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사회이슈

반려동물 연명치료, 과연 누굴 위한 걸까?

우린 치료가 동물을 위한 거라고 하지만 사실 우리 자신을 위한 것일 때도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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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Tima Miroshnichenko

2024.09.06 14:51

New Yo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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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려동물은 이미 한국 사회에서도 '가족'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인간과는 다른 점이 많아 '윤리적 딜레마'가 생기는 지점들이 있습니다. PADO가 과거 소개했던 '2000만원이면 당신의 고양이를 살릴 수 있습니다. 어떻게 하시겠어요?'는 많은 돈을 들여서 반려동물을 치료하는 것과 다른 동물의 장기를 자기 반려동물에게 이식하는 행위의 윤리성을 살펴봤는데 이번에 소개하는 뉴욕매거진의 2024년 8월 12일자 기사는 치료 행위 자체의 윤리성을 따져 봅니다.


인간과 달리, 반려동물은 자신이 고통받고 있다는 사실이나 치료의 연장이나 중단에 대한 의사를 전달할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기사에 등장하는 수의사들은 얼마나 많은 주인들이 자신의 반려동물이 고통을 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현실 부정 등의 감정으로 안락사를 외면하고 고통을 연장시킬 뿐인 연명치료를 요청하는지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한편으로는 그런 수의사들조차도 본인이 직접 당사자가 되자 반려동물에 대한 애착 때문에 판단이 흔들리기도 합니다.


'죽음'으로 인한 이별이 인류 역사 그 어느 때보다 희귀해진 오늘날, 우리가 가장 많이 접하게 될 죽음은 인간에 비해 수명이 짧은 반려동물의 죽음일 것입니다. 반려동물 문화와 산업이 보다 발달한 미국의 사례는 우리 사회가 보다 지혜롭게 처신하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고양이의 이름은 파블로였고, 수백만 마리의 다른 고양이들과 비슷해 보였다. 귀여운 얼굴의 태비 고양이로, 회색빛 털에 흰색 가슴털과 흰색 발, 그리고 초록색 눈을 가졌다. 뉴욕시 퀸즈에 사는 안제이 킨칙과 그의 파트너는 룸메이트가 유럽으로 이사 가면서 파블로를 남겨두고 가자 그를 맡게 되었다. 킨칙은 파블로가 "그냥 흔한 길고양이"라고 말할 것이다. 한편으로는 또 "가장 아름답고 매우 독립적이며 멋진 녀석"이라고 말할 것이다. 손님이 올 때마다 파블로는 당연히 받아야 할 관심을 요구하며 방 한가운데로 살랑살랑 걸어 들어왔다. 둘은 파블로를 귀여워하면서도 걱정했다. 나중에는 고양이를 하나 더 입양했는데 그에게 친구를 만들어주기 위해서기도 했다. 수년 동안 파블로는 편안해 보였다. 그러다 8살이 되었을 때, 수의사가 그의 배에서 혹을 발견했다.


킨칙과 그의 파트너가 그 혹이 종양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그들은 새로운 세계로 들어섰다. 파블로의 가장 큰 문제가 가끔 있는 요로 감염이었던 세계에서, 파블로의 몸이 그들이 답할 수 없는 질문들을 던지는 세계로. 이를 테면 이런 질문이다. '당신은 나를 살려둘 여유가 있나요?' 그들은 시도해 보기로 했다. 파블로는 공격적인 형태의 고등급 림프종을 앓고 있었지만 방도가 없는 건 아니었다. 둘은 그것들을 실행했다. 파블로는 수술을 받고 6개월간의 화학 요법을 받은 후, 3년간 차도를 보였다. 림프종이 재발했을 때, 그는 다시 6개월간의 화학 요법을 받았다. 첫 번째 치료는 파블로에게 메스꺼움을 유발했다. 두 번째 치료 후에는 수염이 빠졌다. 킨칙은 파블로에게 메스꺼움을 관리하기 위한 보조제를 주었고 그의 수염은 결국 다시 자라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킨칙은 때때로 그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의문을 가졌다. "우리가 이런 결정을 내리는 데 도움이 된 것은 파블로가 치료 사이에 좋은 삶을 살고 있는 것 같았다는 점이에요." 그가 말했다. "하지만 그래도, 이 고양이에게 이런 약물을 계속 주입하면서 우리는 '이게 정말로 그를 돕고 있는 건가, 아니면 우리 자신을 위해 하고 있는 건가?'라고 묻게 됐죠."


세 번째가 가장 힘들었다. 파블로가 진단받은 지 5년이 지났다. 의사들은 또 다시 화학 요법을 시행했다. 몇 달에 걸쳐 종양은 줄어든 것 같았다. 하지만 다른 무언가가 잘못되고 있었다. 그의 혈액 검사 결과가 새로운 방식으로 나쁘게 나왔다. 수의사들은 수혈을 제안했는데 킨칙에게는 그것이 미친 짓처럼 보였다. 처음으로 파블로는 식욕을 잃었고, 처음으로 그의 주인들은 안락사에 대해 진지하게 논의했다. 둘은 약속을 잡았다. 하지만 그를 데려가기로 한 전날, 파블로는 집에서 죽었다. 6년 동안, 킨칙은 둘이서 파블로를 살리는 데 3만 달러(3900만 원)를 쓴 것으로 추정한다. "가장 큰 후회는 화학 요법을 했다는 것이 아니라 그를 안락사시키기까지 너무 오래 기다렸다는 거예요." 킨칙이 말했다.


이는 반려동물의 삶에서 당신이 고려하고 싶지 않은 부분이다. 그 삶이 끝나야만 하는 부분. 때로는 사고나 위기로 인해 당신이 굳이 결단을 내릴 필요가 없을 것이다. 이럴 때 가장 분명히 자비로운 일은 고통을 빨리 끝내는 것이다. 그들을 도울 수 있는 치료를 감당할 형편이 안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다른 경우에는 그 생명의 쇠퇴가 길고 느리게 이어진다. 그리고 그게 바로 우리 때문인 경우가 점점 더 늘고 있다. 고등 수의학이 확산됨에 따라—최근에 추가된 반려동물 호스피스와 완화 치료와 함께—반려동물을 돌보는 새로운 방법들이 우리가 언제든지 그들을 안락사시킬 수 있다는 지식과 불편하게 공존한다. 이로 인해 우리가 아직 대비하지 못한 모호성이 생겨난다. 병원비와 진료 약속, 죄책감과 슬픔을 넘어, 반려동물 생명의 하향곡선은 우리와 반려동물 사이의 간극을 드러낸다. 우리는 그들이 무엇을 느끼고 있는지 모른다. 우리는 그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무엇을 이해하는지 모른다. 관계는 친밀하지만 그들의 고통은 낯설게 느껴질 수 있다. 우리는 협상 단계에서 머뭇거린다. '네가 원하는 게 뭐야?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우린 우리의 삶을 반려동물에게 맞추고 있지만—미국에서는 점점 더 그렇다—여전히 권력을 쥐고 있는 건 우리들이다. 그 사실에 대해 좋은 기분을 유지하기 위해, 우리는 반려동물이 우리가 그들을 위해 선택한 삶을 좋아한다고 스스로를 설득한다. 때로는 우리는 그들이 삶이 영원히 지속되기를 원하리라고 스스로를 설득한다. 하지만 반려동물이 자신의 삶이 멈추기를 필요로 한다면 어떨까?



우리는 항상 반려동물을 죽여왔다. 병든 고양이나 개, 또는 원하지 않는 고양이나 개를 살리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던 시절이 있었다. 새끼 고양이가 든 자루를 강에 던져버리거나 불편함을 보이자마자 보호소나 수의사에게 데려가곤 했다. 콜로라도주립대학에서 수의학 의료윤리 과정을 창설한 철학자 고 버나드 롤린Bernard Rollin은 1960년대에 애견 호텔 비용을 아끼기 위해 휴가 전에 개를 안락사시킨 사람들을 봤다고 썼다. 1980년대가 되자 이런 행동은 많은 사람들에게 혐오스러운 것으로 여겨졌다. 반려동물은 가족의 일부가 되었다. 미국인들이 독신으로 지내며 1.9명의 자녀 대신 개와 유대감을 형성했기 때문이라는 설명이 있다. 동물 의학은 성장하고 전문화되어 전국에 수의과 대학이 개설되고 종양학과 같은 분야에 대한 별도의 과정이 개발되었다. 갑자기, 당신의 반려동물이 아플 때 동네 수의사가 당신에게 선택지와 추천 병원을 제시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제 당신은 당신의 슈나우저를 위해 인슐린을 구입한다. 당신의 핏불에게 알레르기 주사를 맞히고 당신의 고양이의 신장병을 보조제로 치료한다. 이를 감당할 수 없을 수도 있다. 인슐린만 해도 한 달에 수백 달러가 들고 화학 요법 비용이 1만 달러(약 1300만 원) 이상일 때는 더욱 그렇다. 반려동물 보험에 가입할 선견지명이 있었다 하더라도 모든 치료가 보장되지는 않으며 당신의 동물이 이미 아프다면 보험 적용은 거의 물건너간 일이다. (많은 반려동물 보험이 기존 질병을 보장 범위에서 제외한다.) 충분한 돈으로 반려동물의 증상을 완화시킬 수 있다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다. 하지만 얼마나 많은 돈이 있더라도 당신의 고양이나 개가 여전히 죽음이라고 불리는 삶의 단계에 도달할 것이라는 사실과 이를 인정하는 게 당신의 몫이라는 사실을 피할 수는 없다.


아프거나 나이 든 반려동물에게 안락사가 인도적인 것으로 여겨지며, 자연사까지 끌고 가는 것은 인도적이지 않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수의학적 논리는 우리가 고통을 더 빨리 끝낼 수 있다면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종교적 또는 개인적인 이유로 모든 사람이 이를 믿지는 않지만 미국 수의사협회는 안락사를 표준으로 취급한다. 미국 수의사협회 지침은 수의사들이 수십 년 동안 믿어온 것을 반복한다. "일단, 다른 대안이 장기적이고 끊임없는 고통일 경우, 동물 주인들에게 안락사를 동정적인 치료 옵션으로 안내하는 것이 수의사의 윤리적 책임이다." (협회는 또한 수의사 및 직원들이 "돌봄-죽임의 역설의 윤리와 계속 씨름할 것"임을 인정한다.) 오늘날 선호되는 옵션은 고양이나 개에게 먼저 진정제를 투여해 의식을 없게 한 다음 수의사가 치명적인 양의 바르비투르산염을 주입하는 것이다. 빠르고 고통 없이 보내는 것이 목표이며, 안락사 과정은 거의 항상 그렇게 진행된다. 동물이 진정제에 부작용을 보이고 공황 상태에 빠지는 드문 경우가 있다. 이는 관련된 모든 이에게 끔찍한 일이다.


반려동물의 생명을 연장하는 것에서 갑자기 생명을 끝내는 것으로 전환하는 것은 반려동물 주인들이 결정하기 어려워하는 부분이다. 수의사 대니 맥베티 박사에 따르면 그래서 그들은 "기다리고 기다리고 또 기다리고 기다린다". 탬파에서 '랩 오브 러브Lap of Love'라는 가정 호스피스 및 안락사 사업을 운영하는 맥베티는 대부분의 수의사들이 "열에 아홉" 안락사가 필요하지 않다고 여겨지는 동물들보다는 너무 오래 버티도록 강요받은 동물들을 안락사시켜 달라는 요청을 받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한 수의학과 기술자는 그의 동료 중 일부가 내과 치료나 종양학 치료를 제공하는 병원에서 일하기를 거부한다고 말한다. 그들은 그러한 치료가 가능하다면 결국 안락사시켜야 할 반려동물들을 더 많이 보게 될 것을 두려워한다.


고양이나 개는 영원한 현재 속에 산다고 널리 여겨진다. 그들 고양이, 개의 관점에서는 지금 느끼는 감정이 항상 느낄 감정이다. 그들은 낙관적이지 않다. 비관적이지도 않다. 그들이 고통에도 꿋꿋해 보인다면 그것은 수치심이나 자존심 때문이 아니다. 그들은 당신에게 자신의 고통을 숨기려 하는 게 아니다. 그저 당신이 그것을 볼 수 없는 것뿐이다. 수의사는 그것을 볼 수 있다. "개와 고양이는 그들의 고통을 숨기지 않아요." 맥베티가 말한다. "단지 그것에 대한 감정적 반응이 없을 뿐이에요." 우리는 고통스러운 치료가 미래에 개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지만 개가 '미래'가 무엇인지 아는지는 불분명하다. "그게 반려동물들의 가장 좋은 점이죠. 지금 이 순간 속에 사는 것." 샌프란시스코 베이에어리어에 기반을 둔 수의학과 기술자 다니엘라 도인이 말한다. "마음챙김 명상이 달성하려는 것의 최고의 예시예요. 그들은 죽을 때, '할머니 할아버지를 한 번 더 봤으면 좋았을 텐데'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돌봄의 루틴은 당신의 몸을 훈련시킨다. 고양이가 도망가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문을 연다. 밥그릇을 채우기 위해 무릎을 꿇는다. 이런 행동에 너무 익숙해져서 잠에서 깨기도 전에 비틀거리며 아침 산책을 나갈 수 있다. 동물의 행동을 신체적으로 배운다. 내가 X를 하면 내 동물은 Y를 한다. 내가 A를 잊으면 내 동물은 B를 할 것이다. 대부분의 우리는 반려동물의 선호도에 대한 논리를 거의 이해하지 못해서 일종의 미신적인 태도로 그들에게 접근한다. 그래서 그들이 아프다는 첫 번째 징후는 마치 빛의 속임수처럼 당신을 놀라게 한다. 당신이 X를 했는데 당신의 동물이 대신 Z를 할 때까지 당신은 그들의 습관과 움직임을 얼마나 예상하고 있었는지 몰랐다. 고양이는 자신이 아프다는 것을 무시하기 쉬운 행동으로 보여줄 수 있다. 그저 숨는 것이다. 한 여성은 자신의 늙은 테리어가 집 주변을 빙빙 돌기 시작했다고 말한다. 변화는 서서히 나타날 수 있어 진행 상황을 파악하기 어렵다. 편집증이 시작된다. 자기 의심이 피어난다.


동물의 죽음에 대한 경험이 적을수록 반려동물의 상태에 대해 더 깊은 부정에 빠지는 경향이 있다. 맥베티가 호스피스 치료를 제공할 때, 그는 반려동물의 통증을 관리하고 주인이 현실을 직시할 수 있도록 돕는다. 그가 울혈성 심부전을 앓는 개의 주인들에게 반려동물의 마지막 순간을 어떻게 상상하는지 물어보면, 그들은 온 가족이 모여 작별 인사를 하는 모습을 그린다고 말한다. 유일한 문제는 남편이 출장에서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고 싶어 하는데 그게 다음주까지라는 점이다. "그래서 저는 '집에 와서 개가 혼자 죽어 있는 것을 발견해도 괜찮으세요?'라고 묻습니다. 그리고 만약 그들이 그래도 괜찮다고 하면, '그래요, 하지만 기억하세요. 그가 죽기 전 한 시간 동안 고통 속에 있었는지 알 길은 없을 겁니다. 그가 비명을 지르고 있었는지도 모르죠'라고 말해요. 집에 왔더니 개가 코와 입에서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다고 제게 전화를 걸어 말하는 고객들이 있었죠." 그는 자신의 진료소의 호스피스 예약 중 30~50퍼센트가 현장에서 안락사 예약으로 바뀐다고 추정한다.


맥베티는 30대와 40대의 사람들, 즉 처음으로 이런 결정을 스스로 내리는 사람들이 거의 항상 너무 오래 기다린다고 말한다. 수의학과 기술자 도인은 응급 진료소에서 일하며 매우 아픈 동물들을 살려두려는 고객들의 모든 이유를 들어봤다. 그는 그것들을 하나씩 열거했다. "'음, 아직 음식을 먹고 있잖아요'—제가 가장 좋아하는 변명이에요. 왜냐하면 그 말의 실제 의미는 하루에 한 번 1~2 테이블스푼의 음식을 억지로 먹이고 있다는 거거든요. '아직 꼬리를 흔들어요.' 네? 우리와 함께 있는 걸 좋아해서 그러는 거예요. 또는 '좀 마른 것 같아요'라고 하는데 실제로는 동물이 극도로 야위어 있어요. '좀 무기력해요'—그 얘길 듣고 나서 우리가 동물을 보면 동물은 옆으로 누워 입을 벌리고 숨을 쉬고 있죠."


때때로 맥베티는 고객이 받아들일 수 있다고 생각하면 직설적으로 말한다. "저였다면 지난주에 안락사를 시켰을 거예요." 그래도 수의사가 당신을 대신해 안락사 결정을 내릴 가능성은 낮다. 이는 법적 의무가 아니라 그들의 감정지능의 산물이다. 그들은 주인들이 누군가의 허락을 원한다는 걸 안다. 뉴욕시에서 가정 방문 치료와 안락사를 담당하는 수의사 웬디 맥컬럭은 이렇게 말한다. "전형적인 경우는 방문했을 때 개가 기저귀를 차고, 반혼수 상태로, 얼룩 위에 누워 있고, 움직일 수 없는 상태인데도 주인들이 '시기가 됐다고 생각하세요?'라고 묻는 거죠." 그는 16살 된 셰퍼드를 키우는 가정을 방문했던 사례를 떠올렸다. 그 개는 실금 증상이 있었고 더 이상 걸을 수 없었다. "제가 도착했을 때, 저는 상황을 확인하고 모든 사람이 동의하는지 확인하는 일을 할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가 말했다. "역시나, 도착해보니 그 개는 가망이 없었어요. 가족들이 '그럼 이제 때가 됐다고 생각하세요?'라고 묻더군요. 저는 그냥 '넵'이라고 대답했죠. 그러자 그들은 모두 웃음을 터뜨렸어요. 그들은 그저 누군가가 그걸 말해주기를 필요로 했던 거예요."


하지만 수의사들조차 스스로 결정을 내리는 데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 UC데이비스의 방사선 종양학 교수이자 비교 암 센터의 공동 이사인 마이클 S 켄트 박사는 그의 파트너가 입양했던 유기견 시저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어느 날, 시저는 그가 집에 왔을 때 일어나 맞이하지 않았다. 시저의 배를 살펴보던 켄트는 뭔가 이상한 것을 느꼈고, 그와 그의 파트너는 함께 만약 스캔을 해서 다른 종양이 발견된다면 치료의 고통을 겪게 하지 않고 마취 상태에서 작별 인사를 하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그때, "우리는 그의 폐에서 작은 결절 두 개와 비장에 큰 종양을 발견했어요." 켄트가 말했다. "우리는 둘 다 '아니야, 수술을 받아야 해'라고 말했죠. 우리는 서로 상의도 하지 않고 즉시 그렇게 말했어요. 비록 검사 전에는 임상적으로는 치료를 중단하기로 결정했었지만 말이죠." 시저는 4년을 더 살았다. "잘된 일이죠." 켄트가 덧붙였다. "하지만 그건 내가 실제로 그런 상황에 마주치면 무엇을 할지 몰랐다는 걸 보여주죠."


맥컬럭은 최근 6년간의 암 치료 끝에 사랑하는 고양이 챈스를 보내야 했다. 뉴질랜드 출신인 그는 고향 사람들에게 고양이의 병에 대해 이야기할 때마다 "당신들 미국인들과 동물들은 미쳤어!"라는 반응을 들었다. 그는 최종 결정을 망설이면서, 그 말이 사실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솔직히 말하면, 제가 너무 오래 기다렸다고 생각해요." 그가 말했다. "학문적으로는 그를 안락사시킬 때라는 걸 알고 있었어요. 하지만 좀 독단적인 성격의 친구가 '그 불쌍한 고양이 좀 안락사시켜!'라고 말할 때까지 정신을 차리지 못했죠." 그는 이제 고객들의 혼란을 더 깊이 이해하게 되었다. "뉴욕시의 많은 사람들이 그러하듯, 혼자 살 때 집에 돌아오면 반려동물이 작은 안식처처럼 느껴지는데 그걸 놓아주기가 힘들죠." 그가 말했다.


반려동물 주인들은 계속해서 나에게 버티고 있었던 것을 후회한다고 말했다. "기다린 것은 이기적이었어요." 4살에 신부전에 걸린 사랑스러운 얼룩무늬 믹스견을 키웠던 한 친구가 말했다. 그는 개가 눈밭에서 놀고 난 후 체온을 회복하지 못하고 떨면서 음식을 거부할 때 처음으로 개가 아프다는 것을 알아챘다. 수의사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아내지 못했다. 라임병일 수도 있고 다른 질환일 수도 있었다. 이상하게도 이 불확실성이 희망으로 이어졌다. 내 친구는 시도해보고 싶었다. 치료비를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는 모금 행사를 열었다. 그는 돈을 모아 개를 의사에게 데려갔지만 개는 나아지지 않았다. 수의사들이 급식 튜브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할 때까지 그는 자신이 얼마나 멀리 왔는지 깨닫지 못했다. 그는 약속을 잡았다. 그는 이제 자신이 현실을 부정하고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 마지막 몇 주가 필요했던 건 개가 아니라 나였어요. 그를 죽여야 한다는 생각을 내가 받아들이기 위해서였죠." 그가 말했다.


무엇을 해야 할지 알고 있더라도 적대적인 의료 체계를 헤쳐나가야 할 수 있다. 더 많은 사설 동물병원들이 사모펀드 회사와 기업들에 의해 인수됨에 따라, 이러한 병원에서 일하는 수의사들은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 치료를 강요받고 있다고 보고한다. 달린 캐플런이 그의 노령의 노리치 테리어 딜런을 맨해튼 중심가의 동물병원에 안락사시키러 데려갔을 때—이 병원은 우연히도 전국적인 기업형 동물병원 체인 소속이었다—그는 딜런이 나아질 수 있다는 환상을 갖지 않았다. 캐플런은 60대이며 그가 키웠던 개들의 유골함으로 캐비닛을 가득 채울 만큼 많은 개를 키웠다. 딜런은 1년 동안 건강이 악화되어 왔고 그날 저녁에는 그가 전에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방식으로 울부짖기 시작했다. 하지만 병원에서 그는 젊은 수의사를 마주하게 되었는데 그는 딜런이 1년 동안 겪은 치매 진행이 "그냥 지나갈 수도 있다"고 말하며 집으로 데려가 약물 치료를 하라고 제안했다. 캐플런이 딜런은 이미 약물 치료를 받고 있으며 몇 달 동안 혼란스러워하며 빙글빙글 걸어다녔다고 항의하자, 수의사는 그 점을 이용했다. 그는 그것이 귀 문제일 수 있다며 귀 청소를 추천했다. "그 수의사는 계속 밀어붙였고 저는 정말 화가 났어요." 캐플런이 말했다. "개 8마리를 키워보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 수 있다고요." 결국 캐플런은 딜런을 데리고 그곳을 떠났다. 접수대에서 일하는 한 직원이 조용히 그에게 딜런을 안락사시킬 수 있는 다른 응급 병원의 번호를 알려주었다.


내가 29살이 되던 해, 내 고양이는 새롭고 충격적인 방식으로 똥을 싸기 시작했다. 그는 그런 고양이가 아니었다. 사실, 나는 그게 자랑스러웠다. 그는 배변통을 빗나가서 싸지도 않았고, 토하지도 않았으며, 식물도 먹지 않았다. 그는 깔끔하고 사교적이며 재미있고 제멋대로였다. 내가 그를 입양했을 때 나는 19살이었고 너무 미성숙한 상태여서 그는 빠르게 내 몸의 일부처럼 느껴졌다. 생의 마지막 해에, 그는 새로운 재주를 배웠다. 내가 그의 밥그릇을 채우거나 바닥에서 무언가를 집으려고 몸을 굽힐 때, 그는 내 등 위로 뛰어올라 미친 듯이 가르랑거렸다. 나는 그를 너무 사랑해서 때때로 그가 나를 안으려고 내 침대로 기어들어올 때, 그의 신뢰를 느끼는 것만으로도 울곤 했다. 그래서 그가 아파트 여기저기에 불규칙하게 배변하기 시작했을 때, 나는 즉시 그를 수의사에게 데려가야 한다는 걸 알았다. 그랬기를 바란다. 나는 내가 빠르게 행동했을 거라고 믿고 싶다.


나와 수의사 모두 그가 왜 그렇게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내 룸메이트에게도 고양이가 있었는데, 내 고양이는 그를 경멸했다. (복수일까?) 한여름이었고, 꼭대기 층 아파트는 끓을 듯이 더웠다. (탈수일까?) 그는 막 열 살이 되었다. (새로운 알레르기일까?) 나는 사료를 바꾸고 물을 새로 갈아주었으며 선풍기를 하나 더 샀다. 잠시 괜찮아 보였다가, 다시 안 좋아졌다. 그는 고통스러워했다. 나는 그를 다시 수의사에게 데려갔다. 그리고 또 다시. 그 다음엔 다른 수의사에게. 나는 일을 빼먹고 있었다. 그들이 암을 발견했을 때는 이미 늦었다. 온 몸에 암세포가 퍼져 있었다. 내가 감당할 수 없는 화학 요법을 받더라도 그에게는 기회가 없었을 것이다. 적어도 나는 수의사들이 내게 그렇게 말했다고 기억하기로 했다. 고양이에게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알아내려고 노력하면서 이미 통장 잔고가 바닥을 보이기 시작했다. 나는 동물병원 영수증들이 무언가를—내 행동, 내 헌신, 내 사랑을—증명하는 것처럼 그것들을 붙들고 있었다.


그들은 내가 때가 되면 알 것이라고 말했지만 그의 생의 마지막 날들에는 언제라도 적절한 시기였을 것이다. 나는 그가 더 이상 제자리에 웅크리고 앉아 눈을 내리깔고, 검은색과 흰색의 줄무늬 꼬리 끝을 주황색 몸 아래로 감추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된 오후까지 선택을 견딜 수 없었다. 그의 모습 전체가 고통을 말하고 있었다. 나는 약속을 잡았다. 나는 그들이 주사를 놓는 동안 방에 머물러 있었고, 내 손을 그의 몸에 얹은 채 그의 맥박이 멈추는 것을 느꼈다. 병원을 나와 거리를 걸어가면서, 나는 그가 내 앞의 보도를 달려가는 걸 상상했다.


그날 밤, 그리고 그 후 많은 밤 동안, 나는 내 마음 속을 거꾸로 뒤집어 우리가 함께한 10년동안 내가 그를 독성 있고 암을 유발하는 무언가에 노출시켰을 수도 있는 순간을 찾았다. 더 잘할 수 있었는데. 더 잘했어야 했는데. 그 다음에는 성인이 된 후 처음으로 진정한 외로움이 찾아왔다. 나는 내 정체성의 일부를 잃은 것 같았다.


어떤 상실도 진공 상태에서 일어나지 않는다. 고양이와 개가 고통에 대해 감정적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 반대다. "이 사람들에게 이 동물들은 내가 결코 이해할 수 없는 의미를 지니고 있어요." 맥베티가 말한다. "저는 자녀가 자살한 사람들을 고객으로 접한 적이 있는데 이 개가 그들에게 남은 마지막이에요. 아니면 이 고양이가 죽은 자매나 부모, 배우자로부터 남은 유일한 것이기도 하죠." 결국은 당신의 이야기를 당신의 동물의 이야기로부터 분리하는 것이 그들을 돌보는 마지막이자 최선의 방법일 수 있다. 매번 다르지만, 매번 같다. 예를 들어, 맥베티는 처음에 너무 오래 기다린 사람들은 다시는 그렇게 오래 기다리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리고 거의 모든 사람들이 그에게 같은 말을 한다. 안락사 예약 중 어느 시점에서, 반려동물과 작별 인사를 준비하면서 고객들은 맥베티에게 감사의 마음을 가득 담아 돌아보며 말한다. "사람에게도 이렇게 할 수 있으면 좋겠어요."

1968년 창간된 미국의 격주간지로 뉴요커와 함께 뉴욕을 대표하는 매거진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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