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트럼프 행정부는 불과 두 달 만에 존슨 행정부가 베트남 정책에서 겪었던 5년의 과정을 모두 질주해 지나갔다. 개입, 확전, 답답한 교착 상태, 그리고 협상까지다. 이제는 닉슨 행정부의 영역에 들어섰다. 처음에는 거친 위협을 쏟아내고, 이어 만족스럽지 못한 합의를 통해 빠져나와야 할 필요성을 점차 깨닫는 단계다. 이러한 속도가 유지된다면 이란 개입은 몇 달 안에 끝날 것이며, 그 무렵이면 잘잘못을 따지는 논쟁이 이미 시작돼 있을 것이다.
물론 어떤 역사적 유비(類比)도 완벽하지 않으며, 이란과 베트남의 분쟁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점이 많다. 지역도 다르고, 작동하는 이념도 다르며, 기간은 훨씬 짧고, 미국 지상군 투입이나 징병도 없으며, 행정부 교체도 없고, 첨단 군사기술이 활용되는 등 여러 차이가 있다. 그럼에도 두 분쟁의 구조에는 주목할 만한 대칭성이 존재한다. 우크라이나 전쟁 역시 마찬가지로 한국전쟁과 구조적으로 대칭적이다. 그리고 구조는 정책결정자들의 선택을 제약하기 때문에, 이러한 패턴을 인식하는 것은 전쟁이 어떻게 끝날지에 대한 단서를 제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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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과 이스라엘의 대(對)이란 전쟁은 1973년 베트남전이 끝난 방식과 유사하게 마무리될 가능성이 크다. 즉 일부 문제는 해결하지만 중요한 다른 문제들은 남겨두는 불안정한 타협적 합의로 귀결될 가능성이 높다. 남베트남의 최종 운명이 훗날 결정되도록 남겨졌던 것처럼, 이슬람공화국과 그 핵 프로그램의 최종 운명도 미래의 과제로 남겨질 것이다. 반면 우크라이나 전쟁은 한국전쟁과 마찬가지로 현재의 전선을 대체로 고착화하는 합의로 끝날 가능성이 높다. 휴전 체제 아래 동결된 국경선이 장기간 유지되며, 그 안정성과 지속성은 대부분의 관측자들이 예상하는 것보다 더 클 것이다.
절반은 린든 존슨 식으로
1963년 11월, 남베트남과 미국의 지도자가 모두 암살되면서 린든 존슨은 갑작스럽게 대통령직에 올라 위기에 처한 두 나라를 책임지게 됐다.
베트남에서는 의욕적이며 지휘 체계가 잘 갖춰진 북베트남군이 남부의 게릴라 세력과 함께 무능한 남베트남 정권을 상대로 꾸준히 우위를 확대해가고 있었다. 미국이 이러한 추세를 뒤집기 위한 조치를 취하지 않는다면 결국 사이공은 함락되고, 베트남은 공산주의 통치 아래 재통일될 것으로 보였다. 존슨과 그의 참모진은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다는 낙관론을 크게 갖고 있지는 않았지만, 패배가 초래할 국내외적 결과를 두려워했다. 그래서 그들은 무력 과시가 북베트남으로 하여금 한발 물러서게 만들 수 있기를 기대하며 남베트남에 대한 지원을 확대하기로 결정했다.
이러한 지원확대 결정이 처음에는 경제 원조와 군사고문단 파견을 의미했다. 그다음에는 폭격을 의미했다. 이어 지상군 파병을 의미했다. 그리고 그다음에는 모든 것을 더 늘리는 것을 의미했다. 그러나 북베트남은 핵심 목표를 고수하며 굴복을 거부했다. 1968년에 이르러 전쟁은 막대한 인명과 재정을 소모하고 심각한 국내 혼란을 초래하면서 미국은 출구를 찾기 시작했다. 존슨 자신은 결코 패배를 인정하지 않았지만, 전쟁 확대에 상한선을 설정하고 일방적인 폭격 중단을 선언한 뒤 정계에서 물러나 문제를 후임자에게 넘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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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임자는 리처드 닉슨이었다. 그는 국가안보보좌관 헨리 키신저와 함께 전쟁을 마무리해야 한다는 근본적 과제를 물려받았지만, 새로운 모험을 추진할 정치적 자본은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닉슨과 키신저는 누구도 단순히 사이공을 포기하는 방안을 고려하지 않았지만, 초강대국 관계를 재편하는 데 목표를 두고 있었고 미국이 조속히 다음 단계로 나아가야 한다는 점을 이해하고 있었다. 적어도 다음 대통령 선거 전에는 그렇게 해야 했다. 처음에 그들은 힘과 허세를 새롭게 조합해 기존 목표를 달성하려 했다. 북베트남이 더욱 가혹한 폭격과 거친 위협에 겁을 먹고 물러서고, 소련과 중국이 협조하도록 설득할 수 있으며, 미국 국민은 소규모 병력 감축으로 달랠 수 있고, 이 모든 것이 결합돼 미국의 철수, 남베트남의 생존, 북베트남의 공세중단을 가져올 합의를 이뤄낼 수 있다고 기대했다. 백악관 비서실장 H. R. "봅" 홀드먼이 훗날 회고록에서 유명하게 만든 시기가 바로 이때였다.
"닉슨은 마침내 북베트남을 진지한 평화협상으로 끌어낼 수 있다고 확신했다. 핵심은 위협이었고, 닉슨은 자신의 이론에 이름까지 붙였다. 그는 말했다. '나는 이것을 미치광이 이론이라고 부른다, 봅, 나는 북베트남이 내가 전쟁을 끝내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지경에 이르렀다고 믿게 만들고 싶다. 그들에게 슬쩍 이런 말을 흘리면 된다. "세상에, 알다시피 닉슨은 반공(反共)에 미친 사람이다. 그가 화가 나면 우리는 그를 제어할 수 없고, 게다가 그의 손은 핵 버튼 위에 있다." 그러면 호찌민이 직접 이틀 안에 파리로 와서 평화를 구걸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 전략은 실패했다. 소련은 북베트남이 합의를 받아들이도록 충분한 압력을 가할 수 없었거나 가하려 하지 않았고, 공산주의 세력은 무너지지도 물러서지도 않았으며, 전쟁은 계속 길어졌다.
1969년 가을이 되자 행정부는 사실상 출발점으로 되돌아와 있었다. 다만 이미 미군 철수가 시작돼 미국 국민의 추가 철수 요구를 오히려 부추겼고, 북베트남 지도부에게는 미국이 지칠 때까지 버틸 유인을 제공했다는 점이 달랐다. 백악관의 좌절감은 커져갔다. 키신저는 참모들에게 적을 향한 "잔혹하고 응징적인 일격" 계획을 준비하라고 지시했다. 그는 "북베트남 같은 4류 국가가 언제까지 버틸 수 있겠나"라고 말했다. 공격에 나서기 전 미국 행정부는 소련과 북베트남을 향해 이제 타협하지 않으면 큰 대가를 치를 것이라는 최후통첩을 보냈다. 그러나 상대는 이를 무시했고 미국은 위협을 실행에 옮기지 않았다.
결국 닉슨과 키신저는 두 번째 탈출 전략을 선택했다. 점진적인 미군 철수, 남베트남의 티우 정권에 대한 지원 확대, 그리고 협상 타결을 위한 집중적 노력을 결합한 전략이었다. 1973년 이는 미국이 형식적으로는 동맹(남베트남)을 배신하지 않은 채 전투를 중단하고 전쟁포로를 귀환시킬 수 있는 합의로 이어졌다. 그러나 합의문의 세부 조항은 공산군이 남부의 점령 지역에 그대로 주둔하는 것을 허용했고, 미국이 철수한 뒤 그들이 다시 작전을 개시할 수 있게 내버려두었다. 이 조항과 미국의 베트남전 재개를 제한한 미 의회의 결정이 결합되면서 2년 뒤 남베트남은 붕괴했다.
존슨이 베트남에서 그랬던 것처럼,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도 우려스러운 흐름을 차단하기 위해 이란에 개입했다. 2025년 6월 이스라엘과 미국의 공습은 이란 핵 프로그램에 큰 피해를 입혔다. 그러나 그 이후 이란은 재래식 군사력 재건에 착수했고, 이스라엘과 미국은 이것이 결국 테헤란이 핵 야망을 계속 추구할 수 있는 강력한 방패를 만들어줄 것이라고 우려했다. 트럼프는 강력한 참수작전이 이란 정권을 무너뜨리고 문제를 완전히 해결할 것이라는 이스라엘의 설득을 받아들였고, 2월 말 미-이스라엘 연합 공격을 승인했다. 공습은 이란 군사력의 상당 부분을 파괴했고, 최고지도자 알리 하메네이를 포함한 많은 이란 고위 인사들을 폭살했다. 그러나 하메네이의 아들 모즈타바가 부친의 뒤를 이었고, 뿌리 깊은 이란 정권은 계속 기능했다. 더 나쁜 것은 이란이 걸프 지역 이웃 국가들을 공격하고 호르무즈 해협을 통과하는 해운에 제한을 가함으로써 세계 에너지 위기를 초래했다는 점이었다.
4월 들어 좌절감을 느낀 트럼프는 존슨 역할에서 닉슨 역할로 옮겨갔다. 압박 강화, 최후통첩과 위협, 협상 제안을 결합한 새로운 전략을 시도한 것이다. 이러한 '미치광이 접근법'의 부활은 4월 8일 휴전과 파키스탄의 중재 아래 진행된 미-이란 직접 협상으로 이어졌지만, 원하는 양보를 얻어내지는 못했다. 호르무즈 해협은 여전히 폐쇄돼 있었고 양측의 요구는 여전히 크게 달랐다. 장기전을 전혀 계획하지 않았고 비용은 늘어나며 국내 지지는 급락하는 상황에서, 트럼프는 이제 1970년대 초 닉슨과 키신저가 그랬던 것처럼 체면을 살리며 빠져나갈 방법을 찾고 있다. 그러나 이란인들은 북베트남인들처럼 완강하게 협조를 거부하며 '고통 참기' 경쟁에서 자신들이 승리할 수 있다고 믿고 있다. 다음 단계는 전투를 중단하고 해운을 재개하며, 다른 많은 쟁점들의 해결은 흐리거나 뒤로 미루는 합의가 될 가능성이 크다. 남베트남의 운명이 그랬듯, 이란 핵 프로그램의 최종 운명과 이란 정권 자체의 운명 역시 결국 미래로 넘겨질 것이다.
무승부의 포커 게임
한편 우크라이나에서는 러시아와 함께 싸우고 있는 북한군이 기시감을 느끼고 있을지도 모른다. 교착 상태의 유혈전에 인간 제물처럼 투입되며 조부 세대의 악몽을 재연하고 있기 때문이다. 1950년 6월 말, 북한군은 한반도 전체를 공산주의 통제 아래 두기 위해 기습적으로 38선을 넘어 남하했다. 트루먼 행정부는 이를 점점 격화되는 냉전의 중대한 일격으로 해석했고, 유엔의 후원을 받아 한국 방어에 미국을 투입했다.
북한군은 여름 내내 진격해 결국 유엔군을 남동부 항구도시 부산 주변의 좁은 지역에 몰아넣었다. 9월, 미군의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이 적 후방인 인천항에 성공적으로 상륙하면서 전황은 뒤집혔고, 곧 유엔군이 북한군을 북쪽으로 밀어내기 시작했다.
10월, 승리에 고무된 미국 지도부는 예상치 못한 기회를 감지했다. 한국 주도의 방식으로 한반도를 통일할 수 있다는 가능성이었다. 이에 그들은 맥아더에게 북한 깊숙한 지역까지 작전을 수행할 자유를 부여했고, 맥아더는 이를 한계 이상으로 활용했다. 그러나 유엔군이 계속 북상하자 전쟁은 다시 방향을 바꿨다. 중국군이 북한을 지원하기 위해 참전했고, 유엔군은 황급히 남쪽으로 후퇴해야 했다. 인도와 영국은 대만 포기와 중국의 유엔 가입을 포함하는 합의를 바탕으로 미국이 협상을 시작할 것을 촉구했다. 그러나 트루먼 행정부는 이를 거부하고 전장에서의 극적 반전을 기대하는 도박을 선택했다. 그리고 실제로 새로운 지상군 사령관 매슈 리지웨이의 지휘 아래 유엔군은 다시 전세를 뒤집어 1951년 초 한반도를 따라 북쪽으로 힘겹게 진격해 나갔다.
이 시점에 이르러 양측 교전 세력은 모두 교착 상태를 넘어서는 것이 엄청나게 어렵고 비용이 많이 든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전쟁 이전 상태'를 바탕으로 전쟁을 협상으로 끝내는 방안을 고려하기 시작했다. 맥아더는 이러한 정책 선택에 동의하지 않았고 이를 의도적으로 방해하려 했다. 그는 호전적인 공개 발언을 하고 의회의 공화당 의원들에게 트루먼 행정부를 비판했다. 이에 대응해 해리 트루먼 대통령은 4월 맥아더를 총사령관직에서 전격 해임하고 리지웨이로 교체했다. 6월 유엔군이 중국군의 대규모 공세를 저지한 뒤, 소련의 유엔 주재 대사는 라디오 연설을 통해 양측이 38선을 기준으로 휴전에 합의할 것을 제안했고, 7월 직접적인 휴전 협상이 시작됐다. 당시 관측자들은 몇 주 안에 합의가 이뤄질 것으로 예상했다. 첫 미국 협상단은 조인식에 입을 정복을 챙기라는 지시를 받았고, 첫 중국 협상단은 여름옷만 가져왔다. 그러나 협상은 교착에 빠졌고, 치열한 전투는 2년 더 계속됐다. 결국 1953년 7월, 협상 시작 당시 양측이 위치해 있던 전선과 거의 같은 선을 따라 휴전협정이 체결됐다.
한국전쟁과 우크라이나 전쟁의 유사성은 놀라울 정도다. 현재의 우크라이나 전쟁은 2022년 2월 말 러시아군의 기습 공격으로 시작됐다. 1950년 북한군이 그랬던 것처럼 러시아군도 자신들이 잃어버린 국가 영토라고 생각하는 지역을 되찾기 위해 대대적인 진격에 나섰고, 이번에도 미국과 유럽 지도자들은 침략 피해국의 저항을 지원하는 데 전념했다. 한국전쟁에서 그랬듯 우크라이나 전쟁의 첫해에는 대규모 군사적 반전과 작전상 움직임이 있었지만, 이후에는 비교적 고정된 전선을 따라 수년간의 고강도 교착 상태가 이어졌다.
트럼프가 2025년 취임했을 때 그는 합의를 밀어붙이려 했다. 러시아에는 점령한 영토를 유지할 수 있다고 암시하며 유혹했고, 우크라이나에는 지원을 보류하며 압박했다. 그러나 어느 쪽도 합의를 받아들일 의사가 없었고 전투는 계속됐다. 다만 교전 당사자들이 점점 더 지치고 체념할수록 교착 상태를 공식화하는 합의의 가능성은 커진다. 한국전쟁과 마찬가지로 우크라이나 전쟁 역시 극도로 폭력적이었다. 전사자는 수십만 명에 이르고 부상자까지 포함한 사상자는 수백만 명에 달한다. (한국전쟁에서는 민간인 피해도 수백만 명에 달했다.) 이처럼 미미한 성과를 위해 엄청난 희생을 치른 전쟁은 깊은 상처를 남긴다. 따라서 우크라이나에서도 한국과 마찬가지로 일단 전투가 멈추면 가까운 시일 안에 다시 시작될 가능성은 크지 않다. 무엇보다도 경계선이 매우 엄격하게 감시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번에도 다르지 않다
네 전쟁 모두 핵을 둘러싼 벼랑 끝 전략을 수반했다. 이러한 패턴은 역사상 처음으로 교전 진영 간 전면적인 핵전쟁 가능성이 존재했던 한국전쟁에서 처음 나타났다. 핵보유국들은 적을 겁주어 양보를 얻어내기 위해 핵 사용을 위협했지만 실제로 이를 실행에 옮기지는 않았다. 미국은 한국전쟁이나 베트남전에서 핵무기를 사용하지 않았고, 러시아도 우크라이나에서 사용하지 않았으며, 미국과 이스라엘 역시 어떤 문명 종말적 수사를 동원하더라도 이란에서 핵무기를 사용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핵확산 압력은 분명히 커질 것이다. 우크라이나는 핵을 포기한 뒤에 공격을 받았고, 핵무장을 한 북한은 안전한 반면 핵무기가 없는 이란은 폐허가 됐다는 사실을 누구도 간과하지 않을 것이다.
또한 네 전쟁 모두 적대 세력 간의 갈등뿐 아니라 같은 편 사이의 갈등도 수반했다. 이는 대국과 소국이 서로 다른 이해관계와 책임을 갖고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놀라운 일이 아니다. 대국과 소국의 갈등 패턴 역시 한국전쟁에서 나타났다. 강대국들이 전쟁을 끝낼 준비가 됐다고 판단했을 때 그들은 작은 나라들의 팔을 끌었다. 스탈린 사후 새 소련 지도부는 손실을 이만 줄이고 휴전하기로 결정했고, 미국은 한국으로 하여금 반대하던 협정을 수용하도록 강요했다. 20년 뒤 미국은 남베트남에도 똑같이 했다. 우크라이나는 지금까지는 그러한 압력에 저항하고 있지만, 만약 러시아가 언젠가 합리적인 합의를 받아들일 의사를 보인다면 미국과 유럽 동맹국들은 우크라이나가 이를 수용하도록 만들 방법을 어떻게든 찾아낼 것이다. 이란 전쟁도 마찬가지다. 트럼프 행정부가 이란과 어느 정도 합의점을 찾게 되면 미국은 더 강경한 노선을 원하는 이스라엘과 걸프 국가들의 바람을 무시할 것이다.
요즘 미국이 이란에서 목표를 달성하지 못한 것이 보다 광범위하고 불가역적인 미국 국력의 쇠퇴를 보여주는 것이라는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최근 뉴욕타임스의 한 기사 제목은 "중국은 점점 더 트럼프의 미국을 쇠퇴하는 제국으로 보고 있다"고 선언했고, 국내외의 많은 사람들도 이에 동의한다. 그러나 베트남전의 참패 때도 똑같은 말이 나왔다. 하지만 미국은 패배 후 불과 몇 년 만에 회복했고, 이후 수십 년 동안 세계 패권을 유지했다. 또 다른 지정학적 부활이 보장돼 있는 것은 아니지만, 미국 자본주의의 창조적 역동성과 미국 민주주의의 재생 능력은 수세기 동안 불가능해 보이는 성과를 이뤄냈으며, 지금 와서 갑자기 그런 능력을 잃을 가능성은 크지 않다.
이 모든 역사적 반복에서 가장 눈에 띄는 점은 전시 지도자들의 반복적이고 순진한 희망적 사고일 것이다. 그들은 군사력이 손쉽게 정치적 성과를 가져올 수 있고, 적은 저항하지 못할 것이며, 진지한 전략 기획은 불필요하다고 가볍게 가정한다. 그런데, 전쟁에서도 시장에서도 가장 위험한 말은 아마도 "이번에는 다르다"일 것이다.
기디언 로즈는 미국 외교협회 회원이며 포린어페어스 전 편집인이다. 그는 예일대(고전학 학사), 하버드대(정치학 박사)를 졸업한 후 내셔널인터레스트 매거진의 부편집자로 활동했으며, 클린턴 행정부에서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에서 근동-동남아 담당 부국장을 역임했다. 이후 프린스턴대 정치학과에서 강의했고, 현재는 컬럼비아대 정치학과에서 겸임교수로 강의하고 있다. 그는 <전쟁은 어떻게 끝나는가(How Wars End)>의 저자이다.
이 글은 포린어페어스 5월 20일자 기고문입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한국전쟁과 닮았다는 이야기는 PADO에서 이미 다룬 적이 있습니다만, 미국-이란 전쟁이 베트남전과 닮았다는 것은 이 에세이가 상당히 자세히 다룹니다. 6월 19일에 제네바에서 공식 서명할 미국-이란 합의문 내용에 대해서도 필자인 기디언 로즈는 매우 정확히 예측했습니다. 비즈니스를 하거나 전쟁을 하거나 사람들은 "이번에는 다를 것"이라고 생각하며 일을 추진하는데, 우리 생각보다 세상은 패턴을 반복하는 경향이 강하다고 필자는 주장합니다. 그래서 그는 이란 전쟁이 결국엔 베트남전의 패턴을 따라갈 것이라고 말합니다. 독자 여러분도 글을 읽다보면 "과연"이라며 무릎을 치시리라 생각됩니다. 이란 전쟁에 비해 우크라이나 전쟁은 좀 간략하게 다루고 있습니다만, 대략적으로는 잘 정리되어 있습니다. 한국전 종결을 둘러싸고 미국과 한국 지도자들이 어떻게 대립했는지, 그리고 미국, 유럽과 우크라이나는 어떻게 대립하고 협력할지에 대해서는 2023년 7월 7일자 PADO 기사 '우크라이나 휴전을 위한 한국전쟁의 교훈'이 좀 더 상세하게 다루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