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진=Zaid Mohammed
2025.04.18 15:01
몇 해 전 나는 일하던 병원을 떠나 긴 휴가를 다녀왔다. 복귀 첫날 아침, 기상을 알리는 알람이 울렸다. 버튼을 눌러 알람을 끄고, 잠시 불을 켜지 않은 채 누워 있었다. 그러고는 침대 위에 있던 발을 하나씩 바닥에 내렸다. 그 동작과 함께 다시 마취과 의사로 돌아가는 과정이 서서히 시작되었다.
하지만 무언가 잘못된 것을 느꼈다. 의사로서 나의 일을 수행할 능력에 대해 알 수 없는 불안이 밀려들었다. 내면의 어떤 조화가 사라진 듯했다. 휴가 전 나는 일정한 궤도를 따라 흐름을 즐기며 일했다. 끊임없이 규칙적으로 거듭되는 수술에 참여하며 필요할 때는 즉각적인 결정을 자신 있게 내렸다. 예기치 않은 상황으로 당황한 적도 거의 없었고, 심지어 일상을 벗어난 일이 벌어지기를 은근히 바랄 때도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무언가 달라져 있었다. 삐끗, 궤도를 비껴난 느낌이랄까. 나는 이유를 알 수 없는 의심에 사로잡혔고, 아무리 애써도 의심은 끊임없이 되솟았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불과 얼마 전만해도 아무 문제가 없었는데, 단 몇 주 만에 자신감과 확신이 흔적없이 사라져버렸다. 한마디로 나는 나의 전문가적 직관을 잃어버렸다. 무슨 말인지 명확하게 이해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직관은 실재하며 직관이 없이는 어떤 전문가든 방향 감각을 잃는다. 한때 확실하고 분명하게 느껴졌던 것이 따져야 할 질문거리가 된다.
직관이 전문적 판단에서 갖는 중요성은 오래전부터 학계에서 인식되어 왔다. 1938년, 기업인 체스터 버나드Chester Barnard는 고전이 된 저서 '경영자의 기능The Functions of the Executive'에서 경영자의 의사결정 방식을 논리적 판단과 비논리적 판단으로 이분화하고, 직관을 후자의 예로 설명했다. 1957년에는 학자 허버트 사이먼Herbert Simon이 '제한된 합리성bounded rationality'이라는 개념을 제시하며, 이 같은 이원적 구분을 이론적으로 더 명확히 정리했다. 심리학자 대니얼 카너먼Daniel Kahneman은 의사결정에는 두 가지 인지체계가 존재한다고 설명하며, 직관적 판단을 위한 '시스템 1'과, 의도적이고 분석적 사고를 위한 '시스템 2'를 제시했다. 1960년대에는 신경과학자 로저 스페리Roger Sperry가 논리와 이성은 좌뇌, 직관은 우뇌가 관장한다고 설명했다. 최근에는 이런 구분이 성격 유형 분류에 이용되었는데 사람을 '직관형'과 '분석형'으로 구분하는 마이어스 브릭스Myers-Briggs의 성격 지표 검사(MBTI)가 그 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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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직관은 일정한 틀에 가둬 분류되어 왔는데, 여기에는 직관이라는 개념을 이해하려는 목적뿐 아니라 통제하려는 의도도 있었다. 왜냐하면 세속화된 현대 세계에서 직관은, 인간의 행동을 신비롭고 영적인 힘의 산물로 여기고 과학과 신성한 교리가 구별되지 않았던 원시적 시대로부터 지금까지 살아남은 구시대의 유일한 흔적이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신비롭고 영적인 힘들은 현대의 과학적 세계관에 의해 밀려나 종교의 영역에 머무르게 되었다. 그러나 직관적 사고는 전문가에게 있어 너무 유용한 도구였기에 쉽게 내던져 버릴 수 없었다. 오늘날에도 60퍼센트가 넘는 CEO들이 의사결정에 있어 직관 혹은 '직감gut-feeling'에 의존한다고 한다. 상황에 따라서는 직관에 따른 결정의 90퍼센트가 옳은 것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직관이라는 개념은 과학에 위협이 된다. 과학은 현대의 전문적 삶 대부분을 지탱하는 기반이기도 하다. 과학이 논리와 관찰, 측정을 통해 진리를 찾는 반면, '내면을 들여다보다'라는 뜻의 라틴어 intueri에서 유래한 직관intuition은 내적 성찰을 통해 진리를 추구한다. 이러한 방식은 명료함clarity과 투명함frankness이 사유의 영역을 지배하기 이전의 암흑의 시대를 환기시킨다. 그래서 직관은 일정한 공로는 인정받되, 신비주의적 사유와의 연관성은 절제된 채 질서정연한 체계 속에 갇혀 있어야 했다.
"직관이란 단지 어떤 단서에 의해 유도된 인식recognition일 뿐이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라고 사이먼은 썼다. 의식의 저편, 망각 속에 저장되어 있던 기억들이 어떤 순간 일시적인 필요에 의해 호출되어, 단서를 따라 의식의 표면으로 떠오른다. 동시에 확신의 감정이 솟구친다. 여기에는 어떤 기적의 여지도 없다고 연구자들은 강조한다.
그러나 직관의 신비로운 가치는 전문가가 직관을 잃었을 때에야 비로소 드러난다. 정보가 부족하고 갈 길이 보이지 않는 암담한 상황에서 직관은 마치 계시처럼 찾아오기 때문이다. 직관은 이성이 한계에 다다랐을 때 우리가 받아들이는 하나의 신념이다. 그 계시를 믿는 행위가 직관을 전혀 다른 인지 경험의 차원으로 끌어올린다. 직관과 이성 사이에는 관계가 존재할 수 없는데, 그것은 직관과 이성이 뇌의 서로 다른 측면에서 작동하기 때문이 아니다. 그보다는 유한과 무한 사이와 같은 본질적 차이 때문이다. 무한은 유한과 비교될 수 없는 차원이어서, 그 사이에는 어떠한 유추나 비례도 성립되지 않는다.
직관을 잃은 전문가들은 때로 행동하려는 의지를 잃는다. 어려운 일 앞에서 직관이 동반하는 확신의 감정은 사고를 행동으로 전환시켜주는 추진력이 된다. 그 감정이 없다면, 나와 같은 의사는 어떤 일에서도 머뭇거릴 것이다.
직관을 계시로 받아들이는 것은 세상이 아직 분열되기 전의 상태가 되는 것과 같다. 믿음과 지식이 하나가 되고, 신비가 더 이상 경계의 대상이 아니며, 의사결정의 과학이 더 이상 합리와 비합리를 구분하는 분석에 머무르지 않고, 우주나 영원성과 같은 차원에서, 인간의 이해를 초월한 요소가 존재함을 받아들이게 된다.
그날 아침, 나는 떨리는 마음으로 병원에 들어섰고 첫 환자로 체외 수정(IVF) 시술을 앞둔 한 여성을 맞이했다. 물론 내가 그녀에게 내 안의 의심을 드러내는 말을 할 리는 없었다. 그러나 마음 한 켠에는 그 의심을 영영 떨쳐내지 못할 수도 있다는 두려움이 있었다.
그녀는 천식 병력이 있었다. 더구나 껌을 씹고 있는 것이 발견되었는데, 그건 문제의 소지가 있었다. 시술 전 껌을 씹는 행위는 위액 분비를 유도해 마취 중 흡인1 위험을 높이기 때문이다. 나는 시술을 연기해야 할지 고민했다. 한편으로, 난자 채취는 극히 제한된 시간 안에 반드시 이루어져야 하고, 임신을 고대하는 여성들은 이 기회를 놓치고 싶어 하지 않기에, 시술을 연기하는 일은 전례가 거의 없었다. 다른 한편, 흡인은 천식 발작, 폐렴, 심하면 사망까지도 초래할 수 있는 위험한 일이어서 시술을 진행하는 것이 불안했다.
예전 같았으면, 망설임 없이 결정을 내렸을 것이다. 지금은 왜 이토록 어려운 걸까? 껌을 씹은 경우에 대해서는 명확한 규정이 없다. 그래도 과거에는 수술실에서 모든 판단을 특별한 고민없이 자연스럽게 내릴 수 있었다. 무엇이 옳은 선택인지 분명하고 단순해 보였다. 그런데 지금 나는 이 문제를 아무리 깊이 생각하고, 모든 각도에서 꼼꼼히 살펴도, 의심과 주저의 소용돌이 속에서 허우적거릴 뿐이었다.
환자에게 시술을 연기해야 할 수도 있다고 말하자 그녀는 울음을 터뜨렸다. 외과의사는 불만의 기색이 역력했다. 그를 무례하다고 탓할 수도 없었다. 외과의사로서, 그는 마취과 의사에게 협조적인 태도와 융통성을 기대했고, 내 걱정이 지나치게 이론적인 것이라 생각했다. 그가 옳았을지도 모른다. 의사는 언제나 위험 속에 살아간다. 어리석은 것도 위험하지만, 너무 똑똑하거나 지나치게 생각이 많아도 위험하다. 타인에게 위험할 뿐만 아니라, 그만큼 자기 자신에게도 위험하다.
나는 또 다른 마취과 의사에게 의견을 물었다. 그녀는 웃으며 자기라면 당연히 바로 진행했을 거라고 말했다. 내가 이렇게 혼란스러워하는 걸 보고 그녀가 나를 좀 우습게 여겼을지도 모르지만, 나는 그녀와 나눈 짧은 순간이 즐거웠다. 어쩐지 그녀는 예전의 나, 직관이 살아 있고, 판단이 자연스럽고 매끄럽게 흘러나오던 때의 나와 연결된 존재처럼 느껴졌다.
시술을 진행하기로 결정한 뒤, 나는 잠깐 척수마취spinal anaesthetic를 하는 방안을 떠올렸다. 그렇게 하면 허리 아래만 마비되고 환자는 깨어 있게 되니 흡인 가능성을 줄일 수 있다. 하지만 IVF 시술에서 척수마취는 거의 전례가 없는 일이었기에 결국 나는 수면마취를 택했다. 그러자 또 하나의 결정을 내려야 했다. 마취 상태에서 기도에 호흡관을 삽입해야 할까? 이렇게 하면 흡인을 막을 수 있다. 그런데 과거에는 IVF 케이스에서 관을 삽입한 적이 한번도 없었다. 거기에는 분명 이유가 있었을 텐데, 그 이유가 도무지 생각나지 않았다. '그 시절의 나는 얼마나 확신에 차 있었던가!' 나는 생각했다. 나는 조심스레 호흡관 삽입 의견을 꺼내며, 다른 사람들의 반응을 살폈다. 그러자 간호사가 말했다. "농담이시죠?" 나는 긴장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아직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는 사실을 숨기고, 여느 의사들처럼 그저 자신의 일에 능숙한 척하고 싶었다.
의사결정 과학은 이러한 상황의 문제들을 지극히 합리적인 근거에서 설명한다. 신경과학자이자 심리학자인 조엘 피어슨Joel Pearson은 저서 '직관의 실전 도구The Intuition Toolkit'(2024)에서 SMILE이라는 약어로 다섯 가지 원칙을 제시했는데, 나는 이 중 세 가지를 어겼다고 볼 수 있다. S는 자기 인식self-awareness, 특히 자신의 감정 상태를 의미한다. 내 경우, 두려움과 불안이 직관적으로 사고할 수 있는 능력을 저해했다. L은 낮은 확률low-probability을 의미한다. 나는 마취 중 합병증이 발생할 확률을 과대평가했는데, 이는 마치 잔잔한 비가 오는 날 벼락 맞을 확률을 실제보다 높게 인식하는 것과 유사하다. 그런 인식의 왜곡이 내 직관을 흐렸다. (피어슨은 이를 '오직관misintuition'이라 부른다.) E는 환경environment을 뜻한다. 직관은 익숙하고 예측 가능한 환경에서 가장 잘 작동하는데, 나의 경우 병원을 떠났다 온 탓에, 익숙했던 환경이 낯설게 느껴지는 상태가 되었다.
그러나 과학은 정신 속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빛과 어둠의 깊은 명암으로 그려내지 못한다. 과학은 질서와 빛을 추구하기에, 이성적 사고에서 영적인 혼돈으로의 이행이 시작되는 그 어슴푸레한 경계의 세계를 포용하지 못한다.
그날 아침, 나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수년에 걸쳐 깊숙이 뿌리내린 나의 의학적 직관이, 왜 갑자기 이리저리 흔들리며 방향을 잃기 시작했는가. 대답은 참담했다. 나는 여전히 전문 지식과 임상 경험을 모두 갖추고 있었지만, 내 마음 속 무언가가 무너졌고, 균열이 생겼으며, 나는 그 검고 좁은 틈을 통해, 텅빈 공허를 들여다보았다. 나는 껌 씹기와 마취에 관한 학술 논문 다섯 편을 읽었다. 하지만 그 연구들은 모두 내 사례와는 조건이 조금씩 달랐고, 서로의 결론도 일치하지 않았다. 그 논문들을 한데 모아, 따뜻하고 안정감을 주는 효과를 강화하고, 의료 행위가 질서 있고 예측 가능한 체계처럼 보이게 하려 해도, 다섯 편의 논문은 결국 아무런 보장도, 확실한 결론도 주지 못한다. 그것들은 마치 밤하늘의 별들과도 같다. 밝게 빛나며 마음을 따스하게 하고, 삶이 어떤 안정된 경계 안에 있는 듯한 환상을 주지만, 결국 이름 붙일 수 없는 '무無', 낯설고 차갑고 어두우며, 인간이 미지(未知)와 마주하는 우주 속에 떠 있는 존재일 뿐이다. 실제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지만, 불안은 내 안에서 통제할 수 없는 상상들을 자극했고, 내 지식도, 임상 경험도 그것들을 몰아내지 못했다. 마취 모니터가 그늘 어린 빛처럼 어둠에 가려 투명해졌다. 어둠이 수술실을 뒤덮었을 때, 나는 무한의 깊이 앞에서 떨고 있었다.
20세기의 위대한 바이올리니스트 예후디 메뉴인Yehudi Menuhin도 젊은 시절, 이와 비슷하게 직업적 직관을 상실하면서 연주에 큰 어려움을 겪었던 경험을 회고했다. 그는 회고록 '미완의 여정Unfinished Journey'(1976)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나에게 일어난 일은 연속성sequence의 단절이었다. 음악적 통찰과 표현 사이, 그동안 직관적으로 이루어지던 전이가 어느 순간 끊어졌고, 모든 것이 무로 돌아갔다. 더이상 직관을 믿을 수 없게 되었고, 이제는 지성이 그것을 대신해야 했다." 그러나 지성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제대로 된 연주를 보여주지 못했다. "얼마나 많은 이들이 걷는 법도, 숨 쉬는 법도, 씹는 법도, 소화하는 법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가? 이 모든 것은 직관을 버리고, 아직 되찾는 법을 발견하지 못한 문명이 치르는 대가다." 그는 한탄했다.
전문가들은 잃어버린 직관을 어떻게 다시 되찾을까? 자신이 갖고 있지 않은 것을 어떻게 다시 자신에게 줄 수 있을까? 일부 심리학자들은 직관은 훈련되거나 가르칠 수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 연구심리학자 게리 클라인Gary Klein은 '직관의 힘The Power of Intuition'(2003)에서, 직관적 사고 방식은 타인에게 논리적으로 전달될 수 있으며, 의식적인 노력을 통해 강화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또 한 명의 위대한 직관적 바이올리니스트 야샤 하이페츠Jascha Heifetz의 경험은 사뭇 다른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는 스스로 인정하듯, 자신의 직관이 작동하는 과정을 이해하지 못했고, 그것을 타인에게 가르치는 것은 더더욱 불가능했다. 그는 자신을 철저히 분석했으며, 리허설 영상을 느린 속도로 재생해 손의 움직임을 여덟 배 느리게 관찰하기도 했다. 그러나 바이올리니스트 에릭 프리드먼Erick Friedman은 하이페츠와 직관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그는 자신의 천재성이 어디에서 비롯되는지 알지 못한다. 이것이 그의 딜레마다." 하이페츠는 타인에게 그것을 가르칠 수도 없었다. 그는 좋은 교사라는 평가를 받지 못했다. 한 바이올리니스트는 그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하이페츠는 직관형 연주자이다. 직관을 남에게 전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의 제자들 중에서 오직 한 명만이 독주자로 성장했고, 나머지는 오케스트라 단원이 되었는데, 하이페츠는 그들이 그저 "소음에 기여할 뿐"이라며 냉소적으로 말했다.
그날 아침, 나는 과거의 직관적인 나를 되찾기 위해, 예전에 내렸던 결정들을 머릿속으로 되짚어보았다. 하지만 그 결정들의 비결을 찾아내는 일은 불가능했다. 그 결정들은 감정, 생각, 기억이 끊임없이 흐르며 맞물려 형성된 것이었다. 시작도 끝도 분명하지 않았고, 모두가 서로에게 확장되어, 나를 한 방향으로 움직이게 하는 충동으로 이어졌다. 그 충동을 이해하고 회복하려고 뒤돌아서 찾아보았지만, 사라지고 없었다. 왜냐하면 그 충동은 어떤 '것'이 아니라, 움직임의 '방향'이었기 때문이다. 단순하지만 말로 형언할 수 없는 무엇이었다.
이 신비로움은 예후디 메뉴인을 형이상학적 사고로 이끌었다. 그는 이렇게 썼다. "아무리 결연한 의지로 채찍질해도 완전한 음정에 도달할 수 없다. 그곳에 이르는 길은, 마음으로 깨닫고 몸으로 터득한 원칙들을 긴 세월 고집스러운 믿음으로 조용히 수련하는 데에 있다." 그는 인도로 떠났다. 모든 창조 세계를 하나로 묶는 힘에 대한 힌두교의 믿음을 받아들였다. 하타 요가와 같은 영적 수련에도 끌렸다. 그는 자신의 이성이 가진 한계를 받아들였을 때, 비로소 직관이 되돌아왔음을 시사했다. "열 개의 서로 다른 요소들이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 그 사이에서 천문학적 수의 변수가 생성되는 상황에 직면할 때, 이성은 무력해지고, 오직 직관만이 그것을 감당할 수 있다." 이유가 무엇이었든, 인도에서 돌아온 뒤 그는 다시 직관을 회복했고, 그 직관을 다시 믿게 되었다. 다만 자신이 믿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는 생각은 더 이상 하지 않았다.
메뉴인과 하이페츠의 탐색은 수 세기 전 사람들이 더 높은 차원의 실재higher reality를 이해하고자 걸었던 길과 묘할 정도로 닮아 있다. 그들은 더 깊은 이해를 얻기 위해 질문했고, 희망했고, 공부했고, 기도했다. 그 시절, 지식과 신념은 하나였다. 그 여정은 영적 탐색이라 불렸다. 오늘날 과학은 '신을 좇는 놀이'가 헛되다는 것을 입증하려 한다. 그러나 전문가들도 때로는 영적 탐색에 기댈 수밖에 없는 순간을 맞이한다. 그것은 정신적 삶 속에서 피할 수 없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과학과 방법론은 지식을 줄 수는 있지만, 지식만으로는 전문가가 자신의 내면 깊은 곳에 이르고자 할 때 그 길을 이끌기에 충분하지 않다. 우리가 가진 조각난 지식들을 아무리 조합해도, 그들이 지향하는 직관의 진실에 결코 도달할 수 없다."
환자가 수술대에 누운 뒤, 나는 정맥주사를 놓을 준비를 했다. 그러나 바늘을 든 순간, 나는 갑자기 스스로를 의식하며 긴장감을 느꼈다. 나는 정맥주사를 위해 얼마나 정밀함이 요구되는지, 또 그를 실현하려는 계획이 얼마나 깨지기 쉬운지를 생각했다. 불현듯 선택한 주사 각도가 맞는지 의심스러워졌고, 최근 몇 주 동안 정맥주사를 한 번도 놓지 않았다는 사실도 떠올랐다. 나는 이를 악물고 목표를 겨냥한 뒤 바늘을 꽂았으나, 결국 필요 이상의 힘이 들어가고 말았다.
피부 바로 밑으로 푸르스름한 피가 부풀어 올랐다. 정맥을 놓친 것이다. 다시 시도했지만 또 놓쳤다. 간호사가 눈이 동그래져서 나를 바라보았다. 다행히 세 번째 시도는 성공했다.
이 상황에 대해 의사결정 과학은 타당한 설명을 제공한다. 피어슨은 직관을 더 나은 판단이나 행동을 위해, 무의식적 정보를 학습을 통해 효과적으로 활용하는 것이라고 정의한다. 일을 잘 수행하기 위해서 때로는, 날아오는 축구공을 막기 위해 발을 튕겨내듯이, 반사적으로 행동해야 한다고 설명하고, 이를 '맹목적 행동blind-action'이라 부른다. 내 실수는 정맥주사를 놓는 데 지나치게 의식적인 사고에 의존한 것이고, 그로 인해 리듬이 깨졌다고 할 수 있다.
시술이 시작되었다. 시술 중 외과의와 간호사는 주말을 어떻게 보냈는지 즐겁게 대화를 나눴다. 내가 원했다면 함께 오락처럼 대화를 즐길 수 있었을 테지만, 즐길 마음이 없었다. 무언가 잘못될까 봐 불안했다. 마취 자체가 오락만큼 충분한 긴장이었고, 일이었고, 고통이었다.
이십 분 뒤 시술이 끝났다. 그런데 환자가 마취에서 깨어나면서 기침을 했고, 기도가 막혀 산소포화도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후두경련laryngospasm이었다. 위액이 역류해 성대를 자극하면서, 성대가 닫힌 것이다. 바로 내가 가장 우려하던 상황이었다. 이 상황에서는 속효성 근이완제를 투여해 성대를 이완시키는 것이 최선이었다.
하지만 환자는 다리에 큰 화상 흉터가 있었고, 이런 경우 이완제는 근육으로부터 위험한 수준의 칼륨 방출을 일으킬 수 있어 금기였다. 문제는 흉터의 크기가 어느 정도일 때 그런 반응을 일으킬 수 있는지 교과서에서도 명확히 설명하고 있지 않다는 점이었다.
이전에도 비슷한 난제를 겪은 적이 있었지만, 늘 올바른 결정을 내렸다. 더 안전하지만 작용이 오래 지속되는 지속성 근이완제에 굳이 의지해야 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때는 어떻게 그런 결론에 이르렀을까. 마치 시간을 거슬러 살아가고 있는 것 같았다. 과거의 나는 지금보다 더 나은 의사였다. 나는 과거로부터 그처럼 올바른 결정을 가능하게 했던 마음가짐을 끄집어내려고 애쓰고 있었다.
속효성 약을 쓰지 않는 건 어리석어 보이는 일이었다. 하지만 내 안의 어떤 감각이 그것을 반대했다. 그게 정확히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마치 복통이라도 일듯 메스껍고 불쾌한 감정이었다. 그 속엔 분명 두려움, 즉 약물이 근육에서 위험 수준의 칼륨을 방출시킬 수도 있다는 우려가 있었다. 척수마취를 쓰지 않은 것에 대한 은근한 후회의 감정도 뒤섞여 있었다. 거기에다 애초에 이런 합병증이 발생한 것 자체에 대한 당혹감이 더해졌다. 감정은 매우 강렬했고, 지금이 지속성 근이완제를 요하는 특이 상황이라는 더 광범위한 인식과 얽혀 있었다.
문득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이대로 두어도 다 괜찮아질 것이라는 생각이 유혹처럼 밀려들었다. 후두경련은 위험한 합병증이지만 때로는 저절로 사라지기도 한다. '그냥 두자', 내 안의 한 목소리가 속삭였다. 아무 조치를 취하지 않아도 될 타당한 이유들이 떠올랐지만, 이내 조치를 취해야 할 다른 이유들로 그 생각을 밀어냈다. 후두경련이 풀리기 전에 환자가 저산소증에 빠질 수도 있는 일이었다. 내 안에서 한 목소리는 약물 투여를 미루라고 권유했고, 다른 목소리는 서두르라고 재촉했다. 어떤 목소리를 따라야 할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나는 한숨을 쉬었고, 희망을 품다가, 두려움을 느꼈고, 의심을 품었다. 아무런 지시 없이, 환자는 삼십 초 동안 꼼짝 않고 누워있었다. 그러다가 나는, 충동적으로, 지속성 근이완제를 투여했다. 약물이 환자를 한 시간 동안 마비시킬 것이기에, 나는 기도 삽관을 하고, 재마취된 환자를 회복실로 옮겨야 했다. 그곳의 모두가 내가 한 일을 알고 있었다. 나는 애써 그들의 얼굴을 마주보았고, 비난 어린 시선들을 감내했다. 나는 환자의 곁에 앉아 약효가 풀리기를 기다렸고, 환자가 깨어나자 삽관을 제거하고, 몹시 무거운 마음으로 휴게실로 돌아갔다.
피어슨의 SMILE 이론에 따르면, 새롭게 겪은 일련의 문제들은 내가 'I'를 어긴 데 근원이 있다. 충동적 사고impulsive thinking를 직관으로 오인한 것이다. 사람들은 자기 안에서 강력한 내면의 목소리를 들었다고 상상하고, 그것을 직관으로 착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과학만으로는 이러한 착각이 일어나는 심층 구조를 밝히는 데 한계가 있다. 나는 직관도 확신도 잃어버린 상태였고, 그로 인해 내면에 공백이 생겨났으며, 그 자리를 채우려 다른 목소리들이 앞다투어 몰려들었다. 확신을 잃게 되면, 우리의 마음은 실제로는 우리가 만들어낸 생각들을 검열하고, 합리화해서 직관의 소리처럼 꾸며낸다. 그리고 '어떤 소리'를 간절히 듣고자 하는 사람은, '그 소리'의 작은 파편에라도, 귀를 기울이지 않을 수 없다.
게다가 우리는 스스로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생각 자체를 못 견디기 때문에, 그 파편을 하나의 체계로 발전시키고, 우리의 사고를 정리해서 그 체계가 논리적으로 일관되어 보이게 만든다. 그렇게 해서 탄생한 체계는 개인적 편향, 선입견, 자만심, 희망, 혹은 불편한 것을 의도적으로 외면하는 마음에 뿌리를 두고 있으면서도, 겉으로는 직관처럼 위장하여 우리를 충동적으로 행동하도록 이끈다.
어려운 상황에서는 아무 행동을 하지 않음으로써 자신이나 타인에게 상처를 입히지 않는 것이 자연스러운 선택이다. 하지만 때로는 행동을 해야만 할 때가 있다. 그 때 필요한 것이 의지이다. 의지는 확신에 의해 일어난다. 확신이 이성을 통해 생성되지 못할 때, 그것은 직관에 대한 믿음의 도약을 통해 솟아난다.
드와이트 아이젠하워는 이 원칙을 노르망디 상륙작전 전날 밤에 체현했다. 날씨가 좋지 않았다. 작전을 미루면 기밀 유지가 위험해지고, 연합군이 여름철 맑은 날씨 속에서 작전을 펼칠 수 있는 시간도 줄어들 수 있었다. 반면, 바람과 비를 무릅쓰고 작전을 강행하면 상륙 작전 중 공군의 엄호가 어려워질 위험이 있었다. 또 하나의 문제는 적진 후방에 낙하산 부대를 투입하는 공수 작전을 실행할지 여부였다. 몇몇 참모들은 낙하병들이 몰살당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러나 공수 작전을 취소하면, 해안 상륙 자체가 위험해진다. 아이젠하워는 훗날 그 결정을 "영혼을 고통스럽게 뒤트는 문제"였다고 고백했다. "나는 이 문제를 누구에게도 상의하지 않았다. 전문가의 조언이나 자문이 더 이상 도움이 되지 못했다." 그는 자신의 회고록 '유럽 원정기Crusade of Europe'(1948)에서 그렇게 썼다. 그의 마음속에는 서로 다투는 여러 목소리들이 자신을 따르라며 충성을 요구하고 있었다. 수세기 전 장군들이 신들의 속삭임을 통해 계시를 받았다는 이야기, 보이지 않는 힘들이 위협하기도 하고 타이르기도 하며 희망과 두려움으로 장군들의 정신을 채우던 신화들이 떠올랐다.
아이젠하워는 어쩔 수 없이 상륙작전을 하루 연기했다. 아예 작전 자체를 감행할 수 있을지 확신이 없었다. 그는 '두 손을 등 뒤로 모으고, 고개를 숙인 채' 방 안을 서성이고 또 서성였다.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숙고 끝에 마침내 그는 결단을 내렸다. 직관을 따른 것이다. 그는 고개를 들어 참모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여러분, 출동합시다."
아이젠하워는 당시 자신의 판단이 옳은지 그른지 알 수 없었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의 직관을 믿었고, 신념을 가졌다. 그 신념과 함께 의지가 솟구쳤다. 화산 에너지가 용솟음치듯, 무의식으로부터 분출되는 의지야말로 행동을 가능하게 하는 힘이다. 일단 결정을 내린 후, 아이젠하워에게는 자신의 판단에 대한 재고나 후회, 흔들림이 없었다. 대신, 내면 깊숙한 결단의 힘이 참모들에게 그리고 휘하에 있는 수천 명의 병사들에게 뻗어 나갔다. 솟구친 의지는 한 사람 안에 묶여 있던 모든 힘을 하나로 결집시켜, 앞이 불투명한 상황에서도 행동할 수 있게 하는 결정적인 '신념의 용기'를 준다.
반면, 나는 그날 아침 충동적으로 행동했고, 이어 아이젠하워와는 반대로 내 결정을 스스로 의심했다. 이는 중요한 점을 시사한다. '냉정함'은 직관을 지닌 전문가와 그렇지 못한 전문가를 구분하는 자질이다. 차이는 표정에서 쉽게 드러난다. 전자의 표정은 예외 없이 이렇게 말한다. "나는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했다. 이제는 그저 지켜볼 것이다. 기다리는 동안, 어쩌면 다른 생각을 해볼 수도 있겠지." 후자의 표정은 말한다. "내가 잘못한 걸까? 아, 왜 그렇게 했을까? 그렇게 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아니, 어쩌면 괜찮았던 걸까?
그날 아침, 직관을 잃었을 때 느낌은 마치 무언가가 나를 강하게 내리친 같기도 했고, 혹은 그저 새 한 마리가 나무에 내려앉듯 내 위에 조용히 내려앉은 것 같기도 했다. 나는 굳은 나무처럼 뻣뻣하고 무감각해졌고, 마침내 내 자신이 나무가 된 것 같았다. 다행히 시간이 흐르며 병이 나아지듯 그 증상은 자연스럽게 회복되어, 하루가 끝날 무렵 직관은 다시 돌아왔다. 어떻게, 혹은 왜 돌아왔는지는 알 수 없다. 과학은 직관이 왜 사라지는지 설명할 수 있지만, 왜 돌아오는지는 설명하지 못한다. 그것은 여전히 불가사의한 일이다.
직관이 돌아오면서 가장 뚜렷하게 달라진 점은 의심을 대하는 나의 태도였다. IVF 케이스에서 의심은 마치 자꾸 어깨를 두드리며 내 생각에 끼어들어, "바쁜 건 알아. 방해하고 싶진 않지만 나는 내내 여기에 있었고, 앞으로도 떠날 생각이 없어."라고 말하는 사람 같았다. 결정을 내리려는 순간마다, 의심이 끼어들어 다른 선택을 강권했다. 그날 아침 나는 의심과 씨름하느라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소모했다.
나는 곁에 의심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불쾌했다. 한때 의심 없이 의료를 행하던 자신을 떠올리며, 휴가 이전의 날들을 마치 행복했던 청춘처럼, 지나간 것이기에 더욱 소중하고 즐거웠던 시절처럼 기억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내가 의사로서 의심 없이 지낸 시간은 한 순간도 없었다는 것을 서서히 깨달았다. 그런 시간이 있었다는 생각은 환상이었다.
곁에 의심을 두고 살면서 일하는 데 다시 편안해지면서, 나는 자의식의 물결이 내게서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고, 그러자 마치 놀이에 빠진 아이처럼 나를 의식하지 않게 되었다. 이 마음의 변화는 마치 화학 반응과 비슷하다. 겉보기에 맑고 투명한 액체 속에 액체를 떨어뜨린다. 처음엔 아무런 변화가 없다가, 어느 순간 포화 상태에 이르면, 마지막 한 방울이 더해지는 순간 그 안의 모든 것이 다시 살아난다. 맑은 물이 순식간에 반짝이는 결정체로 변한다. 내게는 그 결정이 직관이었다. 변화가 일어난 순간, 의심이 속삭이는 듯했다. "이제 알겠지. 나는 언제나 여기에 있어. 병원 안 어디를 가든, 나는 당신과 함께 갈 거야. 나는 당신의 주인이고, 당신 또한 나의 주인이야."
과학은 흔히 삶을 비어있고 영혼이 없는 공간, 정적이고 신성이 깃들지 않은 공허로 바라보는 경향이 있다. 비합리적인 힘의 존재를 인정할 때조차, 과학은 그것을 하나의 모형 안에 가둔다. 원초적 야수를 지식이라는 철창 뒤에 가두어 길들이려 한다. 그러나 전문가에게 현실은 완전히 다르다. 전문가의 정신은 이분법적인 체계에 갇혀 있지 않으며, 연구를 통해 얻은 단편적인 지식만으로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 오히려 그것은 내면의 능력으로만 감지할 수 있는 보이지 않는 파장으로 가득 차 있다. 전문가의 정신은 끊임없이 서로를 자극하고 생기를 주고받는 신비로운 흐름과 긴장들로 가득하다. 직관은 이 천상의 조화를 가리키는 또 다른 이름일 뿐이다.
로널드 드워킨은 30년간 대형 의료 센터에서 마취과 의사로 활동하며, 조지 워싱턴 대학교 명예 프로그램에서 정치철학과 의학 및 사회 과목을 가르쳤다. 월스트리트저널, 내셔널 어페어스 등 다양한 매체에 의학과 사회, 미국 문화와 정치에 관한 글을 기고했으며 현재는 버지니아대학교 문화고등연구소의 펠로우로 재직 중이다. 의학 세계와 미국 문화에 관해 여러 책을 썼다.
역자 음해린은 서울대 고고미술사학과 졸업 후 전문 번역가로 활동중이다.
오랜 휴가 후 복귀한 마취과 의사가 갑자기 자신의 전문적 판단 능력을 의심하며 '직관'을 잃어버렸다고 느끼는 당혹스러운 경험으로 시작하는 이 에세이는 전문가의 길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지만 때로는 흔적 없이 사라지기도 하는 직관의 신비로운 본질, 즉 그것이 무엇이며 왜 중요하고, 어떻게 작동하며, 또 과학적 분석만으로는 온전히 설명되지 않는 그 깊이가 무엇인지 탐구합니다. 높은 수준의 전문성과 냉철한 판단이 요구되는 한국 사회의 많은 전문가들에게, 중요한 순간 '감(感)'에 의존했던 경험과 때때로 찾아오는 자기 의심에 대한 이 이야기는 깊은 공감을 자아낼 것입니다. 저자는 의학, 음악, 역사의 생생한 사례를 넘나들며, 논리와 데이터 너머 존재하는 직관의 세계와 그 상실이 가져오는 불안, 그리고 그것을 다시 회복하는 불가사의한 과정까지 성찰함으로써, 단순한 지식이나 기술을 넘어선 전문가적 역량의 근원과 불확실성 속 의사결정의 본질에 대해 고민하는 독자들에게 흥미로우면서도 깊이 있는 사유의 시간을 선사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