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55년 1월 7일 최초의 핵 잠수함 USS 노틸러스의 첫 출항 기록화. /사진제공=US Naval History and Heritage Command
2025.04.18 15:01
미국이 1970년대 이후 원자로 건설을 중단했다는 것은 흔한 오해다. 그뿐만이 아니다. 미 해군은 1950년대부터 매년 최소 한 개의 소형 원자로를 꾸준히 건설해왔다. 민간 원자력 부문의 침체에도 불구하고 해군이 수십 년 동안 원자로를 안전하게 설계, 건설 및 운영할 수 있었던 것은 대부분 "핵 해군의 아버지"라 불리는 하이먼 G 리코버 제독의 제도적 유산 덕분이다.
리코버는 미국 역사상 가장 오래 복무한 해군 장교였으며 세계 최초의 핵추진 잠수함 건설을 포함한 핵기술의 선구적인 개발을 감독할 기술적 역량과 권한을 가졌던, 오늘날 해군 원자로실Naval Reactors이라 불리는 미국 정부 내 조직을 만들었다. 그는 함께 일한 기업과 조선소에 강도 높은 프로그램 관리를 적용했고, 많은 경우 그들의 기술적 로드맵도 개발했다. 리코버는 또한 해군에서의 평생 경험을 활용하여 관료주의의 난관을 헤쳐나갔고, 오늘날까지 지속되는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에너지원을 개발하고 관리하기 위한 제도적 구조를 구축할 수 있었다.
메가프로젝트, 이중용도 기술, 대규모 에너지 인프라 구축에 대한 관심이 다시 높아지는 시대에, 리코버가 원자력 에너지를 실현한 방법을 이해하는 것은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
리코버의 해군 경력
하이먼 G 리코버는 러시아 제국, 현재의 폴란드 지역에서 태어났지만, 그의 가족은 반유대주의 포그롬을 피해 그가 어린 소년이었던 1906년에 미국으로 도피했다. 리코버는 해군사관학교에서 540명 중 107등으로 졸업했지만 임관 후 공학과 리더십에 대한 적성을 보여주었다. 해군사관학교 졸업 후 5년 동안 장교로 복무한 후 컬럼비아대학과 해군대학원에서 전기공학 석사 학위를 취득했고, 이후 S-48 잠수함의 기술장교로 근무했다.
[새로운 PADO 기사가 올라올 때마다 카톡으로 알려드립니다 (무료)]
리코버는 잠수함 기술장교로 복무하면서 기존 디젤-전기 잠수함의 단점을 깨달았다. 이러한 잠수함은 잠수 시 거대한 배터리를 사용하여 동력을 공급했지만, 배출되는 수소 가스가 중화되지 않으면 폭발 가능성이 있었다. 리코버가 합류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잠수함 배터리에 불이 붙어 위험한 폭발 상황이 발생했다. 함장은 모든 대원들에게 갑판으로 나와 바다로 뛰어들 준비를 지시했지만 리코버는 자원해서 갑판 아래로 내려가 화재를 진압해 배터리 가스 폭발을 막았다.

하이먼 리코버 제독. /사진제공=US Naval Historical Center
1939년, 리코버는 함정국Bureau of Ships의 전기과 부과장으로 임명되었다. 리코버는 이미 해상 장교로서 전함용 전투 전화 시스템을 설치하고 나중에는 비효율적인 연료유 소비를 가차 없이 줄여 자신의 전함을 전대에서 가장 연료 효율이 높은 함선으로 만드는 등 여러 가지 인상적인 엔지니어링 프로젝트를 수행한 바 있다. 이러한 경험들이 그의 경력 전반에 걸쳐 유용하게 쓰일 날카로운 기술적 직관을 형성하는 데 도움을 주었지만 전기과에서 리코버가 갈고 닦은 것은 리더로서의 표준운영절차였다.
리코버는 업무 범위가 불분명했던 작은 행정 기관이었던 전기과를 첨단기술의 산실로 변모시켰다. 그는 영리한 젊은 대학 졸업생들을 채용하고 너무 오래 있었던 '똥차'들을 몰아냈다. 리코버는 또한 전기 장비 카탈로그를 완전히 개편하고 중복 부품을 줄여 조달을 대폭 단순화했다. 그의 팀에서 나온 기술적 성과 중에는 비상 케이블을 갖춘 백업 전력 시스템, 적외선 함대 간 통신 체계, 그리고 기뢰 탐지 및 폭발 장치 등이 있었으며, 이는 1941년 제2차 세계대전에서 미 해군이 신속하게 대서양과 태평양에서 전쟁에 돌입했을 때 큰 도움이 되었다. 그는 또한 엔지니어들에게 전기 장비를 완전히 재설계하도록 하고, 당시 업계 표준보다 앞서 있던 자체 개발 사양을 기반으로 제조업체들이 해군 납품 장비를 만들도록 압박했다. 리코버는 해군의 독점적 구매력을 활용하여 그들이 해군이 설계한 사양으로 작업하도록 밀어붙였고, 심지어 업계 최고의 엔지니어들을 장기적으로 추가비용 없이 빌려오기도 했다.
예를 들어 미 해군은 안정성이 높고 충격에 강한 전기 장비가 필요했다. 이는 특히 잠수함에 중요한 것이었다. 잠수함의 천적은 잠수함에 심각한 물리적 충격을 가해 부력 유지에 필요한 전기 시스템을 마비시키도록 설계된 폭뢰depth charge였다. 납품업체들이 해군의 까다로운 기술 기준을 충족하도록 압박하는 과정에서, 리코버는 그의 강한 추진력과 임무 요구 사항을 극적으로 설명하는 재능으로 유명해졌다. 한 업체가 충격에 강하다는 전기 박스 시제품을 리코버에게 가져왔을 때, 그는 그걸 라디에이터에 냅다 던지자 그 시제품이 박살났다.그러자 그는 아무 말도 없이 자신의 사무실로 돌아갔다. 훗날 리코버는 제2차 세계대전 중 전기국을 이끈 공로로 첫 번째 공로훈장Legion of Merit을 받게 된다.
1946년, 그는 맨해튼 프로젝트를 위한 Y-12 시범 플루토늄 생산 공장이 있는 테네시 주 오크리지에 1년 임무 수행을 위해 파견되었다.
오크리지에서의 리코버
오크리지는 리코버가 해군 기술 장교로서의 20년 경험을 아직 초기 단계였던 원자력 기술에 적용한 곳이며, 또한 그가 초기 조직 혁신을 구상한 곳이다.
리코버는 오크리지에 도착하기 훨씬 전부터 이 시기를 위한 기반을 다졌다. 화학과 물리학 지식을 복습하는 것 외에도, 그는 원자력 기술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 핵추진이나 원자력에 관한 얼마 안 되는 보고서들을 열심히 찾아보았다. 제2차 세계대전 동안 대부분의 핵 연구는 폭탄 제조에 집중되어 있었고 에너지 생산을 위한 지속가능한 핵분열 반응을 설계하는 방법에 대해서는 거의 생각이 없었다.
전쟁이 끝날 무렵, 원자폭탄에서 확실히 입증된 바와 같이 핵물리학이 발견한 힘에 대한 많은 흥분이 있었고, 이 기술이 어떻게, 누구에 의해 개발될 것인지에 대한 질문도 많았다. 트루먼은 정부가 핵에너지가 어떻게 사용될 수 있는지 파악하고, 전쟁이 끝난 상황에서 문민 통제를 어느 정도 재확립할 수 있도록 1946년에 원자력위원회(AEC)의 설립을 승인했다. 그러나 원자력위원회는 1947년까지 완전히 구성되지 않았고 여전히 원자로를 건설할 구체적인 계획은 없었다. 오크리지에는 "대니얼스 파일1"이 있었지만, 느슨한 전후 태도로 인해 오크리지에서 실제로 원자로를 건설하기 위한 진지하고 협력적인 노력은 없었다. 맨해튼 프로젝트의 책임자였던 그로브스 장군은 민간 기구인 원자력위원회가 핵에너지의 또다른 군사적 사용을 막으려 할 수 있기에 구축함용 원자로 개발 모색을 위해 제너럴일렉트릭(GE)과 서둘러 계약을 체결했다. 그러나 GE는 주로 플루토늄 생산과 민간 원자로 설계에 집중하고 있었고, 해군 프로젝트는 미래의 펀딩 가능성이 훨씬 낮았기 때문에 이 프로젝트에 우선순위를 두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해군의 다른 부서들은 핵무기에 저항할 수 있는 함선 현대화, 증식로, 그리고 다단계(따라서 수십 년이 걸리는) 잠수함 추진 시스템의 점진적 개선 등, 다른 계획에 신경쓰고 있었다.
해군의 다른 이들과는 달리 리코버는 오크리지 시절 초기에 첫 번째 핵 함정이 잠수함이어야 한다는 생각에 끌렸는데 주로 두 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첫째, 잠수함은 가장 핵 에너지를 적용하기 어려운 사례였다. 만약 좁고 까다로운 잠수함 내부에 원자로를 맞출 수 있다면, 어떤 선박도 핵동력으로 움직일 수 있음을 증명할 것이었다. 그리고 그보다 더 중요한 이유로, 잠수함은 원자로를 장착하면 획기적인 발전을 얻을 수 있는 응용 분야였다. 리코버는 이미 디젤-배터리 구동 잠수함의 위험을 경험한 바 있었다. 배터리를 재충전하려면 디젤 발전기를 돌려야 했는데 이를 위해서는 산소가 필요해 자주 수면 위로 올라와야 했다(혹은 잠망경 정도 수심에 머물기 위해 새로운 독일 스노클 기술을 사용해야 했다). 심지어 배터리로 잠수 상태에서 운행할 수 있을 때도, 당시 배터리의 전력 밀도가 매우 낮았기 때문에 비참할 정도로 속도가 느렸다. 그래서 당대의 잠수함은 진정한 수중 전투함이라기 보다는 보다는 가끔 일정 시간 동안 잠수가 가능한 소형 수상함에 가까웠다.
리코버는 해군을 원자력의 방향으로 밀어붙이기 위해 노력했다. 오크리지에서 자신의 입장을 밝힌 보고서를 열심히 보냈고 1947년 초 원자력에 대한 해군의 입장을 요청한 원자력위원회의 요청에 응답하기 위해 자신의 탈장 수술을 미뤘다. 리코버는 이 기회를 활용하여 핵추진 선박이 5~8년 내에 실현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 보고서를 작성했고 이를 해군부 장관에게 전달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리코버는 오크리지에서 자신의 계획을 실현하지 못했다. 그에게는 놀랍게도 함정국의 핵 문제 담당으로 다른 대령이 공식적으로 임명되었다. 오크리지에서의 1년 순환 근무 마지막 달에, 리코버는 자신이 보살핀 다른 4명의 젊은 해군 장교들과 함께 모든 주요 원자력 시설을 둘러보며 실제 발전용 원자로 건설에 관심이 있는 다른 의욕적이고 재능 있는 인재들을 물색했다. 그들은 에임스연구소, 아르곤국립연구소, 버클리연구소, 로스알라모스를 둘러보았다. 모두 오늘날 미국 에너지부(DOE) 산하의 국립연구소다. 이 방문의 직접적인 성과는 없었지만, 리코버는 원자력위원회(AEC)의 아르곤연구소 책임자인 월터 진, 버클리의 어니스트 로렌스, 로스알라모스의 에드워드 텔러 등과 소중한 관계를 맺었다. 특히 텔러는 당시 국방부 R&D 책임자였던 로렌스 하프스타드에게 해군의 관료주의에 좌절한 "비정상적으로 지능이 높고 상세하고 구체적이며 현실적인 계획에 관심이 있는 다섯 명의 해군 장교들"에 대한 편지를 썼다.
그러나 결국 리코버의 팀은 그들의 순환근무가 끝나면서 해군 관료 조직 전반으로 흩어졌다. 리코버의 최저점이었다.
리코버, 관료주의와 씨름하다
이미 다른 대령이 함정국에서 핵 관련 담당자였고, 리코버가 이미 특유의 무례함으로 많은 논란을 빚으며 평판이 좋지 않았기 때문에 일각에서는 그를 오크리지로 돌려보내 기밀해제 담당관으로 임명할 것을 제안했다.2 다행히도 함정국 책임자인 얼 밀스 제독은 전기과에서의 그의 업무를 통해 리코버를 알고 있었고, 그를 핵 문제 특별 보좌관으로 임명할 만큼 리코버를 존중했다. 하지만 그에게 부하 직원, 권한, 책임은 없었다.
리코버가 해군 전체에 핵 잠수함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계속 노력하는 동안, 대부분의 고위 간부들은 새로 창설된 국방부3에서 권력을 차지하기 위한 경쟁에 몰두했다. 한 장교는 이렇게 말했다. "지금 우리의 주적은 공군이다... 우리가 항공모함을 유지할 수 있다면 운이 좋은 것이다."
그러나 리코버는 해군부 장관으로부터 핵 잠수함의 중요성을 인정받기 위해서는 우선 해군 함대의 필요성에 대해 특히 존경받는 권위자인 해군참모총장(CNO)을 설득해야 한다는 사실을 간파했다. 마침 당시 해군참모총장은 체스터 니미츠였는데 그는 잠수함 승조 경험이 있었다. 리코버는 해체된 오크리지 팀과 함께 니미츠가 해군 장관에게 보낼 편지를 작성했다. 각 사무실에서 적절한 서명을 받기 위해 신중하게 작업했으며, 편지를 왕래하며 다른 이해관계자들을 만족시키기 위해 세세한 수정을 하고, 이전에 잠수함에서 복무했고 핵 에너지가 잠수함 전투에 얼마나 혁명적일지 이해했던 장교들 중에서 도움이 되는 동맹을 확보했다. 두 달 후, 니미츠는 설리번 해군부 장관에게 보내는 편지에 서명했다. 리코버는 또한 설리번(그도 서명했다)이 첫 국방장관 제임스 포레스탈과 배네바 부시4에게 보낼 편지도 작성했다.
마침내, 해군은 핵추진 잠수함에 대한 군사적 필요성을 공식적으로 인정했고 함정국이 그 노력을 주도하게 되었다.
안타깝게도 새롭게 설립된 원자력위원회는 핵추진 잠수함이라는 아이디어에 그다지 흥분하지 않았다. 위원회는 상대적으로 짧은 역사 동안 지금까지 군대의 독점적 영역이었던 핵기술에 대한 문민 통제를 보장하는 데 관심이 있었다. 또한 우라늄 광석 공급에 더 관심이 있었고 전반적으로 핵추진 잠수함이 기술적으로 실현 가능하다고 믿지 않았다.5
위원회와 해군 사이에는 핵추진 잠수함의 중요성에 대한 견해 뿐만 아니라 최초의 원자로를 건설하는 방식에 대해서도 철학적 차이가 있었다. 위원회는 새로운 아르곤국립연구소가 선택지를 연구하고 기본 개념을 제시한 후, 해군이 이를 이어받기를 원했다. 그러나 리코버는 이것이 과학적 문제가 아니라 공학적 문제라고 확신했다. 그는 아르곤 과학자들이 해군과 민간 산업에 핵에너지의 난해한 부분을 가르쳐주길 원했지만 해군은 복잡한 프로젝트를 건설하기 위해 산업계와 긴밀히 협력하는 걸 선호했다.
불행히도 원자력위원회는 리코버와 생각이 달랐고 아르곤연구소의 책임자는 아르곤이 원자로 개발에 있어 주도적인 위치를 유지할 것임을 분명히 했다. 함정국은 어쩔 수 없이 아르곤과의 동등하지 않은 파트너십을 받아들여야 했다.
리코버는 이미 1947년에 액체 금속 열교환 시스템을 개발하기 위한 자금을 받았던 제너럴일렉트릭(GE)에 접근했다. 리코버는 GE가 이 프로그램을 액체 금속 원자로 발전소로 완전히 개발할 수 있도록 GE가 수주한 다른 프로젝트보다 이 사업이 해군에게 얼마나 중요한지를 GE 경영진에게 설득했다. 맨해튼 프로젝트의 정신에 따라, 리코버는 웨스팅하우스와 가압수 열전달 시스템을 개발하기 위한 계약을 체결하여 병렬 기술 개발6과 위험 분산을 확보했다.
그러자 원자력위원회는 GE 임원들을 불러들여 해군이 독자행동을 하고 있으며 위원회는 해군 프로젝트의 우선순위를 낮추길 원한다고 직설적으로 말했다. 위원회는 또한 해군에게 원자력위원회에 연락관을 배정할 것을 제안했다.
이때 해군에서 나온 여러 보고서들이 독일 스노클 공학의 도입을 비롯한 러시아의 잠수함 개발에 대해 경고를 울렸다. 해군의 작전개발부대는 이렇게 진술했다. "중속, 심해 잠수, 스노클 장착 잠수함의 전술적 특성은 제2차 세계대전의 대잠수함전(ASW) 절차, 전술 및 교리 대부분을 사실상 무효로 만들었다." 밀스는 이 정보를 가지고 존경받는 잠수함 승조원 두 명과 함께 원자력위원회의 군사연락위원회를 찾았다. 이들은 군 관계자들로 구성돼 군에 보다 우호적인 군사연락위원회에 핵 잠수함의 중요성을 깊이 심어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자력위원회는 해군의 입장을 완전히 거부하고 GE가 '해군 원자로' 보다 중간 에너지 동력 증식로에 모든 역량을 쏟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원자력위원회와 해군이 동등한 파트너로서 서로 협력하고 과학적 연구보다 공학적 개발을 강조하자는 해군의 제안도 거부했다.
당시 해군의 원자력위원회 연락관이었던 리코버는 다시 행동에 나섰다. 첫째, 그는 원자력위원회가 협력을 거부한다면 해군이 단독으로 산업계와 계약할 것이라고 위협하는 밀스 제독 명의의 편지를 작성했다. 해군 지휘체계 내에 우군을 확보했던 리코버는 48시간 내에 해군부 장관과 국방장관으로부터 산업계 참여에 대한 함정국의 입장을 지지하는 편지를 받을 수 있었다. 리코버는 또한 해군 원자로 프로젝트를 맡고 싶어 하는 열망과 의지를 표명한 GE와 웨스팅하우스로부터 성명서를 받았다.
이런 위협적인 성명들과 해군의 제안에 호의적이었던 군사연락위원회의 중재에 힘입어, 리코버는 마침내 원자력위원회로부터 프로젝트 진행에 대한 합의를 얻어냈다. 리코버가 9개월 전 오크리지를 떠났을 당시만 하더라도 해군은 핵추진 잠수함을 진지하게 건설할 의도가 전혀 없었고 원자력위원회는 아직 설립되지 않았다. 그러나 리코버는 해군 관료주의와 완고한 원자력위원회 모두를 성공적으로 다루고 승리했다.
마침내 리코버는 밀스 제독에게 말했다. "함정국에 핵 관련 책임자가 두 명일 수는 없습니다. 머마(함정국 핵 활동 공식 조정관)와 저 중 하나를 없애셔야 할 겁니다." 밀스도 동의했고 리코버는 함정국 연구부 내 새로운 부서인 원자력분과의 책임자가 되었다.
리코버는 또한 오크리지에 있을 때 처음 구상했던 것처럼 원자력위원회와 해군 함정국 양쪽에서 자리를 차지하는 관료적 혁신을 실현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위원회가 뭔가를 거부한다면 그는 "이것은 해군의 우선순위입니다"라고 대응할 수 있었고, 그 반대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맨해튼 프로젝트가 병렬 기술 접근법을 추구함으로써 프로젝트 위험을 줄인 것과 마찬가지로, 리코버는 병렬 지휘 체계를 추구함으로써 관료적 위험을 줄였다. 이 독특한 구조는 오늘날까지 이어져, 해군 원자로실은 해군 소속이면서 동시에 에너지부(DOE) 산하 준자율적 부처인 국가핵안보관리국(NNSA) 소속이기도 하다.

원자력위원회와 해군 함정과의 병렬 지휘를 받는 해군 원자로실의 당시 조직도. /제공=미국 에너지부
해군 원자로 그룹을 만들다
리코버는 빠르게 새 팀의 인력을 확충했다. 리코버가 데려온 다른 많은 장교들과 엔지니어들은 그가 함정국 전기과를 이끌던 시절에 만났던 뛰어난 인재들이었다.
리코버는 단기적으로 신속하게 인력을 확충하는 동시에, 깊은 인재층과 장기적인 인재 파이프라인을 구축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는 자신이 뽑은 장교와 엔지니어들에게 야금학, 물리학, 화학의 고급 텍스트에 대한 숙달과 원자력위원회 시설 현장 방문을 포함하여 총 854시간(주당 16시간)의 학습을 요구하는 자기 학습 계획을 제출하도록 요구했다. 그는 MIT와 협력하여 1949년 6월부터 리코버가 작성하고 동의한 커리큘럼으로 핵물리학 개론 과정과 핵공학 석사 학위를 개발했다. 리코버는 또한 오크리지국립연구소와 협력하여 핵과학 및 기술에 대한 1년 과정의 커리큘럼을 개발했는데 이 프로그램은 '오크리지 원자로기술학교'(ORSORT)라고 명명되었으며 1기가 1950년 3월에 시작됐다. 웨스팅하우스, GE, 공공시설 부문, 해군 및 민간 조선소, 그리고 해군 원자로실 모두 ORSORT에 학생을 보냈다. 이 프로그램은 매년 약 100명의 졸업생을 배출하기 시작하면서 원자력 산업 발전을 위한 또 하나의 교육 센터를 제공했다.7 마지막으로 리코버는 엔지니어들로 하여금 함정국의 고위 관리자부터 주니어 기술자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청중에게 교육 강의를 제공하고, 아르곤, 오크리지, 웨스팅하우스·GE의 과학자들에게 선상에서 발생하는 문제와 응용법 등을 설명하도록 했다.8
리코버는 직원 교육의 중요성뿐만 아니라 인재의 중요성도 강조했다. 핵 잠수함, 구축함, 항공모함에 필요한 장교와 사병을 훈련시키기 위한 핵 훈련 학교가 설립된 후에도 리코버는 은퇴할 때까지 핵 훈련 학교에 합격한 모든 장교를 직접 면접했다.
리코버의 독특한 면접 스타일에 대해서는 이미 많은 기록이 있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덜 언급된 한 가지 특징은 리코버가 진정한 주도성을 보여주는 인재를 찾았다는 것이다. 하이킹을 좋아한다고 말한 한 면접자에게 리코버는 그가 근처의 '염소 산'에 등반한 적이 있는지 물었다. 그가 없다고 말하자, 리코버는 내일 아침까지 그곳을 올랐다는 증거를 가져오면 채용하겠다고 말했다. 알고 보니 '염소 산'은 인근 동물원에 있는 산양을 위한 구조물 꼭대기를 말하는 것이었다. 그는 동물원에 가서 관광객에게 사진을 찍어달라고 요청한 다음 울타리 안으로 뛰어들어 꼭대기까지 올라갔다. 그는 바로 다음날 채용되었다!9
그는 엔지니어들에게만 주도성과 사명감을 요구하지 않았다. 그는 사무실 비서, 사무원, 속기사를 위한 원자력 에너지와 잠수함 운영에 관한 저녁 강의와 세미나도 후원했다. 그는 과정을 마친 사람들을 주말에 베티스의 현장과 아이다호의 마크I 원자로로 데려갔다. 참석은 자유였지만 참여율은 높았고, 행정직원을 포함한 사무실 전체에 더 높은 목적의식을 불어넣는 역할을 했다.
팀에 탁월함과 목적의식을 불어넣기 위해, 리코버는 다양한 출처에서 가져온 읽을거리를 팀 전체에 공유하기도 했다. 상급자에게 제출할 보고서 작성 방법에 관한 정부 문서 같은 딱딱하고 일상적인 것부터 유럽의 '30년 전쟁' 기간의 삶에 관한 책의 한 챕터 같은 교양 수준이 높고 전문가들만 읽을 것까지 다양했다.
리코버는 또한 매우 엄격하고 매우 꼼꼼한 관리자였다. 당시 대부분의 문서 작성은 카본지(먹지)로 이루어졌는데 매일 밤 리코버는 다양한 팀에서 나온 모든 문서의 '분홍색 사본10'을 모아 그 초안까지도 자택에 들고가 검토했다. 그런 그에게 장교들이 부하 직원들의 보고서 초안을 포함하여 자기 부서 관리를 어떻게 할 수 있겠느냐고 항의하자 리코버는 이렇게 답했다. "자네 부서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내가 자네보다 더 많이 알지 않도록 하는 것은 자네에게 달렸네." 장교들에 대해 엄격한 감독을 시행함으로써, 리코버는 놀스, 베티스, 조선소의 프로젝트 시설을 포함한 각 팀을 훤히 꿰뚫어 보고 문제를 조기에 발견할 수 있었다. 또한 이는 조직 전체에 직접적인 책임과 감독의 문화를 강화했다.
마지막으로 리코버는 해군 원자로실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납작한 조직으로 운영했다. 각 시설의 프로젝트 담당관들은 그에게 직접 보고했다. 계급과 직무 코드는 T/O 요건을 충족시키기 위해 사용되었지만 어떤 위계 구조나 보고 구조에도 적용되지 않았다. 리코버는 부분적으로 그의 거칠고 공격적인 성격을 통해 누구든지 기술적 문제에 대해 다른 사람, 심지어 자기 자신에게도 도전할 수 있는 문화를 만들었다. 이러한 평평한 조직도와 직접적인 책임은 각 기술 영역에 여러 직원이 책임을 지도록 설계되었다. 예를 들어 원자로 밸브의 부식 오염 문제가 발생했을 때, 리코버는 밸브와 파이프를 감독하는 장교뿐만 아니라 안전 엔지니어, 잠수함 프로젝트 담당관, 그리고 작업이 진행 중인 시설을 감독하는 프로젝트 담당관에게도 책임을 물었다. 그는 사람들이 사소한 것처럼 보이는 기술적 문제라도 직접 그에게 제기하여 조기에 해결할 수 있기를 기대했다.
산업 조정
리코버는 해군과 이 최초의 원자로를 개발하는 "주계약업체"들 사이에 매우 긴밀한 조정 관행을 도입했다. 그는 현장에 거주하며 계약업체의 진행 상황을 정기적으로 모니터링하고 조정하는 프로젝트 담당관 관행을 개척했으며, 이 관행은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전체 프로젝트 위험을 최소화하기 위해 각기 다른 기술적 접근 방식을 동시에 추진하는 관행과 함께 이러한 긴밀한 감독 방식은 리코버가 첫 번째 원자로를 일정에 맞춰 건설하는 데 성공한 요인 중 하나다.
1949년, 리코버는 원자로를 설계하고 제조하기 위해 세 개의 주요 그룹—아르곤국립연구소, 웨스팅하우스, 제너럴일렉트릭—사이를 조정하고 있었다. 제너럴일렉트릭은 이미 뉴욕에 놀스 시설을 설치하고 마크A로 알려진 액체 금속 냉각 원자로 설계를 탐구하는 작업을 해왔다. 리코버와 아르곤연구소 모두 리스크를 줄이기 위한 다른 주요 기술 경로로 수냉식 원자로를 점찍었고 리코버는 마크I로 알려진 수냉식 원자로 설계를 펜실베이니아 베티스에 자체 원자력 설계 시설을 설립한 웨스팅하우스에 할당했다. GE와 웨스팅하우스 두 팀은 냉각제 선택을 기반으로 원자로 설계의 위험을 줄이고 있었는데 이는 냉각제가 원자로의 나머지 부분의 설계를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특징이었기 때문이다.
리코버가 관련된 모든 당사자들로부터 직면했던 난관은 다양한 프로젝트가 경쟁 관계에 있었을 뿐만 아니라, 리코버의 관점에서는 합리적인 시간 내에 최초의 원자로를 설계하고 제조하는 데 필요한 공학적 노력에 대해 계약업체들의 진지함이 부족했다는 것이다. 제너럴일렉트릭은 여전히 민간 원자력 발전소와 그들의 플루토늄 증식로를 우선시했다. GE보다 1년 늦게 시작된 웨스팅하우스의 프로젝트도 적절한 전문 지식으로 인력을 확충하고 리코버의 만족도에 맞는 실행 가능한 원자로 개발에 노력을 집중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정부 계약이란 당시에도 그랬고 오늘날에도 그렇듯이 대체로 수동적이고 행정적인 활동이다. 리코버는 정부가 "고객"이고 계약업체가 인도를 책임지는 주체라는 점을 인정했지만 리코버는 독특한 프로그램 관리 기법을 시도했다. 계약업체들에 대한 철저한 감독을 수행하는 것이었다. 리코버는 그의 사무실에 기술 전문가들을 고용한 다음 그들을 프로젝트 담당관으로 파견하여 다양한 계약업체 현장을 감독했다. 프로젝트 담당관은 현장에서 해군 원자로실의 적극적인 대변인으로서 계약업체들과의 문제를 직접 리코버에게 보고하고 계약업체가 예상대로 납기를 맞출 수 있는지 확인하는 역할을 해야 했다. 모든 면에서 프로젝트 담당관은 현장에서 리코버의 눈과 귀가 되어야 했다. 리코버는 계약업체에 의한 '포획'이 벌어지지 않도록 많은 노력을 기울였는데 자신의 프로젝트 담당관 중 한 명에게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그들과 저녁식사 같은 걸 하지 말게. 귀관의 아내가 그들의 아내와 친해져선 안 되네. 귀관의 개가 그들의 개와 친해지는 것조차 허용하면 안 되네. 그렇게 해버리면 자네도 그들의 편이 되네... 더 이상 나를 대표하지 않을 걸세."
정부가 자금을 보내고 제품을 인도받는 것 이상으로 리코버는 자신의 조직이 기술적 로드맵에 적극적으로 조언하고 의사결정에 대한 지침을 제공하기를 바랐다. 동시에 리코버는 계약업체가 기술적 의사결정에 궁극적인 책임이 있음을 항상 분명히 했다. 그는 전례 없는 수준의 기술적 감독을 행사할 수 있었는데 이는 미 국방부의 방위산업 시장 지배력이 강했기 때문이면서도 그가 계약자를 직접 감독할 수 있는 능력과 권한을 부여받고 그들의 기술적 작업에 책임을 지는 기술 팀을 구축했기 때문이었다.
리코버의 독특할 정도로 엄격한 프로젝트 관리는 초기부터 성공적이었으며 그 성과는 원자력위원회의 성과와 대조적이었다. 냉각제를 기반으로 두 종류의 원자로 설계를 병렬로 추진해 리스크를 줄이긴 했지만 어떤 원자로든 핵분열 반응을 유지하는 데 핵심인 중성자가 통과할 수 있으면서도 원자로 내부의 높은 온도와 압력을 견딜 수 있는 연료 피복재가 필요했다. 리코버는 초기에 지르코늄을 유망한 물질 후보로 식별했다. 이전까지 지르코늄은 중성자 흡수체로 여겨졌지만 1947년 오크리지에서의 연구는 이전 지르코늄 샘플이 하프늄 불순물로 오염되었음을 보여주었다.11 순수한 율지르코늄은 중성자 투과성이 놀라울 정도로 높았으나 그 시점까지 kg 단위로 두자릿수 규모로만 생산되었다. 그러나 1949년, 리코버가 유망한 연료 피복재인 지르코늄 생산을 확대하려고 할 때 원자력위원회는 이미 위원회 내 다른 부서를 통해 계약을 실행하기로 결정한 상태였다. 계약업체들에 대한 중앙집중식 통제와 관리를 행사할 수 없었기 때문에 원자력위원회가 자금을 지원한 제조업체들은 고품질 생산 공정의 규모를 확대하는 데 느렸다. 1950년, 1년의 지연을 겪고 리코버는 마침내 웨스팅하우스 베티스 현장에서 직접 지르코늄 금속을 제조하고 광산국Bureau of Mines과 협력하여 지르코늄을 정제할 수 있도록 허가를 받았다. 리코버의 면밀한 감독 하에, 베티스는 새로운 정제 공정으로 지르코늄 생산 능력을 수천 톤으로 확장했다. 리코버는 이 새로운 기술의 리스크를 줄인 후에서야 지르코늄에 대한 계약 입찰을 개시했다. 나중에 해군부 장관이 웨스팅하우스에 어떻게 이 공정의 규모를 확대할 수 있었는지 물었을 때, 그는 "리코버가 그렇게 만들었다"는 답을 들었다.
리코버의 유명한 '퀘이커 회의'도 리코버의 접근법을 잘 보여주는 사례다. 해군 원자로실과 계약업체 사이에 분쟁이 발생하거나 너무 많은 의견 불일치와 의사소통 문제로 신뢰가 약해졌을 때, 리코버는 그의 직원들과 계약업체 직원들을 주말 동안, 일주일, 또는 필요한 만큼의 기간 동안 휴양지로 함께 보냈다. 그들은 어떤 회의 절차나 공식 의제 없이 만나서 "서로를 어느 한 조직의 대변인이 아닌 개인으로 상대"하고 앞으로 나아갈 방향에 대한 합의를 도출하고 상호 신뢰를 구축할 수 있을 때까지 그저 계속 그들의 문제를 이야기했다.
리코버는 또한 초기부터 가능한 한 가장 엄격한 방사선 통제를 고집했다. 그는 심지어 노벨상을 수상한 유전학자 헤르만 뮐러를 데려와 잠재적 방사선 노출에 대해 더 잘 이해하고자 했다. 결국 리코버는 민간 기준보다 높은 방사선 노출 수준을 수용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잠수함 승조원들이 자연 방사선 수준과 비슷한 수준에 노출될 수 있도록 원자로를 설계하기로 선택했다. 1950년대에 대기 핵실험은 여러 핵 잠수함 시설에서 방사선 누출 오경보를 촉발했다. 이후 측정 결과, 핵 잠수함 내부의 방사선이 실제로 잠수함 외부보다 낮았는데 이는 리코버의 원자로 차폐가 얼마나 효과적이었는지를 증명하는 것이었다.
아이다호에서 마크I 건설
1950년 후반, 웨스팅하우스의 마크I 수냉식 원자로가 가장 먼저 완성될 접근법이라는 게 분명해졌다. 그러나 원자로 설계를 검증하기 위해 먼저 육상 기반 프로토타입을 만들어야 했다.
리코버는 원자력위원회가 아이다호에 설립한 국립원자로시험장12을 이용하여 마크I 원자로13를 시험했다. 그는 육상 기반 프로토타입이 실제 함상 프로토타입(마크II라고 불림)과 최대한 동일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원자로 프로토타입을 테스트하기 훨씬 더 쉬운 넓고 복잡한 제어실 대신, 리코버는 모든 프로토타입 원자로 설계와 제어가 좁은 잠수함 함상 조건과 동일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리코버는 또한 실물 크기 모형에 매료되었다. 그는 마크II 원자로가 실제로 설치될 때까지 모든 우발 상황이 고려되도록 계약업체들이 아이다호에 실물 크기의 나무 잠수함을 건설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리코버의 긴밀한 프로젝트 관리 관행은 프로토타입과 실전 배치된 원자로 사이에 차이가 거의 없었다는 점과 함께 해군 원자로실이 최초의 핵추진 잠수함을 정시에 예산 초과없이 완성할 수 있었던 비결 중 하나다. 해군의 다른 부서가 주도한 핵 프로젝트는 그렇지 않았다.
통제된 핵반응을 만들려는 시도에서 오는 많은 오탐지로 어려움을 겪었지만 마크I 원자로를 임계 상태로 만들기 위한 수개월간의 신중한 테스트 끝에 팀은 마침내 1953년 5월 30일 원자로를 정격 출력으로 가동할 준비가 되었다. 처음에는 데이터를 수집한 후 종료하기 위한 48시간 시험가동만 계획되었다. 그러나 리코버는 마지막 순간에 팀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원자로가 대서양 횡단 잠수 항해에 걸리는 96시간 동안 최대 출력으로 가동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메시징의 중요성을 알고 있던 리코버는 이번 시험가동이 잠수함용 핵추진의 잠재력을 직관적으로 보여주기를 원했다. 리코버는 팀원들의 반대에 이렇게 대답했다. "장시간 가동이 어떤 효과를 가져올지 모르겠나? 세계 역사상 어떤 잠수함도 최대 출력으로 20마일(30km) 이상 연속해서 운행한 적이 없네. 이 시험가동은 사람들에게 이게 진짜라는 것을 보여줄 걸세. 이건 장난감이 아니야. 내가 귀관들이 발전기를 멈추게 허락한다면 이를 다시 가동하기까지 몇 주가 걸릴 걸세." 그는 결과에 대해 전적인 책임을 질 것이라고 단언했다. 그는 심지어 대서양 지도를 설치하고 원자로를 "운용"하는 각 교대 근무조가 교대 종료마다 '잠수함'의 현위치를 업데이트하도록 했다.
96시간 운행은 문제 없이 완료되었고 핵추진의 중요한 이정표가 되었다. 마크I 원자로는 1989년 10월까지 아이다호에서 완전 가동되는 시험 원자로로 계속 사용되었다.
잠수함 건조와 승조원 배치
마지막으로 리코버에겐 잠수함을 위한 조선소도 필요했다. 전통적으로 잠수함 건조에서 제너럴일렉트릭은 일렉트릭보트Electric Boat와 협력했고, 웨스팅하우스는 포츠머스 해군 조선소와 협력했다. 두 조선소를 모두 돌리는 것은 기술 개발을 위한 병렬 경로를 취하는 관행을 계속하는 것이기도 했다. 리코버가 1950년에 일렉트릭보트에게 최초의 핵 잠수함 건설을 처음 제기했을 때, 그들은 새로운 핵추진 함선 라인의 안정적인 수익으로 부침이 심한 해군 조선 수요를 완화할 수 있겠다는 기대에 흥분했다. 그러나 해군이 직접 소유하고 운영하는 포츠머스 조선소는 수요 변화에 덜 민감했고 기존 해군 프로젝트보다 핵 잠수함 프로젝트를 우선적으로 추진할 이유가 덜 했다. 포츠머스 조선소의 지휘관이 웨스팅하우스와 함께 최초의 핵 잠수함을 건설하자는 리코버의 제안을 거절하자 리코버는 그 조선소 지휘관의 전화기를 들어 일렉트릭보트에 전화를 걸었다. 그는 일렉트릭보트에 단 한 척이 아닌 두 척의 핵 잠수함을 건설해 달라고 요청했고, 그들은 즉시 동의했다.
일렉트릭보트 팀이 아이다호에서 마크1 압력 용기, 증기 발생기, 냉각제 배관을 설치하는 동안 매사추세츠 그로턴의 조선소는 선체 부분을 제작하고 노틸러스라고 명명될 핵 잠수함의 용골 거치를 준비하고 있었다. 홍보의 중요성을 늘 잘 알고 있던 리코버는 맥마흔 상원의원에게 전화했다. 그는 매사추세츠주 상원의원일 뿐만 아니라 원자력합동위원회 위원장이었으며 수많은 위원회 회의에서 리코버를 만나왔다. 트루먼 대통령은 맥마흔 상원의원의 용골 거치 초대를 기꺼이 수락했다. 1952년 6월 14일, 노틸러스의 용골이 놓였다. 트루먼은 표면에 자신의 이니셜을 분필로 썼고 용접공이 그것을 용접했다. 몇 주 후, 해군부 장관은 리코버에게 두 번째 공로훈장을 수여하며 해군 원자로 프로그램을 "해군 역사상 가장 중요한 개발 작업"이라고 불렀다.
리코버는 마크1 원자로의 개발과 노틸러스의 제작을 순차적으로 관리했을 뿐만 아니라, 최초의 핵추진 잠수함을 운용할 수 있는 잠수함 승조원도 물색해야 했다. 리코버는 해군 인사국이 보낸 모든 잠수함 승조원을 직접 면접하고 주도성과 지능을 모두 검토했다. 장교와 사병 모두 베티스에서 엄격한 교육 프로그램을 거쳤고 1953년 마크1 원자로 가동에 참여하기 위해 아이다호에 도착했다. 승조원들은 또한 1954년 그로턴에서 일렉트릭보트와 함께 함선 시스템과 부품 제조에도 참여했다. 승조원들이 함선의 건조에 이렇게 깊이 관여한 것은 처음이었다.
1954년 노틸러스를 완성하고 마크II 함선 원자로(마크I 원자로의 근접한 복제품)를 취역시키기 위한 숨 가쁜 경주의 한가운데서 재난이 발생했다. 1954년 9월 중순 노틸러스 증기 발전기의 고온 테스트 도중 증기 라인이 파열되었다. 이후 조사에서 증기 라인에 이음새가 없는 파이프 대신 압연 및 용접된 파이프가 사용됐다는 게 밝혀졌다. 이는 고압 증기를 운반하기 위한 파이프가 아닌 난간용 파이프 제조에 사용되는 공정이다. 리코버는 이미 설치된 수천 피트의 파이프를 뜯어내 교체한다는 어려운 결정을 내렸다. 각고의 노력(그리고 엄청난 초과 근무)으로 일렉트릭보트, 웨스팅하우스, 그리고 승조원 팀은 12월 30일 마크II 원자로를 임계 상태로 가져올 수 있었다.
새해 첫 주에 원자로 테스트를 완료한 후, 노틸러스는 1955년 1월 17일 부두를 떠나 항구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노틸러스가 영국의 템스 강을 지나갈 때 신호수는 호위 예인선에 신호를 보냈다. "핵동력으로 항해 중."

2021년 건조된 미국의 버지니아급 공격 원자력 잠수함 하이먼 리코버. 리코버 제독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다. /사진=AP/뉴시스
핵추진 잠수함을 개발하는 데 리코버의 끈기와 선견지명은 핵 에너지가 가장 엄격한 운영 환경에서도 안전하게 사용될 수 있음을 입증했고 민간용 핵 에너지의 광범위한 사용을 위한 기반을 마련했다. 이는 미국을 냉전 기간 동안 핵심 이중용도 기술 영역에서 기술적 리더로 만드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리코버의 방식은 차세대 원자로 건설 뿐만 아니라 이중용도 기술의 거버넌스와 전략적 기술 개발에서의 강대국 경쟁에 대한 관심이 새롭게 부활한 시대에 여러 교훈을 준다. 첫째, 리코버는 복잡한 프로젝트를 감독할 기술적 능력을 갖춘 권한 있는 정부 기관을 구축했다. 리코버는 최고의 기술 인재를 자신의 조직에 데려오는 것을 우선시했으며, 해군 원자로실이 크게 성장했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채용 최종 단계를 직접 승인했다. 초기에 그는 정부와 민간 부문이 장기적으로 야심찬 범위를 실현하는 데 필요한 새로운 교육 기관을 설립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리코버가 유능한 조직을 개발했기 때문에 그는 산업계가 당시 가능하다고 믿었던 것 이상으로 업계를 밀어붙일 수 있었다. 계약업체들과 직접적이고 일상적으로 접촉하는 현장 프로젝트 담당관을 그의 새로운 방식으로 활용함으로써, 리코버는 산업 파트너들과 업무 조정을 하고 최초의 핵추진 잠수함이 일정에 맞게 건설되도록 보장할 수 있었다. 혁신적인 추진 기술을 개발하고 적용했음을 고려하면 일정을 맞췄다는 건 더욱 놀라운 업적이었다. 오늘날 미국의 여러 중요 산업이 외국 경쟁자들에게 뒤처져 있는 가운데 이런 종류의 영감을 주는 공공-민간 파트너십은 절실히 필요하다.
마지막으로, 리코버 자신은 평생 해군 장교로서, 관료적 노하우, 공학적 통찰력, 그리고 확신을 독특한 수준으로 가지고 있었으며 이를 불확실한 로드맵을 가진 당시 흥미롭고 새로운 기술에 적용했다. 깊은 헌신과 신념을 가진 새로운 세대의 공공 부문 리더들은 리코버의 유산에서 영감을 얻어 차세대 신흥 기술을 구축할 수 있을 것이다.
이중용도 기술과 강대국 경쟁에 대한 관심이 새롭게 부활한 시대에, 미 해군이 어떻게 원자력의 시대를 탄생시켰는지에 대한 이야기는 성공을 위한 중요한 교훈을 제공한다.
찰스 양은 워싱턴DC 소재의 산업정책 연구소인 산업전략센터Center for Industrial Strategy의 설립자다. 미국 에너지부에서 AI 및 공급망 정책 보좌관으로 일했으며 샌프란시스코의 AI 하드웨어 스타트업에서 머신러닝 엔지니어로 일했다.
걸출한 인물이 난관을 딛고 위업을 달성하는 이야기는 언제나 흥미롭지요. 하이먼 리코버는 기술적 난관 뿐만 아니라 자신에게 적대적이었던 관료주의적 난관을 능란하게 돌파하여 미국으로 하여금 세계 최초의 핵 잠수함을 개발하는 데 큰 공헌을 한 해군 제독입니다. 세계적인 원자력 기술 강국이자 주요 운영 국가인 대한민국 독자들에게 이 오래된 미 해군 제독의 이야기가 중요한 이유는, 리코버가 핵이라는 첨단 기술을 도입하며 보여준 기술적·관료적 난관 극복 과정, 엄격한 안전 기준 확립, 산업계를 이끌었던 혁신적 프로젝트 관리 방식, 그리고 강력한 리더십이 에너지 안보 확보와 첨단 기술 개발이라는 한국의 핵심 과제에 깊은 통찰을 제공하기 때문입니다. 그의 경험은 단순히 과거의 성공담을 넘어, 원자력과 같은 이중용도 기술의 전략적 관리, 대규모 국가 프로젝트의 성공적 추진, 그리고 무엇보다 타협 없는 안전 문화 구축에 대한 귀중한 교훈을 담고 있어, 기술 혁신과 국가 발전에 관심 있는 독자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클 것입니다. 특히 해군과 조선 관계자들은 꼭 읽어야 할 내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