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승에 따르면 약 2300년 전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 1세는 궁정 고문에게 세상의 모든 문헌을 수집하라고 명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휘하에 있었던 프톨레마이오스는 인류가 쌓아 올린 모든 지식을 보존할 도서관을 꿈꾸었다. 그의 후계자들은 이 사명을 이어받았다. 왕실 병사들은 알렉산드리아 항구에 정박하는 모든 배를 수색하여 두루마리 문헌을 찾아냈고, 그렇게 모인 책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학당 리케이온을 본떠 세운 학문과 예술의 신전 무세이온에 보관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장서 역시 그 소장 목록에 포함되어 있었다고 전해진다.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의 역사에 관한 기록은 대부분 유실되었다. 그러나 그곳은 근대 이전 인류 문명이 이룩한 가장 위대한 지적 업적들이 꽃핀 무대였다. 국왕은 학자들에게 도서관에 머물며 연구할 수 있도록 후원했고, 장서는 "배움을 갈망하는 누구에게나 열려 있어, 도시 전체의 지적 성장을 장려했다"고 당시 이곳을 찾았던 한 그리스 수사학자는 기록했다. 바로 이 도서관에서 에라토스테네스는 지구의 둘레를 계산했고, 제노도토스는 호메로스 서사시의 가장 오래된 사본을 다듬었다. <기하학 원론>을 저술한 유클리드 역시 이곳에서 수학했을 가능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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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학문적 번영은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서기 400년 무렵,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은 역사 속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많은 학자들이 이 도서관의 파괴를 인류 역사상 가장 막대한 지식의 손실이자 암흑시대의 시작으로 여긴다. 수세기에 걸쳐 역사가들은 문제의 원인을 밝히기 위해 파피루스 조각들을 하나하나 분석해 왔다.
오랫동안 그 원인은 전쟁으로 알려져 왔다. 기원전 48년 알렉산드리아 전쟁 당시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일으킨 화재로 4만 권이 넘는 두루마리가 소실되었다. 도서관은 규모가 줄어든 채 명맥을 이어가다가, 서기 4세기에 이르러 알렉산드리아 대주교의 추종자들이 남아 있던 필사본들을 보관하던 이교도 신전을 약탈하면서 마침내 종말을 맞았다. 그러나 현대 역사학자들은 이러한 극적인 사건들보다 훨씬 평범한 다른 원인을 더 주목한다. 바로 방치였다.
소장품을 유지하는 데에는 막대한 비용이 들었다. 습기와 쥐, 그리고 벌레들은 파피루스 두루마리를 서서히 갉아 먹었다. 필경사들은 오래된 문헌이 훼손되어 읽을 수 없게 되기 전에 끊임없이 새로 필사해야 했다. 도서관을 유지하는 어려움이 보존하려는 의지보다 커졌다. 고전학자 로저 배그널(Roger Bagnall)은 이렇게 말한다. "도서관의 소멸이 암흑시대를 불러왔다고 말할 수 없고, 반대로 도서관이 살아남았더라면 그 시대가 더 나아졌으리라고도 말할 수 없다." 도서관이 죽도록 방치되었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암흑시대가 도래해 있었음을 보여주는 증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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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2천 년이 지난 오늘, 전혀 다른 상황 속에서 다시 암흑이 드리우고 있다. 한때 문해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자부심이 컸던 미국인들이 예전만큼 책을 읽지 않는다. 미국인의 독서 습관을 가장 포괄적으로 조사하는 미국 국립예술기금(NEA)에 따르면, 2022년 한 해 동안 어떤 종류의 책이든 한 권이라도 읽었다고 답한 성인은 전체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했다. 38퍼센트만이 소설이나 단편소설을 읽었다. 미국인의 '시간 사용 실태 조사'에 응답한 23만 6천 명의 자료를 분석한 연구에서는 임의의 하루를 기준으로 여가 독서를 한 사람의 비율이 2004년 28퍼센트에서 2023년 16퍼센트로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 연구는 책, 잡지, 신문을 읽거나 오디오북을 듣거나 전자책을 읽은 경우를 모두 독서로 포함했다.) 이제는 도박이 독서보다 더 흔한 여가 활동이 되었다. 지난해 미국인의 57퍼센트가 도박 베팅을 했다.
독서의 쇠퇴는 연령과 성별, 교육 수준을 막론하고 공통적으로 나타났다. 가장 많이 책을 읽는 인구 집단이었던 은퇴자와 여성, 그리고 대학 졸업자들조차 독서량이 급격히 줄어드는 흐름을 보였다.
사람들이 읽는 책들 또한 과거보다 훨씬 단순해졌다. 오늘날 뉴욕타임스 선정 베스트셀러의 문장은 100년 전에 비해 약 3분의 1가량 짧다. 문장이 길다고 해서 본질적으로 더 뛰어난 것은 아니다. 그러나 과거에 긴 문장이 널리 쓰였다는 사실은 미국인들이 진지한 문학 작품을 읽으려는 의지와 능력이 있던 시대가 있었음을 시사한다. 1958년, 보리스 파스테르나크의 <닥터 지바고> 영어 번역판은 퍼블리셔스위클리가 집계한 그해의 베스트셀러였다. 파스테르나크는 길고 복잡한 문장을 구사한다. "산속의 그 따스한 잿빛 아침, 지바고는 짜르에게 연민을 느꼈고, 그토록 소심하고 내성적이며 수줍은 성품이 압제자의 본질일 수 있다는 사실, 그토록 나약한 사람이 누군가를 투옥하고, 교수형에 처하고, 또 사면하는 권력을 휘두를 수 있다는 사실에 혼란을 느꼈다."
지난해 가장 많이 판매된 소설은 <선라이즈 온 더 리핑(Sunrise on the Reaping)>으로, <헝거 게임> 청소년 시리즈의 최신작이다. 뉴욕 공공도서관의 브라이언 배넌 수석 사서는 청소년 소설이 도서관에서 가장 인기있는 분야에 들어가며, 그 독자층에는 엄연한 어른들도 많다고 말했다. (도서관 인기 순위 상위 10권에 어린이책 <파티푸퍼(Partypooper)>, <윔피 키드(Diary of a Wimpy Kid)> 시리즈의 스무 번째 편, 그리고 <도그 맨: 빅 짐 빌리브스(Dog Man: Big Jim Believes)>가 들어간다.) 성인 대상 소설 가운데 가장 인기있는 작품은 로맨타시(romantasy) 모험소설 <오닉스 스톰(Onyx Storm)>이었다. 어떤 재미를 선사할지언정, 파스테르나크와는 거리가 멀다. "그가 나를 내려다볼 때, 각진 턱 근육 하나가 움찔하며, 까칠하게 수염이 돋은 황갈색 뺨 위로 잔물결이 인다."
또한 미국인들은 예전처럼 읽기를 통해 뉴스를 접하지 않는다. 1975년만 해도 20대 청년의 절반가량이 매일 신문을 읽는다고 답했다. 지금 그 비율은 10퍼센트에도 미치지 못한다. 이제 미국인들은 대부분 휴대전화와 노트북으로 뉴스를 접하며, 40퍼센트는 뉴스를 읽기보다 온라인으로 보거나 듣는 것을 더 선호한다고 답한다.
이러한 변화를 흔히 문해력 위기라고 부른다. 실제로 미국인의 기본적인 읽기 능력은 저하되고 있다. 4학년과 8학년(중학교 2학년) 학생들의 읽기 성취도는 지난 10여 년 동안 꾸준히 하락해 왔다. 미국 학교도서관 사서협회 아만다 코델리스키 이사는 학생들의 낮아진 독해 수준을 반영하기 위해 사서들이 새로운 책을 구입해야 하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가장 인기 있는 책들은 그래픽노블이다. 초등학생들은 <매직 트리 하우스> 시리즈 같은 개정판 고전 작품들을, 중·고등학생들은 망가(漫畵)를 좋아한다.
2024년 전국 학업성취도 평가에서, 12학년 (고등학교 3학년) 학생 중 복잡한 문학 작품의 주제를 분석하고 논증의 설득력을 평가하는 능력에서 '능숙(Proficient)' 수준에 도달한 학생은 35퍼센트에 불과했다. 거의 같은 비율의 학생들이 '기초(Basic)' 수준에도 미치지 못했다. 이들은 글 속에 명시된 개념으로부터 결론을 이끌어내거나, 문맥을 단서 삼아 모르는 단어의 뜻을 파악하는 데 어려움을 겪을 수 있음을 의미한다. 성인의 문해력 역시 약화 되었다. 거의 30퍼센트에 달하는 미국 성인이 여러 쪽 분량의 글을 읽고 내용을 자신의 말로 재구성하거나, 추론을 이끌어내지 못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2017년만 해도 그 수치는 20퍼센트 미만이었다.
역설적이게도, 미국인들은 아마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도 많은 단어를 읽고 있을 것이다. 달라진 것은 무엇을 읽느냐 그리고 어떻게 읽느냐일 뿐이다. 사람들은 매일 이메일과 문자 메시지, X 게시물, 레딧 스레드, 인스타그램 캡션에 쉼 없이 노출된다. 단편적인 텍스트들이 폭발적으로 넘쳐나면서 풍부하고 복합적인 정보를 담은 긴 글에 오랫동안 집중하는 능력은 그만큼 희생되고 있다. UCLA의 인지신경과학자 메리앤 울프는 사람들이 글을 깊이 사유하는 능력을 잃어가고 있다고 주장한다. 개별적 단어들을 해독하는 법을 모른다는 것이 아니라, 이해와 종합이라는 고차원적 인지 능력을 상실하고 있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 미국은 문맹 사회가 아니다. 미국은 탈(脫)문해 사회가 되었다.
상황은 이제 곧 급속히 악화될 것이다. 다음 세대는 오늘날의 성인들이 어렸을 때보다 훨씬 적게 읽는다. 예일대학교와 코네티컷대학교가 공동 운영하는 해스킨스 글로벌 문해력 허브(Haskins Global Literacy Hub)의 벤저민 파워스 소장은 유치원 교사들로부터 많은 아이들이 전래 동요나 동화를 모른다는 이야기를 듣는다고 전했다. (앞서 언급한 23만 6천 명 규모의 미국 성인 조사에서도, 임의의 하루를 기준으로 아이에게 책을 읽어 준 사람은 2퍼센트에 불과했다.) 1984년부터 2025년까지 '재미를 위해 책을 읽는 일이 거의 혹은 전혀 없다'고 답한 13세 청소년의 비율은 8퍼센트에서 29퍼센트로 늘어났다. 아이들은 나이가 한 살씩 많아질수록 책을 더 멀리한다. 미국 예술과학아카데미의 로버트 타운센드 프로그램 담당 국장은 최근 고등학생들을 대상으로 포커스 그룹 인터뷰를 진행하며, 여가 독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물었다. 대부분의 학생들이 독서를 낯설고 이질적인 행위로 여긴다고 했다.
사회에서 가장 교육 수준이 높은 사람들 중에서도 이제 독서를 부차적인 것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있다. 하버드대학교 인문사회과학 지원실 마거릿 레닉스 부국장은 한 학생의 예를 들었다. 그 학생은 "Old English(학계에선 '고대 영어'를 의미)"로 쓰인 책을 읽기가 너무 어렵다고 토로했는데, 알고보니 그 책은 앤서니 버지스의 1962년 소설 <시계태엽 오렌지(A Clockwork Orange)>였다. (그 학생은 결국 챗GPT를 이용해 작품을 쉬운 말로 '번역'해 읽었다.)
얼마 전, 하버드의 한 사회학 교수는 강의 평가에서 학생들이 밀도 높은 읽기 과제가 지나치게 많다고 불만을 제기해 고심하다가, 레닉스 부국장에게 자신의 수업에 와서 독서의 의미를 변호해 달라고 요청했다. 레닉스는 미국 최고의 명문대에서, 글을 통한 관찰과 논증, 분석에 뿌리를 둔 학문을 배우는 학생들에게, 발췌문이나 요약문은 원전이 지닌 깊이와 정교함을 결코 담아낼 수 없다는 사실을 설명해야 했다.
레닉스에 따르면, 이제 일부 학생들은 지식을 습득하는 데 있어 독서를 불필요하게 부담스러운 방식으로 여긴다. "교수들이 학생들에게 글을 읽도록 요구하는 것을, 굳이 더 어려운 매체를 통해 정보를 얻도록 강요함으로써 타당한 이유없이 학생들이 진짜 정보에 접근하는 것을 방해하는 것으로 보는 거죠."

169년 역사를 지닌 이 매거진에서 글을 쓰는 사람이 독서의 가치를 열렬히 옹호하는 것은 자신의 이익을 위한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탈문해 시대에 설 자리를 잃는 사람은 비단 글로 먹고사는 이들만이 아니다. 독서는 단순한 기술이 아니다. 많은 의사소통 방식 중 하나에 불과한 것도 아니다. 우리가 서로 소통하기 위해 사용하는 매체는 우리가 사는 세계의 모양을 형성한다. 초기 인류는 수천 년 동안 오직 음성만으로 서로 소통했다. 읽기와 쓰기가 등장하면서 사회는 근본적으로 달라졌다. 읽고 쓰는 일은 인간의 의식을 바꾸었고 정치 질서를 바꾸었으며, 인간이 이룰 수 있는 지적 위업의 수준을 바꾸어 놓았다. 독서의 쇠퇴 역시 그만큼 중대한 변화를 가져올 것이다. 그것은 우리 내면의 가장 깊은 사고에 영향을 미칠 것이며, 우리 사회의 정치와 문화는 물론, 우리 문명의 역사를 서술하는 방식까지 바꿀 것이다. 조금만 눈여겨 보면, 변화가 이미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사실 독서는 인간에게 본래 자연스러운 능력이 아니었다. 인간의 뇌에는 글자를 엮어 단어를 만들고, 그 단어를 현실 세계의 대상과 연결하도록 설계된 타고난 인지 체계가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은 글을 읽기 위해, 원래 언어와 사물 인식을 담당하던 뇌의 영역을 새로운 용도에 맞게 재구성해야 했다. 독서는 약 6천 년 전 메소포타미아에서 처음 등장했다. 그러나 그 이후에도 수천 년 동안 대부분의 사람들은 글을 읽지 못했다. 문해력이 대중의 보편적인 능력이 된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로, 1440년 요하네스 구텐베르크가 인쇄기를 발명한 이후였다.
문자 언어는 구술 언어와 근본적으로 다르다. 글쓰기는 메시지를 메신저로부터 분리시킴으로써, 구술 사회에서보다 감정의 영향이 배제된 정보의 확산을 가능하게 한다. 같은 말을 글로 쓰는 일은 말하는 것보다 훨씬 더 시간이 걸린다. 그래서 글쓰기는 사람으로 하여금 속도를 늦추고 자신의 생각을 되돌아보게 만든다. 문자 언어는 구어보다 문장 구조가 더 복잡하고 어휘도 더 풍부한 경향이 있다. 무엇보다 말과 달리 허공 속으로 사라지지 않는다. 독자는 언제든 같은 문장으로 다시 돌아가 새로운 의미를 발견하고 더 깊은 이해에 도달할 수 있다. 글은 오래도록 남기 때문에, 사람들은 자신이 쓴 내용을 잠시 잊더라도 그것이 영원히 사라지지는 않을 것을 믿을 수 있다. 그렇게 자유로워진 정신은 새로운 생각을 하고 새로운 발견을 이룰 수 있게 된다.
역사학자이자 예수회 사제인 월터 J 옹(Walter J Ong)은 1982년 저서 <구술문화와 문자문화(Orality and Literacy)>에서 "인류의 그 어떤 발명보다도 쓰기는 인간의 의식을 깊게 변화시켰다."고 말했다. 그는 읽기능력이 인간에게 내적 집중력, 장시간의 몰입, 그리고 논리적 추론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을 만들었다고 보았다. 이는 이성적이고 선형적이며 분석적인 새로운 사고방식을 가능하게 했다.
옹은 신경심리학자 알렉산드르 루리야(Alexander Luria)의 연구를 인용했다. 루리야는 농민들이 막 기초적인 읽기와 쓰기 교육을 받기 시작하던 1930년대, 우즈베키스탄과 키르기지야(오늘날의 키르기스스탄)의 외딴 마을을 찾아다녔다. 그는 찻집과 들판의 야영지, 저녁 모닥불가에서 연구대상자들을 만났다. 그리고 글을 아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의 사고방식이 어떻게 다른지를 알아보기 위해 고안된 질문을 던졌다. 그는 먼저 이렇게 말했다. "먼 북쪽 지방의 곰은 모두 흰색입니다. 노바야 제믈랴는 먼 북쪽 지방에 있습니다." 그리고는 물었다. "그렇다면 노바야 제믈랴의 곰은 무슨 색입니까?" 글을 아는 농민들은 어렵지 않게 삼단논법을 완성했다. 그러나 글을 모르는 농민들은 답을 하려 하지 않았다. 북쪽에 가 본 적이 없어 알 수 없다는 것이었다. 문해력을 갖추는 것은 단순히 글자를 읽는 기술이 아니라 논리적 추상적으로 사고하는 능력을 획득하는 일임을 보여 주는 연구이다.
이후 학자들은 이러한 새로운 사고방식이 읽기 능력만이 아니라, 문해 사회를 살아가면서 경험하는 다른 요소들의 복합적 작용 결과로 설명하기도 했다. 그러나 옹의 더 큰 통찰은 여전히 유효하다. 활자 문화는 길고 체계적인 논증을 중시한다는 사실이다. 1985년 닐 포스트먼(Neil Postman)은 이렇게 썼다. "글쓰기는 말을 고정시키며, 그렇게 함으로써 문법학자와 논리학자, 수사학자와 역사가, 과학자들, 즉 언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어디서 오류를 범하는지, 그리고 어디로 나아가는지를 보기 위해 언어를 눈앞에 붙들어 두어야 하는 모든 이들을 탄생시킨다." 읽기와 쓰기의 등장은 철학, 현대 과학과 학문으로서의 역사학, 그리고 예술비평을 위한 전제조건이었다.
이러한 변화는 사회의 근본을 뒤흔드는 일이었다. 문해력이 사회 전반으로 확산되면서 정치적 격변과 혁명을 촉발하는 데 일조했다. 식민지 시대 미국의 독립운동 지도자들은 신문과 팸플릿을 활용해 영국에 대한 반감을 고조시켰다. 1782년 벤저민 프랭클린은 이렇게 썼다. "고대 로마와 그리스의 웅변가들은 자신의 목소리가 닿는 범위 안에 모인 시민들에게만 말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인쇄술 덕분에 모든 나라들을 향해 말할 수 있다. 훌륭한 책과 잘 쓴 팸플릿은 광범위하고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은 인쇄된 문서를 토대로 새로운 국가를 세웠으며, 시민들이 정보에 밝은 독자가 되리라는 전제를 바탕으로, 자신들이 설계한 정치 체제가 제대로 기능하리라 믿었다. 벤저민 프랭클린 자신이 신문 발행인이었고, 미국 최초의 대출도서관을 설립한 인물이었다. 그는 자서전에서 이렇게 썼다. "이 도서관들은 미국인들의 전반적인 대화 수준을 향상시켰으며, 평범한 상인과 농부들을 다른 나라의 신사들 못지않게 식견을 갖추게 만들었다." 이처럼 미국인들은 일찍부터 사회 현안에 대한 정보를 유지하는 것을 시민의 의무이자 심지어 도덕적 책무라 여겼다.
물론 새롭게 탄생한 공화국이 늘 명철한 분석의 장은 아니었다. 건국의 아버지들은 신문을 통해 정적들을 공격했고, 대중의 분노를 부추기기 위해 거짓말을 퍼뜨리기도 했다. 토머스 제퍼슨의 한 지지자는 존 애덤스에게 "남자의 힘과 강인함도, 여자의 온유함과 섬세함도 없는 흉측한 자웅동체 같은 인물"이라고 독설을 퍼부었다.
글을 읽을 기회 또한 모두에게 공평하게 주어진 것은 아니었다. 오랫동안 많은 미국인이 연방정부의 문해력 시험을 통과하지 못했으며, 특히 남부에서 그 현실은 더욱 두드러졌다. 흑인의 문해력을 억압하는 것이 남부 백인우월주의 정권을 유지하는 핵심 정책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미국 초창기부터 좋은 문장들은 많은 사람들에게 오락과 삶의 의미, 그리고 유대감의 중요한 원천이었다. 미국인들은 성경과 영문학에서 인용과 참조를 공유했다. 찰스 디킨스는 미국 독자들에게 얼마나 큰 사랑을 받았던지, 1842년 뉴욕을 방문했을 때 숭배자들이 디킨스가 머리를 깎은 이발소로 몰려가 잘린 머리카락을 주워 모을 정도였다.
19세기에 편지를 쓰는 일은 하나의 예술이었다. 가족이나 연인에게 보내는 편지도 우아하고 격식을 갖춘 문체로 썼다. 컬럼비아대학교의 언어학자 존 맥워터는 말했다. "오늘날의 우리 눈에는 이상하게 보이죠. 남북전쟁의 한 병사가 진흙투성이 천막 안에서 아내에게 편지를 쓰는데, 마치 셰익스피어처럼 글을 쓰거든요. '자기 아내한테는 좀 편하게 써도 되는 거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죠. 하지만 바로 그런 글쓰기가 당시 그에겐 아내에게 장미꽃을 보내는 사랑의 표현이었던 겁니다"
새뮤얼 D 로히드는 북군 미주리 의용 보병 제8연대 소속으로, 실로(Shilo) 전투와 빅스버그(Vicksburg) 포위전에 참전했다. 1862년 10월, 그는 아내에게 편지를 썼다. "전쟁터에서 자기 피로 온몸이 뒤덮인 채 쓰러져 죽어 가는 것은 참으로 견디기 어려운 일이오. 힘센 군마가 펄쩍펄쩍 날뛰며, 무자비한 발굽으로 죽어 가는 자들과 이미 죽은 자들을 짓밟는 모습을 바라보는 것도 참으로 고통스러운 일이오. 위로의 말 한마디 건네줄 사랑하는 아내도 곁에 없고, 인간의 역사에서 가장 슬픈 그 순간에 구원의 손길을 내밀어 줄 누이도 어머니도 없소. 아, 인간이여. 아, 전쟁의 참혹함이여."
1962년 미디어 이론가들의 정신적 스승이라 불리는 마셜 매클루언은 서구 사회가 자신이 '탈문해(post-literate)'라고 이름붙인 시대에 접어들 것이라고 예견했다. 그해 출간된 <구텐베르크 은하(The Gutenberg Galaxy)>에서 그는 그러한 시대가 이미 시작되었다고 주장했다. 전자 매체가 이미 문자를 대체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당시 미국 가정의 90퍼센트가 텔레비전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그 비율은 불과 10년 전만 해도 9퍼센트에 지나지 않았다. 텔레비전은 미국인들의 가장 중요한 뉴스의 원천으로 자리 잡았고, 평균적인 가정은 하루 다섯 시간이 넘는 시간을 TV 앞에서 보냈다.
오늘날의 시점에서 돌아보면, 1950~60년대의 미국은 탈문해 사회로 보이지 않는다. 전쟁 이후 미국은 놀라운 속도로 부유해졌고 교육 수준 또한 크게 높아졌다. 글에 대한 열정과, 글을 쓰는 지식인들에 대한 존경은 앞으로도 끝없이 커질 것처럼 보였다. 1964년에는 당시 발행 부수가 300만 부를 넘었던 시사주간지 타임(Time)이 교외 생활의 우울과 권태를 어둡게 그려낸 소설가 존 치버를 표지 기사의 주인공으로 다루었다. '오시닝의 오비디우스(Ovid in Ossining)'라는 제목의 그 기사는 고대 로마 시인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Metamorphoses)>에 나오는 기도문을 길게 인용하며 시작했다. 치버의 대표작 <5시 48분(The Five-Forty-Eight)>에서 주인공이 제목 그대로 오후 5시 48분 기차에 올라타자, 눈앞에 펼쳐지는 것은 그때는 익숙했으나 지금은 낯선 광경, 객실 가득 통근객들이 저녁 신문을 읽고 있는 모습이다.
그러나 텔레비전은 미국인의 삶의 리듬과 생활 습관을 조금씩 바꾸고 있었다. 1985년, 매클루언의 친구이자 제자였던 포스트먼은 저서 <죽도록 즐기기(Amusing Ourselves to Death)>를 출간했다. 그는 텔레비전이 미국인들의 관심을 탈취해 정치마저 값싼 오락거리로 만들어 버렸다고 주장했다. 포스트먼은 이렇게 썼다. "문제는 텔레비전이 우리에게 오락적인 소재를 보여 준다는 것이 아니라, 모든 소재가 오락으로 제시된다는 것이다." 또 "텔레비전은 우리 문화가 자기 자신을 이해하는 가장 중요한 방식이다."라고 했다. 당시 미국의 평균 가정은 하루 7시간 이상 텔레비전을 시청했고, 그 시간은 2010년에 이르면 거의 9시간에 이를 정도로 늘어났다.
텔레비전이 독서에 필요한 조용한 시간을 잠식했다면, 초고속 인터넷과 스마트폰은 독서 시간 확보를 거의 불가능하게 만들어 버렸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집에서 스크린을 통해 영상 콘텐츠를 즐기는 데는 분명한 한계가 있었다. 방송 프로그램은 정해진 요일, 정해진 시간에만 방영되었다. 지난 영화를 보고 싶을 땐 집을 나서 비디오 대여점에 가야 했다. 그런 환경에서는 책도 경쟁력이 있었다. 적어도 잠들기 전에 TV를 끄고 책을 펼쳐 읽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제는 오락에 한계가 없다. 확실한 종료 지점이 없이, 한 편에서 다음 편으로 매끄럽게 이어진다. 사람들은 손에 휴대폰을 든 채 TV를 보며 소셜미디어를 확인하거나 친구와 문자 메시지를 주고받는다. 넷플릭스는 감독과 시나리오 작가들에게 시청자들이 온전히 집중하지 않는다는 가정 하에 작품을 만들고 이야기의 진행 상황을 계속 상기시킬 것을 요청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런 환경에서 책을 읽으려면 단호한 결심이 필요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렇게 하지 못한다.
사람들은 책을 읽더라도 예전만큼 많은 내용을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사실을 느낄 것이다. 스마트폰으로 읽을 때 더욱 그렇다. 끝없이 이어지는 스크롤, 곳곳에 삽입된 하이퍼링크, 그리고 끊임없이 울리는 알림으로 읽기는 피상적인 수준에 머무르고, 시선은 계속 다른 곳으로 흐르게 된다. 여러 연구에 따르면 종이책보다 디지털 기기로 읽을 때 내용의 이해도가 더 낮아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아마도 이러한 방해 요소들 때문일 것이다. 이제는 어떤 글에 오래 집중하기를 기대하는 것은 무리라고 느껴질 정도다. 오디오북이 종이책의 대안으로 큰 인기를 얻은 적잖은 이유도, 책을 들으면서 설거지를 하거나 출근길 운전을 하는 등 여러 일을 동시에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주의 지속 시간이 점점 짧아지고 이해력이 저하되고 있는 만큼, 학교 교육이 짧은 글과 피상적인 읽기로 향하는 추세에 저항할 것이라 생각되지만, 오히려 학교들은 그러한 흐름을 더욱 심화시켰다. 2025년 실시된 한 조사에 따르면 미국의 중고등학교 영어 교사 대부분은 1년에 학생들에게 0권에서 4권 정도의 책만을 과제로 내준다. 교육 개혁이 거듭되면서 여러 학군들이 객관식 독해 시험의 형식을 더 잘 모방하기 위해, 완결된 책보다는 짧은 지문을 선호하게 되었다. 다수의 학군들에서 채택한 교육과정이 발췌문에 의존하고 있다. 캘리포니아주 코로나에 있는 한 초등학교의 애너메리 코르테즈 교장은 많은 교육 행정가들이 교사들에게 책 한 권 전체를 읽는 과제를 내지 말고, 대신 짧은 발췌문을 이용한 단편적인 독해 훈련을 실시하도록 요구한다고 말했다.
한편 디지털 기기가 미국의 교실에 물밀듯이 밀려들었다. 뉴욕 타임스의 설문조사에 따르면 80퍼센트 이상의 초등학교 교사가, 아이들이 유치원에 입학할 무렵이면 학교에서 지급하는 디지털 기기를 받게 된다고 답했다. 텍사스주 던컨빌의 한 유치원 준비반에서 3세 아이들을 가르치는 루피타 비야로보스는 학군에서 각 학생에게 수업용 태블릿을 지급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녀는 아이들이 집에서 많은 시간을 화면 앞에서 보낸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에, 학교에서는 태블릿을 사용하지 못하게 한다. "학교에 처음 왔을 때 아주 심하게 적응하지 못한 아이가 있었어요. 보통 아이들은 처음 몇 주 동안 엄마를 찾으며 울곤 하죠. 그런데 이 아이는 엄마를 찾는 대신 태블릿을 달라고 울더라구요."
불과 얼마 전까지 사람들은 온라인에서 적어도 무언가를 읽었지만, 그마저도 빠르게 변하고 있다. 한때 텍스트 중심이었던 소셜미디어는 이제 짧은 동영상으로 완전히 뒤덮였다. 특히 젊은 세대에서는 틱톡, 유튜브 쇼츠, 인스타그램 릴스 같은 짧은 동영상 플랫폼이 사람들의 관심과 시간을 사실상 장악하고 있다. 세대 변화를 연구하는 심리학자 진 트웬지(Jean Twenge)의 최근 데이터 분석에 따르면, 평균적인 학생은 8학년이 되면 하루에 4시간 30분을 소셜미디어에 쓴다. 그 중 상당 부분은 동영상을 시청하며, 그것도 종종 2배속으로 본다. 문자 메시지도 점점 구어체적 특징을 띤다. 사람들은 고조된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 모든 글자를 대문자로 쓰고, 정식 문장부호 사용을 너무 딱딱하고 엄격한 격식으로 여겨 피하는 경향이 있다. 많은 20대들이 대부분 그렇듯, 나와 친구들도 이제는 문자 메시지 대신 음성 메시지를 주고받는 편을 선호한다.
문자는 수천 년 동안 살아남았고, 새로운 기술이 제기한 연속적인 도전들을 극복해 왔다. 분명히 문자는 회복력이 강하다. 독서율은 오르내릴 수 있지만, 낙관론자들은 역사의 긴 흐름이 결국 보편적 문해력을 향한다고 믿는다. 하버드대학교 비교문학 전공 마틴 푸크너(Martin Puchner) 교수는 문학이 역사를 어떻게 형성해 왔는지를 연구해 왔다. 그는 수십 년 동안 커뮤니케이션 기술이 변화해 온 양상과, 그러한 변화가 불러일으킨 사회적 공포를 추적해 왔다. 연구 인생 대부분 동안 그는 독서의 종말을 우려하는 목소리에 회의적이었다. 그는 말했다. "글쓰기 기술의 오랜 변천사가 내게 가르쳐 준 것이 있다면, 그것은 이런 종말론적 시나리오에는 언제나 저항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제 푸크너조차도 종말론적 시나리오가 현실이 되었다고 믿는다. 동영상에서 벗어나 다시 텍스트로 돌아갈 가능성은 너무나 희박해 보인다는 것이다. 어쩌면 매클루언과 포스트먼이 우리 사회가 탈문해 사회가 될 것이라고 예견했을 때, 그들은 틀렸던 것이 아니라 너무 일렀을 뿐인지도 모른다. 반세기 전에 이 이론가들이 내다본 세계가 이제 현실이 되었다. 문해 시대는 결국 구술 시대와 디지털 시대 사이에 잠시 존재했던 짧은 막간으로 기록될 것이다.
읽기는 현대인의 정신을 형성했다. 읽기의 소멸은 정신을 새로운 모습으로 형성할 것이다. 인지과학자들은 그 변화가 어떤 모습일지 밝히기 시작했다. 나는 열두 명의 인지과학자들에게 우리가 더 이상 독서를 하지 않게 되면 뇌에 어떤 변화가 생기는지 물었다. 너무 단순한 질문에 웃음 짓는 학자들도 있었다. 버지니아대학교의 교수 댄 윌링엄(Dan Willingham)은 말했다.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은 뇌를 변화시킵니다. 문자 그대로, 단어 하나만 읽어도 최소한 몇 시간 동안은 뇌가 변화하죠. 적절한 방법으로 측정하면, 그보다 훨씬 더 오래 영향을 주는 것도 볼 수 있어요." 그는 나를 안심시키려 했다. 모든 경험이 뇌를 변화시킨다면, 어느 한 가지 행동이 특별히 결정적인 의미를 갖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만약 우리가 한 가지 행동 (글을 읽는 일)을 지속적으로 다른 행동 (인스타그램 릴스를 보는 일)으로 대체한다면 어떻게 될까? 신경과학에서 가장 확고하게 입증된 사실 한 가지는 사람의 뇌는 반복해서 수행하는 활동에 맞추어 최적화된다는 사실이다. 우리의 시간을 책이 아니라 짧은 동영상으로 채운다면, 독해 능력은 점차 쇠퇴한다. 이해를 돕는 배경지식도 줄어든다. 갑작스레 대규모 문맹이 발생할 위험은 없지만, 독서가 길러주는 복잡한 인지 능력은 퇴화하기 시작한다. 우리 마음속 도서관은 황폐해져 간다.
책을 읽는 것은 집중력을 단련하는 운동과도 같다. 많이 읽을수록 읽기가 더 쉬워지고, 새로운 것을 알아가는 보상도 더 커진다. 결국 독서는 힘들기보다는 즐거운 경험이 된다. 하지만 신체 운동과 마찬가지로 그 반대도 성립한다. 적게 읽을수록 읽기는 더 어려워지고, 지식을 습득하는 길은 더욱 험난해진다.
소셜미디어는 즉각적인 만족감을 제공한다. 텍사스 사우스웨스턴 의과대학의 소아과 교수 존 허턴(John Hutton)은 틱톡을 스크롤하는 행위를 실험실의 쥐가 버튼을 누를 때마다 코카인을 투여받는 상황에 비유한다. 결국 쥐는 오직 버튼을 누르는 일만 하게 된다. UC 어바인의 심리학자 글로리아 마크(Gloria Mark)에 따르면, 2004년만 해도 사람들이 화면 하나에 집중하는 평균 시간은 약 2분 30초였다. 그런데 2012년에는 75초로 줄었고, 5년 전에는 약 47초까지 떨어졌다. "우리는 콘텐츠가 아주 빠르게 바뀌는 것에 익숙해지고 있습니다."
영상을 보는 것은 글을 읽는 것보다 더 수동적인 형태의 참여다. 허턴은 최근 3~5세 어린이들이 서로 다른 형식으로 이야기를 접할 때, 반응하는 뇌의 이미지를 수집했다. 어린이들이 애니메이션 영상을 볼 때는, 오디오를 들으며 정지된 삽화를 볼 때보다, 상상력과 관련된 뇌 영역을 절반 정도밖에 사용하지 않았다. 또한 영상을 볼 때는 학습과 관련된 뇌의 한 부분인 소뇌(cerebellum)의 활동이 더 적었다. 허턴은 이렇게 설명했다. "화면에서 모든 일이 이미 일어나고 있기 때문에 아이들은 상상력을 그만큼 사용할 필요가 없습니다. 애니메이션을 볼 때는 삽화를 보면서 이야기를 들을 때보다, 내용을 이해하고 배우기 위해 뇌가 해야 할 일이 훨씬 적습니다."
역설적이게도 영상은 텍스트보다, 언어뿐 아니라 소리와 움직이는 이미지까지 더 많은 정보를 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더 깊은 사고를 촉진하지 못한다. 오히려 너무 많은 정보를 한꺼번에 시청자에게 쏟아부어 어느 한 가지에 집중하기 어렵게 만든다. 시청자가 얼마나 알아차렸든, 혹은 이해했든 상관없이 화면은 계속 바뀐다. 놓친 부분을 되돌아보기 위해 멈추고 되감는 사람은 거의 없다.
오늘날의 젊은 세대는 숏폼 영상이 일상에 넘쳐나지 않는 세상을 경험하지 못했다. 허턴은 다른 연구에서 스크린을 더 많이 보고 책을 덜 읽는 아이들일수록, 실행 기능과 언어 능력에 관련된 뇌 영역의 백질(白質)이 충분히 발달하지 않은 경향을 발견했다. 이는 그 아이들이 그러한 인지 능력을 사용하는 데 덜 익숙하다는 것을 시사한다. 해스킨스 글로벌 문해력 허브의 벤저민 파워스 소장은 아이들이 집중력을 오래 유지하는 능력과 정신적인 노력을 견디는 인내심이 낮은 상태로 초등학교에 입학한다고 말한다. "그 결과 교실에서는 학생들이 글자를 읽어내거나 정보를 찾아내는 일은 잘하지만, 추론이나 종합 혹은 긴 글에 걸쳐 맥락을 유지하는 것이 필요한 독해에서는 어려움을 겪는 모습을 보입니다."
2024년, 3학년부터 8학년 교사들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 80퍼센트 이상이 학생들의 독서 지속력이 2019년 이후 눈에 띄게 떨어졌다고 답했다. ACT 시험의 읽기와 영어 영역 점수도 지난 7년 동안 꾸준히 하락했으며, 지금은 30여 년 만에 가장 낮은 수준에 이르렀다. SAT의 읽기와 쓰기 점수 역시, 출제 기관들이 독해력을 평가하는 지문을 더 짧고 더 단순하게 만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하락하고 있다.
이런 학생들이 대학에 진학하면, 교수들은 텍스트를 이해하는 방법, 다시 말해 사고하는 방법 자체를 가르쳐야 한다. 브라운대학교 독일학 교수 조너선 파인(Jonathan Fine)은 이렇게 말했다. "저는 독일어를 가르치기 때문에, 학생들에게 글 읽는 법을 가르치는 데는 원래부터 익숙합니다. 그런데 이제는 영어학과 교수들도 그런 일을 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어요." 그는 이어 설명했다. "'이 글이 말하려는 더 큰 핵심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으로 들어가기 전에 먼저 '이 표현이 반어법인가?', '이 은유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같은 것부터 가르쳐야 합니다. 학생들이 단어와 문법 자체를 정확히 이해해서 글 속의 모든 단서를 놓치지 않도록 도와야만, 그것들을 서로 연결해 글 전체의 큰 의미를 파악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과장처럼 들릴 수 있지만, 대학은 머잖아 거의 확실히 기초학력 보충교육을 더 많이 담당하게 될 것이다. 2024년에 발표된 한 연구에서, 캔자스주의 두 지역 대학교에 재학 중인 영문학 및 영어교육 전공 학생들에게 디킨스의 소설 <황폐한 집(Bleak House)>의 첫 일곱 문단을 읽게 했다. 이 소설은 자든다이스 가문의 사람들이 상속을 둘러싼 오랜 법적 분쟁을 겪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도입부가 이렇게 시작된다:
"런던. 미카엘마스(Michaelmas) 학기가 막 끝났고, 대법관(Lord Chancellor)은 링컨스 인 홀에 좌정해 있다. 매섭도록 스산한 11월의 날씨. 마치 대홍수가 막 지표에서 물러간 듯 거리엔 진흙이 질펀하다. 길이가 40피트쯤 되는 메갈로사우루스가 코끼리처럼 거대한 도마뱀 몸을 흔들며, 홀본 언덕을 뒤뚱뒤뚱 올라오는 모습을 마주친다 해도 그다지 이상할 것 같지 않다."
연구자들은 학생들이 이 문장을 어떻게 이해했는지를 소개했다. 한 학생은 이렇게 말했다. "그러니까... 음... 진흙이 거리에 있었고, 우리가... 아니... 그러니까 모든 게 물에 휩쓸린 것 같고, 메갈로사우루스의 뼈를 발견할 수도 있는데, 그런데 디킨스는 그 공룡이 언덕을 뒤뚱거리며 올라간다고 말하는 것 같아요." 연구 결과에 따르면 최소 4분의 1의 학생들이 비유적 표현을 실제 묘사로 해석했고, 그 결과 19세기 런던 거리를 실제 공룡들이 돌아다녔다고 추론하는 경우도 나타났다. 디킨스는 이어 대법관이 '굵은 구레나룻(great whiskers)에 작은 목소리, 끝없이 방대한 소송 서류를 들고 있는 체구 큰 변호사의 변론을 듣는' 모습을 묘사한다. 한 학생은 이 구절을 이렇게 이해했다. "어떤 동물하고 같은 방에 있는 걸 묘사하는 것 같네요? '큰 수염(great whiskers)'이라면... 고양이일까요?"
학생들이 낯선 배경지식을 어려워하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연구자들은 학생들에게 인터넷을 자유롭게 이용하게 했다. 마음만 있다면 Michaelmas term(미카엘마스 학기), Lord Chancellor(대법관), Lincoln's Inn Hall(런던 법조인 협회의 법정 건물) 같은 낯선 용어를 얼마든지 검색할 수 있었다. 학생들은 자신이 무엇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지조차 파악하지 못했거나, 설령 알았다 하더라도 굳이 찾아보려 하지 않았다. 대부분은 이 글의 배경이 법정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자신이 읽은 내용을 정확하고 구체적으로 이해한 학생은 전체의 5%에 불과했다.
이러한 변화는 대학 캠퍼스 안에만 국한된 현상이 아니다. 미국 성인들의 논리 문제 해결 능력, 합리적 추론 능력, 패턴 분석 능력은 2006년부터 2018년 사이에 하락했다. 지금 미국 성인들은 50년 전 같은 교육 수준의 성인들보다 어휘력도 더 빈약한 경향을 보인다. 최근 연구들은 1930년대 이후 세대를 거듭할수록 IQ가 꾸준히 상승해 온 현상인 플린 효과(Flynn effect)가 지난 20년 동안 역전되었음을 시사한다. 노스웨스턴 의과대학의 연구심리학자 엘리자베스 드워랙(Elizabeth Dworak)은 평균 IQ가 현재 10년마다 약 3점씩 하락하고 있다고 말했다.
인지적 변화가 모두 부정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드워랙의 연구에 따르면 미국 성인들은 특정 형태의 공간 추론 능력은 오히려 향상하고 있다. 탈문해 문화는 우리가 아직 파악하지 못한 새로운 장점을 가져다 줄 가능성도 있다. 플라톤의 <파이드로스(Phaedrus)>에서 소크라테스는 글쓰기의 등장을 두고 유명한 경고를 남겼다. "글쓰기로 인해 배우는 사람들이 더 이상 자신의 기억력을 사용하지 않게 되면서, 그들의 영혼 속에는 망각이 피어날 것이다. 그들은 외부에 기록된 문자에 의존하고, 스스로의 힘으로 기억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옳았다. 하지만 미디어 이론가 안드레이 미르(Andrey Mir)가 지적하듯, 글쓰기는 개인의 기억력을 약화시키는 대신 사회 전체의 집단 기억은 강화시켰다.
끊임없는 영상 피드에 뇌가 길들여진 채 성장하는 세대는 우리가 아직 감지하지 못한 새로운 종류의 뛰어난 인지 능력을 발달시키고 있는 것일까?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까지, 독서의 쇠퇴는 덜 합리적이고 덜 분석적이며 덜 정교한 사고방식을 불러들이는 것으로 보인다. 그 안에서 어떤 이점을 찾아내기란 쉽지 않다.
1982년, 월터 J 옹은 현대 문명이 '제2의 구술성' 단계로 들어서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는 한때 문자 문화를 이룩했던 사회가 다시 문자 이전 문화의 소통 방식으로 일부 되돌아가는 현상을 뜻한다. 말은 발화되는 순간 곧바로 사라지기 때문에, 구술 문화에서는 기억을 돕기 위해 반복을 중시한다. 구술 사회의 음유시인들은 이야기의 흐름을 놓치지 않기 위해 정형화된 표현(stock phrases)과 기억을 돕는 장치(mnemonics)을 적극 활용한다. 또한 옹의 표현을 빌리면, 그들은 관용적 별명(epithets)을 즐겨 구사하고 "육체적 폭력을 열광적으로 묘사"할 때가 많다. 차분한 토론보다는 갈등이 훨씬 기억에 오래 남기 때문이다. 말하는 사람은 글 쓰는 사람처럼 자신의 말을 다시 편집할 수 없기에, 실수를 인정하지 않고 계속 말을 이어간다. 나중에 자신의 말이 앞뒤가 맞지 않더라도 청중이 이전 발언을 기억할 것이라고 기대하지 않는다. 의미는 객관적 진실이라는 개념이 아니라, 화자가 누구인가에 좌우된다.
도널드 트럼프가 월터 J 옹의 <구술문화와 문자문화(Orality and Literacy)>을 읽어 내용을 익히 알고 있을 가능성은 높지 않다. 만약 읽었다면, 그는 옹의 묘사에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을 것이다. 트럼프의 소통 방식은 구술 사회에 완벽하게 어울린다. 그는 "로우 에너지 젭(Low-Energy Jeb)", "리틀 마코(Little Marco)", "슬리피 조(Sleepy Joe)"처럼 기억하고 반복하기 쉬운 별명을 사용한다. 마치 자신의 과거 발언이 어디에도 기록되어 있지 않은 것처럼 모순되는 말을 한다. 심지어 그의 글쓰기도 말하기와 거의 구별되지 않는다. (트럼프는 직접 글을 쓰기보다 받아쓰게 하는 방식을 선호한다고 알려져 있으니 이해할 만하다.) 그의 온라인 게시물은 독특한 위치에 찍힌 구두점과, 대문자, 느낌표로 가득하다. 상당수 게시물은 텍스트가 거의 없는 밈(meme)이다. 예를 들어 한 게시물에는 미국 군함이 레이저로 이란 항공기를 명중시키는 그림과 함께, "Lasers: Bing, Bing, GONE!!!" ("레이저! 빙! 빙! 끝!!!") 이라는 짧은 문구만 들어 있다.
트럼프는 미국 최초의 탈문해적 대통령이다. 정보가 주로 글을 통해 확산되는 나라에서 그가 대통령으로 선출되는 모습을 상상하기는 어렵다. 2024년 대선을 앞두고 NBC 뉴스가 유권자 10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신문을 읽는 응답자들 사이에서는 조 바이든이 트럼프를 49포인트 앞섰다. 트럼프는 산만하고, 논쟁이 끊임없는 이 시대를 파고드는 소통 방식을 개척했다. 텍사스대학교 오스틴 캠퍼스의 커뮤니케이션학 명예교수 로더릭 하트(Roderick Hart)는 "많은 사람들이, 특히 학계와 언론계에서, 트럼프를 정치적 혁명가로 여기죠. 그러나 나는 그를 정치적 혁명가라기보다 수사학적 혁명가로 봅니다"라고 말했다.
1985년 저서 <장소감의 상실(No Sense of Place)>에서 미디어 이론가 조슈아 메이로위츠(Joshua Meyrowitz)는 텔레비전과 다른 전자 매체가 미국인들에게 정치 지도자 후보들에 관한 새로운 종류의 정보를 쏟아낸다고 분석했다. 인쇄 매체는 대중에게 정치인의 다듬어진 발언만을 접하게 했지만, 영상 매체는 대통령 후보가 땀을 흘리고, 재채기를 하고, 말을 더듬는 모습까지 모두 보여 주었다. 유권자들은 이제 정치인을 평가할 때 '이력서 기준' 대신 '데이트 상대 기준'을 보게 되었다고 그는 설명했다. 메이로위츠는 <장소감의 상실>에서 이렇게 썼다. "과거에 비해 오늘의 지도자들은 글을 잘 쓰고 논리정연하기보다, 보기 좋고 듣기 좋아야 한다." 그는 인쇄 문화의 쇠퇴와 전자 매체의 부상이 결국 대중을 포퓰리즘적 지도자로 이끌 것이라고 예견했다. 사람들은 권위나 제도를 외면하고, 텔레비전에서 매력적으로 보이는 후보를 선호하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그는 전직 배우 출신인 로널드 레이건이 재선에 성공한 직후 이 책을 출간했다.
"최근 제 책을 다시 읽으면서 내내 '세상에, 내가 쓸 당시보다 지금 훨씬 더 맞는 이야기군.'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메이로위츠는 말했다. 소셜미디어 플랫폼은 미국인들에게 자신들을 대표하는 정치인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볼 수 있는 전례 없는 기회를 제공한다. 알고리즘은 복잡성, 섬세한 맥락, 엄밀한 논증보다 단순하고 선동적이며 감정에 호소하는 콘텐츠가 더 널리 확산되도록 만든다. 그 결과, 정치에 대한 대중적 통념들, 예를 들어 '모든 정치인은 똑같이 부패했다', '이민자들이 일자리를 빼앗는다', '정책 문제는 쉽고 상식적인 해결책이 있다'와 같은 주장들이 해당 분야 전문가들의 연구 결과보다 큰 영향력을 갖게 된다.
좌우 진영을 막론하고 정치인들은 새로운 플랫폼을 이용하는 법을 파악했다. 보수 성향의 맨해튼연구소 레이한 살람(Reihan Salam) 소장은 이것이 현실 정치에서 어떤 양상으로 드러나는지 설명했다. "적을 하나 만들어내서, 대중을 양극화시키는 겁니다. 복잡한 현실 설명을 허용해서는 안 됩니다. 그건 권력 투쟁 중에 혼란을 야기할 뿐이니까요."
이런 상황에서는 제도와 엘리트에 대한 불신을 조장하는 정치인들이 더 유리하다. "사실은 모든 것이 아주아주 단순하며, 강력한 지도자 한 사람만 있으면 시각적으로도, 감정적으로도 강력한 승리를 손쉽게 거둘 수 있다는 환상을 만들어 냅니다"라고 살람은 말했다.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은 독서를 많이 한 시민이라면 바로 이런 종류의 선동적 인물을 꿰뚫어 볼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살람은 "우리의 헌정 질서가 본래 어떻게 작동하도록 설계되었는지를 생각해 보면, 그런 식의 정치는 헌정 정신과 정면으로 배치됩니다"라고 했다. 마셜 매클루언은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자유주의 세계는 본질적으로 문해 사회이다." 이 명제의 역(逆)도 참일 것이다.
트럼프가 최초의 탈문해적 대통령이라면, 그가 마지막은 아닐 것이다. 버락 오바마의 대통령 선거 전략을 설계했던 정치 전략가 데이비드 플루프는 후보들이 선거운동의 일과를 콘텐츠 제작 중심으로 운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모든 아이디어를 스크린에 길들여진 유권자들이 집중할 수 있을 만큼 짧게 압축하라고 조언했다. 최근 뉴욕타임스 기고문에서 플루프는 "인스타그램 게시물 하나나 10초짜리 틱톡 영상으로 전달할 수 없다면, 처음부터 다시 구상하라"고 썼다. 탈문해 시대의 선거 전략으로 매우 훌륭한 조언일지도 모른다. 충분한 정보에 기반한 자치를 실현하기 위한 방법으로서 이는 재앙을 예고할 뿐이다.
인공지능에 대해서는 아직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수많은 디지털 기술이 우리의 주의를 탈취해 집중해서 읽는 일을 거의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생성형 AI는 글쓰기의 존속을 위협하는 최초의 기술이다.
글쓰기는 어렵다. 조지 오웰은 글쓰기를 "고통스러운 병을 오래 앓는 경험"에 비유했다. AI는 손쉬운 치료법을 약속한다. 문제는 글쓰기가 이미 완성된 생각을 그대로 옮겨적는 행위가 아니라는 데 있다. 만약 그렇다면 애초에 그렇게 어려울 이유가 없다. 글쓰기란 자신이 무엇을 생각하는지를 발견하고, 그 생각을 아직 공유하지 않은 타인에게 어떻게 전달할지를 찾아가는 과정이다. 조지타운대학교의 컴퓨터과학 교수인 칼 뉴포트(Cal Newport)는 글을 쓰는 과정이 사람들로 하여금 질서 있고 선형적인 방식으로 사고하게 만든다고 말한다. 글쓰기는 느슨한 사고와 빈약한 논리를 드러낸다. 생각을 단어와 문장, 문단으로 다듬는 데 필요한 시간과 집중은 글쓴이가 새로운 연결고리를 발견하고, 새로운 통찰에 도달하도록 만든다.
나도 이 말이 맞다고 느낀다. 글 쓰는 일은 나의 직업이다. 오웰에게는 미안하지만, 병을 앓게 될 거라는 생각보다 빈 종이를 마주하는 일이 더 두렵다. 그렇지만 그 힘겨운 싸움에는 만족감이 있다. 글을 쓰는 과정은 아직 형태를 갖추지 못한 생각을 다듬고 체계화하며, 새로운 이해에 도달하는 과정이다. 내 주장을 검토하여 설득력 없는 것은 버리면서 설득력 있는 주장을 찾아간다. 글쓰기가 어려운 이유는 글쓴이가 배우고 있기 때문이다. AI는 그 어려움을 없애 주지만, 배움까지도 함께 없애버린다.

초기 연구들은 AI를 이용해 글을 쓸 때 바로 그런 일이 일어나는 것을 시사한다. 과정은 훨씬 수월해진다. 결과물도 자신이 직접 썼을 때보다 나을 때가 많다. 그러나 그 대가로 사고력 발달은 저해된다. 브라질에서 진행된 한 연구는 AI를 활용해 학습한 대학생들이 그렇지 않은 학생들에 비해 예고 없이 치른 시험에서 유의미하게 낮은 성적을 거두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이들은 특정 지식이 아니라 성찰과 노력을 요구하는 문제들에서도 다른 학생들보다 뒤쳐졌다. 영국에서 수백 명을 대상으로 실시된 또다른 연구는 인지적 과제에 AI를 빈번히 사용하는 것이 비판적 사고 능력과 부정적 상관관계를 보인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현대 사회는 지루한 글쓰기를 숱하게 해야 한다. 어떤 글쓰기는 분명 그리 큰 대가 없이 기계에게 맡길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새로운 기술의 역사적 수용 과정을 연구하는 데 평생을 바친 뉴포트는 자동화를 통해 한 가지 문제를 없앨 때는 거의 반드시 다른 문제가 발생한다는 확신을 갖게 됐다. 매번 거듭해서, 사람들은 귀찮은 일 하나를 피하기 위해 새로운 도구를 사용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온갖 2차적 파급 효과들이 뒤따라옵니다"라고 뉴포트는 말했다. 이메일은 원래 팩스와 전화, 회의를 대체할 편리한 수단으로 등장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이메일에 답하는 일 자체가 엄청난 시간을 잡아먹는 일이 되어 버렸다. 이처럼 예기치 못한 결과들은 결국 우리의 지적 생활 전반을 변화시킨다.
많은 사람이 글쓰기를 피하기 위해 AI를 사용하는 세상에서는 깊이 사유하는 능력이 점점 더 희귀해질 가능성이 크다. 동시에 그것은 점점 더 중요해질 것이다. AI는 텍스트를 넘쳐날 정도로 대량 생산하고 있다. 2022년 챗GPT가 출시된 이후, 아마존에서 매달 출간되는 책의 수는 세 배로 증가했다. 같은 기간 동안 학술지에 제출되는 논문 수도 급증했다. 그중 상당수가 적어도 부분적으로 인공지능이 작성한 것이다.
AI는 간결하고 전문적 수준의 문장을 만들어 낸다. 사람이 쓴 글과 AI가 쓴 글을 나란히 제시했을 때, 문예창작 석사(MFA) 과정의 학생들조차 AI가 쓴 글을 더 선호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AI의 글이 아무리 매끄럽고 설득력 있을지라도, 그것은 독창성이 없고, 때로는 부정확하며, 혹은 둘 다일 수도 있다. 따라서 앞으로는 분별력과 이해력이 어느 때보다 중요해질 것이다. 자신이 무엇을 생각하는지 알고, 스스로 판단을 내릴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사고 기술이야말로 AI의 사용으로 인해 잠식될 위험에 처해 있는 것들이다.
그러므로 진정으로 위태로운 것은 바로 스스로 사고하는 능력 자체이다. 사람들이 글쓰기를 지나치게 AI에 의존하게 되면, 자신의 생각을 비판적으로 검토하거나, 심지어 자신의 견해를 형성하는 능력마저 잃을 수 있다. 이는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본질적인 능력이다. 뉴욕대학교 철학 교수 콰메 앤서니 아피아(Kwame Anthony Appiah)는 이렇게 말했다. "만약 우리가 그런 능력을 포기한다면, 우리는 더 이상 지금과 같은 인간이 아닐 겁니다. 전혀 다른 존재가 될 겁니다."
126년 전, 애틀랜틱 매거진에 실린 아서 리드 킴볼(Arthur Reed Kimball)의 글은 현대 미국 사회가 별다른 문제의식 없이 받아들인 변화들 가운데 가장 심각한 문제 하나를 지적했다. 글을 제대로 쓰고 깊이 사고하는 미국인들의 능력이 위협받고 있다는 것이었다. 미국인들의 표현력과 집중력을 무너뜨리는 적은 무엇이었을까? 바로 신문이었다. '저널리즘의 침입(The Invasion of Journalism)'이라는 글에서 킴볼은 스포츠면과 가십 칼럼, 잡다한 기사와 속어로 가득한 일간신문이 책과 문예 잡지를 밀어내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워싱턴이나 유럽의 중요한 일들을 알기 위해 신문을 읽는다고 자처하는 사람들도 실제로는 "흥미로운 '이야기', 이를테면 기이한 자전거 모험담이나 교활한 강도를 붙잡은 이야기"를 가장 먼저 펼쳐 본다고 꼬집었다.
신문 이전에는 소설이 올바른 독서 습관과 도덕적 품격을 위협하는 존재로 여겨지기도 했다. 토머스 제퍼슨은 여성 교육을 가로막는 한 가지 큰 장애물이 소설에 심취하는 풍조라고 생각했다. 그는 소설이 여성들을 "건전한 독서"로부터 멀어지도록 유혹한다고 보았다. 제퍼슨은 이렇게 썼다. 여성이 한번 소설에 빠지면, "공상이 빚어낸 허구로 치장하지 않은 어떤 것도 관심을 끌지 못한다."
독서를 위협하는 현실을 가볍게 여기는 사람들은, 새로운 기술이나 매체가 등장했을 때 사람들의 주의를 흩뜨리고 미국 사회를 타락시킨다고 개탄하던 오랜 관행을 지적한다. 어쩌면 126년 후 이 글 역시 그런 호들갑스러운 비관론의 최신 사례쯤으로 여겨질지도 모른다. 과거의 비관적 목소리들을 되돌아보다가, 나는 주로 기존 방식에 이해관계를 가진 사람들이, 모든 것이 무너질 것이라고 앞장서 예언한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적어도 몇몇 지표로 보면 책은 여전히 건재하다. 지난해 종이책 판매량은 10년 전보다 늘어났다. 반스앤노블(B&N)은 60개가 넘는 신규 매장을 열었다. 2025년 한 해에만 거의 400곳의 독립 서점이 새로 문을 열었다. 서브스택(Substack)에서는 장문 글에 대한 구독이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두아 리파나 리즈 위더스푼 같은 유명 인사들은 자신의 명성과 영향력을 활용해 놀랍도록 성공적인 북클럽을 만들어냈다. 오디오북은 수십억 달러 규모의 산업으로 성장했다.
그러나 낙관론자들은 데이터 속에 숨은 결정적인 흐름을 간과한다. 텍스트 문화는 살아남고 있지만, 전체 인구에서 그것을 누리는 사람들의 비율은 계속 줄어들고 있다. 지난해 전체 독서량의 80퍼센트 이상이 성인의 단 20퍼센트가 읽은 양이었다. 럿거스대학교에서 독서사를 연구하는 리아 프라이스(Leah Price)는 이렇게 말했다. "독서는 우표 수집이나 난초 재배처럼 일종의 틈새 취미가 되어 가고 있습니다." 책 읽는 사람들은 20년 전에 비해 하루에 더 많은 시간을 독서에 쓴다. 또한 이전 세대보다 종이책에 더 큰 애정을 가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글을 사랑하며, 문자를 통해 문화적 이해와 지적 교감을 얻는 사람들은 이제 하나의 하위문화를 이룬다.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 역시 거의 틀림없이 그 하위문화의 구성원이다.
독서가 선택이 된 만큼, 책을 읽는 것은 하나의 정체성 표지로 기능할 수 있다. 지하철에서 인쇄된 글을 읽는 사람을 보면, 그것이 마치 하나의 선언처럼 느껴진다. 어쩌면 필연적이겠지만, 그런 선언들은 이제 온라인 조롱의 소재가 되어버렸다. 사람들 앞에서 책을 펼쳐 읽으면 '보여주기식 독서'라며 비난받는 것이다. 이런 비난은 그 사람이 고학력자이거나 남다른 문학적 취향을 지녔음을 과시하려 한다고 전제한다. 그렇지 않고서야 왜 굳이 무거운 책을 들고 다니겠는가?
이런 일이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은 아니다. 인류 사회가 구술 문화에서 문자 문화로 처음 전환되었을 때, 글을 읽을 수 있는 사람은 극소수였다. 이 귀중한 능력을 지닌 유일한 사람들로서 그들은 특권적 지위를 누렸고, 그들의 일에 대해 후한 보수를 받았다.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의 상주 학자들은 왕궁 단지 안에 거주했다.
오늘날에도 독서는 다시 소수의 인구 집단에 집중되고 있다. 그러나 글을 읽는 사람에게 과거만큼 사회적 위상이 부여되지는 않는다. 독자로 남은 사람들은 주변화되고, 조롱받으며, 많은 면에서 사회적으로 영향력을 잃어가고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글로 먹고사는 삶은 경제적으로 막다른 길이다. 지난 20년 동안 신문사 고용은 75퍼센트 감소했다. 인문학 분야 교수 채용도 계속 줄어들고 있으며, 종신 재직이 보장되는 자리도 점점 줄어들고 있다. 2024년 대학 졸업생 가운데 인문학 학사 학위를 받은 학생은 겨우 8퍼센트에 불과했다. 그해 영어학과와 역사학과의 졸업생 수는 2012년에 비해 40퍼센트나 감소했다. 역사학자들은 학회와 세미나에서 조용히 속삭이며 두려움을 나눈다. 자신들이 인류의 과거를 체계적으로 연구하는 마지막 세대가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다.
수백만 명의 미국인이 읽는 시사 주간지의 인쇄된 표지를 대중적인 문학 작가가 장식하는 일은 오늘날 상상조차 하기 어렵다. 이제는 그런 대중적 작가도 없고, 그렇게 널리 읽히는 시사 주간지도 없다. 대신 많은 미국인들은 자랑스럽게 탈문해적 삶을 살고 있다. 대통령은 개조식 요약 보고를 선호한다고 말했고, 보좌관들도 대통령이 그림과 도표를 좋아한다고 했다. 세계 최고의 부자들이 X 게시물과 팟캐스트, 그리고 챗봇과의 대화에서 정보를 얻는다고 자랑스레 말한다. 부와 영향력을 꿈꾸는 젊은이들에게 그들을 본받으라고 고무하는 사회적 분위기이다.
문화적 경제적 권력은 대체로 그 시대에 가장 널리 쓰이는 커뮤니케이션 기술에 능숙한 사람들에게 흘러간다. 오늘날 그런 사람들은 스트리머, 팟캐스터, 그리고 인플루언서들이다. 조 로건(Joe Rogan)은 기자들이 꿈도 꾸기 어려운 규모의 청중을 거느리고 있다. 그는 스포티파이에서 1400만 명이 넘는 팔로워를, 유튜브에서는 2000만 명이 넘는 구독자를 보유하고 있다. 실사판 '오징어 게임' 같은 정교한 스턴트를 기획하고 연출하는 유튜버 미스터비스트(MrBeast)는 꾸준히 수억 회의 조회 수를 올린다. 아이쇼스피드(IShowSpeed)나 더번트피넛(TheBurntPeanut) 같은 게임 스트리머들 역시 미국에서 손꼽히는 미디어계 인물이다. 이들은 젊은 세대가 무엇을 꿈꾸고, 무엇을 이야기하며, 심지어 어떤 말투를 사용하는지까지 영향을 미친다.
한때 책은 지식과 기억, 지혜, 도덕성의 핵심 원천이었다. 사회심리학자 조너선 하이트(Jonathan Haidt)는 "책은 기성 세대가 써서 아랫세대에게 전하는 문화의 수직적 전승 방식이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제 정보는 수평적으로, 즉 젊은이에게서 젊은이에게로 이동한다. 이러한 역학 속에서 미스터비스트나 더번트피넛 같은 인물들이 미국 문화의 수호자가 된다. 독서의 쇠퇴는 세상을 위아래로 뒤집어 놓지 않았다. 세상을 옆으로 돌려놓았다.
젊은이들은 자신을 엘리트 계층으로 단숨에 올려줄 직업을 꿈꾼다. 지금 성인이 되는 세대는인플루언서가 되고 싶어한다는 뜻이다. 2023년 모닝컨설트의 여론조사에 따르면 Z세대 응답자의 거의 60퍼센트가 가능하기만 하다면 소셜미디어 유명인이 되고 싶다고 답했다. 미국 학교 사서협회 소속이자 오클라호마에서 사서로 일하는 아만다 코델리스키는 학생들을 위해 녹음 스튜디오를 마련했다. "팟캐스팅이야말로 지금 가장 뜨겁고 가장 인기 있는 활동입니다. 마이크를 백만 개 사다 놓아도 오디오 랩에 들어오려는 대기 명단은 줄어들지 않을 거예요. 다들 인플루언서가 되고 싶어 하거든요."
지난 9월, 시러큐스 대학교는 크리에이터 경제 센터(Center for the Creator Economy)를 출범시켰으며, 곧 인플루언서 지망생들을 위한 첫 부전공 과정을 개설할 예정이다. "이 센터는 현재와 미래 학생들의 열망에 부응"하며, "학생들이 있는 자리에서 그들을 만나, 다가올 세상을 이끌 수 있도록 준비시키는 것이 목표"라고 시러큐스 대학교 뉴하우스 공공커뮤니케이션 대학의 마크 J 로다토(Mark J Lodato) 학장은 보도자료에서 밝혔다.
그런 세상의 도래가 확정된 것은 아니다. 우리가 무엇을 잃어가고 있는지를 깨닫고 다른 길을 선택하는 사람들도 있다. 미국에서는 거의 20여 개 주가 학교 일과 동안 휴대전화 사용을 금지했다. 텍사스주가 지난 학년도 초 이 조치를 시행한 이후, 댈러스의 한 교육구에서는 도서관 대출 권수가 전년보다 20만 권 늘어나 거의 25퍼센트의 증가율을 보였다. 시카고 교외의 고등학교 영어 교사이자 미국 영어 교사 협의회(NCTE) 회원인 렉스 오바예는 발췌문 위주의 수업을 바꾸려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고 했다. 일부 교사들이 다시 완독할 책들을 교과과정에 도입하고 있다. 클리블랜드 공공도서관의 펠턴 토머스 주니어 관장은 가장 나이 어린 이용자들이 오히려 노년층과 함께 전자책보다 종이책을 더 선호하는 모습을 보인다고 전했다. 탈문해문화에 맞서는 이러한 작은 저항들이 헛되어 보일지 모르지만, 끝까지 시도하는 사람들이 잃을 것은 아무것도 없다.

나는 탈문해 시대에 성장했다. 닷컴 버블이 꺼진 직후에 태어났고, 아이폰이 처음 출시될 무렵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7학년 때 처음 휴대전화를 손에 넣자마자 인스타그램 계정을 만들었다. 인터넷에서 유행하는 거라면 어떤 것도 나는 (유감스럽지만) 대부분 안다. 독서를 토대로 했던 세상에 대한 나의 지식은 대부분 책에서 배운 것이다.
다행히 나는 독서를 사랑하는 가정에서 자랐다. 아버지는 내가 중학생이 될 때까지 거의 매일 밤 책을 읽어 주셨다. (감정 기복이 큰 사춘기 딸에게 아버지는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난감해하시곤 했다. 함께 책을 읽을 때면 아버지는 다른 사람의 말을 빌려 마음을 전하셨다.) 두 언니는 나를 북클럽에 끌어들이기를 손꼽아 기다렸다. 우리가 가장 좋아했던 책은 <박스카 칠드런(The Boxcar Children)>으로, 부모를 잃은 네 남매가 버려진 기차 화물칸에 집을 만들어가는 이야기였다. 이 책에서, 아이들이 먹을 것과 잘 곳을 겨우 마련한 직후, 두 누나들은 어린 남동생에게 글을 가르친다. 나무 조각을 깎아 알파벳을 만들고, 블랙베리즙을 잉크삼아 글을 쓴다. 내가 열 살이 되던 해, 어머니는 어린 시절 읽으셨던 <래빗 힐(Rabbit Hill)>과 <자니 트리메인(Johnny Tremain)>을 내게 물려주셨다. 어머니는 그 책들을 처음 갖게 됐을 때 표지 안쪽에 이름을 적어 두셨다. 나도 그 아래에 이름을 적었다.
고등학교 시절 나는 문득 고전을 읽어야겠다고 마음 먹었다. 선생님들은 좋아하는 책들을 끊임없이 추천해 주셨다. 나는 선생님들의 지식을 함께 나누고 싶었고, 선생님들이 인용하는 작품과 이야기들을 이해하고 싶었다. <제인 에어>를 힘겹게 완독했고, <안나 카레니나>에 푹 빠졌다. 책을 읽는 동안 나는 혼자였지만, 그렇게 느껴지지 않았다. 책들은 여러 세대의 지혜를 담고 있었다. 제임스 볼드윈(James Baldwin)은 1963년 라이프 매거진과의 인터뷰 (그가 타임 표지를 장식한 바로 다음 주에 실린 기사)에서 이렇게 말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고통과 상실이 세상 누구도 겪어 보지 못한 것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책을 읽기 시작하면 생각이 달라진다. 도스토옙스키와 디킨스는 나를 가장 깊이 괴롭히던 것들이야말로, 지금 살아 있는 모든 사람, 그리고 이 세상을 살아갔던 모든 사람과 나를 이어 주는 것임을 가르쳐 주었다." 나는 내가 끊어진 적 없는 지식과 문화의 사슬을 이루는 한 고리인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 후 몇 년 사이, 정확히 언제부터였는지는 모르겠지만, 독서 습관은 슬그머니 사라졌다. 변화는 미세하게 일어났다. 나는 더 바빠졌다. 잠들기 전 책 대신 휴대전화 화면을 넘기기 시작했다. 책은 몇 쪽 이상 집중해서 읽기가 어려워졌다. 하지만 좀 덜 읽는다고 해서 무슨 문제가 있겠는가? 누가 내 독서 진도를 확인하는 것도 아니었다. 게다가 책은 언제나 그 자리에 있을 테니까. 나중에 다시 집어 들면 되는 거였다.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이 사라졌을 때, 두루마리에 기록된 지식도 영원히 함께 사라졌다. 에라토스테네스와 유클리드가 무엇을 더 기록했을지 우리는 짐작만 할 뿐이다. 글은 먼지가 되어 흩어졌다. 오늘날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 거대한 도서관의 모든 문헌도 컴퓨터 칩 하나에 저장될 수 있다. 이제는, 거의 알려져있지 않은 전문 학술서조차 스캔되어 디지털화된다. 구글 북스와 인터넷 아카이브는 가늠할 수 없을 만큼 방대한 규모의 도서관을 이룬다. 지중해를 가로지르는 위험천만한 여정이 아니어도, 키보드 몇 번만 두드리면 그곳에 다다를 수 있다. 문헌들이 습기나 쥐 떼에 희생될 위험도 거의 없다.
그러나 여전히 남아 있는 위협이 있다. 바로 무관심이다. 우리가 잃고 있는 것은 텍스트들을 읽어낼 능력과, 읽으려는 의지이다. 경이로울 만큼 풍부한 정보와 지혜가 우리에게 물려졌다. 이 유산으로 무엇을 할 것인지는 우리의 몫이다.
로즈 호로위치는 예일대에서 역사학을 전공한 후 현재는 애틀랜틱 매거진의 스태프 라이터로 활동중이다.
미국 인문계열 지식인들의 우려, 공포감이 잘 느껴지는 장문의 에세이입니다. 미국 동부 지식인들이 즐겨 읽어오던 애틀랜틱 매거진은 7월 8일자 기사로 예일대 역사학과 출신 저널리스트인 로즈 호로위치의 에세이를 발행했는데, 필자는 미국 사람들이 글을 안 읽고 소셜미디어로 숏폼을 보거나 동영상을 본다며 걱정하면서 에세이를 시작합니다. 말과 달리 글은 시간과 장소를 뛰어넘어 커뮤니케이션 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물론 현재의 과학기술은 말도 저장과 전달을 쉽게 할 수 있습니다만, 수천 년간 인간이 쌓아온 자료들은 대부분이 글에 담겨있습니다. 그리고 시간과 장소에 따라 자꾸 변하는 말과 달리 글은 상대적으로 고정됩니다. 언어의 안정성이라는 측면에서도 글은 장점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말에만 의존하다보면 세대간의 커뮤니케이션이 단절되고 좁은 언어공동체들로 파편화됩니다. 로마나 중국같은 대제국은 말이 아니라 글로 제국의 통일을 유지해왔습니다. 라틴어나 관화(官話, 만다린) 같은 보편언어(lingua franca)는 무엇보다 '읽기'를 위한 것입니다. 이 에세이는 현재 미국 지식인들이 '읽기'가 직면해 있는 시대적 도전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를 잘 정리했습니다만, 월터 옹(Walter J. Ong)이나 마셜 매크루헌(Marshall McLuhan) 등 미국에서 인기있는 전거(典據)를 맴돈다는 인상을 줍니다. 이 에세이는 그러한 한계를 보이긴 하지만, 제한된 지면에 미국 지식인들의 생각을 깔끔하게 정리했다는 점에서는 훌륭한 글입니다. PADO 독자 여러분들도 미국 인문 지식인들의 '컨센서스'를 보시면서, 과연 우리의 '읽기'는 어떻게 될 것인지 한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