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정학

트럼프의 소프트파워 장악

적나라한 힘의 시대에 MAGA 정권이 이룬 분위기 반전은 트럼프 대통령의 최대 승리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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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AP/뉴시스

2025.03.14 15:33

New Statesm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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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가 백악관에 돌아온 지 갓 두 달 밖에 되지 않았지만 세계 질서는 이미 크게 흔들리고 있습니다. '소프트파워'라는 개념을 창안한 조지프 나이는 최근 FT에 기고한 글에서 트럼프가 소프트파워의 중요성을 이해하지 못하며 트럼프 2기를 거치며 미국의 소프트파워가 크게 약화될 것이라고 주장했는데 이는 비단 미국 뿐만 아니라 세계의 진보 성향 논평가들이 공유하는 입장이기도 합니다.


저명한 정치사상가 존 그레이는 영국의 유서 깊은 진보 평론지 뉴스테이츠먼 3월 5일 기고문에서 전혀 다른 관점을 제시합니다. '워우크woke'로 대표되는 극단적인 리버럴 사상이 지배하고 있던 워싱턴의 분위기를 뒤집어 버린 것이야말로 가장 순수한 형태의 소프트파워라는 것입니다. 그레이는 이전부터 서구 엘리트의 극단적인 리버럴 성향이 '민중'과 점차 괴리되면서 오히려 서구 리버럴 질서를 무너뜨리고 있다고 지적해 왔는데 여전히 트럼프를 이분법적으로 바라보는 서구 리버럴의 주류적 관점에 비해 우리에게 더 생각할 거리를 제공합니다.


또한 이번 논평에서 그레이는 트럼프 2.0에 대한 유럽의 대응과 대만의 앞날, '딥시크 쇼크'의 진정한 영향 등에 대해 냉정한 평가를 내립니다. 이제 유럽의 당면 과제는 스스로가 만든 무정부적 세계에서 살아남는 것입니다.


1월 15일 영국 외무장관 데이비드 래미와 문화장관 리사 낸디가 영국 소프트파워 위원회를 출범시켰다. 시점이 흥미로웠다. 도널드 트럼프가 다시 백악관의 주인이 된 이후, 국제 문제에서 설득과 영향력이 통하던 시대는 가고 명령과 강압, 힘이 지배하는 시대로 접어들었다는 논의가 주를 이루고 있었기 때문이다.


현실은 그보다 더 미묘하고 역설적이다. 하드파워와 소프트파워는 완전히 구분이 가능한 상반된 개념이 아니다. 둘은 지속적으로 상호작용하며 때로는 모순되는 듯한 방식으로도 상호작용한다. 관세 위협은 하드파워와 소프트파워의 중간쯤에 위치한다. 트럼프는 국경 통제와 같은 비경제적 목표를 달성하는 데 이를 사용했으며 파나마, 멕시코, 캐나다는 빠르게 굴복했다. 이런 점에서 그는 이전 미국 대통령들보다 더 합리적인 행위자임을 입증하고 있다. 미국과 그 동맹국들은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서 엄청난 군사력을 소모했다. 예측 가능한 결과는 패배와 후퇴였다. 전략적 목표의 부재와 동맹을 저버린 행위로, 서구는 자신들이 신뢰할 수 없는 상대임을 스스로 보여주었다. '선택적 전쟁1war of choice'은 소프트파워의 행사였지만 부정적이고 자멸적인 종류였다.


키어 스타머 영국 총리는 워싱턴에서 가진 트럼프와의 정상회담에서 소프트파워를 구사했다. 환하게 웃는 트럼프에게 영국 방문을 초청하는 왕실의 편지를 전달한 것은 일견 성공을 거두었다. 그렇다고 트럼프가 장난스럽게 스타머에게 영국이 혼자서 러시아를 상대할 수 있겠느냐고 묻는 걸 막지는 못했다. 어떤 상징을 활용해 아첨을 하더라도 영국이 약하다는 사실을 바꿀 수 없다. 이는 수십 년에 걸친 국방비 부족의 결과일 뿐만 아니라 소프트파워를 영국의 국익을 해치는 방향으로 사용해 온 결과다.


차고스 제도2Chagos Islands를 모리셔스에 반환하려는 계획이 그러한 예다. 스타머는 이에 대해 트럼프 행정부를 설득한 것으로 보인다. 국제사법재판소가 해당 섬들에 대한 영국의 주권을 거부한 자문 판결이 이 계획의 근거다. 이 제도의 일부인 디에고 가르시아에 미국의 군사기지가 있는데 영국은 디에고 가르시아를 90억 파운드(13조 원) 이상을 주고 모리셔스로부터 장기 조차할 계획이다. 이는 차고스 제도에서 존재감을 키워가는 중국과 이란의 입지를 강화할 것이다. 이제는 사라지고 있는 유행인 리버럴 법률주의legalism의 기념비라 할 수 있는 이 계획은 무관심하거나 적대적인 세계에 영국의 도덕성을 과시한다.



영국의 에너지 정책 또한 부정적 소프트파워의 패러다임을 보여준다. 탄소중립을 달성한 영국이 지구 온난화에 미치는 효과는 미미할 것이며 다른 국가가 에드 밀리반드3의 기후 정책을 모방할 가능성은 희박하다. 밀리반드 본인도 독일의 선례를 따른 것이었는데 독일의 이른바 에네르기벤데Energiewende—석탄과 원자력을 버리고 '청정 에너지'로 전환하는 정책—는 독일의 산업 기반을 공동화空洞化시켰다. 다른 국가들, 특히 글로벌 사우스 국가들은 자신을 구원자라고 여기는 선진국 정치인들의 메시아적 허세가 아닌, 자국의 상황과 필요에 따라 에너지 믹스를 구성한다.


탄소중립의 주된 결과는 탈산업화로, 이를 목표로 채택한 국가들의 국방 능력을 감소시킨다. 재생에너지 공급망은 중국이 장악하고 있으며, 여기에 필요한 광물 중 많은 부분이 아프리카에 위치해 있다(이를 차지하기 위한 경쟁이 아프리카 곳곳에서 파괴적인 전쟁을 촉발했다). 그린란드를 "차지"하겠다는 트럼프의 결심은 기이하게 들릴 수 있다. 그러나 산업화의 다음 단계에 필요한 물질이 대규모로 매장돼 있는 몇 안 남은 장소 중 하나가 그린란드라는 트럼프의 견해가 틀린 건 아니다. 거대한 AI 데이터 센터들은 에너지에 굶주린 괴물들이다.


백악관 대통령 집무실에서 고성이 오가는 해프닝이 벌어지기 전, 트럼프는 우크라이나가 통제하는 영토의 광물 매장지에 대한 미국의 부분적 소유권을 조건으로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과 계약을 체결하려고 했다. 우크라이나 지도자를 잡으려고 잘 만들어놓은 덫이었을 이 순간을 두고 트럼프는 "멋진 텔레비전" 장면이 될 것이라 표현했다. 이제 어떠한 상황도 불가능하지 않다. 젤렌스키가 쫓겨나게 될 수도 있다. 키이우에 더 순종적인 정부가 들어서면 푸틴과 트럼프는 우크라이나의 천연자원을 서로 나눠먹을 수 있을 것이다. 이미 북극에서 러시아와 미국의 협력 가능성을 거론하는 보도가 있었다. 녹아내리는 북극에 새로운 해상 항로를 개설하는 것도 포함된다. 기술의 발전에 의해 추동되는 자원 전쟁과 강대국 동맹의 새로운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트럼프가 우크라이나를 팔아넘겼다는 비판과 함께 이를 1938년 뮌헨 협정이 비견하는 이들이 많았다. 당시 나치 독일에 대한 유화책은 2차 세계대전이라는 재앙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보다 적절한 역사적 비유는 유럽과 세계를 분할했던 얄타 회담이다. 1945년의 얄타 회담 이래 처음으로, 미국은 2025년 2월 국제 안보 문제에 대해서 러시아와 한편이 되어 유럽, 영국, 캐나다 등의 서방 국가들에 맞섰다. 러시아의 침공을 비난하는 유엔 결의안에 대해 반대표를 행사한 것이다. 80년 전에 자리 잡은 세계 질서는 종말을 맞고 있는 게 아니다. 의도적으로 전복되고 있다.


트럼프는 미국의 이익에 맞게 다극화된 국제 체제를 구축하고 있다. 우크라이나가 푸틴과의 자원 거래에 이용되는 장기말이라면 시진핑과의 무역에 관한 '그랜드 바겐'에서 대만이 희생양이 되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다. 가자Gaza의 운명은 미국의 사우디아라비아와 이스라엘과의 관계를 우선시하는 역내 합의로 결정될 것이다. 이러한 구상에 어느 정도의 오만함이 내재되어 있음은 굳이 말할 필요도 없다. 다극화된 경쟁은 지극히 위험한 게임이다. 리얼리티 TV 프로그램 연예인 출신인 트럼프는 본인이 국제정치에 재능이 있다고 생각하지만 푸틴과 시진핑이야말로 '레알폴리틱4realpolitik'의 대가들이다.


3월 2일 스타머가 주재한 랭커스터하우스 정상회의는 불편한 사실에 대한 간략한 언급으로 마무리되었다. 유럽은 미국의 지원 없이는 우크라이나에서 러시아와 맞설 수 없으며 미국은 지원을 제공하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이다. 현재의 국제 제재에도 불구하고 러시아는 소모전에서 결정적인 자산인 강력한 군사 총동원 체제를 구축했다. 유럽의 재무장은 재산업화를 전제로 하는데 진정으로 미국으로부터 독립적이 되는 게 목표라면 엄청난 비용과 기간이 소요되는 사업이다. 게다가 정치적 의지의 문제가 있다. 정체성 정치로 분열된 국가들은 적에 대항하여 단일대오를 형성하기 쉽지 않을 것이다.



에마뉘엘 마크롱의 프랑스 '핵 방패' 확대 제안은 러시아가 이미 유럽에서 벌이고 있는 사보타주, 사이버공격, 암살 작전이 앞으로 몇 년간 확대되는 걸 막지 못할 것이다. '리틀 그린 맨little green men'—2014년 크름(크림)반도 침공 때 요충지를 점령했던 병력들처럼 러시아군 표식을 제거한 러시아 군대—이 수행하는 비정규전은 핵무기 대응 요건을 비껴갈 가능성이 높다. 게다가 소소한 정치적 문제도 있다. 전략적 자율성을 강조하는 신드골주의적 비전은 유럽 전역에서 극우가 득세하고 있다는 현실을 외면하고 있다. 마크롱은 간신히 정부를 구성할 수 있는 상태다. 마크롱 다음으로 국민연합(RN)의 마린 르펜이나 조르당 바르델라가 프랑스 대통령이 된다면 프랑스의 핵 방패에 무슨 가치가 있을까? 지난 2월 선거에서 관측된 친러시아 성향의 '독일을위한대안'(AfD)과 극좌 '좌파당Die Linke'의 주류 정치 진출이 계속된다면 독일은 핵 방패를 원할까?


어떤 잠재의식 수준에서, 유럽의 지배계층은 그들의 무력함을 깨닫고 받아들이는 것처럼 보인다. 앙겔라 메르켈의 안보 및 외교 정책 고문이자 유엔 주재 독일 대사였던 크리스토프 호이스겐은 2018년 트럼프가 독일의 러시아 에너지 의존에 대해 경고했을 때 이를 비웃었던 대표단 중 하나였다. 이번 뮌헨안보회의의 의장이었던 호이스겐은 JD 밴스 미국 부통령의 신랄한 연설 후에 공개적으로 눈물을 흘렸다. 그가 흐느끼자 유럽의 저명인사들로 구성된 청중은 박수를 쳤다. 그 모든 자만심과 허세의 이면에서, 유럽 엘리트들은 우엘벡5을 연상시키는, 피할 수 없을 것 같은 운명에 복종하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혀 있다.


지정학은 단지 자원에 관한 것만이 아니다. 그것은 신화myth의 전쟁이기도 하다. 지난 1월에 공개된 딥시크DeepSeek는 마치 유도탄처럼 월스트리트를 강타했다. 딥시크는 중국의 AI 모델로 비슷한 수준의 미국 AI모델보다 훨씬 적은 비용으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중국 수출이 금지된 종류의 고급 칩을 덜 사용하여 개발됐으며 무료로 다운받을 수 있다. 일각에서는 잘 알려지지 않은 중국의 헤지펀드에서 분사한 스타트업인 딥시크의 개발사가 중국 국가기관이 양성한 것일 수 있다고 의심한다. 딥시크 챗봇은 중국 공산당에 의해 차단된 모든 정보를 삭제하며 실시간으로 자체 검열한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딥시크는 상업적 기업이라기보다는 정보 작전처럼 보인다. 다시 말해, 소프트파워의 매우 효과적인 행사인 것이다.


딥시크가 가져온 진정한 충격은 자유주의 사회가 기술 혁신에서 권위주의 정권을 능가한다는 신화를 흔든 것이다. 차르 시대의 러시아, 독일 제국, 메이지 시대의 일본은 자유주의 체제가 아니었음에도 산업화에 성공했다. 대부분의 경우 이들 국가는 중국이 지금 그러하듯 영국과 미국과 같은 개방된 사회에서 발명된 기술을 수입하고 있었다. 중국은 딥시크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미국의 고급 칩 수출 제한에 자극받아, 중국은 서방에서 고안된 어떤 것보다 더 나은 AI 모델을 만들었다.


신화는 인간이 그들의 삶에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하는 이야기다. 과학이론처럼 반증될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러나 어떠한 사건이 발생하면 신화는 더는 쓸모없게 되기도 한다. 이것이 서구의 지배적인 신화에 대해 딥시크가 한 일이다. 서구적 가치의 일신교적 기반은 잘려나가 버렸다. 서구가 인종차별적 억압에 특별하게 공모했다는 신화가 주입되면서 서구가 이뤄낸 성취의 대부분이 지워졌다. 서구가 내재적으로 갖고 있는 기술적 우월성에 대한 전설만이 남겨진 성취의 전부였다.


중국의 '민족중흥' 신화는 더 오래 살아남을 수도 있다. 중국 사회의 감시와 억압의 갑각甲殼 이면에는 만성적인 부채, 청년 실업, 아노미 등 자유주의 사회의 많은 취약점이 포착된다. 하지만 지배 엘리트가 스스로의 역사와 전통에 대한 혐오에 사로잡히지 않았다는 데 중국의 강점이 있다. 중국의 지배 엘리트는 자국민에게 중국 문명이 서구 문명보다 우월하다고 가르친다.


여기서 도널드 트럼프가 등장한다. 그의 압도적인 선거 승리는 유권자의 상당수가 미국 문명을 비방하고 조롱한 진보 이데올로기를 거부함을 보여줬다. 미국적 정신의 깊은 곳을 건드림으로써 트럼프는 진보주의적 표류의 무기력한 세월 동안 억압되었던 도취적 에너지를 방출시켰다. 그가 이룬 분위기 반전은 가장 순수한 형태의 소프트파워이며 지금 이를 막을 수 있는 건 없다. 미국 진보 진영은 결코 상상하지 못했던 반전에 충격을 받아 인지적 붕괴에 빠져 있다.


그러나 도취감은 빠르게 사라질 수 있다. 스티브 배넌이 일론 머스크를 "진정으로 사악하다"고 비난하면서 내셔널리즘 포퓰리스트와 테크노미래주의자techno-futurist들의 MAGA 연합이 분열되기 시작됐다. 연방 부채가 산사태처럼 쏟아질 위험이 모든 것 위에 드리워져 있다. 트럼프의 '레짐 체인지'는 서구의 퇴폐와 쇠퇴의 또 다른 단계였던 것으로 드러날 수도 있다. 결과가 어떻든 트럼프의 영향은 돌이킬 수 없을 것이다. 정부효율부(DOGE)를 통해 머스크와 그의 Z세대 게릴라 군대는 체계적으로 현대 행정국가를 해체하고 있다. 과거 진보적 사회공학의 도구였던 정부가 이제는 디오니소스적 초자본주의의 조력자로 재편되고 있다. 과거 보편주의적 이데올로기의 매개체였던 미국은 이제 미국 자신에 대한 비보편적인 사상을 내세우고 있다.


트럼프의 역설은 '팍스 아메리카나'가 끝났지만, 미국은 그 세계적 우위를 되찾고 있다는 것이다. 냉전 후 리버럴들은 그들의 숙적을 스스로 불러왔다. 허영심에 의한 전쟁에서 소프트파워를 낭비하고, 무분별한 녹색 에너지 성전으로 산업을 파괴하며, 반서구적 서사를 앵무새처럼 따라하고, 하드파워 군사력을 구축하는 것을 소홀히 하며 수십 년을 낭비함으로써, 그들은 스스로를 무력하게 만들었다. 이제 당면한 과제는 자기파괴적인 리버럴들이 만든 무정부적 세계에서 생존하는 것이다. 좋든 싫든, 트럼프의 미국은 유일한 현실이다.

1913년 창간돼 케인스, 버트런드 러셀, 조지 오웰, 버지니아 울프 등이 기고했던 전통 있는 영국 진보 주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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