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클 샌델: 문화전쟁과 '가치중립적 국가'라는 신화

우리는 견해가 다른 사람들을 피하기보다 '가치의 충돌'에 적극 참여해야 한다

'정의란 무엇인가' 저자 마이클 샌델 미국 하버드대학 교수가 4일 서울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에서 새누리당 이재영 의원과 함께 '정의와 시장 그리고 좋은 사회'를 주제로 대담을 하고 있다. 2014.12.4/뉴스1

<정의란 무엇인가>로 유명한 미국의 정치철학자 마이클 샌델이 노에마 매거진 편집장과 '가치에 중립적인 국가'라는 것에 집착하는 미국 리버럴리즘의 문제점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어느 나라든, 정치공동체든 기본적인 가치에 대한 합의가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나라사랑, 애국을 어떻게 만들어야 할지에 대해서도 기본적인 합의가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리버럴들은 무엇이든지 이야기하고 논의할 수 있는 개인적 자유를 추구하는 경향이 강하다보니 합의된 기본적 가치가 있어야 한다는 주장 앞에서 등을 돌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공동체를 이루고 있는 많은 사람들은 질서를 원하고 공동체라는 울타리를 원합니다. 리버럴리즘이 제대로된 '기본 가치'를 제시하지 않고 비워두다보니 과격한 내셔널리즘 같은 것이 이 빈 공간에 파고듭니다. 노에마 매거진의 4월 14일자 인터뷰에서 샌델은 그 기본 가치가 무엇이어야 하는지까지는 이야기 하지 않고 있으며, 그러한 가치의 필요성을 우선 이야기해둡니다. 그리고는, 이를 위해 '가치의 충돌'을 피하지 않는 더욱 적극적인 공론의 활성화를 주장합니다. '중립적인 국가'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모든 견해는 나름의 가치가 있다'면서 열띤 논의에서 발뺌을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샌델이 보기에 가치의 충돌을 감내해가며 기본 가치를 놓고 논의를 하는 것 가체가 오히려 공동체를 건강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꼭 '합의'가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적극적인 공론 속에서 의견의 충돌도 있을 것이고 어느 정도의 합의도 있을 것이고 서로 타협할 수 없다는 점도 인식하게 될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공동체를 묶어내는 것입니다. 모든 것은 평등한 가치를 갖는다는 민주주의의 믿음은 자칫 무정부상태를 가져올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물리의 세계가 진공을 내버려두지 않듯 이런 무정부상태에는 과격하고 무뢰한 의견과 세력들이 파고듭니다. 인간은 가치와 정부 없이 살아갈 수 없다는 샌델의 이야기를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하버드대학교 정치철학 교수인 마이클 샌델은 2025년 베르그루엔 철학문화상 수상자다. 그는 최근 노에마 편집장 네이선 가델스와 만나 리버럴리즘의 운명과 가치중립적 국가의 취약성에 대해 논의했다.


네이선 가델스: 40년 전, 저희가 여기 케임브리지에서 저명한 사회학자 대니얼 벨의 식탁에 앉아 소위 '미국의 문화 남북전쟁'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았습니까? 오늘날의 맥락에서 생각해보면 놀랍지요. 당시 논의는 로널드 레이건의 부상과 함께 정치적으로나 문화적으로 리버럴 진영 주류가 권위를 잃어가는 것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그때 했던 말의 대부분은 지금도 유효하죠.


교수님은 그때 레이건이 전통적 질서의 '상징과 울림'에 호소했던 반면, 민주당은 볼링클럽이나 교회와 같은 '지역적 매개 기관'들을 '편협하고 편견에 사로잡혔다'고 얕잡아 보면서 이런 것들과의 접점을 잃어버린 복지국가 정당이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선견지명 있게 '좋은 삶이 무엇인지를 놓고 경쟁하는 관점들 사이에서 똑같이 공평한 권리의 틀을 제공하는 것으로 만족하는 중립국가가 가지는 취약성'을 지적했었죠. 교수님께서는 그것이 취약한 이유가 '관용(똘레랑스)의 문제는 그것이 해석이나 실행을 이끌 이상(理想)으로서의 힘이 없다'는 점에 있다고 했었습니다. 관용은 공동선에 대한 비전을 대체할 수 없고 공동선을 전제해야 하기 때문이라고요. 당시 교수님께서는 이 취약성을 해결하는 방법은 '정치에 도덕적이고 정신적인 의미를 불어넣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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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2026년에 MAGA(미국을 다시 위대하게)가 한 일이 바로 그것이 아닌가 하는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그들은 리버럴리즘의 가치가 아닌, 그들이 '강한 신들'이라고 부르는 가족, 신앙, 국가라는 관점에서 국가에 도덕적 실체를 부여했습니다.


마이클 샌델: 그렇습니다. MAGA는 우리 주변에서 공동체의 도덕적 구조가 해체되고 있다는 느낌에 호소하며, 주권과 소속감을 맹렬히 주장하는 일종의 초국가주의를 불러일으키는 데 매우 효과적이었습니다. 저희가 레이건 시절에 만났을 때 제가 우려했던 부분 중 하나는, 당시의 리버럴리즘이 이미 공동체, 정체성, 소속감, 애국심과 같은 언어를 우파에게 거의 넘겨주었다는 점이었죠.


로널드 레이건은 매우 효과적이었습니다. 그는 자유시장지상주의자였지만 한편으로는 정치적 수사의 다른 부분에서는 공동체와 애국심이라는 강력한 언어를 구사했죠. 저는 이것이 레이건의 친시장 자유지상주의적 측면보다도 그의 정치적 성공에서 핵심적 역할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국가 공동체 의식과 소속감, 자부심을 불러일으켰습니다. 그때 이후로, 리버럴들은 애국심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대안적 개념을 제시하는 대신, 애국심을 의심하게 되었고 이 강력한 공동체와 소속감의 언어를 우파에게 넘겨주었습니다. 그래서 편집장님께서 그때와 지금을 연결한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그게 바로 트럼프와 MAGA가 한 일이죠.


지금도 민주당원과 진보주의자들이 뒤에 성조기를 늘어놓고 연설을 하고 있긴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아요. 진보주의자들이 우리를 하나로 묶는 것, 시민이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리고 우리가 공유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설득력 있게 이야기하려면 소속감과 공동체의 언어에 내용과 실체를 부여해야 합니다.


편집장님께서 지적했듯이 실제로 무슨 일이 일어났냐면, 가치중립적 리버럴리즘은 공론장이 경쟁하는 도덕적 신념들에 대해 중립적이어야 한다고 주장함으로써 일종의 도덕적 공백을 만들어 스스로를 취약하게 만들었습니다. 그 공백은, 제가 그때 우려했던 것처럼, 조만간 두 가지 종류의 편협하고 불관용적인 도덕주의, 즉 종교적 근본주의나 초국가주의로 채워질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슬프게도, 그것이 최근 수십 년 동안 전개된 상황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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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의 수사학에서 불만의 정치로

가델스: 레이건과 MAGA 사이의 시기를 돌이켜보면 대체로 주도권을 쥐고 있던 건 리버럴들이었죠. 미국에는 부시 가문의 시대가 있었습니다만 서구 전역에서 주요 행위자는 빌 클린턴, 토니 블레어, 버락 오바마의 시장친화적 중도 좌파인 '제3의 길 민주당'과 '신노동당New Labour'이었습니다.


그들은 교수님의 책 <공정하다는 착각>에서 언급한 세계화와 사회적 초경쟁을 조장했습니다. 그들은 설파하기를, 이런 세상에서 성공하는 길은 야망 있는 개인이 정말 열심히 일하고 뛰어나서 정상에 오르는 것이라고 했죠. 그 함의는 성공하지 못한 사람들은 게으름뱅이와 패배자라는 것이었고요. 그래서 이것은 성취를 찬양하면서도 트럭을 운전하거나 단순노동을 하는 '야심이 작다'고 여겨지는 사람들을 외면한 정치인들에 대한 분노를 만들어냈습니다.


교수님께서는 공동체 없이 시장에서 홀로 싸워야 하는 개인의 투쟁과 결합된 그 분노가 MAGA의 엘리트 분노 정서의 토대를 얼마나 마련했다고 생각하시는지 궁금합니다.


샌델: 네, 그것이 매우 사실이라고 생각합니다. 레이건 시대로 조금만 더 거슬러 올라가 보죠. 로널드 레이건과 마거릿 대처는 정부가 문제이고 시장이 해결책이라고 명시적으로 주장했습니다. 대처는 유명한 말을 남겼죠. '국내적으로 그리고 세계적으로 자유시장 외에는 대안이 없다.' 레이건과 대처가 미국의 빌 클린턴, 영국의 토니 블레어, 독일의 게르하르트 슈뢰더 같은 중도 좌파 정치인들로 교체된 후에도 이 시장 신앙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들은 순수한 자유방임시장 신앙의 거친 모서리를 부드럽게 만들었지만 시장과 시장 메커니즘이 공동선을 정의하고 달성하기 위한 주요 도구라는 근본적인 전제에는 도전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안전망을 강화하며 더 인간적인 방식으로 시장 신앙을 받아들였을 뿐이죠.


그리고 불평등을 심화시킨 시장 주도, 금융 주도의 세계화 버전을 받아들였습니다. 이는 지난 50년 동안 공화당 대통령뿐만 아니라 민주당 대통령의 재임 기간에도 일어난 일입니다. 그 결과 풀뿌리에서는 심화되는 불평등에 대한 분노가 커졌죠.


미국, 영국, 유럽의 중도 좌파 정당들이 그러한 불평등에 대해 내놓은 대응이라고는 본질적으로 사람들은 긴장시키는 조언이었습니다. 즉, 글로벌 경제에서 경쟁하고 이기고 싶다면 대학에 가라. 배운 만큼 벌 수 있다. 노력하면 해낼 수 있다. 이런 정치적 수사였습니다. 저는 이를 '성공의 수사학'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이를 악화시킨 것은 '자기계발하고 학위를 따라'는 조언 속에 숨겨진 모욕이었죠. 그 모욕이란, 만약 당신이 새로운 경제에서 고군분투하고 대학 학위를 받지 못했다면 당신의 실패는 당신 탓이라는 겁니다. 우리가 조언한 대로 자기계발을 하지 않은 것 아니냐. 그래서 4년제 학위가 없는 많은 노동자들이 결국 세계화의 승자인 자격증을 갖춘 전문 엘리트들에게 무시를 받는다고 느끼게 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죠.


우리 미국 시민 대부분이 4년제 대학 학위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약 62%가 학위가 없어요. 따라서 존엄한 노동과 괜찮은 삶의 필요조건으로 4년제 학위를 설정한 경제를 만든 것은 어리석은 일이었습니다. 이것이 승자와 소위 패자 사이의 분열을 야기한 겁니다. 2016년 영국의 브렉시트 투표와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당선으로, 우리는 자격증을 갖춘 엘리트들에게 얕보인다고 느낀 사람들의 불만의 정치, 즉 포퓰리즘적 반발을 보았습니다.

회피적 관용에 대한 불신

가델스: 포퓰리즘 정치는 인정받지 못한다고 느낀 사람들에게 강하게 울려 퍼졌습니다. 가치중립적 국가 이야기로 돌아가 보죠. MAGA 운동에 참여했거나 그 감성에 공감하는 사람들은 리버럴한 국가를 가치중립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볼 때 이 '가치중립적 국가'는 동성혼과 낙태를 합법화했죠. 그리고 청소년기 이전 아동의 트랜스젠더 치료를 허용하고 모든 기관에 '깨어있는woke' 다양성, 형평성, 포용성(DEI) 의무를 부여했고요.


그러나 리버럴리즘 국가에 내용이 있다고 할때도 그것은 분명 우리가 이야기해 온 어떤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소속감과 공동체 의식을 부여하는 내용은 아니었습니다. 만약 리버럴리즘이 주로 사람들의 해방과 자아실현을 관용하는 사상이라면 과연 소속감과 공동체 의식을 부여할 할 수 있을까요?


샌델: 여기서 우리는 경쟁하는 관용의 개념들에 대해 이야기해야 합니다. 좋은 삶이나 미덕에 대한 가치중립성을 주장하는 리버럴리즘에 부합하는 형태의 관용이 있죠. 이를 '회피의 관용tolerance of avoidance'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겁니다. 어떤 삶의 방식이 가치 있고 더 높은지에 대해 판단을 내리거나 평가하려 하지 않고, 단지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에게도 유사한 자유를 허용하는 한, 그들의 길이 무엇이든 자신들의 길을 추구하도록 허용한다는 의미에서 중립을 지키려는 것이죠. 겉으로 보기에는 이것이 다원주의 사회에 대처하는 매력적인 방법처럼 보입니다.


사람들은 무엇이 좋은 삶인지에 대해 의견이 다릅니다. 성도덕 문제에 대해서도 의견이 다르죠. 미덕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도 의견이 다릅니다. 자녀를 어떻게 키울지에 대해서도 의견이 다르고요. 동료 시민들과 미덕과 좋은 삶에 대한 어지럽고 논쟁적인 토론에서 얽히기보다는, 그러한 도덕적 분쟁에 발을 들여놓지 않는 종류의 관용을 추구하는 것이 더 안전하지 않을까? 그것이 가치중립적 리버럴리즘이 갖는 도덕적 충동이자 타당성입니다.


그러한 관념은 내용상의 도덕적 의견 불일치를 피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회피의 관용은 곧 가치중립적 리버럴리즘처럼 공공의 문제가 어떤 사람들의 도덕적 신념을 다른 사람들보다 우대하는 방식으로 결정되는 것 같다는 불신을 불러일으킵니다.


예를 들어 낙태에 관한 '로 대 웨이드' 사건에 대한 연방대법원의 판례를 보죠. 판결은 생장 중인 태아의 도덕적 지위라는 매우 논쟁적인 도덕적, 신학적 문제에 대해 중립을 지킬 것이라고 발표하며 시작합니다. 그러나 법원은 국가가 낙태를 규제할 수 있는 시기와 그것이 어머니와 부모의 선택이 되어야 하는 시기에 대한 기준에 따라 특정 정책을 발표합니다. 이것이 낙태 문제로 분열된 국가에 대한 합리적인 해결책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매우 논쟁의 여지가 많은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중립이라는 미명 하에 특정 도덕적 결정 편에 서는 것처럼 보였고요.


제가 생각하기에 다원주의와 의견 불일치에 대처하는 더 나은 방법은 회피의 관용이 아니라, 이러한 도덕적 문제에 대해 공론과 논쟁에 적극 참여하는 '논쟁 참여의 다원주의pluralism of engagement'입니다. 생각해보면 우리가 동성혼 문제에 대해 했던 게 바로 그거죠. 이 나라에서 동성혼이 받아들여질 수 있게 만든 것은 회피의 관용이 아니었습니다. 동성애와 혼인의 도덕적 지위, 그리고 가족의 의미에 대한 대중의 생각이 바뀐 것이었죠.


이 문제는 좋은 삶이 무엇인가라는 영역을 직접적으로 파고듭니다. 결혼은 사적인 차원을 갖지만, 또한 공적인 제도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이 문제는 무엇이 좋은 삶이고 무엇이 도덕적으로 정당한 혼인 형태인지에 대한 논쟁과 서로를 설득하려는 시도를 공론장으로 가져오지 않고서는 결정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것이 제가 '논쟁 참여의 다원주의'라고 부르는 것의 한 예입니다.


정치적 설득뿐만 아니라, 특히 종교 공동체 내의 가족들 사이에서 사람들이 LGBTQ 커뮤니티의 구성원들을 알게 되고 그들이 친구이자 이웃이며 아들과 딸이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 이루어진 대화를 통한 설득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놀랍도록 짧은 기간 안에 내용상의 도덕적 문제에 대한 대중의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그것이 동성혼의 합법화로 이어진 것이죠.


지금도 여전히 의견 불일치는 있을 겁니다. 그리고 만장일치도 아니죠. 그러나 리버럴한 가치중립이라는 허구를 넘어 근본적인 도덕적 문제에 대한 공개적인 토론이 있었다는 인식이 있습니다.

누가 좋은 삶의 내용을 결정하는가?

가델스: 현대 철학으로서의 리버럴리즘이라는 관점에서 정치보다 조금 더 깊은 부분으로 들어가 보죠.


리버럴리즘의 근대는 '탈문화화deculturation'와 연결됩니다. 즉, 그것은 역사적 선례와 전통으로부터 물려받은 총체적인 삶의 방식 즉 기존 문화로부터 개인을 해방시키는 것에 관한 것입니다.


좋은 삶에 대한 어떤 관점은 그런 탈문화화가 훌륭하다고 합니다. 우리는 이전에는 '트랜스젠더 유동성'의 가능성을 가져본 적이 없었습니다. 이제는 있죠. 다른 사람들은 안 된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자연법과 우리의 기독교 문화 및 가족 규범이 상징하는 모든 것에 대한 죄악이라는 거죠. 이는 사회 내 두 가지 흐름으로 이어집니다. 한편으로는 낡은 전통의 사슬로부터의 해방이라는 리버럴리즘 근대성 사상과, 다른 한편으로는 그 전통의 사슬에서 파생된 규범과 가치의 문화적 연속성이라는 사상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미국에 있는 것은 '정상성 없는 규범norms without normality'입니다. 트랜스젠더 권리, LGBTQ 및 DEI 규범을 믿는 많은 사람들이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 완전히 다른 것을 믿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둘 사이에는 일종의 문화적 교착 상태가 있죠. 문화가 이토록 정치화된 것은 좋은 삶이 무엇인지에 대한 공통된 합의가 없기 때문입니다. 어떤 규범이 정상적인 것으로 되어야 하는지를 누가 결정하느냐?


먼저 교수님께서는 우리가 처한 상황에 대한 그러한 규정에 동의하시는지요? 방금 '논쟁 참여의 다원주의'에 대해 말씀하신 것을 고려하면 그런 토론을 할 방법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이런 교착 상태가 생기죠.


둘째, 이러한 종류의 공동 숙의, 즉 회피하지 않는 공개 대화가 이루어질 수 있는 플랫폼을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오늘날 서로 단절된 '버블' 속에 사는 세계에서 특히 그렇죠.


샌델: 플랫폼에 대해서는 잠시 후에 이야기합시다. 그러나 물려받은 전통, 소속감, 공동체, 정체성과 무관한 자유의 개념으로서의 리버럴리즘 근대성 문제에 대해, 저는 그것이 리버럴리즘의 강력한 요소라고 생각합니다. 그 요소는 자유를 우리가 속한 공동체와 자아로부터 분리되거나 초월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저의 첫 번째 책 <정의의 한계>로 돌아가면, 저는 이러한 자아상에 반대하는 주장을 해왔습니다. 전 그것을 '무연고적' 자아, 즉 선택에 앞선 도덕적 구속으로부터 독립적인 자아라고 부릅니다.


저는 무연고적 자아가 매력적인 자유의 모습을 제공하지만 실제로는 자유가 아니라 일종의 무력화로 이어진다고 주장해왔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유가 무엇으로 구성되어 있는지 깊이 생각해야 해요. 저는 제 책 <민주주의의 불만>에서 자유는 단순히 이전의 도덕적 유대에 얽매이지 않고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이 아니라고 주장했습니다. 자유롭다는 것은 집단적 운명을 형성하는 데 의미 있는 발언권을 갖는 것입니다. 자치에 목소리를 내는 것이고, 참여자가 되는 것, 시민이 되는 것입니다.


제 견해는 이전의 도덕적 유대에 얽매이지 않고 내 자신의 의지로 시작하여, 나의 욕구, 선호, 관심, 욕망에 가장 잘 맞는 것을 선택하는 소비주의적 자유 개념과 다릅니다. 저는 그것이 공유, 자치, 그리고 자치 참여와 연결된 자유의 부분을 놓치고 있기 때문에 빈곤한 자유 개념으로 봅니다.


그래서 나는 두 번째, 더 까다로운 자유의 개념을 '소비주의적' 개념에 반대하여 '시민적civic' 개념이라고 부릅니다. 지금 이 이야기는 모두 철학의 차원에 있는 것이죠.


가델스: 제가 바로 그 말을 하려던 참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빈곤한 개념은 우리의 문화적 기풍을 지배하는 소비자 사회에 의해 주도되기 때문입니다.


샌델: 네, 그래서 저항하기 어렵죠. 우리가 소비하기를 좋아하고 소비자 사회에 살고 있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물론 그것도 이유이긴 하지만요.


나의 자유가 내가 원하는 것을 스스로 선택하는 데 있다는 생각에 매력적이고 유혹적인 무언가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를 시민 프로젝트와 공동의 목적과 목표에 대해 동료 시민들과 숙의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시민의 힘'으로부터 단절시킵니다. 그 단절이 단지 정치적인 것만이 아니라는 것은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최근 수십 년 동안 시장이 우리의 집단적 삶과 선택을 점점 더 지배함에 따라, 정치적 의사 결정은 점점 더 전문관료에게 이양되었습니다.


시민의 목소리는 점점 줄어들고 있죠. 그러나 이것은 우리가 이전에 공동체에 대해 논의했던 부분과도 연결됩니다. 왜냐하면 나의 자유가 동료 시민들과 함께 공동의 목적과 목표에 대해 함께 추론하는 것에 달려 있다면, 우리는 인격 형성, 소속감, 공동체에 주의를 기울여야 하니까요. 그것이 바로 공공 숙의의 가능성을 제공하기 때문이죠.


가델스: 기본적으로 교수님 말씀은, 누가 좋은 삶이 무엇인지를 결정하고 우리가 어떻게 결정하는가가 오늘날의 핵심 정치적 이슈라는 건가요?


샌델: 네, 그 질문에 대한 제 대답은 우리가 시민으로서 그것에 대해 함께 논의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공동선에 대한 토론과 무관하게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저는 그 둘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고 봅니다.

공공 숙의를 위한 포럼 재구상하기

샌델: 그렇다면 그 플랫폼은 무엇일까요? 뭐, 요즘은 거의 없다고 봐야죠. 활력을 잃고 속이 비어버린 상태입니다. 공론장을 살펴보면, 그것은 아무에게도 영감을 주지 않는 좁은 관리적 전문관료적 담화이거나, 열정이 개입될 때는 당파적 고함치기, 이념적 푸드파이팅, 소셜미디어, 토크 라디오, 팟캐스트 등의 분노하고 격분에 찬 내용으로 구성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공공 숙의를 위한 새로운 플랫폼을 만들어야 합니다. 우리는 유해한 것들, 특히 소셜미디어를 통제해야 합니다. 소셜미디어는 비즈니스 모델상 우리를 가능한 한 오랫동안 화면에 붙잡아 두어 개인정보를 수집하고 타겟 광고를 통해 물건을 팔기를 원하죠. 우리 모두 알다시피, 그 비즈니스 모델은 분노와 분노를 유발하는 뉴스 피드의 꾸준한 흐름으로 이어집니다.


이는 공론장을 거칠게 만들고 부패시킵니다. 그래서 한 가지 질문은 그것을 어떻게 통제할 것인가이죠. 저는 16세 미만 청소년의 소셜미디어 사용을 금지한 호주의 조치를 좋아합니다. 저라면 그 제한선을 74세, 75세, 어쩌면 80세까지 연장하고 싶을 거 같군요. 그러나 그 외에도 할 수 있는 일들이 있습니다. 소셜미디어의 비즈니스 모델을 겨냥하는 거죠. 타겟팅된 디지털 온라인 광고를 금지하고 소셜미디어 회사들이 예를 들어 '구독'과 같이 당신을 붙잡고 항상 화나게 하는 데 의존하지 않는 다른 방식으로 사업 자금을 조달하도록 요구하는 것처럼요. 우리는 소셜미디어의 비즈니스 모델을 바꾸는 방법에 대해 토론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시민 담론의 가능성을 부패시키기 때문입니다.


그 다음 우리는 분노와 좌절을 배제하지 않으면서도 분노를 억지로 부추기지 않는, 설득력 있고 접근 가능한 공공 숙의를 위한 포럼을 창의적으로 재구상해야 합니다. 저는 이를 위해 진정한 공공 숙의를 위한 플랫폼을 제공할 수 있는 비영리 미디어 회사들과, 또한 예를 들어 공동선에 대한 숙의에 더 적합한 방식으로 공론장을 재건하는 공공 장소를 제공하기 위한 다양한 시민 포럼 및 시민 의회를 탐색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가델스: 공화국이 헌법적으로 설계된 방식은 한 곳에 너무 많은 권력이 집중되는 것을 막기 위해 견제와 균형을 두는 겁니다. 이 소셜미디어 시대에 우리는 정반대의 문제를 안고 있죠. '버블'과 소셜미디어 '1촌'들을 통한 사적인 소통은 공론의 장을 만들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무력화시킵니다.


따라서 너무 많은 권력에 대한 견제와 균형이 필요한 것처럼, 공론장의 무력화를 막기 위한 견제와 균형이 필요합니다. 교수님께서이 언급하신 시민 의회와 같은 것들도 일례가 될 수 있는데, 시민들이 선거의 장 밖에서, 말하자면 선의의 섬에서 모여 정책의 실제 시행에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치는 비감정적인 방식으로 문제를 숙의하는 것이죠. 유럽과 미국의 지역 및 지방 자치 단체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입니다.


샌델: 소셜미디어가 권력을 집중시키기보다는 공공 커뮤니케이션과 담론을 원자화하고, 급진적으로 사유화하고 개별화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편집장님의 말씀 한 가지를 짚고 넘어가고 싶습니다. 저는 그게 사실이라고 생각합니다.


원자화되고, 사유화되고, 개별화되었죠. 그러나 담론과 커뮤니케이션이 사유화되고, 원자화되고, 개별화되는 동안 빅테크 소셜미디어 회사들은 집중된 권력을 축적하고 행사하기 때문에 우리는 양쪽의 최악을 모두 갖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공화정이 항상 우려해 온 종류의 집중된 권력과 원자화된 공공 커뮤니케이션 방식을 모두 가지고 있죠.


가델스: 공화국에 위협이 되는 두 가지 측면을 모두 다루어야 합니다.


샌델: 공론장의 가능한 대안에 관해서, 저는 시민 의회 실험의 장점이 정당성을 많이 잃은 대의 정부의 교착 상태를 깰 수 있는 방법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미국의 경우, 이는 선거 제도뿐만 아니라 정치에서 돈의 힘과도 많은 관련이 있죠. 따라서 선거 과정 밖의 원외 시민 의회의 매력 중 일부는 특정 문제에 대해 함께 추론하고 논쟁하는 시민들이 무엇을 생각해 낼 수 있는지 확인하고, 그런 다음 아마도 선출된 공직자에게 책임을 묻고, 그들이 동의하지 않는 이유나 당면한 문제에 주의를 기울이지 못한 이유를 설명하도록 촉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실험은 더 나아갈 수 있습니다. 저는 이 실험들 중 일부에 존재하는 한 가지 요소를 추가하고 싶은데 그것은 추첨에 따라 모일 시민들을 선택하는 것, 고대 민주주의 메커니즘인 '추첨제'입니다. 한 가지 장점은 미국 하원이나 다른 나라의 의회에 반영된 능력주의적 편견을 깨뜨린다는 것이죠.


미국인의 62%가 4년제 학위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수치로 돌아가보면, 그들 중 몇 명이나 하원이나 상원에 있을까요? 거의 없죠. 상원에는 1명, 하원에는 약 5%가 4년제 학위가 없습니다. 그리고 상원의원 대부분은 석박사 학위나 전문 학위를 가지고 있습니다. 매우 높은 비율이 로스쿨 학위를 가지고 있고요. 만약 사실상 대표되지 않는 시민의 큰 부분이 있는 동일한 불균형이 있고, 만약 그것이 다른 인구 통계학적 근거에 근거한다면, 우리는 그것에 대해 우려할 겁니다. 우리는 그것을 비민주적이고 개혁이 필요하다고 간주할 겁니다.


따라서 추첨제 요소는 본질적으로 노동자들을 대의 정부에서 배제하는 능력주의적 편견에 대처하는 방법이 될 겁니다. 추첨으로 참가자를 뽑는 시민 의회로 시작해볼 수 있겠죠.


그러나 여기에 상상할 수 있는 급진적인 확장이 있습니다. 만약 이것이 이러한 지역적 사례와 실험에서 잘 작동한다면, 주나 국가 차원에서 양원제 입법부를 고려하는 건 어떨까요? 한 의회는 선출되고 다른 의회는 추첨으로 선택되는 겁니다. 예를 들어 상원과 민중의회people's house가 있고, 민중의회는 추첨으로 선출되며 문제에 익숙해질 만큼 충분히 긴 임기와 함께 교체가 있는 거죠. 그것은 대의 정부에 대한 능력주의적 편견과 함께 돈과 권력이 가진 지배력을 깨뜨리는 방법이 될 수 있습니다.


가델스: 사실상, 선거 민주주의나 대의 민주주의를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교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바로 그 이유들 때문에 일종의 견제와 균형으로 보완하는 것이로군요.


미국의 헌법 설계 역사로 돌아가 보면, 1776년 존 애덤스는 노스캐롤라이나를 위한 헌법을 구상했는데 여기서 한 의회는 가능한 한 완벽하게 일반 대중을 모방하는 역할을 하고, 다른 의회는 더 경험이 많고 숙의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두 의회가 서로를 견제할 것이고요.


샌델: 추첨으로 선출된 기구, 그러니까 민중의회가 자격 있는 상원보다 숙의를 잘 못할 것이라고 할 수 없을지도 모르죠. 오늘날 미국 의회나 유럽 의회의 숙의의 질을 보면, 올바른 상황에서 추첨으로 선출된 시민들의 기구가 훨씬 더 효과적인 방식으로 숙의할 수 있다는 것을 상상하기 어렵지 않습니다.


가델스: 소집된 시민 의회, 예를 들어 헌법의 낙태 금지 조항 완화를 권고한 아일랜드의 유명한 사례는 구조화된 숙의가 있었기 때문에 성공적이었습니다. 정보와 지식을 가져오는 것이 숙의이므로, 지식이 풍부한 민주주의를 갖게 되죠. 단지 사람들이 말하는 것, 단지 의견만 내놓는 것이 아닙니다.


샌델: 존 애덤스는 그저 오합지졸이 모여 순전히 사리사욕을 위해 행동하고 전체 공동체의 안녕을 위하지 않을 것을 걱정했을지도 모릅니다. 글쎄, 부패한 대의 정부로 우리가 지금 어떻게 됐는지 보세요. 이것보다는 더 잘할 수 있습니다.

경청이라는 민주적 기술

가델스: 40년 전 저희 대화가 끝날 무렵, 사회학자 대니얼 벨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타협할 수 없는 도덕적, 문화적 문제를 정치화한다면 어떤 사회도 존재할 수 없다."


교수님께서는 논쟁적인 문제에 대한 공공의 숙의가 필요하다는 견해를 취해오셨죠. 어떤 면에서는 위대한 다원주의 사상가 이사야 벌린의 후계자인 영국의 철학자 존 그레이는 그것이 효과가 없을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좋은 삶이 무엇인가에 대한 일치된 개념은 하나도 없다는 거죠.


좋은 삶에 대한 많은 개념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유럽 중세 시대와 같은 복수 관할권이죠. 어떤 것은 여기서 괜찮고, 어떤 것은 저기서 괜찮지 않은 겁니다. 왜 모든 사람이 어디에서나 같은 규범을 따르도록 만드나? 그런 견해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샌델: 복수 관할권이라는 생각과 보충성의 원칙이라는 생각은 미국 연방주의 이면에 있는 열망과 주state가 민주주의의 실험실이 되어 중요한 정책 문제에 대해 다른 해답을 내놓을 수 있다는 생각을 떠올리게 하는군요. 저는 복수 관할권이라는 생각에 매우 공감합니다. 비록 일부 문제는 국가적 차원에서, 심지어 그 이상에서 토론되고 결정되어야 하지만요.


(프랑스의 정치 사상가, 정치가, 역사가) 알렉시스 드 토크빌의 생각은 시민들이 손이 닿는 작고 가까운 공간에서 통치(공동체 경영)의 기술을 배운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공간이 확장됨에 따라 시민들은 다원주의에 대처할 뿐만 아니라 시민적 미덕과 시민적 품성을 함양하기 위해 더 큰 영역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하는 일종의 정치 교육이 필요합니다.


더 나아가 지역, 도시, 마을, 주 등 다양한 공간적 장소뿐만 아니라, 이상적으로는 계급, 계층을 넘어 사람들을 모아 손이 닿는 작은 공간에서 생각하고 논의할 수 있는 노동조합이나 교회 모임과 같은 시민 사회 내의 다른 모임들을 갖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는 그러한 탈중앙적, 분권적 단위들을 활성화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도덕적, 문화적 의견 불일치가 협상 불가능하다는 우리의 오랜 친구 댄(대니얼) 벨의 생각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저희가 처음 이야기했던 리버럴리즘적 가치중립에 대한 충동을 부채질하는 것이 바로 그 생각이죠. 그것은 시민들이 공론의 장에 들어올 때 도덕적, 정신적 신념을 밖에 놔두고 들어와야 한다는 생각을 부추깁니다. 그래야 덜 논쟁적이고, 덜 다투고, 덜 어지러운 종류의 공적 생활을 만들 것이기 때문이죠. 하지만, 이는 덜 관용적인 공적 생활을 만들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 충동은 이해할 만하며 댄 벨은 그것을 아주 잘 표현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것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공공의 숙의가 어떤 논쟁적인 도덕적 문제에 대해 한 목소리의 합의로 이어질 것이기 때문에 잘못되었다는 게 아닙니다. 우리가 시도해보기 전까지, 대화와 숙의에 들어가 설득을 시도하고 때로는 차례로 설득당하는 자신을 발견하기 전까지는 어떤 도덕적 문제가 협상 불가능한지 미리 알 수 없기 때문에 잘못된 겁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 우리의 민주적 삶에 드리워진 그림자와 위험에 대처할 유일한 방법은 우리가 익숙해진 종류보다 더 참여적이고 활발한 종류의 공론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경청의 기술을 회복해야 하며, 경청이란 단지 정치적 반대자가 하는 말을 듣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정치적 불일치 뒤에 놓인 도덕적 신념을 듣는 것을 의미합니다.


경청은 민주적인 기술입니다. 시민적 미덕이고요. 그리고 우리는 어떤 순간에 그것들을 해결할 것이라는 보장이 없더라도, 서로의 말을 듣고, 우리의 차이를 넘어 함께 추론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들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을 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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