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이슈

고립의 시대 ② 고독의 정치학

미국인은 그 어느 때보다 많은 시간을 홀로 보낸다. 이는 우리의 성격, 정치, 심지어 현실세계와의 관계까지 바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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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1.31 15:59

The Atlanti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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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립의 시대' 2부에서 데릭 톰슨은 이러한 '자발적 고독'의 확산이 사회와 정치에 미치는 영향을 살펴봅니다. 통신 기술의 발달이 가까이 살면서도 서로 차이점이 많은 '지역 공동체'를 와해시키면서 상대방을 적대시하는 정치 양극화로 이어진다는 관찰은 미국과 마찬가지로 극심한 정치 양극화를 겪고 있는 한국의 현실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새로운 공동체와 연결됨을 모색하는 흐름도 존재한다는 지적은 우리에게 희망을 줍니다. PADO에서 과거 소개한 인문학 부흥 시도에 대한 기사들도 이러한 흐름에 부합합니다. PADO 또한 한국 사회 내에서 이러한 흐름을 만드는 데 일조하고자 합니다.


(고립의 시대 ① '혼자'를 택하는 사람들에서 이어집니다.)

고독의 정치학

집에서 휴대폰을 보며 보내는 이 모든 혼자만의 시간은 우리 개인에게만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다. 이는 사회를 더 약하고, 더 악의적이며, 더 망상적으로 만들고 있다. 작가이자 브라운대학교 연구원인 마크 던컬만Marc J Dunkelman은 자발적 고독이 어떻게 사회 전체를 왜곡하고 있는지 보려면, 먼저 약간 직관에 반하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고 말한다. 오늘날 우리의 많은 유대관계가 실제로는 더 강해지고 있다는 점이다.


부모들은 수십 년 전보다 자녀들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으며 많은 부부와 가족들이 끊이지 않는 의사소통을 유지하고 있다. "아내와 나는 오늘 작별 인사를 한 이후로 벌써 10번이나 문자를 주고받았어요." 평일 정오에 내가 연락했을 때 던컬만이 말했다. "10살 된 제 딸이 편의점에서 과자를 사면 저는 그에 대한 휴대폰 알림도 받아요."


동시에 메신저 앱, 틱톡 영상, 서브레딧은 관심사를 공유하는 전 세계 군중의 생각과 의견에 우리를 연결시켜 준다. "신시내티 벵골스의 미식축구 경기를 볼 때, 저는 질문을 할 수 있고 답변도 받을 수 있는 담당 기자들과의 단체 채팅방에 들어가죠." 던컬만이 말했다. "X.com(트위터)에서 미식축구 분석가들의 생각을 실시간으로 팔로우할 수 있으니 사실상 그들의 어깨 너머로 경기를 보는 거나 다름없죠. 저는 로드아일랜드에 사는데, 이런 연결은 30년 전에는 결코 존재할 수 없었던 것들이에요."



가정 기반, 휴대폰 기반 문화는 우리의 가장 가까운 연결과 가장 먼 연결을 강화했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혈연과 친밀함으로 묶인 가족과 가장 친한 친구들이라는 내부 원과, 공유된 관심사로 연결된 동족 무리tribe라는 외부 원이 강화된 것이다. 하지만 이는 던컬만이 '마을'이라고 부르는, 우리 주변에 사는 사람들과의 "친숙하지만 친밀하지는 않은" 관계라는 중간 원을 파괴하고 있다. "당신의 이웃들, 당신의 마을 사람들을 말하는 겁니다." 그가 말했다. 과거에 우리는 그들을 잘 알았다. 이제는 그렇지 않다.


사회적 단절은 진보가 왜 무능할 정도로 트럼프의 매력을 이해하지 못하는지를 설명하는 데 도움이 된다.


중간 원은 사회적 결속력의 핵심이라고 던컬만은 말했다. 가족은 우리에게 사랑을 가르치고, 무리는 충성심을 가르친다. 마을은 우리에게 관용을 가르친다. 학부모회 모임에서 어떤 지역 학부모가 차별철폐조치affirmative action에 대해 당신과 의견이 다르다고 상상해보자. 온라인에서라면 당신은 그를 경멸받아 마땅한 정치적 반대파로 일축해버릴 수 있다. 하지만 이웃들로 가득 찬 학교 강당에서는 말을 삼간다. 시간이 흐르면서 당신은 당신의 딸과 그 학부모의 딸이 같은 댄스 수업을 듣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아이들을 데리러 가면서 당신은 그와 노부모 부양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다. 당신과 그의 차이는 사라지지 않지만 그것은 평화로운 공존 속으로 접혀 들어간다. 그리고 당신과 그가 학교의 다양성 선언문을 작성하는 위원회에 등록할 때, 서로의 상반된 관점을 수용할 수 있다는 것을 발견한다. "현실 세계에서 당신과 의견이 다르지만 사려 깊은 사람들을 만나는 것은 정치적으로 절제하게 만드는 효과가 있어요." 던컬만이 말했다. 학부모회 모임이 여전히 자주 대면으로 열리긴 하지만 이웃을 만나고 이해할 수 있는 다른 많은 기회들은 과거의 것이 되어가고 있다. "중간 원의 소멸이 가져오는 중요한 함의는, 만약 상대방이 왜 그들만의 서사를 가지고 있는지 이해하지 못하면 당신 편이 타협 없이 그들과 싸우기를 원하게 될 거라는 점이에요."


마을은 생산적인 불일치와 타협—다시 말해, 민주주의—를 실천하기에 가장 좋은 장소다. 따라서 마을의 침식이 모든 선거가 내부의 적을 물리치기 위한 사활적 모험처럼 느껴지는 기괴한 정치 스타일의 출현과 맞물린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지난 50년 동안, 미국 전국선거연구 조사는 민주당원과 공화당원들에게 상대 정당을 0(매우 차가움/비호의적)에서 100(매우 따뜻함/호의적)까지의 '감정 온도계'로 평가해달라고 요청해왔다. 2000년에는 단지 8%의 당파주의자들만이 상대 정당에 0점을 주었다. 2020년이 되자 그 수치는 40%까지 치솟았다. 2021년 제너레이션 랩/액시오스의 설문조사에서는 자신을 공화당 지지자라고 밝힌 대학생의 거의 3분의1이 민주당 지지자와는 데이트조차 하지 않겠다고 말했고, 민주당 지지 학생들의 3분의2 이상이 공화당원들에 대해 같은 말을 했다.


도널드 트럼프의 2024년 대선 승리에는 인플레이션과 조 바이든의 리더십에 대한 불만을 포함한 여러 가지 원인이 있었다. 하지만 트럼프의 성공 요인 중 하나는 그가 패거리 무리만 있고 마을은 없는 연극적 대결 방식의 화신이라는 점일 수 있다. 그는 타 집단에 대한 적대감을 부추기고, 정치적 차이를 격렬하게 용납하지 않는 유권자들에게 호소한다. 선거 운동의 몇 가지 예를 들자면, 트럼프는 민주당을 "민주주의의 적"이라 부르고 언론을 "국민의 적"이라 칭했으며, "우리나라 경계 안에서 해충처럼 살면서 거짓말하고 도둑질하고 선거를 조작하는 급진 좌파 폭력배들을 뿌리 뽑겠다"고 약속했다.


사회적 단절은 또한 진보가 왜 무능할 정도로 트럼프의 매력을 이해하지 못하는지를 설명하는 데 도움이 된다. 작년 가을에 민주당 지지자들이 잔디밭에 내걸었던 '해리스·월츠: 당연히' 슬로건을 보자. 실제 유권자 다수가 거부한 이 정서는 진보 진영이 실제 세계와 교류하는 데 실패했음을 보여준다. 던컬만은 선거 후 내게 이메일을 보내 민주당의 무지함을 한탄했다. "엘리트 서클에 사는 우리가 어떻게 트럼프가 심지어 우리의 실제 이웃들 사이에서조차 인기를 얻고 있음을 보지 못했을까요?" 그가 썼다. 너무 많은 진보 유권자들이 집 안에서 좌파 언론만 주입하면서 길 건너편의 가정들이 우파로 기울고 있음을 인식하지 못했다. 심지어 뉴욕에서 매우 진보 성향인 브루클린에서도 유권자 30%가 트럼프를 찍었다. 만약 진보가 여전히 MAGA를 이질적인 운동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부분적으로 그들이 스스로를 자신들의 땅에서 이방인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공동체 속에서가 아닌 인터넷상에서 혼자 정치를 실천하는 것은 우리가 상대편을 악마화하고 소외시킬 가능성을 높이는 데 그치지 않는다. 물론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나쁘지만 말이다. 이는 또한 깊은 허무주의를 조장할 수 있다. 2018년, 덴마크의 정치학자 미하엘 방 페테르센Michael Bang Petersen이 이끄는 연구진은 미국인들에게 트럼프와 힐러리 클린턴을 포함한 민주당과 공화당 정치인들에 대한 거짓 루머를 평가해달라고 요청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좌파는 우파에 대한 음모론을 퍼뜨리고 우파는 좌파에 대해서 그렇게 하는 명확한 양극화 패턴을 예상했어요." 피터슨이 내게 말했다. 하지만 일부 참가자들은 기존 질서를 파괴하려는 의도가 있는 한 좌우를 막론하고 어떤 음모론에도 끌리는 것처럼 보였다. 이 집단의 구성원들은 흔히 인종적 또는 경제적 불만을 품고 있었다. 아마도 더 중요한 것은, 피터슨에 따르면, 그들이 사회적으로 고립되어 있다고 느끼는 경향이 있었다는 점이다. 이런 화가 난 고독자들은 "내 주변에 혼돈이 필요하다"와 "우리의 정치적, 사회적 제도들에 대해 생각할 때면, '그냥 다 불타버리게 두자'라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다" 같은 음침한 선언에 동의했다.


혼돈 지향적인 개인들은 흔히 쓰이는 외로움 측정에서 높은 점수를 기록하지만 그들은 명백한 해결책을 찾으려 하지 않는 듯 보인다. "그들이얻고자 하는 건 절대로 우정이 아니라 인정과 지위예요." 페테르센이 말했다. 특히 빈 방에서 반짝이는 스크린이 자신들의 경험하는 현실의 대부분인 사회적으로 고립된 남성들에게, 파괴에 투표하는 것은 최후의 수단으로서의 정치다. 집단의 진보나 어떤 종류든 집단적 지지가 불가능하게 느껴지는 세상에서 자신의 흔적을 남기는 방법인 것이다.

내향성에 대한 착각

잠시 고독에 대해 공정하게 이야기해보자. 어린 아이의 아버지로서, 나는 혼자 조용히 보내는 밤이 치유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잘 안다. 나는 바에서 혼자 야구 경기를 보며 저녁을 보낸 적이 있는데 그것은 황홀할 정도로 천국에 가까운 느낌이었다. 사람들은 스트레스와 슬픔, 일상적인 실망감에 복잡한 방식으로 대처한다. 때로는 고립이 내적 균형을 회복하는 최선의 방법이기도 하다.


하지만 문제는 그 정도다. 울어대는 아기로부터 벗어나 혼자 보내는 하룻밤과 10년 이상의 만성적인 사회적 단절은 완전히 다른 문제다. 그리고 해마다 더 많은 시간을 혼자 보내는 사람들의 행복도는 크게 감소한다. 필라델피아 연준의 아탈레이는 21세기 고독의 부상에 관한 2023년 논문에서 한 가지 척도로 볼 때, 사교성이 돈보다 행복에 훨씬 더 큰 의미가 있다고 계산했다. 혼자 보내는 시간이 5%p 증가하는 것은 가구 소득이 10% 감소하는 것과 비슷한 수준으로 삶의 만족도 하락과 연관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은 계속해서 다른 사람들로부터 멀리 떨어져 집에서 혼자 여가시간을 보내는 것을 선택한다. 아마도 어떤 이들은 그들이 올바른 선택을 하고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결국 자기 자신은 자신이 가장 잘 알 테니까. 하지만 현대 심리학이 일관되게 발견하고 있는 것은, 사람들이 종종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또는 무엇이 자신을 행복하게 만들지 모른다는 것이다. "예측은 어렵다. 특히 미래에 관해서는"이라는 말은 우리 자신의 삶에 대한 예측에 특히 무게 있게 적용된다. 우리에게 평화를 가져다줄 것이라 기대하는 것들—더 큰 집, 고급 자동차, 급여는 두 배지만 여가는 절반인 직업—은 되풀이해서 더 많은 불안만 만들어낸다. 그리고 우리가 원한다고 오해하는 것들의 꼭대기에 고독이 자리 잡고 있다.


몇 년 전, 시카고 대학교 부스 경영대학원의 심리학자 닉 에플리Nick Epley는 통근 열차 승객들에게 이런 요청을 했다. 낯선 사람과 대화하며 통근을 한다면 어떤 기분이 들 것 같은가? 대부분의 참가자들은 모르는 사람과 긴 대화를 나누는 것보다 조용한 고독이 더 나은 통근 시간이 되리라고 예측했다. 그런 다음 에플리의 팀은 일부는 혼자 있도록 하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낯선 사람과 대화하도록 지시하는 실험을 만들었다(참가자들은 "대화가 길수록 좋다"는 지시를 받았다). 그 후 사람들은 설문지를 작성했다. 그들의 기분은 어땠을까? 최고의 통근은 조용한 것이라는 광범위한 가정에도 불구하고, 낯선 사람들과 대화하도록 지시받은 사람들은 실제로 혼자 있었던 사람들보다 훨씬 더 긍정적인 감정을 느꼈다고 보고했다. "인간 삶의 핵심에 있는 근본적인 역설은 우리가 매우 사회적이며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있음으로써 모든 면에서 더 나아진다는 것이에요." 에플리가 말했다. "그런데도 우리는 계속해서 연결할 기회를 잡지 않거나 심지어 적극적으로 거부하는데, 이건 끔찍한 실수예요."


연구자들은 반복적으로 에플리의 발견을 입증했다. 2020년, UC리버사이드의 심리학자 세스 마골리스Seth Margolis와 소냐 류보미르스키Sonja Lyubomirsky는 사람들에게 1주일 동안은 외향적인 사람처럼, 다른 1주일 동안은 내향적인 사람처럼 행동해달라고 요청했다. 피험자들은 그 주의 주제에 따라 "자기주장이 강하고 자발적"이거나 "조용하고 절제된" 행동을 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참가자들은 외향성 주간이 끝날 때 더 긍정적인 감정을 느꼈고 내향성 주간이 끝날 때 더 부정적인 감정을 느꼈다고 말했다. 배달이라는 편리함을 갖춘 현대 경제는 사람들을 광장공포증 환자처럼 행동하도록 조종한다. 하지만 우리가 반대 방향으로도 조종될 수 있다는 것이 밝혀졌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를 더 행복하게 만들 수 있다.


고독에 대한 우리의 "잘못된" 선호는 다른 사람들이 우리와 대화하는 데 그다지 관심이 없거나 우리의 동행을 귀찮게 여길 것이라는 잘못 자리 잡은 불안감에서 비롯될 수 있다. "하지만 실제로는 상호성의 원칙 때문에 사회적 상호작용은 그리 불확실하지 않아요. 누군가에게 인사하면, 보통 상대방도 화답할 거예요. 누군가를 칭찬하면 감사하다고 답할 거고요." 에플리가 내게 말했다. 많은 사람들은 스스로에게 도움이 됨에도 불구하고 충분히 사교적이지 않은 것 같다. 그들은 실제로는 연결 속에서 기쁨을 찾을 수 있는데도 너무 자주 고독 속에서 위안을 찾는다.


내향적 행동에 최적화된 것처럼 보이는 소비 경제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편리함이라는 저주의 흐름을 거스른다면—더 많은 낯선 이들과 대화하고, 더 많은 집단에 소속되며, 더 많은 활동을 위해 집을 나선다면—우리는 더 행복한 나날과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다.

AI의 세기

반사회적 세기는 더 많은 불안과 우울, 그리고 정치에서 더 많은 "혼돈에 대한 욕구"를 가져오는 등, 이미 충분히 나빴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우리의 집단적 고립은 여전히 더 나빠질 수 있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더 이상해질 수 있다.


2024년 5월, 인공지능 기업 오픈AI의 직원 세 명이 무대에 앉아 챗GPT의 새로운 실시간 대화 음성 기능을 소개했다. 마크 첸이라는 연구 과학자가 휴대폰을 들고 미소를 지으며 말하기 시작했다.


"안녕, 챗GPT, 나는 마크야. 어떻게 지내?" 마크가 말했다.


"안녕하세요, 마크!" 쾌활한 여성의 목소리가 응답했다.


"있잖아, 나 지금 무대 위에 있어." 마크가 말했다. "생방송으로 시연을 하고 있는데, 솔직히 좀 긴장되네. 내 긴장을 좀 풀어줄 수 있어?"


"오, 지금 생방송 시연을 하고 계시는 거예요?" AI는 섬뜩할 정도로 진짜 같은 놀람을 표현하며 답했다. "멋져요! 심호흡을 하시고 기억하세요. 여기서 전문가는 당신이에요."


마크는 자신의 호흡에 대한 피드백을 요청한 뒤, 마라톤을 막 끝낸 사람처럼 크게 헐떡였다.


"잠깐만, 천천히요!" 그 목소리가 응답했다. "마크님, 당신은 진공청소기가 아니에요!" 화면 밖에서 청중이 웃었다. 마크는 다시 한번 호흡 소리를 내보였고, 이번에는 더 천천히, 의도적으로 했다.


"좋아요." AI가 응답했다. "기분이 어떠세요?"


"훨씬 나아졌어." 마크가 말했다. "정말 고마워."


AI의 자연스러운 발화 능력은 새로운 아이폰의 카메라 개선처럼 점진적인 업데이트로 보일 수 있다. 하지만 닉 에플리에 따르면 유창한 발화는 인간관계를 침범하는 AI 기술의 능력이 급진적으로 진보했음을 의미한다.


"일단 AI가 당신에게 말을 할 수 있게 되면 그것은 매우 실제처럼 느껴질 거예요." 그가 말했다. 사람들이 문자보다 말을 더 친밀하고 감정적으로 처리하기 때문이다. 2020년에 발표된 한 연구에서 에플리와 텍사스대학교 오스틴의 심리학자 아밋 쿠마르Amit Kumar는 참가자들에게 무작위로 전화나 이메일을 통해 옛 친구에게 연락하도록 배정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문자 메시지를 보내는 것을 선호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전화로 대화하도록 지시받은 사람들은 이메일을 사용한 사람들보다 친구와 "훨씬 더 강한 유대감"을 느꼈고, 더 강렬한 "진정으로 연결되었다"는 느낌을 보고했다.


말에는 강조와 억양 같은 '준언어적 신호'가 풍부한데 이는 듣는 사람의 마음속에 공감과 신뢰를 쌓을 수 있다. 다른 연구에서, 에플리와 행동과학자 줄리아나 슈뢰더Juliana Schroeder는 고용주와 잠재적 채용 담당자들이 '내가 이 직무에 적합한 이유'라는 취업 지원 발표를 눈으로 읽을 때보다 귀로 들을 때 지원자를 "더 유능하고, 사려 깊고, 지적"이라고 평가할 가능성이 더 높음을 발견했다.


AI 반려자의 출현에 대한 책을 쓰고 있는 저널리스트 제이슨 파곤Jason Fagone에 따르면, AI가 유창한 발화를 완전히 습득하기도 전인 지금도 이미 수백만 명이 기계와 친밀한 관계를 형성하고 있다. AI 동반자를 위한 가장 인기 있는 플랫폼인 캐릭터AICharacter.ai는 월 사용자 수천만 명을 보유하고 있으며, 이들은 하루 평균 93분을 AI 친구와 대화하는 데 보낸다. "아무도 실제 인간과 대화하고 있다고 속아 넘어가지는 않아요." 파곤이 내게 말했다. "사람들은 자유롭게 인공 파트너와의 관계를 선택하고 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스템들의 감정적 능력 때문에 깊은 애착을 형성하고 있어요." 그의 책에 나오는 한 사례는 약혼자의 사망 후 고인을 닮은 AI 챗봇을 만든 젊은 남성이다. 또 다른 사례는 양성애자로 남성과의 결혼 생활에서 오는 결핍을 여성 정체성에 맞춰놓은 AI로 보완하는 어느 애 엄마다.


비물질적 존재와의 감정적 교류라는 개념이 섬뜩하게 느껴진다면 당신의 삶에서 주로 화면 속 글자로만 존재하는 많은 친구들과 가족들을 생각해보라. 파곤은 디지털 통신이 우리의 많은 물리적 세계의 관계들을 문자 알림음과 파란 말풍선의 연속으로 변형시킴으로써 이미 우리는 AI 반려자 관계를 받아들일 준비가 됐다고 말했다. "AI 반려자 앱이 이렇게 빨리 매력적인 것으로 입증된 이유 중 하나는 이미 우리 인간관계의 대부분이 전적으로 휴대폰을 통해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그가 말했다.


에플리는 AI 반려자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날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절대 나를 비판하지 않고, 배신하지 않고, 기분 나쁘다고 나를 모욕하지 않으며, 항상 내게 관심을 보이도록 설정할 수 있어요." 가장 인내심 있는 배우자도 못 하는 수준으로 AI는 우리가 늘 옳다고 말해줄 수 있다. 세상에서 가장 좋은 친구도 못 하는 수준으로 자신의 사생활이 있다는 너무나 인간적인 방해 요소 하나 없이 우리의 필요에 즉각적으로 반응할 수 있다.


"물론 끔찍한 부분은 당신에게 동의하지 않고 당신을 실망시킬 수 있는 실제 인간들과 상호작용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 필수적이라는 점이라고 에플리는 말했다. 나는 그의 말이 옳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에플리는 1970년대에 태어났다. 나는 1980년대에 태어났다. 2010년대나 2020년대에 태어난 사람들은 "진짜 인간" 친구를 대체할 수 있는 건 없다는 생각에 동의하지 않을 수 있다. 이 세대들은 자신들이 관계에서 가장 원하는 것이 그들에게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들의 집합이 아니라, 탄소 기반 생명체보다 실리콘으로부터 더 확실하게 끌어낼 수 있는 일련의 감정—공감, 유머, 인정—이라는 것을 발견할지도 모른다. 실리콘밸리가 아인슈타인 수백 명분의 일을 할 수 있는 초지능 기계를 만들기 훨씬 전에 친구 수백 명분의 일을 할 수 있는 초감정 기계를 만들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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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사회적 세기는 우리의 휴대폰 내부의 발전만큼이나 콘크리트와 강철로 이루어진 외부 세계에 일어난 일의 결과다. 에릭 클리넨버그Eric Klinenberg가 "사회적 인프라"—세계와의 관계를 형성하는 공공 공간—라고 부르는 것에 대한 정부 투자의 감소는 20세기 후반에 시작되었을 수 있지만 21세기에도 계속되고 있다. 이는 거의 모든 사람에게 영향을 미쳤지만 특히 저소득층 미국인들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쳤다.


"대도시의 빈곤 지역에 가면 지역사회 리더들이 가난한 십대들의 진짜 위기는 더 이상 할 일도 없고 갈 곳도 없다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을 정말 많이 들었어요." 클리넨버그가 내게 말했다. "정부가 비디오 게임 회사들이 십대들을 실내에 머물게 하는 장난감을 만드는 것과 같은 창의성과 관대함으로 십대들을 위한 사회적 인프라를 구축했으면 좋겠어요. 운동장, 공공 수영장, 그리고 젊은이들이 함께 어울릴 수 있는 아름다운 사교 공간이 있는 도서관 같은 것 말이죠."


공공 사회 인프라 개선이 반사회적 세기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황폐화된 공공 공간—그리고 황폐화된 공적 삶—은 어떤 면에서 비디오 게임과 휴대폰, 그리고 더 크고 더 나은 사적 공간에 대한 투자의 이면이다. 산업혁명의 보이지 않는 배출물을 인식하는 데 시간이 필요했던 것처럼 우리는 이제야 휴대폰과 집에 얽매인 세상의 부정적 외부효과를 직시하기 시작하고 있다. 미디어 이론가 마셜 매클루언은 한때 기술에 대해 모든 확장은 또한 절단이라고 말했다. 우리는 디지털로 강화된 세상을 선택했다. 우리는 그로 인해 절단되고 있는 것의 중요성을 깨닫지 못했다.


하지만 우리는 다른 선택을 할 수 있다. 닐 스티븐슨은 2015년 소설 '세븐이브스'에서 어떤 기술을 받아들일지 신중하게 선택하는 실천을 설명하기 위해 '아미스틱스Amistics'라는 용어를 만들어냈다. 이 단어는 자동차와 텔레비전을 포함한 많은 현대의 혁신을 전반적으로 기피하는 아미시Amish를 참조한 것이다. 엄격하게 반현대적이라고 여겨지는 경우가 많지만, 많은 아미시 공동체들은 냉장고와 세탁기를 가지고 있으며 일부는 태양광 발전도 쓴다. 아미시는 모든 기술을 거부하는 대신 그들의 종교적, 공동체적 가치를 지지하는 혁신만을 채택한다. 1998년 한 아미시 공동체에 대한 논문에서, 당시 하버드의 박사과정 학생이었던 테이컹탄Tay Keong Tan은 한 공동체 구성원이 TV나 라디오를 채택하고 싶지 않다고 말한 것을 인용했는데 그 이유는 그러한 제품들이 "우리가 서로의 집을 방문하는 관습을 파괴할 것이고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만나러 가는 대신 텔레비전이나 라디오와 함께 집에 머물게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기술에 대한 아미시의 접근방식이 적용에 있어서는 급진적일지라도 그것은 명백하고 진실된 무언가를 인식하고 있다. 기술이 그 자체로 가치관을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 그것의 채택은 조율된 노력이 없는 경우에도 가치관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수십 년 동안, 우리는 마찰을 제거하거나 도파민을 증가시키는 모든 기술을 채택해왔고, 순간적으로 삶을 쉽고 좋게 느끼게 만드는 것을 받아들여왔다. 하지만 도파민은 화학물질이지 미덕이 아니다. 그리고 항상 쉬운 것이 우리에게 최선인 것은 아니다. 우리는 스스로에게 물어봐야 한다. 즉각적인 만족이 아닌 장기적인 건강을 기반으로 기술을 선택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그리고 만약 기술이 우리 공동체를 해치고 있다면 우리는 그것을 치유하기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겉보기에 간단한 처방은 십대들이 휴대폰을 보는 시간을 줄이고, 그들의 부모는 더 많은 친구들을 저녁 식사에 초대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어떤 면에서 이것들은 집단행동의 문제다. 십대는 급우들이 이미 서로 어울리는 습관을 갖고 있다면 집 밖으로 나올 가능성이 더 높다. 그 십대의 부모는 이웃들도 주간 모임을 갖는 습관이 있다면 손님을 초대할 가능성이 더 높다. 이러한 깊이 새겨진 공동체적 습관을 일컫는 단어가 있다. 의례ritual다. 사교의 쇠퇴가 종교의 쇠퇴와 동시에 일어난 한 가지 이유는 아마도 신앙만큼 우리의 일정표에 의례를 새기는 데 능숙한 것이 없다는 점일 것이다.


"저는 사회과학자들 사이에서는 흔치 않은 견해를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도덕적 혁명이 실존하며 그것이 우리의 문화를 변화시킨다는 겁니다." 로버트 퍼트넘이 내게 말했다. 20세기 초, 목사 월터 라우센부쉬Walter Rauschenbusch를 포함한 진보적 기독교인 집단은 다른 기독교인들에게 개인적 구원에 대한 협소한 관심에서 정의에 대한 공적 관심으로 신앙을 확장하라고 촉구했다. '사회복음'으로 알려지게 된 그들의 운동은 아동노동 폐지와 같은 주요 정치 개혁을 통과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또한 이는 노동조합 회관과 커뮤니티 센터, 식당에서 모이는 완전히 세속적인 집회들로 대표되는 미국적 생활에 대해 더욱 공동체적인 접근을 장려했다. 이 모든 것은 글쓰기와 사고, 조직화의 특별한 연금술에서 나왔다. 한 국가의 도덕적-정서적 분위기를 어떻게 바꿀 수 있는지 정확히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지만 확실한 것은 분위기가 시대에 따라 변한다는 것이다. 우리의 가장 작은 행동이 규범을 만든다. 우리의 규범이 가치관을 만든다. 우리의 가치관이 행동을 이끈다. 그리고 우리의 행동은 연쇄적으로 퍼져나간다.


반사회적 세기는 그러한 연쇄적 확산의 결과다. 디지털 세계의 진보와 물리적 세계의 퇴보로 가속화된, 선택된 고독의 연쇄적 확산이다. 하지만 한 연쇄적 확산이 우리를 반사회적 세기로 이끌었다면, 다른 확산은 사회적 세기를 가져올 수 있다. 새로운 규범은 가능하다. 끊임없이 만들어지고 있다. 독립서점들이 호황을 누리고 있다. 미국서점협회는 2009년 이후 50% 이상의 성장을 보고했다. 뉴욕시와 워싱턴DC 같은 도시에서, 많은 서점들이 작은 극장이 되어 작가 낭독회에 입석 관객이 정기적으로 모이고 있다. 더 많은 학군과 주에서 학교 내 스마트폰을 금지하고 있는데 이는 낙관적으로 보면 아이들의 집중력과 물리적 세계의 관계를 개선할 수 있는 전국적인 실험이다. 지난 몇 년 동안 보드게임 카페가 전국적으로 확산됐으며 이들의 사업은 2030년까지 거의 두 배로 성장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러한 카페들은 80년간의 추세를 거스르고 있다. 이전의 사회적 오락 형태를 사적인 것으로 바꾸는 대신, 거실에서 하는 여가 활동을 그 자체가 목적인 활동으로 바꾸고 있다. 내가 설명한 사회적 혁명이 아무리 광범위해 보일지라도, 그것은 우리의 통제 안에 깊이 있는 제도와 결정들로부터 상향식으로 만들어진다. 카페처럼 소박하고, 학교의 새로운 휴대폰 보관함처럼 작은 것들로부터 말이다.


에플리와 그의 연구실이 시카고 사람들에게 고독에 대한 선호를 극복하고 기차에서 낯선 사람들과 대화하라고 요청했을 때, 그 실험은 아마도 누구의 인생도 바꾸지 않았을 것이다. 그것은 단지 15분이라는 시간의 경험을 조금 개선했을 뿐이다. 하지만 인생은 그런 15분이 하나씩 이어진 긴 연속일 따름이다. 우리가 분 단위의 시간을 보내는 방식이 곧 우리가 수십 년을 보내는 방식이다. "제가 했던 그 어떤 연구도 이것보다 제 삶을 더 많이 바꾸지는 못했어요." 에플리가 내게 말했다. "내가 전혀 외롭지 않다는 게 아니에요. 삶의 공허한 공간을 활용해서 그 안에서 친구를 만드는 법을 배웠기 때문에 삶의 순간순간의 경험이 더 나아졌다는 거예요."



데릭 톰슨은 애틀랜틱의 기자이며 '플레인 잉글리시'라는 팟캐스트를 진행하고 있다. 저서로 'Hit Makers: How to Succeed in an Age of Distraction'(2017)이 있다.



1857년 창간된 미국의 대표적인 시사·문예 매거진. 진보적 성향으로 롱리드 피처, 인터뷰 기사로 유명합니다. 본래 월간지였으나 현재는 1년에 10회 발행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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