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성의 외로움 위기'가 착각인 까닭

보다 고립되고 외로운 사람들은 분명 존재하지만 그게 전부 남성은 아니다

/그래픽=Tolga Akdoğan

슬레이트 매거진의 8월 13일자 에세이는 '미국 남성의 외로움'이라는 화두가 외로움의 본질을 호도하는 잘못된 화두임을 지적합니다. 우리도 남자들은 사교성이 부족하고 평소 친구들도 별로 없는 것처럼 이야기합니다. 반면 여성들은 타인들과 쉽게 소통하고 늘 전화를 할 친구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실제 통계를 보면 외로움, 고립은 성별보다는 오히려 소득과 더 관련되어 있습니다. 즉, 소득이 높은 사람들은 사교활동이 활발하고 낮은 사람들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단적인 예로, 사교활동에는 비용이 듭니다. 친구와 커피 한 잔을 하더라도 커피 값이 필요합니다. 좀 더 길게 만나려면 식사비용이 듭니다. 이성과 데이트를 하려면 상상한 비용이 듭니다. 이것이 여의치 않은 저소득층은 사교를 '선제적으로' 피합니다. 미국 사회는 경제적 양극화가 심해지고 있습니다. 이와 함께 '사교'의 양극화도 심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사교의 양극화는 비단 미국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한국도 마찬가지입니다. '사교에는 돈이 필요하다'는 것은 어디서나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외로움과 빈곤의 상관관계를 지적한 이 에세이는 남성들의 젠더적 특성이나 개인적 성격으로 구조적 문제를 환원하는 문제를 지적합니다. 사회적 동물인 인간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외로움, 고립감입니다. 눈이 멀고 귀가 머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은 그것이 주는 고립감이 두려워서입니다.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 역시 '절대적 외로움' 때문입니다. 우리 사회에서 고립되어 외로워하는 사람들을 챙겨야 할 이유입니다. 외로움은 개인을 파괴하고 결국 사회를 파괴합니다.

남자들이 외롭다는 이야기, 한 번쯤 들어봤을 것이다. LA타임스의 칼럼니스트 진 게레로Jean Guerrero의 글은 최근 홍수처럼 쏟아져 나오고 있는 "남성 외로움 대유행"에 관한 여러 논평 중 하나이다. 논평에서 게레로는 이렇게 단언하고 있다. "외롭다고 인정하는 남자는 거의 없겠지만, 사실 대부분의 남자가 외로움을 겪고 있다." 게레로는 "가상 세계", 그리고 가상 세계 속 "포르노그래피와 이데올로기적인 자극제"가 외로움 대유행의 원인 중 하나라고 주장한다.


우리의 달력에서 사교 일정을 찾아보기 어려워진 이유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대해, 이러한 담론은 남성이나 남성성을 비판하는 답을 내놓는다. 가디언의 한 칼럼니스트는 이런 이론을 제시하고 있다. "남성들은 힘, 독립성, 극기를 우선시하도록 사회화되는 경우가 많다. 이런 사회화는 마음을 터놓고 정서적 유대감을 형성하기 어렵게 만든다." 그의 주장에 동의하는 애틀랜틱의 다른 필자는 이렇게 쓴다. "우정을 유지하는 것은 원래도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남성이 마음을 열고 자신의 취약함을 드러내는 상황에서 종종 마주하게 되는 사회적 낙인은 이를 한층 더 어렵게 만들 수 있다." 한 '펑크 록 심리학자'는 바이스The Vice와의 인터뷰에서 남성들의 정서적 지능이 낮다고 말하기도 했다.


미국의 온라인 매체 버즈피드BuzzFeed는 2026년 동안 남성의 외로움을 다룬 글을 12편이나 쏟아냈다(적어도 지금까지 나온 글을 세어 보자면 그렇다). 그중에는 상당히 인정사정없는 글도 있는데, 이런 글이 한 예시가 될 것이다. '''남성 외로움 대유행'은 자업자득이라는 사실을 단박에 행동으로 보여주는 27명의 루저남"


남성들이 친구를 사귀는 것은 고사하고 서로 대화조차 나눌 줄 모른다는 이야기는 SNL 코미디 소재로 안성맞춤이다. 한 스케치 코미디 영상은 지친 여성들이 남성 파트너를 "남자 공원"에 데려가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리고 그 "남자 공원"이란 남성들이 스포츠와 마블 영화 이야기를 하며 투덜대는 곳이다. 4월에 나온 다른 영상은 아내들이 여자들만의 시간을 보내는 동안 한데 틀어박혀 시간을 보내는 남편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데, 이 남성들은 도무지 단답형 대화에서 벗어날 줄 모른다. 트럼프 진영의 술꾼들을 풍자한 오프닝 콩트마저 "남성 외로움 대유행"을 언급할 정도이다. '데일리 쇼'도 최근 몇 달 동안 두 차례에 걸쳐 남성의 외로움을 다룬 코너를 방영했다. 그중 한 편은 레슬리 존스가 이렇게 불평하는 것으로 끝나고 있다. "이건 다 남자들이 상담받으러 안 가서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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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예시는 수도 없이 많다. 대중적 상상력 속에 구현된 외로운 남자(물론 대부분 남자가 그렇다고 한다)의 이미지는 감정을 억누르고, 끔찍할 정도로 서툰 데다, 연애 관계가 아니더라도 친밀한 관계를 맺을 수 있다는 생각에 질겁하는(그리고 어쩌면 연애 관계에서마저도 친밀감을 거부하는) 그런 남자다. 이들은 대체로 다른 사람들에게 짐이 되는 존재이며 위험한 영향에 쉽게 휘둘리는 존재라고들 한다.


이런 남자들이 존재한다는 것이 사실일까?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남성이 여성보다 특별히 더 외로운 것은 아니다. 퓨리서치센터와 하버드 교육대학원이 최근 실시한 대규모 자기보고식 조사에서는 외로움에서 유의미한 성별 격차가 나타나지 않았다. 카이저가족재단(KFF)가 수행한 한 조사에서는 항상 또는 자주 외롭다고 답한 여성(18%)이 남성(13%)보다 많았다. 2021년 미국인의 인식 조사American Perspectives Survey에서는 남성의 15%와 여성의 10%가 가까운 친구가 한 명도 없다고 답했지만, 퓨리서치센터가 최근 같은 질문을 포함해 조사를 했을 때는 유의미한 성별 차이가 발견되지 않았다. 가장 최근에 수행된 미국인의 시간 사용 조사American Time Use Survey에 의하면 남성은 하루 평균 약 5시간 30분을 혼자 보냈고, 여성은 약 5시간 20분을 혼자 보냈다. 친구 및 가족과 함께 보내는 시간에서도 성별 차이는 미미했다.


외로움은 미국 사회 전반에 우려스러운 수준으로 침투해 있다. 이와 같은 연구들은 오늘날 미국인들이 지난 수십 년에 비해 가까운 친구를 더 적게 두고, 더 긴 시간을 혼자 보낸다는 사실도 보여준다. 미국인의 인식 조사에 따르면, 가까운 친구가 단 한 명도 없다고 답한 사람의 비율은 1990년 3%에서 현재 12%로 늘었다. 반면 가까운 친구가 10명 이상이라고 답한 사람의 비율은 33%에서 13%로 줄었다. 성인이 하루 중 혼자 보내는 시간이 2003년에는 약 5시간이었다면, 2024년에는 7시간으로 늘었다.


이 모든 연구에서 다른 사람들보다 압도적으로 더 외로운 것으로 드러난 집단이 하나 있다.미국에서 사회적 관계를 제대로 누리지 못하는 이들은, 다른 많은 것에서도 자신의 몫을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바로 가난한 사람들이다. 생필품을 살 여유조차 없는 사람들은 고립감 문제로 어려움을 겪게 될 가능성이 더 높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미국의 외로움은 개인이 심리사회적 자기관리를 제대로 하지 못해서 발생하는 문제라기보다는(이는 젠더를 탓하는 논리의 근본 전제이기도 하다), 사회가 초래하는 문제에 더 가깝다. 남성 외로움 대유행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여러 연구를 자세히 조사하고, 전문가들과 저소득층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면서 내가 알게 된 사실이 있다면, 외로움의 굴레는 분명히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누구나 운이 나쁘면 이 굴레에 갇히게 될 가능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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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 초반까지만 해도, 댄에게는 고등학교와 직업 훈련 프로그램에서 사귄 친구들이 있었다. 댄과 친구들은 함께 식당에 가고, 영화를 보고, 쇼핑몰에서 어울려 다니며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 코로나19가 닥쳤다. 성씨는 쓰지 말고 이름만 밝혀 달라고 요청한 댄은 보스턴 지역에서 어머니와 함께 살고 있었다. 두 사람은 방역 수칙을 철저히 지켰다. 댄은 지방 전문대에서 수업을 듣는 것도 그만두었다. 댄의 원래 계획은 전문대에서 학점을 이수한 뒤 4년제 대학으로 편입하는 것이었다. "1년 반 동안 사실상 방에 갇혀서 아무것도 안 했어요." 댄의 말이다.


댄의 친구들은 다른 지역으로 이사 가거나 연락이 뜸해졌다. 6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의 사회적 삶은 아직 회복되지 않았다.


현재 27세인 댄과 어머니는 시간당 21달러를 주는 댄의 풀타임 재택 간병인 일자리와 어머니의 사회보장 연금으로 생활하고 있다. 댄은 온라인 수업을 들으며 경영학 학사 학위를 취득하기 위해 공부하고 있다. 댄의 말에 의하면 요즘 그는 이렇게 지낸다고 한다. "사람들과 어울리지 않아요. 그런 걸 하는 사람이 아니라서요."


그는 자신이 취미가 없어 외로움을 겪는다고 생각한다. 새로운 친구들을 사귀려는 사람들은 흔히 비슷한 관심사를 가진 사람들이 있는 모임에 참여해 보라는 조언을 듣는다. 하지만 댄은 그런 모임에 나갈 여유가 없다. 만약 가처분소득이 좀 더 있다면, 댄스 수업이나 헬스장에 나가 사람을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댄은 말한다. "그리고 어쩌면 요트 타는 법을 배울 수도 있겠죠."


사회경제적 지표는 일관되게 외로움을 예측하는 지표로 나타난다. KFF의 연구에 따르면, 연 소득이 4만 달러 이하인 가구의 성인 구성원은 자주 외로움을 경험한다고 보고할 가능성이 9만 달러 이상을 버는 가구의 성인 구성원보다 약 3배 높았다. 하버드 조사에서는 연 소득이 3만 달러 이하인 사람들의 29%가 외로움을 보고했는데, 연 소득이 5만 달러 이상인 사람에서는 그 비율이 19%였다. 미국인의 인식 조사에서는 대학 학위가 없는 미국 성인의 5명 중 1명이 가까운 친구가 한 명도 없다고 답했는데, 이는 학사 이상의 학위를 소지한 사람들의 약 두 배에 해당하는 비율이었다. 미국인의 시간 사용 조사에 의하면 연 소득이 2만 5천 달러 이하인 사람들은 하루 평균 약 6시간 30분을 혼자 보냈다. 이는 연소득이 2만 5천 달러에서 5만 달러 사이인 사람들보다 약 90분, 10만 달러 이상인 사람들보다 3시간이나 더 긴 시간이다. 가장 소득이 낮은 집단은 2010년 이후 혼자 보내는 시간이 증가한 폭도 가장 컸다. 2010년 당시 이들은 하루에 약 4시간을 혼자 보내고 있었다.


이러한 추세는 미국 바깥에서도 관찰된다. 유럽 20개국을 대상으로 한 옥스퍼드대학의 연구에서는 저소득층의 49%가 외로움을 느낀다고 답했는데, 고소득층에서는 그 비율이 15%에 그쳤다.


어쩌면 댄은 대학에서 친구를 사귈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팬데믹이 닥치며 대면으로 이루어지던 대학 교육은 끝이 났고, 댄은 결국 학교로 돌아가지 않았다. 댄의 또래들은 직장에서 친구를 사귀기도 하지만, 댄이 종사하는 업무에서 그런 것을 기대하기는 힘들다. 고령화에 힘입어 성장하는 재택 간병 및 개인 돌봄 서비스 분야는 대학 학위가 없어도 취업이 가능한 분야이다. 미국 노동통계국에 의하면, 2024년에 미국에서 간병인으로 일한 사람은 400만 명으로, 2023년보다 17% 증가했다. 이들의 평균 시급은 16.78달러인데, 이는 패스트푸드 노동자보다 조금 더 높은 수준이다. "어느 면에서 봐도 장래성이 없는 일자리이긴 해요." 댄의 말이다.


그 이유 중 하나는 배울 점이 있는 동료나 잘 보여야 할 상사가 없다는 것이다. 대부분 경우에 댄이 소속된 에이전시는 매번 댄을 똑같은 가구 몇 군데에 파견해 혼자 일하게 한다.


댄이 겪는 이러한 곤경은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기도 하다. 저임금 노동 분야는 변했다. 이제 많은 노동자가 같은 일을 하는 다른 사람들과 거의 아무런 관계도 맺지 못한 채로 일하고 있다.


지난 수십 년 동안만 하더라도, 저임금 일자리의 환경이 이렇지는 않았다. 옥스퍼드대학에서 사회적 상호작용과 공중 보건을 연구하는 연구자 아란 데이비스Arran Davis는 이렇게 말한다. "70년대의 노동계급 노동자는 일터에서 매일 같은 사람을 만났을 겁니다. 퇴근 후에는 여러 노동자 사교클럽 중 한 군데에 들리거나 늘 들리는 술집에 방문했을지도 모르죠. 꽤 넓은 사회적 관계망도 갖고 있었을 겁니다." 3대 자동차 제조사처럼 규모가 크고 대중에게 잘 알려진 기업의 일원이라는 자부심과 소속감을 느낄 수도 있었으리라고 데이비스는 덧붙였다.


경비나 청소 같은 저임금 직종들은 점점 더 외주화되는 추세로, 외주화는 이러한 직종에 종사하는 사람들을 자신이 출근하는 일터의 외부인으로 만들어 버린다. 건물 입구를 지키고 밤에 카펫을 청소하는 사람들은 대개 회사에 직접 고용된 직원이 아니며, 회사의 연휴 파티에 초대되지도 않는다. 우버나 도어대시 같은 긱 노동 앱들은 노동자들을 한층 더 소외되게 만들어, 알고리즘이 파견 담당자이자 상사 역할을 하는 환경에서 동료도 없이 일하게 만든다.


일정한 근무지가 있는 저임금 업종에 종사하는 경우도 마찬가지다. 숙박 및 접객업, 요식업, 소매업 같은 업계는 이직률이 높아 동료들 사이에 유대감이 형성되기 어렵다.


현대의 노동 패러다임에 관해 데이비스는 이렇게 말한다. "그건 노동자들을 원자화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설계된 것처럼 보입니다." 데이비스에 의하면 어떤 비밀 결사체가 의도적으로 이런 설계를 만들어낸 것은 아니라고 한다. 그러나 이는 부유한 사람들에게 유리하게 짜여 있는 현대 경제의 또 다른 측면이라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노동자들의 연대를 약화할 수 있는 무언가를 용케도 발견해 낸 셈이죠." 데이비스의 말이다. 미국 노동인구 가운데 노동조합에 가입한 사람의 비율은 1983년 이래 절반이나 감소해, 20%였던 것이 현재 10%가 되었다. 노동조합 가입률의 감소는 노동자들의 경제적 전망을 더욱 어둡게 만들 뿐만 아니라, 직장에서 느낄 수 있는 동료애의 원천 중 하나를 없애 버림으로써 사회적 관계망까지 약화할 수 있다.


가난한 노동자들은 직장에서 더 적은 친구를 사귀는데, 이에 더해 이들의 직업적 삶 자체가 사회생활을 할 시간을 빼앗는 경향이 있다. 이들은 생활비를 감당하기 위해 더 많은 시간을 일하거나, 주말이나 밤에도 일해야 할 수도 있다. 전국 저소득주택연합National Low Income Housing Coalition의 데이터에 따르면, 2025년에 최저임금을 받는 노동자가 2개의 침실이 딸린 평균적인 임대주택의 월세를 감당하려면 116시간을 일해야 했고, 침실이 1개 있는 평균적인 임대주택의 월세를 낼 수 있으려면 97시간을 일해야 했다. 이 데이터에는 더 높은 최저임금이 적용되는 지역과 주의 데이터도 반영되어 있었다.

"겨우 입에 풀칠하기 위해 주 6일에서 7일씩 일해야 한다면,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고 그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시간이 줄어들 수밖에 없습니다." 미국 소년 및 남성 연구소American Institute for Boys and Men의 연구자 아이작 블레드소Isaac Bledsoe의 말이다.


노동계급 일자리에서 관찰되는 사회적 유대감의 상실은 화이트칼라 직종의 관행과는 대조적이다. 의사, 변호사, 소프트웨어 개발자, 엔지니어, 교사, 회계사, 재무 관리자, 마케팅 전문가, 기자 같은 직업을 가진 이들은 서로를 동료로 여기고, 현재 직장 안팎에서 직업적 인맥을 쌓도록 사회화되어 있다. 회식에 참석하고 여러 네트워킹 기회를 활용하는 것이 업무의 일환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이러한 활동은 친구를 사귀는 계기가 되기도 하고, 사교 활동을 용이하게 만들어 주기도 한다.


게다가 이들 "전문직 계층"의 상당수는 대학에서 암묵적인 사회화 교육을 받았다. "대학에는 동아리와 학생지원처를 비롯해 학생들의 사회적 삶을 물심양면으로 지원하는 거대한 생태계가 있습니다." 사회적 연결을 연구하는 버지니아대학 연구원 샘 프레슬러Sam Pressler의 설명이다.


미국생활조사센터Survey Center on American Life가 수행한 설문 조사에서는 4년제 대학 졸업자의 60%가 학교에서 적어도 한 명 이상의 가까운 친구를 사귀었다고 답했다. 반면 대학에 진학하지 않은 사람 중 학교에서 가까운 친구를 만났다고 답한 이들의 비율은 35%에 불과했다.


프레슬러는 대학을 "인간관계 슈퍼차저"라고 부른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대학에서 우리는 대학에서뿐만 아니라 이후에도 지속될 인간관계를 쌓게 됩니다. 사제 관계를 맺기도 하죠. 여기저기 참여하는 습관도 만들어 나오게 됩니다."


대학 시절에 형성된 습관들은 댄이 그러했듯이 학교를 졸업한 뒤 "우정의 절벽" 밑으로 굴러떨어져 버리는 일을 막아줄 수도 있다. 그러나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에게는 단순히 친구가 있다고 해서 사회적 고립이 해소되는 것은 아닐 수 있다.


32살의 사라 페레즈는 로스앤젤레스의 한 가정용 발향 제품 회사에서 생산직 보조 사원으로 일하고 있다. 댄과 달리, 사라는 직장 동료와 잘 어울리며 지내고 있다. 얼마 전에는 사라의 직장 동료 중 한 명이 르네상스 축제에 가자며 사라와 다른 직장 동료 몇 명을 생일 나들이에 초대하기도 했다.


사라는 이렇게 말했다. "절 위해 입장권이며 코스튬이며 모든 걸 다 사줬는데, 도저히 갈 수가 없는 거예요. 돈이 없었거든요. 친구들과 다 같이 차려입고 놀 수가 없었어요. 정말 속상했어요."


입장권은 65달러였는데, 거대한 칠면조 다리나 뿔 모양 잔에 담긴 에일 맥주 같은 추가 구매 상품은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페레즈는 시간당 22달러를 벌지만, 소득 대부분은 각종 지출로 빠르게 빠져나간다. 그중에는 사라가 갚으려고 애쓰는 신용카드 빚도 있다. 사라는 셰어하우스 월세로 한 달에 1000달러를 내고 있고, 자기 방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낸다. 사라는 일기 쓰기와 소설 쓰기를 좋아하고, 돈이 드는 장소에는 가급적 방문하지 않는 습관을 들였다.


"많이 아쉽죠. 새로운 사람을 만날 때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일 중 하나가 함께 어떤 경험을 하면서 유대감을 쌓는 일이잖아요." 사라의 말이다. "그렇게 친구를 사귀는 거잖아요. 그래야 서로 잘 맞는지 아닌지도 알 수 있고요."


지갑 사정이 빠듯하지 않은 사람들은 사람들과 어울리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쉽게 잊곤 한다. 친구들은 함께 영화를 보거나 콘서트장에 간다. 술을 마시거나 브런치를 먹으며 밀린 이야기를 나눈다. 수업을 듣거나 공예나 코스프레 같은 새로운 취미에 돈을 투자하다 보면 마음이 맞는 사람들을 만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활동들은 공짜가 아니다.


한때 미국의 도시와 마을에는 돈을 많이 들이지 않고도 참여할 수 있는 다양한 사회적 교류의 공간들이 있었다. 사람들은 이런 공간에 주로 시간과 노력을 투자했다. 정치학자 로버트 D 퍼트넘은 미국에서 공동체 참여가 쇠퇴하는 현상을 다룬 2000년의 기념비적 저작 '나 홀로 볼링Bowling Alone'에서 바로 이러한 시민단체들이 사라지는 것을 개탄했다.


20세기 중반의 시민들은 다양한 인구 집단을 위한 단체에 가입할 수 있었다. 여성 클럽, 재향군인회, 문화 보존이나 정치 운동을 위한 민족성 기반의 단체, 콜럼버스 기사단이나 브나이 브리스 인터내셔널 같은 종교 부속 단체가 그 예시이다. 지역 주민들은 지역의 적십자 지부나 보이스카우트 지부에서 자원봉사를 할 수도 있었고, 이글스나 엘크스처럼 특별한 목적 없는 의례와 친목을 즐길 수 있는 친목 단체에 가입할 수도 있었다.


오늘날 미국의 대부분 지역에서 이러한 단체들은 과거보다 회원 수가 줄었고 활동도 뜸해졌다(그것도 지역에 그 단체가 존재할 때의 이야기이다). 어떤 단체들은 이제 완전히 구닥다리가 된 것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하지만 이러한 사회 기반 시설을 대체할 수 있는 것은 전혀 등장하지 않았다. 미국에서 일어난 일에 관해 블레드소는 이렇게 말한다. "시민단체는 위축되고, 제3의 공간은 줄어들었습니다." 블레드소는 무료로 이용할 수 있는 또 다른 공동체 공간인 교회에 나가는 일도 줄어들었다고 지적한다.


반면 우정은 여가와 오락을 중심으로 형성되는 경우가 많고, 이를 위해서는 여윳돈이 필요하다. 많은 이들에게 그런 돈은 부족하다. 실제로 한 설문조사에서 성인 3분의1 이상은 400달러의 긴급 지출을 현금이나 저축 등으로 감당할 수 없다고 답했다.


그 결과 우리가 겪게 된 것은 지루함과 외로움에 국한되지 않는다. 경험할 기회를 놓치다 보면 재미없거나 어딘가 부족한 사람이 되었다고 느끼기 쉽고, 이는 사회적 삶에서 또 다른 장애물로 작용한다.


사라는 데이트를 할 때 인생 경험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면 자신이 어딘가 부족한 사람이라는 느낌을 받곤 한다고 말한다. "데이트 상대는 이렇게 이야기하죠. '아, 그래. 나는 중국에 2주 다녀왔고, 2주는 유럽에 다녀왔어.' 그러면서 이런저런 것들을 했다고 하는데, 저는 이런 생각을 하는 거죠. '나는 5년 넘게 휴가 한 번 못 갔는데.' 저는 그럴 수가 없어요. 전 아무 데도 안 가요. 저는 교양 있는 사람이 아니에요. 너무 뒤처져 있다는 느낌이 들어요. 게다가 저는 점점 나이를 먹고 있고요. 정말 우울한 일이에요."


직장 동료들이 탕비실에서 이야기할 만한 전형적 주제인 TV 프로그램 이야기를 나눌 때조차 사라는 소외감을 느낀다. 동료들이 보는 스트리밍 서비스는 사라의 형편으로는 감당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마이크 D는 원예 웹사이트에서 편집자로 일하다가 해고되었다. 그런 뒤에는 마이크가 부업으로 글쓰기와 편집 강의를 하던 교육 플랫폼이 문을 닫았다.


본디 컴퓨터공학을 전공했던 마이크는 서브스택 페이지 피티 사이보그Pithy Cyborg를 열고 주간 연재를 시작했다. 그의 뉴스레터는 AI 뉴스들을 요약해 주고, AI에 관한 철학적인 단상도 다룬다. 마이크 D는 독자들이 알고 있는 이름으로 자신을 소개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에게는 이제 "몇천 명 정도" 되는 구독자가 있고, 그중 2% 정도가 유료 구독을 선택했다. 그리고 유료 구독은 마이크의 유일한 수입원이다. (컴퓨터공학 전문가임에도 해당 분야에 취업하지 못한 사람들이 증가하고 있는데, 마이크는 그중 한 명이다. 뉴욕 연방준비은행에 따르면, 한때 폭발적인 성장세를 보였던 이 분야에서 갓 졸업한 이들의 불완전고용률은 16%에 달한다.)


마이크는 자신이 사는 보스턴 지역의 CEO, 컴퓨터 엔지니어, 기업 창업자, 명문 대학의 연구자들에게 연락한다고 한다. 이들 중 몇 명은 마이크에게 커피 한 잔 하면서 AI에 관해 이야기하자고 제안하기도 한다. 그런데 마이크는 이렇게 말한다. "전 말 그대로 커피 한 잔 살 돈도 없어요. 창피한 일이죠." 아이러니하게도, 뉴스레터를 통해 더 많은 사람과 연결될수록 그는 더 깊은 외로움을 느낀다.


여전히 마이크를 초대해 주는 사람들도 있다. 마이크의 지인 중 몇 명은 마이크 몫의 비용을 자신이 내주겠다며 암묵적인, 혹은 직접적인 제안을 건네기도 했다. 그들 중에는 마이크가 새롭게 알게 된 사람도 있고, 원래 알고 지내던 사람도 있다. 그럼에도 마이크는 이런 제안을 거절한다. "꼭 먹이를 받아먹는 유기 동물이 된 기분이에요." 마이크의 말이다. "동정의 대상이 되느니 사라져 버리고 싶어요."

마이크는 산책을 나가고, AI에 관한 백서를 읽고, 독자층과 소통하며 지낸다. 몇몇 구독자들과는 정기적으로 일대일로 소통하기도 한다. "이런 관계들이 제게는 의미 있는 관계가 되었어요." 마이크의 말이다.


하지만 그에게 대부분의 사교 활동은 몹시 피곤한 일이다. 마이크는 주말에 무엇을 했는지, 혹은 동네에 새로 생긴 식당을 가봤는지 질문받는 상황을 싫어한다.


"가벼운 잡담 하나하나가 지뢰밭을 걷는 느낌을 줘요. 나도 모르게 가난이 고개를 내밀어서 창피한 순간을 겪을 수 있는 거죠." 마이크의 말이다. "그래서 아예 모든 대화를 선제적으로 피해버리는 거죠. 이제는 외출에 드는 비용이라는 대가보다 가난한 티가 나서 느끼게 될 굴욕감이라는 대가가 더 크게 느껴져요."


별로 놀랍지 않은 일이겠지만, 미국에서 소득과 자존감 사이에는 매우 깊은 상관관계가 있다. 이는 가난한 미국인들이 고립되는 또 다른 원인이 된다. 형편이 말이 아닌 상황에서는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고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주저하게 된다. 이러한 태도는 방어적인 사고방식으로 굳어질 수 있고, 이러한 사고방식은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있게 되었을 때도 지속될 수 있다.


초반부에 언급된 옥스퍼드의 연구자 아란 데이비스는 20개국에서 약 2만5000명을 대상으로 실시된 설문 자료를 검토하는 연구를 이끌기도 했다. 이 연구에 의하면 외로운 사람들은 통증, 피로, 우울한 기분을 호소할 가능성이 더 높았다. 데이비스는 이 세 가지 증상을 "방어적 증상 군집"이라고 부르는데, 이 증상들은 늘 경계 태세를 유지하는 것과 관련된다. 똑같이 외로운 사람이라 하더라도, 외로움과 가난 모두에 시달리는 사람들은 경제적으로 좀 더 여유가 있는 외로운 사람들에 비해 통증, 피로, 우울감에 시달릴 가능성이 높았다. 가난한 사람들은 경제적 여유가 있는 사람들과 똑같은 시간을 타인과 함께 보낼 때조차 외로움을 느낄 가능성이 더욱 높았다.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조차도) 사회생활에서 뭔가 부족하다고 느끼는 부분이 있는 거죠." 데이비스의 말이다.


그 이유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데이비스에 따르면 가난한 사람들은 자기보고 검사에서 "사회적 자본"을 더 적게 보고하는 경향이 있다. 이는 자신이 사회적 관계망 속에서 가치 있는 사람이라고 느끼는 정도가 낮다는 뜻이다. 또한 가난한 사람들은 다른 가난한 사람들에 대해서도 낮은 기대를 품게 된다. "가난하면 관계에 마찰이 생긴다"라는 것이 그 이유다. 빈자들은 소액의 돈을 빌려야 하거나 급히 머물 곳이 필요한 상황처럼 부자들은 겪을 일이 없는 문제나, 육아나 교통 문제처럼 부자들이 돈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다른 사람에게 의지해야 한다. 이런 일들을 겪다 보면 우정에 금이 가고,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일에도 회의적인 태도를 보이게 될 수 있다.


가난으로 스트레스받다 보면 다른 사람과 진실한 관계를 맺고 관계에 투자하는 데 필요한 에너지가 고갈되어 버린다. 데이비스는 이렇게 말한다. "사교는 운동과 같아서, 약간은 품을 들여야 합니다. 너무 피곤하고 기분이 안 좋은 상황에서는 운동도 하고 싶지 않고, 사교적인 사람이 되기도 어려울 수 있죠." 그리고 루틴에서 한 번 벗어나면 운동하는 것은 더욱 어려워질 수밖에 없다.


돈의 유무는 사람들이 연애를 시작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느끼는 정도에도 영향을 미친다. 25~35세 미국 싱글들을 대상으로 실시된 2025년의 연구에서는 소득 수준이 높을수록 연애를 시작하고 싶은 욕구와 스스로 평가한 연애 준비도가 높았고, 6개월 뒤에 실제로 연애하고 있을 가능성도 더 높았다. 그리고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소득 수준이 낮은 사람들은 연애를 시작할 준비가 덜 되어 있다고 느꼈고, 싱글로 남을 가능성도 더 높았다. 이러한 경향성은 남성과 여성 모두에게 나타났다. 경제적인 여유가 있는 사람들이 느끼는 자신감에는 근거가 있다. 여러 조사 결과가 잠재적인 연애 상대를 평가할 때 경제적 안정이 매력적인 특성으로 여겨진다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경제적 빈곤에 시달리는 상황에서 데이트할 때의 문제점은 명백하다. 데이트는 카드 긁기로 끝나는 또 하나의 부담스러운 사회적 상황이라는 것이다.


해고된 이후 마이크 D는 데이트를 포기해 버렸다. "진지하게,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데이트를 하겠어요?" 마이크는 이렇게 물었다. "'안녕하세요, 출근할 때 타는 대중교통 타고 가서 적당한 식당에 가면 어떠세요? 거기서 저는 어떻게 돈을 나눠 낼지에 대한 걱정으로 벌벌 떨 거고, 혹시라도 비싼 걸 주문하시면 엉엉 울어버릴 것 같아요.' 이런 건 너무 창피하잖아요. 그냥 포기할래요."


설령 누군가를 만나게 되더라도, 적지 않은 사람이 경제적 안정성이 뒷받침되어야 결혼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한 연구에 의하면,18~22세의 응답자 중 91%가 경제적 안정성이 결혼의 필수 조건이라고 답했다고 한다. 결혼생활을 시작하는 데 드는 비용을 고려하면 합리적인 생각이다. 결혼식에 드는 평균 비용은 1990년에는 1만 3000달러였지만, 2005년에는 2만 달러로 증가했고, 2025년에는 3만 6000달러가 되었다. 결혼의 다음 단계로 여겨지곤 하는 내 집 마련과 자녀 양육에 드는 비용도 계속해서 증가하는 추세다.


브루킹스 연구소에 따르면 1980년 이래로 소득 상위 25%에 해당하는 33~44세 성인의 결혼율은 큰 변함이 없이 유지되었다. 그러나 나머지 모든 계층의 결혼율은 감소했고, 특히 소득이 가장 낮은 계층에서는 결혼율이 60%에서 38%로 떨어졌다. 아마 이 모든 비용 상승의 결과일 것이다.


다시금 소득은 사회적 장벽이 되어, 평생 함께하겠다는 약속을 중심으로 형성된 제도에 대한 진입 장벽으로 기능하는 것이다.


빈곤은 대부분의 미국인이 피할 수 없는 것, 자신이 자초한 것, 극단적인 상황만 아니라면 별문제가 되지 않는 것으로 여기는 만성적인 문제다. 경기 침체와 불황이 닥치면 빈곤 문제가 더 많은 헤드라인을 장식하기는 하지만, 빈곤에 빠진 이들의 곤경이 사회적 위기로 여겨지는 경우는 거의 없다.


하지만 남성성의 위기만큼은 미국에 언제나 존재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20세기 말에 벌어진 탈산업화와 임금 정체 현상은 전통적으로 생계를 책임지는 역할을 맡아 온 성별인 남성들을 실의에 빠뜨렸다. 수전 팔루디의 1999년 저서 '스티프트: 배신당한 남자들Stiffed: The Betrayal of the American Man'은 이들의 두려움을 잘 요약하고 있다. 팔루디는 이렇게 쓰고 있다. "남자다움을 획득하기 위한 기존의 공식들이 순식간에 모두 사라져 버렸다. 네가 우주의 주인이 되어 모든 것을 지배할 것이라고 들으며 자랐던 그 소년은 자신이 무엇도 지배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전에도 심리학자들과 사회 비평가들은 남성들이 페미니즘의 제2물결을 어떻게 견디고 있는지 걱정하곤 했다. 저널리스트 마이런 브렌턴Myron Brenton은 1966년 저서 '미국의 남성들: 남성성 위기를 꿰뚫는 시선The American Male: A Penetrating Look at the Masculinity Crisis'에 이렇게 쓴 바 있다. "여성의 의존이 더 이상 남성성을 보장하지 않게 되었다."


우리는 제2차 세계대전의 전장에서 기업의 위계질서와 교외의 잔디밭이라는, 시시하기 그지없는 세계에 내던져진 남성들을 걱정하곤 했다. '남성에게 무슨 문제가 있는가?What's Wrong With Men?'라는 제목을 단 한 NBC 특집 프로그램은, 예고편에 의하면 "직업 경쟁과 사회적 지위 문제, 남편이자 부모로서 부족한 사람이라는 비판에 시달리는 오늘날 남성이 처한 딜레마"를 다룬다고 한다. 이 프로그램이 방영된 날짜는 1961년 10월 19일이다.


또 그보다 앞선 시기에는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징집 대상자의 50%가 군 입대 신체검사 기준을 충족하지 못했던 일, 도시와 실내 중심 환경으로의 대규모 인구 이동, 개척지 확장의 종식 같은 사건들이 남성에 대한 우려를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사회가 변화하고 기존의 위계질서가 동요할 때마다, 우리는 그 위계질서의 꼭대기에 자리한 남성이 어떤 사람일지 불안해한다. 이는 정말로 그것이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해서일 수도 있고, 병적인 호기심 때문일 수도 있고, 백래시를 두려워해서일 수도 있다.


때로는 우리 남성들을 걱정해 주는 것이 좋은 일이 될 수도 있다. 세상이 변화함에 따라, 소년과 남성들은 실제로 확인되는 여러 측면에서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 최근의 현상인 남성의 교육적 성취 하락이 그 한 예시이다. 하지만 남성성의 위기란 항상 그 자리에서 약한 온도로 부글부글 끓고 있었던, 역사 이래 항상 존재해 온 도덕적 공황으로, 그 형체는 불분명하기 그지없다. 그리고 데이터로 보건대, "남성 외로움 대유행"이란 그 최신 버전에 지나지 않는 것 같다. "남성 외로움 대유행"을 뒷받침하는 통계적 근거가 빈약하다는 사실은 차치하더라도, 이 담론은 크게 두 가지 측면에서 해롭다는 것이 나의 의견이다.


첫째로, 미국에서 외로운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는 것은 정말이지 사실이다. 외로움이 남성에게 미치는 영향에 집착하는 전문가는 으레 외로운 여성도 우려스러울 만큼 많다는 사실을 무시하곤 한다. 여성의 고립과 고통이 다뤄지는 경우는 드물다.


둘째로, 외로움을 성별화하는 담론은 고립의 근본적인 원인이 개인의 성격에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성별 정체성은 성격의 일부이기도 하다.


그러나 나는 외로움과 빈곤이 어떻게 맞물려 있는지를 살펴보면서, 사회구조가 단절과 연결에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는지, 그리고 사회구조의 역할이 얼마나 자주 간과되는지를 깨닫게 되었다. 대부분의 사람은 다른 사람과 반복적으로 만나야만 하는 이유나 쉽게 반복적인 만남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있어야 친구를 만들고 우정을 유지할 수 있다. 초등학교에서 대학원에 이르기까지, 상당수의 친구 관계가 학교에서 형성되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그러나 미국의 성인들에게 이러한 연결의 계기들은 점점 더 줄어들고 있다. 외로움은 가난한 사람들만의 문제가 아니지만, 다른 사회적 문제들과 마찬가지로 돈이 있으면 극복하기가 더 쉽다.


안타깝게도, 외로운 남성들은 "남성 외로움 대유행" 담론이 내놓는 비난조의 메시지를 내면화한 것처럼 보인다. 이는 상황을 한층 악화할 뿐이다.


앞서 등장한 버지니아대학교 연구자 샘 프레슬러는 "전화할 사람이 아무도 없다Nobody to Call"라는 프로젝트를 이끌었다. 이 프로젝트에서 프레슬러와 그의 공동 연구자들은 대학 학위가 없는 남성 30명을 인터뷰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사회적 관계망을 뒷받침해 줄 구조가 없는 상태에서 많은 남성들이 관계망이 "위축되고 흩어지는" 것을 경험했다는 것이 프레슬러의 설명이다.


다수의 연구 참가자가 자신에게 책임이 있다고 느꼈다. "이 남성들은 자신의 인간관계를 처음부터 다시 쌓아 올리는 것이 온전히 자신의 책임이라고 느끼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건 너무 어려운 일입니다. 이런 생각은 너무 잔인하게 느껴졌고, 저희가 보기에는 아무런 책임이 없는 사람들에게 그 책임을 묻는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프레슬러의 말이다.


이어서 그는 이렇게 덧붙였다. "그들을 공동체로 다시 불러들이는 것은 가족, 친구, 이웃의 책임이어야 합니다. 물론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가라는 큰 문제가 있지만, 개인과 개인적 개선에 초점을 맞추는 것보다는 공동체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더 적절한 대응이라고 생각합니다."


미국의 빈곤층이 겪는 역경에 관해 성찰하는 것은 언제나 어렵고, 복잡하고, 슬픈 일이었으며, 이런 논의는 정치적 분열을 한층 심화하는 경향이 있다. 빈곤층에 관한 논의는 소득 불평등을 상기하게 하는데, 소득 불평등은 많은 사람들이 부당하다고 여기지만 여전히 지속되고 심화하는 문제이다. "빈곤층의 외로움 위기"라는 주제는 자극적인 논평 거리나 그보다 더 저급한 코미디 소재가 되기에 안성맞춤이다. 그러나 문제를 이런 관점에서 바라보면, 사회에서 말 그대로 배제된 사람들, 즉 외로운 사람들에 대해 우리가 져야 하는 집단적 책임을 인식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건 그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다. 빈곤층의 외로움을 들여다본다는 것은 우리 사회의 구조를 들여다보는 것과 같다. 우리 사회의 구조를 살펴보고, 우리의 손이 닿는 곳에서부터 그 구조를 다시 설계해 나간다면, 우리는 모두가 더 많이 연결된 세상에서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닉 케플러는 피츠버그에서 활동하는 프리랜서 기자로 슬레이트, 멘즈헬스, 바이스, 워싱턴포스트 등에 기고한 바 있다.


옮긴이 이승연은 사회학 연구자이자 번역가로, 청년의 삶, 소비주의, 포스트페미니즘, 건강주의 문화에 대해 연구하고 있으며 최근 청년 세대가 외로움을 호소하는 동시에 자발적으로 단절을 선택하는 현상을 탐구한 '손절사회'를 썼다. 정신의학과 신자유주의의 관계를 다룬 제임스 데이비스의 '정신병을 팝니다'를 번역하였다.