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페미니즘 이후의 페미니스트들: 혁명가에서 현실주의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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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Anna Shvets

2025.03.14 15:33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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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래 들어 전통적인 여성상을 추구하는 움직임이 미국 등지에서 주목을 받는 등, 2010년대 세계를 휩쓸었던 페미니즘의 열기가 이제는 한풀 꺾인 듯 보입니다. 페미니즘의 목표가 달성되었기 때문도 아니고 페미니즘의 문제 제기가 잘못되어서도 아닙니다. 그보다는 여성들이 '원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당시의 주된 메시지가 제대로 실현되지 못했기 때문으로 봐야 할 것입니다. 낙관했던 미래가 오지 않은 오늘날의 페미니즘을 '포스트페미니즘'이라고 부를 수 있겠습니다. 어떤 여성들은 만성 질환 등의 취약한 여성 건강 문제에 천착하기도 하고 또 어떤 여성은 '신성한 여성성'이라는 신비주의로 도피하기도 합니다. 희망을 포기하고 불공평한 시스템에서 자신만의 이득을 추구하는 여성들도 나옵니다. 현대 문화와 여성 문제에 대해 섬세하고 솔직하게 글을 써온 그레이시 소피아 크리스티는 미국 시카고의 문예지 더포인트The Point에 기고한 에세이에서 이러한 포스트페미니즘의 갈래들을 다룹니다. 흥미롭게도 필자는 제인 오스틴의 작품으로 돌아가 현실주의적 페미니즘의 가능성을 모색합니다. 여성이 실제로 경험하는 현실을 인정하고 그 안에서 의미 있는 변화를 모색하자는 것입니다.


뉴욕에서 딱 한 번 보냈던 여름, 찌는 듯 무더웠던 그 여름에 사기를 당한 적이 있다. 급하게 아파트를 구해야 했던 나는 친구의 친구와 메시지를 주고받았다. 이내 정신을 차려보니 돈이 오가고 있었다. '오간다'는 표현이 적절하지는 않은 것 같지만. 제 시간에 돈을 보냈지만 돌아온 것은 없었다. 아파트 열쇠도, 적당한 투룸의 절반도, 분노에 찬 내 물음표에 대한 답변도,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 내 기준에서는 큰 돈이었고, 경찰서로 가는 건 창피했다. 아버지를 찾아가는 건 더 수치스러웠다. 그 돈을 메꾸기 위해 남은 여름 동안 남자들에게 억지로 관심을 보이며 저녁을 얻어먹었다. 이 이야기에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두 가지다. 첫째, 사기를 당하는 이유는 그것을 믿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둘째, 사기당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 당황스러우면서도 복수심이 차오르는 격분 상태가 되어 모든 것이 허용되는 집요한 약자의 윤리를 받아들이게 된다. 보상을 얻기 위해 저지르는 사기에 죄책감 따위는 없다.


포스트페미니스트 시대를 살고 있다는 말을 점점 많이 접하게 된다. 시대순으로는 페미니즘 이후를, 철학적으로 보자면 페미니즘을 넘어, 페미니즘을 폐기하는 시대라는 뜻이다. 2010년대의 유명한 스타 페미니스트들이 변하고 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작가 겸 활동가 리나 더넘1Lena Dunham은 한때 자신이 주도하던 담론을 버리고 의사 진단서를 받아 병상에 누워버렸다. 여성 참정권 운동가에게서 영감을 얻은 걸보스2 협업 공간 더 윙The Wing의 설립자 오드리 겔먼Audrey Gelman은 '위치는' 브루클린이지만, '시골... 감성을 살린' 홈웨어 매장을 열었다. 독서하는 배우이자 유엔 여성 친선 대사인 에마 왓슨Emma Watson은 남녀평등보다 유일하게 좋은 일은 성스럽게 여성스러워지는 것임을 깨달았다. 그녀는 지난 해 생일날 인스타그램에 게시물을 올렸다. "서른 세 번째 생일이네요. 스물 아홉이 되기까진 토성 귀환3Saturn Return의 개념조차 몰랐는데 말이죠. 오늘은 기분이 (나비 이모티콘)이에요. 나와 같은 마녀들에게 고마움을 전합니다."


포스트페미니즘이라고 하면 흔히 겔만의 새로운 고객층이자 1950년대, 이른바 미국 산업 중흥 시대의 코스프레를 가정으로 다시 가져와 스텝포드4Stepford 가족을 위한 바느질로 진보를 무력화하는 전통적인 아내tradwife가 떠오른다. 지겹도록 언급되는 여성상이지만, 온라인에서 이들과 똑같이 분류되는 그녀의 자매들은 어떨까? 디톡스 상품을 찾아다니는 만성 환자, 중세 오두막부터 오늘날 툴룸Tulum에 이르기까지, 케타민에 취해 있는 여성 샤먼, '소녀'라고 하기에는 너무 커버렸고, 세속과 격리된 수녀원에서 소명 의식을 의심받는 수녀, 여성혐오라는 레몬을 자신을 위한 레모네이드로 만들 수 있다고 확신에 찬 완전한 사기꾼까지, 이들 모두는 스스로를 거대한 페미니스트 조직의 피해자나 생존자로 여긴다는 한 가지 공통점 말고는 서로 연관성이 없어 보인다.




여성은 언제나 거짓말과 특수한 관계가 있었다. 우리 여자들은 생존을 위해 거짓말을 자주 이용했다. 하지만 여성 다수에게 자기기만의 기술을 처음으로 소개해준 것은 바로 개인주의적이고, 역량 강화를 강조하고, 특히 소울사이클5SoulCycle 등장 이후 숨가쁘게 달리게까지 만든, 2010년대의 야망 가득한 페미니즘이었다.



당시 여성들은 고귀한 도덕 원리를 따랐는데, 그것은 묻는 대상에 따라 적응할 수 없는 것이기도 했다. 우리 여자들은 상황에 순응한다는 원칙보다는 당위성의 원칙에 따라서 살려고 노력했다. 우리가 양보할 수 없는 전제는 아동도서에서도 찾을 수 있었다. "남자와 여자는 사소한 차이를 제외하면 거의 똑같이 만들어졌다"거나 정반대 결과를 받은 힐러리 클린턴을 인용하며 여자는 "무엇이든... 대통령까지도" 될 수 있다고 한 2019년의 어느 책처럼 말이다. 여성혐오는 여성이 개입하지 않는 이상 끊임없이 돌아가는 순환 고리와 같아서 사회 전반에 걸쳐 있고 사회가 우리 여성에게 기대하는 모든 것에 각인되어 있다가 우리가 그 기대에 부응할 때마다 정당화되었다. 우리의 행위와 말이 여성혐오를 강화할 수도, 약화시킬 수도 있기 때문에, 페미니스트들은 적절한 표현과 행동으로 가부장제 개념에 맞섰다. 우리는 속도 위반에 걸렸을 때나 면접 자리에서 추파를 던지지 않았다. 남성이 1달러를 벌 때 80센트만 벌어도 데이트 비용은 똑같이 부담했다. 공짜 술처럼 현재 시스템이 지닌 최소한의 이점을 누릴 때도 연계 책임을 느껴야 했다. 페미니스트다운 행동을 통해 페미니스트 세상을 만들 수 있고, 수천 번의 작은 전투를 통해 결국에는 가부장제를 몰아낼 수 있다는 주장이 있었다. 그러나 여성이 다르게 행동해야 했던 그때도 여성혐오는 만연했다. 그 결과 갈등이 생겼고, 가끔은 개인이 대가를 치러야 했다. 결국 우리에게는 잘못을 알아차리기만 해도 그 잘못이 '강화될 것 같은' 공포증이 생겨버렸다. 추악한 진실을 논의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그 진실을 영구적인 것으로 만드는 데 집착하는 듯했던 것도 사실이다. 마치 그렇게 하면 생리통이 사라지기라도 할 것처럼, 2010년대는 엄청난 고통을 겪으며 참는 시대였다.


그리고 2020년이 되었다. 전화기에 귀를 대 보면 온라인 세상 속 여성들이 일제히 불행에 절규하는 소리를 감지할 수 있었을 것이다. 코로나19로 인한 봉쇄 정책으로 우리는 자기 삶과 반성적 거리를 둘 수 있었고, 틱톡은 과시와 질투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 많은 이들이 좋은 선택을 했음에도, 혹은 오히려 그 선택 때문에 느끼게 된 자기기만을 음모론의 언어로 표현했다. 당시 그들의 선택이 잘된 것으로 분류된 기준은 페미니스트라는 일종의 자격이었는데, 원칙은 고고하고 현실성은 부족해서 마치 당당하게 자기 발을 겨냥해서 총을 쏜 격이 되었다. 우리는 '안주'하지도 '서두르지'도 않았지만 아무런 결실도 맺지 못했다. 배우자보다는 일을 선택했지만 그 일이 우리를 선택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조언에 따라 난자를 냉동했지만 그 방법에 기댄 후에야 그 과정을 신뢰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할 만큼 한 결과 ... 우리를 기다린 것은 만성 피로였다. 새롭고 야심 찬 평등의 원칙을 따라 살았지만, 여성성이라는 오래되고 불공정한 규칙이라는 벽에 부딪혔다. 그사이 우리의 권리는 폐기되었다. 한 여성이 틱톡에서 촬영한 팟캐스트에서 부클레 소재 안락의자에 앉아 이렇게 말한다. "버티기에 지쳤어. 잠깐 쉬고 싶어 ... 여성으로서 성공만 바라보고 높이 올라갔어 ... 내가 나를 속인 걸까? 그럴 수도 있겠네."


진심으로 믿는다 해도 포스트페미니스트들의 '진실'은 가변적이다. 완전히 불순하지는 않지만 이들의 동기가 순수하지는 않다. 포스트페미니스트들이 마치 아이폰 카메라로 박제된 극장에서 연기를 하는 것처럼 보일 때가 너무 많다. 소셜 미디어에서는 여성을 대상으로 하는 '망상이 해결책이다delulu is the solulu'라는 조언이 후렴구처럼 돌아다닌다. 하지만 여성에게 더 나은 미래를 위해 살라고, 현실과 거리를 두고 현실에 참여하지 말라고 한다면 여성들이 이중사고6doublethink의 기술에 능숙해진다고 해도 놀라운 일은 아니다. 갈라진 지퍼의 양쪽처럼 이상과 현실이 접점을 찾지 못하면, 여성은 양 끝을 틀어쥐고 있을 수밖에 없다. 아니면 애초에 틈이 없는 것처럼 행동하거나. 우리가 사는 세상과 우리가 원하는 세상 사이에는 항상 오늘만큼의 시차가, 현재만큼의 간극이 있을 것이다. 포스트페미니스트가 그 간극을 헤쳐나가거나 도피하려고 과거의 오랜 고정관념을 받아들이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포스트페미니스트로부터 우리가 배울 점이 있을지도 모른다. 현실에 대한 다른 태도, 즉 극단주의나 마법으로 향하는 첫 번째 신호를 따라갈 만큼 진실을 갈구하는 사람들이 만족할 수 있는 태도를 되찾거나 발굴하려면 무엇이 필요한지에 대해 말이다. 몸에 맞지 않는 의상을 받아들이는 포스트페미니스트와 현실을 인식하지 못하고 맹목적으로 나아가는 밀레니얼 세대 선구자들 사이에는 분명 중간 지대가 있을 것이다. 오래된 양식에서 지금도 활용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 보존하면서 우리의 새로운 경험을 비교검증하는 것이 페미니스트 현실주의 아닐까. 널리 사랑받는 책의 첫 구절이 "누구나 인정하는 진리다it is a truth universally acknowledged"로 시작해서 현실적이면서 로맨틱한 사랑 이야기로 결말을 맺는 데는 이유가 있다. 문학에 리얼리즘이 도입되면서 여성은 나쁜 존재가 아니라 복합적인 존재라는 것이 드러났다.




내가 비행기를 탈 때마다 쓰는 속임수를 이야기해 보겠다. 나는 캐리어를 대신 들어줄 남자를 미리 점찍어놓고 통로에서 캐리어 때문에 힘든 척을 한다. 파란색 스웻셔츠를 입은 그는 이미 나와 눈이 마주쳤다. 행동에 옮기기도 전에 그의 몸은 긴장 상태다. 무릎에 얹어 두었던 서류 가방을 치우기까지 한다. 그래도 그가 일어서서 나를 구해줄 때까지 내가 캐리어를 들어올리고, 낑낑거리거나 허우적거리는 팬토마임은 계속된다. 우리 모두 여자가 약하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 나는 내 연약함을 일종의 개인적 결함처럼 연기한 뒤 옆구리에 통증을 느끼며 열 시간을 앉아 있어야 한다. 하지만 내 키와 힘은 보통 수준이다. 정서적 문제가 있을 뿐 신체적 결함도 없다. 머리 위 짐칸이 구조상 대다수 여성에게 너무 높은 걸 어쩌란 말인가.


나처럼 나쁜 페미니스트7가 되지 않고도 거짓된 외관을 벗어던질 방법을 찾은 여성도 있다. 수퍼모델 벨라 하디드Bella Hadid는 재작년 여름 몇 달 동안 모습을 감췄다. 팬들은 재활원에 들어갔다고 의심했지만, 사실 그녀는 문학 작품에서나 볼 법한 빅토리아식 소파8fainting couch에 누워 있었다. 나중에 그녀는 투병하는 모습을 다양하게 담은 사진을 인스타그램에 공개했다. 고급스러운 환경을 배경으로, 혹은 그녀의 건강관리 코치의 보살핌 아래 담요로 몸을 감싼 채 웅크리고 있는 벨라 하디드의 사진이 올라왔다. 연약하면서도 화려해 보이는 사진 속 그녀의 기진맥진한 몸은 비쩍 말라 있었다. 복부를 드러낸 모습, 고급스러운 라일락 빛으로 눈 밑이 부어오른 채 정맥주사에만 의지해 바닥에 매어 있는 그녀의 모습은 그 누구보다도 아름답거나 성스러워 보였다.



그녀는 사진 아래 캡션에 만성 라임병chronic Lyme과 라임 동시감염병Lyme co-infections을 앓았다고 썼다. 이 두 가지 진단명은 혼동하기 쉬운데 진드기 매개 세균 질환으로 항생제로 치료하는 라임병Lyme disease, 또는 라임병 환자 중 20%에서 발생하는 치료 후 라임병 증후군post-treatment Lyme disease syndrome (PTLDS)과 아무 관련이 없을 수도 있다. 사실 이 두 질병은 의학계의 역사에서 대체로 유사과학이나 심리적인 사기쯤으로 여겨온 것으로, 논쟁의 대상이자 검증할 수 없는 현상에 가깝다. 기껏해야 제대로 연구되지 않았거나 그 속성이 잘못 알려진 일련의 실제 증상에 불과하다. 통계적으로 가능성은 낮지만, 벨라의 어머니와 남동생도 라임병을 앓았다. 그리고 저스틴 비버도 같은 병을 앓았다. 벨라 하디드는 라임병 치료를 위해 100일간 일을 쉬었다. 그녀는 이렇게 썼다. "보이지 않는 고통을 15년 동안 겪었지만, 신의 뜻에 따라 평생 동안 사랑을 가득 채워 전파할 수 있기에, 그리고 난생 처음으로 나 자신에게 충실할 수 있었기에 충분히 가치 있는 시간이었어요."


내 친구들은 대다수가 병가 중이다. 이 녀석들은 스스로를 소개할 때 진단명을 먼저 밝힌다. 한때 여성 사업가, 잘 나가는 자본가였던 그들은 개인 휴가를 제외하면 몇 년 동안 일을 쉬지 못했다. 이들의 증상 다수가 실재하고, 검증 가능하며, 일반적인 의미에서 의학적인 질병이다. 다른 증상들은 사실에 기반한 것부터 꾸며낸 증상 사이의 스펙트럼에 걸쳐 있다. 이 스펙트럼에서는 희귀 증상이 흔해지고, 스스로 깨달은 것처럼 착각하는 자가 진단이 난무하며, 증명이 불가능에 가까운 배제 진단9diagnoses of exclusion이 마치 새로운 이름표를 붙여도 되는 막강한 허가증처럼 취급된다. 해리성 정체감 장애, 간기울결肝氣鬱結, 점성 담즙, 투렛 증후군, 벨라 하디드의 언니 지지Gigi Hadid처럼 섭식장애를 일으킨다고 하는 하시모토병, 히스타민 과부하, 만성피로, 엘러스-단로스Ehlers-Danlos 증후군, 일어설 때 어지럼증을 유발하지만 알려진 어떤 이유로든 기절 중인 모습을 찍고 싶어지도록 유도하지는 않는 기립성 빈맥 증후군postural orthostatic tachycardia syndrome (POTS), 곰팡이 독성, 칼슘막calcium shell 등이 그 이름표에 속한다. 중금속 노출, 신경계 실조증, '기능 정지', 전정 편두통, 코티졸 상승, 미토콘드리아 장애, 장누수, 운동 불내성, 브레인 포그10brain fog도 이에 속한다. 땀에서 매캐한 냄새가 나거나 눈이 붓는 것처럼 의료화11medicalization 체계에 포함될 수 있는 새로운 항목들은 항상 내가 보기에 삶의 대가, 몸이라는 걸 가진 대가로 보이는 증상이었다. 향정신성 약품을 제외하고 승인된 치료법은 종종 20대들 사이에서 온라인으로 퍼지는 기능의학이나 전인의학(holistic medicine)에 속한다. 기생충 디톡스12, 피마자유 팩, 아드레날 칵테일,13 온라인 기 치료14reiki에 이르는 다양한 '프로토콜'은 인생을 완전히 바꾸거나 시간을 들여 삶에서 도피하게 만들 수 있다. 이 질병들의 대부분은 성별이 부여된 것이다. 남성들은 이 병에 거의 걸리지 않는다.


자, 경고음이 울린다. 기시감이 느껴지지 않나? 질병은 혼란을 여성 고유의 방식으로 표현하는 것이고, 무례한 사회와 사랑 없는 결혼, 쾌락 없는 성관계, 또 한 번의 임신, 객관적으로 봐도 메스꺼운 상황을 피하기 위한 의학적 허가서이다. '개를 데리고 다니는 여인15'처럼 '아픈' 여성이 요양원이나 휴양지로 떠나 바람을 피우는 문학 장르도 있다. 스위스에서 요양 치료를 받는 이야기, 의자에서 다른 의자로 자신을 옮겨 달라고 요구하는 빅토리아 여성들처럼 '약점을 강점으로' 삼는 방식은 결코 유행이 끝나지 않는다. 프리다 칼로의 부상은 진짜였지만, 그녀는 바람둥이 남편을 묶어두려고 일부 사람들이 뮌하우젠 증후군16으로 추측하는 것을 이용했다. 그녀의 남편은 프리다가 한번 더 수술을 하기로 결정한 후에야 완전히 자유로워질 수 있었다.


여자들은 정말로 아프다. 여성이 처한 의학적인 문제에 대한 연구는 부실하다. 의사들은 여성을 믿지 않는 경향이 있다. 생리통에 효과적인 치료법은 인류사의 의제에서 화성에 가는 것보다 우선순위가 낮다. 일본에서 변화하는 여성의 역할을 다룬 다니자키 준이치로(谷崎潤一郎)의 소설 '세설(細雪)'의 마지막 문장은 이렇게 끝난다. "결국 설사는 그날도 멈추지 않았고, 기차에 오르고 나서도 여전히 계속되었다."17 설사를 꾸며낼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내 친구들의 두드러기 증상도 가짜가 아니다. 내 눈에는 보인다. 머리도 점점 빠져간다. 하지만 나는 친구들의 모든 만성적인 건강 문제를 그들의 오래된 불만과 떼어놓고 생각하기가 힘들다. 저녁식사나 술 모임을 할 때마다 불평을 길게 늘어놓거나, 서로 병을 진단하거나, 이해하기 힘든 의학적 증상(그 해결책은 항상 자신을 더 상냥하게 들여다보는 것으로 귀결된다)을 풀어놓게 된다. 아마 진실을 말할 수 없다 보니 내면이 초조해지는 것이리라. 문자 그대로, 그리고 은유적으로도 야심 찬 2010년 이후 아픈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서 있을 힘도 없다면 여성을 굳이 옹호해야 할 필요는 없다.


내 경우 20대 초반에 처음에는 오른쪽 다리, 나중에는 왼쪽 다리에 문제가 생겼다. 정밀검사에도 잡히지 않는 건염이 동시에 생긴 난해한 사례였다. 여기에는 '통증 증후군'이라는 병명이 붙었다. 나는 통증 때문에 몸져누워야 했고, 계단과 특정 자동차 뒷좌석을 피해야 했다. 춤을 출 수도, 하이힐을 신을 수도, 낮은 의자에 앉을 수도 없었다. 통증은 결국 사라졌지만 정밀검사에 대한 강박은 그대로 남았다. 엑스레이, MRI는 내 근육과 뼈를 보여주는 훌륭한 혁신 기술이었지만 내 고통을 명확하게 해명해주지는 않았다.


내 슬개골이 거짓과 진실을, 나의 정신 나간 상태와 나의 이성을, 아픈 관절과 옛날의 불행을 휘저어놓은 성운처럼 보이기 시작했고, 중력이 그 성운을 머리에서 완전히 아래로 끌어내린 것 같았다. 내 무릎이 선언하기로 한 내면의 위기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곧 있을 결혼은 샴쌍둥이를 분리하는 고된 절차와 정반대로 두 사람을 하나로 붙이는 과정과 같아서, 최선의 경우라도 다소 폭력적으로 보였다. 비자 문제, 입사 지원, 작가가 되고 싶었다는 것을 인정하기 꺼렸던 문제, 이런저런 일들을 겪었다. 그 시점에 이사를 했고, 나는 이사간 집의 침대에 누워 약혼자에게 무엇을 짐으로 싸야 하는지, 무엇을 어떻게 접어야 할지 알려주었다. 그때 나는 네팔에서 단식투쟁 중인 승려, 빛나는 폐결핵 환자, 여왕이 된 기분이었고, 잠깐 동안 내 무릎이 진정 원하는 것은 휴식이 아니라 권력이 아닐까 생각했다.




아픈 친구들에 더해 마녀가 되어가는 친구들도 있다. 그들은 매월 세이지를 태우는 연기 속으로 더 깊이 빠져든다. 그 안에서 주기를 기록하고, 별을 도표에 기록한 뒤 천사의 수를 세며 황홀경에 취한다.


대중 사이에서 인기가 높아지는 여성 샤먼의 기조는 현대 여성이 기업 페미니즘18 때문에 남성적인 면에 따라 살아왔기에 불행하다는 것이다. 그녀의 여성성은 상처받으며, 기억상실에 걸린 것처럼 선조의 지식으로부터 분리되어 있다. 그녀는 지치고, 갇혀 있고, 창조성이나 성적인 면에서 제 기능을 하지 못한다. 그녀의 육감은 장내 미생물처럼 상해 버렸으며, 제일 강력한 프로바이오틱스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녀는 더는 다른 여자들을 위해 전진할 방법을 찾지 않아도 된다. 그녀는 돌아가야 한다.


여성 샤먼, 즉 성스러운 페미니스트에게는 동족이 있는데, 바로 50년대 코스프레를 하는 전통적인 아내, 유아용 티셔츠 차림에 헤어 리본을 달고 셀카를 찍는 뉴욕의 어른이 된 '소녀'다. 이들은 모두 분리주의자로서 여성 숭배를 조장하여 상처입은 자신감을 회복하려고 하며 스스로 부정했던 여자라는 것의 특혜를, 어쩌면 아무것도 아닌 것을 쓰라리게 갈망하는 마음을 표현한다. 그래서 이들은 진자 운동하듯이 움직이면 반대 방향으로 과도하게 노선을 수정한다. 자신은 멍청하고, 건방지고, 전통을 따르고, 미신을 믿는 '그냥 여자아이'일 뿐이다. 이렇게 반쯤은 모순적인 퍼포먼스로, 반쯤은 까불듯이 짜증을 내며 차이 페미니즘19difference feminism이 부활했다. 이번에는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여성 샤먼들이 보기에 말로 현실을 창조할 수 있다는 2010년대의 사상은 긍정의 언어에서 그 극단적인 형태를 찾아냈다. 여성은 성스러운 여성성 덕분에 자신이 출산을 위해 절개한 회음부가 다 낫지도 않은 상태로 복직하도록 강요당하는 변호사가 아니라 여신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이런 생각이 평범한 여자아이에게 영향을 미친 정도를 확실히 보여주는 예시를 '카다시안 패밀리'의 가벼운 언급에서 알 수 있다(당연히 코트니 카다시안20 이야기다). 여자가 성스러운 여성성을 회복하려면 따라야 하는 과정이 인스타그램에 떠돈다. 드럼 동호회에 가입하고, 기 치료를 받고, 업무 과부하를 피하고, '예쁜 파자마 세트를 입고', 월경 주기에 맞춰 난포기에는 데이트를 하고 황체기에는 카카오를 먹어야 하며, 직물 짜는 법을 배우고, 전생을 탐구하고, '의도적으로 독신이 되고', 약초 치료에도 발을 들여야 한다(이때 병든 여성이 갑자기 성스러워지거나, 성스러운 여성이 병에 걸린다). 심지어 골수를 먹고, 배리 부트캠프21 대신 필라테스를 등록하고(배리 부트캠프는 남성적인 운동이라 옳지 않다), 천체지도를 들여다보고, 합성향 캔들을 피하고, 다른 여성들과 함께 부드러운 담요를 덮고 힐링해야 한다는 말도 있다. 몸은 아무리 경미한 통증이라도 해석해야 할 지도이다. 예를 들어 요로감염urinary tract infection은 성적 불일치의 징후이고, 굳은 골반은 큰 트라우마의 징후이기 때문에 '척추 치료법'이 필요할 것이다. 신성한 여성 예술을 위해 툴룸, 코스타리카, 포르투갈로 떠나는 것은 녹초가 된 파티 걸에게 어울린다. 이 휴양지에서 제공하는 모임과 명상, 워크샵에서는 여성들이 누워서 무아지경으로 호흡하고, 몸이 가는 대로 춤추고, 성적 희열을 느끼고, 소리 목욕22을 하고, 목청껏 소리지르고, 바닥에서 몸부림치고, 꽃잎 속에 샤워를 하고, 고대의 '영적 깨달음'을 다운받고, 이집트 남수련23 차를 마시고, 크리스털이 함유된 오일24을 바르고, 환각 상태에서 이시스25에게 제물을 바친다.


여성 샤먼이 이를 모두 해내면, 그녀는 자신이 선택한 조건을 확언하고 자기 쪽으로 끌어들일 수 있다.


나는 오랫동안 이런 모든 행위가 확장된 홍보 전략이자 좌절을 다른 방식으로 표현하는 대처기전26coping mechanism라고 생각했다. 어려운 문제를 회피하고 어려운 선택 대신 고대의 주문을 통해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수단 말이다. 자유를 거부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그 덕에 대학 교육과 신용카드를 비롯한 여러 가지를 얻을 수 있지 않았던가. 영원히 소녀로 머물 수는 없다. 신비한 능력을 추구하면 궁극적으로 아직 끝나지 않은 현실 세계의 투쟁으로부터 유리될 뿐이다. 여성 샤먼들의 영상을 많이 보면 그들이 지상으로 내려와 남성 '부양자'를 유인하는 방법을, 한 번쯤은 주기보다 '받는' 상태가 되는 법을 가르쳐줄 것이다. 그리고 '공익광고: 페미니스트 운동은 사기다,' '밀레니얼 세대 여성은 속았다'라며 우리가 원래의 시작점으로 돌아왔다고 할 것이다. 이는 극단적인 경우에 속한다. 하지만 내가 아는 제일 의식 있는 여성들도 티 파티를 열고, 머리를 땋고, '안락한 삶'에 대해 조용히 설파하고 있다.


그리고 나는 자궁 치유 일정을 잡는다. 당연히 조사 목적으로. 보통 자궁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는다. 내 안에 비어 있는 그 기관이 중요하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으니까. 그렇지만 여성 치료사는 나를 침대에 눕히고 끈으로 내 자궁을 표시한다. 그녀는 손을 흔들면서 남성은 매일 주기로 달라지지만 여성은 일주일 주기로 달라진다고 설명한다. 내가 스스로에게 맞지 않게 남성들의 계략에 놀아난다는 사실을 간과했다는 것이다. 지침도 알려주었다. 생리 중에는 잠을 더 많이 자고 그다음 주에 맹렬하게 글을 쓸 것. 감정 발산이 필요한 날에는 지금까지 그랬듯이 최대한 울 것. 그녀의 손이 내 몸 오른쪽 아래에 닿자 내 다리가 발길질을 한다. 근육이 당겨서 상당히 불편하게 느꼈는데 소화불량으로 착각했던 곳이었다. 그녀는 그 지점에 오래 머문다. 나중에 설명하기로는 그 위치에 난소가 있단다. 신체적으로도, 은유적으로도 내 난소에 문제가 있다고 한다.


여성 억압의 역사에 해박한 나도 내 난소가 거기 있는지는 몰랐다. 더 위에 있는 줄 알았는데.




내가 아는 가장 급진적인 포스트페미니스트 중 전통에 더 가깝지만 색다른 방식으로 신성함을 추구하는 이는 내 친구 핼리다. 핼리는 미주리 주의 은둔 수녀원에 들어갈 예정인데, 그곳에서는 진짜 거울을 소유할 수 없기 때문에 내리는 눈에서 자기 얼굴을 감싼 흰 수녀복과 비슷한 형태를 발견할 것이다. 기도하고, 일하고, 미사드리고, 나무 판자 위에서 잠들고, 한 끼만 먹고, 자유 대화는 한 시간만 허용되며, 한 달에 편지 세 통만 집으로 보내고, 1년에 두 번 방문을 받고, 소설이나 영화는 허용되지 않는 일상을 살 것이다. 열렬한 독서가이면서 한때 배우를 꿈꿨던 핼리에게는 마지막 규율이 고통스러울 것이다. 핼리는 여고시절 공연한 뮤지컬에서 남자 주연으로 캐스팅되었다. 그녀는 로마시대 웅변가의 목소리를 가졌다. 군대를 이끌거나 수녀원에서 봉기도 일으킬 수 있는 목소리였다. 하지만 이번에는 특정한 여성상이 된다는 일을 뛰어나게 수행하고 싶은 마음에 입회한 것이기에 그럴 일은 없을 것이다. 그녀는 아버지 문제 때문에 제대로 데이트를 해본 적이 없다. 45킬로그램가량 살을 빼면서 여성에게 가능한 미래에 대한 흥미도 함께 사라졌다. 그녀는 진심을 담아 자신의 선택을 해명하는 긴 편지를 소셜 미디어에 올렸다. "작고 연약한 식물 같은 나는 세상의 끊임없는 풍파가 너무 버겁다."


핼리는 키도 크고 힘도 세다. 연약하지도 얌전하지도 않다. 조심스럽지만 사기가 아닐지, 관심을 얻기 위한 술책이 아닐지 의심된다. 적어도 그랬으면 좋겠다. 작년만 해도 핼리는 여성에게 프리랜서로 일하는 법을 가르치면서 성공적인 걸보스 전략을 실행하고 있었다. 링크드인에는 과장된 문구가 넘쳤다. 졸업반 때 그녀는 누구도 만나본 적 없는 존이라는 이름의 원거리 남자친구를 주인공으로 한 애정 판타지를 내게 보여주곤 했다. 지어낸 것으로 보이는 연애 메일, 자신이 나를 낚은 것처럼 존이 기름지고 반짝거리는 연어를 잡은 사진도 보여주었다. 그때 핼리의 미소에 서린 외로움이 기억난다. 졸업 후 나는 핼리에게 문자를 보냈다. 존은 잘 지내? 내가 하트 이모티콘을 곁들여 물어봤다. 핼리는 편리하게 존이 자동차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고 썼다. "그 이야기는 하고 싶지 않아." 수녀가 되면 앞으로는 그럴 필요도 없을 거다. 존은 우리 모두와 마찬가지로 실재하는 동시에 실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핼리는 여성이 되는 모든 방법 중에서 타당하고 시기적절한 이유로 가장 솔직한 방법을 선택했다. 수녀들은 그녀가 무엇을 포기하게 될지 정확히 알려준다.


수녀원 입회 전, 서로 다시 볼 수 없게 되기 전, 우리는 마지막으로 점심식사를 함께 하면서 그녀가 과연 좋은 사람인지, 양인지, 아니면 늑대인지 고민해본다. 내가 가장 궁금한 것, 즉 그녀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지 여부는 묻지 않는다. 이후 나는 다른 사람에게 지금껏 그런 대화는 난생 처음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내 깨닫는다. 올바르게, 공정하게, 도덕적으로 사는 데 집착하면서 현실의 추한 진실은 말하지 않고 맴돌게 한 채 이런 대화를 현대의 여성, 그리고 소녀들과 수도 없이 해왔다는 것을.




2002년에 출간된 '남자들은 왜 여우 같은 여자를 좋아할까Why Men Love Bitches'라는, 제목부터 저의가 의심스러운 책이 2021년 들어 서서히 베스트셀러 목록에 오르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나는 새롭게 등장한 악명높은 사기꾼의 전기영화를 봤는데 이들은 애나 델비27엘리자베스 홈즈28로 모두 여성이었다. 그후에 읽은 캐롤라인 캘러웨이의 책 '사기꾼Scammer'도 재미있었다. 한편 내 스마트폰 알고리즘은 '허영의 시장29Vanity Fair'의 주인공 베키 샤프처럼 복수에 나서는 여성 모험가라는 여자아이의 원형에 맞춰지고 있었다. 자신을 '현실주의자'로 여기는 사기꾼은 우리가 포스트페미니스트를 묘사하는 마지막 유형으로, 나머지 유형들만큼이나 오래된 것이다. 사기꾼들은 인스타그램에서 여성적인 소통 스타일을 유리하게 이용하는 법을 가르치고, 장난으로 만든 곡이었지만 원곡자에게 대형 레코드사와의 계약을 성사시켜준 "금융맨을 찾고 있어"는 귀에 쏙 들어올 노래를 부르고, 면접이나 속도 위반 단속에서 자신의 성을 당근처럼 흔드는 법을 자세히 알려줄 것이다. 이런 사람이 정당화될 수 있냐고? 우리가 위로 올라가려는 약자일 때는 우리의 행동이 항상 부정해 보일 것이다. 인생에서건, 포커 게임에서건 패가 안 좋을 때 이기는 유일한 방법은 허세를 부리는 것이다.


이 포스트페미니스트 집단은 환각버섯의 마이크로도즈30microdosing가 인기를 끌었던 것처럼 미량의 진실을 주입한다. 나는 우연히 짧은 틱톡 영상들을 보다가 평범한 여성이나 여자아이의 입을 통해 진실과 거짓을 기이한 방식으로 조합하는 솔직함과 시시함에 경악했다. 영상 속 이들은 대개 화장을 하면서 "가식적으로 살기 지쳤어"만큼이나 "아무도 들으려하지 않아"라고 자주 말한다. "예쁜 건 나중에 챙겨도 돼." "여자는 작은 남자가 아니야." "우리는 아침마다 테스토스테론이 혈관을 타고 흘러넘치지도 않아." 동영상을 많이 본 젊은 여성은 그 별난 행동을 방언처럼 받아들인다.


내 친구 몇 명은 틱톡에서 진실을 알리는 이들 덕분에 거창한 뜻이 담긴 말을 담아야 한다는 압박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었다. 친구들은 클립 속 소녀들처럼 고개를 끄덕이고, 눈썹을 치켜올린다. 그리고는 갑자기 우리는 덜 아프고, 덜 마녀 같아진다. 우리가 가진 한계나 초자연적 능력에 대해 스스로를 기만하지도 않고 브런치를 먹으며 서로를 속이지도 않는다. 우리는 눈물 연기를 했다거나 다이어트를 했다는 등의 죄를 고백하기 시작한다. 알러지를 극복하는 환자에게 의사가 하듯이 서로에게 진실의 주사를 놓아준다. 우리는 서로를 위한 체스판을 그려주어 한 번쯤은 스스로 행동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내가 어느 완고한 걸보스에게 생체시계를 언급하자 마치 내가 자기 목을 조른 것처럼 자기 목에 손을 갖다 대던 옛날 스타일과는 완전히 달라진 것이다.


하지만 버섯처럼 잘못된 마음가짐으로 먹으면 진실이 나쁜 경험으로 이어지거나 복수심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 어떤 영상은 이렇게 조언한다. 돈 같은 "물질을 남자들에게 요구하는 걸 두려워하지 마," 왜냐하면 "남자들은 당신에게 2초 안에 옷을 벗으라 할"테니까. 온라인의 여성 데이트 전략가들은 남성을 '새끼'라 부르고 이들 '코인꾼'들이 그런 일을 당해도 싼지 논쟁한다. 한 여성은 자기가 남자친구를 유혹하기 위해 만든 요리가 사실 자신의 요리실력이 아니라 써머믹스31로 만든 것이라고 말한다. 어떤 영상에서는 이렇게 묻는다. "남편감을 찾기 제일 좋은 나이는 몇 살일까요?" 대답은 이렇다. "일하기 지겨울 때요." 넷플릭스 리얼리티쇼에 나오는 사기꾼들은 여성이 처한 '현실'을 역이용해서 자신의 이익을 취할 수 있다는 가설을 여러 번 시험한다. 그녀는 우리 여자들의 경멸을 견뎌내고 초월하여 돈을 벌 것이다. 넷플릭스 리얼리티 쇼 '셀링 선셋'의 출연자 크리스틴 퀸은 거의 성공 직전까지 도달한다. 부동산업자인 크리스틴은 너무나 사악해서 보고 있자면 유쾌할 정도다. 헤어스타일, 코, 게다가 빌린 것이라고 시청자들이 의심하는 디자이너 의상까지, 그녀의 여러 면모는 가짜다. 그녀의 동료 대부분은 전직 접대부였거나 배우인데, 이들은 하나같이 가식을 떨고, 우스꽝스럽고, 탐욕에 굶주려 있다. 크리스틴은 동료들을 약간 가혹하게 대한다. 그런데 자격도 없는 그녀가 시즌 3에서 갑자기 큰 성공을 거둔다. 그녀는 자신이 팔던 종류의 저택과 아기까지 얻었고, 게다가 남편은 불안정한 성격의 소유자이고 테크 버블에서 빠져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아서 크리스틴이 마음껏 주무를 수 있는 사람이었다. 모든 여성이 원하는 모습은 아니지만 크리스틴은 딱 이런 것을 원했다. 그녀는 승리를 기념하며 '제일 쎈 *이 되는 법(How to Be a Boss B*tch)'이라는 책을 출간했다. 그러던 그녀가 느닷없이 조난 신호를 보내기 시작했다. 400유로짜리 확언 캔들, 장미 스머지 스틱32을 주문했는데 두 세트에는 '정화와 보호'라는 주문이 새겨져 있었다. 몇 주 뒤 그녀의 남편은 가정폭력으로 체포되었다.


속임수로 만든 힘은 진정한 힘이 아니다. 뉴욕에서의 그 여름, 나는 강력한 악당이 아니었다. 나는 내가 싫어했던 남자들로부터 온 메시지가 가득 찬 전화기를 무서워하는 여자아이였다. 여성이 포부 넘치는 삶에 지치면, 바닥에 계속 가라앉아 있는 것이 제일 합리적인 선택지일까? 피해를 입었다고 생각하는 여성에게 불쾌하고 역겹지 않은 진실이 있을까? 이득을 얻기 위해 자신을 비하하지도 않고, 이런 익살극이나 비극의 인물처럼 행동하지도 않으면서 자신에게 솔직할 수 있을까?




제인 오스틴33이 살던 시대에는 여성의 삶을 좌우하는 진실이 우리 시대보다 암울하고, 비참하고, 융통성이 없었다. 하지만 오스틴의 소설을 보면 완벽하지 않은 현실을 탈출하기 위한 우리의 전략을 연상시키는 부분이 상당히 많다. 촛불을 켠 조명은 어둡고, 숨결 때문에 공기도 나쁘다. 소설 속 여성들은 페티코트를 입고 종이로 만든 헤어컬을 달고 있지만, '이성과 감성'부터 '설득'에 이르기까지 그려지는 과거 시대의 삶에서 익숙한 앙상블이 보인다. 메리 머스그로브와 처칠 부인은 쑤시고 아프다고 투덜댄다. 루시 스틸, 이사벨라 소프, 레이디 수잔은 특히 공략 대상이 결혼이라면 카드놀이의 사기꾼처럼 행동하지 않으면 절대 카지노를 이길 수 없다고 생각하며 '부양자'를 노린다. 캐서린 몰랜드는 고딕의 환상을 탐닉한다. 마리아 버트램과 리디아 베넷34은 '위험' 신호를 지나쳐 뻔히 보이는 절벽으로 떨어진다. 절벽이 그곳에 있어서는 안 되니까.


오스틴 소설의 해피엔딩은 교훈을 얻어 현실을 직시하고, 명민하게 현실을 사는 주인공에게만 주어진다. 엘리너 대시우드35, 앤 엘리엇36, 융통성 없는 패니 프라이스37, 특히 엘리자베스 베넷38은 오스틴의 세계에서 무비판적인 순응, 냉소주의, 망상이라는 규칙에서 거의 제외되기 때문에 예외적인 주인공이다. 이들은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한다. 에마는 소설 '에마39Emma' 전체가 끝나는 시점에서야 그 미묘한 선을 찾아낸다. '이성과 감성'은 오스틴의 성숙기 작품 중 첫 번째 소설로, 엘리너 대시우드와 마리앤 대시우드, 루시 스틸의 삼각 구도를 통해 잠정적이지만 윤리적인 삼각법을 풀어낸다. 지나친 감성은 현명하지 못하고, 물질적인 사리사욕은 질책의 대상일 뿐이며, 상식이 좋은 것이다. 이런 것들을 명심하면 훗날의 행복과 안전을 확보할 수 있다. 오스틴은 '오만과 편견'에서 한발 더 나아간다. 오스틴은 이렇게 묻는다. 세속적으로 변하지 않고 불완전한 세상에서 살아갈 방법은 무엇인가? 엘리자베스의 언니 제인처럼 묘책을 고려할 필요도 없을 정도로 보기 드문 미모와 이에 수반되는 운 없이, 샬럿 루카스처럼 무결성을 잃지 않으면서 여성이 처신하는 방법은 무엇인가? 엘리자베스 베넷은 "자기 자매들보다 영리한 구석이 있다." 도덕적으로 권위도 있다. 엘리자베스는 여동생들처럼 멍청하지도 않고, 어머니처럼 요령이 없지도 않고, 사촌처럼 지위에 집착하지도 않으며, 아버지처럼 무관심하지도 않고, 샬럿 루카스처럼 자신을 팔지도 않으며, 네더필드 사람들처럼 거만하지도 않다(빙리 씨는 제외). 장난기 어린 매너, 인습과 스스로를 유쾌하게 비웃는 태도는 현대의 독자에게 적절해 보이고, 그녀의 아이러니는 훨씬 좋게 보인다. 엘리자베스는 바보들을 용납하지 않는다. 그녀의 "고운 두 눈"은 다아시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기지만, 그 두 눈은 우리(독자)에게 윙크를 보내기도 한다. 어쩌면 엘리자베스는 그들이 아닌 우리와 같은 부류 아닐까?


하지만 엘리자베스가 19세기 하트포드셔 사람들보다 우위에 있더라도 그 역시 그 사회의 구성원이다. 그녀는 "현명한 것을 조롱하고 싶지 않다"고 말한다. 그녀는 자기 어머니가 무례하다는 것을, 콜린스 씨가 다아시 씨에게 인사치레를 하지 않았으면 좋았을 것을, 동생의 불명예가 악취처럼 자신에게 옮는다는 것을 안다. 리디아가 위컴과 도주하자 엘리자베스는 리디아가 더는 처녀가 아닐 뿐 아니라 죽어가는 물건인 것처럼 반응한다. 그녀는 제인의 '행복'에 더해 언니가 "바로 그 집에 사는" 모습을 상상하며 행복해한다. 아시는 대로 아주 좋은 집 말이다. 그녀는 사랑 없이 결혼하는 사기꾼 행세를 하지 않겠지만 혁명가나 순교자 역할도 하지 않을 것이다. 엘리자베스는 이미 유토피아가 도래한 것처럼 살지 않는다. 그저 당대 현실인 섭정 시대40에 맞추어 살아갈 뿐이다. 엘리자베스는 자기 시대에 보편적으로 인정받는 진리의 경중을 따져서 필요없는 것과 자기 삶에 반드시 필요한 것을 판단한다. 내 생각에 그녀의 현실주의는 자신의 가능성을 제한하는 측면이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자신에 대해 상상할 수 있는 범위가 한정된다. 하지만 게임을 알면서도 진정성 있게 임하며 필요한 것, 원하는 것, 가질 자격이 있던 것을 얻었다면 이 역시 한발 더 나아간 게 아닐까?


이 이야기들이 시스템을 무너뜨릴 다이너마이트 다발은 아니지만 무기력하지는 않다. 오늘날 우리의 보편적 진실은 저마다 다르다. 내일이 되면 새로운 진실이 생길 것이다. 하지만 나는 엘리자베스가 앞으로도 모범적 인물로 남는다는 데 돈을 걸 수 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오스틴의 세상보다 좋아졌다 해도 이런 이야기들의 역할, 우리가 이 이야기를 읽는다는 사실, 생전에는 거의 인정받지 못했지만 나중에 크게 인정받은 오스틴이 이 이야기들을 썼다는 사실을 무시할 수는 없다. 이러한 현실주의는 고정관념, 캐리커처, 비극이나 익살극의 정해진 운명을 벗어난 여성 인물을 제시하고 이 인물들에게 진정한 힘을 선사할 수 있다. 속임수나 전략적 침묵이 아니라 여성과 여자아이로서 우리의 삶을 솔직하게 말하는 데서 비롯되는 진정한 힘 말이다. 이 힘은 여성의 삶을 개선하기 위해 항상 필요한 정치 행위가 유일하게 믿을 수 있는 토대라고 생각한다.


진실은 아프다는 말이 있다.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한 말이다. 나는 분만통, 여성혐오, 몸을 더듬는 상사, 걸을 수 없는 어두운 골목, 갱년기, 산후우울증, 아이를 집에 두고 나올 때의 슬픔, 집에 아이가 있어서 직장에 일을 두고 떠나야 하는 슬픔에 대해 들으며 자랐다. 다만 내 성별 때문에 내가 누릴 수 있는 어떤 기쁨에 대해서도 알게 되었다. 지금껏 누구도 완벽한 평등에 대한 약속을 선물처럼 건네줬다가 어느 날 다시 가져가버리지 않았다. 어쩌면 내가 최선을 다해도, 최소한 같은 기준에서는 남성들만큼 자유롭게 살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나 내가 친구들에게 남자가 되고 싶은지 물어보면 그들이 고개를 저으며 나를 비웃는 데는 분명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레이시 소피아 크리스티는 마이애미 출신의 작가로 잡지 '마이애미 네이티브'의 편집장이다.


역자 박해진은 중앙대학교 영어영문학 박사과정을 수료했고 번역가로 활동 중이다. 역서로 '언더그라운드 엠파이어'가 있다.


The Point는 2008년 가을, 시카고대학교 박사과정생들이 창간한 문예지로 문학, 문화, 비평 이론, 정치, 예술에 관한 에세이, 리뷰 등을 발행한다. 문학평론가 제임스 우드가 "지혜롭고, 도발적이며, 지적이고, 진지하고, 공정하다"고 평가했으며 특정 정치적·사회적 의제에 얽매이지 않고, 다양한 지적 전통과 관점 간의 대화를 통해 '성찰된 삶'이 추상적 이상이 아닌 일상적 실천이 되는 사회를 목표로 한다. 마사 누스바움, 슬라보예 지젝, 빌 아이어스 등도 기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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