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이슈

고립의 시대 ① '혼자'를 택하는 사람들

미국인은 그 어느 때보다 많은 시간을 홀로 보낸다. 이는 우리의 성격, 정치, 심지어 현실세계와의 관계까지 바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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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1.31 15:58

The Atlanti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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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그 어느 때보다 자기 자신 속으로 침잠하고 있습니다. 거리를 바쁘게 쏘다니는 배달 오토바이부터 급감하는 혼인률까지, 세계 곳곳에서 그 현상을 감지할 수 있습니다. 그에 따라 요식업, 엔터테인먼트 산업 등이 지각 변동을 겪기도 하지만 그보다 더 심각하고 본질적인 문제가 있습니다. 바로 우리의 행복감, 정신건강에 미치는 영향입니다. 한 연구에 따르면 홀로 보내는 시간이 5%p 늘어나는 것이 삶의 만족도에 미치는 영향은 가구 소득의 10% 감소와 맞먹습니다. 애틀랜틱 2025년 2월호 커버스토리에서 데릭 톰슨은 '자발적 고독'의 증가에 대한 각종 연구를 섭렵하고 이것이 개인의 정신건강부터 사회와 정치 영역에까지 미치는 영향들을 유려한 솜씨로 풀어냅니다. 현대 사회를 이해하는 데 필수적으로 읽어야 할 기사라고 감히 추천드립니다. 8000단어에 가까운 장문의 기사라 1, 2부로 나누어 싣습니다.


'바 운영 안 함'

노스캐롤라이나에 있는 내 집에서 차로 조금만 가면 작은 멕시칸 레스토랑이 있다. 주방이 보이는 바 카운터에 스툴 4개가 있고 테이블이 몇 개 놓인 곳이다. 지난 여름의 한 무더운 오후, 나는 아내와 딸과 함께 그곳에 들어갔다. 가게는 텅 비어 있었다. 하지만 자세히 보니 장사가 잘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바 카운터는 포장 음식으로 가득했다. 큰 갈색 봉투가 아홉 개나 있었다.


우리가 식사하는 동안 여섯 명 정도가 레스토랑에 들어오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러나 그들은 자리에 앉지 않았다. 각자 문을 밀고 들어와 카운터로 걸어가 바에서 봉투를 집어 들고는 나갔다. 주방과 손님 사이의 섬세한 안무 속에서 단 한마디도 오가지 않았다. 한때 수다스러운 사교의 장소였던 바는 이제 손님들이 집에서 먹을 음식을 픽업하는 조용한 집하장으로 바뀌어 있었다.


팬데믹 이전까지만 해도 이 레스토랑의 바는 단골들로 북적였다. "좌석이 몇 개 없지만 꽤 활기찬 곳이었죠." 레스토랑의 지배인 레이 모셔가 말했다.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슬퍼요." 그가 말을 이었다. "포장 봉투가 바 전체를 차지하면서 손님과 직원 사이의 소통이 막힌다는 걸 알아요. 하지만 픽업 음식을 둘 다른 곳이 없네요." 그는 '바 좌석 사용 불가' 라는 팻말을 붙였다.


바에 걸린 이 팻말은 요식업계의 시대상을 보여준다. 지난 수십 년간 이 업계는 테이블 서비스에서 포장으로 전환했고, 이는 팬데믹을 거치며 가속화되었으며 팬데믹 사태가 잠잠해진 후에도 계속되고 있다. 전미레스토랑협회에 따르면 2023년에는 전체 레스토랑 이용객의 74%가 "매장 외" 고객, 즉 포장과 배달 고객이었다. 이는 코로나19 이전의 61%에서 증가한 수치다.



외식 감소의 이면에는 '혼밥'의 증가가 있다. 지난 20년간 미국 성인이 친구들과 저녁 식사나 음주를 하는 비율은 30% 이상 감소했다. "요식업계에서 고립주의적 변화가 일어나고 있어요." 워싱턴DC의 레스토랑 사업자 스티브 살리스가 내게 말했다. "사람들이 오늘날 세상에 불편함을 느끼는 것 같아요. 자신의 집을 피난처로 삼는 거죠. 밖으로 나오게 하는 게 쉽지 않아요." 미국인들이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할 때도 혼자 하는 경우가 훨씬 더 많아졌다. 온라인 예약 플랫폼 오픈테이블이 수집한 데이터에 따르면 지난 2년간 혼밥이 29% 증가했다. 가장 큰 이유는 더 많은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요식업계의 진화는 미국의 또 다른 산업인 할리우드의 궤적을 따라가고 있다. 1930년대에 영상 엔터테인먼트는 극장에서만 존재했다. 일반적인 미국인은 한 달에 몇 번씩 영화를 보러 갔다. 영화는 필연적으로 집단적인 경험이었고 친구들 및 낯선 사람들과 함께 즐기는 것이었다. 하지만 기술은 영화를 가정 배달 시스템으로 바꾸어 놓았다. 오늘날 일반적인 미국 성인은 1년에 영화 티켓을 약 3장 구매한다. 일주일에 거의 19시간, 다시 말해 영화 8편에 해당하는 시간 동안 텔레비전을 시청한다. 식사와 마찬가지로 엔터테인먼트에서도 현대성은 과거에는 사람들과 함께하는 의례儀禮, ritual였던 것을 집에 틀어박힌 은둔과 고독의 경험으로 변모시켰다.


자발적 고독은 21세기 미국의 가장 중요한 사회적 현상일 수 있다.


미국 여가 생활의 사사화私事化는 더 큰 이야기의 한 부분일 뿐이다. 미국인은 신뢰할 만한 데이터가 존재하는 1965년 이래 그 어느 때보다도 다른 사람들과 보내는 시간이 줄어들었다. 1965년부터 20세기 말까지 대면 사교 활동은 서서히 감소했다. 노동통계국이 실시하는 연례 연구인 미국인 시간 활용 조사American Time Use Survey에 따르면 2003년부터 2023년 사이에 이는 20% 이상 급감했다. 미혼 남성과 25세 미만의 사람들 사이에서는 그 감소율이 35%를 넘었다. 팬데믹 동안 혼자 보내는 시간이 예상대로 급증했다. 하지만 이러한 추세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라는 말을 들어보기도 전에 시작되었고 팬데믹이 종식된 후에도 계속되었다. 필라델피아 연방준비은행의 경제학자 엔긴 아탈레이Enghin Atalay에 따르면 미국인들은 2021년보다 2023년에 혼자 보내는 시간이 더 많았다. (그는 다른 사람과 전화 통화 중이거나 컴퓨터 앞에 있더라도 "방 안에 혼자 있는 경우"를 모두 "혼자"라고 분류했다. 이 글 전체에서도 그렇게 간주할 것이다.) 동반자 관계의 침식은 오늘날 미국인의 삶에서 볼 수 있는 각종 기이하고 우울한 현상에서 확인할 수 있다. 텔레비전을 시청하는 남성들은 집 밖에서 누군가와 어울리는 시간의 7배를 TV 앞에서 보낸다. 반려동물을 키우는 여성은 일반적으로 같은 종의 친구들과 대면 접촉하는 시간보다 반려동물과 적극적으로 교감하는 시간이 더 길다. 2000년대 초반 이후 미국인들이 핵가족 외의 사람들을 돕거나 돌보는 데 쓴다고 말하는 시간은 3분의1 이상 감소했다.


자발적 고독은 21세기 미국의 가장 중요한 사회적 현상일 수 있다. 놀랍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많은 전문가들은 이 현상을 외로움이라는 주제로 단순화했다. 2023년, 바이든 대통령의 의무감醫務監 비벡 머시는 미국의 '외로움이라는 전염병'에 대한 81페이지 분량의 경고문을 발표하며, 그 부정적인 건강 영향이 흡연이나 비만과 맞먹는다고 주장했다. 점점 더 많은 공중보건 관계자들이 외로움을 선진국의 차기 주요 공중보건 문제로 보고 있다. 영국은 현재 외로움 담당 장관이 있다. 일본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고독과 외로움은 같은 것이 아니다. "어느 정도 외로움을 느끼는 것은 사실 매우 건강한 정서적 반응이죠." 뉴욕대학교 사회학자 에릭 클리넨버그Eric Klinenberg가 내게 말했다. "그런 신호가 당신을 소파에서 일으켜 대면 상호작용으로 이끄는 거예요." 여기서 진짜 문제, 즉 미국의 사회적 위기의 본질은 대부분의 미국인들이 다른 사람들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라는 생물학적 신호에 반응하지 않는 듯 보인다는 점이다. 그들의 고독 수준은 급증하는 반면, 외로움을 측정하는 많은 지표들은 실제로 정체되어 있거나 감소하고 있다. 널리 사용되는 UCLA 외로움 척도에 대한 2021년 연구는 "'외로움이라는 전염병'이라는 자주 사용되는 용어가 과장된 것으로 보인다"라고 결론지었다. 젊은이들이 과거보다 더 외롭긴 하지만 오늘날 외로움이 전반적으로 더 증가하고 있다는 증거는 거의 없다. 2023년 갤럽 조사에 따르면 "어제 하루 중 대부분" 외로움을 경험했다고 말한 미국인의 비율은 2021년에서 2023년 사이에 약 3분의1 정도 감소했다. 반면 아탈레이의 계산에 따르면 혼자 보내는 시간은 소폭 증가했다.



매일매일, 시시각각 우리는 이러한 삶의 방식을, 그 편안함과 손쉬운 오락거리를 택하고 있다. 하지만 편리함은 저주가 될 수 있다. 우리의 습관은 아탈레이가 "고독의 세기"라고 이르는 시대를 만들어내고 있다. 이는 '반사회적 세기anti-social century'다.


지난 몇 달 동안, 나는 미국의 반사회적 성향에 대해 심리학자, 정치학자, 사회학자, 테크전문가들과 이야기를 나눴다. 이들과 나눈 대화의 세부사항은 달랐지만 공통적인 테마를 갖고 있었다. 사회 전반에 걸쳐 확대되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반복적으로 행사되는 고독에 대한 개인의 선호가 미국의 시민적, 정신적 정체성을 재구성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로 인한 영향은 우리의 행복, 우리의 공동체, 우리의 정치, 심지어 현실에 대한 우리의 이해에까지 미칠 정도로 광범위하다.

사회적 세기의 종말

20세기 전반기는 놀라울 정도로 사회적이었다. 1900년부터 1960년까지 교회 신도 수가 급증했고 노동조합 참여도 마찬가지였다. 혼인율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고 출산율은 그 유명한 '베이비붐'을 누렸다. 독서 클럽과 자원봉사 단체를 포함한 각종 협회들이 번창했다. 뉴딜 정책은 미국의 분관 도서관 시스템을 세계의 부러움의 대상으로 만들었다. 전국의 지역사회와 개발업자들은 극장, 음악 공연장, 놀이터, 그리고 온갖 종류의 모임 장소를 건설했다.


하지만 1970년대에 미국은 침잠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정치학자 로버트 퍼트넘1이 2000년 저서 '나 홀로 볼링'에 이를 기술한 것으로 유명하다. 결혼과 같은 몇몇 공동체적 제도는 천천히 침식되었다. 다른 제도는 빠르게 사라졌다. 1985년부터 1994년 사이에 지역사회 조직에 대한 적극적인 참여는 거의 절반으로 줄었다. 이러한 감소는 놀라울 정도로 광범위했다. 퍼트넘이 추적한 거의 모든 사회적 활동과 모든 인구통계 집단에 영향을 미쳤다.


1970년대에 무슨 일이 있었나? 사회학자 클리넨버그는 정치적 우선순위의 변화를 지적한다. 정부가 공공 공간 건설을 크게 줄였다. "도서관, 학교 체육관, 노동조합 회관처럼 지역사회 생활의 구심점이었던 장소들이 접근하기 어려워지거나 아예 문을 닫았어요." 그가 내게 말했다. 퍼트넘은 무엇보다도 무절제한 개인주의의 수용과 같은 새로운 도덕적 가치를 지적한다. 하지만 그는 가장 중요한 요인 중 두 가지가 당시 이미 널리 퍼진 기술이었음을 발견했다. 바로 자동차와 텔레비전이다.


20세기 후반부터 미국인들은 자동차를 이용해 서로로부터 점점 더 멀리 떨어져 살게 되었다. 이는 교외지역의 성장을 가능케 했으며 그와 함께 사적인 뒤뜰의 파티오, 사적인 수영장, 더욱 사적인 삶으로의 퇴각이 이루어졌다. 미국인들은 차에서 내리면 텔레비전 앞에 자리를 잡았다. 1965년부터 1995년 사이에 일반적인 성인은 주당 6시간의 여가 시간을 얻었다. 그들은 이 시간—연간 300시간!—을 지역사회 봉사나 농구, 독서, 뜨개질, 또는 이 네 가지 모두에 쓸 수 있었다. 하지만 추가 시간의 거의 전부를 TV 시청에 쏟아부었다.


텔레비전은 미국인의 실내 장식, 우리의 인간관계, 그리고 우리의 공동체를 변화시켰다. 1970년에는 6학년 학생의 단 6%만이 자신의 방에 TV를 가지고 있었다. 1999년에는 그 비율이 77%로 증가했다. 1990년대의 시간 기록을 보면 부부가 서로 대화하는 시간보다 거의 4배나 많은 시간을 함께 TV를 시청하는 데 보냈음을 알 수 있다. TV가 자신의 "주된 오락 형태"라고 말한 사람들은 퍼트넘이 집계한 거의 모든 사회적 활동에 참여할 가능성이 더 낮았다. 자원봉사, 교회 출석, 저녁 파티 참석, 소풍, 헌혈, 심지어 인사장 보내기까지. 마치 보드게임 클루Clue에서의 살인 사건처럼 미국의 사회적 연결의 죽음에는 수많은 용의자가 있었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가장 유력한 범인이 누구인지는 자명하다. 그것은 전자식 텔레비전을 발명한 필로 판스워스다.

전화기의 포로

20세기의 상징적인 기술인 자동차와 텔레비전이 미국인의 고독의 부상을 시작했다면, 21세기의 가장 악명 높은 하드웨어는 우리 나라의 반사회적 성향에 계속 연료를 공급했고 실제로 이를 가속화했다. 수많은 책과 기사, 케이블 뉴스는 미국인들에게 스마트폰이 정신 건강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으며 특히 청소년들에게 해로울 수 있다고 경고해왔다. 하지만 이러한 우려 섞인 보도는 이 기기들이 우리의 의식적 경험을 얼마나 크게 변화시켰는지를 고려하면 오히려 절제된 것이나 다름없다. 일반적인 사람은 하루에 약 900분을 깨어 있다. 디지털 페어런트후드 이니셔티브Digital Parenthood Initiative에 따르면 미국의 어린이와 십대들은 평균적으로 평일에는 약 270분, 주말에는 380분을 스크린을 들여다보는 데 보낸다. 이에 따르면 스크린은 아이들이 깨어 있는 시간의 30% 이상을 차지한다.


사회적으로 미발달된 유년기는 거의 필연적으로 사회적으로 위축된 성인기로 이어진다.


이러한 '스크린 타임'의 일부는 어떤 면에서 사회적이다. 하지만 동영상을 공유하거나 친구들과 문자를 주고받는 것은 대면 상호작용의 희미한 모방에 불과하다. 젊은이들이 휴대폰으로 무엇을 하는지보다 더 우려되는 것은 그들이 무엇을 하지 않느냐이다. 젊은이들은 이전 세대보다 운전면허를 따거나, 데이트를 하거나, 한 명 이상의 친한 친구를 갖거나, 심지어 친구들과 어울리는 것조차 할 가능성이 더 낮다. 방과 후에 거의 매일 친구들과 만난다고 말하는 남녀 학생의 비율은 1990년대 초반 이후 거의 50% 감소했으며 가장 급격한 감소는 2010년대에 일어났다.


어울림의 감소는 단순히 스키니진보다 나팔바지를 선호하는 것과 같은 평범한 세대 변화로 일축할 수 없다. 심리학자 조너선 하이트는 '불안 세대'에서 청소년기를 포함한 인간의 유년기는 동물계 전체에서 유일무이하게 민감한 시기라고 쓴다. 인간의 뇌는 5세까지 완전한 크기의 90%까지 성장하지만 신경 회로가 성숙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린다. 우리의 긴 유년기는 놀이를 통한 사회적 학습의 연장된 견습 기간을 계획한 진화의 방식일 수 있다. 가장 좋은 형태의 놀이는 신체적으로, 야외에서, 다른 아이들과 함께, 감독 없이 이루어지는 것으로, 아이들이 갈등을 관리하고 고통을 견디는 방법을 알아내는 동안 자신의 능력의 한계에 도전할 수 있게 한다. 하지만 이제 젊은이들의 관심은 그들의 신체로부터 벗어나게 만드는 기기들로 집중되어, 그들에게 필요한 물리적 세계의 교육을 박탈하고 있다.


십대의 불안과 우울은 거의 기록적인 수준에 도달했다. 2023년에 실시된 고등학생에 대한 최신 정부 조사에 따르면 십대 여학생의 절반 이상이 "지속적인 슬픔이나 절망감"을 느낀다고 답했다. 이러한 데이터는 충격적이지만 놀라운 것은 아니다. 놀이를 박탈당한 어린 쥐와 원숭이는 사회적, 정서적으로 손상된 채로 자란다. 스스로를 '사회적 동물'이라 부르는 인간이 다르리라 생각하는 게 오히려 이상할 것이다.


사회적으로 미발달된 유년기는 거의 필연적으로 사회적으로 위축된 성인기로 이어진다. 틱톡의 인기 트렌드 중 하나는 20대들이 친구가 종종 너무 피곤하거나 불안해서 집 밖으로 나가기 싫다는 이유로 약속을 취소할 때, 창의적인 방식으로 이를 환영하는 것이다. 이러한 영상들은 바보 같지만 꽤 재미있기도 하다. 물론 공감이 가는 부분도 있다. 우리 모두 일정이 빡빡한 상황에서 자유시간을 되찾았을 때의 안도감을 알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영상의 수가 엄청나다는 것은 좀 불안하다. 누군가가 외롭고 현실세계와의 접촉을 간절히 원한다면, 그 사람은 여전히 수년간의 팬데믹으로 인한 갑갑증에서 회복 중인 20대일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미국에서 가장 고립된 세대인 20대는 집 밖으로 나가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그들은 카메라를 켜고 SNS에 사람들과 어울리지 않는 것의 기쁨을 세상에 광고하고 있다.


젊은 성인들이 현실세계의 어울림이 가져오는 정서적 비용에 압도되고, 가까운 친구들과도 물리적 거리를 두려 한다면, 이는 휴대폰이 청소년기만 재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우정의 심리도 뒤흔들고 있음을 시사한다.


1960년대에 메릴랜드주 베세스다의 해군의학연구소 소속 심리학자 어윈 알트만Irwin Altman은 친밀도가 증가하는 것을 특징으로 하는 우정 공식을 공동 개발했다. 우정의 초기 단계에서 사람들은 사소한 세부사항을 공유하며 가벼운 대화를 나눈다. 신뢰가 쌓이면서 그들의 대화는 깊어지고 더 사적인 정보가 포함된다. 무언가를 털어놓는 것이 습관적이고 쉬워진다. 알트만은 나중에 중요한 팁을 추가했다. 친구들 사이에는 친밀함만큼이나 경계가 필요하다. 재충전을 위한 혼자만의 시간은 건강한 관계 유지에 필수적이다.


휴대폰은 고독이 예전보다 더 분주해졌고, 군중은 더 고독해졌음을 의미한다. "한때는 혼자 있는 것과 사람들 속에 있는 것 사이에 명확한 경계선이 있었죠." 새 책 '슈퍼블룸: 연결 기술이 우리를 어떻게 분열시키나Superbloom: How Technologies of Connection Tear Us Apart'의 저자 니콜라스 카Nicholas Carr가 내게 말했다. "경계선은 도움이 됐죠. 친구들과 함께 있을 수 있었고, 홀로있는 휴식시간에는 사색할 수 있었으니까요." 이제 우리의 사교시간은 다른 곳에서 더 재미있는 일이 일어나고 있을지 모른다는 가능성에 시달린다. 우리의 휴식시간은 수십 명의 친구들, 동료들, 애증관계의 사람들, 낯선 이들의 동영상과 게시물, 문자메시지로 오염되어 있다.


카의 말이 옳다면, 현대 기술이 외부 세계로 향하는 창을 항상 열어두는 것은 재충전을 훨씬 더 어렵게 만들어, 많은 사람들을 마치 늘 빨간색 상태로 되어 있는 배터리처럼 만성적으로 고갈된 상태로 만들고 있다. 건강한 세상에서는 혼자 많은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이 그 오래된 생물학적 신호를 느낄 것이다. '나는 혼자이고 슬프다. 약속을 잡아야겠다.' 하지만 우리는 비뚤어진 세상에 살고 있다. 여기서는 손쉬운 홈 엔터테인먼트, 온라인상의 과도한 공유, 발달이 저해된 사회적 스킬이 이상하게도 인기 있는 반응을 불러일으킨다. '나는 혼자이고, 불안하고, 지쳤다. 약속이 취소돼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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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묶인 사람들

2024년 프린스턴대학교의 사회학자 패트릭 샤키Patrick Sharkey는 장소가 어떻게 미국인의 삶과 경제적 운명을 형성하는지에 대한 책을 집필하고 있었다. 그는 원격근무의 증가가 더 장기적인 추세를 가속화했을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사람들이 집 안에서 보내는 시간이 보다 급격히 변화했으리란 것이었다. 그는 수치를 분석했고 우리의 일상적 습관에서 "놀라운 변화"를 발견했는데 이는 그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극단적이었다. 2022년—팬데믹이 수그러든 후에도—성인들은 2003년과 비교해 하루 평균 99분을 더 집에서 보냈다.

이 발견은 2024년 논문 '집에 묶인 사람들Homebound'의 기초가 되었다. 논문에서 샤키는 2003년과 비교했을 때 미국인들이 집에서 회의를 하고, 집에서 쇼핑을 하고, 집에서 오락을 즐기고, 집에서 식사를 하고, 심지어 집에서 예배를 보내는 경향이 더 높아졌다고 계산했다. 사실상 경제 전체가 미국인들이 자신의 방 안에 머물 수 있도록 재편되었다. 이 현상은 단순히 원격근무만으로 설명할 수 없다. 그보다 훨씬 더 전체적인 현상, '원격의 삶remote life'에 가깝다.


누군가는 이렇게 물을지도 모른다. 경제적 여유가 있는 미국인들이 집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싶어하는 게 당연하지 않을까? 지난 수십 년간 미국의 집은 평균적으로 더 커지고, 더 편안해지고, 더 재미있어졌다. 1973년부터 2023년까지 새로운 단독주택의 평균 크기는 50% 증가했고 에어컨이 설치된 새로운 단독주택의 비율은 두 배가 되어 98%에 이르렀다. 스트리밍 서비스, 비디오 게임기, 평면 TV는 거실을 20세기의 그 어떤 극장이나 오락실보다 더 흥미진진한 공간으로 만들었다. 하지만 편리함은 실제로 저주가 될 수 있다. 샤키의 계산에 따르면 집에서의 활동은 행복감의 "강한 감소"와 연관되어 있었다.


집에 묶인 삶이 반드시 고독한 삶일 필요는 없다. 1970년대에는 일반적인 가구가 한 달에 한 번 이상 손님을 접대했다. 하지만 로버트 퍼트넘이 수집한 데이터에 따르면 197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 후반까지 파티, 게임, 저녁 식사 등을 위해 친구들을 초대하는 빈도가 45% 감소했다. '나 홀로 볼링'이 출간된 후 20년 동안 미국인들이 사교 행사를 주최하거나 참석하는 평균 시간은 추가적으로 32% 감소했다.


우리의 집이 덜 사교적이 되어감에 따라 주거 건축도 더 반사회적이 되어갔다. 클리프턴 하니스는 새로운 주택 건설을 위한 레이아웃 설계 소프트웨어를 만드는 회사 테스트핏의 공동 창업자다. 그는 현대 아파트 설계의 기본 원칙은 모든 방이 최대한의 스크린 타임을 수용하도록 만드는 것이라고 내게 말했다. "개발사업자와 건축가들과의 설계 회의에서는 모든 방에 벽걸이 평면 TV를 설치할 공간이 있을 것이라고 모두를 안심시켜야 해요." 그가 말했다. "예전에는 '방에 채광이 잘 되게 하자'였어요. 하지만 이제는 '어떻게 하면 가장 많은 사람들에게 가장 큰 편안함을 줄 수 있을까?'라는 질문의 답이 사람들의 스크린 중독을 채워주는 것이 되었죠." 부동산 개발업자 바비 피잔은 작년에 "대체로 아파트는 넷플릭스 시청을 위해 지어진다"고 말했다. 평면도를 연구하면서 그는 침실, 드레스룸, 그리고 다른 사적 공간들이 커지고 있음을 발견했다. "우리는 고독을 위해 건물을 짓고 있는 거 같아요." 피잔이 내게 말했다.

세속의 수도승

2020년, 철학자이자 작가인 앤드류 태가트Andrew Taggart는 종교 저널 '퍼스트 싱스First Things'에 실린 에세이에서 새로운 형태의 남성성이 등장하는 것 같다고 관찰했다. 강하고, 자기 최적화에 집착하며, 혼자인 것에 당당한 남성성이었다. 남녀 모두 가정을 이루는 것을 미루고 있다. 남성의 초혼 연령 중앙값은 최근 역사상 처음으로 30세를 넘어섰다. 태가트는 자신이 아는 남성들이 기꺼이 결혼과 아버지 되기를 포기하는 듯 보인다고 썼다. 30대와 40대를 결혼반지와 기저귀에 집중하며 보내는 대신, 그들은 자신의 몸과 은행 계좌, 명상으로 단련된 정신을 가꾸는 데 전념했다. 태가트는 이런 남성들을 구식 금욕주의와 현대적 유아론唯我論이 결합된 "세속의 수도승"이라고 불렀다. "수행자들은 점점 더 엄격하고 모니터링되는 형태의 금욕적 자기통제에 자신을 내맡긴다." 그는 썼다. "찬물 샤워, 간헐적 단식, 데이터 기반 건강 최적화, 명상 부트캠프 등이 이에 포함된다."


작년에 태가트의 에세이를 읽었을 때, 나는 충격적인 깨달음을 느꼈다. 지난 몇 달 동안, 나는 SNS의 특정 장르에 사로잡혀 있었다. 바로 바이럴 "아침 루틴" 영상이었다. 주인공이 남성인 경우, 그는 전형적으로 잘생기고 부유하다. 우리는 그가 일어나는 것을 본다. 명상하는 것을 본다. 일기를 쓰는 것을 본다. 운동하고, 영양제를 먹고, 냉수욕을 하는 것을 본다. 하지만 이런 영상들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그것들이 전형적으로 결여하고 있는 요소, 바로 타인들이다. 잘 살아낸 삶을 보여주는 이 작은 영상들에서, 주인공들은 대체로 혼자 일어나서 그렇게 혼자 지낸다. 친구도, 배우자도, 자녀도 거의 볼 수 없다. 이 영상들은 현대적 수도생활의 호화로운 형태를 광고하는 것이다. 여기서 타인의 존재는 좋게 봐도 달갑지 않은 방해요소이며, 최악의 경우에는 포르노나 과자처럼 가급적 피해야 할 건강하지 않은 탐닉으로 취급된다.


몇몇 틱톡 영상들을 갖고 현대 남성성에 대한 중대한 결론을 도출하는 것은 현명한 방법이 아니다. 하지만 고독한 남성은 단순히 SNS에서만 볼 수 있는 현상만은 아니다. 미국인 시간 활용 조사에 따르면, 남성은 여성보다 혼자 보내는 시간이 더 많으며 젊은 남성들은 다른 어떤 집단보다 더 빠르게 혼자 보내는 시간을 늘리고 있다.


이 혼자만의 시간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메릴랜드대학교의 사회학자 리아나 세이어Liana C Sayer는 21세기에 남성과 여성의 여가시간이 어떻게 변화했는지에 대한 분석을 내게 보여줬다. 세이어는 여가를 두 가지 큰 범주로 나눴다. 사교 활동, 콘서트 관람, 스포츠 활동을 포함하는 '참여적 여가engaged leisure'와 TV 시청과 비디오 게임을 포함하는 '좌식 여가sedentary leisure'다. 참여적 여가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하는 경향이 큰 반면, 좌식 여가는 혼자 하는 경우가 보다 잦다.


세이어가 밝혀낸 가장 극적인 경향은 가장 많은 여가시간을 가진 무자녀 독신 남성들이 압도적으로 이 시간을 혼자 보내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2003년 이후, 그들이 혼자 하는 좌식 여가에 쓰는 시간은 세이어가 추적한 다른 어떤 집단보다 더 많이 증가했다. 세이어가 쓴 것처럼 "다른 사람들과 함께 더 많은 여가시간을 보내는 성인들의 웰빙 수준이 더 높다"는 점에서 이는 불행한 일이다. 이와 대조적으로 좌식 여가는 "부정적인 신체적, 정신적 건강과 연관되어 있었다."


미국 소년·남성 연구소의 소장인 리처드 리브스Richard V Reeves는 남성이든 여성이든 우리가 고립주의적 편안함을 추구하는 삶을 살 때 정의하기 어려운 무언가를 잃게 된다고 내게 말했다. 그는 이것을 "쓸모neededness"라고 부르는데 우리가 우리 가족과 공동체에게 필수적인 존재가 되는 방식을 뜻한다. "우리 모두 어느 정도는 어딘가에 맞춰질 퍼즐 조각 같은 존재라고 느낄 필요가 있다고 봐요." 그가 말했다. 이러한 '쓸모'는 사회적, 경제적, 공동체적 등 여러 형태로 나타날 수 있다. 자녀와 파트너는 우리에게 돌봄이나 수입을 의존할 수 있다. 동료들은 프로젝트를 완수하거나 짜증나는 상사에 대해 함께 한탄하면서 서로를 신뢰할 수 있다. 종교 공동체와 주말 포커 모임은 우리가 교회 의자를 채우거나 먹을 것을 가져올 것이라고 기대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공동체로의 다리를 놓는 데는 에너지가 필요하다. 그러나 오늘날의 젊은 남성들은 과거처럼 이러한 관계를 구축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쓸모 있다는 의식 대신 절망이 스며들고 있다. 실업 상태이거나 불완전 고용 상태인 남성들이 특히 취약하다. 자신이 불필요한 존재라고 느끼는 것은 "어떤 경우에는 말 그대로 치명적이죠." 리브스가 말했다. "자살하기 전 남성들이 스스로를 묘사하는 말을 보면, 그들은 자신이 무가치하고 쓸모없다고 표현해요." 2001년 이후 남성 수십만 명이 약물 과다 복용으로 사망했는데 대부분 오피오이드와 펜타닐 같은 합성 마약 때문이었다. "만약 2001년 이후 약물 중독 사망률이 변화가 없었다면 남성 40만 명이 덜 사망했을 겁니다." 리브스가 말했다. 그가 강조하기를, 이러한 약물에는 고독하다는 특징이 있다. 오피오이드는 파티용 약물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다.


(계속: 고립의 시대 ② 고독의 정치학으로 이어집니다)


1857년 창간된 미국의 대표적인 시사·문예 매거진. 진보적 성향으로 롱리드 피처, 인터뷰 기사로 유명합니다. 본래 월간지였으나 현재는 1년에 10회 발행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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