키기는 어려울 것이다. 내겐 심각한 지적 장애나 놀라운 기억력 같은 게 없다. 아이 컨택에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나는 이전에 유명인사들을 카메라 앞에서 인터뷰하는 일을 했다. 때로는 생방송 이벤트에서도 그랬다. 만약 누군가가 반대 심문에서 내가 가졌던 직업들을—TV와 잡지의 문화 담당기자, 그리고 여러 지역을 돌아다니며 대중을 상대로 말을 해야 하는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 작가—지적한다면 나는 어떻게 스스로를 변호해야 할지 몰랐다.


그리고 설령 내가 공식적으로 자폐증이 있다고 해도, 그것이 중요할 만큼 충분히 자폐적일까? 그건 무슨 의미일까? 나는 인생의 여러 시점에서 가면증후군2impostor syndrome과 씨름해왔다. 내가 계속 떠올리는 최악의 악몽 같은 시나리오는 내가 동료나 지인에게 심각한 자폐증이 있는 자녀가 있다는 고백을 듣기 위해 스스로에게 자폐증이 있다고 말한다는 것이었다. 이런 생각은 구제 불능일 정도로 당혹스러웠다. 나는 사람들이 내가 주장하는 자폐증이 상대적으로 너무 미미해서 기만적이라고 느낄 것이라고 확신했다. 나는 사회에서 제 구실을 하는 사람들에게 기대되는 사회적 관습으로부터 나를 면제해줄 의사의 소견서를 얻기 위해 수백 달러를 지불하는 기괴한 특권의 과시를 저지른 걸까? 나는 심리치료 용어를 무기처럼 휘두르는 최악의 인간쓰레기, 자기관리 산업복합체의 엘리트 희생자가 되길 거부했다. 그렇지만... 그렇지만.




어쩌면 당신도 자폐증이 시대정신처럼 되고 있음을 느꼈을지 모른다. 바지 통이 점점 커지고 있거나 멸균하지 않은 생우유가 유행하는 것처럼. 미국 질병통제예방센터(CDC)에 따르면 2020년 기준으로 8세 아동 36명 중 1명이 자폐증을 가지고 있다. 이는 2018년의 44명 중 1명에서 큰 폭으로 증가한 수치다.


자연스레 나오는 질문은 ASD를 가진 사람들이 더 많아졌는지, 아니면 우리가 세는 방법을 다르게 하고 있는지이다. 솔직히 말해 임상의들도 모른다. 하지만 개선된 탐지법이 한 요인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과거에는 아이들이 8세 즈음에 진단을 받았지만 이제는 2~3세에도 신뢰성 있는 진단이 가능하다. 전통적으로 자폐증은 또한 백인 아이들, 특히 소년들의 영역이었는데 이들은 더 눈에 띄게 행동이 분열적이고 진단하기 쉬운 것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CDC의 최근 집계는 흑인, 히스패닉, 아시아인, 태평양 섬 주민 아이들 중에서도 ASD가 증가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자폐증이 역사적으로 발달 장애로 분류되어 왔고 그 연구와 인식이 아이들에 초점을 맞추어 왔기 때문에, 자폐증이 있는 성인에 대한 데이터는 많지 않다. 2017년, CDC는 미국에 ASD 성인이 약 540만 명이 있다고 인용한 연구를 발표했지만, 이 숫자는 추정치다. 데이터의 부족과 경험 많은 임상의의 부족, 그리고 자비로 진단비를 지불할 수 없는 사람들을 위한 보험금 지불 승인을 받는 데 긴 시간이 걸린다는 점이 온라인에서 자가 진단이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이유를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2023년 연구에서 드렉셀대학교의 연구진은 틱톡에서 "'#자폐증' 해시태그와 관련된 동영상들이 총 115억 뷰를 기록했다"고 보고했다. 이 연구는 조회수 상위 133개 동영상 중 단 27%만이 그 내용이 "정확한" 것으로 분류했다. 더 많은 사람들이 (일부는 부정확하게) 자가 진단을 하면서 진단이 신뢰성을 잃을 수 있다는 우려도 크다. 또는 모든 사람이 신경다양성3neurodivergent을 가지고 있다면, 결과적으로 아무도 신경다양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이 된다. 돌봄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돌봄을 받기 더 어려워질 수 있다.


위양성false positive에 대한 우려에도 불구하고, 전문가들과 옹호론자들은 많은 ASD 성인들이 진단되지 않은 채로 있다고 본다. 자폐증은 행동 진단에 달려 있다. 막대에 소변을 묻혀 검사를 할 수도 없고, 혈액 검사도 없다. ASD를 가진 모든 사람들에게 공통적으로 나타나며 동시에 그들을 ASD가 없는 사람들과 구분하는 단일한 생물학적 지표도 없다. 시간이나 돈, 심지어 검사를 수행하는 임상의의 편견과 같은 사회적, 환경적 요인에 영향을 받기 쉬운 오류의 가능성이 존재한다. ASD를 가진 성인들은 의도적으로 또는 무의식적으로 자폐적 특성을 평생 동안 억제함으로써 탐지를 피할 가능성이 더 높다. 특히 여성들은 높은 감수성과 사회적 신호를 모방하는 능력 때문에 자폐 행동을 더 잘 숨기거나 위장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연구들에 따르면 여성은 ASD 진단을 받기 전에 불안 장애나 기분 장애로 잘못된 진단을 받을 가능성이 더 높다. 자폐증 진단에 관해서는 오해의 소지가 많다.




ASD 진단이 말이 안 되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내 인생의 이 시점에 나는 이미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늘 이상함을 느끼는 이유, 사회적 상황에서의 지속적으로 곤란함을 느끼는 이유를 설명하는 깔끔한 내러티브를 가지고 있었다. 결국 나의 이야기는 전형적인 이민과 동화assimilation의 이야기에 다양성을 위한 몇 가지 예외사항을 덧붙인 것이다.


작가 매리 HK 초이. /사진=Aaron Richter

작가 매리 HK 초이. /사진=Aaron Richter


나는 한국에서 태어나 1살 때 당시 영국 식민지였던 홍콩으로 이주했다. 부모님과 집에 있을 때나, 항상 그들의 사회 구조의 중심이었던 한인 가톨릭 공동체 교회에서 나는 한국어를 사용했지만 대부분 침묵을 지켰다. (말을 하는 건 어른들이었다. 주로 내 몸, 머리카락, 성적, 얼굴을 큰 열정과 관심으로 해부했다.) 내가 다녔던 영국 학교에서는 (농담이 아니라) 그리핀이 수놓인 교복과 넥타이를 입고 영어를 사용했는데 나는 벽에 붙어 다니며 다른 부적응아들과 친구가 되었다. 대부분 키가 작은 소년들이었다. 우리가 교복을 입은 모습을 상상해보면 나는 친구들보다 30cm 정도 더 큰, 떡진 머리를 한 건장한 아시아 소녀였다.


제3문화 아이들은 관찰을 곧잘 한다. 나 또한 관찰했다. 규칙과 그것들이 상황에 따라 어떻게 변화하는지를 익혔다. 부모님과 교회의 세계에서, 우리는 '눈치'의 원칙을 따랐다. 눈치란 주변의 분위기를 읽고 자신의 위치를 파악해서 얻은, 자신의 사회적 지위에 기반한 인식이다. 그것은 관찰을 장려한다. 자신의 위치에서 역할을 하는 것. 서열이 낮다면 존경심을 중요하게 여긴다. 한국 문화에서는 상급자에게 꾸중을 듣거나 질책을 받거나 심지어 말을 걸 때도 직접적인 아이 컨택은 무례하게 여겨진다. 하지만 학교에서는 "나와 대화할 때는 나를 봐"라는 것에 높은 가치를 두었다. 규칙이 무엇이든, 그것이 말이 되든 말든 상관없었다. 모든 것은 올바른 상황에서 충실히 기록되고 연습되어야 했다. 그것이 내게 "상식"이 부족하다고 꾸짖는 어떤 영국인 교사의 눈을 쳐다보면서 불타는 느낌을 받는다는 의미일지라도.


채찍질은 끊임없었고, 코드의 전환은 어지러울 정도였다. 나는 항상 문제에 빠져 있다는 확신, 내가 그 어떤 것도 어떻게 작동하는지 결코 본능적으로 알 수 없으리라는 두려움에 시달렸기 때문에 모든 걸 암기해야만 했다. 한인 교회 사람들과 있을 때를 제외하고 나의 부모는 남들과 교류가 별로 없었고, 의심이 많았으며, 주목을 끄는 걸 좋아하지 않았다. 그들은 영어를 하지 못했기 때문에 나는 학교에서 온 통신문에 어머니의 서명을 위조하는 데 능숙해졌고 학부모 면담에 대해 결코 말하지 않았다. 나는 나의 부모를 무시당할 수도 있는 상황에 노출시키고 그 상황을 내가 통역해야 하는 걸 견딜 수 없었다. 그들의 체면과 나의 체면을 지키기 위해, 나는 규칙들을 잘 익혀야 했다.


그리고 내가 14살 때, 우리 가족은 샌안토니오의 한 교외로 이사했다. 규칙이 완전히 달랐다. 홍콩에서 우리는 한시적인 영토에 살고 있는 다른 이민자들 사이에 고립된 외국인이었다. 미국 남부에서는 우리가 이방인이라는 게 더 강하게 느껴져, 우리는 그저 '아시아인'으로 환원되었다. 홍콩에서 한식당을 운영했던 어머니는 결국 우리 동네 사람들이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초밥 식당을 열었다. 이 시기에 아버지는 일 때문에 텍사스와 홍콩을 오갔고, 때로는 몇 달 동안 떨어져 있다가 집에 돌아와서는 방문을 닫아버리곤 했다. 그는 변덕스러웠다. 소리를 지르곤 했다. 우리와 단절되고 무관심한 것처럼 보였다. 우리는 대부분 서로를 그냥 내버려 두었다.


고등학교가 시작되던 첫날, 4000명의 학생 중 소수의 아시아 아이들 중 하나였던 나는 빈티지 벨벳 바지와 얇은 블라우스, 그리고 나막신을 신고 있었다. 내가 홍콩에서 입었을 법한 차림이었다. 둘째 날, 나는 그것들을 버리고 로고 티셔츠와 평범한 청바지를 입었다. 나는 또한 영국식 액센트를 없앴다. 그 48시간 동안, 나는 영국식 발음의 흔적이 사라질 때까지 이중모음을 길게 빼고, 나의 발음에서 메타데이터를 지워버리는 법을 배웠다. 한 살 위인 내 오빠는 그렇게 변절에 능숙하지 못했다. 학교에서 반 친구들이 왜 다른 새로운 아시아 아이가 그렇게 고상한 척 말하는지 물어볼 때 나는 눈을 내리깔았다.


나는 22살에 뉴욕으로 이주했다. 성인이 되어, 나는 소시지와 우유로 연명하는 십대들로 가득한 학교 식당에 냄새나는 도시락을 가져와 눈총을 받았던 아시아계 미국인들의 개인적인 에세이들을 읽기 시작했다. 타이거맘과 한(恨)에 대한 기사들을 읽기도 했다. 한은 특히 한국적인 문화 현상으로, 외적에 의한 반복된 점령과 침략으로 인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고통과 분노를 중심으로 한다.


최소한, 나는 내가 어떤 종류의 이야기 속에 있는지, 그 장르를 파악했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식별 가능했고, 받아들이기에도 위안이 됐다. 나는 명확한 타자에 속했고, 나의 문제들은 평생 동안 적절한 역할들 사이를 오가며 생긴 코드 전환의 오류에서 비롯되었으리라. 나는 병적으로 다른 사람들을 기쁘게 하려는 성향, 다른 사람들을 거울로 사용하고 그들의 인식을 무기로 활용해 나 자신을 통제하려는 본능에 대한 재미난 리트머스 시험지를 개발했다. '집단주의인가, 정신질환인가?'


하지만 내 정체성을 만들고 진정한 삶을 시작할 수 있을 거라고 믿었던 뉴욕에서조차, 나는 계속 뭔가에 대해 준비해야 한다는 강박을 떨쳐낼 수 없었다. 연습하기. 마치 웹브라우저의 쿠키처럼 다른 사람들의 행동에 대한 정보를 축적하기. 시간이 지나면서, 나는 어떤 시나리오도 헤쳐나갈 수 있는 방법을 개발했다. 대본들, 결과의 순열들, 내가 관찰한 친구들과 동료들, 그리고 낯선 사람들이 하는 일들로 가득 찬 마음 속의 폴더들. 내 삶에서 발생할 수 있는 모든 상황과 만날 수 있는 모든 사람들을 위한 대비책이었다.


전채 요리를 나눠주는 행사에서 내가 만약 한 친구가 다른 손님에게 대화 중 단 두 가지 질문만 하는 것을 관찰했다면, 나는 개인적인 호기심이나 진정한 유대감으로 인해 세 번째 질문을 하고 싶은지와 상관없이 똑같이 행동할 것이다. 만약 다른 친구와 내가 동시에 화장실을 가게 될 경우(공포), 그들이 손을 씻은 후 무심코 살짝 털어낸다면 나도 그렇게 따라할 것이다. 내가 손이 젖은 느낌을 얼마나 싫어하는지보다는 다른 사람과 보조를 잘 맞추는 게 더 중요했다. 내 집에 저녁 식사를 하러 온 적이 있는 모든 사람들에 대해, 나는 그들이 무엇을 먹었는지, 얼마나 먹었는지, 그리고 샐러드의 어느 부분을 접시에 남겼는지를 기억하는 데 많은 정신력을 쏟았다. 다음에 그들이 오면, 나는 저녁 내내 그들이 토마토를 싫어한다는 것을 언급할 적확한 순간을 찾는 데 사로잡혀 있을 것이다. (한편 나는 그 저녁 식사 전에 내 치과 예약이 있다는 걸 잊어버렸음을 다음날이 되어서야 알게 될 것이다.)


이는 내가 아는 사람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었다. 나는 한때 시험을 위해 단어를 암기했던 것처럼 잘 모르는 사람들의 습관과 반응까지도 암기했다. 나는 이것을 강박적으로 했다. 언젠가는 충분한 근육기억이 쌓여 자연스럽게 느껴질 것이라는 희망으로, 내 행동을 모델링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넓은 데이터셋을 축적했다. 다른 사람들을 관찰하며 그들의 태연한 상호작용의 비밀을 연구하는 동안, 내 생각을 가장 괴롭힌 후렴구는 '맙소사, 어떻게 하면 이렇게 사는 걸 멈출 수 있을까? 어떻게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그냥 무엇을 해도 되는지 아는 걸까?'였다.

수년 동안 나는 계속 노력해야 하는 연옥 같은 고통을 잊게 해줄 수 있는 것이라면 술, 대마, 설탕, 폭식, 카페인, 다른 사람 등 무엇이든 (특히 찾기 어렵고 강렬한 종류로) 찾아다녔다. 그런 약물들이 위험 감각, 조증, 자기중심적 편집증을 고조시켰음에도 불구하고, 고통과 수치심에 대해 직접적인 책임을 느낄 수 있다는 건 안심이었고 심지어 짜릿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40대가 되어서는 12단계 프로그램(알콜중독 치료), 명상, 약물 치료, 여러 가지 형태의 치료법, 그리고 트라우마 치료사의 관리 하에 담대한 용량의 실로시빈을 발견했다. 나는 중독의 본질에 대해 더 많이 배웠고, 내가 다루고 있던 다른 여러 가지 문제들을—복합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CPTSD), ADHD, ED(그거 말고4 섭식 장애), 일 중독, 해리 경향, 분노, 성폭력 경험, 인종적 트라우마—헤쳐 나가는 방법도 배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모든 자기 심문 과정에서 뭔가를 놓쳤다는 확신이 나를 계속 신경 쓰이게 만들고 괴롭히는 게 당혹스러웠다. 언젠가 누군가가 모든 사람들에게 항상 분명했던 내 명백한 결점을 공개적으로 지적하리라는 생각. 바로 나만 그걸 모르고 있었다는 생각.




알코올중독자 치료모임(AA)의 회의실에는 이런 말이 있다. "내려놓고 신에게 맡겨라." 하지만 나는 다른 버전을 더 선호한다. "내려놓거나 끌려가거나." 내 자폐증 진단은 구원을 제공했다. 만약 내가 항복할 수 있다면 구원받으리라. 마침내 약간의 평화를 얻을 수 있을 것이었다.


ASD는 스펙트럼이지만, 흔히 이 스펙트럼이 경미한 것에서 심각한 것까지 이어지는 선형의 그라데이션이라고 추정한다. 사실 이 장애의 스펙트럼은 하나가 아니라 여럿이다. 각각의 사람마다 그 스펙트럼이 다른 광대한 3차원 별자리들로 이루어진 태양계와 같다. 자폐 커뮤니티 내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ASD가 있는 한 사람을 만났다면 ASD가 있는 한 사람을 만난 것이다."


다시 말해 '올바른' 자폐증이란 없다. 내가 나 자신을 비교하고 확신할 수 있는 기준을 가진 자폐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내가 얼마나 뚜렷하게 자폐적이든 간에 내가 한 일이나 하지 않은 일이 내가 가진 다른 이니셜들과 문제들이 아닌 오직 ASD에만 귀속될 수 있다는 법의학적 증거는 결코 없을 것이다. 나는 자폐증이 끝나는 곳과 나머지 내가 시작되는 곳 사이의 명확한 경계를 결코 찾을 수 없을 것이다. 결국 배심원이 단 한 명 밖에 없는 셈이다.


내 자신에 대해, 늘 알고 있었지만 ASD 진단을 받고 나서야 다른 시각으로 보기 시작한 것도 있었다. 중요한 점심 미팅이 있을 때면 나는 시간을 지키는 것, 음식을 우물거리는 동안 새로운 사람들에게 좋은 인상을 주는 것, 그리고 모든 평범한 실수들에 대해 걱정했다. 그리고 만약 레스토랑이 개방형이고, 배경음악이 시끄럽고, 내 테이블의 누군가가 향수를 뿌리고 왔다면, 나는 식사를 마칠 수는 있겠지만 집에 돌아오면 독감 같은 증상으로 쓰러질 것이다. 내 신경계에는 과도한 부담이 쏠릴 것이다. 난 며칠 동안 숙취에 시달릴 것이다. 남편을 날카롭게 대하고 일에 제대로 집중할 수 없을 것이다. 나는 내가 좋아하지 않는 것들이 실제로 나를 쇠약하게 만듦을 이해하게 되었다.


ASD가 있는 많은 사람들이 감각 처리에 어려움을 겪는데 내가 자폐증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배경 소음이 있을 때를 위해 귀마개를 샀다. 그리고 실제로 귀마개를 사용하게 되었다. 그것이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 놀라웠다. 천장등은 지속적이지만 불규칙한 쨍그랑거리는 소리만큼이나 내 집중을 방해한다. 나는 완전히 스칸디나비아 스타일을 적용해 테이블 램프를 사고, 모든 전구의 밝기를 은은한 걸로 바꾼 후 그것들을 바닥에 놓았다.


몇몇 해결책들은 금방 찾을 수 있었다. 다른 해결책들은 더 많은 시행착오가 필요했다. 성인이 되고 난 이후 거의 대부분의 기간에, 나는 신경질적일 정도로 주의를 기울여 옷을 입었다. 하지만 옷을 차려입었을 때조차, 나는 때때로 그것을 벗기 위해 일찍 자리를 떠나거나 불편할 것을 알기에 아예 행사에 가지 않곤 했다. 자폐증이 있는 사람들은 질감, 태그, 솔기에 매우 민감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나는 내가 거부감을 느끼는 직물에 대한 방어막으로 아주 얇고 부드러운 터틀넥이나 내의를 입기 시작했다. 알고 보니 내가 미학적으로는 좋아하지만 내 몸으로는 견딜 수 없는 실루엣들도 있었다. 앉을 때 당겨지는 모든 트렌치코트 길이의 옷. 포플린. 내 뒤에 모호한 감각을 만드는 너무 풍성한 치마들. 브로케이드. 뻣뻣한 청바지. 겨드랑이에서 뭉치는 볼륨 소매leg-of-mutton sleeve. 이것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내 자신을 더 많이 설득시켜야 했다. 하지만 일단 그렇게 하고 나니 내 스타일 아카이브를 샅샅이 뒤져 옷장의 절반과 작별했다.


그리고 나서 나는 아이 컨택에 대해 생각했다. 한국 어른을 만났을 때는 눈을 마주치지 않기. 백인 선생님을 만났을 때는 눈을 마주치기. 규칙들을 암기하는 데 들인 노력이 아니었다면 내가 그 모든 행위를 얼마나 싫어하는지 알았을까 모르겠다. 아이 컨택은 항상 나에게 침습적으로 느껴졌다. 마치 인사랍시고 내 손가락을 다른 사람의 입에 넣고 그들이 자기 손가락을 내 입에 넣는 것 같았다. 내가 그걸 할 수 있다고 해서 항상 해야 한다는 건 아니었다.


ASD와 ADHD는 종종 함께 발생한다. 나는 그것들이 나에게 각기 다른 방식으로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발견했지만 때로는 개별적으로 또는 때로는 협력하여 영향을 미치므로, 나는 무엇이 무엇인지 분석하려는 시도를 그만두었다. 갑자기 내 자신의 선호도에 기반한 선택을 강요받으면 내 마음은 백지가 된다. 이러한 경향은 ADHD와 관련된 것일 수 있다. 작업 기억과 우선순위 설정의 문제들이 그렇다. 아니면 주변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을 모방하는 영역에 속할 수도 있다. ASD인지 ADHD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나는 큰 화이트보드를 사서 내가 싫어하는 것들을 적었다. 이는 생각보다 오래 걸렸다. 다음 몇 달 동안, 현장에서 데이터를 수집했다. 어느 날 밤, 메뉴에서 굉장히 맛있어 보이는 새우를 한 입 물었다가 집에 가서 그 목록에 '새우'를 추가할 수도 있다. 다른 날, 친구가 향초를 선물할 수 있고 그것을 받았지만 사용하지 않은 다른 향초들로 가득 찬 서랍에 넣을 때까지 '향초'를 목록에 추가하지 않을 수도 있다. 목록이 없으면, 나는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나는 뭔가를 결정해야 할 때 이 목록에 의존하기 시작했다. 망설이지 않게 된다는 게 가장 자유로웠다. 다른 사람들의 선호도와 습관을 집계하는 대신, 나는 그 에너지를 내 자신의 취향에 대한 일종의 머신러닝된 분별력을 만드는 데 썼다. (나에게 향 있는 양초를 사준 모든 분들께 사과를 드린다. 향초는 내 치아가 꽉 조이는 기분이 들게 만든다.)


아마도 내 ASD 진단이 믿을 수 없다고 생각한 것은 자기기만이었을 것이다.


어쩌면 내 삶의 어떤 것도 실제로 반증으로 제시될 수 없을지도 모른다. 물론 나는 유명인사 인터뷰를 잘했다! 취재 대상이 최신 프로젝트에 대해 준비된 이야기를 늘어놓다가 기삿거리를 위해 틈틈히 자신의 사생활에 대해서도 미리 검토를 거친 이야기들을 풀어놓는, 샤토마르몽에서의 75분 짜리 점심 식사 같은 건 나의 자폐증 유무에 대해 어느 것도 입증할 수 없었다. 그 모든 것은 가장이었고 나는 그게 매우 편했다.


ASD 진단을 받았을 당시 나는 네 번째 책을 쓰고 있었고 작업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나는 주로 1인칭으로 책을 썼는데 이번에는 시점이 여러 차례 바뀌는 3인칭으로 쓰고 있었다. 나의 캐릭터들은 신경질적으로 허둥대기 때문에 풍부한 내면 생활을 가지고 있다. 3인칭으로 이 캐릭터들이 공간을 통해 움직이는 것을 지켜보면서, 나는 내가 진정한 인간의 동기에 대해 충분히 알고 있는지조차 의심했다. 하지만 내 커리어를 전환시킨 첫 소설이 서로 눈을 마주치는 것을 견디지 못해 문자로 사랑에 빠지는 두 사람에 대한 이야기였다는 것을 깨닫자 나는 웃었다.




샘에게는 나의 ASD 진단이 모든 것을 바꾸었다. 대해와 같은 안도감을 제공했다. 우리 관계의 프레임은 바뀌었다. 나는 병리학적 요구 회피5pathological demand avoidance에 대해 알게 됐다. 이는 ASD 세계에서 여전히 논쟁의 여지가 있는 행동 패턴이지만 나에게는 엄청난 운영체제(OS) 업데이트를 의미했다. 이는 내가 어떤 요청을 받았을 때 반드시 이를 거부하게 되는 이유를 설명해주었다. 또한 어떠한 요구나 부탁이 내게 압도적인 공포감과 요청한 사람을 실망시킬 것이라는 확신을 유발하는 이유를 설명해주었다. 샘이 내 문을 두드렸을 때의 내가 바로 그랬다.


진단 3개월 후, 나는 벽에 포스트잇 메모를 하나 붙였다. 메모엔 '가서 인사해 :)'라고 써있다. 그걸 볼 때마다 그 말을 마음에 새긴다.


이런 순간에 나는 수줍음을—마치 정말로 모험을 하는 것 같은—느끼지만 샘은 친절하고 수용적이다. 그는 책상에서 일어나 내게 돌아서서, 헤드폰을 내려놓고 내가 좋아하는 창가 자리를 내게 내어준다. 그의 기쁨을 보면 나는 기쁘다. 그리고 안도한다.


내가 벽을 건너가는 사람이 되면, 다른 무언가가 일어난다. 우리는 서로를 찾는다.


사소한 일이다.


하지만 난 그게 다른 차원으로 가는 문이라고 확신한다.




샘이 냉소적으로 뱉은 말 때문에 내가 자폐증 진단을 받았다는 것은 대부분 근거 없는 농담이다. 사실, 그것은 내 아버지 때문이었다.


팬데믹 기간에 그는 근위축성 측삭경화증(ALS) 진단을 받았다. 한번은 아버지가 한밤중에 쓰러졌을 때, 부모님은 30분 거리에 사는 내 동생에게 전화해 깨우기에 적당한 시간을 기다리며 6시간 동안 거실 바닥에 계셨다.


아버지가 ALS 진단을 받고 난 후, 나는 여러 차례 부모님을 방문했다. 에어비앤비에서 구한 방에서 격리하며 아버지를 간호했다. 그 때 내 뇌가 고장났다. 제대로 작동하던 인지 기능의 메트로놈이 멈췄다. 나는 일을 할 수 없게 되었다. 글도 쓸 수 없게 되었다. 내가 ADHD 진단을 받고 약물 치료를 받았던 게 바로 이때였다.


아버지는 내가 자폐증 진단을 받기 1년 전인 2022년 음력 설날 밤에 돌아가셨다. 장례식에서 나는 울지 않았다. 나보다 더 슬퍼할 자격이 있는 어머니와, 장남이자 아이가 있는 아버지로서 슬픔의 순서에서 어머니 바로 다음인 오빠 앞에서 우는 것은 불경스럽게 느껴졌다. 그 대신 교회에 서서, 나는 너무나 강력한 자의식에 사로잡혀 그것 때문에 의학적으로 죽을 수 있는지 궁금해질 정도였다. 나는 예의범절의 미적분에 대해 집착하는 걸 멈출 수 없었다. '아버지의 딸인 내가 울 수 있는 강도의 수치 속성은 무엇일까? 그가 나를 거의 안아주지 않았기 때문에 내가 덜 아파할 자격이 있는 걸까? 그가 나를 성과 이름을 붙여서 불렀기 때문에? 나를 멀리 했던 것은 그였을까, 아니면 나였을까? 작별 인사를 할 시간에 맞춰 도착하지 못했지만 내가 첫 비행기를 타고 온 것이 중요할까?'


나는 이 모든 것이 어떻게 느껴지는지에 대해 이전에는 의문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 내가 삶을 살면서 늘 갖고 있던 학습적 긴박감. 하지만 아버지의 관 앞에 서자, 이 모든 임시변통의 시스템들, 사람이라면 이렇게 행동해야 한다는 이 모든 모방들이 갑자기 기괴하게 느껴졌다. 나는 처음으로 나의 생각을 바라볼 수 있었다. 그것의 잔혹함, 내가 느끼는 것조차 허용하지 않은 파도 같은 슬픔 앞에서의 자기혐오적 판단이 내게 있어 가장 비인간적인 것이었다.


내가 아버지의 얼굴을 마지막으로 본 것은 내가 운전 중이었을 때였다. 어머니가 페이스타임 사용법을 알아냈고 나에게 전화를 걸었다. 나는 차를 세웠다. 아버지는 중환자실에서 몇 달을 보냈음에도 항상 좋은 기분이었다. 아버지는 숨을 가다듬거나 말을 할 수도 없었지만 미소 지었다.


포스트잇 메모는 축복이지만 그 속에는 잔인함도 있다. 웃는 얼굴 이모티콘이 나를 자극하는 날이 있다. 그 포스트잇은 내 결혼 생활을 구했을지 모르지만 나와 아버지에게는 너무 늦게 왔다.


내가 할 수 있었을 때 그의 닫힌 문을 두드렸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나는 40대였지만 여전히 내가 그들에게 나 자신을 보여줄 준비가 되기 전에 그들이 죽을 수 있다는 사실을 생각지 못했다. 아버지는 나를 거절할 수도 있었다. 그는 수줍게 웃으며 대화를 피할 수도 있었다. 우리 둘 다 당혹감에 덜덜 떨면서 포옹을 시도했을 수도 있었다. 그는 그러는 대신 나를 '메리 최'라고 부르고 악수를 할 수도 있었다. 이 모든 순간들을 모았더라면. 그랬다면 내가 가진 것보다 아버지에 대해 더 많은 걸 갖게 됐으리라. 어떤 날들은 그런 시도도 하지 않은 데 대해 나 자신을 용서할 수 없다. 하지만 그것도 괜찮다. 그것이 바로 내가 그를 사랑했던 방식일 테니까.



매리 HK 초이(최현경)는 한국계 미국인 작가·극작가로 바이스뉴스Vice News에서 문화 담당 기자로 일했고 애틀랜틱, 뉴욕타임스, 와이어드, 얼루어 등에 기고했다. 작품으로『비상 연락처Emergency Contact』, 『영구적 기록Permanent Record』, 『요크Yolk』가 있다.



1968년 창간된 미국의 격주간지로 뉴요커와 함께 뉴욕을 대표하는 매거진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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