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정학

미국 없는 유럽의 미래 (1): 유럽의 긴 휴가는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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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로이터/뉴스1

2024.08.16 14:56

Foreign Polic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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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7월 1일, 미국의 국제문제 매거진 포린폴리시는 미국 없이 유럽 홀로 안보를 꾸려나갈 수 있을지를 주제로 외교전문가 9명의 지상토론(紙上討論)을 게재했습니다. 우크라이나 전쟁과 중동사태가 지리적으로 훨씬 가까운 유럽의 지식인들은 분명 우리와는 현실인식이 다릅니다. 무엇보다 러시아의 서진(西進)을 훨씬 구체적인 위협으로 느낍니다. 푸틴과 러시아 내셔널리스트들은 구 러시아 제국의 복원이라는 원대한 구상이 있는 것이 아닌가라는 의구심이 강합니다.


푸틴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소련을 그리워하지 않는 사람은 심장이 없는 사람이고, 소련이 돌아오길 바라는 사람은 머리가 없는 사람이다." 소련의 공산주의 체제는 받아들이지 않더라도 소련의 광대한 제국은 복원시켜 보고 싶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보기에 러시아가 그런 꿈을 실현할 실질적 역량이 있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 군사력도 이번 전쟁을 통해 평가가 낮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이번 전쟁에서 러시아가 영토 확대에 성공한다면(가능성이 높습니다) 유럽인들의 공포는 더욱 커지게 될 것입니다. 게다가 미국이 인도태평양으로 외교안보 역량을 집중시키게 되면서 유럽이 홀로 러시아의 위협에 맞서야 한다면 공포는 극도에 달하게 될 것입니다.


가까이 있는 사람들보다 한 걸음 떨어져서 보는 사람이 상황을 더 잘 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유럽은 그 자체로 세계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큰 정치·경제·군사 블록이고, 그들의 상황인식과 그에 따른 대응은 결국 우리에게도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두 차례로 나눠 소개하는 유럽 외교전문가들의 논의를 보면서 유럽 현지의 분위기가 어떤지 한번 느껴보시기 바랍니다.


지난 75년 동안 유럽만큼 미국과 밀접히 연결된 곳은 없었다. 무엇보다 서유럽, 그리고 냉전종식 이후엔 동유럽의 대부분은 미국과 무역, 금융, 투자 분야에서 세계에서 가장 광범위한 유대관계를 갖고 번영을 누려왔다. 또한 유럽은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나토) 동맹의 75년 전통에 의해 공고화된 미군의 철통같은 방위 공약에 의존할 수도 있다. 미국과 유럽은 다른 몇몇 국가와 함께 서방이 주도해온 질서를 구성하는 많은 제도를 만들어왔다. 미국-유럽 동맹은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글로벌 시스템의 근간이 된 것은 틀림없다.


그러나 유럽이 미국에 의지할 수 있는 시대는 이제 거의 끝나가고 있다. 11월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누가 당선되든 상관없이 워싱턴의 관심은 이미 중국과 인도태평양으로 옮겨가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가 백악관으로 복귀하면 미국은 나토에 대한 안보공약에 의문을 제기하거나 심지어 나토 동맹에서 완전히 탈퇴할 수도 있으며, 이는 7월 워싱턴에서 열리는 나토 창설 75주년 기념 정상회의에 그늘을 드리우는 시나리오다.


유럽은 곧 위협에 홀로 직면할 수 있다. 러시아는 현재의 유럽연합(EU) 일부 회원국을 포함했던 냉전시대 제국의 복원을 목표로 2차 세계대전 이후 처음으로 유럽에서 대규모 지상전을 일으켰다. 중동전쟁이 더 큰 전쟁으로 번지면 새로운 이주민 물결이 EU으로 유입될 수 있다. 유럽은 또한 미중(美中) 경쟁의 장으로 변모했으며,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서방이 주도하는 질서와 이를 수정하거나 파괴하려는 중국 주도의 블록 간 경쟁의 첫번째 장면이 되었다.


많은 지도자와 사상가들이 쉽게 인정하듯이 유럽인들의 문제는 그들이 대부분 하드 파워의 세계에 대한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EU는 유럽대륙에서 전쟁을 추방하기 위해 만들어졌고, 1945년부터 2022년까지 유럽에서 대규모 전쟁이 발생하지 않은 것은 역사적 기준으로 볼 때 놀라울 정도로 긴 평화로서 이 프로젝트의 성공을 증명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유럽인들은 다른 곳에서도 전쟁이 사라지고 있으며, 그렇지 않더라도 미국이 항상 그들을 안전하게 지켜줄 것이라고 믿기 시작했다. EU의 외교정책 책임자인 조셉 보렐은 지난 3월 조지타운대 청중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마치 유럽인들은 '전쟁 때문이라면 미국에 전화하세요'라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이론적으로 4억5000만 명의 시민을 보유한 EU는 세계 주요 파워블록 중 하나다. 총 GDP는 미국에 이어 두 번째이며 러시아의 약 10배에 달한다. 많은 회원국, 특히 러시아와 지리적으로 가까운 회원국들은 세상에 대해 냉엄하고 전략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유럽은 경제적 자원을, 예컨대 러시아를 견제할 수 있는 지정학적 힘으로 전환하지 못했다.


역사를 잊어버리고 떠나 온 유럽의 긴 휴가가 끝났다는 느낌은 유럽의 수도들에서 느낄 수 있다. 2022년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후 올라프 숄츠 독일 총리는 시대의 전환을 선언했다. 더 극적으로,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유럽이 충분히 빨리 적응하지 못하면 "죽을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


따라서 문제는 다음과 같다. 유럽이 미국의 지원을 줄이면서 자신의 안보와 지속적인 번영을 보장하고 보렐이 말한 "잊고 있었던 세상의 가혹함"을 스스로 헤쳐나갈 방법을 배울 수 있을까? 저명한 사상가 9명에게 유럽이 미국 이후의 미래에 대비할 준비가 되어 있는지 의견을 물었다.


—스테판 테일, 포린폴리시 부편집장

1. 전쟁에 의해 탄생한 새로운 EU (마크 레오나드, 유럽외교관계협회(ECFR) 대표)

미국 의회는 4월 말 마침내 610억 달러 규모의 원조 패키지를 통과시킴으로써 우크라이나와 유럽 동맹국들에게 결정적인 숨통을 틔워주었다. 하지만 11월 미국 대통령 선거 이후에는 어떻게 될지 아무도 알 수 없다. 하지만 누가 당선되든 장기적으로 미국의 유럽에 대한 관여는 축소될 가능성이 높다. 결론은 유럽이 미국의 영향력 축소 속에서 지정학적 행위자로 부상할 수 있을지 여부에 모든 것이 달려 있다는 것이다.


유럽은 냉전 종식 이후 많은 실패를 경험했다. 1990년대 발칸전쟁 당시 유럽연합(EU)은 처음으로 전쟁 앞에서 무력함을 깨달았다. 한동안 EU는 명실상부한 지정학적 행위자로 변모하는 데 필요한 제도와 역량을 구축할 수 있을 것처럼 보였다. '공동안보 및 국방' 정책을 시작하고, 유럽방위청을 설립하고, EU 군사참모부를 출범시켰다.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성과가 없는 상태에서 2014년 러시아의 크름(크림)반도 병합은 또 한 차례 진실의 순간처럼 보였다. 그 후 몇 년 동안 안보협력을 위한 또 다른 틀인 '상설 구조적 협력'과 유럽방위기금이 탄생했다. 그러나 EU를 평화 프로젝트에서 하드파워까지 담는 프로젝트로 변모시키려는 노력은 매번 EU 회원국들의 이해부족으로 좌절되었다. 좁은 국익은 항상 더 큰 전략적 이익에 우선했다.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유럽대륙에서 전면전이 일어날 수 있다는 생각을 불러일으키며 모든 것을 바꾸어 놓았다. 이는 단순한 안보위기가 아니라 EU의 정체성과 직결된 문제다. 그 후 2년여 동안 유럽인들은 정책에 대해 다르게 생각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각 국가가 자신의 정체성과 유럽 프로젝트의 목적에 대해 생각하는 방식, 즉 보다 근본적인 것에서도 변화가 있었다. 지난 수십 년 동안 유럽통합은 번영, 무역, 삶의 질에 초점을 맞춘 평화 프로젝트로 여겨졌지만, 이제 통합의 동력은 전쟁에서 나오고 있다. 그리고 유럽 주요 국가들의 정체성에 깊은 변화가 나타나게 되자, 진정한 '지정학적 유럽'의 윤곽이 처음으로 구체화되기 시작했다.


EU가 평화 프로젝트에서 전쟁 프로젝트로 전환하는 데에는 여러 가지 차원이 있다.


첫 번째 중요한 변화는 프랑스에서 일어나고 있다. 냉전 이후 EU는 영향력을 놓고 경쟁하는 다극적 유럽보다 협력적이고 보편적이며 단극적인 유럽을 선호했다. 하지만 프랑스는 전통적으로 EU 인접 국가들의 모호성을 제거하는 데 있어 가장 큰 장애물이었다. 2008년 우크라이나와 조지아의 나토 가입 제안에 반대했고, 2019년에는 북마케도니아 및 알바니아와의 EU 가입 협상에 거부권을 행사했다. 그러나 지난 2년 동안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생각을 완전히 바꾸어 우크라이나를 시작으로 나토와 EU의 확대를 열렬히 지지하게 되었다. 그 결과 처음으로 유럽대륙의 전략적 경계와 EU를 이 전략적 경계에 따라 재건하는 것에 대한 범유럽적 합의가 이루어졌다.


어쩌면 더 큰 도전은 유럽이 하드파워를 진정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꺼려왔다는 점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튼튼한 국방 건설에 있어서 유럽의 가장 큰 걸림돌이었던 독일이 자국의 기존 전략을 뒤집었다. 올라프 숄츠 독일 총리가 러시아의 침공을 '차이텐벤데'(Zeitenwende) 즉 시대전환이라고 선언한 이후 국방비 지출(독일은 미국, 중국, 러시아, 인도에 이어 세계에서 다섯 번째로 국방비를 많이 지출할 예정)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측면에서도 패러다임의 전환이 이루어지고 있다. 이러한 변화의 가시적인 징후는 유럽의 나토 동맹국들이 올해 집단적으로 GDP의 2%를 국방비로 지출한다는 목표에 도달할 것이라는 점이다. 하드파워에 대한 이러한 초점은 브뤼셀의 EU기관들이 경제정책에 대해 생각하는 방식에도 변화를 가져왔다. 과거 EU는 상호의존성 구축이 적을 친구로 만드는 열쇠라고 믿었다. 이제 EU는 상호의존의 본질을 살펴보고 유럽 경제를 '디리스킹' 하는데 주력하고 있으며 경제력을 지정학적 도구로 보고 있다.


마지막으로, 지정학적 유럽의 출현은 지정학적 행위자가 된다는 것이 실제로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두 가지 상반된 개념 사이에 항상 갇혀 있었다. 한편으로 프랑스는 전략적 자율성을 추구하면서 유럽의 통일성을 위험에 빠뜨렸다. 반면에 영국과 중부 및 동유럽 대부분은 유럽-미국의 통일성을 요구하면서 유럽의 전략적 독립성을 희생하는 대가를 치렀다. 이제 우크라이나 전쟁은 미국에게는 독립적인 유럽이 아니라 지나치게 의존적인 유럽이 가장 큰 문제라는 점을 보여준 동시에 프랑스에게는 미국이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에 너무 중요하기 때문에 EU를 단결시켜 미국에 대항한다는 것은 불가능함을 보여줌으로써 이 딜레마를 해결했다. 마지막으로, 예상대로 올해 영국 노동당이 집권하고 트럼프가 당선될 경우 영국은 EU와 연대할 가능성이 훨씬 높아질 것이다. 역설적이게도 우크라이나에는 안좋은 일임에도 불구하고 트럼프의 복귀는 유럽 협력을 강화하는 틀을 만들 수 있다.


이 모든 영역에서의 성공은 매우 수많은 변수에 달려 있으며 보장된 것은 거의 없다시피 하다. 차기 대선을 앞두고 마린 르펜이 여론조사에서 선두를 달리고 있는 프랑스처럼 이들 국가의 국내 정치가 근본적으로 궤도를 바꿀 수도 있다. 그리고 러시아의 전쟁으로 촉발된 유럽의 문화, 사고방식, 정체성의 변화가 성숙하려면 시간과 인내가 필요하다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이번에는 마침내 달라질 것이라고 믿을 만한 이유가 있다.

2. 폭풍 속의 유럽 (콘스탄체 스텔첸뮐러, 브루킹스연구소 미국유럽센터 센터장)

독일의 국내정보 책임자인 토마스 할덴방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당장의 폭풍우라면 중국의 글로벌패권 추구는 기후변화같은 것이라고 말한다. 현재 유럽이 직면하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지정학적 폭풍우이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에 대한 공세뿐만 아니라 부정부패의 무기화, 암살, 사이버공격, 스파이활동, 가짜정보, 선거개입, 통신방해, 핵심인프라 파괴 등을 통해 유럽에 대한 이른바 하이브리드 전쟁을 벌이고 있다. 중국 역시 유럽을 전략적 요충지로 보고 있다. 물리적 및 디지털 인프라를 사들이고, 유럽시장에 전기차를 넘쳐나게 하면서 경제전쟁을 준비하고 있으며, 유럽에 비밀 경찰서를 설치하여 반체제 인사들을 감시하고 압박하고 있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5월 유럽 순방지로 프랑스, 세르비아, 헝가리를 선택한 것은 중국의 대유럽 전략인 '분리통치'를 가장 분명하게 보여주는 신호였다.


베이징, 모스크바, 평양, 테헤란에게 우크라이나 전쟁은 미국에 맞서는 거대한 글로벌 분쟁의 최전선에 불과하며, 유럽과 그 주변 지역은 이 분쟁의 핵심 전장이다. 중동에서는 이스라엘과 하마스의 전쟁이 더 큰 지역 분쟁으로 확대되어 유럽으로의 대규모 이주를 촉발할 수 있다. 러시아는 아프리카에서 또 다른 전선을 개척하여 유럽과 미국의 평화유지군을 서아프리카 사헬 지역에서 몰아내고 권위주의 정권을 안정시키며 크렘린궁에 또 다른 유럽 압박 카드를 제공했다.


이 모든 것은 이제 유럽에게 있어서 역사와 지정학 문제를 홀가분히 벗어던진 긴 휴가가 끝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무역과 경제적 상호의존이 평화와 협력을 보장할 것이라는 가정에 기초한 초세계화에 대한 유럽의 정책결정, 특히 독일의 전략적 베팅이 실패했음을 의미한다.


이제 지정학적 유럽이 탄생할 수 있는 시점이 된 것인지는 두고 볼 일이다. 유럽인들이 현 상황의 심각성을 깨달았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는 우크라이나를 돕기 위해 예산과 무기고를 탈탈 털고 있으며, 국방비를 늘리고, 냉전 이후 처음으로 영토 방어와 지역 억제력을 업그레이드하고 있다는 점이다. 주요국에서는 급격한 정책변화가 있었다. 프랑스는 EU와 나토의 확대를 원하고, 독일은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재래식 군대를 건설하고, 영국은 EU와 협력하기를 원하며, 8년간의 반(反) EU적 정권이 물러난 후 폴란드도 마찬가지다. 중립국인 핀란드와 스웨덴도 나토에 가입했고, 스위스도 조용히 선택을 저울질하고 있다.


이러한 변화는 두려움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에 실체가 있다. 그리고 그 두려움의 원인이 실재하기 때문에 변화는 지속될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많은 심각한 장애물이 남아 있다. 각국 정부는 아직 복잡한 제도적 절차, 예산 제약, 정치적 의사결정의 파편화를 극복할 방법을 찾지 못했으며, 전략을 명확히 제시하고 이를 실행에 옮길 수 있는 국가도 거의 없다. 유럽의 큰 나라들은 서로 협력하는 데 끔찍히도 서툴다. 작은 나라들은 큰 나라들이 위압적이거나 이기적이라고 원망하지만, 그렇다고 스스로 제안을 하거나 다른 나라들과 협력해 목소리를 내는 경우가 거의 없다. 남북, 동서, 중앙과 주변부의 깊은 분열을 극복하려면 아이디어와 리더십이 필요하지만 현재 이 두 가지 모두 부족하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이 유럽의 미래에 대해 열정적인 연설을 할 때 다른 EU 지도자들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불만스러워 하지만 그렇다고 대안적인 비전을 제시하지도 않는다. 이 위험한 시기에 유럽을 안전하게 이끌기 위해서는 지출의 우선순위를 재설정하는 것뿐만 아니라 말 그대로 싸울 준비를 해 억제력을 강화하는 등 비용을 들여야 하고 희생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용기 있는 정치인이 보이지 않는다. 우크라이나의 경우, 유럽 국가들은 우크라이나를 위해 자신들이 이뤄내고 있는 것을 거듭 자축하고는 있지만 확전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우크라이나가 유럽을 대신해 러시아를 더욱 밀어내는데 필요한 조치를 취하지 못하고 있다. 그들은 우크라이나의 패배가 유럽 안보에 재앙이 될 것이며 앞으로 러시아를 억제하기 위해 더 큰 노력이 필요할 것임을 알고 있지만, 사실로 알고 있는 것을 실행에 옮기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실패는 유럽이 미국의 막대한 지원에 의존하지 않고 독자적으로 행동하는 것을 방해할 뿐만 아니라. 러시아 및 기타 위협에 대한 각국의 시각에 따라 유럽 정치가 분열되고 다시 자국중심적으로 될 위험도 있다. 이는 유럽을 지금보다 훨씬 더 적에게 취약하게 만들 것이다.


한편 유럽의 강경 우파는 백인만의 비자유주의적인 '기독교 철옹성 유럽'을 꿈꾸고 있으며, 이러한 움직임은 러시아와 중국의 지원을 받고 있다. 이 강경 우파는 헌신적이고 잘 조직된 이데올로그들이 운영하는 트럼프 2기 행정부가 자신들을 가신으로 취급할 가능성이 더 높더라도 자신들과 힘을 합치기를 바라고 있다. 이에 맞서 자유롭고 민주적인 유럽은 실용적인 통합, 국방 및 기타 비용에 대한 적극적인 공동 비용조달, EU의 확대, EU의 가장 힘센 국가들의 계몽적이고 이타적인 리더십을 결합해야만 1945년 이후 최악의 지정학적 전환기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화염폭풍이 유럽에 닥칠 수 있다.

3. 트럼프에 대한 대비 부족 (나탈리 토치, 로마소재 국제문제연구소(IAI) 소장)

2016년 도널드 트럼프가 미국 대통령으로 당선되었을 때 이 사건은 유럽을 단결시켰다. 유럽 정부들은 몇 달 전 영국 유권자들의 EU 탈퇴 결정으로 여전히 충격에 휩싸여 있었고, 지도자들은 브렉시트가 다른 탈퇴의 도미노 효과를 촉발할까 우려했다. 유럽 부채 위기의 상처와 이민을 둘러싼 격렬한 분열은 여전히 생생했다.


트럼프는 유럽인들이 자기만족의 백일몽에서 깨어나도록 했고, 유럽인들은 EU의 가치, 즉 민주주의, 다자주의, 규범에 기반한 질서 등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되었다. 미국이 이러한 질서에서 이탈하자 당시 EU의 확고한 리더였던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가 자유 세계의 목소리를 대변하게 되었다. 유럽인들은 분열하고 있을 때가 아님을 알고 있었다. 당시 러시아가 크름(크림)반도를 합병하고 내셔널리스트 포퓰리즘이 득세하는 등 유럽 대륙은 이미 불타고 있었기 때문이다. 고조되는 위협에 직면하고 미국으로부터 버림받은 유럽인들은 함께 뭉쳐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지금 유럽인들이 직면해 있는 질문은 트럼프가 백악관으로 돌아오는 경우 유럽이 다시 단결할 수 있을지 여부다. 물론 유럽이 단결해야 하는 이유는 트럼프 때문만은 아니다. 유럽과 그 주변 지역은 2016년보다 오늘날 훨씬 더 큰 화염에 휩싸여 있다. 러시아 관리들은 러시아 제국에 대한 갈망은 우크라이나 정복 정도로 충족되지 않을 것임을 공개적으로 언급하고 있고, 이에 따라 유럽은 전쟁 중이다. 또 유럽 남동쪽에서는 이스라엘과 하마스의 전쟁이 더 큰 분쟁으로 번질 위기에 처해 있다. 아프리카의 광활한 사헬 지역에서는 러시아가 난민의 이동을 무기화하는 등 유럽을 때릴 수 있는 모든 옵션을 갖춘 채 지배력을 강화하면서 유럽 국가들과 미국이 밀려나고 있다.


유럽은 더이상 중국이 언젠가 자유주의 질서의 책임 있는 이해관계자가 될 것이라는 환상을 품지 않는다. 2016년과 달리 EU는 다자주의를 옹호하는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주장에 더이상 속지 않는다. 지난 5월 시진핑의 프랑스, 세르비아, 헝가리 방문에서 보듯이 중국의 '분리통치' 전략은 순진한 유럽인들도 알아차릴 수 있을 만큼 노골화되었다. 2016년에는 다극화 세계가 다자주의와 자유주의 질서와 양립할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면, 오늘날에는 후자의 두 가지가 생명유지 장치로 겨우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유럽이 직면한 모든 위협을 고려할 때 트럼프가 EU에 미치는 통합 효과는 2016년보다 지금이 기하급수적으로 더 강력할 것이다.


하지만 이는 희망이 섞인 생각일 수도 있다. 유럽의 민주주의 국가들도 우익 내셔널리즘이 부상하는 등 미국과 비슷한 정치적 경련을 겪고 있다. 높은 인플레이션과 불충분한 경제 성장은 다시 한번 강경우파의 돛에 바람을 불어넣었다. 게다가 유럽의 내셔널리스트들은 더이상 영국의 재앙적 탈퇴를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내부로부터 EU의 가치를 허물어 버리려고 한다. 그들은 헝가리와 슬로바키아 등 일부 동유럽 국가뿐만 아니라 이탈리아와 네덜란드에서도 정권을 장악했으며 올해 말에는 오스트리아에서도 승리할 가능성이 있다. 그리고 그들은 브뤼셀에서 점점 더 많은 협력을 통해 EU의 정책결정에서 집단적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으며, 수십 년 동안 유럽의 단결과 통합을 주도해온 보수주의-사회주의-자유주의자-녹색당 다수파에 쐐기를 박으려 하고 있다.


'트럼프 2.0'은 2016년보다 훨씬 더 혼란스럽고 분열된 유럽 앞에 등장할 것이다. 이번에는 트럼프와 눈을 맞추고 그의 EU 폄하에 동의하는 유럽 정부들이 더 많아졌다. 트럼프는 시진핑 주석과 마찬가지로 유럽을 '분리통치' 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될 것이다.


이러한 분열은 유럽 정책의 광범위한 영역으로 확대된다. 우크라이나에서의 전쟁과 다른 위기로 인해 이러한 정책이 점점 더 시급해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내셔널리스트들이 점점 더 힘을 발휘하고 트럼프와 동맹을 맺을 가능성이 있는 상황에서 EU가 국방, 기후, 에너지, 기술, EU확대에 대한 야심찬 조치에 합의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EU의 창시자 중 한 명인 장 모네는 유럽의 연합이 위기를 통해 발전할 것이라고 예측했다. 1945년 이후 다양한 정치적, 경제적 격변이 유럽인들이 더욱 긴밀한 연합을 구축하는 데 힘을 실어주었기 때문에 지금까지 그의 예언은 사실로 입증되었다. 하지만 유럽에 대한 위협이 커지고 있는 상황에서 트럼프의 재선이 유럽-미국의 유대관계를 진정으로 약화시킬 경우, 이는 EU에게 감당하기 어려운 숙제가 될 수 있다.

4. 만약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멸망시킨다면 (칼 빌트, 유럽외교관계협회(ECFR) 공동의장·전 스웨덴 총리)

우크라이나와 서방 후원자들이 결의를 잃으면 유럽은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의 나머지 지역을 정복하고 꼭두각시 정권을 설치한 후 우크라이나의 대부분 또는 전부를 새로운 러시아 제국에 점진적으로 통합하는 시나리오에 직면할 수 있다.


물론 장기적으로는 그러한 승리가 러시아에게 엄청난 출혈을 요구할 것이다. 이 억압적인 제국은 점령지를 완전히 흡수하고, 저항하는 인구를 제압하고, 새로운 대결의 시대에 막대한 군사비 지출 부담을 감당하는데 어려움을 겪게 될 것이다. 러시아는 중세 몽골의 멍에를 21세기 중국의 멍에로 바꾸고, 전 세계가 새로운 친환경 디지털 시대로 접어드는 상황에서 심각하게 뒤처지게 될 것이다. 조만간 러시아는 한 세기가 채 되지 않아 세 번째 국가붕괴에 직면하게 될 수도 있다.


러시아의 승리와 우크라이나의 패망은 유럽에도 매우 심각한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우선, 수천만 명의 새로운 난민이 발생할 것으로 예상할 수 있다. 러시아가 점령한 지역에서는―2014년의 첫 점령지와 2022년 이후의 새 점령지―인구가 상당히 감소했다. 러시아의 추가 정복에도 비슷한 비율이 적용된다면, 이미 유럽이 수용하고 있는 400만 명 조금 넘는 우크라이나 피란민에 더해 1000만~1500만 명의 피란민이 인근 유럽 국가로 유입될 것으로 예상하는 것이 현실적일 것이다.


러시아의 승리는 여러 측면에서 유럽 정치를 변화시킬 것이다. 최근까지 파리, 베를린, 그리고 다른 유럽 수도에서 논의되었던 새로운 러시아와의 공존 방안은 완전히 비현실적인 것이 될 것이다. 우크라이나 망명정부는 폴란드 바르샤바나 중부 유럽 어딘가에 자리잡게 될 것이다. 점점 더 절박해지는 러시아 정권의 위협을 확실하게 억제하기 위해서는 올해 폴란드 국방비로 예상되는 GDP의 4%, 나토의 대부분 지역에서 예상되는 최소 2%의 국방비를 다시 두 배 늘려야 할 것이다.


새로운 분쟁이 발생할 수도 있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복원하고 싶은 러시아 제국의 옛 국경은 어디일까? 핀란드, 폴란드, 발트해 연안 국가들은 모두 한때 러시아의 통치를 받았으며, 크렘린궁이 승인한 텔레비전 방송에서는 러시아 제국을 꿈꾸는 자들이 이런 식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우크라이나를 넘어서까지 제국을 복원하는 것은 과중한 부담을 안고 고군분투하는 정권에겐 사실 비현실적인 염원일 수 있지만, 핀란드, 라트비아, 폴란드에서 누가 감히 그것을 비현실적인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 유럽에 새로운 대립의 시대가 도래한 것은 확실하다.


푸틴은 우크라이나를 굴복시키고 서방과 미국의 지배에서 벗어나 세계 질서를 재조정하기 위해 전쟁을 벌이고 있다. 우크라이나를 굴복시키는 일에서는 중국의 지원을 제대로 못 받고 있지만, 세계 질서를 재조정하는 일에서는 서방의 약화를 자국의 입지 강화로 간주하는 중국을 강력한 동맹으로 확보하고 있다.


기시다 일본 총리는 4월 미국 의회에서 오늘의 우크라이나가 내일은 동아시아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사이공 함락과 카불 함락과 마찬가지로 우크라이나에서의 러시아 승리는 전 세계에 미국의 힘이 약화되고 있다는 더욱 중요한 신호로 받아들여질 것이다. 이 신호를 보고 수많은 행위자들의 모험주의 욕구가 더욱 커질 수밖에 없다.


우크라이나에서 러시아가 승리하게 되면 우크라이나 국민에게는 재앙이 될 것이고, 유럽의 안보에는 매우 심각한 위협이 될 것이며, 전 세계에는 심각한 불안정을 초래할 것이다. 결국에는 이것이 러시아 자체의 붕괴로 이어질 수도 있는데, 이는 유럽이 대비해야 할 완전히 다른 결과를 낳을 것이다.


새뮤얼 헌팅턴이 1970년 창간한 국제문제·외교 전문지. 1979년 카네기국제평화재단이 인수했다가 2008년 당시 워싱턴포스트 소유주였던 그레이엄홀딩스가 인수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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